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이슬람교의 역사와 확장

수호천사1 2011. 10. 3. 11:37

이슬람교의 역사와 확장


이슬람의 뜻

  이슬람교는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Mecca)에서 코레이시족의 무역상 모하메드(Mohammed)의 계시 체험에 의한 예언자로서의 소명과 그 포교활동으로 시작된다. 이슬람(Islam)이란 어휘는 평화, 순결, 순종, 복종이라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아랍어의 "쌀라마"라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의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종교와 샤리아(이슬람법)의 차원에서 볼 때 창조주, 절대자의 목적과 의지에 순종하고 창조주의 법칙에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는 뜻이다. 쌀라마의 또 다른 의미는 "화합과 평화"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시종일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그들 종교의 기본 신조로 하고 있다. 무슬림(Muslim)이란 뜻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알라의 뜻에 맡기기로 작정한 사람을 말하는데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오늘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교도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가 모하메드(Mohammed)교라고 불리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알라(Allah)신을 믿는 종교이지 신의 예언자 모하메드를 믿는 것이 아니므로 이슬람교를 모하메드교라고 부르는 것은 곧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창조주를 믿되 예수라는 선지자를 매개체로 하여 믿는다. 그러나 이슬람은 창조주 절대자를 믿되 어떤 중개자를 통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창조주 절대자만을 경배하고 모하메드는 한 인간의 개체로 밖에는 믿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을 다른 어휘로 표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이슬람교의 발생과 형성

  아라비아인들은 대개가 유목민으로서 그들은 사막의 혹독한 기후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낙타와 양떼를 몰며 이주하며 살았다. 사막의 유목민들에게는 낙타야말로 가장 유용한 동물이며 수송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낙타와 염소의 젖과 고기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이들의 털과 가죽으로는 의복과 천막을 만들었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그들의 행동을 반목과 공격형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용맹, 부족공동체에 대한 충성심, 인내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용 등 남성다운 태도와 여행자와 손님에 대한 환대 등을 으뜸가는 미덕으로 여겼으며, 또 한편으로는 미신과 괴이한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거주지는 메카(Mecca)였다. 메카는 상거래의 중심지로써 부가 축적되었고 귀족과 상인계급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호 공동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의회를 설립하였다. 메카의 부족은 쿠라이쉬(Quraish:이스마엘의 후손)라 불리웠고 그 수가 컸으므로 씨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씨족은 자신의 마즐리스와 씨족을 상징하는 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돌을 한 자리에 모아서 성역을 만들어서 씨족의 연합체인 부족의 단결을 외부에 과시하였다. 이 성역의 이름은 카바(Kaba)라 하며 곧 메카시의 단합의 상징이었다. 원래 메카에는 도시가 없었고 오늘날 메카에 있는 지명인 토암 계곡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예언자 아브라함은 이집트 여인인 그의 노예 하갈과 그녀의 몸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지금의 메카지역에 두고 갔다고 한다. 기갈에 못이겨 겨우 메카에 도착한 이들은 싸파마르아 언덕을 오르내리며 물을 찾는 동안 목말라 울던 이스마엘의 발 밑에서 거품과 함께 기적이 일어나 젬젬(Zem Zem)샘물이 나타났다고 함다. 이 기적을 믿는 무슬림들은 지금도 메카 순례시 싸파마르아 구릉을 일곱 번 뛰면서 왕복하고 젬젬 생수를 마시면서 속죄를 빈다.

  예언자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교리는 메카와 그 주변의 부족들에 의해 한 때 지속되어 왔으나 세월의 흐름과 외부로부터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신론의 신앙은 점점 쇠퇴하여 가고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다신론적 우상숭배로 바뀌어 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는 신앙적 암흑시대로서 자연숭배와 정령 신앙등 허다한 잡신을 믿는 우상숭배가 범람한 시기였다.

  기원 후 7세기는 세계가 살벌해지고 유대교는 팔레스틴에서 쫓겨났으며 기독교는 로마종교와 야만인들의 미신과 혼합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때 순수한 신앙의 새로운 샘이 갑자기 동양에서 터져서 서양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고 믿는다. 이 새로운 신앙이 하나님이 거니시는 땅 중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라 칭하는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모하메드가 태어난 곳이다.

  모하메드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헌은 코란과 하디스와 Sirah이다. 무슬림들은 코란을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해 주신 Allah의 계시로 본다. 코란은 모하메드가 죽은 후에 편집되었으므로 그 원본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코란에는 예언자의 가르침이 담겨졌으나 사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디스는 예언자의 행적과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동료인 사하마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이 하디스에는 코란의 가르침을 자상하게 설명, 또는 보완하는 구절과 예언자의 생애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에 대한 귀절이 있다.

  이로부터 유명한 이븐 이사크(Ibn Ishaqp)의 모하메드 전기가 나왔다. 또 Sirah는 하디스와 코란을 기초로 한 연대기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사실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의 육적 장자인 이스마엘의 직계 후손인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A.D. 570년 메카에서 아버지 압둘라(Slave of Allah)와 어머니 아미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난지 여섯달 만에 고아가 되었다. 힘있고 부유했던 할아버지 마저 노쇠하자 그는 가난한 삼촌 Abu Talib 아래서 자라났고 장성하여서는 그의 삼촌을 따라 낙타 몰이꾼이 되었는데 당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많은 종교, 기독교, 유대교 등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경험들이 그의 종교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부자 과부 크하디자아(Khadijah)의 일을 관리하고 있다가 25세에 15세 연상인 그녀와 결혼하였다. 이 당시 아라비아와 메카는 지배 계급인 쿠라이쉬족이 세력을 남용하여 온갖 수단으로 민중을 억누르며 부를 축적하였다. 주위의 모순과 부정을 본 그는 40세에 히라산 동굴에 들어가 우주의 신비 뒤에 있는 비밀에 대하여 명상을 하며 지냈다.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의 날을 보내던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낭송하라! 낭송하라!" 핏덩어리로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이름으로 낭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모하메드는 유일신 사상에 대한 계시를 환상 중에 체험하였다. 이 계시는 아라비안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유일신을 알라(Allah)라고 불렀으며 자신을 알라의 예언자라고 불렀다. 그의 계시를 수록한 책을 코란('낭송'이란 뜻) 이라고 불렀으며 신의 책이라 일컬었다.

  그는 메카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그가 6년간 포교한 메시지의 핵심은 "알라만이 참 신이며 카아바의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결국 박해로 말미암아 모하메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국인 이디오피아까지 피난을 하게 되었고 그 뒤 메디나 사람들의 초청으로 메디나(헤즈라)로 갔다가, 여러 전쟁 끝에 A.D. 630년에 메카로 진격하여 신상을 제거하고 메카를 이슬람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의 첫 설교가 금요일이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슬람교는 예배를 금요일에 드린다. 나아가서 그는 자신이 모세, 아브라함과 같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그의 계시는 마지막이며 완전한 것으로 믿었다.

  모하메드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품고 자신의 계시를 강조하여 개종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들에게 칼을 들어 메카에서 자취를 없애 버렸고 그의 관심은 동족인 아랍인에게로 돌려졌다. 헤즈라 10년인 A.D. 632년 메카에 마지막 순례를 마치고 후계자인 알리에게서 충성을 다짐받은 후 그 해 6월 8일 아내 아이사의 무릎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이 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기독교에는 예수의 탄생,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많이 있지만 이슬람은 소명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는 사건 밖에 없다. 계시를 받은 다음 핍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포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명 때문이었다. 이 부름받은 사건이야말로 이슬람 성립의 근원이 되었다.

이슬람교의 확장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란 표어아래 이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노예와 짐승의 중간쯤으로 여기고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는 태도로 이슬람교의 확장을 서둘렀다. 또한 이들의 목적이 이루어져 모하메드의 사후 25년이 되었을 때 이슬람의 정복은 이집트,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까지 퍼져 나갔으며 1세기 후에는 러시아와 스페인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의 중요한 하나는 주변 국가들의 허약함에도 기인한다. 즉 당시 페르시아의 사산니드 제국(Sassanid Empire)이나 동부 지중해 연안제국인 레반트(Levant)의 비잔틴 제국(Byzantin Empire)은 수년간 계속되어진 전쟁으로 모두 쇠퇴되어 있었다.

  그 결과 이슬람교는 그들의 의도대로 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슬람교는 그의 신조에 대하여 지지자를 얻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폭력(force)과 설득(persuation)에 의한 방법이었다. 예언자 모하메드는 통치자로서의 권위와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슬람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지하드(Jihad: 종교라는 명목아래 일으키는 전쟁으로서 聖戰을 뜻한다.)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을 통과했던 이슬람교는 모하메드 사후 100년쯤 남부 프랑스에서 멈추게 된다. 이슬람교가 아프리카의 두 해안을 따라 아래로 뻗어간 것을 대개 상인이나 수피(신비주의적인)교사 군사력정복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슬람교의 율법은 동유럽까지 번졌는데, 이것은 그 지역의 동방교회들이 생기를 잃었기 때문에 더욱 용이하였다.

  모슬렘 군대는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까지 이르게 되지만, 이교도들인 투르크족과 몽고인에게 패해서 모슬렘제국은 약화된다. 투르크족과 몽고족들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이겼지만, 영적으로는 정복당해서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다. 북인도에서는 군사적 정복과 이민과 통치들이 이슬람교의 교세를 확장하는데 기여했지만, 남부 지방에서는 평화적인 교역과 설득으로 같은 일을 해냈다.

  모슬렘 상인들은 8세기 초에 중국의 항구 도시에 나타났으며, 13세기 몽고의 통치기간 중에는 상인, 직공, 군인, 죄수로 무더기로 들어왔다. 12세기와 13세기까지 상인들과 수피들이 말레이, 인도네시아 군도와 필리핀 남부와 태국에 이슬람교를 전했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한마디로 이슬람 제국들의 붕괴와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로 표현할 수 있다. 우트만 제국의 붕괴가 러시아와 유럽 제국들에게 지배권 확장을 초래하였고, 이전 우트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 열강국에 병합되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은 프랑스가, 이집트와 아라비아는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동부 아프리카는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서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페르시아 제국과 무가르 제국 역시 무너지게 되었고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또 이슬람교가 급속히 성장하였던 인도네시아도 네델란드의 손에 들어갔다. 이 기간 중에 이슬람 제국에 미친 서구의 문화적 압력은 대단하여 이슬람 국가들은 점차 서구의 과학, 철학, 정치, 기술 등 제반 문화에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모든 열강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이슬람 국가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커지게 되었는데 중동 산유국들의 경우 전 세계 산유량의 37%를 차지하는 천연자원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경제 규모는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석유자본을 통한 대폭적인 군비증강으로 이슬람국들의 군사력을 하나의 종교적인 동맹체로 결성하여 서구 세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오늘날 모슬렘의 이동과 전파의 결과로 서유럽, 영국 미국, 등에서도 이슬람교를 볼 수 있는데 이 지역의 흑인들 사이에서 반응을 얻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들이 나오고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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