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학

[스크랩] 목사와 장로, 동역자인가 경쟁자인가

수호천사1 2012. 9. 11. 09:49

목사와 장로, 동역자인가 경쟁자인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호존중 필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분쟁이 없이 조용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떤 공동체는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조율하면서 조용히 운영되는가 하면, 어떤 공동체는 분쟁으로 인하여 시끄러워져 깨어지기도 하고,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거나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교회공동체도 예외는 아니다. 근래에도 상당히 유명하고 큰 교회들이 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분열되고,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따가운 눈총과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런 분쟁의 여파가 그 교회의 내부적인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계 전체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특히 규모가 큰 교회의 분쟁은 사회적인 여파도 그만큼 크고 전체 교계에 더욱 큰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심각성도 그만큼 크다 할 것이다.


   몇 년 전인가 다른 종교의 분쟁이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몽둥이와 흉기가 등장하고 폭력배까지 동원된 분규현장을 각종 매스컴들이 앞다퉈 보도하는 동안 일반 시민들의 그 싸늘한 조소를 독자들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 분규를 겪으며 그 종교의 신도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보도를 본 기억이 있다.


   교회의 내부분쟁의 중심에는 누가 있을까


   그런데 우리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분규사태를 분석해보면, 그 분쟁의 핵심에는 항상 그 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 기독교, 교회의 내부분쟁의 중심에는 누가 있을까?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목사와 장로가 있었다.


   그럼 목사와 장로가 왜 교회분쟁의 핵심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회운영의 중심을 이루는 두 축인 목사와 장로는 교회 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어떤 형태로든 연관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불가피한 측면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 간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인한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목사와 장로가 갈등하는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대를 보는 시각과 의식이 상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목사들을 견제하지 않으면 독선과 전횡을 하려 한다는 장로들의 시각이고, 두 번째 문제는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목사가 심사숙고하고 오랜 기도 끝에 추진하는 목회비전을 장로들이 가로막으려 한다는 목사의 시각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의 이면에 감춰진 권위의식이다. 언젠가 만난 어느 목사는 “장로들은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흥회나 교회 행사에 초빙된 강사목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담임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 받는다”는 말이다. 목사가 스스로 목사를 섬기라고 하는 것은 권위의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장로들을 지명하여 약점을 들춰내며 은근히 모욕을 주기도 한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갔을 때다. 강사로 초빙된 목사는 누구나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한 목사였는데, 설교 중에 갑자기 “오늘 감사헌금한 장로님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니 장로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장로가 몇 명인데 도대체 겨우 한 명만 헌금을 했느냐”며 나머지 장로들을 듣기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얼핏 들으면 그냥 일반성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헌금을 강조하기 위한 제스처 같지만, 그 이면에는 목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성도들 앞에서 장로들의 권위를 짓밟은 것이다. 그 교회 목사도 부흥강사였으니 어쩌면 바로 그 강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부흥회에 초빙되어 비슷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품앗이로 말이다.


   그런가 하면 장로들의 모임에서 가끔 듣는 말 중에 “새로 온 목사 길 잘 들여야 돼. 나중에 골탕 먹지 말고”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어떤 장로는 무용담을 펼치기도 한다. “지난주 당회에서 목사가 갑자기 안건을 제출하기에 사전 통보와 귀띔도 없이 불쑥 그런 안건을 내밀면 어떻게 하느냐”고 혼쭐을 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 목사들 상당히 건방지단 말이야. 지들이 뭘 안다고 자꾸 뜯어고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역시 젊은 목사나 신임목사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이다.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라고 해도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시무한 목사와 장로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피차 상대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목사가 시무 중에 자신이 장로장립이 된 경우에는 목사의 권위에 은연 중 복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랫동안 시무했던 목사가 은퇴하고 신임목사가 부임한 후 5년 이내에 발생한다.


   젊은 목사와 장로들의 묘한 갈등


   새로 부임한 목사는 대개 젊기 때문에, 의욕이 넘치고 변화를 추구한다.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하며 나름대로 목회에 대한 계획과 비전을 갖고 있던 것을 펼치고 싶기도 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바꿔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신임목사를 보는 장로들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특히 나이든 장로들은 생리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이것저것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을 보면 왠지 불안하고 못마땅한 것이다.


   더구나 신임목사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당회에서 장로들과 폭넓은 토론이나 의사를 물어 공감대가 형성된 후에 시행하면 다행인데 성질 급한 젊은 목사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럴 때 오래된 장로들의 감정은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굴러온 돌이 어느 날 갑자기 기둥을 갈아세우겠다고 주춧돌을 빼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목사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은 차치하고 감정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실제로 젊은 목사들 중에는 나이든 장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꽉 막힌 노인네들, 일하는 데 걸림돌만 되는 훼방꾼, 이런 편견은 다른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할 때부터 쌓인 깊은 불신 때문이다.


   가까이에 있는 젊은 목사들에게서는 이런 불평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은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부담이 없이 만난 젊은 목사들에게서 듣는 말은 상상을 초월할 때가 있다. 도대체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전에는 이랬었는데” 하는 전통가치관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에 너무 인색하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의 젊은 부목사는 우연한 기회에 장로들과의 대화에서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의 불평등성을 지적하였더니 그다음부터 진보적인 목사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배척하더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동산 투기로 한몫 잡은 어느 졸부 장로는 기회만 되면 돈 자랑과 사회적으로 조금 출세한 아들 자랑을 늘어놓고 과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장로가 존경스럽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설교 중에 아멘! 아멘! 을 유도하며 스스로의 권위에 심취되어가는 일부 목사들, 성도들을 섬길 줄 모르고 오히려 스스로 높아지고 스스로를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어가며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목사들은 정말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장로들 중에는 대개 그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소위 카리스마라고 하는 권위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위의식보다 잘못된 교회의 관행들을 뜯어고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젊은 목사들이 장로들과 더 많은 갈등을 야기시킨다는 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숙제라면 숙제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동역자인가? 경쟁자인가?


   한마디로 동역자다. 성경적으로도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는 서로 도우며 하나님을 향한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동역자인 것이다. 문제는 상호불신과 몰이해. 그리고 지향점은 같은데 방법과 역할에 대하여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동역자 관계인 목사와 장로가 화합하여 교회를 이끌어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먼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는 곧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지혜가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 말썽 많은 일부의 대형교회들처럼 목사의 독선과 전횡에 말없이 굴종하고 이끌려가는 평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성도들로부터 신격화되어 교회재정을 사유재산처럼 주무르는 것을 방조하거나 오히려 거들며 떡고물이나 얻어먹는 식의 왜곡된 평화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목사를 견제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장로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목사와 장로가 화합이라는 허울로 회칠한 무덤 속에서 같이 썩어가는 것은 분쟁으로 인하여 햇빛 속으로 나오는 것보다도 더 추악한 것이다.


   그러면 바람직한 화합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장로들은 젊은 목사들의 변화 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너그럽게 수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데 교회만 옛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면 작은 제도나 형식과 방법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목사들도 장로들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움을 향한 개혁과 비전에 걸림돌이 된다 해도 실존하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한꺼번에 뛰어넘으려고 하면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장로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버려야 한다. 적어도 일정 수준의 학력과 지적수준을 갖춘 목사들이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장로들에게 일종의 우월의식을 가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바람직한 목회자 의식이 아니다.


   그리고 삶의 대부분이 교회 안에 머무는 목사와 현실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장로는 현상을 보는 시각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입장과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만 하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다. 결코 급히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항상 먼저 자신을 성찰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만 탓하면 분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을까봐 걱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주님을 위하는 것인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극심할 때,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은 못할지언정 내부분쟁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오래 전에 우리 기독교 사회에서 유행하였었던 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우리들 마음에 새기고 있으면 분쟁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2006. 1. 16. 뉴스앤조이 / 이승철 기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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