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의 원인과 그 배경
한 때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중동에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지난해 9월 13일 미국 백악관에서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의장이 평화협정을 맺고 여리고,가자지구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올해 7월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46년에 걸친 숙적관계를 청산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중동평화 정착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이제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시리아와 본격적인 평화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에 얽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이 하나 둘 풀어지면서 화해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는 중에도 중동의 한 끝에서는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란 하나님의 성회 소속 후세인 수만드목사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다른 무슬림들을 유혹하고 교회에서 집회를 가지며 기독교서점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데 이어 지난에는 1월 같은 교단의 총회장 하이크 홉세피안 목사가 실종된 지 하루만에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차츰 늘어나고 있는 이란내 기독교세력을 억제하고 국제적인 압력을 동원해 이슬람권의 박해를 약화시키려는 이란 기독교계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그는 활발한 목회활동과 대외활동 때문에 이란 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아왔는데 지난해 정부가 이슬람교로부터의 개종을 막기위해 전국 이란교회에 대해 더 이상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현교인들의 신분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조치를 내렸으나 이에 대해 반발하여 서명을 거부하고 교인들의 신분증명서도 제출하지 않았었다. 또 이란정부가 복음주의 교회를 폐쇄하고 교인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집어넣는등 개신교에 대해 박해를 가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유엔에 보내 국제적인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고, 개종혐의로 10년간 복역해 온 메디 디바지장로가 지난해 12월 3일 이슬람혁명재판소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자 국제적인 구명운동을 펼쳤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진 지 6개월 후 같은 교단의 미카일리안 목사가 머리와 가슴 부분에 각각 한발의 총탄을 맞고 살해되었고, 이어서 개종혐의로 10년간 복역하다가 석방된 바 있는 디바지 장로 역시 실종된 후 테헤란공원에서 옷이 벗겨진 채 피살체로 발견되어 또 다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박해는 비단 이란에서, 그리고 성직자들에게만 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초에 이집트에서 바디 압둘라라는 기독교인이 대낮에 거리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지난 4월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기독교인 3명이 총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회교도 신성모독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재판도중 회교도 광신자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부 파수루안에 있는 3개의 교회건물이 이슬람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리야드 인근에 있는 카라지 의 한 필리핀人교회를 종교경찰이 불시에 습격하여 2명의 목회자들을 체포, 불법적인 조직을 구성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에 처했으며, 이집트의 아슈트에서는 13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가게나 상점들이 수십 채 불타 버렸다. 이집트 하난이란 곳에서 마을 촌장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이슬람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같은 마을의 기독교인 약사 2명이 약국에서 일하던 중 무슬림들이 던진 수제 폭발물에 의해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한쪽에서는 전통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져왔던 국가들간에 평화협정을 진행시키기 위한 급속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재산과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받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진리라고 믿는 것들 중에 많은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왜 이런 심각한 박해가 벌어지고 있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산권의 붕괴 이후 이슬람권이 주요 선교지요 우리가 가야 할 ‘땅끝’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왜 이러한 박해가 일어나고, 점차 심해지고 있는지 그 배경과 원인을 밝혀보고자 한다.
1.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관계
기독교와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서로에 향한 태도와 인상이 관계를 변화시키거나 개선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역사의 순서를 바탕으로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 역사에 있어서의 관계
어떤 무슬림들이건 간에 처음으로 그들을 알게 되고, 어떤 형태이든지 그들과 관계를 가졌던 기독교인들은 7세기 초에 메카, 메디나,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의 중앙 주변에 살고 있던 소수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거기에는 나즈란(Najran,현재 북예멘지역)과 알-히라(al-Hirah,현재 이라크지역)라는 두 개의 기독교인 중심지가 있었다. 그들은 시리아정교회(Jacobite)와 네스토리아안 교회에 속해 있었고, 후에 일부는 무함마드에게 항복하고 세금을 내면서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었고, 일부는 개종하였으며,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과 싸웠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함마드 시대에 이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까친 영향은 비교적 적은 것이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와 다마스커스를 오가며 대상을 이끌고 여행을 할 때 기독교 수도사들과 접촉했을 것으로 본다.
무함마드가 예언자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로서 다스리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통치 아래 있던 기독교인들을 거룩한 책들을 계시한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인정하고 보호해 주었다. 632년 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들이 빠르게 주변 영토를 정복하여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비옥한 초생달’ 지역까지 확장시켰고, 비잔틴 제국의 억압과 독재 속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정복자들의 통치 아래서 사는 것을 받아들였다. 무슬림들은 처음부터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을 다른 곳에서 정복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였다. 항복하고 세금을 내는데 동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이슬람의 법을 따라 보호하였다.
2) 십자군 전쟁과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에게 대부분의 서구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서구의 대중들은 십자군 기사들의 공적에 대해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미사여구를 가지고 표현하지만, 동방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에게는 십자군들에 의한 학살과 파괴에 대한 기억으로 인한 오래된 쓴 감정과 거리감, 의구심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전투적인 모험이 발생하게 된 동기에는 성지 이스라엘을 탈환하는 것 외에도 여러 다양한 상업적인 이해관계들, 유럽의 신생국들 간의 경쟁관계들, 그리고 모든 기독교 세계를 로마 교황의 기발 아래로 재통합하려는 욕망등이 포함되어 있다. 십자군 전쟁은 7,8세기 이슬람의 침입에 대한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인들이 보인 첫번째 주요 반응이었는데, 전쟁을 통하여 무슬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까지 학살해 버렸다.
십자군 전쟁과는 대조적으로 중세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클루니 수도원장이었던 피터(Peter, the Venerable 1094-1157)는 십자군의 자극에 의하여 유럽에서 돌고 있던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에 관한 터무니 없는 거짓말과 중상모략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슬람에 관한 무지를 해결하기 위하여 코란과 이슬람의 전통들, 그리고 몇 개의 표준아랍기독교변증서들을 번역하기 위한 연구계획을 제안하였다. 피터의 번역서들과 그의 이슬람 신앙에 대한 이해는 거의 오백 년 동안 유럽인들의 이슬람에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Raymond Null과 같은 다른 유럽의 학자들도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 시대에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었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접근하였다. 17세기 초반에 약 3백만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당했거나 죽음을 당했던 일은 그 분위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편 이 시기에 몽골의 유목민들이 중국을 거쳐 동부 유럽에까지, 페르시아를 거쳐 아랍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지나 이집트국경에 이르는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 유목민 집단은 대부분의 이슬람 문명을 황폐화시켰고, 불가불 십자군의 정치적 상황과 기독교와 무슬림 지도자들간의 경쟁관계에까지 끼여들게 되었다. 마침내 몽골이 무슬림이 되었고,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들은 쇄퇴하게 되었으며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3) 십자군 이후 근대에 있어서 관계
오토만 제국의 성장에 의해 그리스 기독교인들은 점차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그 세력을 후퇴하게 되었다. 오스만의 지도 아래 이슬람은 이교도인 비잔틴 제국을 계속적으로 침략했으며, 비잔틴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우회하여 발칸반도를 침략하므로 유럽에 압력을 가했다. 1453년 마침내 Mehmet 2세가 수도를 정복하고 이곳을 이스탄불라고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서 오토만 터키는 유럽의 관문인 비엔나까지, 페르시아에서 북아프리카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이슬람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으면서 서구의 대중들은 이슬람을 반기독교적인 전투적인 폭력운동으로 보게 되었다.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유럽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슬람을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무서운 적으로 보았다.
칼빈이나 낙스 같은 초기의 개혁자들은 주로 유럽에 있는 로마교회에 대한 복음화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였지 본질적으로 세계의 다른 뿐에 대한 선교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탐험과 식민지 시대 동안에 유럽의 개신교인들과 카톨릭 신자들이 상인이나 군인으로써 뿐 아니라 선교사로서 세계 전체를 여행하였다. 유럽인들이 인디아와 아시아로부터 향료와 비단을 실어 나르기 위한 대안적인 무역로를 개척할 때 그들은 무슬림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육상무역로를 우회하여 아프리카, 인디아, 동남아시아, 북,남미의 해안을 따라서 항구를 개발하였다.
18세기에 소수의 개신교 개척선교사들이 유럽으로부터 인디아와 다른 지역에 도달하였었지만 현대 선교의 성장은 19세기 초반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영향 또한 19세기와 20세기 전반 서구 12개국 이상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이슬람이 우세한 지역들에서 세력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서구의 식민통치는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져왔다. 사실 무슬림들이 수 세기 동안 십자군으로부터 몽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전을 받아왔지만 서구문명의 거센 흐름처럼 심각하게 이슬람 생활의 핵심에 도전을 가해왔던 것은 없었다. 이슬람법에 의한 전통적인 삶의 양식인 보수적인 이슬람과 중세시대에 이룩한 찬란한 이슬람 문화는 패배와 복종이라는 새로운 입장에서 20세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무슬림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어려운 것이었다: 세속적인 접근방식을 취하여서 승리에 찬 유럽인들과 경쟁을 하든지 혹은 서구문명, 기독교와 기타 다른 것들과 화해하기 위해서 이슬람을 개혁하든지!
2.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원인들
두 종교 사이에 관계를 맺어왔던 역사적인 흐름은 현재에 박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이슬람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박해의 이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교리적인 이유
무슬림들에게 코란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코란은 마지막 예언자로서 무함마드가 신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로 이전의 모든 계시를 완성시킨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코란의 내용과 가르침은 이전의 모든 경전들과 예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에게 통해 준 신의 계시인 수흐프(Suhuf), 모세에게 준 토라(Torah), 다윗에게 준 자부르(Zaboor), 예수를 통해 준 인질(Injeel), 마지막으로 무함마드에게 준 코란(Quran) 등 다섯 가지 책을 신이 주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마지막 계시인 코란이 주어지게 된 이유를 토라라는 구약성경과 인질이라는 신약성경이 변질되고 삭제,첨가된 부분들이 있어서 원작품의 상태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무슬림들은 <바나바의 복음>을 사용한다. 이 책은 13세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이 이슬람의 예수를 합리화하기 위해 씌여진 것으로 보는데 무슬림들에게는 이것이 경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책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 예수는 무함마드의 출현을 예언했다, 복음서는 예수에게 주어졌으나 애당초 예수에게 준 성경과는 다르다 등 가르치는 내용이 신약성경과 상반된다. 이처럼 코란에 절대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이슬람은 성경은 왜곡되고 변질된 것으로 취급하여 성경의 여러 가지 진리를 거부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삼위일체를 해석하기를 하나님, 마리아, 예수라고 보고 성령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코란 4:171에서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 하니 이는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코란은 기독교를 세 神을 모시는 다신교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의 알라가 진짜 하나님이요 성경의 하나님은 진짜가 아니라며 성경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요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분개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무슬림들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을 무시한다. 하나님은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기 때문에(코란112:3) 알라가 아들을 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코란19:35) 하나님이 메시아와 동일시되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대해 전적으로 터무니 없는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보고, 예수에 대해 하나의 예언자로서 비교적 높은 차원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구세주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와 함께 예수는 무함마드의 출현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왔다고 주장하며, 요한복음14:16, 15:26-27, 16:7의 보혜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원래는 예수가 ‘찬양받을 자’인 무함마드의 출현을 예언한 것인 데 복음 전승자들이 고의적으로 ‘성령’이란 단어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코란4:158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았으나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라고 하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정한다. 이유는 알라가 그가 보낸 예언자를 십자가상에서 죽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고, 또 사람들의 죄를 대속키 위해 죽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불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성과 주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무슬림들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기독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독교를 따르고, 그 도리를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적대시하는 것이다.
2) 역사적인 이유들
먼저, 무함마드의 생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무함마드 당시 아라비아반도에는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매우 강하고 영향력있는 종족들도 있었는데 올바른 경전을 가지 못하고 전설과 신화가 섞인 일종의 외경을 믿고 있었다. 대상무역에 종사했던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콜리리디안파와 같은 이단자들도 끼어있었다. 그는 유대인들과 접촉을 통해서 우주와 인류의 창조자이신 진실하고 탁월한 유일신의 존재에 관한 신앙을 얻게 되었고, 기독교로부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신의 배려와 자비에 관한 신앙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메디나로 이주하여 살 때 주민의 70%가 유대인들이었던 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그는 유대교리와 관습들의 일부를 받아들였고, 유대인들도 호의적으로 그를 대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차츰 자신이 알라가 보낸 예언자이고,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한 언급 내용이 부정확하자 그를 사기꾼이요 이단으로 몰기 시작하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에게 분개하여 자신이 설명했던 구약의 사건들의 내용이 구약과 일치하지 않을 때 역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 임의대로 改惡 내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의 비난이 고조되자 그는 유대 종족들에 대한 추방 혹은 대학살을 단행했고, 그가 초기에 따랐던 유대교의 관습을 아랍식으로 수정하여 아랍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코란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코란10:29은 “신과 최후의 날을 믿지 않는 자들, 신과 신의 사도가 금하신 것을 금하지 않는 자들, 비록 성경의 추종자라 하더라도 진리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과 그들이 복종할 의지를 갖고 또 스스로 정복을 감수하여 인두세(jizya)를 낼 때까지 싸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무슬림들의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비무슬림 세계에 대한 유일하고 적절한 관계는 영구적 전쟁으로 모든 비무슬림들이 개종하든가, 굴욕적으로 공물을 바치게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무슬림들은 개종을 하든가, 정복되는가, 아니면 죽음을 당해야 한다.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이슬람의 보편주의가 聖戰(jihad)을 공동체에 부과하는 특별한 의무로 간주하고 무슬림 공동체에서 성전은 무슬림의 보편적 포교 사명과 모든 사람을 설득으로든 강제로든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야 할 책임 때문에 그것은 종교적 의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비무슬림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가 그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어지며, 더우기 선교적일 때에는 더욱 강하게 대응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는 십자군 전쟁이다.
Laurence Brown은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고 지구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 이미 십자군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이슬람에 대한 생각은 적대적인 것으로 개종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칼로써 왕국을 재건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무슬림들은 마치 7,8세기의 모습을 재연시키는 듯 줄기찬 정복을 계속하여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에게해 연안까지 침입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수중에 넣었고 이집트 국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동방제국의 변화된 상황은 이스라엘을 향한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어려움을 겪고 돌아온 순례자들은 성지에서 겪은 참담한 현실을 증언하였고, 결국 많은 이들에게 성지 이스라엘로부터 이러한 신성모독을 제거하려는 열정에 불타게 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 중에 십자군들은 각종 전염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등 처참한 댓가를 치러야 했지만 무슬림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특히 예루살렘에서는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학살해 버렸다. 한 예로 성전 근처에서는 피가 무릎에까지 차 올랐다고 한다. 이러한 학살극은 일반 세속 역사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든 것이다. 1095년 영광스럽게 시작되었던 십자군 원정은 2세기 후 1291년에 원래의 목적을 위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시리아와 필레스타인에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무슬림의 초생달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인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남겨주고 말았다.
세째는 제국주의이다.
19세기에 눈부신 지리적 확장이 있었는 데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주의와 경제적 제국주의의 기틀 아래서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술이 발달하고 공업생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옴에 따라 거대한 자본과 보다 넓은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동안 유럽 지역들이 필요한 시장을 제공했지만 제국주의자들은 또 다른 시장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마련하였다. 결국 새로운 공업과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시장 뿐 아니라 원자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토지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다. 이러한 탐욕은 식민지주의로 이끌었으며 군사 점령과 정치적 점령을 가져오게 하였다.
당시 서구 세계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들이었는데 일부는 식민지 확장이나 식민지화된 현지의 주민들에 대한 착취에 반대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백인들에게 서구 문명과 기독교 신앙을 맡기셨기 때문에 세계의 나머지 인류와 이를 공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이 식민지에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이 가진 인종적, 문화적 자만심은 식민지의 현지인들의 농토를 빼앗았고,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였는 데, 20세기 중반에 반식민지적 반동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이러한 상황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식민지주의와 선교 사이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선교사들을 식민지주의의 앞잡이로 매도하게 되었고,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은 이 사실을 크게 부각시켜 이용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이 식민 통치를 경험했던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공통적인 것이다. 그들은 서구 세계를 생각하면 먼저 기독교를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들 속에 자리잡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흥
무슬림 사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 이슬람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서구적인 개념과 협의의 종교적인 신앙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그 사회에서는 이슬람이 사회질서이며 인생철학이고, 경제원리이며 동시에 통치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슬람이 탄생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전들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위대한 이슬람 누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혁기적으로 발전된 서구의 과학, 기술, 사상 체계와 만나게 된 이슬람 세계는 전에 없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예기치 못했던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슬림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근대 이전의 이슬람의 核이었던-현재도 그렇지만-이슬람법의 재검토와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무슬림들은 한편으로 유럽을 표준으로 하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슬람의 병폐는 진정한 이슬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유럽 문명을 거부하고 진정한 이슬람으로 복귀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반된 두 개의 흐름은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본주의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아랍에서도 서구의 자유주의 가지관을 수용해 이슬람 세계도 근대화해야 한다는 조화론이 성행했으나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간섭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 생활 수준의 향상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조화론의 기반이 약해졌다. 그러므로 ‘과거 이슬람’ 또는 ‘아랍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면서 마침내 아랍 민족주의를 대신하여 근본주의가 정치적인 힘을 입고 등장하게 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신념체계를 추구하면서 종교적인 정통주의의복고를 지지하거나 과거에 자신들을 지탱해 준 낡은 가치로의 복귀를 지지한다. 과거에 화려했던 이슬람 문화에 대한 동경, 기독교인들의 강대함, 무슬림들의 상대적인 무력함에 대한 분노, 역사의 現 흐름에 대한 불만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세력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근본주의는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각국의 근본주의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렇게 근본주의가 이슬람 세계에서 세력을 얻게 되자 자연스럽게 서구에 대한 반감이 증대하게 되었고 서구 침략의 앞잡이처럼 인식되버린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박해가 심해지게 되었다. 근본주의는 당분간 그 영향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이 큰 제한을 받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4) 영적인 전쟁
이것은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가 ‘진리’인가? 그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영으로부터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다.
코란은 80% 정도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고 있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를 역사적인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들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코란은 동정녀 탄생은 말하지만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를 그보다 위대한 기적을 행한 뛰어난 선지자요 훌륭한 인격자로 경의를 표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神性을 부인했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은 코란이라는 어두운 유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 진정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이 무슬림들에게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잡게 되어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볼 때 무함마드가, 코란이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계시를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더우기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신앙을 실천하는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어느 곳을 가든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들의 신앙표현의 형식이 의미하는 내용은 정통 이슬람과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대중적인 이슬람은 정령숭배자의 신앙과 의식에 의한 총체적인 삶의 방편을 내포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성서공회의 한 사역자는 이슬람 국가에서 수 년 동안 사역한 결과 이슬람교의 능력은 교리나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분의 구속의 죽음에 대한 반대에서 오는 것이 이니었고, 단지 무슬림들을 사로잡고 있는 지도자들의 마술적인 능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슬람교는 코란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기 때문에 신학적, 원리적, 신앙적인 공동체성을 띤다고 주장할 지 모르나 이슬람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여러가지 사상들과 의식들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외부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이슬람법이 대중들을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의 생활 속에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영적 세력들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코란의 진리 자체가 가진 능력보다는 그 책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영적인 능력 때문에 대중들이 코란을 신성시 한다. 삶에서 갖게 되는 두려움을 해결해 줄 준재를 자신들의 기본적인 토착신앙의 배경 아래서 이슬람이라는 이름 이래 찾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슬람은 분명히 기독교와는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고, 기독교와는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글을 맺으며
이상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배경과 원인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슬람교만큼 기독교와 가까운 종교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교 만큼 기독교와 적대적이고 먼 종교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에 들어와서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선교에 대한 제한이 증가하고 있으며, 박해 또한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꿰뚫고 참 복음을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이슬람 세계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박해의 심각성이나 논하고 두려워하고만 있다면 이는 박해받는 형제들을 위하여나 선교를 위하여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편견과 오해와 왜곡된 상황을 어떻게 제거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줄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더 절실하다. 박해에 대해 우리가 ‘두려움’울 가지고 한 발을 슬그머니 빼놓고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자세를 가지고 무슬림들을 바라본다면 결국 우리를 반대하는 영적인 세력의 전략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 세계 內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인 압력과 소외감과 더불어 박해를 통한 두려움까지 겪으면서 주위 세계의 기독교인들로부터의 적극적인 격려와 선교적인 동참이 없다면 과연 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동질감을 가질 수 있을까 또 ‘인내하라’,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왔다’ 등등 말만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려 한다면 과연 그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러므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중보기도에 동참하며,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파송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슬람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비전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슬람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10억의 신자를 가진 세계 종교의 하나이며, 동시에 아랍인들의 문화이고, 경제원리이고, 정치원리이다. 따라서 이슬람법을 모르고서, 코란을 모르고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무지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 놓고서 그들의 하는 반응에만 민감하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금기사항은 어떤 것이고, 아랍사회의 기본적인 예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복음만 전해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이슬람 세계에 발을 디뎠다가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올바른 영성과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무슬림들은 지금도 기독교를 서구인들의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종교로 왜곡된 진리를 따르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는 기독교인들과 사역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진리가 참 진리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역사 속에서 잘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수용하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참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박해란 그들의 신앙을 더욱 튼튼히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성숙한 신앙을 불러 일으켜 준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자들로서 스스로를인식할 수 있도록, 그들이 믿는 진리가 참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도록 박해의 어려움 속에 있는 이슬람 세계의 형제,자매들을 격려하고 그 고난을 함께 나눌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이슬람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슬람선교, 이슬람 문화와 신앙 이해가 꼭 필요 (김정한) (0) | 2012.09.02 |
---|---|
[스크랩] 이슬람의 이해-경전 : 코란 (0) | 2012.09.01 |
[스크랩]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이슬람의 알라와 달라” (0) | 2012.08.06 |
[스크랩]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구원관 비교연구 (정선숙) (0) | 2012.08.06 |
[스크랩]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이해 (0) | 201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