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관과의 비교 |
1. 서론
올바른 세계관을 분별할 일곱 가지 기본 질문 |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 |
3) 인간은 무엇인가? | |
4) 인간의 사망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 |
6)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 |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
2. 기독교적 유신론
1)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며, 전지하시고, 주권자이시며 선(善)이시다.
2) 하나님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개방체계(open system)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t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
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니고 있다.
4) 인간은 주위의 세계와 하나님 그 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 안에 심어 주셨으며 능동적으로 인간과 교통하시기 때문이다.
5)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6)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 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7) 윤리는 초월적이고, 선(거룩과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8) 역사는 직선적인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가는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2. 이신론 : 시계와 같은 우주
1) 제1원인(a First Cause)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 두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事)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 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
3)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4) 우주 즉 이 세상은 타락했거나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인간은 우주를 알 수 있고 우주를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5) 윤리는 일반 계시에 국한된다. 우주는 정상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 준다.
6) 창조시에 역사의 과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다.
3. 자연주의 : 유한한 우주의 침묵
1)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한다.
3)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이다.
4) 사망은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5)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인 목적성은 없다.
6)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4. 허무주의 : 영점(零點)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다. 즉 모든 가치에 대한 부정이며, 자연주의의 자연적 산물인 극단의 무의미 상태이다.
5. 실존주의 : 허무주의를 넘어서
▶ 무신론적 실존주의
1) 우주는 단지 물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2)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 낼 수 있다.
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
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5) 객관 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를 하는 진정한 인간(authentic person)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한다.
▶ 유신론적 실존주의
1)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이다.
2) 인격적인 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3) 지식은 주관적인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
4) 사건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화되고 생활화될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6.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 동양으로의 여행
1) 아트만(Atman)은 브라만(Brahman)이다. 즉 인간의(각 개인 모두의) 영혼(soul)은 우주의 영혼(Soul)이다.
2)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
3) 많은 길(비록 모든 길은 아닐지라도)은 유일자로 향하고 있다.
4) 우주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인격을 초월하는 것이다.
5) 우주와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지식을 초월한다. 궁극적 진리가 관계된 곳에서는 모순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6) 우주와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선악을 초월하는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다.
7) 죽음은 개인적, 인격적 존재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것은 불변한다.
8)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은 비실재이다. 역사는 순환적이다.
7. 뉴 에이지 : 또 하나의 실재
1)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관념이든 혹은 물지, 에너지 혹은 입자이든) 자아가 중추, 곧 최고의 실재이다.
2) 우주는 자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또 다른 두 개의 영역 - 평범한 의식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보이는 우주, 그리고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통해서 접근이 가능한 보이지 않는 우주[혹은 큰 정신(Mind at Large)]-에서 발현된다.
3) 뉴 에이지의 핵심적인 경험은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인데 그 안에서는 공간, 시간 그리고 도덕성과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져 간다.
4) 육체의 죽음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다. 우주 의식에 대한 경험이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5) 실재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뉴 에이지의 일반적인 틀 안에서 다음 세 가지의 독특한 해석이 있다.
참고서적)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제2판), IVP.
8. 포스트모더니즘
1) 포스트모더니즘이 다루는 첫째 질문은 무엇이 존재하는가 혹은 그 존재하는 바를 우리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언어가 의미 자체를 구성하기 위해 어떻게 작용하는가이다. 달리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이 존재(being)에서 인식(knowing)으로, 인식에서 의미 구성(constructing meaning)으로 변천되었다.
2) 실재 그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3) 모든 서사(narratives)는 파워 플레이의 변장이다. 메타서사로 사용된 어떤 서사도 억압적이다.
4) 인간은 자신에 대해 구성하는 언어들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만들어 나간다.
5) 윤리는 인식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구성체이다. 사회적 선(social good)은 사회가 받아들이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
6) 문화의 선봉장은 문학 이론이다.
참고서적)
제임스 사이어, 포스트모더니즘(“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의 제3판에 추가 - 국내에는 소책자로만 출판), IVP.
기독교 세계관
양승훈
1. 서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생각하시고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본질의 연장인 인간도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록 그의 사고의 깊이의 심도와는 무관하더라도. 그런데 인간의 사고활동은, 언제나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세계관에 근거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다. 세계관이란 철학자나 심호한 사상가에 국한된 호사품이 아니라, 그가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뒷바침하고 있는 세계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우리 세계(세상)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견지하는 바 일련의 전제들 (혹은 가정들)이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1) 참된 최고의 실재(reality)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의 사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이와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과 인생과 문화전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기독교적 안목을 말한다. 다음 장에서 왜 이러한 다소 난해해보이는 것들을 고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냉랭한 지식만의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있는 깊은 문제 - 우리들을 오류로 이끄는 몇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먼저
(1)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함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主님으로 인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시간 및 재물사용, 앞길의 계획의뢰함 따위에만 국한시켜 왔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은 교회, 사회 심지어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요 1:3, 골 1:20, 마 28:18, 행 2:36)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주인(主人) 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문화 사회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과 생활 양식을 개발하여 좀 더 완벽히 융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2) 이원론(二元論)적 행습의 탈피를 위하여서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관찰, 인식함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사고의 틀의 부재 혹은 거부로 말미암아 사고가 이분되거나 그릇된(지나친 혹은 소홀한) 강조를 하거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분열 증세를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심각한 분리를 야기시켜 신앙과 생활 모두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이제 우리 주변에서 그 구체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첫째로 동양종교(특히 불교)의 탈세속적 자세 및 유교의 형식주의와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 요행, 맹목적 열심 등에 의하여 우리의 종교심은 깊은 영향을 받아왔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초자연적인 것과의 결부로 인하여 신앙과 생활의 분리가 야기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에 비해 숱한 고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현재적 책임보다는 미래의 천국의 모습에 편중되는 모순을 낳았다.
셋째로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펼쳐나가기가 어려우므로 이 가운데 상존하는 긴장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원론적 경향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전임 사역자보다도 실생활의 많은 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반 신도들 사이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는 대표적 패턴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타협형,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이런 생활에서 도피하는 분리형, 그리고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이원론형이 있다. 특히 이원론형은 자기의 이중적인 면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몰인식과 이원론을 지양하는 이런 방향에의 교육이 부재한데 기인한다. 기성교회의 다분히 공리적인 목회방침이나, 여러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이 일반 전공과목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것들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3) 풍성한 삶으로 회복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너나할 것없이 모두다 풍성한 삶(요 10:10)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흔히들 이 풍성한 삶을 '영적 생명', '중생', '새로운 피조물' 등등의 개념으로 혹은 현재적 축복(건강회복, 사업의 발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풍성한 삶이란 훨씬 넓은 창조의 전 영역과 창조의 본질적 성격,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잠재력(성, 예술, 학문, 사회)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올바른 안목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왜곡된 생각 속에서 자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았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위의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떠한 안목을 가지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3. 기독교 유신론(唯神論) - 기독교 세계관
17세기말까지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해왔고, 그 뒤에 발전된 여러 세계관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 유신론은 그 세계관의 기본명제가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를 알아본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며, 주권자이시며, 善하시다' 라는 명제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 - 자존(自存) - 과 그의 속성의 정수인 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실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최고의 실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은 거룩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고, 여기에서 우리는 의의 절대적 표준(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되는, 요일 1:5)과 그래도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사실(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요일 4:16)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또 다른 명제, "윤리는 초월적이고, 그것은 선(거룩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윤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며, 도덕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 표준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셋째 명제로는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개방체계(open system)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f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 이 명제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선재하는 물질"이 없는 상태 - 시간, 공간 물질까지도 - 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이 우주는 질서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재조정에 의하여 변경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우주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숙고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명제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창 1:26, 27)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참다운 창조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라는 명제와 더불어 다음의 명제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도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은 택할 수도 있다' 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속-영화"의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같이 인간도 선하게 창조된 자로서 매일의 생활에서 그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이제 원래의 창조된 의도대로 되는 영화(glorified)의 과정에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그 순간부터 개인의 삶은 천국으로의 연속 시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의 명제 '역사는 직선적인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라는 것에 접근한다. 비록 인간의 행위가 혼란하게 보일지라도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으며, 그것은 창조-타락-구속-영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섯째 명제로는 '인간은 죽음은 하나님 및 그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중 하나이다' 에서 영화된 존재로 변화된 자들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천국과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통하고 있다'는 명제에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의 교통하심은 "계시"라고 표현되는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한 특별계시로 이루어진다. 특별계시의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이시자, 지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자요 친구가 되신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바로 사람과 교통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들고 싶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순종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참고서적)
1) 제임스 사이어 지음, 김헌수 옮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 1985.
2) 송인규,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5
올바른 세계관 선택을 위한 小考
양승훈
1. 서론
사람은 비록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해도 다양한 세계관들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정은 그 선택된 세계관의 여하에 따라 잘못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관 선택의 자유는 개인에게 모험과 책임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왜 많은 세계관 중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선택해야 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난 호의 기독교 세계관 소고에 이어 다른 세계관 -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 에 대해 발생동기와 인간론, 도덕론, 인식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이신론
이신론은 전통적 기독교에서 제시한 섭리, 예지, 의지, 운명에 대해 장황한 논쟁을 하던 이들이 신학과 철학의 혼란한 논쟁을 벗어나 어떤 지적 통일을 이루고자하는 시도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욕구와 더불어 하나님은 이성적 신이기에 그가 만든 우주도 합리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따라서 연구의 대상이라는 근거에서 우주의 형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연구한 하나님이 만든 세계의 상(image)은 질서정연한 거대한 기계, 기어와 지레가 기계적으로 정확히 맞물리는 거대한 시계처럼 보였다. 이는 더 많은 탐구와 발견을 자극하였고 근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더우기 이에 의해 신지식에 대한 권위의 근거가 특별계시에서 이성으로 옮겨졌으며, 우주의 구조는 거대한 시계로 비유되었고, 하나님은 그 시계의 제조자로 간주되었다.
이들 사조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중 첫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하여 '제1원인(a first cause)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라고 전제함으로써 하나님은 인간과 소외된 존재로서 인간에게 엄청난 고독감을 안겨다 주게 되었다.
우주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성격을 지니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가 없다고 봄으로써 인간은 그 체계 안에서 어떠한 변화도 창출할 수가 없다.
인간론에 있어서도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중의 하나인 부품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결정력을 잃게되고 인간의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윤리에 관해서는 우주는 정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창조시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라 생각하고, 재조정이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신론은 짧은 기간동안 학문 세계에만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이신론이 빨리 사라진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로, 윤리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우주를 가정하여 우주는 자연회 모든 것이 선으로 흐른다면 윤리의 독특한 내용은 설 탕을 잃게 되었다. 둘째로, 인식론의 면에서 개별에서 보편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성(infinite mind)이 필요하나 이신론 안에서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째로, 인간 본성면에서 인간의 재조정에 대해 닫혀진 세계에서는 그 인격과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자연주의
이신론은 유신론과 자연주의라는 두 개의 큰 대륙을 연결하는 지적 호기심의 이행기에 불과했지만 자연주의는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중대한 사조 중의 하나이다.
이신론에서는 하나님을 창조주 또는 인격은 없지만 우주의 암시적 유지자로 보는 반면 자연주의에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실제적 가치가 없는 이론적 실제로만 생각한다.
자연주의 기본 내용은 첫째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에서 본질의 중심 요소가 하나님에서 우주로 옮겨가게 되었고, 실재는 기계적, 공간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단위들'로 구성되며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 그 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불변의 '법칙률'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우주는 보는 관점에서 이신론과 유사한 사상체계를 가지지만 이신론과는 달리 사건의 발생 순서와 그들의 의존관계 및 사물의 존재 양식 등이 고정 불변의 필연적 단계가 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고 불확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이 개념에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그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여했다.
셋째로, 인간과 인격에 관해서는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고, 인격이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라고 전제함으로써 인간의 이해력은 순수한 신비가 아니고 기계의 복잡성에서 유래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화학적, 물리적인 성질의 다양한 의존 관계가 불확정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로, 죽음은 인격과 개체성의 완전한 소멸로 간주한다. 즉 전인격이란 사회적, 물리적, 상황 안에서 활동하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작용이며, 인간의 존재란 사망 시에 소멸한다. 이 같은 전제는 인간을 덧없는 존재로써 규정짓고 말았다.
다섯째로,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 목적성은 없다.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의도하신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목적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자연주의는 그 과정이 자율적이어서 단지 역사는 인간이 계속 존재할 때까지만 <지속>할뿐이다. 만일 인류가 소멸하면 인간의 역사도 소멸하고 자연의 역사만 계속될 것이다.
여섯째로,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라는 명제에서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이 가치의 부여자로 본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의식과 자기 결정적인 인간과 함께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윤리도 인간과 함께 성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이전의 선악의 분별력에 관해서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도덕적 가치 근원을 인간의 경험에서 찾고 있으며 인간 생존 유지를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둔다. 이의 주요 결점은 자기의식과 자기결정력이라는 <존재>가 가능성의 <영역>에서 선으로 향한 <당위의 영역>으로 자연적으로 진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주요 내용들을 다루어 보았는데 이 사상들이 과학적 연구방식과 각급 학교의 교육 및 사회 모든 분야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자연주의는 정직하고도 객관적인 인상을 주고 많은 사람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비판자들에 의해 허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비판이 자연주의 내부의 불일치에서 더욱 크게 노출되고 있다. 즉 자연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또한 그처럼 불분명한 기원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두려움을 야기시키고 결국은 허무주의를 낳게된다.
4.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다. 즉 모든 가치에 대한 부정이며, 자연주의의 자연적 산물인 극단의 무의미 상태이다.
자연주의 사고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이성의 결과는 확신할만한 것이 못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우주의 폐쇄적 성질은 하나의 제한으로 느껴졌으며, 죽음이 소멸이라는 관념은 심리적 불안을 야기시켰고, 자연의 최고 산물로써 인간의 지위는 우주로부터 소외나 우주와의 연합-따라서 인간을 해변가의 조약돌 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으로 간주되었다.
자연주의에서 허무주의로 건너가게 된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면, 자연주의의 첫 번째 명제 '물질은 존재의 전부이며 영원히 존재한다'와 둘째 명제 '우주는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제로 운행한다'에서 자연주의는 폐쇄체계를 불확정인 것으로 간주하여 도덕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지만 폐쇄된 우주에서의 불확정성이란 인식되지 않은 확정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써 어떠한 차원에서든지 우주를 변경시키려는 힘도 우주의 한 일부분이고, 또한 현재의 상황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주의는 인간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이 비인격적인 힘의 결과로 존재한다면, 즉 물질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작용한다면 물질이 의식적 존재로 하여금 정확한 관찰과 옳은 전제에 기초한 참된 인식이나 논리적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도덕론에 있어서도 자연주의자들은 세계란 단지 거기(There)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도덕적 당위(Ought)를 느끼게 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윤리의 최고 가치를 인간 생존의 유지에 둠은 윤리적 상대주의를 초래하였고, 이는 가치 사실(the fact of Value)를 지적할 뿐 결코 절대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연주의는 자연히 윤리적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재판정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범죄의 사실(the fact)이 아니라 죄책감(the feeling of guilt)만 남아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인간론과 인식론, 도덕론은 절대적 가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인간에게 극도의 의미 상실을 안겨다 줌으로써 자연히 허무주의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살펴보았다.
5. 실존주의
실존주의의 중요한 목표는 허무주의를 초월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고, 이러한 좌절과 문화적 불만의 토양 속에 실존주의는 문화적 뿌리를 내렸다. 실존주의는 자생적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세계관들과의 관계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크게 구분된다.
우선 알베르트 까뮈나 장 폴 싸르트르에 의해 제창되었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고찰하고, 또한 19세기 중반에 죽은 정통교회에 대한 반응으로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하여 신 정통주의로 연결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명제를 제외하고는 자연주의 모든 명제를 긍정한다.
이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첫째 명제는 우주는 단지 물질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는 세계는 단순히 존재했고 그때 새로운 의식적 존재인 인간이 탄생했다. 그래서 (그 이유는 모르지만) 주관세계와 객관세계가 있게 되었다. 자연주의는 객관세계를 실재로, 주관세계를 그 그림자로 간주하여 두 세계의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실존주의는 두 세계간의 불일치를 강조했으며 의식과 자기결정력에 의한 주관세계를 선호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인간론에 있어서는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관세계의 왕이므로 내적으로 자유롭고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신론적 실존주의 관점에서의 객관세계는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되어 있어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그 중 가장 극복하기 힘든 궁극적인 부조리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이 인간을 한 객체로 만든다는 확실성과 생에 대한 사랑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가치창출을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객관세계의 최종 무기인 죽음 앞에서 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순종하는 수동성이나, 함께 부조리에 직면했다는 사실에 위로함을 받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고, 부조리에 도전하여 어엿한 인간이란 사실을 매 순간 자신에게 입증하는 의식적 선택행위를 선이라 본다.
이상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도덕적 근거를 인간에게 둠으로써 인간 본래의 권리를 가졌다는 의식을 충족시켰을 뿐이지 각 개인을 초월하는 도덕적
준거점을 제공하지는 못하였으며, 죽음이 없다면 가능했을 의미들을 종식시켜 버렸고, 나아가 허무주의를 넘어 단지 유아론(唯我論), 즉 80여년간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에 도달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유신론의 명제들을 받아들이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출발점이 하나님과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며 하나님은 인간이 의심없이 확신할 만큼 자애로운 신이라는 완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아니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결정력과 개인의 확신을 통한 선택이라는 신앙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결단한다고 본다.
또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인격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논리 하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인경의 만남으로 해석하여 유신론 체계 자체의 풍요함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전통적인 유신론의 관점에서 가장 문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성경의 역사성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사건의 기록으로서 역사는 불확실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화된 모델, 유형, 신화 등으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적을 신화화했고, 성경은 역사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한 전통적 유신론자들의 비판은 어떻게 일어나지 않은 사건(일어나지 않은 부활)이 소망이나 실로 다른 어떤 것의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말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려면 먼저 사건이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의미창출을 주관세계에 둠으로써 객관적 준거점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사하다. 또한 의미의 근거로서의 사실성을 포기할 때 그들은 자연히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미마저도 포기하게 될 것이다.
6. 결론
이제까지 기독교 유신론에서 실존주의까지의 여러 세계관을 살펴 보았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올바른 세계관인가? 그것은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내적인 지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둘째는 실재의 자료를 모두 포함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는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신론에 이어 실존주의자까지의 모든 현대사상들은 많은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음을 살펴보았고, 기독교 유신론만이 진실한 설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 유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지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인격이 있으신 우주의 주재(主宰)에게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진정 살만한 가치있는 검토된 삶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참고서적)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제임스 사이어 지음, 김헌수 역,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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