한국적 선교신학의 탐구(R&D): 두 선교신학의 합치성 모색
신경규 교수 (고신대 선교학)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를 포함하여 세계교회의 신학에는 여러 종류의 선교 신학적 흐름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선교 신학적 흐름은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선교 신학적 흐름은 보다 큰 신학 사조에서는 구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신학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역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관점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두 선교신학의 연합 내지 합치점의 추구하고 합일점을 모색하는 것은 신학 전반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일치를 추구하고 공통분모를 찾아낸다는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상황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출현과 그로 인한 좌우이념대결, 한국전쟁, 남북분열과 이산가족 등의 현실과 맞물려 있어서 그 분열의 정도가 심화되고 어떤 면에서는 왜곡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약화되고 공산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사회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강조점이 변화하면서 신학과 선교신학의 강조점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더구나 선교신학에 있어서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로잔대회(1974, 1989, 2010)가 열리고 그 이후에 후속되는 모임이 진행되면서 사회참여 등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내세우던 문제의식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도 반영됨으로써 두 신학적 흐름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합일점을 모색하기가 용이한 여건이 형성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학 내적 합치성의 조성은 신학 외적 여건의 일치가 무르익어가는 상황에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점에 중차대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 동안 한국교회 선교신학 내에서 불일치를 이루어 온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내 중요 이슈들의 공통분모를 모색함으로써 신학의 합치성과 그를 통한 한국적 선교신학의 탐색해 보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II. 한국교회 분열과 연합에 있어서 신학의 문제
1. 한국교회 분열에 있어서 신학의 문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옥중성도들의 배타성으로 인해 재건파와 복구파의 분열, 신사참배의 회개문제로 생긴 고려파의 분열, 신학적 차이와 대립으로 발생한 한신파(기독교장로회)의 분열, 그 후 WCC문제와 행정과 교권문제가 얽혀 일어난 합동과 통합의 분열, 그리고 신학교 내부문제와 교권문제로 인한 합동측 내부의 이합집산적 분열 등으로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특히 한신파의 분열과 합동-통합의 분열은 WCC 신학과 그 용공성과 연결된 신학적인 문제가 교단분열의 주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신학적 입장 차이는 한국교회 분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의 분열이었던 통합-합동의 분열은 WCC문제가 주된 원인 중 하나였는데 여기에는 WCC의 성격이 용공적이라는 것과 WCC의 세계적 노선이 한국 보수주의 신앙에 맞지 않다는 신학적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의 신학적 논쟁 및 교파분열과 연관된 것으로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방식의 연합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보수적인 교단을 중심으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설립과 활동을 통해 보수진영 내부에서 연합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한국교회의 주요행사 및 각종 대형 연합집회에 범 교단적으로 강사와 교인들이 참여하거나, 고신-통합의 강단교류 등 신학적으로 입장에 차이가 많은 교단들의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구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독립, 민주화 등으로 인해 이데올로기가 퇴색함으로써 WCC신학의 용공성 논쟁이 수그러든 상황이어서 연합의 기운은 더욱 활발해 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견해와 상호이해차로 인하여 상대방의 신학을 용인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이해의 장벽과 고정관념의 산이 존재하고 있어서 신학적 대립의 완전한 해소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 동안 전개된 신학의 합치점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의 신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좀 더 폭 넓은 교류와 협력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2. 선교신학의 두 조류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을 그 전제로 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신앙의 경험과 몇 가지 교리의 고수를 강조한다. 그 교리란 일반적으로 축자영감과 성경의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과 육체적 재림 등을 포함한다.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은 다음 여덟 가지가 그러한 교리라고 설명한다.
ㆍ성경의 절대 영감과 권위
ㆍ모든 사람은 육체적 몸 안에 불멸의 영혼을 가진다는 영혼의 교리와 45 2010 제10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
ㆍ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교리
ㆍ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
ㆍ유일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론
ㆍ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교회
ㆍ"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는 말씀에 따른 세계복음화와 마지막 때에 관한 교리
ㆍ구원에 관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하는 것을 교회의 기복사명으로 한다는 교리
ㆍ신자에게 거룩한 삶을 살게 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교리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복음전도, 혹은 세계복음화를 교회의 최고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현재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확장된 것은 전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복음전도란 개종자를 얻는다는 뜻 보다는 결과에 상관없이 단순히 복음선포함을 의미하였다. 물론 복음주의 교회성장학이 등장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복음전도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선교로, 교회의 최고사명으로 생각한다.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신학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재해석되면서 '우리 시대의 혁명적 운동에 있어서 … 심판과 개선을 위한 일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WCC가 이런 개념을 그 선교신학의 기본이념으로 삼게 됨으로 결국 그들의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국제간, 그리고 인종간의 관계를 개선시키며, 불의에 항거하는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 이로부터 몇 가지 주제가 발전된다.
ㆍ하나님께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일하고 계신다.
ㆍ하나님의 선교목적은 사회적 조화라는 의미에서 샬롬(평화)의 수립이다.
ㆍ이 샬롬은 유색인종의 해방, 산업사회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의 인간화에 대한 관심, 농어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도, 사업과 직업윤리 추구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조류의 선교신학은 그 강조점의 차이로 인해 적어도 한국에서는 신학적 합의점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로잔대회(1974, 1989, 2010)와 그 이후 이어진 세부회의로 인하여 복음주의 내부에서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외부적으로 공산주의와 독재체제가 퇴조하는 등의 세계적인 변화의 추세는 각 신학의 경향을 변화시키는 추세이고 양자의 신학적 합일점의 모색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합치점을 모색하되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진영의 신학적 범위의 넓이로 인해 복음적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적 견해에 한정시켜 논의하고자 한다.
3. 한국적 선교신학 모색을 위한 전제
한국적 신학이나 선교신학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건과 전제는 그 신학이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자립교회설립을 위한 전통적인 삼자(three-self)원칙 이외에 제 4의 자(the fourth self)인 자신학(self-theology)을 제시하였고 최근에는 자선교학(self-missiology)을 강조하고 있다. 선교학은 독자적인 학문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신학적 성격으로 인해 신학과 긴밀한 관계성 속에 있는 선교학의 분야이다. 따라서 자선교학은 그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자신학과 긴밀한 연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히버트는 기존의 자신학이 지역신학(local theology)적 성향이 강하여 그 보편성을 잃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보편성을 지닌 자신학의 요건으로 초문화적 신학(trans-cultural thaology)적 성향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적 선교신학의 정립을 위해서는 그 선교신학이 (1) 성경적이어야 하고, (2) 초문화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두 요건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서 한국적 신학의 범주에 포함 시킬 수 있는 영역은 아래와 같다.
(1) 새로운 이론의 창안 - 서구의 선교신학에서 고안해 내지 못한 성격적 선교신학을 새롭게 발안, 체계화 하여 이론으로 정립시키는 것은 매우 귀중한 한국적 선교신학이 되면서 동시에 선교신학에 큰 공헌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2) 기존이론의 개정, 확장 - 기존 (서구중심의) 선교신학이 잘 못된 내용이나 방향성을 지녔을 경우 이를 성경적 선교신학으로 바로 잡는 작업은 한국적 선교신학의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3) 정리 및 종합(혹은 통합) - 서구의 선교신학에서 산만하게 전개된 선교신학을 범주화 하거나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 역시 한국적 선교신학의 수립과 정립에 귀중한 기여가 될 것이다. 특히 서구 기존의 선교신학에서 대립적으로 전개된 논의의 서로 다른 면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을 경우 그 내용이나 이론들을 종합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한국적 선교신학이 될 뿐만 아니라 선교학에 귀중한 공헌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중에서 (3) 종합의 영역에서 서구 선교신학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한국적 선교신학의 한 부분의 정립에 기여하고자 시도하고자 한다.
III. 선교신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1. 보완적 논제와 배타적 논제: AND냐 OR이냐
한 주제에 관한 두 가지 이상의 견해가 존재하고 그 주제에 관한 해답을 모색할 때 그 견해 들 모두가 수용가능한지(AND) 아니면 그 중 하나만 수용해야 하는지(OR)의 문제를 마주치게 된다. 전자를 보완적 논제라고 하고 후자를 배타적 논제라고 한다. 어떤 복수의 논제가 상호 배타적인지 보완적인지는 (1) 그 주제의 성격이나, (2) 각 견해의 내용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i) 인간이시다. (ii) 하나님이시다. (iii)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시다 라는 세 개의 명제 중에서 세 명제가 다 틀린 명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성경적인 해답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제시하는 명제가 명확히 제시되어 있으므로 충분히 선택 가능하다. 이것은 AND(그리고)를 요청하는 논제, 즉 보완적 논제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참 인간이 가능한가라는 논제에서는 (i) 반인반신이시다, (ii)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시다 는 대답에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하는 사안이다. 이것은 OR(혹은)를 요청하는 논제, 즉 배타적 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는 종말론에 있어서 (i) '영혼불멸'이냐 (ii) '죽은 자의 부활'이냐에 관한 논쟁이다.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이 플라톤적 이데아(idea)개념이나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기독교 신학의 역사 가운데 첨가된 개념으로 보고 '영혼불멸'은 비성경적 개념이고 '죽은 자의 부활'이 성경적 개념으로 간주하여 한 견해만을 취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오른편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간청하는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셨다.
육체가 죽은 이후 영혼이 함께 죽었으면 어찌 그 시간에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비록 플라톤과 그 이후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강조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영혼불멸'이 비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영혼불멸도 맞고 죽은 자의 부활도 맞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 두 논제는 배타적 논제가 아니라 보완적 논제이다.
선교학적 이슈에 있어서도 이러한 논제가 많이 있다. 이를테면 선교의 주체와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인가 교회의 선교인가, 하나님의 선교라면 어떤 성격을 지닌 하나님의 선교인가의 문제, 선교의 내용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세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관한 구속사적 선교신학과 약속사적 선교신학, 선교의 목표에 있어서 영혼구원과 샬롬 등의 논제가 그러한 것들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각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2. 선교의 주체와 본질: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용 용례
기독교 신학과 선교학계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며 또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신학적 편향성에 따라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것 중 하나가 missio Dei 개념과 그에게서 해석된 신학이다. 신학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고,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에 속한 그룹에서도 이 용어를 그들 나름대로의 확장, 변질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오늘날 한국 신학계에서 missio Dei 개념은 자유주의 선교신학의 대변하는 것으로 '고유명사화' 되었다.
이동주는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두 신학을 명확하게 양분하여 두 진영에서 사용하고 있는 missio Dei 개념과 신학의 상이점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은 이 missio Dei의 개념을 선교적 의미로 처음 사용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용어를 IMC 빌링겐대회에 관한 독일어 보고서 중 "신학적 각성"(Theologisch Besinnung)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대회 2년 전 후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의 신학(1950)과 결부되어 그 의미가 변질되었고 그 변질된 의미의 신학이 오늘날까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류신학이 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 대회 이전까지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과 선교단체, 그리고 선교사들은 구속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선교의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믿고 또 그러한 사역에 일에 종사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개념이 제창되고, 후켄다이크의 주장들이 발표되면서 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Missio Dei라는 개념이 탐바람대회(1938)의 '교회의 선교'로부터 IMC 빌링겐대회 (1952)의 '하나님의 선교'로 변화함으로써 IMC와 WCC의 에큐메니칼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함축적 개념이 되었다. 빌링겐 대회에서는 후켄다이크, 프라이탁(Walter Freitag), 워렌(M.A.C. Warren)의 영향으로 '교회의 선교'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게 된다. 빌링겐대회는 교회의 선교적 과제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절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 용어가 사회복음화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메킨토쉬(John McIntosh)는 말하고 있다.
첫째는 빌링겐대회의 '교회의 선교적 사명'(A Statement on the Missionary Calling of the Church)이라는 문건으로서, 거기서는 일반적인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문건은 교회의 선교적 의무를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간청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결론부분에서 "전쟁과 격변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인간지식의 증대, 정치사회적 운동의 시대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한 점은 옳게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문건이'이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능력의 일반은총의 실행'과 '구원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화해케 하시는 특별-구속적 은총의 실행'을 구분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신학적 오류였고, 그러한 의미에서 missio Dei의 본질적인 의미 49 2010 제10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 파악에는 실패한 대회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화란의 신학자 후켄다이크(Hoekendijk)의 출현과 그의 신학적 경향이 반영되면서부터 missio Dei의 개념에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후켄다이크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영역이 전 세계 인류의 문제, 인간의 조건을 포함한 것이고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종래의 선교관을 교회중심의 선교관이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의 도구이며 이 세상에 평화(shalom)을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후켄다이크의 사상(1950)을 많이 반영한 빌링겐대회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게 하게 되는데,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그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셨으므로 교회도 또한 그렇게 해야 하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모습을 식별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켄다이크가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shalom)로 본 것은 그 선교의 목표가 지구의 세속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IMC와 WCC의 선교개념으로 이 후켄다이크의 missio Dei를 채택한 것은 그 이후 WCC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선교에 관한 사고유형이 "하나님-교회-세계" 임에 반하여, 이러한 문건들에 나타난 사고형태는 "하나님-세계-교회" 라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도식은 교회가 세계복음화나 교회개척이 아니라 직접 정치, 경제적인 인간의 유익을 위해 활동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파송하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나타낸다. '샬롬'이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의 목표이므로 세계가 행위 내용을 설정하고, 교회는 현존하는 이단적 구조(heretical structures)를 버리고 하나님의 행위에 합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선교는 missio Dei에 순종하는 임시적인 형태이므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켄다이크(Hoekendijk)의 missio Dei 개념은 많은 학자들과 대회를 거치면서 점점 그 개념이 확대 변모되어 간다. 그 이후 '육대륙의 선교'(Mexico City, 1963), '교회와 사회에 관한 세계대회'(Geneva, 1966), 그리고 전도에 관한 특별연구보고서인 '타자를 위한 교회'(1967) 등 계속되는 WCC문서에도 이러한 사상은 계속 등장한다. 이러한 개념변질은 웁살라 대회1968)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이 대회에서는 비기독교세계에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할 정도로 편향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웁살라 대회(1968)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사회복음 중심의 신학이 샌안토니오대회(1989) 이후 복음전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신학적인 조정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missio Dei 개념의 해석에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missio Dei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면서 교회와 선교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모색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대표적인 선교대회인 로잔대회(1974)의 중심인물인 존 스토트(John R. Stott)는 선교를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을 '선교하시는 하나님'으로 정의함으로써 이 대회를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천명하는 대회가 되게 하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missio Dei)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셨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의 아들은 사도들과 70인의 제자와 교회를 보내셨고, 교회에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것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선교를 폭 넓게 이해하였는데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의 우선성(the primacy of evangelism)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동반자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책임이 복음전도를 대치할 수 있거나 우선순위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missio Dei 라는 개념의 사용용례는 이제 에큐메니칼 진영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공히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missio Dei라는 개념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전유물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으나 전 세계적으로는 복음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단지 동일한 단어이지만 그 개념의 내용에는 양 진영에서는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본 논문의 이후에서 전개되는 바,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로잔대회를 기점으로 사회참여를 선교의 내용에 포함하게 됨으로써 그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고, 그 내용이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를 뜻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
3. 선교의 내용: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 교회와 신학계는 보수주의 및 진보주의 내지는 자유주의로 양극화 되어왔다. 이 양극화 현상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거기에서 파생된 '사회구원'에 대한 논쟁 등이 신학적으로 나타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개인의 영혼구원이 선교의 중심적인 내용이라고 보아 현실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침묵해 왔다. 반면 진보주의는 하나님의 구속의지의 사회적 실현에 참여하는 것이 선교라고 보고 사회구조적인 악, 인권문제, 정의로운 분배 등의 사회 문제에 적극 개입해 왔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현대의 상황 속에 처한 교회의 세상에 대한 대응양식으로서 선교의 내용에 사회참여를 포함시켰다. 초창기 에든버러대회(1910) 당시에는 미미했던 이에 대한 강조는 세계정세와 상황의 변화로 인해 교회의 자기책임 인식과 함께 기독교 선교계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대회가 진행됨에 따라 에큐메니칼 신학은 점점 사회참여 방향으로 지나치게 경도되어 마치 선교가 사회참여 그 자체인 것처럼 치우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세계적,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가 약자와 억눌린 자에게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어 감으로써 이에 대한 대응 양식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는 하나 본문(Text)에서 상황(Context)으로 편향되어 전개되어 나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빌링겐 대회(1952) 이후 후켄다이크에 의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활동을 주장하며 보편구원의 길을 연 이후 웁살라대회(1968)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신학적 좌경화 경향과 사회구원 편향적 경향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에서는 휘튼대회(1966), 프랑크푸르트선언(1970) 등을 개최하여 간헐적으로 사회참여부재에 대한 회개와 함께 전통적인 의미의 복음전도 중심의 선교 개념을 재천명하지만 사회참여에 대한 과제와 부담은 지속되었다. 그 이후 방콕 CWME 대회(1973)에서 복음의 개념에 사회적 구원의 내용이 담기면서 이에 복음주의자들이 대응하고자 열린 대회가 로잔대회 세계복음화 대회(1974)이다. 그러나 이 대회는 진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되고 그리하여 복음주의 선교개념과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회가 되었고 이 대회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복음주의의 선교신학의 입장에 전향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대회를 주관한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이해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모델에 따른 교회의 참여에 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선교에서 발전된 사상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는데, 스토트의 이러한 신학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파송에 근거한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있어서 이 대회가 중요한 이유는 균형 잡힌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신학적으로는 복음주의에 굳게 섰으며,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유일성, 복음전도의 필요성과 함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선교의 개념에 포함시킴으로써 균형 잡힌 복음주의 선교신학에 초석을 놓은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선교는 곧 전도라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이 대회를 통하여 시각을 넓히게 된 것이다.
우선, 로잔대회에서 복음전도를 사회참여와 동반자로 인식한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대립적으로 보는 견해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독교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림 1]는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양자는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즉, 진보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반면, 이에 반발하여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학진영에서는 복음전도를 강조했다.
한편, 로잔대회에서 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는 이 두 요소가 모두 기독교 선교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로잔대회를 주도한 존 스토트는 기독교선교는 문화명령(창 1:27)과 지상명령(마 28:18-20)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문화명령은 기독교 선교의 사회참여를 포함하는 것이고, 지상명령은 복음전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양자가 상호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관계가 [그림 2]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복음전도의 반대 술어는 사회참여가 아니라 복음전도를 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사회참여의 반대는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물론 그는 복음전도의 우선성(the primacy of evangelism)을 말함으로써 전통적인 복음전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 교 = 복 음 전 도 + 사 회 참 여
(M: Mission) (Ev: Evangelism) (SR: Social Responsibility)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줄기차게 주장해 왔지만 웁살라에서도 양자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실패했고, 그 이후 방콕대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심각한 고려와 논의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의 관계설정에는 실패한다. 복음주의(에반젤리칼) 신학진영에서도 로잔 이전 프랑크푸르트선언(1970)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은 생겨났으나 양자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다가 로잔대회(1974)에 와서야 양자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이로써 두 흐름의 신학에서 공히 사회참여의 당위성이 형성되고, 선교의 내용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양자의 균형 잡힌 사고가 가능해 진 것이다.
복음주의 로잔대회(LCWE, 1974)에서 정립된 양자의 관계는 이후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적 입장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전에 에큐메니칼의 사회참여 신학이 복음주의의 의식을 깨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한 바가 있는데, 이제는 복음주의에서 정립한 양자의 관계를 에큐메니칼 신학진영에서 수용하게 되는 상호교호작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사회참여'에 관한 한 양대 신학진영의 차이점은 외견상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강조점의 차이만 존재한다.
기독교와 기독교 메시지는 그 본질 상 세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독교 선교 역시 세상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지난 세기가 지나기까지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태만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복음주의 대회를 거치면서, 특히 로잔대회(1974)에서 기독교회와 기독교 선교의 사회참여가 강조되고 더구나 양자의 관계에 관하여 신학적 정리 작업은 이루어졌으며, 복음주의 내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실행을 위한 에큐메니칼 진영과의 적절한 합의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일이 과업으로 남겨져 있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먼저 제기한 "사회참여 역시 선교이다."라는 명제에 관해서 복음주의는 오랜 기간 동안 배타적 견해를 견지하여 '복음전도'만이 선교일 수 있고 사회참여는 선교의 범주에 포함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의 로잔대회에 이르러서는 '사회참여' 역시 선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고, 그 이후 이어지는 로잔대회의 부속회의에서 이러한 견해는 복음주의 내에서도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양진영은 선교의 내용에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공히 포함시켜서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개념을 인정, 사용하고 있다. 이 이슈는 상호 배타적 논제가 아니라 보완적 논제임을 오랜 논의와 반성 이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4. 세계역사에 대한 관점: 구속사적 선교신학과 약속사적 선교신학
독일의 선교신학자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선교신학의 유형을 이식유형과 회심유형, 구속사적 유형, 약속사적 유형, 의사소통적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위의 구분 중 '구속사적 유형'과 '약속사적 유형'에 속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중심으로 이 두 유형의 신학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구속사적 선교모델에 해당되는 신학으로는 칼 하르텐슈타인(K. Hartenstein)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과 이 개념을 명료화 한 휘체돔(G. Vicedom)의 '하나님의 선교신학' 등이 해당된다. 그리고 현대 로잔대회의 신학 이후 복음주의적 선교신학이 대부분 이런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선교모델은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아왔으며, 현재에도 선교신학자들과 선교 담당자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모델의 선교신학이 성경신학적 기초로서 채용하는 신학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그리스도와 시간』(1946)이라는 저서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학이다.
이 신학에 관하여 순드클러(B. Sundkler)는 '발전적인 축소'의 법칙과 '발전적 확대'의 법칙으로 구속사적 선교 모델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선교의 역사가 구속사적으로 결정적인 사건, 즉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바벨탑을 통한 인간의 저항이래, 상실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아브라함의 소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중적으로 행동하신다. 그는 인간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대리적으로 활동하신다. 대리적인 활동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 외 세상과 세상의 역사는 대리적 활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구속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전적인 축소" 의 법칙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한 종족의 선택에서 남은 자의 선택으로, 거기에서 다시 인자의 선택으로 마침내 십자가에서 그 장점에 이른다는 법칙이다. 십자가는 정점이자 동시에 전환점이 되는데, 그것은 이때부터 구속사가 "발전적인 확대" 법칙의 힘에 따라 전개된다. 즉 사도로부터 교회로, 교회로부터 세계로 인류의 구원이 확대 전개된다. 즉 사도의 선택에서 교회의 탄생, 교회는 다시 인류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구속사적 모델에서 개진되는 선교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의 역사를 구속사와 세계사로 구분하고, 이스라엘과 교회가 중심이 된 역사를 구속사로 보고, 세속의 역사와 구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역사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그리고 그 구속사건을 증거하고 전파해 온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하나님의 중심적인 활동으로 보고, 그 하나님의 활동이 중심이 되어 세속사를 주도하고 변화시켜 가야하는 대상, 혹은 이차적인 역사로 본다. 따라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세상은 이 교회가 활동하는 장(場)이라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구속사적 선교신학에서의 선교의 본질이 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델에서도 다른 종교들을 멸망으로 향해 가는 것으로 보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며 회개와 세례를 통해 옛 생활과 종교로부터 해방되어 교회로의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구속사적 모델을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총회의 "교회의 선교적 구조"(1961)에서 전적으로 수용되었다. 약속사적 모델 역시 missio Dei 개념을 선교신학의 출발점으로 한다. 약속사적 모델에서 하나님의 선교 대상은 역사와 세계이며 선교의 목적은 세계의 샬롬(shalom)이다. 샬롬은 교회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또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샬롬은 세계에 적용된다. 이 모델에서는 아들의 파송과 성령에 의한 교회의 파송이 중요시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파송만이 중요시된다. 그러므로 이 모델에서는 구속사적 모델의 '하나님-교회-세계'가 아닌 '하나님-세계-교회'의 순서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술어로서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서 일하시고 교회는 그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만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세상에 알리신다. 하나님의 광범위한 구원활동의 목적은 세계이며 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교가 교회의 기능이 아니라 교회가 선교의 한 기능이다. 구원이 교회 안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며, 교회도 모범적인 실존을 보여주지 않는다. 교회가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부단히 탈 중심화의 사건 속에서 존재하며 이로부터 교회는 자신의 선재(pre-existence)를 실현하고 교회는 타자을 위한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선교 내용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 개입해 들어오시며 약속의 말씀으로 역사를 새롭게 만드시고 역사를 그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진 세계란 있을 수 없다. 세계는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살아가는 역사의 한 단계이다. 이 세계는 발전적으로 운동해 나간다. 구속사적 모델에서 역사는 선교를 위해 존재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선교와 교회는 역사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역사에 봉사하며, 역사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교회는 해방에 봉사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해방신학에서와 같이 교회의 보편성이란 오직 가난한 자의 보편적 해방 가운데서 존립할 수 있다.
이런 선교신학적 관점은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과의 연대에서 구체화된다. 이 점은 멜버른(Melbourne)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선교대회(1980)에서 최종적으로 정립되었다. 여기서 선교는 세계의 "평화화(Shalomization)", "행동 가운데 있는 희망(Hope in Action)"으로 이해된다.
로잔대회에서 주창된 복음주의적 의미의 missio Dei는 철저히 교회를 매개로 한 복음과 사회적 책임을 통한 세상의 섬김이었다. 따라서 로잔대회의 복음주의적 선교신학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중심적 기구이며 도구라는 점에서 휘체돔의 missio Dei 개념만큼이나 교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점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하신 일하심의 방법이 구속사적 선교신학에서 말하는바 하나님-교회-세상의 도식에서처럼 '교회'를 통해서만 일을 하시고 하나님-세상-교회의 약속사적 선교신학의 도식에서처럼 '직접' 세상에서 일하시지는 않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직접 일을 하시기도 한다. 노아 시대 홍수로 세상을 벌하시고, 바벨탑사건에 간섭하셨고,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셨고, 세상의 군주 고레스를 통하여 유다백성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기도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대리적 방법으로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일을 하시기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구속사적 선교신학의 역사이해만 옳고 약속사적 선교신학의 역사관은 잘못이라든지, 그 반대의 논리도 정당하지 못하다. 두 신학의 역사관 모두 성경에 나타나 있는 관점이다.
[그림 3]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각종 자연현상 등의 일반은총적 사건이나 세속적 지도자들을 통해 세상에 직접 일을 하시기도 한다. 따라서 구속사적 신학에서 보는 역사관과 약속사적 신학에서 보는 역사관 모두 하나님의 세계역사에 관여하시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제 역시 배타적 논제가 아니라 보완적 논제로 보아야 할 사안으로서 양 진영 신학적 견해가 결합하여 온전한 신학적 관점을 이루어 갈을 수 있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 3] 통전적 역사관: 두 신학에 있어서 역사관의 통합
① 구속사적 선교신학의 방향
② 약속사적 선교신학의 방향
5. 선교의 목표: 영혼구원, 교회설립, 그리고 기독교적 사회건설
선교목표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영혼구원, 토착 교회설립, 기독교적 사회건설 등 세 가지가 논의 되어 왔다.
첫째는 개인구원, 특히 그 중에서도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개인구원의 목표는 사람의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 선교사역의목표라는 것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선교목표이다. 오늘난 한국교회 성도들도 선교의 목표를 영혼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선교의 위대한 세기로 불리는 19세기 선교에 있어서 가장 지배적인 목표였다. 그런데 개인구원이 선교의 최종 목표가 된다면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건전하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역교회와의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 때 불완전한 목표로 남을 가능성이 많다.
두 번째로 등장한 선교목표는 교회설립니다. 이에는 로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우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목표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교회설립(plantio ecclesia)이었다. 로만 가톨릭교회에서는 한 지역이 선교되었는지의 여부는 얼마나 복음이 널리 전해지거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심했는지로 평가 하지 않고 그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주교가 착좌(着座)했는가가 선교여부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19세기 이후 개신교에서는 토착교회의 설립을 선교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 목표는 20세기 중반 교회성장학파가 교회 중심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오늘날까지 복음주의의 중요한 선교전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 번째 선교의 목표는 기독교 사회형성의 목표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하고 있다. 17세기 청교도들과 19세기 후반 과학기술의 발달로 역사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후천년설을 주장하던 사회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또한 20세기 중반 이후 하나님의 선교(Misso Dei)의 영향으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로 인정되었다. 로잔대회의 중심인물인 존 스토트(John R. Stott)는 선교를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을 '선교하시는 하나님'으로 정의함으로써 이 대회를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선교를 폭 넓게 이해하였고,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의 우선성(the primacy of evangelism)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동반자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책임이 복음전도를 대치할 수 있거나 우선순위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로잔대회에 와서야 선교의 목적이 비로소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기독교적 사회건설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고 있는 목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선교의 세 가지 목표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을 구원하여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여 교회가 부흥하고 개인은 그 속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사회에 진출한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사회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주권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취되는 것은 상호 간에 긴밀히 연관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단지 목표를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선교지의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려가 주어진다면 이상의 세 목표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왕국신학(kingdom theology)의 강조 인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 즉 하나님의 통치가 미래적인 천국뿐만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사회형성의 목표가 주요 선교목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사회에는 개인의 죄로 인하여 무질서와 범죄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사악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사회구조적인 악을 제거하여 하나님과의 샬롬(Shalom)을 이웃과의 샬롬으로 확장하자는 개념은 복음주의의 선교목표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 목표에 있어서도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목표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OR)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AND)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선교신학의 편향성: 본문(Text)과 상황(Context)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성경의 본문(Text)을 중시 여겨서 복음전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지상명령(마 28:18-20)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구성하여 양육이 일어나게 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이 되는 삶을 구현하도록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복음 그 자체를 중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데에 초첨을 두고 성경의 내용을 중요시 하여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본문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시대적 상황(Context)에 대한 고려가 부족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실제로 그러한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민감하지 못하고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이에 비하여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인간의 역사과정 속에서의 상황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본문(text)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들이 그토록 상황(context)에 대해 강조하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사료한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개최된 각종 대회는 각각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경우가 많다. 현대의 첫 세계적인 선교대회라고 할 수 있는 에든버러 선교대회(1910)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져 18세기 이후 당시까지 지속되어온 계몽주의 사상에 기초한 역사적 발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 세계를 향한 복음전도와 역사발전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세대 안에 세계를 구원한다."(Romaticism)이 에든버러대회의 구호인 것을 고려하면 이 대회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개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예루살렘 대회(1928)에 와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것은 그 사이에 세계역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인데, 에든버러 대회 이후 세계 역사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1914), 러시아 혁명(1917)으로 인해 낙관적인 인간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고,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에 반대한 근본주의 논쟁과 신정통주의 대두로 인해 신앙적인 보수화 현상, 양극화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대회에서는 화해를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면서 신학적 방향성도 그러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마드라스 또는 탐바람 대회(Tambaram 1938)에서는 1차 세계대회 이후 여전히 불안했던 세계 정세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치는 상황에서 개최된 대회로서 결국 이 대회 반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파쇼정권을 경계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를 반영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분이 강조된다. 이 대회에서는 예언자적 증거(Prophetic Witness)가 강조되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상황과 관련이 된 것이다.
휘트비 대회(Whitby, 1947)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분위기가 대단히 침체된 상황에서 개최된 선교대회이다. 전쟁과 이어진 냉전시대, 피선교지의 독립전쟁 등이 지속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양 기독교 선교국에 대한 피선교지의 투쟁, 선교회와 선교지가 갈등, 반 서양, 반 선교국, 반교회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러한 사안의 해결을 위해 세계교회의 협력이 요청되던 관계로 이 대회의 주요 논의 점은 (1) 세계교회의 교제(koinonia) 강조, (2) 교회의 능동적인 사회참여 강조, (3) 선교는 초국가적 과제가 강조되었다.
그 1년 후에 개최된 암스테르담 대회(Amsterdam, 1948)는 제 1차 WCC 총회로서 그 주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경륜" 이었으며, 이 대회에서 WCC가 결성되었다. IMC 빌링겐 대회(Willingen, 1952)의 시대적 상황도 중국의 공산화(1949)와 선교사추방(1950), 한국전쟁(1950) 등으로 대단히 우울한 분위기였다. 이 대회는 WCC 결성(1948)이후 첫 선교대회로서 이 대회에서 '선교개념'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대회의 핵심 기조는 "교회의 선교적 의무"이었으며 이 대회에서 강조된 선교관은 "십자가에 순종하는 선교" 였다. 시대적 상황(context)이 대회의 선교신학적 기조에 영향을 준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WCC 2차 총회인 에반스턴 총회(Evanston, 195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희망"이란 주제로 개최 되었고, 가나 회의(Ghanna, 1958)에서는 제3 세계교회의 지도자 양성과 신학 교육의 갱신을 위하여 TFF(Theological Education Fund)를 창설하여 제도적으로 W.C.C.계의 교회가 인재를 더 많이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 대회에서는 W.C.C.와 IMC의 통합을 결정하였다. 통합이후 최초의 WCC대회(3차 총회)인 뉴델리 총회(New Deli, 1961)는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총회는 증거, 봉사, 일치의 세분과로 나누었으니 호켄다이크의 증거(kerygma), 봉사(diakonia), 교제(koinonia)와 일치하는 것'이다. 과거의 IMC는 세계선교 및 전도회(CWME)라는 분과가 되었다.
웁살라 총회(Uppsala WCC 4차 총회, 1968)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는데 상황과 성격에 있어서 대단히 논란이 된 대회였다. 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월남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서 반전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이다. 국론이 나라마다 분열되고 교회도 분열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1960년대는 학생세력이 증대되어 기성세대에 반항하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이 극도로 심화되었다.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JFK), 그 동생 로버트 케네디(RK), 마틴 루터 킹 목사(M. L. King) 등의 암살사건으로 어두운 사회의 실상을 경험하게 된 배경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 웁살라 대회의 논의 내용도 (1) 선교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형성(the new humanity), (2) 타자를 위한 교회, (3) 타종교와의 대화 60 2010 제10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 문제, (4) 사회구원에 대한 견해 강조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a) 선교를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을 교회가 동참하는 것, (b) 선교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이루시는 사역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해했는데 대회는 그 중 전자에 집중하게 된다. 이 대회 이후 Mission Dei에 관한 전자의 개념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고, 이후 복음주의 로잔대회에서는 Missio Dei에 대한 후자의 견해를 취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도 결국 상황(context)이 신학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방콕 대회(1973)는 W.C.C.의 선교 및 전도 분과 위원회(CWME)의 대회로서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을 주제로 토론했다. 특히 구원의 개념을 정의함에 있어서 성경적, 신학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오늘'의 구원이라고 하여 구원의 이해를 현재적, 상황적 개념을 신학적으로 재해석 한 것이었다.
나이로비 대회(Nairobi WCC 5차 총회, 1975)의 주제는 "자유하게 하시며 연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대회에서는 전인(the whole person), 전 세계(the whole world), 전 교회(the whole church) 를 주창하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다루고 있다. 교회에 관해서는 교회를 전도와 사회행동의 통합적 관계로 이해함으로써 웁살라대회보다는 보다 균형 잡힌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그해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해 킬링필드(1975-79) 대학살이 일어나던 시점이다.
WCC 선교신학은 이후에도 이러한 전통에 따라 시대적 상황과 연결되어 전개되어 오고 있다. 즉 대부분의 WCC대회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동일한 맥락에서 그 대회의 신학을 전개시켜 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회의 흐름 속에 형성된 에큐메니칼 신학은 자연히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경 본문"(Eternal Word of God)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약점과 함께 복음주의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두 신학의 일치점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진영의 전향적인 자세가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첫째,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본문 그 자체에 지나치게 천착하여 "변화하는 세상"(Changing Wrold)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이 시대를 걸쳐 전개되어온 에큐메니칼 대회의 신학을 그 상황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리라고 생각된다. 둘째, 아울러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들은 상황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본문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보다 더 성경 본문에 대한 정직성과 성실한 적용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양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한 걸음씩 양보하여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면 두 신학의 합치성은 보다 용이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7. 두 선교신학의 다양성과 합치성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선교신학의 양 진영인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상호 도전을 통한 자기 수정에 의해서, 또한 자기반성적 성찰을 통하여 각각 그 성격과 내용이 변화, 수정되어 왔다. 에큐메니칼 신학의 경우 전 세계 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적 컬러의 참여자들에 의해 형성된 대회의 신학으로 천명된 것이어서 한 대회의 문건 내에서도 복음주의적 성격의 문건에서부터 전혀 비복음적인 성격의 내용을 지닌 문건이 동시에 발견된다. 예를 들면 에큐메니칼 구원의 개념 중 '사회구원' '인간화'라는 가장 급진적인 개념을 내세웠던 웁살라 대회에서도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웁살라 대회는 1960년대의 비인간화에 맞서는 새 인간성에 역점을 두면서 위의 선교 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는 바, 보고서는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인 복음, 예배,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 및 새 인간성에 기초할 교회의 선교 과제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즉, 과거에는 선교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향하기보다 사람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지금은 중대한 문제가 참 인간이기 때문에 선교하는 교회의 궁극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을 선교의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1960년대의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 비인간화의 상황에 대응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인간', '하나님의 형상', '새 인간의 회복자',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성부를 영화롭게 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 고난과 죽음을 승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새 인류의 머리로서 차차 모든 것을 총괄하실 것이다.
웁살라 대회는 이와 같은 기독론적 초석 위에서 새 인간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새 인간' 이라는 개념은 '무지한 상태로부터 각성된 인간'을 의미하거나 내지는 '중생한 인간'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다음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성령, 말씀, 신앙, 중생, 새 사람이라는 용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앙으로 거듭난 자를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새 인간성이란 ...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신앙의 응답에 의해서 우리는 이것을 받는다. 성령께서는 여러 다양한 결단의 순간들에 있어서 인간들에게 이 선물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함으로써 인간을 살피고 회심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복음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응할 수 있는 기회들을 인간에게 갖다 주는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중생이다.
의식화에 의한 새 인간을 주장함과 동시에 신앙으로 거듭난, 즉 회심에 의한 새 인간을 규정하는 등 새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본주의적 인위적 인간상과 성경적으로 거듭난 인간상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어서 의미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진영이 다양한 색깔의 신앙인과 신앙집단을 모두 어우르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백이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어쨌든 이러한 혼재된 고백은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통한 사람들에게 의식화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내부에서는 전통적인 신조에 동의하는 자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방콕대회(1973)의 CWME 역시 웁살라대회(1968)의 복음과 교회, 그리고 교회의 사회 참여라는 두 기둥을 가지고 있다. 이 방콕 대회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참여로 '복음과 교회'라는 기둥이 더 튼튼해지는 감이 있으면서도 몰트만 등의 주장에 의하여 '사회구원'이 더욱 첨예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웁살라 대회의 '인간화'에 이어 방콕대회 역시 '사회구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구원이란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착취에 항거하여 경제적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권에 대한 정치적 억압에 항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 소외에 항거하여 소외 된 무리와 연대감을 갖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인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에 항거하여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구원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빈곤과 압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여 철저히 사회 중심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쟁으로부터 쟁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콕 대회에서는 위에 언급된 사회구원이 복음주의 계통에서 강조하는 개인구원과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구원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인들을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을, 이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갱신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구원관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참여를 통한 사회구원을 역설하면서 교회의 갱신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구원과 전통적인 복음의 내용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는 데에 있다. 두 상반되는 구원에 대한 이해가 어떤 관계를 지니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러한 모호성이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이 두 개념에 대한 관계의 정립은 복음주의 로잔대회(1974)에서 적절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그 구성원들의 다양한 신앙적 스펙트럼으로 인하여 복음주의적 견해에서부터 자유주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적 색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다양한 신학적 견해에 대한 선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신학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사료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자신들의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적, 복음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방이 처한 신학적 위치를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우리는 보다 더 각각의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신학적 상이점을 상호보완적 관점으로 진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IV. 한국적 선교신학 구축의 과제
1. 신학을 보는 눈
신학함(theologizing)에 있어서 정직성과 성실성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두 조류의 선교신학진영에 소속된 신학자들에게도 이 요건은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질이다. 이를 토대로 두 신학진영의 학자들이 가져야 할 관점과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첫째, 본문(Text)은 중요하다.
둘째, 상황(Context)도 중요하다.
셋째, 본문을 상황에 조명하여 정확하고도 성실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신학 일반뿐만 아니라 선교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성경 본문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이 성경 본문(text)과 복음에 충실하여 하나님과의 우선적 화해와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태도이며 본문에 대해 '정직한 자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상황(context)을 바라보는 데에는 '성실하지 못했다.' 시대적 상황이 교회에 해답을 요청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에 대한 해답을 회피한 불성실함을 보였다는 점은 시인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은 특히 성경 구약의 예언서의 본문과 그 해석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했다.'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가져오는 데에 소홀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신학함에 있어서 상황을 치열하게 조명하는 성실함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들이 상황(context)을 간파하고 아픈 가슴으로 고난 받고 억압 받는 자들을 품은 것은 상황과 이웃에 대해 '성실한 자세'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상황에 천착한 나머지 본문(text)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로 차용하는 '부정직성'을 보였다. 성경을 복음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의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처한 입장에서 성경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내용'의 부정직성 때문에 그 내용의 단초가 된 '문제의식'까지 잘 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할 점이 있다고 사료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시대적 상황에 성실하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 신학적 내용이 전개된다. 비록 그 신학적 내용이 복음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의식은 귀중한 것이며 충분히 본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은 이웃에 대한 배려의 부족인 점을 감안하면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마땅히 에큐메니칼 신학으로부터 그 문제의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제의식'의 불성실함이 '내용'의 정직성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비록 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이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였고 성경 본문의 상황에의 적용에 '불성실함'을 모였다고 할지라도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정직하지 못하고 오류가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복음주의로부터 '복음 그 자체에 대한 성실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후의 과제는 상황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복음 그자체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 비록 내용에 있어서는 비복음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의식은 올바르다는 점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일치된 신학으로의 행보를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 공통분모와 과제의 설정
분열로 점철된 한국교회는 이제 연합과 일치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미 진행되어 온 양 진영의 신학적 차이점의 간격을 메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지적한 바, 상대에 대한 선이해와 관점의 변화를 전제한다면 상대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사료되는 바이다. 물론 완벽한 이해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최소한도로 필요한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양자가 협력해서 일할 수 있을 만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학적 이해가 전제 된다면 과제의 협력은 가능해 진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과제의 범위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과업성취를 위해 협력해야할 성경적 당위성과 시대적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1) 복음전도의 측면에서
이 땅 국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기독교인 수가 감소하고 있고, 가장 정직해야할 기독교를 정직하지 못한 종교로 간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뢰가 전제 되어야 복음증거가 가능하고 이웃사랑이 순수하게 실천될 수 있다. 복음증거를 위해 전도를 강조하지만 전도는 점점 힘든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향해 전도하라고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는 전혀 전도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있지 않다.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미디어에서는 협력과 연합기도 결과로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남미 콜롬비아(Columbia)의 마약도시로 유명했던 칼리(Cali),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근교에 위치한 범죄도시 키암부(Kiambu), 미국 캘리포니아에 부패와, 마약, 이단으로 유명했던 헤멧(Hemet), 중미 과테말라의 술과 범죄도시 알모롱가(Almolonga)의 변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도시는 공통적으로 범죄와 마약, 우상숭배의 도시로 사람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으나 교회의 연합과 기도로 범죄와 악행이 제거되고 도시 전체가 변화됨으로써 살기 좋은 도시가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크게 늘어나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 도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된 대표적인 도시들로 언급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콜롬비아의 칼리(Cali, Columbia)의 경우 목회자들의 희생, 연합기도와 협력을 통하여 도시 전체의 범죄를 몰아내고 그 이후 폭발적인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이 일어났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 한국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여건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전반적이고 대대적인 갱신이 필요한 상황이다. 개인과 개체 교회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적인 개혁과 갱신 운동이 일어 나야할 시점이다. 자기중심성에서 파생되는 대교회주의와 개교회주의, 교파분열의 문제, 소극적 사회참여, 형식주의에서 나오는 교회 내에서의 인간적 직위 추구, 권위주의에서 파생되는 목회자의 권위의식, 담임목사 중심의 교회와 목회구조, 교회의 계층화, 교회갈등의 문제, 세속주의에서 파생되는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 맘몬주의, 예배당의 대형화, 도덕성의 결여로 인한 비윤리성 등의 산적한 문제가 쌓여 있다.
(2) 사회참여의 측면에서
또한, 적극적인 구제와 사회참여를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사회적 소외계층을 돌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긍휼을 세상 속에 실천함으로써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고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과제 앞에서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상황이다. 한국교회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쇄신운동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사회구조적 부조리를 분석하고 사회정의와 경제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 모든 교회가 힘과 역량을 모아야 할 때이다. 사회를 정화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고 노력해야할 때이다. 나아가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때이다. 아울러 세계의 재난 구호사역과 세계평화의 선도에도 깊이 있고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이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한국 교회의 선교신학은 그 공통분모를 도출하여 부분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합치성을 도출하여 함께 생각과 마음과 힘을 모음으로써 성도와 교회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선교신학의 일치가 선행적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물론 과업의 협력이 선행되고 그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진전된 협력과 일치가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서 시작하든 이와 같은 선순환구조가 정착되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 땅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기를 학수고대해 본다.
VI.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선교신학의 두 조류를 형성하고 있는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선교의 주체와 본질은 하나님의 선교이고, 선교의 내용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포함하는 것이며, 세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구속사적 선교신학과 약속사적 선교신학을 포괄하는 통전적인 역사관, 선교의 목표는 영혼구원과 샬롬을 포함하는 것으로 수렴되어, 이들의 논제가 상호 배타적인 내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찰해 보았다. 한국 선교교회와 신학계는 이제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지양하고 서로의 힘과 지혜를 모아 일치된 선교신학을 세우고, 한국교회를 바르게 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협력을 도모해야 할 때이다. 오히려 양 신학 진영은 한국의 양대 선교신학이 상반되는 의견을 통하여 온전한 신학적 견해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상이한 신학적 견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과 상대 진영에게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선교신학, 나아가 한국의 전반적인 신학적 경향에서 이 양자의 신학이 관점의 변화를 통하여 서로를 비난하고 폄하해 오던 태도를 지양하고 서로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태도로 변화하고, 나아가 서로 연합한다면 협력사역을 위한 기초가 마련될 뿐만 아니라 교계의 성도들과 국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어 궁극적으로 모든 국민 개개인이 복음을 만나 변화되고, 교회가 성장하며, 사회가 변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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