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정의와 현장적용 (조용중)

수호천사1 2012. 8. 2. 11:02

선교정의와 현장적용

조용중 선교사(GP연구개발원장)

 

 

지난 해 ‘한국교회 선교정의 심포지엄’은 한국교회 안에 선교에 대한 원론적인 의견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보다는 오히려 동질성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더욱이 현장의 선교사역으로 가면 거의 대동소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선교정의에 대한 합일된 이해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론적인 것보다는 실천에 강조점을 두고, 결과론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중시하는 교회와 선교사들의 일반적 특성이 그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선교의 현장에서 가끔 들리는 불협화음은 선교정의에 대한 원론적 이해에 대하여 재고하여 보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가진 복음적 토양과 미래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발굴하여 나간다면 더욱 좋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올바른 선교정의가 선교동원, 선교훈련, 선교전략과 선교자세의 차원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현실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선교동원의 차원

 

교회의 역할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는 선교를 위해 누가 동원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게 한다. 현장의 선교사들에게나 지역교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선교사들은 선교를 하고 교회는 후원을 하는 관망자로서의 자세이다. 그러나 선교의 주체체가 하나님이시고 그 사명을 맡은 주관자가 구원공동체인 교회라고 할 때에 교회, 특히 지역교회가 감당해야 할 부분은 현재의 역할보다 훨씬 커져야 할 것이다. 지역교회는 선교를 하나의 부서로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활동을 선교를 중심으로 계획하고 운영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선교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담선교사들이 담당했던 선교를 공동체로서 담당하게 하고, 나타날 수 있는 지역적 한계와 전문성 결여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선교조직을 만들어 감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재정의 사용에 있어서 선교에 우선권을 두고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현 상황은 교회가 거의 선교재정을 과시적으로 사용하거나 구색 맞추기 위해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모든 재정 사용에 있어서 예산을 세울 때에 선교비가 어떤 비율로 책정이 되는지 살펴보고 선교비를 우선적으로 책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출에 있어서도 그 어떤 용도보다도 우선권을 두고 집행하여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 가운데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버리고 떠난 사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교회가 선교비를 중단하는 사태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다.

  

평신도의 역할

 

교회는 모달리티(목회구조)와 소달리티(파송구조)의 창의적 구조 안에서 특히 평신도들을 이끌어내 파송 구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직까지도 평신도들의 선교참여는 목회사역자들의 보조적인 지원역할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면 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인 것이다. 선교조직 안에서 목회자출신과 평신도출신의 특별한 역할 구분은 있을 수 있겠으나 신분의 고하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선교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출신의 선교사와 평신도 전문인출신의 선교사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살려 총체적 선교를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평신도가 자신있게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목회자출신 역시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존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서로가 교회를 세워가는데 필요한 지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신도 자원 개발에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선교자원 발굴의 차원

 

선교자원의 발굴은 특히 모든 교회의 자원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자원제도는 철저한 검증을 통하여 전문선교사로 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원제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며 선교사 발굴이 징병제도와 같이 좋은 자원을 미리 발굴하여 훈련시키고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들을 투입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선교는 잉여자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자원을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선교훈련의 차원

 

선교사 훈련의 내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핵심적인 복음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해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이 있고, 다른 차원의 돌봄이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복음제시와 제자훈련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다. 어떤 일보다도 복음으로 변화된 자신의 확신있는 태도는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양태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훈련의 가장 기초가 되는 복음에 대해 머리로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복음의 확고부동한 삶의 변화를 가장 기초로 하여야 할 것이다.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할 때에 어떤 교회를 설립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교회론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존재 형태와 목적이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적이라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필리핀 마닐라 동부지역에 한 예배당을 헌당할 때였다. 한국에서 후원하던 교회에서 약 30여 명의 사절단(?)이 축제를 위해 참석하였다. 건축비보다 더 많은 비행기 값을 치루고 온 것이다. 그보다 더 한 것은 교회의 이름이었다. 원래 교회의 이름은 필리핀식의 이름이었으나, 파송교회에서 본교회 이름을 고집한 것이다. 그 이유로 마닐라의 동쪽에 자리잡은 교회에 서쪽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선교사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한글로 그 현판을 달고 방문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돌아간 다음에 떼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서울에 “뉴욕교회”가, 부산에 “시드니교회”가 오늘날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개탄할 일이겠는가? 그러나 버젓이 한국이름의 교회가 세계 곳곳에 세워지는 데 인식조차 없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관의 현실인 것이다. 이는 잘못된 지역교회 선교 열심이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개교회의 영향력 확대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바뀔 수 있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비판을 하는 미국교회는 오늘날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교회나 새들백교회가 “리더십세미나”나 “목적이 이끄는 세미나”등을 개최할지언정 그들의 이름을 세계 어디에도 분점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이 깊이 새겨야 한다.

선교현지에서 개척된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미리부터 계획하고 현지인 리더십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재정의존도를 최소한으로 낮추고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성경정신을 배워가는 세계적 교회로 세워지도록 도우며, 자신들이 선교의 주체가 되는 교회로 세워져 가는 꿈을 처음부터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전도된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과 나아가 세계의 장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함으로 단순히 구원의 방주로 끌어들이는 “오라”가 아닌 “가라”로의 패러다임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신이 자신의 사역지와 사역에만 몰입되어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을 멀리 바라보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선교는 어떤 한 단체나 교단이 끝낼 수 없는 우주적 교회에 주신 사명이기에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선교의 모든 세력들과 활발한 협력을 통하여 동역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상 유례없는 교단의 발전을 이루어온 교회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와 감리교와 오순절교회가 있고, 교단이 활발하게 발전되어 온 교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이 교파주의로 선교지로 수출이 된다면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올 것은 명약관화하다.


선교지 현지에나 근처에는 대부분 이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있고 관련을 가지고 있는 다른 단체들이 있다. 이들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한국식의 신앙전통과 교회를 세워간다면 분명 많은 반발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다. 중국교회의 대표적인 가정교회 지도자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중국교회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한국교회를 세우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 진정한 선교는 현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그들이 진정 우리교회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가 서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선교전략의 차원

 

선교가 단순한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이원론에서 벗어나 통합적인 정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우선권을 분명히 한다면 복음주의적 해석이나 에큐메니칼 해석의 합의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명령은 문화명령을 포함하고 있지만 문화명령을 수행한다고 선교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활동이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안타깝게 세상을 보시며 행하셨던 모든 일은 선교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제자들에게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의 목적과 방법으로 선교를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전 세계의 위급한 상황에 구호를 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인류애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선교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광의적인 선교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하는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고의 사랑이 전해지기 위해 복음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한 선교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북부 수마트라에 불어 닥친 쓰나미는 전 세계의 국가들과 NGO 들을 불러들였다. 많은 국가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고, 대형 국제적 NGO 단체들이 참여하여 구호활동을 하였다. 이 때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단체들이 기독교 단체들이었다. 피해를 입은 현지인들은 99%가 무슬림이지만 이슬람 국가보다도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후에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에 현지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끼리만 살수 없다는 것을 느꼈으며 기독교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들이 쉽게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단체들은 단순히 구호의 현장에 물건을 풀어놓고 떠났지만 장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돕게 될 때에 열매가 조금씩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구호행위가 복음을 직접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반발을 받게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의 정신으로 나아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의 전파에 있고, 상황에 따라 복음을 직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어야 효과적인 선교가 될 것이다.

선교의 현장에서는 믿는 자들의 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수 있겠으나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 실현과 세상 왕국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끊임없는 갈등구조는 마지막 주님의 영원한 통치가 있을 때까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쓰나미의 현장에서도 조직적으로 선교적 구호활동 금지와 방해가 활발하게 일어났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전도를 하기 위해 대립하기보다는 더욱 부드럽게 사랑을 보이며 지속적인 관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녹일 필요가 있다. 물론 영적인 싸움이 근본적인 것이지만 그 지역의 영계를 정복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두드러진 외형적, 과시적 형태의 일을 시도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을 보여줄 수 있으며 접촉할 수 있는 의료팀 방문 등을 통해 영적 기상도를 바꾸어 가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선교적 환경의 지속적인 변화는 창의적인 선교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사고만을 고집하여서는 변화에 대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대를 향하여 그들의 언어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창의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교의 끊임없는 도전은 우리가 그 영역을 더 넓혀가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한다면 현재 잊혀지거나 소외된 영역에서까지 개척 정신으로 선교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지역개념을 뛰어넘어 종족개념으로 보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교의 범위를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모든 삶 자체가 선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선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임을 자각하고 선교영역의 재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랄프윈터는 AIDS나 암세포와 싸우는 의학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교회가 돌보아야 할 선교의 전방개척영역이라고 지적하였다. 현재 AIDS나 불치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교회보다 비기독교인들이 더 앞장서서 일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교회는 다양한 분야의 전방개척영역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선교명령을 수행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선교자세의 차원

 

선교의 바른 정의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갈 것인가는 한국선교가 깊이 생각해야 할 현실이다. 선교가 단순한 복음의 내용 선포만이 아니라면 선교사는 삶에서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인이어야 한다. 복음이 어떻게 선교사 개인과 가정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비복음적인 삶과 복음적인 삶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오는지를 삶의 구석 구석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선교사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서구선교사들보다는 현지인들과의 관계를 용이하게 가진다는 것이다. 태국의 대표적인 교회의 목회자는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일본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일본선교사로부터 삶을 배웠고,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사역을 배웠다는 표현을 하였다. 그는 두 가지 다 자신을 지도자로 세워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간증하였다. 다른 목회자는 한국선교사들과의 사이에서 양육 받은 좋은 사례를 들었다. 이렇게 선교사의 삶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국선교사의 삶은 곧 복음의 실험장이요 증언대인 것이다.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는지, 어떻게 삶과 사역의 경계에서 행동하는지, 어떻게 경제생활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모든 부분에서 마땅히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 받은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

복음으로 하나된 화합의 모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사역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원리적인 면에서 한 길을 가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일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선교사들끼리 화합하지 못하고 싸우는 모습이 현지인의 눈에는 부모가 싸우면서 자녀들에게 서로 나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언급은 우리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민족교회와 선교사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화합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면, 다른 민족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손을 내미는 것은 위선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한 외형적 일치를 이룰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르지만 한 목표를 가지고 화합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보게 될 것이다.

현지인들을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대해야 할 것이다. 현지인들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의 기대만큼 커야 할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 동역자들을 자기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대한다고 보이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상하게 만든다. 현지인의 지도력을 세우는 일도 단순히 내 할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전락한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현지인들이 선교사의 기대만큼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믿으며 리더십을 인정하게 될 때에 진정한 지도자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피선교국의 차등적인 보조자가 아니라 선교적 교회의 주체자로서 우리와 함께 동역의 길을 가는 동반자로 대하며 일할 때에 거기에 부응하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선교사가 갔다는 것을 기억하며 선교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잘 하려고 한다 해도 선교사들은 종종 현지인들과 관계에서 피해자가 되어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법적 투쟁을 벌이는 것은 옳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재산권을 둘러싼 다툼일 경우 현지인들 사이를 중재해서 화해를 하게하고, 선교사들과의 사이에서는 져줌으로 이기는 모델이 더 나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 받을 일이기에 절대주권을 믿는 마음으로 오른쪽 뺨도 내어주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선교정의에 대한 이해와 현실 적용의 문제를 선교동원, 선교훈련, 선교전략, 선교자세의 차원에서 간단하게 둘러보았다. 물론 이론가들도 심포지엄에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어놓지 않았으며, 한국교회의 합일된 정의가 문장으로 나와있지는 않아도 복음주의 계열이나 에큐메니컬 계열에서 대동소이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선교가 현장의 선교활동에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두드러지게 정의에 입각한 선교를 내세워 일하는 것도, 눈에는 띄지 않고 지극히 대세를 따라가고 있는 현실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 형태를 나타내는 것도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다르게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획일성의 요구도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보다도 연합을 잘하는 모습이 종종 선교지에서 나타나는 것은 긍정적인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세계선교를 위해 하나님은 한국에는 5만이 넘는 지역교회를, 전 세계에 5천여 디아스포라교회를 주셨다. 이제 파송된 선교사가 2만을 헤아린다. 우리 모두 선교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다시 한번 새기면서 동의하고 거기에 준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마지막 시대의 고귀한 사명을 이루는 축복된 민족이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세계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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