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역사
중국의 당대에 실크가 서역을 거쳐서 유럽의 중심이었던 로마로까지 가는 여정을 실크로드(비단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주로 말과 낙타를 이용해서 비단이 중국에서 로마로 가게 되고 유럽의 물건들이 중국으로 들어 오는 길인데 당시에는 주로 대상(낙타를 탄 상인-카라반)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길에 대해서 어떻게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말이다.
독일을 저명한 지리학자인 리흐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그는 1860-1862년에 통상조약 체결을 위하여 파견된 프러시아 대사의 수행원으로 동아시아의 자바.필리핀.일본 등 여러나라를 탐방했다. 1869-1872년 중국 전역을 답사하고 귀국한 후에는 본 대학.라히프치히대학.베를린대학에서 지리교수로 일을 하였다.
그는 중국전역을 탐사하고 1877년 중국(China)라는 책 5권을 썼는데 1권 후반부에서 동서교류사를 개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시르강)와 아무다르야(아무강)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지대를 거쳐서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 비단이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영어로는 실크로드)라고 말하고 있다. 후에 이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중요한 이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비단이 어떻게 로마에 까지 알려졌을까? 중국과 로마까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비사막,타클라마칸,파미르고원,중앙아시아,이란고원,소아시아(터어키),지중해 등을 거치는 길이다.. 이 실크로드를 개통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장건이라는 사람이다.
1) 장건의 서역개척
장건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한무제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에 흥기한 흉노(Hun)는 한 대초에 이르러 동복도위(군대.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대부분의 서역나라들을 그 치하에 두었다. 기원전 209년 묵특선우가 등극한 후 흉노의 국력은 급속히 강화되어 동쪽 인접국인 동호와 서쪽 인접국인 월지를 각각 격파하고 남으로는 황하연안까지 진출하여 한을 크게 위협하였다. 기원전 177-176년에 묵특선우는 우현왕을 파견해 월지의 숙적인 오손(우이순)과 제휴하여 월지를 천산이북지역으로 축출하였다. 몇 해 후(BC173-160)흉노와 오손의 연합 공격을 재차 받은 월지는 일리강의 남쪽에 있는 대완.대하일때까지 밀려가 그 곳에서 대 월지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서천하지 못하고 쿤륜산 이북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소월지라고 불렀다. 월지의 피격 결과 오손은 월지의 고지를 점령하고 일리강유역과 이씩호일대에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이씩호 동남부에 있는 적곡성에 정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국이 아니었고 흉노의 속국에 불과했다. 그 결과 기원전 176년 이후 오손 등 천산북로의 26국은 모두 흉노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서북방에서 강세 일로를 걷고 있은 흉노의 존재는 한으로서는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초 60년간 한은 국력 회복을 위해 흉노에 대해서 화친과 타협정책을 썼다. 매해 흉노의 선우에게 비단과 솜.쌀을 보내는가 하면 통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만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던 흉노는 한의 화친정책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한의 변방을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서역제국에 막대한 공물과 납세를 강요하는 등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한의 안정을 위협하고 한과 서역제국간의 내왕도 끊어 놓았다.
16세의 어린나이에 등극한 한무제 (유철BC140-87)은 흉노의 끊임없는 침범에 의분을 표하면서 전에 왕들이 못다한 유업을 달성코자 결의를 다지곤 하였다. 그는 등극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흉노의 한 투항자로부터 흉노에 의해 멀리 서방으로 쫓겨간 대월지가 흉노에게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무제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대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당시의 나위에 있던 장건을 기원전138년 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장건은 수행원 감부와 함께 백명을 인솔하고 장안을 떠난 농서(감숙성)에 이르렀는데 더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이미 지 지방까지 남하한 흉노군에 체포되어 흉노의 포로로 압송되었다. 장건은 흉노에서 흉노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고 10년간을 보내던 중 기회가 생겨 감부.처자와 함께 도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잊지 않았던 그는 서쪽으로 수 십일 동안 걸어 드디어 대완.강거.대월지에 이르렀다. 그가 흉노를 떠나 대완등에 이른 길은 천산북로로 짐작된다. 대완국은 지금의 페르가나지방인데 그곳에 도착하려면 파미르고원을 너머야 한다. 한서.서역전등에는 북도의 서쪽 파미르를 넘으면 대완.강거.엄채가 나온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건이 대완에 이른 길이 바로 천산 불고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망을 안고 찾아간 대월지의 정세에는 그간 변화가 일어났다. 신왕이 등극하여 대하를 병합하고 오손을 피하여 일리강으로부터 멀리 중앙아시아에 이동하여서 국가가 평온함을 누리고 강성해 지자 흉노를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어졌던 것이다. 실망한 장건은 대월지를 떠나 대하의 바그크에 가서 일년 동안 체류하며 관망하다가 기원전 128년 오아시스 육로 남로를 따라 강중(지금을 청해성)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흉노에게 재차 체포되어 1년 동안 다시 구류되었다. 그런데 그가 잡혔을 때 흉노선우의 죽음을 계기로 태자를 모살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기회를 틈타 장건은 수행원 및 처자와 함께 다시 도주하여 기원전126년 드디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곡절 많은 장건의 서역여행은 전후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렸으며 그나마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그와 수행원 감부 두 사람 뿐이었다. 무제는 그의 노고와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태중대부로 봉하고 감부에게는 봉사군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장건의 제1차 서역여행이다. 이 여정은 사기와 대완전.후한서,서역전등에 기술한 것이다.
장건의 1차 여행을 통해서 대월지와 대흉노의 공수동맹을 결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흉노를 비롯한 서역제국에 대한 정보와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견문을 무제에게 진술하하고 대하와의 무역등도 제안을 하였다. 대하와 촉도(지금의 사천성)가 무역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무제도 이러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기원전 125년 장건을 파견해서 이러한 길들을 개척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것을 토착부족들을 저지로 인해서 실행이 되지 않았다. 그후 장건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서역에 대한 지리지식을 활용하여 기원전123년 대장군 위청의 흉노토벌전에서 위청을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이 해 봄에 위청은 10만여 군대들 이끌고 출격하여 흉노군 1만9천명을 살상하거나 사로잡았다.
이 후 잇달아 흉노정벌로 인해 하서지역의 흉노는 큰 타격을 받고 기원전121년에 원래 흉노는 휴도와 곤야왕이 통치를 했었는데 곤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한에 투항하므로서 한은 하서에 무위와 주천.장액.돈황등에 두 군을 증설하므로서 서역의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그후 장건은 여러차례 서역의 여행을 하였으며 기원전114년 그동안의 쌓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장건이 가지고 온 군사.정치.경제.지리 등의 정보는 한의 조정에 일대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보고를 통해 무제는 여태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페르가나.사마르칸트.부하라.발흐등의 부유한 도시국가들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가나는 물론 이건이라 불리는 또 다른 먼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은 오늘날 학자들 대부분이 로마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보다 더 직접적인 소득은 페르가나에서 기가 막힌 새로운 종류의 군마를 발견한 것인데, 장건은 그것을 천마라고 보고 했다. 빠르고 몸집이 크며 강인한 이러한 말이 당시 중국인들에겐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말이라고는 작고 느린 말(오늘날 프로제발스키 말 이라불리며 현재는 동물원에서나 가까스로 볼수가 있다.) 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따. 흉노와 전쟁에서 기마전을 해야 할때 이 페르가나의 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무제는 자신의 군대를 이들 말로 무장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말을 구하기 위하여 페르가나로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듭 실패를 하였다. 결국 수의사까지 동반한 대규모 원정군이 파견되어 페르가나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그곳의 주민들은 말들을 모두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만약 중국군이 더 접근해 오면 말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마침내 중국군은 철수하는 대신 소량의 군마를 받기로 하고 그들의 조건부 투항을 수용해 귀환하였다.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이 천마는 한 대와 당대의 조각가.화가들의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청동제 비마상이다 이것은 1969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서안(장안) 근처 실크로드상에서 발굴해 낸 것으로 2천년전 한 이름없는 조각가가 만들었다.(감숙성 무위에서 발굴. 이 조각의 특징은 날아가는 제비를 사뿐히 밟고 달리는 천마의 형상에 있다. 한국학자들은 신라 천마총의 천마와 양식상의 유사성을 주목하고 있다.)
한 무제는 결연한 의지로 여행의 신기원을 이루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장건의 보고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그에게 "위대한 여행가"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무제는 제국의 영역을 서쪽으로 확장시키려 마음 먹었기 때문에 여러차례에 걸처 서역원정군을 했다. 그 일환으로 흉노의 서쪽에 살고 있던 오손(우이순)이라는 유목민과의 결맹을 추진하기 위해 장건이 기원전115년에 다시 길을 떠났으나 이번에도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우이순이 인접한 흉노의 보복이 두려웠을 뿐 아니라 그의 반해 중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따.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위대한 여행가"는 황제로부터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을 하사받고 세상은 떠났는데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셈이었고, 이는 당시 두 강대국인 중국과 로마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그는 '실크로드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2) 로마인들이 어떻게 비단을 알게 되었을까?
로마인들은 비단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굳게 믿었다. 플리니우스는 일찍이 "세레스는 솜털이 자라는 숲으로 유명하다. 그곳 사람들은 물을 이용하여 나뭇잎에서 솜털을 채취하다"라고 적었고 베르길리우스도 "중국인들이 잎에서 그 부드러운 털을 어떻게 빗질해 내는가"를 묘사하였다. 중국인 역시 이러한 허구의 신화를 구태여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천년 전에 제작의 비법을 발견한 비단을 가능하면 많이 팔기를 원했고 또 그것을 독점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AD6세기가 지난 뒤. 일설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승려가 속이 빈 나무 지팡이 속에 누에고치를 넣어 비쟌티움으로 밀반출함으로써 이 독점 체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 혁명적인 세로운 물질을 처음으로 목격한 로마인들은 마르쿠스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의 7개 군단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동쪽으로 파르티아인들을 추격하던 BC53년의 일이었다. 도주하던 파르티아인들이 카르하에서 갑자기 말의 진로를 바꾸면서 뒤로 몸을 돌려 화살을 비오듯 퍼부었다.(이것이 바로 원래의 파르티안 사격이다) 이때 화살은 두 사람을 관통하기도 하고 혹은 적군의 손을 뚫고 방패에 못박듯 꽂히기도 하여 로마 군대의 진영을 붕괴되고 말았다. 아마 불굴의 로마 군단은 곧이어 벌어진 다음과 같은 일이 없었다면 그래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파르티아인들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로마 군인들의 얼굴을 향해 비단으로 만든 거대한 깃발들을 펼쳐들고 번쩍이는 태양빛 아래서 펄럭였던 것이다. 여태까지 이러한 것을 본 적이 없었던 로마인들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뒤로는 2만명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로마사람들이 알기로는 파르티아인들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민족으로 '구름처럼 가볍고 얼음처럼 투명한' 이런 놀라운 물건을 발명하거나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과연 이들은 이 것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그것은 중앙아시아 저 너머에 살고 있는 신비스러운 종족인 '비단민족'에게서 온 것이었다. 장건의 뒤를 이어 한 무제가 보냈던 또 다른 사신이 파르티아까지 가서 그곳에서 비단을 주고 대신 타조의 알과 마술사를 데리고 왔는데 중국 연대기에 따르면 황제는 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얼만 지나지 않아서 이 놀라운 물건의 견본을 가까스로 손에 넣게 된 로마인들은 그 뛰어난 광택과 촉감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것을 좀더 많이 구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동시에 파르티아인들에게는 이 점을 이용하면 새로운 교역의 중개인인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일대 유행처럼 번졌고, 급기야 AD14년에는 그러한 풍조가 퇴폐를 조장한다고 여겨 티베리우스는 비단옷을 입는 것 자체를 금지할 정도였다. 플리니우스는 속이 다 비치는 이 세로운 의복에 대해 "여성을 나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하면서 비단에 대한 로마 여성들의 갈망 때문에 경제가 고갈될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공식적으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단 무역은 더욱 번창하여 380년경 로마의 한 역사가는 비단이 "한때 귀족들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이제는 하층민까지 포함한 모든 계층에 널리 퍼져 있다"고 기록하였다. 비단 가격은 점점 올라가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할 정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어쨌든 로마인들을 금을 주고 비단을 사들였고 수요가 늘어갈수록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익의 상당부분은 비단을 짜는 중국의 직인들인 세레스인이 아니라 날로 번창하는 실크로드의 중개상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미 AD1세기부터 일부 발빠른 로마상인들은 탐욕스런 파르티아인을 따돌리고 세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마침내 2세기경에는 많은 양의 비단이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경비를 절감을 이룰수 있었다. 피르티아인들은 이 중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해로의 위험성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해외에 퍼뜨렸는데 한 중국인 사신은 로마로 가려다가 바로 이러한 이야기에 겁을 먹고 돌아간 적도 있다.
이렇게 하여서 거의 1만5천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와 중국사이의 비단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실크로든 중국에서 비단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으로 가는 대상(카라반)들은 금과 보석.모직물과 면직물.상아.상호.호박와 중국에서 생산이 되지 않은 유리들을 가지고 갔으며 중국에서 출발하는 대상들은 모피.도자기.철.칠.계피.대황.혁대.거울등의 청동제품을 가지고 나갔다....
'문화유적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카파도키아/우치사르(비둘기계곡).괴레메계곡 - 푸른마음-(2934) (0) | 2011.09.09 |
---|---|
[스크랩] 世界의 宮殿 - 불란서 베루사이유 宮殿-(2924) (0) | 2011.09.03 |
[스크랩] 실크로드의 분류 (0) | 2011.08.25 |
[스크랩] 실크로드의 문화 (0) | 2011.08.25 |
[스크랩] 실크로드의 인물 (0) | 2011.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