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와 구속신앙
서철원 교수
<한영신대 석좌교수, 전 총신대학 부총장,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장>
포스트 모너니즘 시대를 맞아 종교다원주의 또는 종교적 상대주의가 기독교회를 흔들어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기독교 신학으로 정착된 사상이다.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종교이고 절대적인 종교라는 정통주의 주장에서 후퇴하여 여러 고등종교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 그만이 유일한 구주가 아니라 많은 종교설립자들 가운데 하나여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에게만 전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설립자들에게도 다 타당하다면서 그들도 다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종교가들은 다 절대자를 경험하였다. 그 경험이 일정한 역사 내에서 일어났고, 일정한 문화적인 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자기들의 종교만이 유일한 신 경험을 한 것처럼 자신들의 경험을 절대화한 것이 오늘날 여러 종교들이 자기들의 우수성을 주장하게 돈 근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장 배타적으로 자기들의 종교가 유일한 구원종교이고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해 왔으나 이 주장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들은 다 일정한 시간대에서 절대자를 경험하여 그것을 절대화한 것이므로 다 상대적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절대적인 주장을 할 수가 없고 기독교도 세계 종교 가족의 일원일 뿐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절대자에 이르는 특수한 길이고 다른 종교들은 거기에 이르는 정상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도 다 윤리와 교리, 선행, 그리고 내세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종교들이 다 정상적인 종교이고 정상적인 절대자에로의 접근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처럼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종교가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가 다 절대자에게 이르는 동일한 길이어서 기독교는 그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본고에서는 이 시대의 위험한 신학사상인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발생배경과 신학적 주장을 살펴보고 그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여 우리가 가진 구속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한다.
1. 종교다원주의 철학 및 신학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를 바른 신학으로 채택하게 된 것은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래 주장과 본질을 다 부인하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여 일반 종교와 동일한 수준으로 낮추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출발하고 오직 성경을 표준과 법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이 마무리되자 기독교의 자기 부정을 시작하였다. 18세기 이래 계몽주의의 방식으로 신학을 하여 이성으로 모든 신학을 설명하기로 하였다. 이성적인 것만이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계시에 의존해서 신학 하는 것을 버리고 이성의 법칙에 합치하도록 하는 신학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당대의 언어로 곧 당대의 주도적 사상 체계인 철학에로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신학 작업의 원칙으로 정하였다.
이성으로 신학 하는 것을 바른 것으로 알게 된 17세기에는 이신론이 성하였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역사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자기의 법칙들과 과정을 따라 운행하게 작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특별간섭과 섭리를 배제하였다. 하나님이 직접적인 간섭과 섭리를 하지 않는다면 특별계시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경은 다 이방종교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 아니고 이방 종교들의 영향으로 나타난 문서들의 편집이며 성경이 말하고 주장하는 사실들은 실제로 사실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칸트의 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존재를 사람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은 단지 감각 기관이 접촉할 수 있는 경험세계뿐이다. 인간이 이성의 능력으로는 물자체의 세계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으므로 지식의 대상으로는 배척된다. 그러나 인륜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하고 사후 세계를 상정하였다.
이와 같이 철학이 경험의 영역을 확정하고 감각적 세계만을 지식의 대상으로 국한하면 신학도 그 방법을 전혀 달리해야 한다. 신학도 근세 경험과학이 그 방법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물질적인 세계만을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지식으로 신학 하는 것을 버리고 절대의존의 감정을 도입하였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존재로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단지 신의식의 기원으로서만 신을 말하고 있다. 절대자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있는 것처럼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이런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성육신은 불가능하다. 존재함이 확인되지 않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세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일 수가 없다.
슐라이어마허가 시작한 자유주의를 완성한 릿츌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보통 사람이고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그는 다른 종교 설립자들과 같은 하나의 종교가이고 탁월한 윤리교사이자 사랑의 화신이다. 예수가 이러한 존재이면 기독교는 그의 사랑을 모방하여 사는 종교일 뿐이다. 예수가 특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어서가 아니고 단지 이러한 훌륭한 윤리의 실천과 가르침에 있다.
이런 신학은 20세기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되었다. 불트만은 칸트에게서 시작하고 슐라이어마허가 잘 발달시킨 비신화화 작업을 완료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육신은 현대 과학적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신화적인 기술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 후에는 초자연적인 것은 다 배제되었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부정되면 기독교가 특별한 종교일 수가 없다.
종교다원주의를 정립한 카알 라아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부인하여 누구나 다 성육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허공에다가 발언하므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갖는다. 또 하나님도 자기 통보를 계속하신다. 그러나 역사 내에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존재 통보와 인간의 자기 초월이 합쳐졌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절대적인 구세주이다.
인간이 누구든지 자기의 실존을 진지하게 받으면 그는 유일신론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재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교도들도 다 자기의 실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이 종교인들로 사는 한 얼마나 자기 생을 진지하게 살고 자기 생이 진실된 생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진력하는가? 그러므로 그는 유신론자이고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다.
한스 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카알 라아너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인의 합일이 이루어져 그가 절재적인 구주가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것이 전유적으로 일어나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이 배척되고 누구나 다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도 동일한 가치를 갖고 동등하게 절대자에게로 인도한다. 단지 그리스도교는 절대자에게 이르는 특별한 길이고 다른 종교들은 절대자에게 이르는 정상적인 길이라는 데만 차이가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만 믿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하여 기독교가 자체 부정을 하여 다른 종교들을 정상적인 종교로 인정하여 주게 되었다. 한스 큉은 힌두교, 불교, 모하멧교 등을 정당한 구원종교로 인정하였다.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20세기 최대 신학자로 서품된 카알 발트는 다른 면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나오도록 도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모든 인간 본성을 존중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때문에 모든 인류가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되었다. 전통적인 선택교리에 의하면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로 나뉘었다. 그러나 발트에게 있어서 모든 인류가 선택되어 선택교리는 밝은 빛일 뿐이다.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다. 모든 사람이 다 선택되었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선택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선택되었는데 누구를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겠는가? 이렇게 발트의 신학에 의하면 신불신간에 다 선택되었고 다 구원에 이르도록 되었으며 힌두교도나 불교도나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나 다 동일한 구원에 이르게 작정된 자들이다. 그러면 종교들 간에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모든 종교들은 다 동일하여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 된다.
20세기 삼대 신학자로 꼽히는 폴 틸리히도 종교다원주의가 나오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틸리히에 의하면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사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다. 종교가 궁극적인 관심사이면 종교의 대상인 하나님이 인격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객관적인 실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틸리히는 신론을 완전히 비 신화화하였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창조주가 아니다. 신은 존재의 근거이고 힘이다. 신은 용기이고 의미이다. 절망적일 때 신을 소망으로, 불안할 때 신을 용기로 보면 삶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자기의 존재가 불안하고 불확실할 때 신을 존재의 힘 혹은 존재의 기반으로 긍정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새 존재가 나타났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새사람이고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틸리히의 신학에 따라 하나님이 인격적인,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고 창조주가 아니면 신을 어떤 존재라고 하면 무슨 상관인가? 종교가 궁극적인 관심사이면 무슨 종교를 선택하든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종교가 더 나으냐는 선택한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면 기독교만을 택해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의 정당성이 다 상실된다.
2. 로마 교회의 이방 종교들의 인정 결정
로마교회는 모든 고등종교들은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종교로 결정하므로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종교다원주의를 기독교의 교리로 삼았다. 로마교회는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로마교회와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를 결정하였다. 바티칸 공의회는 카알 라아너의 신학으로 결정되었으므로 그의 글에 나타난 대로 하였다. 이로써 교회의 교리적인 지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완전한 신학으로 정립되어 다른 종교들에게 선교가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같이 사는 아름다운 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정하였다.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결정사항은 종교에 관한 교리적 구성(constitutio dogmatica de ecclesia)의 제 2장 하나님의 백성(De pipulo Dei)의 16조에서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도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배정된다고 결정하였다. 바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면 복음 없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확정하였다. 또 이방 종교들에게 나타나는 선과 아름다움도 다 하나님이 일로 말하고 절대자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제 종교다원주의가 완전히 교리로 정착하여 이방종교들이 완전한 가치로 인정되었다. 그런 종교들도 다 동일한 절대자에게 도달할 수 있고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만을 유일한 구원 종교로 주장하고 믿을 것인가? 모든 종교들은 다 하나님께로 가는 정상적인 길이 되었다. 이제 기독교 세계에서 종교다원주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행되고 정당한 권리로 자리를 갖게 되어 기독교의 선교를 불필요하게 하였다.
3. 종교다원주의의 근본 신조
(1)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다. 모든 종교들은 일정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절대자 혹은 신을 경험한 것을 체계 화한 것이므로 다 동일하고 동등하다.
(2) 예수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비 신화화해야 한다.
(3) 예수가 중심으로 삼은 신 중심에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하였다. 그런데 여기 예수가 경험한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고 궁극적인 실재이다.
(4) 그리스도는 구주로서 혹은 구원의 원리로서 모든 종교들에게 현시되었다.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나타난 구원의 상징이다.
(5) 종교 간의 대화는 존속에 필수적이다.
4.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판
종교다원론자들은 기독교의 근본을 다 부정하고 비 신화화하여 자연주의적인 종교를 만들면 타 종교와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이것이 인류의 종교경험을 풍성하게 하며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면 기독교는 종교로 성립하지 않고 해체된다. 다른 종교들은 본래가 자연적인 종교들이므로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것도 없고 비 신화화할 것도 없다. 그런 종교들은 대화를 하면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인정받게 되므로 더욱 자기들의 종교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종교들 중의 지위가 향상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종교이므로 이 기독교의 근본 요소들을 다 제거하면 기독교는 해체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남아 있지를 않게 되어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유익을 나눌 사람도 없게 된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해체의 종결을 위한 마지막 시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들 간의 대화를 위해 기독교만이 자기 해체와 부정을 했지 다른 종교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다른 종교들은 자기들의 종교가 유일한 종교이고 바른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주저나 양보가 없다.
기독교도들과 불교도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 종교체험을 서로 나눌 것이 있을 것인가? 불교는 선을 해서 깊은 명상으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무념무상에 도달한 경험을 말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다 제거되어 기도할 대상도 없어져 버렸는데 무슨 특별한 종교 체험을 생산하여 불교도들과 다른 종교들에게 그들의 종교경험에 덧붙여주어 풍성한 종교 생활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의 근본을 해체하고서 기독교도들은 세계 종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지게 된다. 오히려 기독교를 버리고 깊은 명상과 선을 하여 종교생활의 묘미를 맛보는 불교로 개종하도록 돕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종교간 대화를 통하여 한 종교는 없어지고 다른 종교는 흥하도록 돕는 것이 본래 종교 대화의 목적인가? 종교 간의 대화로 기독교가 무슨 유익을 얻어 종교생활을 풍성하게 할 것인가? 불교는 신도 없는데 종교의 근본인 신 경험에 도달할 수 있는가? 종교다원주의로 세계 평화는 성취되지 않는다. 동일한 종교 내에서 조금의 차이를 내어도 종파들 간에 심하게 싸우며 이웃하고 오래 산 종교 종족들 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데 종교다원주의로 결코 세계 평화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같아서도 종족들이 이해가 달라지면 언제나 싸우게 되어 있다.
5. 결론(구속 신앙의 사수)
기독교는 성경의 주장대로 믿을 때만 기독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생명을 잃는다. 기독교는 진리이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 세상은 하나님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 아래 매이므로 창조주를 대신하기 위해 많은 종교들을 생산하였다. 그 종교들은 다 우상숭배의 종교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의 주장대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이다. 성경의 주장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고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 이 피를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되어 죄와 사망에서 구출되고 영생에 이르러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성경은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이방 종교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문서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창조주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구원의 방편으로 성경을 자기의 말씀으로 기록되게 역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만이 창조주이고 구원자이다. 혹은 귀신들을 섬기는 우상 종교들이 있을 뿐이다. 절대자는 이름도 없이 존재하는 자가 아니며 막연히 궁극적 실재로 상정된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냥 사람의 수양은 다 헛수고이다. 다른 신들은 다 인간의 심성이 만들어낸 상상물이다.
이 종교가 이제껏 너무 과도한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이 주장을 철회하고 또 그런 주장들을 한 것이 너무 오만했다고 회개하고 다른 종교들과 같은 형태로 변형시켜 대화를 하여 세계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타협 없이 기독교가 로마 세계를 정복하였다면 지금도 성경대로 믿고 선교하면 왜 지금이라고 그런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 그의 피에 죄의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행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구원을 이루었고 완전히 이루었다. 오직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일반 종교들이 없어지지 않고 그 존재영역을 확장하기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가 나오게 되었지만 그들은 다 선교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기독교를 일반 종교의 수준으로 낮추므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여 본래의 힘을 회복한다면 종교다원주의는 하나의 유행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릇된 신학의 도전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고 다음 세기에는 구속신앙으로 굳게 무장하여 선교 영역을 더욱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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