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무엇이 주의 날인가? 2 (G. Ph.van Popta)

수호천사1 2012. 1. 5. 20:57

무엇이 주의 날인가? 2

 

- G. Ph.van Popta -

 

 

제2부: 성경적인 배경, 신약

 

신약

 
우리가 신약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행하셨던 바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시면서 복음을 설교하셨을 때에, 참된 안식이 세상을 뚫고 들어왔다. 예수님의 설교와 치유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적인 쉼을 가져다주었다. 히브리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최종적인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셨다. 더 나은 여호수아가 와야 했다. 그분은 안식과 관련된 모든 쉼(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법을 만드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다. 구속주가 오셨고, 그리고 우리는 안식을 누리고 있다.

 

누가복음 4:14-21-안식이 성취되었다

 

누가는 주님께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나사렛 회당 예배에 참석하셔서 거기에서 이사야 61장에 있는 희년에 대해서 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이 성경 본문을 들을 때에 성취되었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 날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다, 구약의 희년이 가리키고 있었던 그 안식을 선포하러 오셨다. 희년에 그 절정을 이루었던 안식과 관련된 모든 구약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복음 설교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성취되었다.  


자 이제 복음서 안에서 이 말씀의 위치를 살펴보고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이 안식적인 쉼의 복음을 여러 구약의 안식 절기들 뒤에서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었던 실체(body)로 발효시키기 위해서 여러 안식일에 행하신 일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12:1-8; 마가복음 2:23-3:6; 누가복음 6:1-11


이 병행구절 안에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랐고, 그리고 누가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추수하고 타작한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바리새인들의 반대는 출애굽기 34장 21절(“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라”)에 근거를 두었고 또 출애굽기 16장의 만나를 안식일에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금지법에 근거를 두었다.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이러한 구약 본문들에 대한 다른 해석들과 논쟁하지 않으셨다(그 당시 이러한 논쟁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메시야이신 인자가 지금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다윗이 성전 진설병을 먹음으로 율법을 어기셨는지 또 어떻게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하면서도 죄를 짓지 않고 성전에서 일하였는지를 설명하셨다. 그렇게 하신 다음 주님께서 진지하게 성전보다 더 큰 이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안식일 복음의 성취시며, 다윗 가의 약속된 메시아 왕이신 인자가 그들 가운데 계셨다.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었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른손을 가진 남자를 치유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마른손을 가진 남자를 고치시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이 경각 중에 있지 않다면,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치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메시야의 도래로 새로운 시대가 당도했다.


복음서 기자가 이 에피소드를 둔 문맥 역시 대단히 시사적이다. 마태는 이 에피소드를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말씀하신 직후에 배치시키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마태는 이 안식일 에피소드가 “그때에”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표현은 아주 시사적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 구속적인 안식이 선포되었다. 특별히 마른 손 가진 남자를 치유하신 것은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왕적인 메시아이시며, 성전보다 더 크신 이가 어떻게 안식을 주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의 불편한 손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다시 공동체 안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가와 누가는 이 동일한 에피소드를 다른 문맥에 두었다. 예를 들어 마가는 이 에피소드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신랑이 되시는지를 선포하셨던 기록 바로 뒤에 두고 있다. 축제할 때가 신랑의 도래와 더불어 당도했다. 새 왕국의 질서가 도래했다. 새 것이 옛 자리에 왔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듯이, 새 것을 옛 것에 기워서는 안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듯이, 새 것을 낡은 것에 담아서는 안 된다. 메시야의 도래로 새로운 시대가 당도했다. 메시아는 안식일에 의해 선포되었던 구속을 가져오셨다.

 

누가복음에 있는 안식일의 다른 치유사건들


누가복음 13장 10-17절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만성적으로 추하게 된 여자를 고치셨다. 그 지역 회당장은 엿새 동안 이와 같은 치유를 할 수 있는데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견해의 외식됨을 폭로하셨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의 소나 나귀를 안식일에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풀어주시고” 사단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을 그들이 반대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14장에서 우리는 안식일에 주 예수님께서 수종으로 고통을 당하는 한 남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이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분은 치유하시는 분이시며, 해방하시는 분이시며, 사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람들을 자유케 하셔서 안식적인 쉼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악한 자의 통치와 죄와 그 모든 비참한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

 

요한복음 5장 1-15절


요한복음서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발견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안식일에, 주님께서 38년 동안 사족이 마비된 남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 이 남자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리를 들고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는 이 남자를 만나 그가 율법을 어겼다고 말했다.

 

신약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우리는 아주 재빠르게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를 한 쪽 편으로 내팽겨 쳐서는 안 된다. 느헤미야 13장과 예레미야 17장은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것을 금했다. 어떤 사람이 짐을 지고 가고 있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논쟁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오, 그렇지 않아,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짐을 지고 가는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예수님은 여기에서 당신을 아버지의 착한 일 즉 하나님의 상처받은 백성들을 치유하시고, 기쁨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계시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깨뜨리는 자로, 다시 말해서 언약을 파기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또 그러하기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언약의 중보자로, 안식일을 성취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안식을 가져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복음서 안에서 안식일의 요약

 

복음서는 주 예수님께서 종종 안식일에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식일이 그렇게 하기 위한 다른 날보다 더 나은 날이었는가? 예수님은 구약의 안식일이 내다보고 있었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최종적이고 영원한 희년을 개막시키셨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신들의 죄의 비참한 결과들을 고치셨다. 이 안식일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모습의 참되고 분명한 의미를 발효시키셨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고 계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왕이시다(겔46장), 그리고 그분은 하늘 성전의 문을 여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도록 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오신 분이시다. 주의 날 제38주일이 말하듯이, 우리는 오늘 영원한 안식의 쉼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올라가셨을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주셨다. 또 그러하기에 구약 안식은 그 모든 규정과 더불어 성취되었고 동시에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서신서들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기록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유대주의자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은 끝이 났다고 주장했다. 신약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계속되는 법적인 요구조건은 없다. 안식일은 그림자였다. 그 실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안식일이 주의 날로 바뀐 것이 아니다, 즉 주의 날에 양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식일은 그리스도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그리스도가 몸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구약 전반을 회고하도록 한 그림자의 일부였다. 이제 그리스도가 안식이시다.


구약의 음식법과 마찬가지로, 할례 규정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러분이 음식법 규례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또 구약 당대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러분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안식일을 지키기를 강력하게 고집하는 것은 구약의 그림자를 우리에게로 되돌려 놓으려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4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적인 혹독함으로 특별한 날들을 지키기를 고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또한 날 혹은 절기 준수는 양심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5). 더 이상 거룩한 장소나 혹은 거룩한 시간이란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거룩하다.

 

주의 날


구약 안식일은 지나갔다. 그러나 계속 예배드리라는 명령이 있다. 신약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요청받았다. 신약 성경 몇 군데서 한 주 첫 날에 더 나은 여호수아이자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오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자 기독교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날에 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주 첫 날이 어떻게 특징지어져야 하는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을 선포하고 즐거워함으로 보내야 한다. 주의 날은 새 날이다. 구약 안식일을 신약에 맞게끔 걸친 것이 주의 날이 아니다. 주의 날은 온갖 종류의 규칙과 금기 사항들로 속박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주의 날은 예배드리는 날이다.

 

 

*이 시리즈는 원래 브링턴 개혁 연구 센터에서 전달한 일련의 연설문이다. G.Ph. van Popta 목사님은 온토리오 주에 있는 앙케스트 캐나다 개혁교회 목사이다. 이 시리즈는 Clarion(2004,5.13)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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