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 선교
시골 교회 예배당 안에서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친 지가 언제부터인가? 요즘에는 시골 교회 예배당 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그립다. 태인 시찰 목사님들이 모일 때에 교회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하면 모두들 부러워하며 신기하게 여긴다.
우리 교회에는 몇 년 전부터 예배 시간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 때문에 예배가 방해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어쩔 때에는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여서 예배 후에 내가 “참, 엄마들이 아이들 단속 좀 하질 않고 예배가 방해받게 하다니.” 하면서 투덜거리노라면 목사님은 “시골 교회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 나는 것이 복인 줄 알고 넓은 아량으로 보시오.” 한다. 하긴, 예수님께서도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부모들을 꾸짖은 제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시면서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쓰다듬어주시고 나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고 하셨음을 생각할 때 빙긋이 웃을 수밖에 없다.
우리 교회에 새댁이 3명이나 생겼다. 그 중에서 2명은 베트남 여성이다. 두 베트남 새댁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중매를 했다. 한 명은 부인을 암으로 잃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왔고, 또 한 명은 노총각에게 시집을 왔다. 그들에게 중매를 할 때 결혼을 하면 반드시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을 약속받았었다. 그러나 한 부부는 신앙생활을 잘하여 여러 가지로 복을 받았는데 다른 한 부부는 아직도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고 부인만이 어쩌다 한 번씩 교회에 나올 뿐이다.
목사님이 중매를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다 보니 아이들은 없고 다들 노인들뿐이었다. 그리하여 고민을 하던 중, 마침 그 때에 외국인 여성과의 결혼이 유행을 했다. 그러나 막상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하고자 선뜻 나서는 당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 때 우리 부부는 무릎을 쳤다. "옳거니! 시골교회에 아이들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만들어내야겠구나." 하고는 시골에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 주변에 한국 여성과 결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시골 노총각, 상처한 남자, 그리고 이혼한 남자는 한국 여성과 결혼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목사님은 중매쟁이가 되기로 하였다. 마침 그 때 교회로 주 1회씩 배달되는 기독교 관련 신문이 있었다. 거기에는 각종 광고가 실려 있었다. 그 신문을 뒤적거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추진하는 ◯◯◯ 웨딩회사가 눈에 띄었다. 그 회사에 관한 정보를 조사하고 직접 사장님이신 장로님과 통화를 하여 자세한 정보를 수집한 후, 당장 결혼이 시급한 남자를 두 명 물색하였다.
그들이 바로 얼마 전에 암으로 아내를 잃은 우리 교회 집사님과 우리 교회 구역으로 얼마 전에 이사를 온 늙으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노총각이었다. 그 어머니께서는 이사 오기 전에 다니던 교회에 다니시지만 새벽기도회와 수요일 밤 예배는 집에서 가까운 우리 교회에 나오신다. 그 권사님은 결혼 못한 늙은 아들 때문에 새벽기도 시간에 늘 우셨다.
두 남자들과 면담을 여러 번 하였다. 여러 번의 설득과 조언을 통해 많은 난관을 헤치고 그들은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몇 달 후에 두 젊은 베트남 새댁이 우리 교회 구역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 교회 집사님 아내 되는 자매는 믿음이 있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그 주일부터 교회를 나와 처음에는 말도 알아듣지 못해 힘들어 했으나 차츰 한국생활에 적응도 빠르고 말도 여느 베트남 여성보다 더 빨리 익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변의 베트남 여성들의 조언자 역할을 잘 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주변의 다문화 가정의 모델이 되어 많은 시어머니들이 그녀를 본보기로 삼아 외국 여성 며느리의 기준으로 삼곤 했다. 잘 적응하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다문화 가정의 가족들은 그녀와 그녀의 시어머니를 부러워한다.
다른 한 편,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 다른 한 명의 베트남 여성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권유로 가끔 교회에 나오다가 그나마 아이가 생긴 후로는 그것마저 끊어버리더니 비슷한 때에 한국에 온 두 여성은 한국생활의 적응 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두 자매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어느 날, 성도 중의 한 분이 찾아 와서 이웃면에 사는 언니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목사님이 외국 여성과의 중매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면서 동생네 집에 왔는데 노총각이 돼버린 막내아들 중매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바로 즉시 결혼 회사를 운영하는 장로님에게 5년 만에 전화를 했다. 장로님은 원래는 300쌍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 목표였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까지 약 700쌍의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하면서 이제는 연세도 많아서 1000쌍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그만둘 계획이라고 하면서 즉시 다음 날 함께 그 집에 가보자고 흔쾌히 대답하셨다.
다음 날 우리 부부와 성도님, 장로님과 그의 아들은 그 집에 가서 상세히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하였다. 한 명의 외국 여성이 한국에 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건만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는 일이니 어쩌겠는가? 결혼이란 하나님의 맺어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어느 날 수천 마을에 사는 성도님이 전기선이 오래 되어 벗겨지고 약해져서 밤에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노라고 하였다. 며칠 전에 TV에서 전기로 인한 화재 사건을 방영한 것을 보고 나더니 밤마다 불길한 꿈을 꾸기까지 한다고 걱정을 땅이 꺼지게 하여서 전기선을 교체하러 그 집에 갔다. 목사님이 전기선을 교체하는 동안 그 성도님과 나는 집 옆에 있는 모정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성도님이 그 마을에 캄보디아에서 시집 온 새댁 얘기를 하였다. 새댁이 적응을 잘 못해서 온 식구가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하였다. 그 캄보디아 새댁은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고 식구들과 아무것도 대화가 되지 않아 늘 침울한 표정으로 죽지 못해 사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각자 따로 따로 여서 지옥 같은 삶을 산다고 하면서 결혼을 잘못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 삼자인 나는 각자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언어가 불통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마음이 되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었다. 마침 그 때, 시어머니 되는 분이 택배 기사를 맞이하러 모정에 나오셨다. 그래서 우리 셋이는 캄보디아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게 되었다.
내가 그 시어머니에게 "제가 며느리의 한국말 공부를 시켜 볼까요?" 라고 했다. 그 시어머니께서는 매우 고마워하면서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리하여 그 다음 주부터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 한 두 시간씩 그 집을 방문하여 남편은 시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나는 캄보디아 여성에게 한글공부를 가르쳐주게 되었다.
서로 언어가 달라서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언어 교육을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영어 교사였으므로 차라리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면 더 쉽겠다 싶었다. 그나마 그 여성이 캄보디아에서 기본 교육은 받았는지 쉬운 영어 단어를 알고 있어서 조금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어려운 점은 그 여성이 성격이 활달하지 않아서 소극적으로 공부에 임하므로 좀 힘이 들었다.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하는 말은 "몰라."였다. 매 주 자료를 만들어서 가는데 어느 날은 좀 흥미롭게 공부를 하고 어느 날은 도무지 막막하여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내가 그런 투정을 하노라면 남편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니 참고 해 봅시다."라고 나를 달랬다. 그러니 언어를 미리 익히지 못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루마니아로 떠난 박 목사님 부부가 더욱 더 생각났다.
어느 날은 공부를 하다가 한국 음식 중에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김밥"이라고 하여 다음번에는 함께 마트에 가서 재료를 구입하여 김밥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제안을 했더니 시어머니도 기뻐하고 며느리도 좋아하였다. 목요일이 되어 그 집에 가서 그녀를 우리 차에 태워서 마트에 가서 온갖 종류의 물품들을 가르쳐주고 김밥 재료를 사왔다.
<김밥 만드는 법>의 자료를 인쇄하여 부엌 벽에 붙여 놓고 함께 김밥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무슨 일에 흥미로워 한다고 시어머니께서 기뻐하셨다. 그녀는 열심히 만들었다. 그 다음 몇 주 후에는 <볶음밥 만드는 법>을 인쇄하여 가져다주었더니 그것도 부엌 벽에 붙여 놓고는 다음 날 혼자서 정읍에 나가 장을 봐왔다고 하면서 그 날 저녁에 식구들에게 볶음밥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하였다. 어쨌든 시어머니께서는 며느리가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고마워하셨다.
우리 부부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그 집의 세 명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시어머니와 아들과 며느리가 이런 기회에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 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의 싹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내가 부흥회 초청장을 갖다 주고 한 번 나오시라고 했더니, 일생동안 한 번도 교회 문턱을 들어서 보지 않은 시어머니께서 부흥회 동안 두 번이나 참석하셨다. 그리고 김장을 하고 난 후 김치 한 통을 들고 교회를 찾아 오셔서 전해 주셨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새벽기도회와 금요일 밤 기도회 때마다 합심하여 기도한다. 교회 문턱을 한 번이라도 넘은 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해주시라고.
한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전도를 하다 보면 어찌나 어둠의 영들이 불신자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며, 티끌과 같은 나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때가 되매 부르셔서 전도의 아름다운 사명을 맡기셨으니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 목회를 하다 보니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늘 실감하며 산다.
구약성경의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흉년을 맞이하여 진득하게 인내하지 못하고 더 편하고 풍족한 삶을 찾아 모압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떠나 살다가 남편이 죽고 두 아들도 죽고 아이도 없는 두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만 남아 빈털터리가 되어 사는 중에 고향 땅에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큰 며느리는 친정과 자기의 신에게로 돌아가나 둘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자 아무것도 없는 빈천한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함께 이스라엘 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약간 다른 얘기일 수는 있지만 오늘날 한국에 시집을 오는 외국 여성들을 만나면서 옛날의 룻을 떠올려본다. 어찌어찌하여 이방인과 결혼하였으나 결국 그 길이 하나님께 구원받는 길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들은 룻처럼 진정 복 받은 여자들이다.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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