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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크로드의 문화

수호천사1 2011. 8. 25. 15:50

실크로드의 문화

 

 

1) 불교


이 거대한 아시아 횡단 교통로를 통해 비단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것이 옮겨졌다.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의 예술과 사상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은 이것은 기원전 6세기 동북인도에서 탄생한 이념 즉 모든 살아있는 생물에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는 불교의 교의였다.


굽타왕조의 아쇼카왕이 BC 3세기에 개종함으로서 불교는 인도 거의 전역을 지배한 그 왕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채택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불교는 AD 1세기 한나라의 명제의 꿈을 계기로 중국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꿈에서 금인이 빛을 발하면서 자기 궁전에서 떠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그는 현자들을 불러 해몽을 요구했는데 그들을 숙의 끝에 꿈에서 본 사람이 부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당시 불교의 존재는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을 알아보기 위해 즉 인도로 사신이 파견되었고 한 참 뒤에 사신이 한나라 궁정에 돌아왔는데 그는 불교의 경전과 그림들 이외에 황제에게 불교를 설명해 줄 인도의 승려들까지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 시기 이후로는 중국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 사이를 오가는 승려와 순례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전과 서적은 물로 새로운 종교에 사용되는 예술품들도 갖고 왔는데 이것들을 남다른 심미안이 있었던 중국인들의 눈에 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놀랍고 감탄스러운 것들이었다.


불교의 중국전파는 중국인들에게 세로운 종교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레스(중국)과 인디아라는 두 단어의 합성해서 만든 '세린디아(Serindi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전혀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이다.


논리적으로 세린디아는 인도의 불교미술과 한 대중국미술의 단순한 결합이 되었어야 했다. 중국과 인도의 모든 직접적인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거대한 히말라야산맥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넘을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혀 불교의 가르침과 미술은 멀리 우회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중간의 요소들이 영향을 받아들인 것이다.


불교 전파의 실질적인 진원지는 인도 본토가 아니라 현재 서북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계곡에 위치한 간다라의 불교 왕국이었다. 거기서 또 다른 미술적이 혼합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AD 1세기에 쿠샨왕조에 의해 도입된 인도의 불교 미술과 그보다 4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그곳에 들어오게된 그리스 미술과의 결합이었다.


이 그레코-불교식 혹은 간다라식 미술의 가장 혁명적인 점은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느 것이었는데, 이는 그 전에는 어떠한 예술 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존재로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열반에 들어감으로써 윤회의 끝없는 사슬에서 벋어난 그는 이전에는 발자국.수레바퀴.나무.스투파(탑).산스크리트문자등과 같은 신비적인 상징을 통해 표현될 뿐이었다. 그러나 간다라미술에서 조각가들은 부처를 곧고 날카롭게 솟은 코와 눈썹.고전적인 입 모양과 파상형 머리카락등으로 묘사함으로써 헬레리즘적인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혁명적인 새로운 이념인 불교는, 인도에서 원래 생겨난 불교 미술이 아니라 바로 이 간다라 미술과 함께 북방루트를 통해 중국령중앙아시아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간다라 미술은 다시 세로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승려들, 그 다 음에는 상인들과 술례자들의 발길을 따라 중국과 다른지역의 새로운 영향을 점차 흡수해 나갔다. 이 새 종교가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도시들을 따라 전파되면서 수많은 사원과 석굴과 스투파가 생겨났다.


새로운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근원 즉 경건과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카라코람과 파미르고개들을 넘어 불교의 제2성지나 다름없어진 간다라를 방문했고 거기서 다시 인도로 들어갔다.


이들중에 일부는 당시의 번영을 누리고 있던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도시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대부분의 길을 도보로 여행했던 법현은 아마 가장 일찍 그런 여행을 한 사람일 것이다.


법현法顯 : 399년 長安을 출발하여 난주를 거쳐 돈황에 도착하였다. 돈황에서 여행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은 후 사막을 통과하여 17일 만에 산샨(樓蘭)왕국에 도착하였다. 산샨왕국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인도의 불교를 배워서 인도의 승려규율을 지키고 았었다. 그는 1개월 후에 산샨을 출발하여 高昌을 거쳐 15일 후에 엔지(焉耆)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4000여명의 소승불교의 승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카라샤르焉耆에서 2개월을 머문 후 다시 투르판으로 돌아와 여행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몇사람과 함께 타클라마칸사막을 통과하여 35일 만에 호탄에 도착하였다. 그는 기술하기를 호탄은 번영된 왕국이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수천명의 승려들이 있었고 일부 승려들은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문 후 카쉬카르왕국을 거처 쿤륜산맥을 넘어 인도에 도착하였다. 414년에 해로로 중국에 돌아왔다..


높은 사료가지를 지닌 법현의 여행기"불국기"는 1869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내용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 이 나라는 토지가 기름져서 사람들의 생황이 윤택하였고 무도 불법을 받들어서 불교가 생활화 되어 있었다. 승려들의 숫자는 모두 수만 명에 이른다"


법현의 다른 이야기들...(중략)


그 이후에 당대에 손오공과 여행을 한 수호지로 유명한 현장법사가 법현을 이어 인도로 건너간다.


현장顯奬(603-664) : 현장이 쓴 《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으며, 16세기에 출판된 《西游記》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현장은 629년 長安을 출발하여 먼저 돈황에 도착하여 혼자서 800리 이상되는 사막을 통과하여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투르판의 高昌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高昌에 남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여행할 것을 굽히지 않자 高昌왕은 그에게 동행인과 양식을 주고 서역의 왕국에 소개신을 써주었다. 그는 투르판을 떠나 焉耆카라샤르,쿠차, 바이拜城에 도달하여 북쪽으로 가서 천산을 넘어 이씩쿨호(크르그즈스탄)지역을 지나 추강를 따라 탈라스를 지나 타쉬켄트를 경유해서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였다. 다시 서행하여 카라코람사막을 통과하여 후어라사지역에서 남서쪽으로 전환하여 大夏의 도읍인 헤라트를 지나 아무다르야의 상류인 쿤두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高昌왕의 서신을 보여주었을 때 高昌國과 친척관계인 大夏의 왕은 매우 기뻐하고 환대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북부고원을 넘어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몇년을 머물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西安으로 돌라왔다.


또한 신라인으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인도를 다녀왔던 사람이 있는데 혜초이다. 그는 왕오천축국전으로 더 유명하다.


해초 慧超(700?-780?) : 혜초는 700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20세가 못되어 중국의 長安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이에 만족치 않고 불교의 본고장인 天竺國(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얼머동안 머물른 뒤, 인도의 서북부에서 大夏(이미 아랍인이 통치함)의 북부를 통해 타쉬코르칸을 넘어 카쉬카르를 통과하고 쿠차,엔치,高昌을 거쳐 西安으로 돌아와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는 인도의 중부에서부터옌지에 이르는 여행을 기행문으로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을 기록하였는데, 이 책은 자신이 방문한 곳의 불교상황, 국가의 통치관계,풍속습관 및 경제생활을 기록하여서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우연하게도 1908년 돈황에서 프랑스의 동약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책은 돈황의 17호 굴에서 발견이 되었다.)

 

2) 조로아스터교


실크로드는 불교만이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어 들어온 유일한 외래 종교는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종교 역시 미술 문헌과 함께 타클라마칸 주변에 자리를 잡았는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가 그것이다.


그리스도가 동시에 인간과 신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432년 에페수스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자, 많은 수의 추종들이 동쪽으로 도망쳐 오늘날 이란지역에 세워졌던 사산제국의 영내로 들어갔다. 거시에서 다시 상인 겸 선교사들은 그 교리와 미술을 중국으로 전달하여 638년에 처음으로 장안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서역북도를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그 연도에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금세기 초에 투르판과 돈황의 석굴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문헌들이 발굴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의 상당수가 상인이자 또 선교사였기 때문에 중국령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모든 대상로를 따라 이 종교가 뿌리를 내렸고, 심지어 남쪽으로 티베트까지 도달하였다. 당나라 때인 845년에 모든 외래 종교를 금지했던 조치도, 또한 11세기 무슬림들에 의한 중앙아시아이 정복도 이 종교를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베네치아 출신이 마르코폴로는 13세기 말 카쉬카르와 호탄을 지나면서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3) 마니교


3세기 페르시아에서 태동한 마니교는 빛(영혼)과 어둠(육체)이라는 대립하는 '두 개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마니의 제자들은 5세기 말 서구 기독교도들의 무참한 박해를 피해(주로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동쪽으로 도망을 쳐 결국 중국령 중앙아시아와 중국본토에 들어와 수나라(589-618)와 당나라(618-907) 때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독일 탐험대가 투르판 지역에서 마니교 서고를 발국하기 전 까지 이 종교는 아무런 문헌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졌고 주로 이 종교에 대한 비판자들-대표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이 쓴 극도로 적대적인 글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었다.


위구르인들은 762년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을 약탈할 때 마니교를 접한 뒤 곧바로 개종하였다.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서로 조화되기 힘든 교리들을 차용하여 생겨난 이 기묘한 종교(불교의 교리도 차용하였다)는 10세기경에 전성기를 이룬 뒤 곧 쇠퇴하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실크로드의 서부 오아시스 지역에서는 이슬람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가혹한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불교로 대치되어 버렸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타클라마칸 동북지역에 있는 카라호자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르콕은 후대의 불교 별화에 의해 가려진 마니교의 아름다운 벽화들을 발견했다. 물론 네스토리우스교와 마니교의 화가나 필사가들도 훌륭한 유산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도시들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물을 남긴 것은 불교 미술인 것이다.


당나라 시대에 실크로드는가 황금기를 구가한 것을 사실이기만 왕조의 운명과 간선교역로의 운명도 하나로 묶여버리게 되었다.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실크로드상의 문화도 쇠퇴하여 마침내는 그곳에 있던 사원.승방.예술품도 종말을 고하고 만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흔적들은 너무더 철저하게 사라져버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될 정도였다. 이것은 복합적인 원이 있는데 하나는 오아시스도들로 흘러들어가던 만년설이 녹은 물이 만들어내 하천들이 서서히 말라버리게 된 것이고 아라비아에서 출현한 이슬람의 갑작스런 출현이었다.


그러므로 실크로드상에서 불교문명이 사라지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당제국의 쇠퇴와 몰락, 그리고 서방에서 아랍이 승리함에 따라 타클라마칸 전지역이 무슬림으로 개종한 것이다. 이 새로운 종교는 무슬림들이 금기시하는 형상예술-특히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것- 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싫어하는 우상인 벽화난 그림들은 훼손되거나 파괴되고 사원과 스투파는 무너지고 방치된 나머지 모래 속으로 사라져갔다. 15세기가 되면 타클라마칸의 모든 지역이 무슬림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명대(1368-1644)에 가서는 실크로드가 거의 방치된 상태였으며 중국은 서방과의 접촉을 모두 끊어 버리고 자폐의 길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타클라마칸 지역은 더욱 고립되어 쇠퇴의 길을 걸었다.

 

4) 이슬람교


이슬람이 들어온 시기는(9세기말에서-960년) : 사만조


사마니드왕조라고도 부른다. 875년에 세워진 최초 폐르시아(이란)계 이슬람왕조이다. 당시 사만조는 아랍계의 압바시드 왕조에게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왕조의 출현으로 이란 민족의 순수한 전통이 복구되고 10세기 전 기간동안 돌궐계 부족들이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았다.


875-999)의 한 왕자가 정권을 잡으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카쉬카르로 망명하였다. 이때 동커라칸조의 카칸은 왕자를 아투스 에 지방관리로 배치하였다. 여기에서 사툭·부그라칸은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영향과 설교에 의하여 비밀리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후, 부그라칸이 집권할 때 백성들에게 개종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와 더불어 더 빠른 전파를 위해 강제수단도 채용하였다. 또한, 이슬람교를 믿지않는 대칸(大汗)에 대해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이와동시에 선교사들을 초원의 유목민족중에 파견하여 선교를 진행시켰다. 960년에는 이슬람교가 커라칸조의 국교가 되었다.

 

이때 20만의 유목민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때 이슬람교의 전파 범위는 카쉬카르지역에 국한되었다. 초기전파시기(960년-1220년) : 960년 커라칸조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불교를 신봉하는 위티엔(于田)李氏왕조에 대해 정복전쟁을 발동하고 40여년동안 전쟁을 계속하여, 1006년 마침내 정복하였다. 그러나 于田의 불교도들은 반항투쟁을 계속해 오다가 11세기 중엽에 잠식되었다. 카라칸조는 于田李氏왕조를 멸망시킨 후 이드쿠트왕조에 지하드를 발동하였다. 커라칸조의 군대는 일리를 건너 투르판(吐魯番)에 침입하였다. 이드쿠트위구르왕의 군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커라칸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카라칸조는 또 탕쿨(西夏)에 대해서도 지하드를 개시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커라칸조는 무력을 통한 방법을 기본상 종결하였다.

 

西遼(크탄-크타이)의 통치시기 때는 종교에 대한 자유정책으로 각종 종교가 자유롭게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는 이 때를 이용하여 이드쿠트위구르왕조에 대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파하였다. 큰 전파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타림분지 서부와 남부에 확고한 지위를 갖는 종교가 되었다. 전지역전파시기(1220년-16세기초) : 14세기초 이슬람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天山의 남북에 넓게 전파되어 불교,경교와 병존하였다. 동차카타이칸국의 투르크·티무르칸(1347-1362)이 무슬림이 된 후, 그 후대 때 신장 각지에 이슬람교를 빨리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백성에게 강제로 개종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불교지구에는 지하드를 진행하는 등 각종 수단을 사용하였다. 16세기에는 하미(코물)지구에서 이슬람교가 우세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의 민족들은 기본적으로 전 백성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13세기에 신장에 진입한 차카타이몽고인들은 이 시기때 전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위구르족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淸代에는 위구르족, 타직크, 회족 뿐만 아니라 카작족, 키르키즈족, 우즈벡족, 타타르족등이 이슬람교를 신봉하였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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