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1
※ 차 례 ※ 1
1. 서 론 2
2. 본 론 2
1. 영지주의 개관 3
1) 영지주의 3
2) 영지주의의 성격 3
3) 영지주의 자료 3
4) 영지주의의 기원 4
2. 영지주의의 종류 5
1)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자 5
(1) 사투르니누스 5
(2) 카르포크라테스 5
(3) 바실리데스 5
2) 시리안계의 영지주의자 7
3) 팔레스타인계 영지주의자 7
(1) 에비온파 7
(2) 케린투스파 8
4) 로마의 영지주의 9
3. 영지주의의 사상 11
1) 영지주의의 구원론 11
2) 영지주의의 우주론 12
3) 영지주의의 윤리론 12
4) 영지주의의 기독론 12
3. 결 론 13
※ 참 고 문 헌 ※ 15
1. 서 론
교회는 “하나님의 몸”으로써 신자의 공동체의 장이다. 성서 백과 대사전. 민 영진 (서울: 성서 교재 간행사. 1981). p. 625.
이러한 교회의 초대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단들이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던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와 마르시온 그리고 몬타니즘(Montanism)이다. 영지주의는 처음에 완전히 이교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했다. 마르시온은 신·구약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영지주의 이원론을 기독교 가르침속에 융합시켰으며, 몬타니즘은 임박한 새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마르시온(Marcion)과 몬타누스(Montanus)는 교회의 자식들(sons of church)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이 기독교와 유사한 데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내에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앞에 언급된 세 개의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파 기독교와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 놓여 있었다.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은 전통적인 복음을 곡해하였고, 몬타니즘은 복음의 한 면만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영지주의에 대하여서면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영지주의의 전체적인 개관을 하여서 영지주의의 특성과 성격,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자료 등을 살펴봄으로써 영지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가능케 하고, 그들의 종류와 사상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마지막 결론으로는 영지주의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교부들의 이단 논박에 대하여서는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았다.
2. 본 론
1. 영지주의(Gnosticism)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는 헬라의 단어(gnosis)에서 비롯되었다.
초대 교회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서 영일 역. p. 100.
개관
1)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은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주의 운동이다. 130년에서 180년 사이에 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교사들이 기독교의 지적 생활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로마, 소아시아, 심지어 론 벨리(Rhone Valley)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과 금욕주의적 윤리, 그리스도에 대한 색다른 이해, 죽음의 망각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능력으로서 지식의 강조 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3)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77.
2) 영지주의의 성격
영지주의라는 일반적인 호칭은 2세기에 성행했던 각종 종교적 이론을 총망라해 버린 이단을 말한다. 그 특징은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이론이 가치있다고 판단되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예로 초대 기독교를 알게 되었을 때, 기독교가 매력이 있음을 보자 기독교를 자기네들 사상 체계에다 적용해 버렸다. 즉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마술, 바벨론의 점성술, 동양의 각종 신비주의 종교, 헬라의 철학, 유대교의 율법, 기독교의 구원론 등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골격으로 하면서도 헬라의 철학을 논리적인 근간으로 혼합하였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고 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78.
3)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들로는 피스티스 소피아, 교부들의 작품들, 그리고 나그 하마디 문서들이다.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는 발렌티누스에 대한 문헌이 담겨져 있으며, 이레니우스(Irenaeus)5) 리용의 주교로 있었던 그는 2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180년경에 이단반박을 써서 영지주의 를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지주의의 교리를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저작활동을 통해 성서의 정경, 신조, 주교직의 권위를 한단계더 높게 끌어올렸다. ‘이단반박’은 5권으로 쓰여졌으 며, 원래를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나 지금은 라틴의 번역본만 알려져 있다.
, 히폴리투스(Hippolytus), 오리겐(Origen) 초기 교부시대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며, 성서학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구약성서]의 6가지 판본(그리스어역, 히브리어판, 70인역, 아킬라역, 심마쿠스역, 테오도티온판)을 병기해 놓은 헥사 플라(Hexapla)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브리태니커 16권 147페이지를 참조.
, 터툴리안(Tertulluan),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이단의 신조에 맞서 싸운 주교, 주로 동방교회의 대신학자 오리겐의 가르침에 항의했다. 오리겐 을 그리스도보다 그리스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심하게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던 원칙 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주요 저작으로는 그리스 철학파들, 유대교 종파들, 사마리아 종파를 포 함하여 800여개의 이단설을 다른 뒤 정통 신앙 교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Panarion(374
-377)과 교회의 가르침들에 관한 해설집 Ancoratustua(374)가 있다.
같은 교부들의 작품에는 영지주의에 관한 상당한 문서들이 담겨져 있다. 금세기 중엽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 하마디(Nag Hammadi) 상 이집트 지방 나일강 서편에 있는 카나주의 도시이다. 주변의 농경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을 판매하는 상업도시이다. 1945년에 영지주의의 문서인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2-3 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노시스파의 성서 사본 13부와 그 성서를 해석한 주석이다.
가 발견되기까지 노스틱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에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di Texts)은 주후 400년 매장된 것으로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의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조명해 준다. <진리의 복음>(The Gospel of Truth)은 무지가 인간의 상실된 상태임을, <레기노스 서(書)>(The Letter of Rheginos)는 부활이 육체적 사건이 아님을, <도마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은 예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114개의 어록을 수집한 것, <빌립보서>(The Gospel according Philip)은 성례전에 대하여, <요한묵시>(The Apocrypha of John)는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아담 계시록>(The Revelation Adam)은 아담이 노아가 홍수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셋에게 알려준다. 나그 하마디의 문서는 기독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은 있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없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80.→, Edwin M. Yamauchi. "Gnosticism." in
Eerdmans' Handbook to the History of Christanity. 98-9.
4) 영지주의의 기원
영지주의의 원형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영지주의의 형태를 갖춘 하나의 사상 체계는 기독교 이후에 형성된 신학의 조류하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같은 교부들은 영지주의가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등의 헬라철학과 상당히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자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암시적이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며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사도행전. 8:9-11.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은 사마리아 출신이었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 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그는 “자기 스승 못지 않게 마술에 능숙하게 된 뒤 한층 오만하게 기적을 행하는 체”하여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에 대한 교부들의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의 카파라태아 마을 출신으로서 시몬의 제자가 되어 역시 마귀의 선동을 받고 있었던 메난더가 안디옥으로 와서 마술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했다는 것을 우리는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지금도 그의 몇몇 추종자들은 같은 것을 믿고 있다. 이러한 사기꾼들은 기독교인라는 이름으로 악한 술책을 사용하여 위대한 경건의 비밀을 마술에 의해 손상시키려 했고,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을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견고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라고 기록한다. 결국 메난더는 거짓 선지자임이 입증된 셈이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의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교 출판부. pp. 181-182.
2. 영지주의의 종류
1)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
(1)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메난더의 제자였던 사투르니누스는 이 세상을 일곱 천사가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대의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다. 천사들이 실패로 끝낸 인간들을 하나님이 자비로서 영원한 본질을 부어 주셨으나 인간들이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으면 성욕을 절제함으로써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고 하였다.
(2)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
카르포크라테스는 주후 13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면서 신플라톤적 흐름에다 기독교의 구원론을 접합시켜서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보다도 저급한 신들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출생 이전부터 존재한 인간의 혼은 선재적 상태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혼은 수없는 재생의 저주를 받는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나 완전한 인간이었으므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였으며 잊어버렸던 영원한 실재를 찾아서 선포하였다. 그는 구원받은 자들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쾌락주의에 빠져서 윤리적인 면을 흐리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3) 바실리데스(Basilides)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는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120년-130년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은 하드리안과 안토니우스 파이우스 황제의 통치기간(125-155)에 쓰여졌다.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사상을 그대로 전수하기 보다는 일대 수정을 가하여 새로운 영지주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왜 그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바실리데스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나지 않으신 아버지가 마음을 처음 낳고, 마음은 이성을, 이성은 중용을, 중용은 지혜와 권세를, 지혜와 권세는 미덕, 프린스 그리고 천사를 낳았다. 그들에 의하여 첫 하늘이 만들어졌고, 그후에 다른 하늘들이 만들어졌고 이들 하늘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하늘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모두 365개의 하늘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바실리데스의 가르침은 심연과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 사이에서 낳은 33개의 에온을 통하여 설명하는 발렌티누스의 가르침과 상당히 흡사하다. 바실리데스는 인간의 육체는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구원을 단지 인간의 영혼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선지자들을 포섭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때문에 바실리데스는 복음서에 관한 책을 24권 저술하였으며 또 바르카바스와 바르코프 및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박해때에 어쩔수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변절하여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대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가르침을 임의대로 수정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쉽게 변절하게 만들어 버렸다.
① 기독론 :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나중의 하늘을 지배하는 천사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지었으며, 그것들 가운데 지상과 민족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관자는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다른 민족들을 자신의 백성, 즉 유대민족 아래 복종시키기를 소원했기 때문에 모든 다른 주관자들이 그에게 저항하고 그들 대적할 수단을 취하였다. ··· 그런 후 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가 ··· 자신이 낳은 첫 마음(First-begoten Mind-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라 부르는 자이다)을 보내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만든 이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민족들에게 이 지상에서 한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도덕적인 행동들을 수행하였다. 그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는데 그것을 구레네인이라는 어떤 시몬이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시몬이 예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무지와 잘못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사람들은 시몬이 예수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구레네 시몬을 예수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인정한다면 그는 아직 종이며, 우리의 육체를 만든 그들(천사들)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지 않은 아버지의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② 구원론 : 구원이 단지 영혼에만 관여하는데 그것은 육체가 본성상 부패하였기 때문이며, 예언들 자체가 이 세상을 만든 권세자(Princes)들로부터 나왔고 특별히 율법은 그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출애굽시킨 그들의 권세자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상에 드린 제물을 경시하고 상관하지 말며,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용하고, 다른 풍습과 온갖 종류의 방종의 도덕을 상관 해서는 인될 문제로 다루었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p. 184-185. →, Irenaeus. Adv. haer. I xxiv. 3-5.
바실리데스의 사상은 발렌티누스에 의하여 좀더 시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로 체계화되었다.
2) 시리안계의 영지주의
두 번째 영지주의의 형태는 시리안계이다. 120년경에 활동했던 안디옥 출신의 새투르니우스(Saturni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이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 메난더와 같이 새투르니우스는 천사들과 천사장들과 덕을 만든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아버지가 존재하며 세계와 모든 만물들이 이떤 천사 즉 7명의 천사들에 의하여 지음 받았다고 가르쳤다. 새투르니우스가 선포한 구주는 모양과 육체가 없으며 단지 안간처럼 보일뿐이다. 그는 유대인의 하나님이 그 천사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확신하였다. 모든 프린스들이 그의 아버지를 파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하나님을 파멸시키고 그를 믿는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두종류의 인간들, 즉 선인과 악인이 천사들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 최초의 인물이다. 마귀들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구주가 악인들과 마귀들을 파멸하고 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며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87. →, Irenaeus. Adv. haer. I. xxiv. 1.2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 첫째 자유 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구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유대주의계(Judaizing Type) 영지주의자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계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케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1) 에비온파
유대주의 영지주의 형태 가운데 에비온파는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초대교회의 주요 이단 가운데 하나이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란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에비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들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낮고 천박한 견해를 품은 사람들이라고 유세비우스가 일축했던 에비온파는 단지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다. 마르시온 이단이 반유대주의인 것에 비하여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는 친유대주의를 특색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4복음 중에서 유대주의 색채가 강한 마태복음만을 인정하고 바울서신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바울을 배도자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안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에비온파가 교리에 있어서 통일성이 었었던 것은 아니다. 에비온파의 어떤 부류는 “그리스도는 보통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덕의 진보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자연 생식에 의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에비온파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부인했다.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상과 부활과는 상관이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기대한 바에 따르면, 지상의 천년왕국이 이땅에서 실현되며, 예수의 재림시에 최초로 이땅에서 구원이 가시적인 실재로 나타난다는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들에 기초해서 에비온파는 그리스도를 순수한 인간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예수가 그의 세례시 혹은 부활한 때와 같은 시기에 양자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기독론의 원형이 되었다.
유대주의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이들은 “율법의 준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믿었으며, 율법에 따르는 의식적인 예배를 열심히 준수하였다. 사도들의 모든 서신을 부인하고 심지어 “주님을 율법에 대한 배교자”로 이해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에비온파는 율법적인 삶을 그대로 계승하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고 율법에 따르는 관습을 지켰으며, 심지어 유대인의 생활 양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고대했다.
(2) 케린투스(Cerinthus)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케린투스는 좀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약속’(On Promises) 제 2권에서 케린투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표방한 이단을 창시한 케린투스는 고의적으로 자신이 날조한 문서에 요한의 이름을 써넣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가 가르친 교리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주색에 빠져 있었고 지극히 호색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먹고 마시고 결혼하며 또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관능적 쾌락들을 보다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 즉 축제와 희생 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저서 [이단반박(Against Heresies)]에서 폴리캅에게 받은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사도요한이 한 번은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 케린투스가 있는 것을 알고서 그곳을 뛰쳐나와 도망쳤다고 한다. 그는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조차 참지 못했으며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행하기를 권면하며 ‘자 도망칩시다. 진리의 원수인 케린투스가 목욕탕 안에 있는한 그 목욕탕은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승은 당대 케린투스의 위치를 말해 준다. 케린투스의 가르침은 발렌티누스와 유사한 면이 많았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아시아에는 케린투스라는 사람이 세상은 첫째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만물보다 위이신 주권자(the Principality)와는 동떨어지고 거리가 먼 어떤 덕(a certain Virtue)에 의하여 지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는 더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셉에게서 나온 아들이지만 정의(justice), 중용(prudence) 그리고 지혜(wisdom)에 있어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세례 후 만물보다 위이신 주권자에게로부터 그리스도가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강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시고 도덕적 행동을 행하였으나 말년에 그리스도가 달아나셔서 그에게 인간 예수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였으나 본성상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는 단지 무감각하게 남았을 뿐이다.
4) 로마의 영지주의
(1) 발렌티누스(Valentinus: 104-165)
로마에서 활동한 발렌티누스(135-160)는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그는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발렌티누스는 그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전승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 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프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아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올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영지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이 하나님을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the Unknown Father)이라 부르기도 하고 깊음(abyss)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홀로 있지 않고 짝을 이루므로 깊음도 여성 짝인 침묵(silence)과 더불어 있다. 깊음과 침묵이 정신(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에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이것이 최초의 사조(四祖:tetead)가 된다. 여기에서 정신과 진리는 연합해서 말씀(word)과 생명(life)을 낳았으며, 또다시 연합하여 인간(men)과 교회(church)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팔 조(八祖:ogdoad)를 완성시켰다. 팔조 가운데 나중에 태어난 말씀과 생명에서 10존재, 그리고 인간과 교회에서 12존재가 태어나서 30존재가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에서 30에 대한 가르침을 찾는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몇은 1시에 다 른 이는 3시에 또 다른 이들은 6시, 9시, 11시에 포도원에 갔다. 이들 수를 합하면 30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30세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렇게 30존재가 15쌍으로 짝을 이루면서 있는 모습을 ‘충만’(pleroma)이라고 한다. 이 에온들은 엄격하게 자신의 짝과 더불어서만 교제할 수 있으며, 다른 에온의 짝을 넘볼 때는 ‘한계’(horos)라는 감찰자가 즉각적으로 벌을 내린다. 맨 마지막 짝이 의지(theletos)와 지혜(sophia)인데 여성 에온인 지혜가 남성짝인 의지와 상의도 없이 최고의 에온인 깊음에 대한 열정에 사무쳐서 깊음과 교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위치를 뛰어넘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지혜의 이러한 행위를 ‘교만’(hybris)이라고 하며, 이러한 실패를 ‘유산’(abortion)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지혜의 행위로 인해서 ‘충만’안에 질서가 파괴되자 에온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에온을 생산하여 ‘충만’을 완성시킨다. 이상과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계속해서 격정을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격정을 의인화해서 아카모트(ach-
amoth)라고 한다. 아카모트는 십자가와 한계에 의해서 충만 안에는 다시금 들어올 수 없도록 감시를 받으나 30에온들은 지혜의 유산을 방지하게 위해서 새로운 에온인 예수를 생산해 낸다. 예수가 아카모트를 욕정에서 해방시키자 욕정은 물질이 되고 예수는 아카모트를 회개시켰으며, 그 회개로부터 혼이 기원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충만으로부터 내려온 영지(靈地:gnosis)를 아카모트에게 수여했으며 이러한 깨달음이 영의 기원이 되었다.
물질의 기원을 에온의 열정이라고 함으로써 발렌티누스는 페르시아적인 이원론에 서서 물질을 악하게 보았다. 지혜는 에온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으므로 혼과 물질에다 형태를 부여하여 데미우르지(demiurge) Demiurge-일군, 특별히 세상을 만든자, 창조자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를 만들어서 이 세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지혜는 데미우르지가 만든 인간 안에 자리잡고서 영의 씨앗으로 지낸다. 따라서 모든 인간 안에는 지혜의 영이 자리잡고 있어서 혹은 갇혀 있으므로 인간은 영의 감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의 씨앗은 본래적인 영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으므로 성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장이 준비되자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안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영을 구원해 준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받을 때에 그속에 내려와서 존재하면서 인간 속에 갇혀 있는 영의 씨앗들에게 구원의 신비한 지식(gnosis)을 전파하다가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의 몸을 벗어나서 에온의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은 예수가 에온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한 지식을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자유를 얻고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내는 영지를 획득한 영적인 사람들(pneumatikos)과 영지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혼적인 사람들(neumatikos)과 전혀 가능성조차도 없는 육적인 사람들(sar-
kikos)로 3구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기성 교회의 예배는 구원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사교장에 불과하므로 영지를 가진 사람들은 별도의 예배를 가졌다. 이들의 모임에는 형식적으로 직급이 없었으며 처음에는 주사위를 던져서 해당되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다가 나중에는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성령의 깨우치심을 선언하는 형식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런 일련의 가르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투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 세상을 악한 물질로 보고 따라서 창조자도 악한 데미우르지라고 함으로써 구약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예수를 이원적으로 구별함으로써 4복음서의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보인 에온이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신론과 기독론에 있어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복음과 반대된다. 또 구원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으심보다는 점성술적인 영지를 획득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그것도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서 본래의 영혼의 세계로 복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원론의 입각해서 구원을 영혼에만 국한시킴으로서 육체로 짓는 죄는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육체적 자유방임주의(carnal libertinism)가 인정되었으며 교회의 윤리적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기성교회를 육체적인 자들의 모임으로 규정함으로써 교회의 조직과 체계를 부인하였다.
3. 영지주의의 사상
1)영지주의의 구원론
영지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은 구원론의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영이 물질적인 것들과 연합되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을 이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구원이다. 사람의 몸과 동물적 혼은 물질적 세계에 속하며, 오로지 영만 몸에게 생명과 욕망과 열정을 부여해 준다. 영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신적 본질의 한 부분이다. 약간 신비스러운 설명이지만, 영은 이 세상에 떨어져서 물질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영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지식 혹은 그노시스(gnosis)를 통해서 가능하며, 여기에서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지식은 단순한 앎을 뜻하지 않고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인 조명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지식이란 인간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상태에 있었으며,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는 것이며, 이러한 앎을 통해서 우리를 물질 세계와 묶어 놓는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물질 세계와 그러한 방법으로 결합되어서 노예 상태로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원한 지리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인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해방의 계시를 전달해 줄 사자(使者)가 와야 한다. 이 사자 개념은 모든 영지주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기독교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이 사명을 완수시킨다.
구원 교리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영지주의의 사상 체계는 복잡한 사색적 체계들로 뒤얽혀 있다. 만을 인간의 영이 물질 안에 갇혀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 이유들을 갖가지 사색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사색에는 2가지의 주된 특징적 흐름이 있다. 즉 파생적인 이원론(deriv-
ative dualism)과 숫자풀이술이다. 영지주의적 사색은 단일한 영원한 원리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원리들 혹은 에온들(aeons)이 하향적인 과정을 걸쳐서 생산되며, 마지막에는 가장 낮은 에온의 실수로 말미암아서 물질세계가 생산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물질과 영,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들 사이에 파생적인 이원론이 전개된다. 각종 각층의 에온들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숫자풀이술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에온들이 숫자적 양식을 따라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풀이술은 헬라적 사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이다. 기독교 사상사(I). 후스토 L. 곤잘레스. 이 형기, 차 종순 역. pp. 161-163.
2)영지주의의 우주론
영지주의적 우주론은 이러한 파생적 이원론과 숫자적 사색의 연합을 통해서 형성된 것으로서 절대자와 물질 세계 사이에 에온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가끔 천체적인 것으로 영은 영원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꼭 가로질러 통과해야 할 영역들이다.
3) 영지주의의 윤리론
영지주의의 윤리는 인간학과 우주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선은 결국 인간의 영 안에서만 찾아 볼 수 있고, 몸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으로서 이렇게 상대적인 힘이 영원한 대결상태로 있다. 그래서 몸을 영에게 복종시켜서 엄격한 훈련과 금욕적 삶을 영위하고, 또는 몸이 무슨일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은 영의 순수성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이 원하는 대로 맡겨야 한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로 크게 구별해 볼 수 있다.
4) 영지주의의 기독론
이들의 메신저는 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이룩한 업적은 우리들의 원래의 기원을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지구에 오신 것이며, 또 본래 영적 저택에 귀환하기 위해 필수적인 비밀의 지식을 전달해 주고자하는 것이다. 육체와 물질은 악한것이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적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메신저였던 그리스도가 우리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어떤이들은 그의 육체가 단지 유령에 지나지 않으며 기적적으로 진짜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적 “그리스도(Christ)”와 지상적 “예수(Jesus)”를 구분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우리들의 육체와는 다른 “영체(spiritual matter)”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초대 교회사 . 후스토 L. 곤잘레스. 서 영일 역. pp. 102-103.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의 탄생을 부인하였다. 만일 물질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하나님의 의지로써 생성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적하는 다른 원리에 의해서 생성되었다고 보면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지고하신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신체적인 몸이 아니고 다만 몸을 가진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의 고난과 죽음도 참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과 물질의 파괴적 힘에게 굴복당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르는 기독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3. 결 론
영지주의는 정통주의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점에서 이단 사상은 기독교 사상사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단의 등장은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이단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도신경과 일련의 신조들이 역사에 등장하였으며, 정경의 발전 역시 이단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325년 열린 첫 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이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가 소집하여 개회식을 주제하고 논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때문에 발생한 동방교 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였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성자 성부의 동등함을 나타내 기 위해 성서에 없는 단어인 “호모 우시오스(‘본질상 같다’라는 뜻)”를 니케아 신조에 포함시켰다. 이 공의회에서 여러 가지 교회법을 반포했는데 그중 주교 서품절차, 성직자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정죄, 주교와 사제, 부제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등이다.
이후이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나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의 판단기준이 되었다.
우리가 영지주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초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단을 비판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요소들이 이단들뿐만 아니라 정통주의라고 분류되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에게 상당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에 사상계를 지배했던 중기 플라톤주의, 스토아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다. 영지주의를 비판했던 저스틴의 사상에 영지주의의 핵심 사상인 플라톤사상이, 터툴리안에게는 스토아의 직선적인 사고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에는 플라톤주의의 색체가 농후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80-200)는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를 마르시온과 연결시키고, 오리겐의 요한복음 주석은 반세기 저에 쓰여진 해라클레온의 요한복음 주석의 도움을 받아 쓰여졌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자들은 다음 2세기 후에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를 형성하는 기초를 놓았다. 기독교 플라톤주의도 영지주의에 상당히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 참 고 문 헌 ※
1. 차 종순. 교회사. 한국 장로교 출판사.1992, 2쇄 발행.
2.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이 형기, 차 종순 역.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8쇄 발행
3. 차 종순. 교리사.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2쇄 발행.
4. 박 용규. 초대 교회사. 총신대학 출판부. 1994.
5. 헨리 채드윅. 초대 교회사. 서 영일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3.
6. 유스토 L. 곤잘레스. 초대 교회사. 서 영일 역. 은성 출판사. 1992 6판
7. 이형기. 세계 교회사 I. 장신대학 출판부. 1994.
8. 해리 R. 모어. 단편 초대 교회사. 백 성호 역. 1986.
9. 브리태니케 대백과 사전. 3. 4. 15. 16. 17권. 한국 브리태니커,
동아일보 공동출판. 1992.
초대 교회사
1. 사도시대
%% 때가 차매 %%
복음전파를 크게 촉진시킨 몇가지 요인
1)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오랜 동안의 평화로 인한 상업도로의 발전
2) 알렉산더에 의한 헬라어의 보급=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주전2세기)
3) 수많은 종족과 종교들이 섞여 사는 범세계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
고 있었다.
4) 도덕적 상황의 부패(로마서 1장 참고)
5) 동양의 운명론과 절망적 분위기가 서양으로 파급
이런 우울한 분위기가 어둠속에서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초기 %%
교회사의 시초에 대하여는 신약성경이 가장 중요한 자료다.
오순절에 능력을 받아 복음이 세계도처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바울의 회심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동방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던 안디옥에서 가장 뛰어
난 이방인의 사도를 파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방인의 개종으로 유대교
의 율법과 의식에 대하여 어느정도까지 준수해야 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되
었다. 이 문제는 주후 49년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의 승리를 일단락되었으
나 반대자들은 바울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복음은 유럽으로 옮겨갔으며, 바울은 체포되어 로마로 갔으나 오히려 가이사의 집
사람들도 믿게 되었다.
베드로도 바울 못지 않은 사도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으며, 바울의 순교즈음에 베
드로도 로마에서 거의 동시대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거나 교황이 베드로의 교좌를 이어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 사도의 메세지 %%
당시의 메세지에 대하여는 바울이 고전15/1-11에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예수"라
는 이름이 구새주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런 의미를 전달해 주었으며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부활후 18년이 되는 해에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성격이 변화되고 우상숭배를 멀리하게 되었으
며 심지어 노예들도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 초기 박해 %%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
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최초로 스데반이 순교당한 후 유대인들은 적극적으
로 반대하였으며, 로마인들도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공직을 마다하는 이들에 대해 적
대적이었다. 주후64년 네로황제는 로마의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
하였다. 당시 네로를 싫어하던 타키투스라는 저술가도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해로운
미신을 전하는 자들로 인류의 적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예루살렘의 멸망 %%
네로의 박해가 끝나기 전 팔레스틴에서 무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로마인들로 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아야겠다고 느낀 열심당원들은 로마군 수비대를 학살하기에 이른
다.초기에는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포위당하
였으며 유대인들은 영웅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과 유대
인들로부터 비난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예언하신 재앙의 날로
알고 요단강 건너 펠라로 피신하였다. 수십만 명이 칼에 죽고 기근과 흑사병으로 죽
어갔으며 성전을 불살라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 초대교회의 조직과 특별한 은사들 %%
임시직..사도,선지자,전도자
영구직..장로(presbuteros),감독(episcopos),집사(diakonos)
사도라는 단어는 보냄받은 자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나바나 에바브
로디도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는 특별한 계층에 속하는 자들이다. 하나
님의 능력과 감동을 입은 자들이다.
선지자들은 현재,미래,과거를 막론하고 영감받은 진리의 보도자들이었다. 사도 다음
계층에 속하였으며 2세기 중반이후로 점차 사라졌다.
전도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도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디모데나 빌립은 전형적인 전도자의 모습이다.
장로와감독은 동일 직분임이 여러 증거를 통하여 드러났다.
집사는 종 혹은 사역자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부금이나 재산등을 관리하
는 사람을 의미한다.
처음 두 세기 동안에는 교회조직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 및 예배의 본질이 단순했
다. 즉, 형식주의나 허식이 전혀없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가정이나
두란노 서원등의 공적인 장소에서 할 수만 있으면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성령의 인
도로 자유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예배서를 통한 형식의 틀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교
회는 매우 활동적이어서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파르디아로, 서로는 골과 스페인
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2. 제 2 세기
제 2세기의 초반 70년은 교회 역사상 가장 모호한 시대이다. 주후96년 도미티안 황
제가 죽음으로 박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도미티안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
져서 그를 가리켜 제 2의 네로라고 하였다.
%% 초대교회의 문서들 %%
*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 이레니우스의 글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로마의 제 2대 감
독이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 내용에는 자신의 교회 이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전 세계의 교회를 관할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는 점이 특이하다.
* 열두 사도의 교훈집=디다케.. 유대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비영적이며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적 관습과 금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선지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지자를 사
칭하는 사기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 그가 보낸 7교회의 편지에는 가현설이라고 불리우
는 초대교회의 이단과 관련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현설에 의하면 세상에 사실 때의 그리스도는 참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의 고난도 환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감독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감독들의 대표격인 장로를 감독(bishop)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감독은 한 사람의 장로이지만 영구적인 목회자의 성격을 가
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서머나의 폴리갑..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
한 사람이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
한 지방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으나 그 분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
* 져스틴 마터.. 그는 초기 변증가라고 한다. 그의 변증서에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아주 독특
하였다. 그의 글을 통한 예배의 형식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낭독,사회자의 강론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의한" 즉석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장관 쥬니우스 루스티쿠스에 의하여 사형성고를 받았는데 "너희들은 다시 살아
나서 영원히 살 줄로 상상하느냐?"라는 질문에 져스틴은 "나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
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 초기 이단들 %%
2세기에는 여러 이단들이 일어났다.
* 나사렛파.. 이들은 바울을 몹시도 괴롭히던 초기 유대주의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습을 버린 후에도 끝까지 집착
하던 자들이다. 약 4세가경 까지 존재하였다.
* 에비온파.. 나사렛파와 유사하나 훨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유대의 율법을 강
조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세례시에만 성령이 함께하였으며 십자가상에서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이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여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퍼
졌다. "영지"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헤라어 그노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비의적
이고 신비한 영적인 사람들만이 이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물질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의 도덕적인 생활은 처음에는 엄격하였으나 종종 방종과 방탕으
로 빠져들곤 하였다. 이들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시노페의 말시온이다.
그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
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신은 비토스라고 하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 부
터 유출되어지는 30개의 유출물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는 물질의 창
조의 신 데미우르지라고 한다.
* 몬타누스 주의.. 몬타누스 주의가 나타날 때의 교회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없었고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몬타누스는 성
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년왕
국시대는 감각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여 교회의 재림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로
감정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색과 감정에 치우
치게 되었다.
3. 초기 교부들
2세기의 교회는 영지주의에 의한 환상적인 사변과 다른 편으로는 반지성적인 환상적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끌고 나간 여러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
는데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1) 신약의 정경..당시까지는 신약의 목록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서신들도 정경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편지들이 사
도가 썼는지 아니면 사도와 적어도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 썼는지를 알아 보는 것
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이러한 글들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불렀으며 터툴리안은 구약의 위치에 신약을 올려놓았다.
2) 신앙의 규범.. 영지주의자들이 가짜 복음서와 가짜 서신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하여야만 했다. 이렇게해서 간략한 신조 혹은 신앙의
규범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다.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리의
발견을 위해 사도시대에 있었던 교회들의 신앙에 의존하였다. 이 것이 교회들의 "전
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자 이 전통은 모호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걸
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3) 사도권 계승..이레니우스는 전통의 거룩한 수탁자로서 사도직 계승 사상을 강조
하였다. 이 식부터 점차로 장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감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터툴리안과 클레멘트에 이르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교회가 감독
직 아래서 그 통일성을 발견하게 되고 전해내려오는 전통에 비중을 두게된다. 그 결
과로 전통이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 골의 이레니우스 %%
180-250 년경의 위대한 교부들 중에 첫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그것은 그가 전통에 호소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 저서로는 가장 유명한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남기고 있다.
%%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
복음이 북아프리카에 전해진 이후 유명한 이들로는 바로 터툴리안과 키프리안 그리
고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 라틴 문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크고 아름다운 도시 카르타고가 라틴 문화의 뛰어나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후 그의 신학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
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내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그의
변증서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그는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닥호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더 나아가 사도권의 계승
과 전통의 강조와 접목되어져 로마 가톨릭의 권위와 전통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
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사상에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를 가
지고 있다.
%%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
그는 감독직에 대한 폭넓은 주장때문에 그리고 성직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교회의
예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유명해 졌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려는 그의 줄기찬 주장.. 박해때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를
어떤 회개의 증거없이도 다시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크게 두 파벌이 나뉘어졌
는데 키프리안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의 위치
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에 대한 굉장한 주장을 하였따. 그후 그의 이 주장은 받아들
여져서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성직자 개념..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후에 화체설과 미사희
생을 남용을 초래한다. 당시까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
하
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었으나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신념.. 로마의 감독이 자신의 의견에 자신의 반
대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복종을 요구하는 교령을 보내게 된
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처럼 로마의 권리침해에 대
하여 싸우게 된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다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보자!
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인구 250만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헬라문
화가 아테네 다음으로 꽃피운 도시이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이곳의 교
회에서 배출한 지도자로는 판타이누스,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이 곳
에서는 교리문답학교가 있어 신학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교육도 이루어졌다.
%% 클레멘트 %%
클레멘트는 문답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철학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그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 오리겐 %%
당시까지 교회가 알고 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은 오리겐이다. 그는 18살에 교장이 되
엇다. 또한 학교의 이름을 최고로 높여놓은 것도 그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인 영감
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형적인 풍유적 해석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2세기말에 나타난 단일신론(Moanrchianism)이 있다. 이 말은 헤라 신학자에게는 하
나님의 신성에는 하나의 위격만이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2)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양태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장을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즉 어떤 때는 성부로 성
자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위격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에 의하면 성부계서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성부수난설자라고 한다.
이 상들에 대한 오리겐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그
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인격을 가졌으나 그들과 하나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성
자의 영원출생에 대한 해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의 결정과 4세기의 교회 공의회의
선언에 기초가 되었다.
4. 시련과 승리
교회에 대한 박해가 250-260 정도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데키우스(249-251)와 발
렌시안(254-260)의 통치기간에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이 시기는 로마에 있어 큰
재난의 시기이다. 사방에서 침입해 오는 야만족들의 침입이 심각했는데 그중 고트족
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박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3세기로 접어들기까지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디오클레티안때에 기독교의 예배장
소와 모든 종교서적을 파괴하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이들이 아름다운 교회당에 들
어갔을 때 아무런 신상이 없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서방황제 막시미안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이 칙령을 준수하였는데 그의 부제로
골과 브리테인 그리고 스페인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는 하나님의 성전인 육체가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박해로 인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기전에 특이한 영적체험을 하게 된다. 헬라어 문장이
새겨져 있는 불타는 듯한 십자가를 본 것이다. 그는 공동황제였던 리시니우스를 물
리치고 전 지역의 황제가 되었으며 313년 3월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였다. 기독
교에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고 무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는 후에 매우 사치해져서 이교도의 예복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감독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회에서 예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말에 이르러 거의 모
든 이교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미래에 대한 불길한
전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의 세속적인 야심과 성례가 사상 그리고 수도원
제도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5. 주요 회의들,주요 인물들,주요 사건들(325-500)
이 시기는 단적으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시기다.
## 아리우스 논쟁 ##
아리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앞서고 고귀하기는 하지
만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이던 알렉산더는 동일본질임을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의 노력이 실패하자 324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토론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usius)인가 유사본질(Homoiousius)인가였
다.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의해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임이 주장되었고 아리우
스는 파문당하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사벧리우스 주의에 반대하여 성령의 신성을 특별히 주
장한 회의였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웅변가적인 감독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내
쫓았다. 그가 단성론자들에 반대하여 지나치고 양성론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
하여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당시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
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도 반대하여 그
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지 그의 신성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불공종했으며 그는 유배되었다. 그후 네스토리안 교회는 페르시아와 아르메
니아에서 확장됴으며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던 유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
신성만을 가르친다고해서 정죄당하였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449년
에베소회의에서 그를 인정하였으나 이 회의는 난장판이었으며 일명 강도회의라고 부
른다. 그후 칼케돈회의에서 다시 정죄당하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이렇게 났다. "그리스도가 변화나 혼합됨없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한 위격속에 연합되있다고"고 확인되었다.
## 탁월한 인물들 ##
1) 포이티어스의 힐라리.. 아리우스에 대항한 서방의 위대한 투사
2) 밀라노의 암브로스.. 황제 발렌티니안2세의 어머니가 아리우스파를 위하여 예배
처를 요청했을 때 거절한 사람이며 서방제국의 왕좌를 탈취한 막시무스에게 성찬정
지시켰고, 데살로니가의 반란군에게 학살을 명한 데오도시우스대제에게 8개월간의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3)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그의 신학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4) 세 사람의 카파도기아인.. 가이사랴 감독 대 바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그들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5) 존 크리소스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이름나 있으며 "황금 입의 존"이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6) 제롬..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을 내 놓은 사람이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수
도원주의와 독신주의자이다.
7) 레오대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그와 로마의 그의 계승자에게만 "교황"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후 그는 로마의 감독이 세계의 감독권을 갖는 주장을 폈
다. 그러나 칼케톤회의에서 그의 주장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교황 지상권에 대한 주
장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 격변하는 세계(400-500) ##
이 시기에 야만족들의 침입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서고트족의 알라릭은 410년 로
마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다행인 것은 이 야만족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다행히 기독교의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410년 로마의 마지막
군단은 골과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쥬트족,앵글족,색슨
족등이 북부독일로부터 건너와 동부 잉글랜드와 남부 스콜틀랜드의 교회를 파괴하였
다. 서부의 켈트 교회만이 살아 남았다. 이로서 로마 문화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꿋꿋한 튜튼족은 무력한 문명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힘과 활력을 심었
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있어서는 어려운 시기였다. 비록 이교도들이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각종 미신과 오류가 유입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로마의 감독들에게는 개인적인 위치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도망갔으며 감독의 도덕적인 권위가 크게 증대되었다.
6. 중세의 시작
그리스 로마의 문화는 감소되어지고 튜튼과 로마 사상의 결합으로 새로운 사상이 태
동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그레고리 1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 590년부터 시
작된다고 봄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는 476년 제국의 멸망이후
로 점차 쇠퇴하였다.
## 교황 그레고리 대제(590-604) ##
그는 레오1세 그리고 그레고리7세와 이노센트 3세와 더불어 교황제도를 수립한 사람
이며 정확히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샤프는 그레고히의 성격
을 평하기를 은둔,금욕,헌신,미신,계급,오만하고 야심적이다고 했다. 그는 일찌기
베네딕트회 수도사였었다. 유럽의 3분의 2가 이방인들의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선교회를 앵글로색슨족에게보낼 계획을 세웠다. 58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
교인 요한이 "전세계적인 감독(Universal Bishop)" 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때, 그
를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라고 멀한 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사
용하다가 전교회에 대한 지상권을 주장하기위해 베드로의 계승자, 지상에서의 그리
스도의 대리자라고 한 것은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켈틱교
회만이 예외였을 뿐 서방의 모든교회에서 인정되었다.
오리겐 이후 많은 사람들에 윤곽이 잡혀오던 연옥설에 대해 그레고리에 의하여 공식
적으로 반포되었다. 그레고리 성가는 후시대에 발달되어진 것 같으며 그러나 그는
그림이나 화상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예배치는 못하게 했다. 그는 어려운 시
대에 로마교회를 매우 든든히 해 놓은 위대한 인물이다.
## 영국의 복음화 ##
596년 교황 그레고리의 친구이자 형제 수도사인 아우구스틴이 영국의 앵글로색슨족
을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파리에서 온 그리스도인 공주인 베르타를 아내로 맞은 켄트의 왕 에텔베르트는 로마
선교사들을 관대히 대했으며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에 연구할 시간을 요구했다. 그후
9개월후에 약 1만여명이 개종하였다. 아우구스틴은 성 마틴교회에 켄터베리 본부를
설치하였고 여기서 대성당이 육성되게 된다.
켈트교회의 지도자들을 로마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전략은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독립성때문이었다. 영국은 켈트교회의 영향력이 컷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단,성 콜럼바,콜럼바누스등이 위대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보스게스,라인,이
탈리아 및 헝가리등지에 까지 뻗어나갔으며 많은 기념물들을 남기고 있다. 한 때 이
들의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정도였다. 그러나 켈트교회와 로마교회가 모여 그들의
차이점을 논의하였다 그것이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였는데 여기서 노덤브리아의 왕
오스위는 로마교회측으로 넘어갔다. 그 이후로는 영국에서의 켈트교회의 영향력이
점차로 약해지게 되었다.
## 교회의 변모 ##
1) 교황의 주장.. 교황이 행사하고 있는 힘과 자기의 직책에 대하여 요구하고 있는
있는 엄청난 주장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돌
보던 겸손한 목자가 아니며 왕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때로는 외교적 목적으로 왕들을
이용하기도 하는 엄청난 위치에서 교만해 있었다.
2) 주의 만찬 ..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사상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희생제사로 간주하는 사상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
다. 임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실제적 임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831년에 이르러서는 파스카시우스 라베르투스에 의해 화체설이 주장되었다. 이교리
는 1215년 라테란 회의에서 로마교회의 교리로 재천명되기까지 약 400년이 걸렸다.
3) 연옥설.. 어거스틴이 불로서 영혼의 죄를 깨끗이 씻어낸다는 방법의 가능성을 그
의 믿음으로 표현한 후 점차 그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방종교에서는 연옥에의 신
앙이 보편적인 것이다. 그레고리 대제에 의하여 널리 선호하게 되었으나 1439년 플
로렌스회의 까지는 로마 교회의 신앙조항에 들어있지 않았다.
4)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에게 하는 기도.. 연옥신앙의 증가로 면죄부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그리고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
에 대한 교회의 인정은 787년 제2차 니케아 회의에서 였다.
5) 마리아 숭배..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성언한 이후 마
리아 숭배는 점차늘어갔다. 수태고지일을 축제일로 지키게되었다. 또한 그녀가 중보
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숭배의 발전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론 교리는 프란시스회와 도미니크 사이의 열
띤 논쟁을 거친후에 1854년에 비로소 공포되었으며 성모몽소승천교리는 20세기 중엽
까지도 공포되지 않았다.
6) 비밀고해.. 초대교회에는 중죄를 지은 사람이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죄의 고백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는 공개적으로 하였으나 많은 부작용으로 레오1세
이후에는 사제앞에서의 개이적인 고해가 장려되었다. 이상하게도 비밀고해는 켈트선
교사들이 많이 장려했으며 이는 도덕적으로 저급한 프랑크족을 위해서 였다.
7)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 중에 돈많은 사람들이 늘어나자 교회가 사치해지기 시
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성당과 그레고리 1세의 로마의 일곱교회가 그것이
다. 이에대해 제롬은 200여년전부터 경고하고 있다. 진실하고 거룩한 생활속에서 단
장된 것만이 참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회교도들은 벌써부터 그리스도교회의 화상숭
배에 대해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8) 사제제도.. 교회안에 제단이 생겨나게 되고 이를 집행하는 사제들이 나타나게 된
다. 이들이 의식을 행하는 장소는 거룩한 곳으로 여겨지게 되고 회중석과 분리되었
다. 이들은 점차 서품절차를 거쳐 사제계급화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이후 등장한
예복이 상례화되어서 4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예복의 색을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이
고 있으며 어떤 미사복은 장엄 미사(분향과 주악이 있는 미사)와 또 어떤 의복은 창
미사에 쓰여지는 것으로 구분되고 있다.
9) 분향.. 향을 피우는 일은 기독교의 건물을 훈증 소독할 때만 사용되던 것이었다
이것이 4세기 동안에는 예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심지어 터툴리안은 이방인이
하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7. 수도원 제도의 기록
중세에 있어서 중요시되었던 수도원제도는 사도바울에 의해 정죄되었던 비정상적인
금욕주의에서 비롯되어진다. 이것은 기원이전의 동방에서 있었으며 불교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251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
다.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동굴에 은둔하여 수도하는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원의 공
동체적 조직을 갖춘 사람으로는 파코미우스이다. 이 수도원에 아타나시우스가 방문
했을 때 찬송과 연도를 하는 3천여명의 수도사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수도원 제도는
아타나시우스,제롬,암부로스등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발전하였다. 서방의 가장 초기
지도자는 4세기의 골지역의 성 마틴이었는데 이 제도는 이탈리아에서 시행되기 이전
에 동방으로부터 직접받아들였다.
1) 베네딕트 교단.. 529년 이탈리아의 몬테 카지노에서 베네딕트에 의하여 설립되었
다. 규율은 엄격했으나 인기가 좋았고 부유한 교단이었다.
2) 클루니 운동.. 베네딕트 수도원의 부패와 열정의 결핍으로 베르논이 프랑스의 클
루니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독신생활과 엄한 기강으로 유명하다.
3) 시토회.. 베네딕트 교단의 엄격하고 순수한 규칙을 지키기 위하여 부르군트의 시
토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이다.
4) 탁발수도회.. 프란시스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이 있다. 비천한 신분계층으로 구성
되었다.
프란시스 교단..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청
빈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보나벤투라,둥스 스코투스,윌리암 오캄과 같은 위대한 인
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재물과 세상적인 것으로 인한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도미니크 교단.. 스페인의 귀족 도미니크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1215) 그는 보통사
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간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주장하였다. 교황은 종교재판소를
도미니크회에 위임하여 많은 사람을 피로 물들게 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농업발전
과 학교건립,빈민구제와 자선사업으로 크게 기여하였으나 점차 초기의 이상에서 벗
어나기 시작하였다.
5) 군사적 종단.. 이러한 것으로는 1>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1048년 창설)2>성
담 기사단(1119년 창설) 3> 튜튼 기사단(1121년 창설) 모두 군인 신분의 수도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단들은 순례자들을 돌보고 보호해 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곧
군대적이 되었고 주로 사라센족들과 싸우게 되었다.
12. 성경과 신조
[위로]
1) 성경
(1) 성경의 집성
a. 초기 주일 예배시에 예수의 언행록을 읽음.
b. 160년 전후 사복음서에 종합 집성.
c. 마르키온은 사도 서신 (바울의 10서신)을 경전의 일부함.
d.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는 이미 신악의 집성이 완료됨
(2) 무라토리 단편
a. 1740년에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토리(Muratori)가 미라노의 도서관에서 발견하였다.
b. 4복음서,사도행전,바울의 13개 서신,유다서, 요한2서와 요한 계시록
(3) 페시토 (Peshito)
a. 2세기 중엽 이전에 에뎃사에서 만들어진 시리아(수리아)어역.
b. 4복음서,사도행전,바우르이 13서신,히브리서,야고보,베드로 후서,요한 1서가 포함.
c. 유다서,베드로전서,요한2.3서가 추가됨.
d. 이레네우스는 야고보, 유다서, 베드로 후서,요한3서를 인용치 않음.
e. 클레민스는 빌레몬, 요한2.3서,베드로 후서,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음.
f. 테르툴리아누스은 야고보, 베드로 후서,요한 2.3서를 인용하지 않음.
<요약>
정경 (Canon)에 대하여
(1) 신구약 66권이 정경
(2) 희랍어 [카논]은 <곧은 장대> <지팡이>라는 뜻
(3) 성경에는 <규례> <분량>이라는 뜻으로 사용됨(갈6:13,15,16 고전 10:13,15,16).
(4) 교회가 Canon 을 정경이란 뜻으로 시작한 것은 이 말이 애초부터 사랑의 신앙 행위를 규정하는 원리라는 관념을 갖고 사용함.
(5) 신약 성경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까지 쓰여지고 교부들의 서적에도 이 관념을 갖고 사용함.
(6) Canon <표준> <근본원리> <근본적인 원리를 기록한 책의 목록>을 뜻함.
(7) 결정 시기....동방 교회가 382년 로마 전체 회의에서 27권과 그 목차가 확정됨.
(8) 결정 기준
a. 역사적 기준:사도적 권위가 있는가?
b. 내적 기준: 그 감화력이 사도들의 것과 동일한가?
2) 사도신경
(1) 12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신앙의 표준으로 작성하여 베드로가 로마에 가지고 갔다는 전설에 의하여 <사도신경>이라고 함.
(2) 당시 수세 후보자의 신앙 고백으로서 오랫 동안 사용되어 왔다.(오늘의 것과 같지 않음)
(3) 아리우스 등 이단이 일어남으로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자를 넣어 381년에 전문이 완성된 듯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
13. 교회 정치와 역원
[위로]
1) 교회 정치
(1) 교회 주권
a. 대도시 교회로 집중...탁월한 지도자와 경제적 풍부함으로 인하여
b. 교회는 구원의 조직체...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함
c. 감독의 권위....감독 없이는 교회도 없다하여 전권을 장악.
(2) 지방 대회
a. 도시를 중심하여 지방 대회가 열림.
b. 4세기 경에는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디옥.갈라디아.엘베리스(Elberis), 아를 (Arles) 등지에서 회집.
c. 의장은 대부분 대도시 감독이 되고 간혹 연장자가 됨.
2) 역원
(1) 직제
a. 초기 ...감독,장로 b. 3세기 중엽...감독 1명,장로단,집사국
c. 3세기 후반...(안수직) 감독,장로단,집사 (비안수직),부집사,시승,악마 조복사,독경사,수위 등.
(2) 자격
a. 심신이 건전하고 도덕심이 견고한 자.
b. 자기 교회에서 피선된 자.
c. 30세 이상 단,병상에서 수제자, 관직자, 군직자, 재혼자, 노예,스스로된 불구자, 수세 후 중범자는 될 수 없음.
(3) 임직
a. 감독...지방 교회 평신도에 의해 선출...3명의 인근 감독이 안수.
b. 장로 집사... 교회가 교직자에 의해 선출...감독이 안수.
(4) 권한
a. 대감독...그 지방 전 감독을 지휘하고 안수례를 행하고 2년 1차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됨.
b. 목사...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군림.
c. 감독...교회 정치의 수반,행정 관리.집례,설교,종교회의 참석.
d. 장로..통상예배 관리,안수례 행함.신도 교육,종교회에서 감독의 상담역할.
14. 예배와 예전
[위로]
1) 예배
(1) 예배 장소
a. 초기는 개인집,셋집,회당
b. 200년 후는 특별한 건물에서 예배.
c. 회당은 평행 4변형으로 본당과 목사의 자리인 강단으로 설비.
(2) 예배 내용 (주일 회집)
a. 찬송... 시편과 성경중 이사야 6장,눅 1:46-2:29, 마21:9를 노래함.
b. 성경 낭독...사도가 쓴 예수의 언행록,선지자의 글.
c. 설교...회장이 간단한 말로 즉석 설교, 후에는 준비하여 설교함.
d. 기도...총기립하여 힘에 지나도록.
e. 성찬식..떡,포도주,물을 가지고 회장이 나누어 줌 결석자는 집사는 통해 보내줌.
f. 헌금...회장이 보관하여 고아,과부,병자,곤궁한 자를 구제한다.
2) 예전
(1) 세례
a. 수세전...기도하고 자주 금식(2년간)
b. 문답시...사죄에 관한 원칙을 알게 하고 구하게 함.
c. 세례식...세번 침례함.
d. 수세후...일 주일간 목욕 안함.
e. 축일. 부활절 ...50일간 흰 옷 입음
(2) 유아세례
a. 찬송...이레네우스, 키프리아누스반대...테르툴리아누스
b. 라틴 교회는 전반적으로 시행
(3) 부활절
a. 동방...유대인의 유월절 (니산월 14일)
b. 서방...춘분후 첫 만월 다음 주일
c. 이를 통일하기 위해 158년 폴리가르푸스가 로마에 가서 타협하려 하였으나 에베소 감독과 이레오가 반대.
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통일.
(4) 렌트 (Lent)
a. 부활절전 1주간 (고난주간)근신.
b. 40 시간 무덤에서 머문 시간 동안 금식.
c. 40 일간 렌트(대제)로 지킴.
(5) 승천일과 오순절
a. 부활 후 40일째는 승천일.
b. 부활 수 50일째는 오순절.
(6) 주현절
성탄절이 없을 때 예수의 세례와 그 출현을 축하하는 날임.
15. 생활과 풍속
[위로]
1) 박애와 자선
(1) 박해가 심하므로 성도는 단결
(2) 로마 감독 우르바누스 1세 (223-230)는 걸인 없음을 확인.
(3) 시리아(수리아),아라비아,가바도기아까지 원조.
(4) 카르타고 질병시에 시체를 처리하여 전염병을 방지.
2) 정결한 생활
(1) 결혼은 인정하나 독신 남녀는 존경.
(2) 이혼 후 재혼하지 못하며 재혼자는 파문.
(3) 교직자는 장립 후에 결혼을 피할 것.
3) 은둔 생활과 금식 (수,금요일은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음)
4) 순교자와 수절자 숭배
5) 장례식
a. 화장하지 않음. b. 과도히 슬퍼하지 않음.
c. 복상기 상복은 일반과 같음.
d. 죽은자의 일용 기구, 장식품은 묘문에 장식
고대교회사3 (니케아회의 시대 313-590)
1. 서 론
2. 콘스탄티누스 대제
3. 니케아 회의
4. 기독론 논쟁
5. 수도원
6. 로마 교권의 강화
7. 동방의 교부들
8. 서방의 교부들
9. 아우구스티누스
10. 펠라기우스 논쟁
11. 예배와 예전
이 시대는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즉위에서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까지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604년 그레고리우스 1세가 죽은 때까지를 경계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는 라틴 교부의 마지막 사람이며 첫 교황이다.
1. 서 론
[위로]
1) 기간
313-590 년 (최초의 세계적인 회합인 니케아 회의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부름)
2) 교리의 논쟁
박해 중에는 신앙 뿐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면서 교리 문제가 등장하고 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이다.
3) 세계 대회
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대회가 소집되었고 근본 교리가 제정되었다. 교회 정치 분야에는 암브로시우스, 설교가로는 크리소스토모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유명하다.
4) 교권 증진
정치력이 쇠해 갈 수록 복음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 지도자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졌고,로마 교황 세력이 강대해져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관직까지 소유하였다.
5) 수도원의 발전
관직을 지킬 수록 교회는 속화되었고 여기에 반작용으로 금욕주의.둔세주의가 성행하여 수도원이 생겼다.
2. 콘스탄티누스 대제 (Constantinus)
[위로]
1) 콘스탄티누스 대제 약사
a. 288나이사스에서 출생, 부는 서로마 황제 클로루스(독신자),모는 헬레나.
b. 서방의 부제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의 아들고 용맹하고 싸움잘함.
c. 부왕 사망 후 서방의 황제 입후보자가 6명이었으나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싸워 이김.
d. 동방의 황제리키니우스의 누이를 황후로 삼고 두 황제가 밀리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함.
e. 동방 황제게 이교를 도와줌으로 싸워서 로마 제국을 통일함.
f. 337년 65세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받고, 오순절날 사망.
2) 입신 (입신) 동기
a.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위아 다리에서 전쟁할 때 태양 위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자를 모든 군사들이 봄.
b. 그날 밤 꿈에 예수가 나타나 십자가를 보이고 이것으로 기장을 삼으라하므로 그대로 하여 승리함.
c. 믿은 후에도 죄인이라고 세례받지 않다가 죽음에 이르러 세례받음.
3) 업적
a. 교회 보호
?. 외부적 감독이라 자칭하고 궁중에서 연설함.
遁. 유세비우스를 궁중에 들이고 우대함.
?. 이단을 멸하고 교회 통일을 도모.
b. 법률 개정
?. 고래(고래) 풍속 개량.
(1) 십자가형 폐지 (2) 검투 폐지
(3) 축첩 제도 엄벌,이혼에 제한을 둠.
(4) 여자에게 토지 이외에 소유권 인정.
(5) 죄인 이마에 화인(화인) 금함.
遁. 교회의 법률을 국가가 공인
(1) 교인간의 쟁투에 대한 교직자의 판결은 법률상 유효.
(2) 대의회 결의는 국가의 법률이 됨.
(3) 교회의 법률에 대한 불가침
(4) 사죄,감형 요구권을 교직자에게 부여함.
?. 기독교를 위한 특별 법령
(1) 주일 휴업(법정,군대)
(2) 교직자는 세금과 병역 의무 면제.
(3) 박해시 몰수한 재산 반환
(4) 교회 재산 관리법 제정, 기부금 제도 공인.
(5) 타종교의 잔인성과 불결한 행동을 금함.
c. 천도
?. 3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
遁. 이유
(1) 야만인과 페르시아인에 제어 목적
(2) 새로운 기독교 수도 형성 목적
(3)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d. 결정...왕위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처,자,조카까지 살해.
e. 후계자
?. 세 왕자에게 제국을 분할
(1) 장남...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2) 차남...콘스탄스(Constans)
(3) 삼남...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遁. 차남을 형을 죽이고 동생과 함께 나라를 차지함.
?. 차남은 10년 후 자객에게 암살당함.
?. 천하는 삼남에게 통일됨.
<요약>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
(1) 우상 숭배 금지 (2) 이교 전당을 몰수하여 교회에 줌
(3) 관직은 기독교 신자라야 함.
(4) 크게 부패하기 전에 일대 반동이 일어남.
3. 니케아 (Nicaea)회의
[위로]
1) 시일과 소집자
325년 5월-6월, 콘스탄티누스 황제
2) 소집 방법
(1) 각지 감독에게 안내장을 보냄.
(2) 각 감독은 장로 2명,수행원 3명의 대동을 허락함.
(3) 관용 주창 편의를 보아주고 체재비는 국고에서 부담.
3) 소집 동기
(1) 부활절 일자 문제(동방은 유월절을 지키고, 서방은 주일을 중시했다)
(2) 아리우스 (Arius) 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될까 염려하여
a.아리우스 (Arius)
?. 리비아인 (현,트리포리)
遁. 루키아누스(Lucianus-312년경 죽음)에게 사사 (루키아누스는 당대의 일류 학자로 성경 해석에 통달하였음).
?. 알렉산드리아 장로로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음.
?. 키가 크고, 몸은 약하나 말이 명괘한 이론가.
?. 열정적이며 금욕 생활을 통해 추종자가 많음.
b. 아리우스의 학설 (그리스도관)
?.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참 신이 아니고, 같은 성품,동격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주어서 세계 창조의 중개가 그리스도의 본분이다.
遁. 인성이 없다.
?. 악을 택하셨으면 악행을 할 수 있었다. 선행함으로 상급을 얻는다.
c. 사건의 발단
?. 감독 알렉산드리로스 삼일신의 현현을 가르칠 때 장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공격함.
遁. 320년 알렉산드리아 지방 대회에서 아리우스와 그를 찬송하는 애굽 감독들을 파면함.
?. 그 세력이 점점 확대되고, 각지로 다니면서 반대 연설을 함.당시 유명한 니코메디아 감독의 유세비우스도 이에 합세함.
?. 동방에는 아리우스 설이 유포됨.
?. 황제는 스페인 감독 호지우스(Hosius)로 조정케 했으나 성공치 못하므로 이 문제 해걸을 위하여 회의를 소집함.
4) 회원
(1) 유세비우스는 250묘으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으로 기록(아마 계산한 시일이 차이가 난 듯하다)
(2) 서방은 원거리이며 헬라어를 모르므로 10명만 참속함.
(3) 박해 때문에 눈 멀고,양손 불구자,고행을 겪은 자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4) 회원의 파벌
a. 아리우스파...유세비우스를 비롯하여 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이 이파에 속함 (아리우스도 장로로 참석)
b. 중립파...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c. 정통파...소주지만 유력하였다. 알렉산더 골도바의 호시우스,아타나시우스.
5) 회의
(1)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연설.
(2) 의장은 유세비우스나 호시우스인 듯.
(3) 아리우스파에서 신조 초안을 제출하였으나 기각됨.
(4) 가이사랴 유세비우스가 신조 초안 제출 (화합 목적으로)
(5) 논의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질임> 아타나시우스는 추상적 변론을 피하고 구원 사상에 근거하여 주장.
6) 결의
(1)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초안(아리우수설 부인)에 수정을 하고 토론을 종결,
(2) 출석 회원 일동이 서명케 함.
a. 가이사랴 유세비우스는 하루 생각하고 서명함.
b.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이 문서에 동의치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마지막 문귀를 삭제하고 서명함.
(3) 부활절은 주일에 지키기로.
(4) 교회 정치에 관한 규정 제 20조를 제공함.
7) 폐회
325년 7월 29일
황제 즉위 20년 기념으로 전원 초대
4. 기독론 논쟁
[위로]
1) 제 2차 회의
(1)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381년
(2) 소집자...테오도시우스 황제
(3) 의 장...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4) 의 제... 아폴리나리스(Apolinaris)설.
*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 제한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영에 대치했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이 없으니 인성 제한이라고 주장.
(5) 결의
a. 아폴리나리스 학설을 기각
b.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다.
2) 제 3차 회의
(1) 장소...에베소,431년
(2) 소집자...테오도시우스 2세
(3) 의제
a.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성론 ,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하였다.(신성과 인성 구별) 주장.
b.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376-444)가 항의
(4) 결의
?. 키릴로스파는 동방 회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네스토리우스의 출교를 결의.
遁. 네스토리우스파가 도착하여 키릴로스를 이단이라고 결의.
?.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유배함.
3) 도적 회의
(1) 장소...에베소, 449년
(2) 의제...유티케스(Eutches)의 일성론 (일성론.Monophysotosm), 그리스도는 이성( 인성과 신성)으로 되어 있으나 합일시 인성이 신성에 침입되어 우리의 신체와 같지 아니하다는 주장
(3) 경과
a. 이 회의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자파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유티케스를 지원하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로 소집케 함.
b.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의장이 되어 병졸과 무뢰한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위헙하여 안디옥 파 수령을 내어 쫓고 유티케스를 복직시킴 (그래서 <도적회의>라 부르고 정식 종교회의에 계산치 아니한다)
4) 제 4차 회의
(1) 장소...칼케돈 (Chalchidon), 451년
(2) 소집자...마르키아누스 (Marcianus)황제,600명 감독 참석.
(3) 결과...칼케돈 신조를 작성
* 이 회의에 대해서는 다음 요약을 참고 바람.
5) 제 5차 회의
(1)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553년
(2) 소집자...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3) 의제...일성론자와 화해하려고 삼장렬 (The Three Chapters:안디옥파의 세 신학자의 의견을 변박한 것)을 발표한 때문
(4) 결과...칼케돈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정통 교리를 삼음.
6) 제 6차 회의
(1)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680년
(2) 소집자...콘스탄티누스 4세
(3) 의제...일의론(Monothelitism 양성을 가졌으나 신의만 가졌다.)
(4) 결과...이의론 채택.
7) 제 7차 회의
(1) 장소...니케아,787년
(2) 소집자..콘스탄티누스 6세
(3) 의제...성화 숭배 문제
(4) 결과...성화 숭배하기로.
8) 제 8차 회의
(1) 장소...콘스타티노폴리스, 869년, 879년.
(2) 소집자..바실리우스
(3) 의제
a. 869년...이그나시티우스 대 포티우스
b. 879년 ...니케아 신조 확인.
<요약>
* 칼케돈(Chalchedon)회의 결의 사항
(1)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 인성에도 완전하다 (각 성질은 보존)
(2) 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이성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3)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양성은 썩거나 변하거나 떠나지 아니함).
(4)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서 출생한다.
* 이 회의는 <니케아> <에베소> 양회의에서 정한 신조를 확인하고 설명을 가하여 교리를 명백히 하였다.
5. 수도원
[위로]
1) 원인
(1)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고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 생활, 경건 생활 운동이 일어남.
(2) 교회가 조직화, 규율화 됨에 따라 개인적 신앙 활동을 수도원이라는 별개의 사회에서 구하게 됨.
(3) 복잡한 생활에서 떠나 물질없이도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의 욕망이작용.
2) 기원
(1) 안토니우스(Antonius.356년 죽음)
a. 이집트 부자의 아들로 태어 조실부모하고 누이와 같이 살음.
b.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 (마19:21)라는 말씀에 감동하여 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굴속에 들어감.
c. 추종자가 많음, 박해시에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신자들을 격려함.
d. 은둔 생활의 창시자
(2) 공동 생활
a. 유명한은자가 거주하는 곳에 많은 은자들이 모여옴.
b. 서로 모여 기도하고 후에는 공동 생활을 하니 이것이 수도원의 기원이 되었다.
3) 규 칙
(1) 규칙 제정자들
a. 파코미우스 (Pachomius)가 처음 제정, 나일강의 타벤나이(Tabennae) 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규칙적으로 의식.공부,예배,노동, 징벌에 관한 규정을 제정.
b. 바실리우스 (Basillius the Great)는 규칙을 정하고 교회와의 연락을 도모함 (300-379)
(2) 규칙 제정의 필요성
a. 극단적 금욕 생활을 막기 위하여
b. 자유 방종을 방지하고 본래의 임무를 계속하기 위하여
c. 명령 계통 확립을 위하여 (의견 충돌의 방지 위해)
4) 서방 수도원
(1) 마르티누스 (Martinus)가 고을의 설립.
(2) 암브로시우스 (Ambrosius)가 밀라노에 설립
(3) 로마의 귀부인, 지식인들이 수도원에서 노동하며 생활(388년아우구스티누스)
(4) 캇시아누스 (Cassianus) 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개설.
(5) 베네틱투스 (Benedictus, 480-543)가 수도원 규칙을 제정.
a. 캇시아노 산 (Monte Cassiano)에 세운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전형임.
b. 규칙
?. 수도원장은 전원의 선거
遁. 큰 일은 전체 회의에서, 적은 일은 원장이 수석 수도사와 협의하여 처리함.
c. 입원 지원자들...일정한 기도 시험을 한 후, 일정 기간 정주할 것과 엄격한 도덕을 지킬 것, 복종할 것을 서약한 후 허락.
d. 노동을 장려하여 자력 생활을 함.
e.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교도들에게 전도하는 임무를 맡겼다.
f.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드는데는 캇시오도루스(Cassiodorus)힘이 컸다.
6. 로마 교권의 강화
[위로]
1) 교권의 강화의 이유
(1) 대도시 교회라 유력자가 많고 전도,구제,회당,건축비 부담으로 세력이 집중됨.
(2)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
(3) 동방 천도로 로마 감독의 지위를 중해 여기게 되었다.
(4) 레오 같은 유능한 감독이 있었다.
(5) 살디카 회의에서 결정.
2) 레오 1세 (440-461년 재위)
(1) 설교가, 문학가,정치가였다.
(2) 로마 감독은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 (미16:9) 근거.
(3) 하나님이 로마 제국을 세우심은 기독 교회를 위한 것이니 수도사의 지위에 있을 만하다고 함.
(4) 서 제국의 황제 바렌티아누스 3세는 칙령으로 로마 감독은 서방 교회의 원수이며, 배반자는 국가 배반자라고 규정 (밀라노,북아프리카 등은 부인)
7. 동방의 교부들
[위로]
1)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티나
(1) 유세비우스 가이사랴
a. 260년 팔레스티나 출생,신앙으로 감금된 일 있음.
b. 315년 가이사랴 감독이 됨. 339년 사망시까지 궁정 출입을 함.
c. 저서...<교회사> 콘스탄티누스 대제전> <복음의 준비> <복음의 증명>
d. 후계자...유세비우스의 뒤를 이어 교회사를 집필한 사람.
?.소크라테스(Socrates)..5세기 초엽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사학자
遁.소조멘 (Sozomen)...소크라테스와 비슷.역사의 내용은 다름.
?.테오도레트(Theodoret)...구브로의 감독,458년에 죽음.많은 저술을 남김.
(2) 아타나시우스 (296-373)
a. 326년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됨.
b. 정통 고수에 매진
c. 궁정 방침이 변동으로 3차 유배
?. 335년( 콘스탄티누스)...트리야 유배.
遁. 342년 (콘스탄티우스)...로마 유배.
?. 351년 (콘스탄티우스)...사막 유배.
d. 죽을 때는 평안히 죽음
e. 저서...<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함> <콘스탄티누스에의 변증론> 등.
(3) 키릴로스 (Cyril)
a. 알렉산드리아 감독 (413-444)
b. 이론은 바르나 성격이 포악, 당파심이 강함.
c. 신플라톤파 여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피살에도 책임이 있다.
2)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 교부들
(1) 데오도레 (Theodore)
a. 길리기아 모브스에스티아 감독
b. 성경 주석으로 유명 (그 단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c. 역사적 언어학적 주석으로 유명.
(2) 가바도기아 세 신학자
a.바실리우스(Basilius the Great,330-379)
?. 조모의 신앙 영향,안디옥,콘스탄티노폴리스,아덴(아테네)에서 수학.
遁. 355년 변호사가 됨. 자매의 권고로 수도원생활 시작.
?. 365년 가이사랴 교회 부목사가 됨.5년후에는 감독이 됨.
?. 교회 통솔,지도 능력이 특출하고 수도원 규칙을 제정.
?. 저서<그리스도의 신성론> <성령론> 설교집,서신 등.
b.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Nassenus,332-395)
?.바실의 동생,같이 공부함.
遁.38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 논쟁에 참가,설교가.
c.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Gregorius Nazianzus)
(3)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황금의 입)
a. 346년 안디옥에서 출생,아버지는 장군으로 일찍 죽고 어머니 안투사(Anth
usa)는 아우그수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칭찬받는 신앙인이다.
b. 법률가, 수사학자,변호사
c. 안디옥 감독에게 신학을 배운 후 세례받고 수도생활을 함.
d. 안디옥 감독이 되고 (394년),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됨.
e. 해석적 설교와 성경 주해에 노력
f. 사치와 황태후를 공격하다가 404년 길리기아로 추방.
8.서방의 교부들
[위로]
1) 힐리리우스 (Hilarius, 295-368)
(1) 프랑스 프와티에에서 출생, 철학과 문학에 뛰어남.
(2) 350년 고향 교회 감독 정통 보수에 헌신.
(3) 저서 <삼일신론> <신앙론> <시편 주해>
2) 암브로시우스 (Ambrosius,340-397).
(1) 340년 고올의 수도 토리에서 출생,로마에서 교육받고 밀라노 주지사 됨.
(2) 5년후 감독이 죽고 후임이 됨.
(3) 교회 통솔과 권위 유지에 명성.
(4) 저서 <설교집> <성경주해> <찬미가>
3) 히에로니무스(Hieronumus Jerome)
(1) 346년 스토리돈에서 출생.
(2) 20세에 수세,372년 동방 여행.
(3) 베들레헴에서 새 수도원 건축
(4) 구약의 라틴어역 성공 (12년간)
9.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위로]
1) 생애
(1) 북아프리카 타가스테(Africa Tagaste)에서 출생,부 파트리키우스 (Patuicius)는 이교도 (후에 신자됨), 모 모니카(Monica)는 독실한 신자.
(2) 수사학자로 유명,청년기에 8년간 마니교(이원론 주장) 신봉.
(3) 387년 3월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설교에 감화받고 입신 (롬13:14).
(4) 힙포(Hippo)교회 감독 (395년)
(5) 게르만족의 침공 때 76세로 죽음(430년)
2) 사상
(1) 신을 인격적 체험 대상으로 믿음.그리스도의 양성 주장.
(2) 삼위일체 주장, 원죄 인정,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확신.
(3) 예정론,무형 교회 내세관 확인.
(4) 정통 신자됨이 구원의 필수 조건.
(5) 성례와 의식,관계를 주장 (성례전론의 원조)
3) 저서
(1) 독백 (387년)...신,영혼,영생에 대해 논의
(2) 참회록 (400) 자서전
(3) 삼위론 (400-419)...삼위 동등 주장.
(4) 하나님의 도성 (412)...지상 나라는 망하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10.펠라기우스 (Pelagius) 논쟁.
[위로]
( 동방 교회가 기독론을 논하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죄와 구원 문제를 논함)
1) 라틴 민족
(1) 죄에 대해 심각한 관념.
(2) 테르툴리아누스가 죄의 유전을 가르친 이후 암브로시우스,힐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이 원죄 관념을 기초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철저하지 못했다.
(3) 아우그수티누스 시대에 와서 철저함.
2) 펠라기우스
(1) 영국인 수도사로 5세기 초에 로마의 도덕적 부패 시정에 노력.
(2) 성질 온순,품행 엄정, 지식 명석.
(3)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다가 파울리누스의 반대로 못됨
(4) 에베소의 장로가 되어 그의 학설이 퍼짐.
(5) 431년 에베소 대회에서 이단을 규정.
3) 반 펠라기우스 설
(1) 주장자..캇시아누스, 파우스투스
(2) 주장
a. 죄 유전 b.은혜로 구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음.
c.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 인간 의지에 의해 받거나 거부된다.
4) 도나투스 (Donatus, 카르타고 감독 )파
(1) 주장
a. 범죄자는 교회에서 제거하라.
b. 범죄자가 회원으로 있는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c. 범죄한 교사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
d. 따로 교회를 세워 재세례.
(2) 411년 힐라리우스 (Hilarius)가 카르타고에 회의를 소집.276(도나투스),286 (아우구스티누스) 이단으로 규정.
(3) 결정
a. 집회를 금한다. b. 회당을 정통파에 양도한다.c. 414년 시민권 박탈. d. 예배자는 사형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조항에 반대
11. 예배와 예전
[위로]
1) 회당
(1) 바실리카(Basilica)식. (2) 원형, 다각형. (3) 비잔티움 식
2) 풍속
(1) 그리스도의 화상...키릴로스가 승리한 후 6세기에 그리스도의 화상을 회당과 각 가정에 모시게 됨.
(2) 성자 숭배...순교자 묘소에 모여 예배, 묘소에 성전 건축하고 유골은 재단아래 둠.
(3) 유물 숭배...의복,형구,용구 등이 고가로 매매됨 (병이 낫는다고).
(4) 성모 숭배...영구 처녀설,성모라 함.
(5) 천사 숭배.
3) 예배
(1) 순서 (설교보다 의식에 치중)
a. 1부 (세례와 참회하지 않는 자도 참석) 성경 낭독,찬송,설교,기도.
b. 2부 (1부 사람 퇴장한 후)
?.신자 위해 기도. 遁. 헌물 모음 (집사들이)
?.감독과 장로들-평화의 키스 ?. 상찬식 후 감사기도.
?.감독의 축복으로 끝남.
(2) 절기
a. 성탄절을 12월 25일에 지킴.
b. 354년 로마에서, 3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c. 기원...로마의 3가지 축제.
?. 사투날리아(Satunalia, 17-24일)...옛날 사투룬 신이 지배한 황금시대를 기념.
遁. 시길라리아 (Sigillalia,하순)...어린이들에게 인형을 주어 즐기게 함.
?. 브루마리아 (Brumaria, 동지제)...태양의 왕복 축하. 기독교인이 축일을 모색하게 됨.
4) 성경
(1) 삼분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중에서)
a. 정통...4복음,사도행전,바울 14서신,베드로 전서,요한 일서,계시록
b. 이의 받는일...야고보,유다,벧후,요2,요3.
c. 위경..바울행전,허마의 목양자,베드로 계시록,바나바서,12사도의 교훈.
(2)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50부를 양피지에 써서 주요 교회에 기증함-이의받는 글까지 포함.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주기도문, 죄사함, 구원 (0) | 2011.04.30 |
---|---|
[스크랩] 예정론의 역사적 고찰 (0) | 2011.04.23 |
[스크랩] 성경적 조직신학 - 제3부 인간론 : 사람의 기원, 본질, 죄, 하나님의 언약 (0) | 2011.04.23 |
[스크랩] 종교개혁사(1) (0) | 2011.04.23 |
[스크랩]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0) | 2011.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