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권 선교현황과 전략에 관한 제언
- 중앙아시아와 몽골계,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
유기남 선교사/알타이선교회 대표
애니미즘(Animism)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 Anima 즉, "영혼"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Animism을 사전에서는 물활론, 나무나 돌 같은 곳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 정령신앙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이 영적인 존재에 의하여 신접(神接)되고 만연되고 영집(靈集)되어 있다고 보는 신앙".이라는 정의들을 볼 수 있다. Animism란 다른 말로 자연숭배, 영물주의, 물력론이라 한다. 자연숭배란 큰 바위, 높은 언덕, 폭포, 해, 달, 비등 자연의 대상물과 심지어 죽은 조상에게까지 영이 있다하는데서 생긴 것이고, 물력론이란 자연 안에 에너지가 있다고 보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니미즘의 정의는 결코 단순하지 아니하다. 이유는 각 부족마다 신앙형태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J. T. Seamands 정의하기를 "애니미즘은 단 하나의 동질적 종교로 간주할 수 없다. 많은 부족만큼 종교가 많다고 하였다. 애니미즘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19세기 후반 서구의 문화인류학자들이 하였으며 다음으로 선교사들이 이것을 서구에 소개하였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애니미즘을 연구한 영국의 에드워드 타일러는 애니미즘을 "영적 존재들에 대한 신앙과 교리"로 정의한다. 최근 미국의 선교학자 리넨은 "인격적 영적 존재들과 비인격적 힘이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들의 힘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와 힘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믿음이다"고 하였다. 조지 코웬은 "생명이 없는 대상들과 자연현상이 영적, 초자연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애니미즘은 창조자에 대한 참된 경배가 결여된 피조물에 대한 숭배"로 정의한다. 애니미즘은 창조주와 인간과 자연 및 동물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양식으로, 특히 창조주와 피조물간에는 분명한 한계가 없다. 애니미즘이란 모든 만물에는 영이 존재한다는 신앙이기 때문에 범신론도 되고 혹은 다신론으로 말하기도 한다. 애니미즘은 종교학적으로는 일원론(Monism)에 속한다. 일원론이란 창조주와 피조물은 같은 근원이라는 철학으로 힌두교나 불교도 일원론에 속한다. 즉 자연과 초자연 간에는 분명한 한계가 없다. 여기서 신과 영들의 세계와 자연과 인간은 연속성이 있다. 이러한 연속성 때문에 윤회설이 가능하다.
많은 서구의 복음주의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은 애니미즘이 약화되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는 전 세계에 걸쳐 애니미즘이 다시 부활하는 징조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한국 사회도 여름이 되면 언론매체들이 경쟁적으로 "귀신" 문제를 다루어 "악령 신드롬" 혹은 귀신 신드롬에 빠지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현대는 과학시대라고 자부하지만 사람들의 정신문명은 오히려 퇴화해,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 산업화가 되지 못하였을 때 농촌에서는 밤거리를 다닐 때 귀신이 나타난다고 믿었고 또, 두려워하였다. 그러한 귀신공포증은 농촌문화를 지배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애니미즘은 또한 서구 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뉴 에이지 운동은 기독교와 힌두교와 서구적 세속주의의 혼합종교의 한 모델이다. Gailyn Van Rheenen에 의하면, 뉴 에이지의 신비한 의식 행위와 주술 종교의 점성학에서 애니미즘의 형태가 나타난다고 한다. 남미의 심령술이나 중남미 하이티의 부두교는 전형적인 애니미즘이다. 중국, 한국, 일본의 조상숭배는 유교의 산물이 아니라 실은 애니미즘이다.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소위 화물숭배(cargo cult)라는 종교를 믿는다. 화물숭배란 예를 들면, 비행기를 그들의 조상이 돌아온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들은 먼 옛날의 조상들이 때가 되면 아름다운 새가 되어 좋은 선물을 날아다 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비행기와 미국인들의 "깡통음식(canned food)"을 조상들의 선물로 간주한다. 이들은 특정 의례나 제사행위가 산자에게 물질적 축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인도네시아와 다른 아시아국가의 민속 이슬람 역시 애니미즘으로 혼합되었다. 힌두교 역시 애니미즘의 혼합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엘리아데는 세계의 샤머니즘의 원류를 시베리아, 북방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학설은 거의 정설로 받아지고 있다.
그러면 전 세계적으로 애니미즘의 인구는 얼마인가? 1980년 한 통계는 민속종교 인구를 32억으로 발표하였다. 1970년에 영국의 선교학자 스테판 닐은 세계 인구의 40%가 애니미즘적 사고에 근거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는 신뢰할만한 것이다. 랄프 윈터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전도종족들은 정령숭배자들인데, 그러나 그는 약 11억 인구가 애니미즘에 기초한 세계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민속신앙적 뿌리를 가진 중앙아시아와 몽골계, 시베리아 지역은 외면적으로는 이슬람, 불교, 도교 등을 믿지만, 전통적으로는 애니미즘적 신앙을 가진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중앙아시아 지역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 중앙아시아
고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알타이계 부족들의 신앙은 애니미즘(정령사상),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그리고 천신사상(天神思想)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애니미즘은 나무, 강, 바위, 산, 계곡, 태양, 달, 별 등 자연물에 정령(精靈)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이다. 중앙아시아의 고대 투르크족들은 이러한 자연계의 신령한 정령들을 예르-수(Yer-Su)라고 불렀다. 정령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정령사상과 연관하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고대 투르크족들에게는 토테미즘의 흔적도 강하게 나타난다. 고대 원시부족들은 각 부족마다 토템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토템들은 후대에 각 부족의 성(姓)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부족들 가운데 토간(Togan) ‘독수리’, 아슬란(Arslan) '사자‘, 코취(Koch) '수양’ 등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토테미즘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여러 투르크계 민족들 가운데 독수리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실도 이러한 독수리숭배사상과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알타이계 부족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으로 알려진 흉노족은 봄과 가을이 되면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올렸다. 그 때 사용되는 동물들은 양, 염소 등이었다. 또한 흉노, 돌궐, 위구르 등 고대 투르크 부족들은 원정의 성패를 달이나 별자리의 모양으로 점치는 점성술도 행했다. 그리고 조상숭배의식도 행하였다. 그들은 신성하다고 여기는 동굴 입구에서 조상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물을 희생물로 바치는 풍습을 지켰다. 또한 조상의 유물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돌궐비문에 보면, 그들이 하늘을 천신으로 숭배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권이며, 이 곳 주민들도 스스로 이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이슬람화되기 이전에 이들의 정신적, 현실적 문제를 지배했던 과거의 신앙과 종교들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무속적 이슬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의 투르크족들은 그들 마음의 종교였던 샤머니즘에 깊이 파묻혀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슬람화 되었다 하더라도 샤머니즘과 이슬람이 결합된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그들 삶 전체를 지배했던 것이 샤머니즘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는 여전히 샤머니즘적 요소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카작인과 키르키즈인들은 형식적인 이슬람으로서 토착신앙, 즉 샤머니즘적 요소와 조상숭배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샤머니즘은 그들 신앙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샤먼(Shaman, 무당)을 통해 병자를 치료하고 악귀를 추방하는 일들을 행한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병은 귀신들이 가져다주는 것인데, 박샤(bagsha)라는 무당은 주술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악령들과 접촉한 다음 병을 치료한다.
또한 카작인과 키르키즈인들은 샤먼 외에도 물라(mullah)라고 하는 이슬람의 승려가 있다. 샤먼은 직접적으로 영들과 접촉하여 병자를 치유해주는 반면에, 물라는 병든 자를 위해 알라신에게 빌어 환자를 치유한다. 이와 같은 샤먼의 활동은 우즈벡인, 투르크멘, 타직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19세기 이후 조상신 숭배가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으나 우즈벡인들은 여전히 조상숭배의식을 치루기 위해 아무다르강 삼각주에서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심지어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이 가장 강하다는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이슬람 성지 사마르칸트에서 조차도 복을 빌기 위해 나뭇가지에 천 조각을 걸어놓는 등 샤머니즘의 모습이 현저하게 남아 있다.
소련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이슬람은 핍박을 받아 쇠퇴하여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이슬람 사원과 Madrassas(이슬람 신학교)가 문을 닫았고 많은 이슬람 관습들은 은밀히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이슬람은 일반인의 정신적인 공백을 메우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대체할 만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또한 각 소련 연방공화국들이 국경을 재형성하게 됨에 따라 이슬람이 국가적인 실체의 근거로 제시되면서 이러한 부활은 촉진되고 있다. 최근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하에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는 수백 개의 이슬람 사원이 증축되고 이슬람 학교가 건립되었으며 코란이 중앙아시아의 언어로 번역되고, 수많은 이슬람 전도자들을 단기 혹은 장기로 파견하는 등 대대적인 이슬람 종교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란의 경우는 사우디와 쿠웨이트의 물질지원을 받은 수니파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중동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 좌절되자 중앙아시아 정세의 변화에 편승하여 전력을 다해 이웃나라들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란계 타직스탄을 비롯하여 투르크계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한 이들의 영적인 공허함은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복음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수많은 세미나와 성경학교, 신학교육 과정이 여러 지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토착교회와 서구 및 한국의 선교기관의 협력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갑작스런 변화와 이에 따른 선교적 관심의 증대는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이곳의 장기적인 현지인 지도력과 주도권에 대한 진정한 지원 등이 이루어질 것이 요청된다.
중앙아시아는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로 외부에 문을 열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나라는 공식적으로 선교사 비자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창의적 접근 지역이다. 그래서 전문인들이 신분을 보장받으면서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목회자 사역자일지라도 교회개척과 함께 지역 및 직업개발, 구호나 구제, 교육 사업 등을 겸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에서 시행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는 의료사역이다. 치과 내지 소아과 병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의료진들은 버스를 빌려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마을을 순회하면서 이동진료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비즈니스 사역을 들 수 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기업을 세워서 경제개발과 함께 일자리 마련을 돕고자 하나, 때때로 선교사들은 재정운용에 밝지 못하기도 하고, 동업하는 현지인들이 돈의 유혹을 받아 돈을 갖고 도주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여 팀이 깨지는 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앙아시아에는 인구에 비해 땅이 넓으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치된 땅이 많이 있는데 선교사들은 농업개발사역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과수원 운영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수익도 얻을 수가 있어서 농촌 젊은이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시켜 일과 함께 훈련 사역도 겸하게 된다. 이것과 연계해서 도시권에서는 일자리 소개 센터를 마련해서 일하고자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복음을 소개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아원, 과부, 노인 및 지체 부자유자들을 대상으로 한 긍휼사역, 마약 중독자 재활원 사역도 힘 있게 진행되고 있다. 컴퓨터를 비롯한 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일꾼을 양성하기도 한다.
신학교 교수 사역은 교단별로 작게, 그리고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현지대학에서 한국어 교수 사역 및 한글학교 운영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역하기도 한다.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사역자는 일반과목 교수 사역을 통해 교육 및 캠퍼스 전도 사역을 담당할 수 있다. 그리고 태권도, 축구와 같은 스포츠를 통해 사역을 훌륭히 감당하는 사역자들이 있다.
그리고 카자흐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이 7년간 진행되어 완성을 보았다. 이 일은 현지인 7명, 고려인 3명, 한국인 2명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한국선교사와 한국교회, 미국교포 교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교회개척 및 개발사역은 거의 모든 사역자들이 감당하고 있다. 감시가 심한 곳은 은밀하게 모이고 있으며, 카작스탄과 같이 어느 정도 허용이 되는 곳에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기도 할 정도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아대책기구,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파송된 사역자들은 NGO 사역을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위에 언급한 여러 다양한 사역과 함께, NGO와 교회개척을 통합해 나가면서 선교할 수 있는 독특한 지역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전문인 사역자와 교회개척 사역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또는 통합할 수 있는 분야는 서로 협력하면서 선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Ⅱ. 몽골계 종족
몽골계열의 여러 민족은 아시아 대륙에 넓게 퍼져 살고 있다. 중국의 만주 지역에서 서부로 내몽고성과 몽골공화국, 남부 시베리아 지역, 그리고 멀리 서쪽으로 카스피 해 북쪽의 볼가 강 하류 지역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서 여러 부족단위로 유목생활을 하며 전사로서 사방의 민족들을 침입하기도 하던 몽골민족은 13세기 징기스칸의 영도 하에 하나로 연합하고 기마전사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그와 그의 후계자에 의한 정복사업으로 한반도에서 흑해와 동남으로는 중국과 한반도,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전역과 이란과 이라크, 서북으로 러시아에 이르고 중앙 유럽을 위협하였다. 그로 인해 지금도 유럽은 황색인종에 의한 화를 잠재적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 정복군대가 널리 퍼져서 거주한 결과 오늘까지 몽골계 민족이 넓은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와 종족 기원이 동일한 것과 함께 그들의 종교인 불교가 공동체를 굳게 결속시켜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티베트 지역의 수도승들이 몽고족에게 라마 불교를 전해 주었는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들이 문자를 만들었고 교육기관을 세웠다. 동샹민족과 사르트-칼묵 민족 외에는 모두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더불어 라마불교를 믿고 있다. 금세기에 공산체제가 몽골계 민족 전체를 지배하여 무신론 사상을 주입하였다. 하지만 몽골과 소련의 공산체제가 무너지면서 과학적인 무신론은 거부당하였다. 독립으로 새로 얻은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특히 몽골에서 불교가 점차 부흥되고 있다. 그러나 구소련 지역에서는 불교가 그리 강하지 못하다.
몽골족은 주로 소위 외몽골이라고 하는 몽골과 중국의 내몽고자치주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이 두 지역의 인구 규모를 살펴보면 몽골에 약 250만 명, 내몽에 380만 명이 있다. 그 외에 중국 칭하이와 신쟝 등지에도 총 100여만 명의 몽골족이 있어 실제로 중국에 거주하는 몽골족은 약 5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그리고 카작스탄 및 러시아, 유럽 일대에도 몽골족들이 살고 있다.
몽골에서의 한국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울란바타르 대학교 사역은 윤순재 선교사와 한국의 후원교회들에 의해 1993년에 시작되었는데, 외국인이 세운 최초의 4년제 사립대학이며 몽골에서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몽골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데 중심적인 기관으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으며, 96년부터는 몽골 우수 15개 대학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어 “몽골대학 협회”의 회원대학이 되었다. 99년 5월에 실시한 몽골대학 종합 평가에서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인증서를 받음으로서 공인된 명문대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동안 평균 입시 경쟁률은 5대 1이며, 수업료는 국립종합대학과 비슷한 연간 300불 가량으로 대학 경상운영비의 절반 정도를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다. 전교생의 30%, 몽골 교수직원의 40%가 기독교인이며,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기독학생회가 2개 있고, 대학운영에 참여하는 선교단체는 예장(통합) 총회선교부, 성서침례교회, UBF, IVF, 미국 침례교 등이 있다.
그 후 한국선교사들이 세운 대학으로는 울란바토르대학 외에도 몽골국제대학교(MIU)와 후레정보통신대학교가 세워져서 본토인과 인근 국가 소수부족들에서 온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 곳 대학생들과 직원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효율성이 크다고 볼 수가 있겠다.
한국인 선교사자녀학교가 1998년 9월에 개교하여 초대 교장에 전국천 선교사가 취임하였다. 이후 여러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교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이 학교는 울란바타르 시의 한 건물을 임대하여 유치원 운영과 함께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사회는 몽골에서 사역하고 있는 교단 선교부나 선교단체에서 파송한 이사회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포츠 중에서 특히 탁구는 국가대표 선수였던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중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 탁구 선수들을 길러내며, 그들을 복음으로 양육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된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가 개척되기도 하였다.
연합성경훈련원 사역이 1995년부터 초교파적으로 외국인 선교사들과도 연합하여 운영되고 있다. 총 4년 과정 중에 2년제 성경학교, 2년제 신학교가 있으며, 120명 정도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2002년에는 27명에 대한 최초의 연합목사 안수식이 있었고, 2005년에는 32명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아직까지는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출신교회들의 필요를 채우기에 바쁜 형편이나, 계속 배출될 경우에 지방의 교회개척에 까지 일꾼들이 파송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는 준비된 신학자들이 이 사역에 헌신할 필요가 있다.
교회개척 사역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몽골에서도 힘 있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450교회와 4만 명 정도의 신자들이 생겨났으며, 70여개의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다(2006.9.7국민일보). 대부분의 현지교회들은 신자가 50명 미만으로 아직 완전 자립이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주로 울란바토르 시에서 교회 설립이 이루어졌으나 점차 지방의 소도시에도 확산해 나가고자 힘쓰고 있다.
사전 편찬사업도 진행되어 “한몽소사전”(1994), “몽한포켓사전”(1997), “한몽사전”(2000)이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교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병무 교수에 의해 편찬이 된 것은 한국과 몽골의 교류 및 선교사들의 언어 학습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의료 사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세 친선병원이 매일 400여명 정도 진료를 하고 있으며, 월요일에는 환자가 더욱 많아 약 600명 정도 돌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국립의료대학을 지원하여 젊은 몽골인 교수들을 30명 정도 한국에 6개월간 연수시켰다. 그리고 교수들의 연구비 지원도 매년 5명 정도를 선발하여 지원하는 등 재정적 인적 지원을 통해 의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수도권 및 외곽지역에서 가난한 청소년 및 일반을 대상으로 한 종합 문화센타운영, NGO 사역, 성경번역 사역, 지도자 훈련, 구제사역과 교육사역이 구체적인 열매를 맺으며 진행되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은 몽골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사역하며, 외국 선교부 및 외국인 선교사들과도 잘 협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성공적인 선교지로서 평가되고 있다.
몽골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대략 200명 이상 있는 것으로 집계되나, 내몽고에는 3명 정도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몽골에 있는 선교사 및 몽골인 사역자들이 중국 내몽고로 와서 단기간 복음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무역활성화를 위해서 내몽고 국경접근 지역에 있는 도시 중 13개가 ‘대외개방도시’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내몽고 있는 사람들이 몽골로 들어가는 데는 까다로우나, 몽골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내몽고로 들어올 수가 있다. 이미 상당수의 몽골 유학생들이 내몽고로 들어와서 공부하고 있어 유학생 전도가 가능하다. 내몽고 자치주의 중심도시인 후오하오터에 대학이 9개가 있는데, 몽쭈안이라 불리는 전문대학에 몽골족 학생이 가장 많이 있다. 내몽고대학과 내몽고 사범대학에는 많은 몽골족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서양과 한국의 사역자들은 이 대학에서 언어연수 및 한국어 등의 교수 사역을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캠퍼스 전도 사역을 하게 된다.
내몽고 사역자들은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거주지와는 상당히 떨어진 별도의 도시나 지역에서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한다. 큰 도시에 속하는 통라오시 외곽 농촌 지역에는 30-40명 정도의 몽골족 가정교회들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지도자 훈련, 문서 및 재정적 측면에서 배후에서 돕는 사역이 절실히 요구된다. 아울러 내몽고 동부지역의 농촌을 순회하며 돕는 사역이 효과를 보고 있는데, 이 일은 몽골어에 익숙한 연변 자치주의 조선족 사역자들이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는 철도편을 이용해서 성공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이 외에도 내몽고에서는 광활한 땅에서 목축 및 낙농업과 관련된 제반 사업과 비즈니스가 가능하며, 기타 사회 구제 및 개발을 위한 NGO 사역이 전략적이다. 그리고 내몽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은 내몽고 서부 지역인데, 이들은 영적으로도 동부와 중부에 비해 더욱 열악하며 복음이 미치기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실링하오터를 거점으로 분유공장이나 피혁제품 판매 혹은 의복, 음식점 등 소규모 장사를 통해 영적 불모지인 서부를 개척한다면 더욱 내몽고에 부합한 개척선교가 될 것이다.
몽골 부리야트 선교는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의 미전도종족입양을 위한 목회정책에 힘입어 1996년 10월 온누리교회 청년부에서 부리야트종족을 입양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 다음해인 1997년 10월에 온누리교회는 강서-김포공동체를 통해 몽골 부리야트선교사로 강한대/김은정선교사를 파송하였다. 2000년에는 초이발산에 도르놋드 그리스도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에 후임인 이교자선교사에게 인계되었다. 2007년까지 거점도시인 초이발산에 3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부리야트 마을에는 차강어워교회, 다쉬발바르교회 외에 바잉올과 바잉동에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2007년 10월에는 김경찬/이지혜선교사가 파송되어 언어훈련을 받고 사역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母)교회격인 초이발산의 에밍우드교회는 딸 교회(Daughter Church) 4개를 재생산하였다. 또한 에밍우드교회내에는 가정교회들이 10여개 자율적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이들 가정교회들이 성장함에 따라서 딸 교회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Ⅲ. 시베리아 지역
1. 연해주
연해주는 한인들의 애환이 담겨진 지역이다. 수련회를 마친 뒤 선교사들은 버스로 ‘라즈돌로예’ 기차역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이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출발역이었다.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면서 추위와 공포, 전염병 등으로 유아를 비롯한 노약자의 60%가 죽어야했던 고려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모든 선교사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상처 많은 한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구 230만의 연해주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1년 소련의 몰락, 러시아의 개방과 함께 찾아왔다. 한국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은 인구 70만의 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 33명이, 인구 23만의 나호드까에 2명, 인구 8만의 아르쫌에 14명이, 인구 20만의 우수리스크에 17명, 그 외에 빨치산스크에 4명, 스빠스크와 라즈돌로예에 각각 2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
사역은 대체로 현지인을 위한 교회개척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합사역으로 ‘블라디보스톡 장로회신학교(구, 연해주신학교)’를 운영하여 현지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1996년 9월에 개교한 이래 2009년 6월에 1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학교를 위한 주 후원자는 새문안교회이며, 22명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교수사역을 하고 있다. 학생 수는 20명만 받아 교육하도록 러시아정부로부터 허가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 남서울은혜교회의 후원으로 국제학교가 설립되어 2005년 9월부터 초등학생을 받아 영어로 교육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선교사자녀들에게도 좋은 혜택이 주어지게 되었다.
연해주에는 지금까지 2명의 선교사들이 순교하였다. 첫 번째 순교자는 1912년에 사망한 최관휼선교사이고, 두 번째는 2004년에 우수리스크에 있는 교회마당에서 피를 흘린 당시 40세 김창식선교사이다. 고 김창식선교사는 박은희사모와 함께 교회당에서 기도하다 자동차 경보소리에 놀라 확인 차 마당으로 나왔는데, 이웃과의 시비 끝에 격분한 러시아인에 의해 칼에 찔려 많은 피를 흘린 뒤 순교하였다. 지금은 박은희 사모선교사가 남겨진 어린 두 아들(바울과 바나바)을 데리고 어려운 중에도 먼저 간 남편의 사역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한국선교사들은 여러 교회당과 문화센터, 학교들을 건축하여 외형적 시설을 계속 확장하여 나가고 있다.
2. 사할린
사할린은 러시아 최대의 섬이며 길이는 한반도보다 조금 길고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넓다. 인구는 67만 명이며, 그 가운데 고려인(한인)이 4만 명이 살고 있다.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1905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토지의 재편성이 강행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일본으로 살길을 찾아 나선 데서 시작된다. 1941년에는 8천명의 한인 노무자들이 이주를 했고, 그 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할린에 있던 일본노무자들이 전쟁터로 징집되면서 더 많은 한인노무자를 이주시키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은 자국민만을 소환했고, 한인들은 귀향이 허락되지 않고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1990년 9월에 한.러 국교수립 이후 1992년 9월 29일 사할린 거주 독신자 87명이 귀국하였고, 2000년까지 안산에 임대아파트 500동을 짓고 사할린 1세대 노인 1000명을 영주 귀국시켰다. 그리고 부천에 100세대, 서울 목동에도 100세대가 영구 귀국하여 있다.
사할린 지역의 개신교 선교는 구소련의 붕괴 후 1990년 4월 29일 첫 예배가 드려짐으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25여 곳의 교회와 여러 작은 가정교회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사역자로는 7가정과 2명의 독신선교사가 있어 총 15명의 선교사들이 교회개척, 지도자훈련, 신학교교육, 문화사역, 러시아교회 협력사역 등을 진행하고 있다.
3. 노보시비리스크
노보시비리스크는 ‘새로운 시베리아의 도시’라는 뜻으로 지리적으로 러시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의 역사는 1893년 오비강에 철교가 개설되면서 시작되었다. 1957년 시 외곽에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센터가 건설되면서 도시가 빠르게 발전하였고 연구단지인 아카젬가라독은 이름난 장소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철도망과 지하철, 국제공항의 기간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등 교통, 과학, 문화, 경제의 요충지로 시베리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다. 상주하는 인구는 142만 명 정도로서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80개 이상의 다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2천Km 반경 내 인근지역의 학생들과 타민족 사람들이 유학과 사업을 위해 모여들고 있다.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한 시베리아 내 소수민족이 가까운 곳에 흩어져있다. 한인규모는 유학생, 상사원, 선교사를 포함하여 150명 정도이다.
개방 이후 일찍부터 노보시비리스크에는 이미 대우 현지 지사가 개설되어 있었다. 대우의 부도와 금융 위기 이후 협력관계가 줄어들기도 하였지만, 1999년부터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현재는 한국과의 교류가 증가추세에 있다. 현재 학생들과 선교사, 그리고 몇 사람의 사업가가 활동 중이다. 학생들은 음악대학교와 음악쉬콜라(한국의 초, 중, 고교 과정), 그리고 발레학교와 철도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문화교류 상황으로는 노보시비리스크 국립 대학교 동방학과에 정식으로 한국어가 전공으로 독립되어 30여명의 러시아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2002년의 한.러 친선특급 방문단이 다녀갔고, 2003년에는 노보시비리스크 국립 대학교 국제주간에 한국영화제와 문화공연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대전시에서는 한국문화원을 국립 대학교 내에 개소하여 한국을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노보시비리스크에 한국인선교사가 처음 들어 온 시기는 1992년이다. 그 이후 27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역들은 교회개척, 신학교, 캠퍼스, 사회복지(병원, 교도소, 노숙자, 약물중독자), 다민족사역 등이다. 지금까지의 사역의 결과를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다. 첫째는, 선교거점의 확보이다. 행정적으로 영주권 및 임시거주권을 취득하고, 교회건물을 확보하거나 건축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꾸준히 병원선교를 한 결과 2004년에 원목실을 개설하였고, 캠퍼스 사역도 열심히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세 번째는, 활발한 교회개척이다. 초기 정착기를 보내는 선교사를 제외한 약 90% 이상의 선교사가 교회개척사역을 하고 있다. 개척형태는 독립개척의 형태와 협력개척의 형태가 있다. 독립개척은 선교사가 독자적으로 교회를 시작하여 정부에 등록하고 사역을 전개하는 것을 말하며 교회개척을 하고 있는 선교사의 90%가 이에 해당한다. 협력개척은 현지교단에 소속되어 교회를 시작하고 등록과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러시아 침례교단과 협력하였고 3건의 사례가 있다.
4. 알타이공화국
알타이공화국은 남한과 거의 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고, 인구 20만 명 30%가 알타이종족이며, 고르노-알타이스크가 수도이다. 대부분이 사냥, 양봉, 약초채취, 사슴농장, 관광업 등의 자연자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이 특별히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지를 않고, 공업시설은 거의 들어서 있지를 않아서 러시아 내에서 가장 살기가 어려운 곳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최근 관광업과 약재와 관련된 산업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알타이는 여러 국가들과 국경이 접해 있어서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 갔고, 그 와중에 알타이인 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몽골과 중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18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 진출한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고, 인구 대부분이 러시아제국으로 귀화했다. 이후 계속 러시아영토로 남아 있었고, 1922년 오이라트자치구와 1991년 독립국연합공화국을 거쳐 현재에는 ‘알타이공화국’으로 불리고 있다.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수도 고르노-알타이스크에 사는 인구는 46,00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시골에서 목축과 사냥 등을 하며 생활한다. 그래서 아직도 시골지역에 가면 옛날식 생활을 목격할 수 있다. 알타이의 깊은 산은 아직도 세계적인 오지로 남아 있으며, 그런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눈 덮인 산과 호수, 강을 볼 수가 있다.
고르노-알타이스크에서 사역하는 한국선교사는 마리아선교사 뿐이며, 때때로 단기 사역자들이 함께 한다. 그녀는 10년 전부터 현지인들을 접촉하여 양육을 해 왔는데 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자양육을 해나가고 있다. 8년 전에 설립된 알타이스크교회는 교인의 80%가 젊은이들로 구성되어있고, 이 가운데 몇몇 초등학교 교사들은 자기 고향으로 발령을 받아 자비량으로 지방전도를 감당하며 그곳 교회들을 섬기고 있으며,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교인들은 도시에 거주하며 제자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건축된 지금의 교회당도 외부에서의 도움이 전혀 없이 현지 청년의 전적인 헌신으로 6만 불이 헌금되어 지어졌다고 한다. 또 교외 아름다운 초원에는 그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별장 같은 기도원이 있어서 누구든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현지목사와 사역자들도 세워졌는데, 지방으로 파송되는 사역자들도 3개월 정도만 재정이 지원되고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홀로 서도록 교육되고 있다.
교인들이 이렇게 헌신하게 된 데에는 50일간의 회개와 눈물, 기도와 말씀을 사모하는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초대교회 때와 같은 성령의 은사와 체험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는 샤머니즘이 무척 강하고, 세 집 걸러 한 집에 우울증 환자가 있고 알콜중독자가 많은 그 곳에 절실한 하나님의 역사였을 것이다. 거기에다 선교초기부터 마리아선교사가 강조한 자립정신과 자비량 일꾼 정신이 어우러져 일구어진 놀라운 영적부흥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부터 선교사는 현지인들을 돕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건축될 때 한국의 파송교회가 재정적으로 돕고자 했으나, 현지인들의 자립정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도 한다.
필자는 마리아선교사 팀의 안내를 받아 고르노-알타이스크와 지방의 교회들을 돌아보고, 사역자들을 만나보면서, 아울러 그들이 함께 직업생활을 하고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직업생활과 선교사역을 병행해나갔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일을 한 독신 여선교사가 가장 오지에 속한 알타이공화국에서 사도 바울의 정신을 따라 훌륭하게 감당하는 것을 보고 큰 도전과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5.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역사가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1652년에 카자크들의 동계 숙영지로 러시아제국이 첫발을 디딘 후 1661년에 목조성채를 지으면서 시베리아 개발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범죄인의 유형지라는 초기의 역사를 넘어서서 시베리아산 모피와 금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20세기 초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크게 발전하였다. 유럽에서 아시아 지역을 연결시키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중국과 몽골지역의 대부분의 무역이 이곳을 경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한국, 일본 등과 무역하는데 좋은 위치이다. 이르크추크크 주 전체인구는 약 270만이며, 민족구성은 러시아인 88.5%, 우크라이나인 3.4%, 부리야트인 2.7%로 되어 있다.
이르쿠츠크 시는 바이칼 호수의 서쪽에 위치하여 깨끗한 물과 수력발전소로 인한 값싼 전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350년의 긴 역사와 오래된 아름다운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전원적인 도시라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도 불린다. 인구는 약 60만 명 정도이며, 교육도시로 알려져 학생수가 10만이다. 종합대와 단과대, 전문대까지 포함하여 40여개의 학교가 있으며, 특히 시베리아 미전도종족 지역에서 공부하러오는 유학생이 약 5만 정도이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이 약 700명 정도 살고 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조선족 동포들도 3000여명이 사업이나 장사를 하며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사회적 혼란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혼율이 100%에 달한다. 가정이 더 이상 쉼터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청소년들은 범죄, 술, 마약, 매춘 등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 있다.
종교적 상황을 보면 대부분이 형식적인 정교회인과 무신론자들이다.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도를 위한 사원도 있으며, 이단들의 활동도 만만치가 않다. 특히 샤머니즘의 마지막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의 중앙에 있으며, 샤머니즘 세계에서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해마다 알혼섬에서 샤만 제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세계 각국의 샤머니스트들이 정기를 받으려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1991년 개방이후 들어와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서양선교사와 현지인 사역자들을 합쳐 15개 정도의 교회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선교사는 15명이 있으며, 교회개척, 중보기도, 캠퍼스, 호스피스, 유학생, 고려인 한국어학교 사역들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 가운데 일찍 영주권을 얻은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체류비자를 연장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애초 3개월 비자를 받은 어떤 선교사의 경우는 3개월 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그곳에 있는 2년 이상을 해야 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경찰들의 불시검문에 대비해 집 밖에서는 항상 여권을 소지하고, 다른 도시 내지 지역으로 이동해 3일 이상 머물 때는 거류신고를 해야 하는 등 다른 나라에는 없는 불편함도 있다. 또 많은 선교사들이 러시아어의 난해성 때문에 주요 설교나 강의 시에 통역사에 의존해서 사역하고 있다. 게다가 정교회가 TV, 신문 등 언론을 통해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MCC(선교사상담지원센타) 임경심선교사가 그곳 여러 지역에서 가진 여성선교사들과의 세미나 분석에 의하면, 몽골 등지와 비교할 때 시베리아 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생활과 사역에 있어 많은 스트레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선교사들은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고, 꾸준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한.러 간의 무역증가로 인해 거리에는 적지 않은 한국자동차들이 달리고 있고, 한국제품을 알리는 대형광고 및 문화교류, 인기 있는 한류스타들로 인해 한국인들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한국인선교사들의 선교사역에도 큰 격려가 될 것이라고 본다.
투르크계와 몽골계 종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과 불교, 정령숭배를 하고 있어 복음전도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한 지역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지역이 창의적 접근 지역이어서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각별한 지혜가 필요함을 보게 된다.
Ⅳ. 애니미즘권을 향한 한국교회의 선교전략
이상에서 논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투르크 계열과 몽골계 종족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선교전략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1. 무속신앙의 공통점을 적극 활용
한국인의 심성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무속 신앙적 요소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옛날에는 굿과 무당을 통해 그런 심성이 표출되었다면, 오늘날은 운세나 점을 보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의 투르크 계열 사람들과 몽골계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슬람이나 불교를 갖고 있지만, 그들의 심성에는 오래전부터 애니미즘적 요소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현재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선교사들은 그 곳 사람들의 이슬람, 불교와 정면 대결하는 자세- 강한 반대에 부딪치는 - 보다는 우리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정령 숭배적 요소를 잘 활용하여 사람들을 접촉하고 대화하며, 그들의 영적 고민과 귀신 숭배적 억눌림을 깊이 간파하여 상담하면서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전파해 나가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얻고 선교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2. 타종교 이해와 영적전투 능력 배양
애니미즘은 이슬람에서는 자연숭배와 비슷한 주물(呪物)숭배가 있어서 꾸란의 구절을 몸에 지니거나 호부(護符)를 집에 비치함으로써 재앙을 물리치는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주술(呪術)신앙이 있어 신비한 힘을 원하는 대로 작용시키는 확실한 능력을 가진다고 믿는다. 즉, 자기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저주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악마의 힘을 빌려 남에게 해를 가하는 마술인 블랙매직(black magic)을 가진 자는 이슬람 추종자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도록 함께 집중하게도 만든다. 크게 볼 때 애니미즘에 속하는 샤머니즘은 귀신이나 혼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간을 조종하고자하며, 이를 위해 마술과 접신술 등을 발달시켜왔다. 이것은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애니미즘 속에 실재하는 정령숭배와 공중권세 잡은 어두움의 세력들을 잘 간파하고,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굳게 무장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3.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의 활성화
투르크계와 몽골계의 139개 종족 중에서 126개 종족이 미전도종족으로서 서아시아, 중동,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 일대에 흩어져 있다.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급한 만큼 한국교회의 선교인력과 역량이 이들 지역에 좀 더 모아질 필요가 있다. 선교사 숫자가 20,000명을 넘어서고, 세계 제2위의 선교대국이 된 이 시점에서는 타문화권 선교사를 전 세계에 산발적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미전도종족 지역에 집중적이고도 우선적으로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들이 미전도종족를 활발히 입양해 나가고 새로운 선교인력들이 미전도종족 지역을 향해 나가도록 힘써 나가야 한다.
4. 비교우위지역 선교의 효율성
투르크계와 몽골계 지역은 종교심성적으로 한국과 동일한 뿌리인 애니미즘권이다. 그래서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언어습득과 문화 적응 면에서 수월하고 비교적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곳이다. 그 곳에선 한국인이기 때문에 친밀하게 느끼고 환영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대학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면서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서구인이나 타 지역 선교사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곳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가 보다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곳은 한국선교사들이 좀 더 많이 들어가 선교하는 것이 세계의 한정된 선교인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전문인 선교사의 지속적 발굴
투르크계와 몽골계의 많은 곳은 선교가 자유롭지 못한 제한접근지역(Restricted Access Nations)이다. 그래서 전문인들이 본래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영역에서 사람들을 접하며 효율적으로 선교할 수가 있다. 회사원, 연구원, 상업종사자, 사업가, 교수, 언어강사, 컴퓨터 전문가, 기술자, 의사, 스포츠 맨, 학생 등 생활 전반에 걸친 각 영역에서 기술과 지식을 겸비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타문화권 선교에 헌신하여 해외선교에 나설 수 있도록 분위기를 고취하고 파송 받을 수 있는 통로(Channel)도 부지런히 개발해야 한다. 아울러 목회자 선교사 1명과 4-8명의 전문인 선교사들이 팀으로서 일할 수 있는 모델(Model)과 사역 베이스(Base)를 계속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겠다.
애니미즘은 신(神)들이나 영(靈), 조상의 영혼, 힘(Mana) 등의 영적세계의 실제성을 믿고, 영적세계의 전문가라 불리는 무당과 마법사 등을 두려워한다. 또,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영적 힘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질병, 상처, 사고, 죽음 등에도 어떤 영(靈)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는 애니미즘 사회에서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여러 가지 영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고, 조심해야할 장소나 물건들이 그들의 삶을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애니미즘적 환경 속에 있어보거나, 지금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샤머니즘이나 우상 숭배적 환경에 익숙한 편이다. 인구의 30%가 크리스천인 오늘날도 미신적 사고는 한국인의 무의식 깊숙이에 뿌리내려져 있어서 어떤 때는 의식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사할 수 있는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을 가려서 이사를 하며, 결혼 전에 궁합을 보고,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주위에 널려있는 운세 보는 곳에서 점치기를 한다.
그들의 삶 깊숙이에 기독교적 뿌리가 내려져 있는 서구선교사들은 애니미즘적 요소로 점철된 지역에 와서 생활하고 선교한다는 것은 문화적 장벽 외에도 더 어려운 영적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에 비해 한국선교사들은 이미 미신과 샤머니즘을 경험하였기에 애니미즘권에서 보다 익숙하게 사람들을 접촉하고 선교해 나갈 수가 있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일본의 혼네와 타테마에를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서구인들이 정령 숭배적이고 미신적, 요행적 요소가 다분한 애니미즘적 환경에서는 당황하기 일쑤이지만, 애초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 환경에서 살아온 한국선교사들은 그만큼 애니미즘권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심성 깊숙이까지 접근해 들어가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25년간의 한국선교가 서구선교와 그들의 노하우(know-how)를 배우기 위해 힘쓰고 실수도 반복해 왔다면, 향후 25년은 한국인의 문화적 배경과 장점을 잘 살려서 정령들과 마귀를 무서워하는 애니미즘권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적 자유와 축복을 안겨주는 그리스도와 능력의 복음을 효과 있게 증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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