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지에서의 전도 - 전도의 어리석음 (유경애)

수호천사1 2012. 5. 18. 22:00

선교지에서의 전도 - 전도의 어리석음   

유경애(GMTC 교수)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그 동안 여러 종류의 선교 운동을 통해 세상에 충분히 복음을 전했으니 더 이상 전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기계문명의 혜택으로 손쉽게 세상을 구경할 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가는 데는 2000년 전이나 21세기에나 동일하게 인간적인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데오, 라디오, 비행기, 자동차, 인터넷과 같은 기계적인 도구와 미디어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데는 시간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사람들이 편리하게 세상의 구석구석을 들어가면 갈수록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어려움은 더 가파른 산을 오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에서의 전도에는 지름길도 없고 다른 비인간적인 도구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다. 어리석어 보이는 선교지에서의 전도를 위해 어떤 전도자가 요구되는가를 선교지 상황과 더불어 잠시 고찰하려고 한다.

선교 훈련원을 거쳐간 졸업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세상 여러 구석에서 복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세상 속에서의 전도는 과연 어떻게 할 때 성공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 이 소고의 목적이다. 개종자를 많이 내는 것도 훌륭한 성공의 척도일 수 있지만 여기서의 성공이란 무조건 많은 개종자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참된 하나님의 통치를 펼쳐갈 때를 의미한다.

중동지역에서 온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종교의 자유는 그 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유럽의 다른 나라와 동일한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마련된 법적 조치라고 한다. 그러나 각 개인은 자신이 종교를 갖는 데서나 직업을 갖는 데에 거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 그 나라는 인도 같은 카스트 제도가 눈에 띄는 곳도 아닌데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가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종교란 종교가 아니라 그 나라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그 인격의 일부라는 것이다. 곧 종교는 그것이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선택요소가 아니라 국민적인 민족성의 일부라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도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신분 상승의 욕구는 있으나 스스로 노력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실력을 갖추기 위해 명망 있는 대학교를 나와도 연줄과 뇌물의 고리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번듯한 직장을 얻을 수 없어 고학력자들이 실업자로 빈둥거린다고 했다. 이렇게 자유와 인간적인 존엄성을 박탈당한 그들에게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두 번째 사례는 동남 아시아 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특별히 모슬렘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들과 복음의 진리를 나눈다는 것은 복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에 적대적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복음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벧전 2:8) 되었으나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롬1:17). 복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기에 복음 자체의 특성상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복음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런 만남의 다리를 놓을 매체를 찾는 데만도 2년 여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가 검도를 가르치고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은 복음을 직접 증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듭난 현지인들이 자국의 모슬렘들에게 전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다른 이슬람 지역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곳의 경우는 공산주의가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놓은 곳이어서 파고 들 틈이 보이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은 더 많은 곳이다. 이 선교사의 이야기는 좀 다른 부분을 제시하였다. 그는 상당히 성공적인 전도를 그것도 이슬람 지도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고 간증하였다.

대부분 이슬람교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 그렇듯이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은 종교로서의 이슬람이기보다는 하나의 신분과 정체성으로서 현지인들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어서 종교와 분리하여 자신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피부에 와 닿는 곳에서부터 시작할 때 관계 형성이 가능하고 또 나아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들의 세계관 속에 자리 잡은 일그러진 존재감을 조심스럽게 들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권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고 그를 경외하고 높이는 대화는 상호적으로 수용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 시키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죄 가운데 멸망하여도 스스로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 편에서 어떻게 인간이 되어 내려 오셨는가를 전하면서 그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했다고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코란 속의 예수가 아니라 참된 구주 되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세월을 두고 증거 하되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도덕성과 가족의 사랑을 동시에 본보기로 보였다고 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선교사가 삶으로 나타내 보였을 때 그들의 지도자인 이맘까지도 진리 앞에 머리를 숙였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런 전략을 알지 못해서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선교지의 선교사에게서 나타난 몇 가지 개인적인 독특성을 바울의 선교사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첫째 그는 투철한 소명의식과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졌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결단을 가졌다. 그가 노방 전도와 가가호호 전도를 하러 다니느라고 육체의 지침 때문에 새벽기도를 주님께 양해를 구하고 쉬려고 하였을 때 주님은 환상으로 그에게 맡긴 영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결국 선교지 영혼을 두고 영적인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그가 보았을 때 더 이상 육신의 쉼을 갖지 못하고 성령의 강권함으로 인해 기도의 파수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바울도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라고 고백했다.

소명과 영혼에 대한 강력한 열정은 사도 바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다. 바울 서신의 서두는 그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하기 위해 소명 받았는가를 반복하여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고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엡 1:1)이라고 자신의 분명한 정체감을 나타냈다. 갈라디아 1:11-17에서 바울이 전할 복음이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 바울의 선교의 위임에 대한 첫 언급이라고 피터 오브라언(Peter O'Brien)은 말하고 있다.1

선교지에서 어떤 정체성을 지니고 무엇을 하는가 확신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선교지에 자기를 보낸 교회나 후원자들이나 혹은 선교사 자신의 이름이나 업적을 남기려 간다고 한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상당히 많은 반면 비교적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본국에서 보내는 헌금으로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 또 다양하고 구체적인 기구들을 설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가시적이며 사람들의 눈을 끌고 그 일을 해낸 자에게 칭찬을 쉽게 돌릴 수 있는 일들이다. 흔히 선교지 입국이 어려워져서 사업체를 만들어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교사로의 부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위해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와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다른 어떤 능력을 입은 자에게 맡기지 않고 가장 연약한 선교사에게 소명하고 권한을 부여하여 사람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제자들로 증인 되게 하셨고, 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마태 28:20, 벧전 1:12 참고).

세 번째 사례의 선교사에게서 발견한 두 번째 사실은 그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삶에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것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에서 어떻게 현지인들에게 동화해 들어갈 것인가는 여간한 고민이 아닌 것이다. 바울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어떤 자유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아가서 그가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그 대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참고 견디노라고 고백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다 (고전 9:22하).

여기서 현대 선교사가 가지는 어려움은 단순한 물질 소유와 육신적인 편안을 추구하는 욕구를 절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본국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를 버리는 일은 선교사에게 요구되는 것 중에 큰 헌신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성육신의 동기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성공적인 선교사에게서 보는 세 번째 특성은 전하는 메시지의 우주적인 효율성에 대한 확신이다(엡 3:6,9). 선교사의 메시지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으로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사람들을 진지하게 돌보는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만족감을 누리는 가운데 척박한 상황에서도 부상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나온 선교사의 경우, 삶이 척박한 환경에서 종교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한 예로 그가 그들과 함께 라마단을 지킬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모슬렘들이 해 있는 동안만 금식하였을 때 그들의 금식하는 동기는 천국을 얻기 위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 앞에서 1주간의 주야금식을 하였다고 했다. 그의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에서 한 금식이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슬렘 형제들을 사랑하여 금식하였다고 했을 때 모슬렘들이 그를 재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인 행동을 능가하는 행동과 그들의 도덕을 능가하는 도덕으로 그들 속에서 그들을 섬기게 되었을 때 그들의 적대감이 없어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섬김의 삶이다. "섬기는 일은 모험"이라고 로렌스 크랩(Lawrence J.Crabb,Jr.)은 말하였다.2 섬기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름 사람의 유익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선교지에 나간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갔겠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는 자신의 마음 깊이 내재해 있는 동기를 바르게 점검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도구로 쓰임이 되지 못하고 자신을 섬기는 자로 남을 수 있다.

짧은 소고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내적인 소명의 확신과 그를 보낸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그들이 지닌 복음의 우주성, 그리고 그들의 성육신의 태도 등을 언급하였다. 선교지의 전도가 어렵게 되면 될수록 선교사의 내적인 준비는 더욱 강하게 요구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를 준비시키고 보내는 교회의 역할은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보낼 사역자를 발굴할 때 헌신만을 볼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은사가 있음을 확인하고 또 그런 은사를 개발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한편 선교 헌신을 결심하는 사람들에게 내적인 준비로서 높은 소명의식과 높은 헌신과 높은 자기 절제 및 성육신적인 태도를 갖추는 일이 중요함을 일깨울 수 있었다면 이 글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겠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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