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조 |
▶ 성경이 창세기 1:1의 천지창조에서 시작을 하여 인간의 타락,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어지듯이 세계관의 기본틀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 구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틀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창조 |
타락 |
구속 | ||||||
1. 창세기 1:1 “태초(太初)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시니라.”
창조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만물이 어디서, 어떻게 기원했는지를 알 때 비로소 만물의 존재 이유와 목적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논의는 먼저 창조주와 창조에 관한 성경 기록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창세기 1:1은 창조주와 창조에 대한 독특한 기독교적 시각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시각들을 다음 장에서 하나씩 살펴보자.
1) 창조주 하나님
2) 太初(시간의 시작)
3) 天(공간의 시작)
4) 地(물질의 시작)
2. 창조주 하나님 ; 신론(神論) → 전 강의에서도 강조했듯이 우리는 창조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 내재(內在)하시면서 동시에 초월(超越)하시는 분
☞ 내재하심만을 강조하면 범신론(하나님을 피조세계에 흡수시키거나 동일시)에 빠지게 되고, 초월하심만을 강조하면 이원론(초월적인 영역과 자연적인 영역으로 이분하여 자연적인 영역은 신과 무관)이나 이신론(시계의 창조자, 하나님과 시계로 이분)에 빠지게 된다.
???? really real reality ; 진실로 실존하는 존재(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자존적이며 나머지 가시적, 비가시적 대상들은 피조물로서 일시적이고 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여타의 다른 세계관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 성경(특히 창세기)은 하나님은 누구시며, 왜 만물을 창조하셨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서술한 책이다.
3. 창조기사에 대한 성경 기록의 독특성
ⅰ) 무(無)로부터의 창조(창 1:1, 히 11:3, 롬 11:36)
태초 ; 시간 time | |
천(天) ; 공간 space | |
지(地) ; 물질 matter | |
20세기 현대 물리학 이전까지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물질은 절대 물리량이라고 생각을 했다. 따라서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으며, 물질도 없는 절대 무(無)의 상태를 성경 기록 시대의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다고 생각기 어렵다.
ⅱ) 유일신관(唯一神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주변 국가들의 속국과 같은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변 국가들의 다신론이나 범신론, 애니미즘 등이 아닌 유일신관을 유지함에는 신적 영감이 있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
하나님의 1차적 창조물 ; 긍정적인 부분 | |
인간 죄성의 2차적 부산물 ; 부정적인 부분 ex. “안…”, “못…” |
하나님은 창조 일주간 동안 매일매일 지으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간혹 세상의 불의와 가난, 전쟁, 미움 등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위의 표처럼 부정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1차적 창조물에 대한 타락한 인간 죄성에 의한 2차적 부산물일 뿐이다.
4. 창조의 의미(목적) ; 관계, 안식
(1) 창조 기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설명했듯이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라는 관점보다는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에 관점을 두게되면 우리는 창조를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관점은 ‘하나님은 안식을 하신 그 다음(제8일)에는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점과 ‘일하지 않은 인간과 피조 세계는 왜 제7일에 쉬어야 하는가’라는 점에 의문이 생긴다.
② 하지만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에 관점을 두고 창조의 기사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창조의 의미(목적)를 깨달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며 그 무엇을 지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피조 세계를 완성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초대된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함께 참여하는 ‘에덴에서의 안식의 영광’이다.
(2) 창조의 원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온전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외에 사랑과 정의, 완전하심에 대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음의 창조기사에 관한 도표를 보면 그 하루하루에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성품이 창조의 원리로 느껴진다.
준비단계 |
첫째날 빛 |
둘째날 궁창/물의 분리 |
세째날 마른 땅+식물 |
여섯째날
인간 |
일곱째날 안식 (하나님+인간+자연) |
공존단계 |
네째날 발광체 |
다섯째날 새/물고기 |
여섯째날 짐승 |
▶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기사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창조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미리 준비된 공간’과 그 공간에 어울어져 함께 ‘관계하는 피조물’의 창조이다.
▶ 인간 창조(창 1:26-2:31) ; 창조기사의 제일 핵심인 인간 창조를 살펴보면 ‘관계하는 피조물’의 창조라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ⅰ)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인간창조’
① 창 1:27 / ‘하나님의 형상대로’
② 창 2:7 / ‘...생기를 그 코에’
③ 창 2:15 /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④ 창 2:16-17 / ‘네가 임의로 먹되...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
☞ ③, ④의 의미는 ①을 기초로 하고 있다.
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기초한 ‘인간창조’
① 창 2:21-22 /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취하시고’
② 창 2:23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③ 창 2:24 / ‘둘이 한 몸을...’
④ 창 2:25 / ‘...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3:7)
ⅲ)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기초한 ‘인간창조’
① 창 2:7 / ‘흙으로 사람을...’
② 창 1:28 / ‘땅에... 모든 생물을...’
③ 창 1:29 / ‘...너희 식물이 되리라’
(3) 창조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창 2:3) ‘안식’이다. 그렇다면 이 안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ⅰ) ‘안식일’은 모든 피조세계의 근본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 신 5:15 /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 출 20:8-11 / 일의 쉼
ⅱ) ‘안식일’은 단순히 하나님의 하시던 일을 멈추고 쉬신 날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안식에는 다른 피조물도 참여한다.
- 출 20:10 ; 레 25:4
ⅲ) 이 안식을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가? 에덴! / 창 2:8-25
* 사람의 삶의 터전인 에덴(기쁨, 안락)동산의 모습을 살펴 보라.
- 강(생명), 보석, 각종 실과, 에덴의 관리자(사람)
- 하나님의 임재 장소
- 동물과의
- 사람과의
- 언약 / 하나님 나라의 완성
5. 결론
1) 창조주(자존적 존재)와 피조물(의존적 존재)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 만물의 자존을 주장하는 반성경적인 대표적 이론이 진화론이다.
2) 창조 가운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있다.
- 시 19:1-4 ; 롬 1:19-20
3)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 창조(하나님의 목적)는 역사 전체에 걸쳐 피조물을 통해 그분의 선하심과 영광(평화, 안식, shalom)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안식]을 명령하셨다.
4) 피조세계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
☞ 창세기 1:28과 2:15의 문화명령은 사람을 이끌어 에덴에 두시고 다스리며 지키는 가운데 [안식]을 누리고 유지하라고 하신 것이다.
- 기독교 정신이 상실된 세상에서 -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과 이해에 관한 소고>
신동식목사
--- 차 례 ---
3. 창조-우리의 진정한 고향
3-1. 언약 관계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
3-2. 창조적 인간의 진정한 가치-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됨
3-3. 하나님의 형상이 증거 하는 의미
3-4. 인간은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3-5. 소명을 이루기 위한 일상생활속의 삶
3. 창조-우리의 진정한 고향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창조"의 모습일 것이다.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신앙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창조의 기사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창조"그 자체에 대해서 학자들의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깊은 관심은 갖지 않는 것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우리는 창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문제는 왈쉬와 미들톤이 제기하였던 "나는 누구인가? 혹은 인간의 본성과 사명과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란 무엇인가? 단순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만 할 것인가? 그러나 창조를 단순히 생각하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창조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의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창조의 방법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한가지는 창조는 "말씀"으로 되어 졌다는 사실이다. 창1장은 이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창1장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즉 명령과 창조의 응답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는 창조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를 명령에 순종적인 반응의 한 패턴으로 이루지게 하였고, 이러한 창조의 방법을 좋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바로 창1장의 창조 후에 일곱 번의 좋았더라는 표현이 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창조란 창조주의 주권적인 행위와 창조질서의 상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운행되어진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에 의하여 창조된 세상에 질서와 구조를 주셨다. 이것은 모든 창조의 영역이 전 우주적이며, 전 문화적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말에는 창조의 세계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선하게 창조된 세계는 일정한 목적을 향하여 발전되어 나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창조의 열매가 이미 작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창조 안에 종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의미는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의 현시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언 8:22-31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의 작품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지혜를 세우시고, 탄생시키시고, 세웠다고 말씀하신다. 지혜이신 하나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지혜로운 창조주께서 탁월한 계획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의미이다. 지혜는 단순히 추상적인 의미로,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세상을 설계하시고 명하신 지혜로운 방식이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계가 말씀과 지혜로 되었으며, 선하게 창조되었고,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발전해 나가도록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한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뒤에 이어질 타락과 구속의 문제에 있어서 쉽게 이해를 줄 수 있는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을 우리는 "문화명령",또는 "창조명령"이라고 부른다.
언약 관계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말씀과 지혜로 창조하신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구조를 형성하여 주었다. 즉 혼돈된 세상 속에 질서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서가 흔들릴 때 모든 피조물은 안정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창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응답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상대적 가치에 기준을 두게 되면 무질서와 혼란이 오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에 중심을 두면 무질서가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기본 관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말에 신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저녁에 나타나는 별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번도 변동이 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상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이 땅에서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그럼 이 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창조는 하나님의 언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과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와 맺은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될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께 언약적으로 결속되어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한다. 전 우주는 그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통하여 경배와 찬송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창조적 인간의 진정한 가치-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됨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존재의 의미이다. 인간존재의 의미의 상실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듯 오늘의 시대는 처절하게 만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 버렸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의미의 정립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다준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활동들에 대한 바른 가치와 의미 그리고 삶의 활력을 준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한 확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은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문화명령의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자연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어떤 종교도 인간의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는 것이 환생이니, 최면을 통한 과거여행이니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무수한 공허만이 남을 것이다. 현대화된 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에는 더 이상 존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생물학에 말하는 것처럼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란 단순히 DNA구조 차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낙태에 대하여 합법화를 해야 한다는 소리가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아직도 일부 나라에선 인간의 우열을 나누고있으며 그래서 장애인들의 아이를 갖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죽음이 미화되어 용기있는 일들이라 하며 혼전 성관계가 영웅시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순결, 인간의 존엄성은 이미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파괴 속에 신뢰는 살아지고 처절한 사투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이 이 땅의 가치관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 오늘의 현실의 주범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인간다움의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고 천명한다. 바로 이 사실이 사람의 가치가 동물의 가치와 동일하게 인정되고 이 시대를 바르게 치유할 수 있는 첫 번째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적 인간의 의미는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독창적인 형상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에서 인간을 만들고 말씀하시기를 심히 좋았다라고 하신 의미는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다. 이 땅의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적 인간의 의미가 갖는 두 번째 의미가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 즉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선포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반사체이다. 인간은 인격적인 자유인으로 지음 받았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이라는 사실이다. 비인격에서 인격이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인격체는 반드시 인격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비록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인격이 비정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의 존재가 가치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성이다. 이 인격성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적 인간의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의 제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됨의 목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를 사랑하되 변함없이 사랑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떠나면 언제나 죄의 자리에 서게 된다. 넷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혼을 사모하는 능을 가진 살아있는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것이 사람의 진수이다.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것 바로 영혼을 소유한 것이다. 동물과 본질적이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사람됨의 절정인 것이다. 이 사실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원숭이와 동격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증거 하는 의미
첫째로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더구나 DNA구조를 가진 단순한 생물체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한 자이다. 이 사실은 내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듯 나의 이웃도 동일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이기심 그리고 소경이 되어버린 인간의 인권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우리 주님도 마18:12-14에서 소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존귀성을 들어내었다. 인권이 경시되고, 생명이 우습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존귀성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큰 죄이다.
둘째로.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 사람은 인격체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겼다. 얼마 전에 방영하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두 작품 "쉰들러리스트"
와 "아미스타드"는 인간이 얼마나 가치없이 팔렸고 죽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것은 결코 옛일이 아니다. 미인대회의 여자들의 모습과 온갖 성인영화의 의도 그리고 광고모델에 동원된 사람의 모습은 인격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현대판 아미스타드호를 탄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찌 자동차 모델은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가? 신발 광고에 수영복을 입은 여인의 등장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상품화된 인간은 인격은 간데 없고 소모품처럼 달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돈을 위하여 자식을 사창가에 팔아 넘기고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인간사회의 무질서와 인간성의 파괴는 극에 달하는 것이다. 더욱더 인간은 상품화되어가고 결국 시장에 널려있는 고깃덩어리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매우 뚜렷하게 선언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8]
인간은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존재의 근원, 존엄성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존재는 문화명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문화명령은 그 상관성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창조된 인간의 소명의 선언으로서의 창조명령[문화명령]과는 곧이어 연관되어 기록하고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이 시대에 사람의 존재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만물을 맡기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아담은 하나님에게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다스림은 소비와 파괴와 그 결과로서의 문명의 발전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이 다스림은 "그 본성을 연구하여 그 생물들을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즉 창 2:15절과 같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는 일 Cultivate(경작)의 일하는 것이요, take care of 즉, 돌보는 작업인 것이다. 이 사실을 좀더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다스린다는 것은 cultivation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듬는 것 즉 개발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성장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야 할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다듬[개발]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문화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문화활동의 중심이 있는 것이다. 이 다듬음[개발]의 역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 질 새로운 도시인 새 예루살렘성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의 왜곡은 바로 이 다듬음[바른 의미의 개발]의 실패에 있는 것이다.
화이트는 그의 저서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오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기독교적 창조신학은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형성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은 창조의 완성이며 창조의 중심이다. 하나님이 인간 창조이전에 창조하신 피조물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들이다. 더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
권이 있다고 보았다.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받은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며 세계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신학의 세계관은 자연에 대한 절대의존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이상으로 자연을 정복하며 인간의 과학과 산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결국 환경파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창조신학은 생태계 위기의 주범이 되었고 인간과 세계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발달 시켰다. 그러나 탈근대화와 더불어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서 이러한 자연 정복의 세계관은 자연과의 조화의 세계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화이트는 지나온 역사 속에 이루어진 기독교의 오류를 잘 지적하고 있다. 지난 시절의 기독교는 발전 위주의 가치로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성경의 세계관이라고 본 것은 매우 잘못 보았던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신학은 이원론적이고 계발위주의 신학이 아니다. 다만 이 계발의 의미가 왜곡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오류는 다음의 사실에서 분명하게 증명되어진다.
둘째는 "지키라"는 take care of의 뜻으로 보존하다, 보호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들을 다듬고 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창조하신 세계를 다듬으면서 잘 보존하고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큰 명제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이 어떠한가? 바로 지키지 못해서 온갖 더러움과 추잡함이 난무하지 않는가? 공해의 심각성 그리고 자연의 황폐화 그리고 인간성의 강퍅해짐 이 모두가 우리가 지켜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들인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의 조화와 보존의 세계관은 탈 근대화와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말씀하여진 사실이다. 다만 인간의 어리석음이 이 사실을 왜곡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기독교는 철저하게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현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바른 사상을 가르치지 않음으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였고, 결국은 오늘날의 현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바른 목적을 가르치기보다는 왜곡된 목적을 부과함으로 아이들이 철저한 이원론적 사상으로 물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바른 성장과 보존의 의미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더 이상 돌아 갈 수 없는 늪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술, 담배는 물론이고, 성적 순결에 있어서까지 무감각해져 버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는 세대 속에서 어떻게 다스리며. 지키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우리에게 이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으로 개발시키고, 보존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고 우리에게 확실히 말하고 있다.
이상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모방하는 모든 인간의 활동인 것이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9:7, 시 8편, 히 2장).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창 2:15, 히 6:7, 약 3:3,7,12, 5:7)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명령을 하나님은 죄 짖기 이전의 첫 인간인 아담에게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문화명령" 또는 "창조 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를 탐구하여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 옮아가게 작정하였던 것이다. 즉 인류의 생활은 자연적 상태에서 시작되어 도시 생활로 이전되어 간다는 것이다. 요
한 계시록은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가지고 그 도시로 들어올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계21:24]
창 1:26-28로 주어진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인간 문화의 기원이 되었다. 시편 24편 1절의 표현은 이러한 모습은 더욱 실제적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땅에 "충만한 것"또는 "가득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셨다. "충만하라"는 명령은 단순하게 많은 자녀를 가지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더욱 광범위하게 자연과의 상호 작용에 있어서보다 광범위한 방식에 있어서의 "충만"인 것이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질서가 주어졌을 때 에덴 동산을 "정복하라"는 것은 길들지 않은 자연을 사회적 환경으로 변형시키는 일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와 권능의 현시인 문화의 충만을 시작하기 위해 인간을 그의 피조물 가운데 놓아두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실 때는 전원적 장소를 만드셨다. 그러나 새로운 천국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변혁시키는 사역의 산물은 첫 낙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도성에 이를 것이다. 즉 새 예루살렘에 이른다는 것이다.
거룩한 도성에는 에덴 동산 더하기 "충만한 것"이라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새로운 성 예루살렘에는 구속받은 새 인류만이 모이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진행된 모든 문화 업적들이 수용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도시이다. 비록 왜곡된 역사이지만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되찾으실 것이며 그렇게 함에 있어 그것을 창조물에 의도했던 류의 "충만한 것"으로 변혁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적 업적들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변혁되는 것이다. 비록 이 문화가 범죄한 인류의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졌어도, 하나님의 명령의 성취된 열매들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편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화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창조를 탐구하여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 옮아가도록 작정된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낙원에서 출발했지만 도시의 삶으로 전이해 간다. 이것은 역사의 종국에 이르러서 인류는 첫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도시인 새 예루살렘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예루살렘성은 구속받은 새 인류만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역사에 진행된 모든 문화 업적들이 정화되어 수용되는 곳이다. 바로 도시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사명들은 하나하나 소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받은바 달란트의 사용인 것이다.
문화명령은 세계관의 구조인 ‘나는 누구인가?’를 올바로 이해하게 하여주는 것이 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의 현시인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진행케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이 창조 세계를 위임받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명령은 타락이전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세계가 왜곡되었다 할 지라도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우리의 살판나는 삶의 근거가 바로 문화명령의 중심에 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한 일상생활 속의 삶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우리가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 위해 일상생활 속의 삶에서 해야할 것은 첫째로 우리 자신이 피조물들 속에서 그것을 통해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전10:31]"
바울이 말하고 있는 표현의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그것이 가족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는 주부의 일이든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는 일이든 또한 배우는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소명은 이 땅위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은 오직 교회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오늘날 교회의 무서운 전염병인 이원론적 신앙을 낳았으며 결국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매우 빈약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이 아담에게 주었던 그 명령의 모습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이 일상적인 삶에의 충실히 곧 하나님의 주신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회복의 첫 단추는 바로 이 피조물을 통하여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만 한 가지 제한이 있다. 그것은 죄의 문제이다. 즉,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 수행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영적이라는 말은 매우 실감나는 이야기이다[고전6:12-18]. 딤전4:4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며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이 사실의 강조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현장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다른 사람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간다. 그것이 설교하는 일이든 가르치는 일이든 음식을 만들고, 아이를 기르고, 기계를 만지고, 운전을 하며 장사를 하고, 자신의 주어진 학업에 열심을 내는 일이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섬기는 일이 되어진다면 그 어떤 것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주었던 문화명령을 우리의 것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모습과 우리 가운데 펼쳐져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본다면 앞선 창조의 아름다움에 혼란이 온다. 무엇이 이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선물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여기에 다음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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