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무엇이 주의 날인가? 3 (G. Ph.van Popta)

수호천사1 2012. 1. 5. 20:58

무엇이 주의 날인가? 3

 

 - G. Ph.van Popta -

 

 

제3부: 주의 날 지키기

 

주의 날은 예배를 위한 날이다


어떻게 우리가 주의 날을 기념해야 하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또 우리에게 안식적인 쉼을 가져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함으로 기념해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19-31절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히브리서 10장은 예배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며 또 자신을 출교와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교회에 가기를 중단하는 것, 즉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들을 사용하고, 단체 기도에 참예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독교적인 구제하기를 중단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경망스러운 예배 형태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참으로 위험스럽다.


민수기 15장 30-36절에서는 “고의적이지 않은 죄” “고의적인 죄 즉 오만 방자한 죄” 사이를 구분한다. 주님께서 오만방자하게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언약 백성 중에서 끊어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주워 모은 것은 안식하라는 명령을 무시하여 주님의 명령에 비추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삽화는 히브리서 10장에서 신약의 짝을 발견한다. 2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은 한 주간 첫 날 즉 주의 날에 거행되었던 우리가 잘 아는 공적인 위배를 위해 함께 정규적으로 모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계속 읽는 바를 경청하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히 10:26-31).

 

히브리서 10장은 더 나은 지식을 거스르는 고의적인 죄를 암시하고 있다. 이 죄에 이용할 수 있는 속죄 제사가 없다. 안식일에 나무를 주워 모은 사람보다 주의 날에 교회에 가는 것을 중단한 사람이 훨씬 더 죄질이 무겁다. 교회에 가기를 중단한 사람이 훨씬 더 죄질이 무거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았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했던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다. 또 그는 은혜의 성령님을 모독했다. 교회 안에 이와 같은 회원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손 안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또 그와 더불어 결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 6장의 말씀으로, 교회에 가기를 중단하고 그리고 성도의 교통 안에서 예배를 더 이상 드리지 않는 형제자매는,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형제와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동시에 주님을 공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를 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회원들은 단지 가시와 엉겅퀴만 산출하기 위해서 새롭게 하는 비를 깊숙이 빨아만 들이는 밭과도 같다. 종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셔서 태워버리실 것이다.

 

히브리서 4장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철저하게 훼파될 것이다. 광야에서 완고한 반역자들과 같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과 민수기 15장 사이의 유사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수기 15장에서 출교와 사형에 합당한 고의적인 죄로 인용한 실례는 안식일에 쉬지 않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교회에 더 이상 가지는 않는 것이 출교와 영원한 죽음을 초래하는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로 선포되었다.

 

또 그러하기에 주의 날은 예배에 대한 것이다. 교회에 가서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주의 날이다. 초대 신약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여서 무엇을 하였는가? 신약 교회는 혼신을 다하여 사도적인 가르침에 열중하였고, 주의 만찬을 기념하였고, 기도하였고, 교제하였다(행 2:42). 우리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주의 날은 나무를 줍거나 불을 피우는 것을 삼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주의 날은 예배에 대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주일 예배 훑어보기


우리는 몇 가지 자료에서 초대 기독교 예배를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자료는 로마 황제 트라얀에게 보낸 플리니의 편지이다. AD 112년 어간에 비시디아(북서 터키 지방) 총독이었던 플리니는 로마에 있는 트라얀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플리니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필요한 지침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조사한 것을 쭉 밝혀놓은 보고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해진 날, 동 터기 전에, 정규적으로 만나 마치 신에게 하듯이 그리스도를 찬송하기 위해서 그들이 직접 선정한 구절들을 가지고 노래했다.” 그들은 또한 함께 평범한 식사를 했다.

 

순교자 져스틴으로부터 약 AD 150년에 기록한 것으로 사료되는 문서에서, 우리는 필시 기독교 예배에 대한 가장 완벽한 초기 예식서를 가지고 있다. 제일 변증서에서 져스틴은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요일은 우리 모두가 공동의 모임을 갖는 날인데, 왜냐하면 흑암과 어려움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던 바로 그 날이며, 그리고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날인데, 이는 그분은 토요일 전 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요일 뒤에, 이는 태양의 날이기도 한데,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그들에게 이것들을 가르치셨다, 우리는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여러분에게도 건넸다.

 

순교자 져스틴은 예배를 말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와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예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낭독되고 또 설교되었다), 단체기도(시편이 포함되어 있다), 공동 식사 그리고 자기 소유를 드리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기독교회 초기 몇 년 동안 한 주간 가운데 첫 날이 근로자들과 노예들에게는 일하는 날이었다. 플리니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동이 트기 전에 만났다. 예배를 드린 후에 그들은 일하러 가야만 했다. AD 321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법정 휴일로 칙령을 내렸을 때에 이 행습에 변화가 왔다.


비록 시민 정부가 일요일을 휴식하는 날로 제정했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예배드리라는 당연한 요청에 부응했다.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르침은 초대 교회가 일요일을 준수하는데 있어서 유대주의적인 안식엄수주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6세기 당시에, 유대주의적인 안식일의 모든 영광이 일요일로 전이되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받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아를스 케자리우스의 가르침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538년의 올레앙 회의가 유대주의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이런 추세를 거부했다. 이 말은 주의 날이 신약에서의 구약 안식일인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오래된 논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개혁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일요일


기독교 역사는 1560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한 주간 첫 날이 어떻게 준수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일 첫 공적 예배 약 30분 전에 종이 울렸고, 그리고 첫 예배가 시작될 때에 두 번째 종일 울렸다. 평신도 지도자가 성경 읽기를 인도했고, 몇 번의 기도를 인도했고, 운율한 시편을 노래했다. 예배의 이 부분이 거의 한 시간을 소요했다. 그 다음 목사가 강단에 올라왔다. 기도와 찬송을 더 많이 하고 난 뒤에 설교가 전달되었고, 더 많은 기도, 신경 낭독과 축복이 뒤따랐다.


두 번째 예배는 대개 오후에 개회되었다. 두 번째 예배에서는 칼빈이나 혹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나 자녀 교리문답을 가르치는데 헌신하였다. 실제적으로 “교리문답서들”은 모든 교회에서 가르쳐지도록 요구되었다.


주일 두 예배에 신실하게 참석해야 하는 것이 크게 강조되었다. 예를 들어 에버딘 시의회는 모든 공직자와 그들의 가족들과 그들의 종들이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력하게 요구되었다. 1598년에 그들은 예배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예배 출석하는데 책임이 있었다. 주인들은 자기 종들이 예배에 참석하는데 책임이 있었다. 글라스고우에서 백파이프 연주자가 일요일 해가 뜰 때부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연주했기 때문에, 출교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성 앤드류에서, 다섯 남자가 설교 시간에 빠진 것 때문에 세 시간 동안 감옥에 구금되었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공적 예배가 마치기도 전에 일찍 교회를 떠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였다. 또 다른 교회들은 교회 문들 앞에 지키는 사람들을 배치시켜 놓았다.

 

주의 날에 대한 시행령


서구사회 몇 백 년 동안, 주일날에 아주 조그마한 상행위조차도 통제했다. 필수적인 예배 이외에, 일상 업무와 상행위가 이 날에 중단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요일은 예배드리러 가는 날로 간주되었다. 여러 정부들이 특정한 활동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7세기 찰스 1세 재위 동안 영국 의회는 주의 날을 범한 죄들을 벌하는 시행령을 제정했다. 캐나다에서 1888년에 설립된, 캐나다 주의 날 연맹은 수상 윌프리드 로리 경을 설득해서 1906년에 하원에서 “주의 날 시행령”을 제출했다. 이 시행령은 1907년에 입법되었다. 이 시행령은 일요일에 상행위, 노동, 오락을 제한시키는 것을 겨냥했다. 일부 사람들에게 한 주간 첫 날은 거룩한 날이기보다는 휴일이었다.


겨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는 일요일에 대한 콘스탄틴 견해로 주로 살아왔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준수 사항은 거의 무시되고, 사업과 오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재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빅 엠 약품 마트 소송에서 캐나다 대법원이 주의 날 시행령이 캐나다 권리 자유 헌장 속에 있는 종교와 양심의 자유 항목과 정면으로 위법된다는 근거로 주의 날 시행령을 1985년 4월 24일에 폐기시켰을 때에, 공적인 전환이 캐나다에서 이루어졌다. 대법관 딕슨 씨는 주의 날 시행령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기독교적인 도덕성을 부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콘스탄틴 이후 시기


우리는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 살고 있다. 서구 사회는 거의 1,600년 동안 콘스탄틴 힘으로 살아왔다. 시민 정부가 일요일을 안식의 날로 폐지한 법안과 시행령을 통과시킨 시대는 끝냈다. 월마트와 캐나다 타이어 주차장에는 수요일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에도 만차가 된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예배드리라는 명령에 대해서, 그리고 부지런히 주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출석하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주의 날에 예배드리라는 명령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변화가 그렇게 부지런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심히 어렵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돌트 대회, 1618-1619

 

우리는 일요일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싸운 첫 개혁교회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홀란드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누구든지 일요일에 일하도록 허용 받았는가? 모든 사람이 일요일은 기독교 예배를 위한 날이었다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 외에, 그들이 어떻게 일요일을 준수해야 했는가? 이것은 그 당시에도 큰 문제였다. 총회가 이 문제를 다루었고 다음과 같은 원칙을 천명했다.

 

1. 하나님의 율법 제4계명에는, 의식적인(혹은 일시적인) 측면과 도덕적인(혹은 영속적인) 측면이 있다.
2. 창조에 따라 제칠 일에 쉼과 유대 국가에 특별하게 부과된 이 날의 엄격한 준수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주의 날은 예배에 대한 것이다.
3. 특별하게 지정된 이 날은 예배를 위해서 제쳐두어야 하고, 또 이와 더불어 예배와 거룩한 묵상을 위해서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영속적이다.
4.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고, 주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거룩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5. 주의 날(일요일)은 사도시대 이래로 초대 보편 교회 안에서 항상 지켜져 왔다.
6. 이 날은 반드시 예배를 위해서 따로 떼어놓아서 사람이 단지 자선을 위해서나 현재 필수적인 일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정규적인 일에서,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방해하는 모든 오락에서 벗어나 쉼을 얻어야 한다.

 

이 원칙 천명은 유익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원칙들을 풀어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실천하기


우리는 주의 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출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의 날의 일이라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날에 하는 모든 것, 심지어 토요일도, 예배를 드리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은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밖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며, 우리가 토요일 밤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밤이 되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상 나는 주의 날과 관련하여, 혹 주의 날을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라는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토요일 저녁을 잘 지내고자 하는데 있으며, 토요일 저녁에 가족끼리 모여서 시편을 노래하고 또 내일 공동 예배라는 큰 사건(언약 갱신)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경건의 다른 거룩한 연습을 하고자 하는데 있다. 우리는 일요일을 토요일밤에 시작해서 일요일 밤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가 궁금한가? 성경에서는 하루를 일몰 사이를 말한다. 하루를 일몰 사이로 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견해이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다. 초기 중세 이전이나 중세 동안, 유대교 안식일과 더불어, 기독교의 주일 준수가 토요일 일몰부터 시작해서 일요일 일몰까지 지속되었다. 일요일을 토요일 해지면서 시작해서 그 다음 날 해질 때까지라고 생각하는 이 방법이 17세기 후반까지 몇몇 지역에서 지속되었다. 이런 관습으로 돌아간다면 대단히 유익하지 않겠는가? 온 가족이 토요일 저녁에 집에서 주일 아침을 준비한다면 참으로 유익하지 않을까?

 

주의 날에 우리가 부지런히 예배에 출석하고 그리고 예배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이 개인적인 업무에 시간을 보내는데서 그 날을 휴식하면서 교회에 가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 날을 휴식한다는 말은, (오전 오후) 예배 사이와 그 후에, 우리가 교회에서 행했던 것(설교와 기도와 찬송과 구제)에 의해서 특징지어져야 한다. 이 날은 주의 날이지, 주의 몇 시간이 아니다. 일요일은 평화의 날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도의 교통과 더불어 예배를 드리기에, 우리가 관여했던 다른 모든 행위들이 성도의 교통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서로서로 방문하는 것이 유익하다, 자비 사역을 수행하는 것 역시 유익하다, 우리 가정에 외로운 사람들을 초대하거나, 병원을 방문하거나, 요양시설에 방문하는 것도 유익하다, 연로한 회원 가정에 방문하여 찬양을 하는 것도 유익하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일요일에 해야 할 단지 몇 가지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휴가 중일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라는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휴가를 위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휴가 계획에 복음의 신실한 선포에 전념하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라는 요청을 포함시키도록 하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날에 예배하라는 명령은 변하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주일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가? 될 수 있으면, 우리는 공동 예배에 함께 모이라는 명령 때문에 주일에 일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위해 지정된 시간 동안 일하하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예배드리는 시간 전후로 일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데 적극적인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예배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노력과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다.

 

예배드리는 것은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안에,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일요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점차로 힘들어져 가고 있다. 돌트 대회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날은 예배를 위해서 반드시 제쳐두어야 하고 그래서 요구되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나 또 필수불가결한 일을 제외하고는 정규적인 일에서 쉬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한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선이 요청되고 또 필수불가결한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할 것이다. 주일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필수적이지 않는 부가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농부가 곡식을 베어서, 추수할 채비를 하면서 논바닥에 눕혀놓았다. 그는 토요일에 이렇게 해놓고 월요일에 거둬들일 계획을 세웠다. 그가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100% 폭우나 우박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들었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곡물을 비나 우박에 맞도록 방치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둬들어야 하는가? 어떤 농부는 곡물을 비가 맞도록 방치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거둬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농부는 곡물을 그대로 두고 월요일에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누가 옳은가? 나는 여기에서 개인의 모든 양심의 문제가 작동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 5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일요일에 즐기는 오락에 대해서 어떤가? 예를 들어 일요일에 축구나 야구 경기를 관람해도 되는가? 안 된다. 축구나 야구 게임은 일요일에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을 흩뜨려놓는다. 일요일에 우리가 맞추어야 할 관심은 예배와 성도 교제와 연결된 활동들이다. 게다가 우리가 야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배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 중이다. 왜 우리가 일요일에 그런 곳에 있기를 바라야 하는가?


예배를 드린 후에 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야구 놀이를 하러가는 것은 어떤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의 교통의 일환이다.


우리가 일요일에 쇼핑하러 가는 것이나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서 외출하여 식당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주의 날이 무엇인지를 고려할 때에 그 본의에서 벗어난다. 또 이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라는 우주적인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죄 가운데로 우리가 말려드는 것이다(시96편).

 

주의 날 시행령이 있어야 하는가?


1907년에 로리 정부가 주의 날 시행령을 선포한 것이 옳았는가? 대법원이 1985년에 이 법안을 취하시킨 것이 잘못된 것인가? 두 질문 모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바이다. 시민정부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서 제36항은 두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도록 유도한다. 시작되는 첫 번째 단락 중간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 고백으로 말한다.

 

시민정부가 이들을 억제시키고 보호하는 과업은 공공질서에만 제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고, 복음의 말씀이 모든 곳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또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말씀에서 요구하신 대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존경받고 예배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보호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심지어 제36항의 유명한 22개 단어가 없을 때조차도, 시민정부가 어떻게 교회를 핍박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고백서 역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과업을 교회가 수행할 수 있도록 살필 책무에 대한 시민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가 주의 날에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예배를 강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육신의 영역에 종사하는 시민 정부는 법률을 입법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다. 시민 정부는 영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는다. 시민 정부는 복음을 전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민 정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의 날에 일이나 오락을 제한하도록 법을 만들어 교회가 세상에서 본연의 과업을 감당하도록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세주를 예배하도록 초청해야 한다.

 

 

*이 시리즈는 원래 브링턴 개혁 연구 센터에서 전달한 일련의 연설문이다. G.Ph. van Popta 목사님은 온토리오 주에 있는 앙케스트 캐나다 개혁교회 목사이다. 이 시리즈는 Clarion(2004,5.13)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관련기사: < 주일과 안식일 >

 

☞관련기사: < 안식일과 주일 문제의 연구 >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