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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교(儒敎) 이해

수호천사1 2012. 3. 2. 04:59

유교(儒敎) 이해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는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불/도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인 면을 중시하여 약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정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녕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교양의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의 방지와 국가경륜의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의 부흥에 힘써 유학의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인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의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홍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의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었다. 안향에 의해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에 의한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의 수용으로 인해 그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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