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가정교회에 영향을 미친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사상
안대욱
중국 독립가정교회의 신학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기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한 각도에서 가정교회에 미친 주요 지도자들의 사상을 언급하는 데에 본고의 목적이 있다. 광저우의 린시엔까오 목사나 허난의 쉬용저, 북경의 유엔상천 등 현존하는 몇몇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사상을 논하는 것이 좋겠으나, 본고에서는 왕밍다오와 니토셩, 찡젠잉, 쑹상지에 4사람의 신학사상을 논하려 한다.
1. 왕밍다오
왕밍다오는 니토셩, 쑹상지에와 함께 중국 기독교회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몇몇 소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교회의 대중적인 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5.4운동이 일어난 후 당시 중국 내 서구 선교사들 중 서구의 자유주의신학 전통을 지닌 사람들과 자유주의 계통의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중국 기독교의 ‘시대적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교회 내에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격인 짜오즈천, 자유밍, 사부아이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1) ‘성경화’ 사상
왕밍다오는 당시 적지 않게 퍼져있던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나 사회복음운동과 토착화신학운동을 단호히 거부하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다. ‘토착화’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신학과 교회생활을 ‘성경화’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적으로 토착화 작업을 거부한 것같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야에 관해 학술적으로 발표한 글은 없지만 그가 처한 당시 상황 속에서 너무나 지나치게 중국교회를 무시하고 중국인 지도자를 양육하지 않은 외국 선교단체들이 인도하던 종파적인 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2) 경건주의 사상
왕밍다오는 근대 중국교회 경건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의 영적 생명을 성장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죄를 물리치라고 가르쳤다. 죄에 대하여 가슴아파하고 증오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경건신학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의 전도집회에는 모두 죄악과 싸우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그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고난의 신학은 예수를 닮아 가는 생활이 곧 죄악과 싸워 이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고난을 받을 경우에도 특별한 자기수양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강력히 싸워 이기고 예수를 더욱 닮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 성경 읽기와 기도, 반성 등의 자기수양을 강조하는데, 중국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런 사상을 받아들여 대부분 개인 영성추구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왕밍다오의 초기 사상에는 어느 정도 완전 성결주의적인 사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상은 교회가 부흥하는 때에 종종 나타나는 그릇된 감정의 산물이다. 그가 나중에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깨달은 이후, 그의 노년의 모습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격으로 충만하였다고 한다.
(3) 변증적 사상
특히 당시의 ‘불신파’ 혹은 ‘신 신학’(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과 교회들에 대해 그가 붙인 이름)에 대해서 변증적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서구 선교사들이 중국에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유입하였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성경의 유오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성경의 권위가 실제로 교회에서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점차적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죤 듀이의 실용주의사상까지도 선교사들이 영향을 끼쳤다.
왕밍다오는 서구의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연합하지 말 것을 주장했는데 그는 변증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내의 그 어떤 일반 도덕적 부패보다 교리상의 부패가 교회의 영적 기초를 더욱 심하게 위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해 그가 가한 비난의 강도는 상당히 높았다.
(4) 정교분리
공산당과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려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계속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였다.
(5)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무관심
믿는 사람들과 불신파(신신학파) 사람들과는 연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국 내 일반교회에 관한 생각들이 아주 소극적이었다.
(6) 4 원칙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모범교회를 위해 1925년 북경에「기독교회당」을 설립하였다. 교회자립과 올바른 신학, 바른 성경해석, 정교분리의 4개 원칙을 순교의 정신으로 지켜나가자고 강조하였다.
(7) 토착적인 중국자립교회 운동
서구 선교기관의 예속을 벗어나 진정한 중국의 토착 자립교회를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2. 니토셩(와치만 니)
기독교도취회소(혹, 지방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를 세운 니토셩은 왕밍다오, 쑹상지에 등과 함께 전통적인 기독교보수파 가운데 가장 이름 있는 몇몇 소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중국교회의 토착적인 조직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긍정적인 면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상이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신학은 ‘영적 신학’(屬靈神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의 모든 신학은 대부분 삼분설적 인간론에 근거한 것으로 ‘영적 생명→영적 기초→영적 단체’의 단계로 설명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본질은 신조(信條)나 전통, 예전이나 제도가 아닌 일종의 영적인 실제(一種屬靈的實際)로서 그러한 영적 실제가 있으면 기독교이고 없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영적 실제는 성령의 계시에 의해 사람의 영에 만들어지며 사람은 직접 하나님과 접촉하여 ‘생명상의 교류(生明上的交流)’를 할 수 있다. ‘거듭나고 구원받는 일’은 바로 이런 영적 실제가 시작됨을 말하며 ‘성화를 추구함’은 이 영적 실제를 자라게 하는 것(實際的栽培)이 된다. 성도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봉사하는 것 등은 모두 그 영적 실제의 기초가 된다. 성도는 먼저 자신이 이 영적 실제를 받아야 하고 그 후에 영적 실제를 교회에 공급할 수 있다(林榮洪, 1985:278-279).
영적 신학(屬靈神學)은 동시에 ‘영적인 사람의 신학’이다. 니토셩의 사역의 목표는 더 많은 영적인 사람을 키우고 훈련시켜서 여러 지역에 영적 단체 즉,「지방교회」를 세우는데 있다.「지방교회」를 세우는 것이 말세에 영적인 사람을 향한 유일한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은 곧 각 지역의 원칙에 따라 ‘순종’과 ‘권세’의 구호를 가지고 일체의 전통적 교파주의 행동을 버리고 진실한 영적 연합을 이룩하는 것으로 지방교회의 모델은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이다(林榮洪, 1985:279).
그는 사람을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간론은 그의 신학 전체의 기초며 출발점이다.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살전 5:23, 히 4:12, 고전 2:14, 아3:15 등)을 엮어서 영과 혼과 육의 본질과 그 기능을 주장하고 있다.
영과 혼과 육은 본질과 기능에 있어서 서로 다른데, 영의 활동은 직관과 교통, 양심과 관련이 있으며 혼의 활동은 감정(情)과 생각(知)과 의지(義)와 관련이 있고, 육체는 인간의 외면 즉, 현상의 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그의 삼분설적 인간론은 당시 유행하던 신학적인 관점과 성경의 어떤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여자적 해석(고전적 세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하는데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인간론은 이론적으로도 성경내용과는 다르며 실현하기 불가능한 내용을 가르치는 이론이다. 그는 동질상통의 원칙을 고수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할 때 오직 인간의 영 안에서만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영과 혼과 육은 서로 그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영 혼 육의 순서의 가치) 하나님은 인간의 혼과 육체와 접촉하실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의 주장과는 다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성부분 가운데서 영의 영역에서만 역사 하신다고 가르치는 곳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론은 삼분설이나 이분설이 아닌 총체론(일체론)이다.
성경은 심리학서적이 아니며 인간자체의 구성을 분석해 놓지 않았다. 성경에 나타나는 영 혼 육의 표현들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면들을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각각은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그것이 종교적인 면(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나 사회성(사람과 사람의 관계), 심리성(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물리성(사람과 자연의 관계)이든지 모두 전인적인 관계이다. 즉, 종교적인 면과 관계된 것을 예를 들면, 성경의 어떤 구절에 영 혼 육 가운데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나의 육체가 주께 범죄하여”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그것은 ‘나’ 라는 인간 전체 즉, 육체만 범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육체’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육체의 활동의 면을 통해서 전체 인간이 범죄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적 생명과 관계된 두 가지 과제에서 첫째로, “영과 혼은 꼭 나뉘어야 한다는 것과, 영력과 혼력은 꼭 구별해야 하며 성도들은 영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둘째로, “혼의 구원은 영의 구원과는 다르다. 영과 혼을 분리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도에 의지해서 되어지는 일(히4:12)인데,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혼의 껍질을 부수뜨리고 영이 해방되게 된다” 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성경해석상으로도 받아들이기 곤란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다루기 힘든 일이다. 만약 어느 성도가 실제로 이런 교훈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분석적인 상황 속에서 그것이 혼에서 나왔는지 영에서 나왔는지를 항상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니토셩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주관성이 있는 계시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관적 경험은 객관적 표준이 따로 있을 때 그것을 표준으로 진위여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게된다. 그가 말하는 성경의 ‘영적의미’(聖經的靈意)는 일종의 주관적 체험일 뿐이다.
구원에 대해서는 예수를 믿고 죄에서 승리하면 곧 천국에 들어가는 ‘영의 구원’과 ‘혼을 제거해 버리고 혼을 이기는 ’혼의 구원‘의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혼의 구원’은 말일에 있을 상벌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인간론에 근거해 볼 때, 혼 자체가 하나의 독립개체이므로 니토셩 자신의 성경해석법에 의하면 ‘혼을 잃어버린다’든지 ‘혼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 일종의 여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영과 혼을 연관시키는 두 가지 구원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의 ‘讀經之法’과 ‘讀經之人’, ‘以靈讀經’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가르치는 성경 읽기와 해석의 원리는 상당히 위험한데 그 이유는 문자보다 영적 의미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무엇을 실제로 더 중요하게 볼 수 있으며, 그가 소위 말하는 亮光과 私意의 구분이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과 성령, 성도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어느 하나도 빠지게 되면 구성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이고, 성령은 오늘날 성경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다.”고 하였다.
삼원론에 근거한 일관된 그의 주장은 사역론이나 기독론 등 대부분에서 지나치게 영해적인 삼원론적 논리로 인해 비성경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지방교회관 역시 성경해석학이나 실천적인 면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다. 오늘날 중국교회 특히, 가정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니토셩 자체는 이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그의 가르침에 나타난 많은 부분이 성경해석상 문제가 많고 극단적인 요소가 적지 않기 때문에(즉 조금 더 나아가면 이단적 교리를 가르칠 위험을 보이는 여지가 있어서) 그의 후계자들 중에서 잘못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이미 중국교회 특히, 가정교회에 대부분 퍼져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심사숙고하여 다루어야 한다(林榮洪, 1985:278-300).
3. 찡디엔잉(경존영)
찡딩엔잉은 1926년 산동성에서「예수가정」의 독립교회 일파를 설립하였다. 1900년대 초 중국 산동성을 방문한 두 명의 여성 선교사(노라 딜렌백과 릴리안 브리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외부의 원조를 받지 않고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현재는 그들이 운영하던 공동체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 그 영향은 조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예수가정」은 찡디엔잉을 가장으로 하여 교회에 가입한 회원들을 한 가족으로 여겨 공동생활과 공동생산을 하였다. 외국 선교부로부터 일체의 원조를 거절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원칙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농촌지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발전해 갔다.
사유재산은 없고 육신적 혈연관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약혼과 결혼은 반드시 찡디엔잉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결혼한 후에도 동거는 허용되지 않았다. 자녀양육은 공동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친부모의 자녀에 대한 특별한 애정표현이 필요 없었으며, 자녀들 역시 부모에 대한 감정이 깊지 않아 자연적 혈연적 가정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 공동체생활을 통해 천국의 이상사회를 이 땅에서 실현해 보려는 비현실적 이상을 추구하였다.
4. 쑹상지에(송상절)
존 스토트 박사는 레슬리 라이얼이 쓴 쑹상지에의 전기(傳記) 서문에서 ‘헌신된 사람, 능력의 소재를 알고있던 사람, 진실한 사람, 교회를 통해서 일한 사람’으로 그를 묘사하였다. 그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물론 그는 신학자나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복음전도자이며 중국에 대대적인 부흥의 물결을 일으킨 시대적인 일꾼으로서 복음주의적 경건주의 신앙사상과 구령의 열정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니토셩과 같은 사상가는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15년 간 중국 국내와 동남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중국 사회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다.
우리는 그의 위대한 사역에 나타나는 사역자의 모습과 사역의 비결 등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미 그에 대해 죤 스토트 박사가 그에 대해 표현한 것 외에 레슬리 라이얼(1974:215-217)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세련되진 않았지만 두려움이나 편중성이 없이 대중에게 선포된 메시지였다...그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본문 해석적이었고 성경적이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성에서 이탈한자를 맹렬히 공격하였다...그는 오늘날의 중국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이었다...그는 또한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일분도 허비하는 일이 없었고 여행중이나 전도를 할 때나 잠시 여유라도 생기면 책을 보고 공부하며 연구하며 글을 썼다. 마치 자기 날이 개수된 사람처럼 일했다...그는 자기 선전에 신경 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았으며 청중을 매혹하는 불과 같은 정열의 사람이었다...그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단점이 많았고 개성도 상당히 강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피상적 단점이나 개성을 가진 체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