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어간 수 많은 선배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가슴 시리도록 감사하다. 피뭏은 그리스도의 복음에대한 불타는 확신을 가지고 이땅의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다간 선배들에게 빚진자로서 그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배어있는 그 선교의 현장을 엿보고자 한다. 겸손히 그들의 서있던 헌신의 자리에서 함께 무릎꿇고, 고뇌하던 아픔의 순간에 함께 울며, 승리의 자리에서 함께 기뻐하고, 그들의 생명이 포기 되어진 그 현장들로 그리스도를 위해 즐거이 헌신하며 나아가는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기도한다.
조나단 고포드: 중국 만주 부흥운동의 주역
부흥이라는 단어로 삶 자체를 정의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닌 조나단 고포드일 것이다. 그는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8세에 회심하였고 1887년 토론토의 Knox 대학 학생으로서 D.L 무디가 이끈 대학 복음화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사역을 준비하고 있던 한 젊은이로서 고포드는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기록한 허드슨 테일러의 책을 읽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아 중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삶을 헌신하게된다. 고포드와 그의 아내 로잘린드는 테일러의 중국 내륙 사역에 동역 하는 대신 그들 지역의 장로교회의 후원아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고포드는 호난성에서의 효과적 사역을 위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테일러에게 서신을 보냈다.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 팀이 호난성 사역에 실패한 적이 있어서 고포드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였다. 테일러는 그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젊은 선교사에게 “무릎으로 전진하라” 답장을 보내왔다.
고포드의 초기 중국 사역의 많은 부분은 중국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데 할애하였다. 그가 사역할 당시 “의화단”이라 알려진 사람들이 유럽 상인들의 착취와 학대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의화단의 분노는 선교사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1899년 12월31일, 의화단 단원들은 한 명의 선교사를 살해하였는데 이 사건 후에, 중국의 황후는 모든 외국인들을 국외로 추방한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인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대 학살이 일어났는데 그 여파로 백 명이 넘는 선교사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고포드 부부도 그 사건으로 심하게 몸을 다치고 간신히 탈출하였다. 세계는 의화단 사건에 대해 군사력으로 대응하였고 북경을 포위한 후 옛 질서를 무너뜨렸다. 중국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박해와 핍박의 때에 크리스챤들이 보여준 순교와 담대한 용기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포드를 통한 부흥은 1907년 한국 방문 이후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한국 교회의 부흥 소식을 처음 접한 이후로 부흥을 열망해 오던 고포드는 한국 순회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 깊이 감명 받은 그는 한국의 부흥운동이 성령의 깊은 감동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기도생활에 도전을 받았는데 중국에도 이 같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호난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국에서 목격한 것을 그곳 선교사와 나누기 위해 목단이란 곳에 들렀는데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깊이 감동하였고 한 주간의 특별 집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집회는 그리 희망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를 초청한 목회자는 집회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고포드가 부탁한 기도모임은 전혀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첫 집회 후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흐느끼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 사람들은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가 기도하자마자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냐? 아니면 나의 일이냐? 내가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말이냐?” 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는 말씀이 생각났다.
다음날 아침 집회 전에 교회 장로 한 명이 고포드를 만나러왔다. 그 장로는 주체하지 못하는 흐느낌 속에서 자신이 교회 재정의 일부를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사용했음을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자신의 죄를 교회 앞에서 죄를 고백하며 전액을 변상해야 함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말했다. 설교 후 그 장로가 죄를 고백하자 한 성도가 비난의 고함을 질러 댔지만 깊은 감동을 받은 많은 성도들이 하나 하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곧 눈물 바다가 되었다. 마지막 날 집회가 끝나자 한 남자가 얼굴에 주체치 못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중 앞으로 나아왔다. 그는 이틀 전에 소리를 질러댔던 장로였는데 자신의 죄를 성도들에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저는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세 번이나 아내를 독살하려 했습니다.“ 그는 끼고 있던 팔찌와 반지를 빼어 헌금함에 넣었고, 또 장로증을 꺼내 조각조각 찢으면서 말했다. “저는 교회를 욕되게 했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몇 명의 사람들도 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 무익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목사도 성도들 앞으로 나왔다.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제가 마땅히 할 일을 했다면 이분들이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저 역시 사임해야만 합니다.” 담임 목사가 죄를 회개하며 통곡하자 온 성도들 가운데 회개의 영이 임하였고 전도운동으로 연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부흥의 불길은 이번에는 선교사들에게로 번져갔다. 집회 마지막 시간에 온 회중이 하나되어 무릎을 꿇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위해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연말이 되어 수백명이 돌아왔고 그들 대부분은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않았었다고 고백했다.
목단에서의 집회는 고포드가 중국 전역에 서 인도한 몇몇 집회 중 첫 번째 집회였다. 고포드는 2년 동안에 중국의 6개성에서 30여 차례의 집회를 열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지만 공개적인 죄의 고백은 만주 부흥 운동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는 단순히 “여러분들은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많은 집회에서 고포드가 기도를 권유한 후에 공개적인 죄의 고백이 따라왔다. 우상숭배, 도적질, 간음, 도박 , 아편, 불순종, 증오, 다투는 것, 거짓말, 사기, 공금 유용 등 그 내용은 실로 다양했다. 그러한 죄의 고백을 통하여 사람들은 철저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고포드의 부흥회 사역은 엄청난 수의 개종자들을 얻었고 교회의 개척과 기독교 학교들의 성장을 가져왔다. 고포드는 만주 지방과 중국을 여행하면서 선교 사역을 했는데 동료 선교사들과 후원자들의 몇 명은 그의 전도열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들은 고포드의 집회에서 성도들이 흐느껴 울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광신적”이고 “오순절”적인 운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고포드는 이러한 비난들을 무시하고 복음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그의 부흥회의 절정은, 1918년 기도교인인 펭 유지앙 장군의 휘하의 병사들을 상대로 열었던 2주간의 집회에서였다. 부흥회가 끝날 무렵에 5000명의 병사와 장교들이 은혜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탁월한 전도자로의 명성을 얻으며 가는 곳마다 놀라운 영적 부흥을 경험한 고포드 사역의 뒤안길에는 많은 역경과 시련이 함께 했다. 화재와 홍수, 도둑,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1600km나 되는 먼길을 생명의 참담하게 쫓기는 경험도 해야 했다. 하남 북부 지역에서 갓 세워진 교회들은 카톨릭의 공격으로 와해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카톨릭은 계속적으로 고포드의 뒤를 따라 다녔다. 1년간의 수고가 일주일만에 무위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고포드에 따르면 “카톨릭은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돈을 주었고 장학금과 기숙사를 포함한 무료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많은 기독인들이 카톨릭으로 발길을 옮기는 주요 원인이었다.” 고포드는 “돈을 가지고 사람들을 끄는 일은 없다”고 말하며 물질로 선교하는 식의 사역은 하지 않았는데 결국엔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역을 위해 고포드와 아내 로잘린드 선교사가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고포드의 사역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이다 보니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 어린아이들을 떼어놓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사역의 기간 중에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중국 땅에 묻어야 했다. 로잘린드는 하나님께 대한 남편의 헌신을 귀히 여기며 전적으로 후원하고 동역했지만 고포드가 그녀와 자녀들에게 좀 더 관심을 쏟아주기를 원했다. 그는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남편의 사랑을 확증 받고 싶어 한 것 같다. 1908년 병환으로 아이들과 캐나다로 떠나기 전 그는 “나는 고향에 가도 얼마 못살 것 같아요. 만약 당신에게 와달라고 전보를 보내면 와 주시겠어요?” 라고 물었다. 고포드는 명확한 답을 회피 한 채, “만약 우리 나라가 전쟁 중이고 내가 사령관이라면 가족들이 어려움에 있다고 해서 집으로 갈 수 있겠소? 당신은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오?” 라고 물었다. 로잘린드는 슬프지만 “아니에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포드가 겪었던 또 다른 어려움은 선교회 내의 노선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자신이 속해 있던 장로교의 엄격하고 경직된 규칙“위에 두었다. 로잘린드에 따르면 ”고포드는 성령께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장로교 회원들과 마찰을 빚었고, 다른 선교사들과 협력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고포드는 특별한 혜택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선교사들은”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문제만도 아니었다. 고포드는 자주 자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동료들로부터 비판, 방해 받고있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고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더욱 강력하게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전하고 그 능력을 드러내는데 전념하였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병들어 죽거나 나이가 들어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고포드는 73세의 나이로 여전히 열정에 가득 차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녔다. 심지어 눈이 어두워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중국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 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74세가 되었을 때 캐나다로 돌아가 마지막 남은 18개월을 집회를 인도하면서 보냈다. 그는 잠든 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 주일마다 네 번씩 설교하는 등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조나단 고포드, 그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중국에서 사역한 선교사중에 가장 탁월한 전도자 중의 한 사람 이었으며, 헌신된 한사람의 일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이신 영혼을 향한 사랑과 부흥의 진면목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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