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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사(1)

수호천사1 2011. 4. 23. 09:50

종교개혁사(1)

16세기는 지극히 종교적인 세기였다. 종교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학문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어서 종교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16세기는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종교적인 사회라고 다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며, 종교적 허식에 사로잡힌 교회는 오히려 기독교를 더욱더 타락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이러했다.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가 어느 때보다 더 성행했으며, 성자 숭배, 특히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 성 안나에 대한 숭배가 극적으로 번창하였다. 또한 성자 유골의 수집이 차고 넘쳤고, 면죄부의 판매가 격증하였으며, 성지 순례가 그 어느 때보다 성행하고 있었다.
또한 교황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수에 넘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교황청은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고,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새로운 세금과 요금과 벌금들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 하위 성직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결국은 평민들이 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재정상의 문제는 이것과 함께 복합적으로 성직 매매, 친족 등용, 성직 겸직, 부재 성직자 등의 문제를 야기시켰고, 축첩 등과 같은 도덕적 파탄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생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하고 타락한 싸구려 종교가 아니라 보다 나은 종교를 갈망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보다 성경적인 교회, 곧 신약성경에 묘사된 순수하고 사도적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오랜 갈망을 통하여 종교개혁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1. 왈도파

12세기 초에 프랑스의 론 골짜기에 있는 도시 리용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부유한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1170년경 한 사제를 고용하여 라틴어로 된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오직 한 분의 중보자가 계실 뿐이며, 성인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깨달았다. 또한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곧 세례식과 성찬식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그밖에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받아 들였다. 그는 1177년 자기를 도와서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남녀 회원들을 모아서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교회사에 그들의 지도자였던 왈도의 이름을 따서 왈도파(Waldeneses) 또는 ‘왈도파 사람들’(Waldensian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셨던 것에 기초하여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무로 된 신발인 사보트(Sabots)를 신고 다녔다고 해서 ‘사보타티’(Sabotati)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행상처럼 가장하여 각 지방을 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을 팔았다. 그러나 방문하는 집집마다 반드시 ‘값비싼 진주’(복음)을 소개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사제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고 열린 귀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솔직하게 전파하였다.
그들은 남부 프랑스의 각 지역을 방문했으며, 스위스와 이태리 북쪽에까지 침투했고, 대개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으며 각 가정들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항상 번역된 성경책들과 경건 서적들을 보급하였다.
처음에 교회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관대했으나 그 운동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하였다.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라틴어로든지 각 나라 언어로든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단지 일반인들도 시편이나 예배용 소책자 또는 성모 찬송집 등은 가질 수가 있었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성경 그 자체가 금서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왈도파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부패한 교회를 공격하는 다른 종파들에 대해서도 온갖 박해가 일어났다. 종교 재판이 제기되었으며, 수 백년 동안 살육 작전이 감행되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고향은 황폐하여 사막처럼 변해갔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고, 400여 명의 부녀자들이 피신해 있던 동굴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저들을 완전히 진멸하지는 못하였다.
저들은 로마 교황청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살아남아 중세의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등불이었기 때문이다.

2. 죤 위클리프

죤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1320년부터 1330년 사이에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에 있는 리치몬드(Richmond)에서 출생하였다.
죤 위클리프는 전 생애 동안 옥스퍼드 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수학했고, 그곳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그 인근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그 지역에서 목회하였다.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 교회의 돈을 모아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 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고, 그 결과 그 세금은 완전히 거부되고 말았다.

1370년대 초에 위클리프는, 어떤 특정 상황들 아래서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주권(dominion)과 통치권(lordship)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위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아주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의 무절제한 아들인 랭카스터(Lancaster)의 공작 죤(John of Gaunt)과 그의 탐욕스러운 귀족 패거리들은 위클리프의 이 주장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치부하는데 사용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것은 오랫동안 탐욕스런 교권주의에 대해 거리낌없이 비판해온 많은 평민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아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사도적 청빈을 옹호했던 탁발 수도회도 이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 일로 1377년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 교회의 성직자 회의에 위클리프가 소환되었을 때,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혹독한 공격을 받았으나 랭카스터의 공작 죤과 궁정당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위클리프 생애의 가장 큰 위기는 1378년 그가 모든 정치적 싸움터에서 물러나 신학의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면서부터 오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그의 저술들이 중세 교회의 전통적 구조 전체를 거부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On the Truth of the Holy Scriptures, 1378)에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고의 권위이며 신앙의 기준이고 모든 인간적 완전함의 기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표현은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종교 개혁의 모토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사상의 기초 돌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저서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Power of the Pope, 1379)에서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에 혈안이 된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가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이다. 여하튼 간에 교황직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인간적-즉 그리스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에 의해 창설되었다-이며, 그것의 관할권은 엄밀히 영적 문제에 국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교황제의 폐지와 교회의 총체적 재산 몰수를 요구했다.

이에 이어서 위클리프는 「성찬에 대하여」(On the Eucharist, 1380)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술에서 그는 화체설 교리를 비논리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가 탁발 수도회를 ‘가인의 자식들’로 비난한 것과 연결되어,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곤트의 죤, 궁정당, 탁발 수도사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동조자들까지도 그를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했다.

위클리프의 적들은 1381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원인이 위클리프 이단들에게 있다고 고발했다. 그 결과로 교회와 국가는 화해하였고, 새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코티나이(William Courtenay, 1381-1396)는 런던에서 회의를 소집하여(1382), 그의 저술들 중에서 24개의 명제를 골라 정죄했다.
이 일로 위클리프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그를 지지하는 일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위클리프를 소환하거나 그 이름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13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용하면서도 활동적인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위클리프가 이루어 놓은 업적 중에 가장 큰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그의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가난한 전도단’을 조직하여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줌으로써 백성들이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 다음 세기 초에 의회와 교회는 두 가지의 괄목할 만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 하나는, 이단들(롤라드, Lollards, 위클리프 추종자들)을 화형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 통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성직자 회의에서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을 정죄한 것이다.
로마 교회가 위클리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는 그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시킨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콘스탄스 회의의 결정(1415년)에 의하여 1428년 죤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치고, 위클리프의 유해를 꺼내어 화형에 처하였다.

로마 교회는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위클리프의 유해를 꺼내어 화형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가 그의 가난한 전도자들을 통해 외친 성경의 진리는 화형시키지 못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하나님께서 밝혀두신 종교개혁의 샛별이었기 때문이다.

3. 요한 후스

요한 후스(Jan Hus, 1373-1415)는 보헤미아(Bohemia)의 남부 후시네츠(Husinec: 아마도 그의 이름이 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그(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했고, 1396년 그곳에서 문학석사가 되었으며, 그곳 문학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400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402년에는 체코 개혁운동의 중심지인 프라그의 베들레헴 기념 예배당의 주임 사제이자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체코어로 하는 그의 열띤 설교들을 통해 후스는 곧 거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는 1409년에 프라그 대학(Prague University)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415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의 괴수’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요한 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죤 위클리프였다.
1401년경에 위클리프의 신학 작품들이 프라하에 들어왔다. 요한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는 중에 두 가지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하나는 주 예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교황은 금 면류관과 값비싼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었다. 두 번째의 그림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었다. 그 뒤편에는 교황이 백성들에게 면죄부를 파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진리는 후스의 눈을 열어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밝히 보게 하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성경주의’에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교회법의 비성경적인 전통들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1403년 위클리프에 해당하는 45개 조항이 프라하 교수들 다수에 의해 정죄되었을 때, 후스는 체코인 교수들과 함께 위클리프를 옹호하였다. 그동안 베들레헴 성전에서의 후스의 설교는 처음에는 젊은 대주교 하젠부르크의 츠비네크 차이잎(Zbynek Zajic of Hasenburk, 1401-1411)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성직에 대한 후스의 통렬한 비판과 정죄된 위클리프의 가르침들에 대한 그의 동의로 인해 점차로 반대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피사 공의회(1409)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를 폐위하고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한 일을 둘러싸고 최종적인 관계 단절이 발생하였다.
대주교 츠비네크는 알렉산더 5세(1409-1410)를 지지했다. 츠비네크는 그 교황에게 보헤미아에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고 설명하고, 그에게서 그들의 근절을 위임받았다. 후스는 이에 대해 저항했으며, 이 일로 인해 츠비네크에 의해 파문당하였고(1410), 로마 교황청에 의해 취조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프라그(프라하)는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프라그에서 후스는 대중적 영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411년과 1412년 두 차례에 걸쳐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교황 요한 23세(1410-1415)가 면직된 그레고리 12세와 그의 지지자인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스(Ladislas, 1386-1414)에 대항하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를 약속했을 때, 후스는 이 ‘십자군의 면죄’를 비난했다.
교황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돈의 지불은 진정한 용서에 유효하지 않고,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행하는 면죄는 필요 없다는 것이 후스의 주장이었다.

후스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후스를 지지하던 프라그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교황의 교서들이 그들에 의해 불살라졌다. 이 봉기로 인해 세 청년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 1412년에 교황청에서 후스에 대한 심리가 재개되었고, 추기경 스테파네스키는 후스가 중대한 파문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프라그는 후스가 있다는 이유로 성사금지령을 당하였으며, 이후로 후스는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콘스탄스 공의회가 1414년 11월 1일에 개최되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초청하였고, 후스의 안전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스에 도착한 직후에 후스는 체포되어 시내 하수도의 출구 근처에 있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감금당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1413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이미 채택된 대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오랜동안 묻혀있던 그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단의 우두머리인 위클리프의 헌신적 제자로 추정된 후스는 자신을 성삼위 가운데 제4위로 선언하였다는 신성모독죄 외에 30여 개 항목의 날조된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이에 대해 후스는 몇 개의 고발은 잘못된 전달에 기인한 오류라고 선언했고, 나머지 것들도 성경과 고대 교부들에 의해 그 잘못이 확인되지 않는 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거나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415년 7월 6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최종 선고를 내렸는데, 그것은 후스와 그의 저서들 모두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후스에게는 모욕적인 면류관이 씌워졌고, 그 이마에는 ‘이 사람은 이단의 괴수이다’라는 글자가 씌어졌다. 후스는 무릎을 꿇고 앉아 “주님,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장작과 짚들이 쌓여지고 그가 계속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동안 불이 붙여졌으며, 후스는 연기에 질식하여 곧 숨을 거두었다.
“나는 복음과 말씀 전파를 위하여 이처럼 무섭고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달게 받겠다.”라고 한 것이 그의 최후 고백이었다.
로마 교회는 요한 후스를 불태움으로써 이 사건을 일단락 시키려 했다. 그러나 후스를 지지하고 따르던 보헤미아의 많은 귀족들이 애꾸눈 지스카(Ziska)를 필두로 프라그에서 종교적 관용과 옥에 갇혀 있는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 요구가 거절되자 지기스문트 황제의 군대와 15년 간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저들은 비록 전쟁에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후스주의자들(Hussites)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저들은 처음에는 다볼산에 그들의 본부를 두었다고 해서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었으나 나중에는 보헤미아 형제단 또는 모라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 등으로 불려졌다.

요한 후스가 죤 위클리프의 성경주의를 이어받아 로마 교황청에 맞서 싸웠듯이, 많은 후스주의자들이 후스의 신앙을 이어받아 로마 교황청에 항거하며, 종교개혁의 초석을 놓았다.

4. 제롬 사보나롤라

왈도는 프랑스인이었고, 죤 위클리프는 영국인이었으며, 요한 후스는 보헤미아인이었고, 종교개혁의 또 다른 선구자인 제롬 사보나롤라(Jerome Savonarola)는 이태리인이었다.

왈도와 위클리프와 후스는 모두 로마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교훈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지만, 사보나롤라는 교리적인 면에서의 개혁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동포인 이태리인들의 부도덕한 습관과 악한 생활을 공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보나롤라로 하여금 힙포의 어거스틴의 글들을 보도록 섭리하셔서 이태리 교회 내의 윤리적 배교성을 직시하도록 하셨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지위 면에서나 지적 자질 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1452년 이태리의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가 도미니쿠스회에 가입하였고(1474), 이탈리아 북부 여러 도시에서 사역하였다. 사역 초기에는 설교자로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브레시아에서 행한 요한계시록 설교들(1486)을 통해 웅변가로, 설교가로 신망과 명성을 얻었다. 1490년 피렌체에 정착하였고, 그곳에 메디치가가 설립한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설교자로 일하면서 피렌체 지도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호소하였다. 그후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선출되고 주교좌 성당에 초빙되어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그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사보나롤라는 1494년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피렌체에 홍수처럼 쏟아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사건은 사보나롤라가 예언한 대로 피렌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처럼 보였다. 사보나롤라는 왕을 두 번 찾아가 피렌체 시를 약탈하지 말도록 설득하였고, 마침내 샤를은 그 도시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은 채 철수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몰려올 때 메디치 가의 ‘대부’(大父) 피에로(Piero)가 도시를 떠났고, 그 뒤 샤를이 철수하자 사보나롤라는 그 상황을 하나님의 은총이 피렌체를 위해 개입한 결과로 보았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로렌쪼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로렌쪼는 사보나롤라의 고상한 가르침과 윤리에 대하여 동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로렌쪼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잠재워 보려고 선물 공세를 하였으나 허사였다. 로렌쪼가 44세 되었을 때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로렌쪼는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사보나롤라를 청했다. 그러나 전혀 자신의 죄를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보나롤라는 그를 축복해주기를 거절하였다(사보나롤라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늘 축복을 해주었다).

로렌쪼의 아들이 그를 계승하였으나 백성들이 그를 추방하고 만장일치로 사보나롤라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뽑았다. 사보나롤라는 자기의 개혁 활동을 쉽게 수행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사보나롤라는 3년 동안 피렌체를 다스렸으며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엄격한 통치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도덕적으로 바짝 조이고, 조세 개혁을 단행하고, 빈민들을 구제하고, 법원들을 개혁함으로써 느슨하고 부패하고 쾌락을 좋아하던 도시에서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도시로 바꾸어 갔는데, 이러한 통치를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싫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사람인 알렉산더 Ⅵ세(알렉산더 보르기아)가 교황이 되어 사보나롤라를 공격하였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자기의 권세를 이용하여 그들의 현세적 부귀를 도모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교황이 그 자녀들의 진로, 결혼 등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온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표를 추구해 나갔다. 그는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으며, 자기의 계획이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극물의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매수하려고 뇌물을 주었으나 사보나롤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으나 사보나롤라는 이것 역시도 거절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수도승들을 설득하여 그를 비방하고 그의 권위를 해치도록 유도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파문하여 투옥시켰다. 전에는 사보나롤라에게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도 이제는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도록 고문을 가하라고 촉구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단죄하라고 함께 소리를 높였다.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결국 화형을 당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피렌체 중앙 광장에 모여들었으며, 사보나롤라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화형대 앞으로 끌려갔다. 후스 때처럼 사제의 옷을 벗길 때 군중들은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침묵을 지켰다. 교회의 한 주교가 그에게 다가와서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 교회)와 승리의 교회(천상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전투적 교회에서 이제 떠나지만 승리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들어가려는 승리의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사보나롤라의 사역은 사회 도덕의 개선에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그가 죽은 지 20년 후에 시작된 교리의 개혁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루터는 사보나롤라를 종교개혁의 한 선구자로 간주하였다.

이유는, 사보나롤라가 피렌체 시를 경건한 도시로 개혁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당시 부패할 대로 부패한 로마 교황청과 교황에 대한 강한 항거를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아가 사보나롤라가 “나는 전투적 교회에서 이제 떠나지만 승리의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가 들어가려는 승리의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을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항거한 것은,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천국 열쇠의 권한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보나롤라는 몸으로 직접 개혁을 실행하였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Ⅱ. 종교개혁의 여명기

자연계에 있어서도 동이 트기 전에 어두움이 가장 짙은 것과 같이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이 있기 전인 15세기 말과 16세기 초가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1. 경제적 배경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의 유럽의 경제는 매우 혼란하였다.

십자군 전쟁, 백년 전쟁, 전염병과 기근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전염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로 인해 1500년대의 유럽의 인구는 1300년대의 인구와 거의 비슷해져서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 평화 시대가 열리면서 인구의 급속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인구의 증가로 노동력이 풍부하여지자, 영주들은 농지에 대한 임대료를 인상하여 농민들을 억압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진출하든지 용병으로 나가야만 했다.

또한 무역업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하여 인구의 도시로의 유입이 빨라지면서 대형 도시들이 등장하였다.

15세기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 무역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는 경제계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1세기에 로마제국의 군대들이 가는 곳마다 길을 놓아 여행자들이 쉽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14세기 중엽 포르투갈인에 의한 조선술과 해양 기술의 발전이 국제 무역 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서남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 금, 직물, 향료, 목재, 양곡, 가죽 옷, 소금, 포도주를 실어 날랐고, 인도에서는 후추와 상아를, 중국에서는 비단을 가져왔다. 이러한 무역업의 발전으로 유럽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서구 세계를 온통 흔들었다.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데 대하여 사람들은 두려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세의 미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의 발견은 수송업과 무역량의 증가에 크게 공헌하였다.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이 요구되자, 노예 무역이 성행하였고, 노동력이 필요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더욱 가속화 되었다.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자, 넓은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노동력의 빈곤을 체험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계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산업이 발전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협동조합과 은행들이 생겨났으며, 은행의 출현과 함께 신용 제도, 지폐, 할인 제도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구조가 등장하였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경제 구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고, 자본주의는 경제력의 집중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경제 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물가 불안은 절정에 이르렀다. 16세기 중엽부터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유럽에 수입되면서 물가가 급등하였으며, 17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양곡의 도매 가격이 5배나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7배, 스페인에서는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당시의 신학자와 설교자들은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 특히 양곡 상인들의 농간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또한 물가 상승으로 인하여 식량 폭동이 일어나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들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주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인 혼란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이든 혁명이든 간에 변화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2. 정치적 배경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장원 제도와 함께 봉건 군주제가 무너졌다. 이러한 정치 구조의 변화는 산업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무역으로 치부한 상인들이 중산층으로 일어났다. 왕은 경제력을 가진 상인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권력을 신장하였다. 왕의 권한이 점점 커져가면서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절대 왕조들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시작된 절대 군주들은 다른 왕에게 도전하므로 전쟁을 일으켜 국토를 확대하거나,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교회권에 대항하여 왕권을 확장하였다.

절대 군주들은 국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재산의 해외 유출을 금하는 등, 교회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재정 정책을 폈다. 특히 로마로의 재산 유출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교황청이 유럽 땅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소작인들로부터 물질을 긁어모았기 때문에, 해외로의 재정 유출을 막는 것은 국가 재정을 든든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특히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나가고 있던 독일의 경우, 재정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것은 국가 부강의 기초를 놓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정부는 재산의 유출을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지지하여야만 했다.

경제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은 종교개혁과는 별개로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시기 위해 저들의 배후에서 섭리하셨다.

 

Ⅲ. 종교적 배경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은 경제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심각히 요청되었다. 이유는, 로마 천주교와 교황청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마음을 어둡게 하여 교회를 무지와 미신 가운데 표류하도록 만듦으로써 기독교를 비기독교화 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1) 교회의 신앙적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① 로마 교황청은 1229년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중세인들을 말씀에 무지한 상태로 만들어 미신에 빠지게 하였다.
프랑스 리용의 피터 왈도(Peter Waldo)가 라틴어로 된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에게 보급하면서 말씀 운동을 전개하자, 그 말씀 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개혁되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 로마 교회가 왈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100만 명 이상 살해하였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② 말씀에 접하지 못하는 무지와 미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고행과 금식 등 종교적인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례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거닐던 성지를 고행하면서 순례하면 한평생 범한 모든 죄가 감면된다는 면죄 사상, 지옥의 공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안위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하여 암송하는 풍습, 분위기 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고 하여 촛불 예배가 생겨났다. 그리고 불교인들이 현세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사용하는 묵주가 얼레인 로쉬(Alain de Roche)에 의하여 교회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묵주를 만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하였다.
또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죽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저들은 인간이 천국의 복락이나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죽음의 순간에 임종자가 내리는 결정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무지와 미신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성자(聖者) 숭배 사상이었다.
말씀의 빛이 가려지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간주하여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존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성자들을 통하여 기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자 숭배 사상을 고안한 것이다. 특히 중세 말기에는 마리아 숭배도 급증하였는데, 마리아는 대표적인 성자로 간주되었으며, 결국 마리아 무죄 잉태 사상을 정통적인 교리로 선언하였다.

성자 숭배는 성물(聖物) 숭배로 이어졌다.
중세인들은 성물에 죄를 면케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성자들의 유물이라는 것은 모두 다 수집하였다. 성물 숭배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색소니(Saxony)주 지배자였던 프레데릭 현인(Fredrick the Wise)은 성물에 대한 신앙심으로 5,000 종류 이상의 성물을 모았다고 한다.

2) 교회의 경제적인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교회의 재정적 타락은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 그의 성직록(benefice)을 교황이 마음대로 재 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13세기에 제정되면서 가속화되었다. 교황의 교회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면서 교황들은 다양한 세금 제도를 고안하였다. 성직자가 유고될 경우를 고려하여 후임을 약속하는 예약세(reservation), 성직자로 임직한 뒤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내는 성직 취임세(annates), 특정 교회의 성직 자리를 놓고 기다리는 대기세(expectation) 등을 고안하고, 성직 매매(simony) 등의 방법을 통하여 축재했다.

성직 매매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돈으로 팔 수 있는 성직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 매매하였으므로 그의 치하에서 금전으로 거래된 성직의 수는 사상 최고에 달하였다. 그는 일곱 살 때에 성직에 입문하였고, 여덟 살 때에 대수도원장직을 받았으며, 열 세 살 때에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로마 교황청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돈만 밝히자, 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항간에서는 로마 교황청의 탐욕을 빗대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라틴어(Radix Omnium Malomum Avaritia)의 첫 번째 글자를 따서 ROMA라 조롱하기도 하였다. 곧 교회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탐욕의 도시라고 풍자한 것이다.

3) 성직자의 윤리적인 타락이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당시에는, 교황은 물론 대부분의 성직자가 첩을 두고 자녀를 낳았으며, 이 일이 아주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16세기의 순시 보고서에 의하면, 화란의 성직자의 4분의 1, 남부 라인 지역의 성직자의 3분의 1이 첩과 동거하였고, 성직자 전용의 창녀촌이 있었으며, 첩을 데리고 살던 성직자에 대한 벌금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16세기 초 그 최고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세의 어두움은 끝간데 없이 계속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움같이, 하나님께서 중세의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을 비추셨으니 바로 마틴 루터을 통해 종교개혁의 포문을 여신 것이었다.

4) 면죄부 판매가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로마 교회의 부패는 면죄부 판매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달하였다.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공덕의 창고’란 교리에서 나왔다. 이 교리는 예수와 마리아가 선행을 통해서 이룩한 공덕이 하늘에 다다랐고 성자들도 큰 공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덕은 선행을 행한 자신을 구원함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성자들의 공덕에서 일부를 떼내어 일반 신자들의 죄를 면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면죄부가 처음에는 십자군 병사나 자선가들에게만 주어져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9세기에 불신자들과의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은 죽기 전 참회와 연옥형을 사면한다는 제도가 생겨난바 있었다.
그러나 차츰 면죄부가 교황의 재정적인 부족을 보충하는 데 사용되면서 본래부터 잘못된 교리는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2세기 이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돈으로 죄의 사면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죄의 사면은 교회의 수입원으로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로마를 순례하여 얻어지던 면죄부도 역시 돈으로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죽은 자들을 위한 면죄부도 생겼다.

당시 교황청은, 성당들 특별히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였다. 그래서 100년 동안 끌어오던 공사비용을 메우기 위해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판매 수입고를 올리기 위해서 그 수입의 반액은 지방 감독이 차지하도록 했고, 또 판매 책임자는 그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도록 했으며, 나머지를 교황청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판매업자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높이기 위하여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언이설로 무지한 사람들을 속여서 면죄부를 팔기에 혈안이 되었다.

저들은 “자, 여기 면죄부가 왔습니다. 이 한 장이면 당신은 물론 당신 부모의 죄도 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부모님의 고통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얘야 우리는 너를 낳았다. 너를 힘들게 키웠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뜨거운 불 속에서 신음하는데 너는 편안히 살고 있느냐. 살려다오. 우리를 구해다오. 면죄부를 사서 여기서 벗어나게 해다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당신은 짐승입니까? 부모를 외면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한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면죄부 판매업자들로부터 위와 같은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사함을 사야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면죄부 판매 책임자는 마인즈의 대주교 알베르트(Albert)의 파송을 받은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었다. 그의 언변은 실로 뛰어나서 그에게서 면죄부를 산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면죄부 판매를 못마땅하게 여긴 작센의 통치자였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ederick)는 그의 영토 내에서 테첼의 면죄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가 이같이 한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대주교 알베르트가 대표하는 브란덴부르크 가에 의해 행사된 권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이웃 도시에서 테첼이 설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성 경계를 넘어 갔으며, 그에게서 면죄부 사기를 즐거워하였다. 이유는,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던 중세 교인들에게는 이 면죄부가 천국에 들어가는 통행증처럼 느껴졌으며, 이 면죄부를 산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에 저들은 손쉬운 구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면죄부 판매에 대해 당시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경교수였던 수도사 마틴 루터는 오랜 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분연히 일어나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붙였다. 그 내용은 교황을 반대하거나 로마 교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악한 면죄부 판매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본래의 바른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 행위은 거대한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는 행위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거대한 봇물이 쏟아져 세계 역사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유는, 그의 배후에 종교개혁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1. 루터의 종교 개혁

1) 개혁적 발견을 하기까지의 루터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터(Hans Ruther)와 마가렛 루터(Margaret Luther)의 여덟 명의 자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은 본래 농부 출신이었으나 루터가 출생한 이듬해에 동광(銅鑛) 중심지인 맨스펠트(Mansfeld)로 이주하여 주물 공장을 경영하면서 가업이 날로 번창하여 1491년에는 이 도시에서 시민의 권리를 변호할 수 있는 4명의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될 정도로 부유해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에르푸르트 대학은 매일 아침 기도와 미사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이러한 금욕적인 훈련을 통하여 루터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반쯤 공부한 것과 같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루터는 대학 생활 동안 결코 늦잠을 자거나 강의에 빠진 적이 없는 근면한 학생이었다.

루터는 1502년 9월 에르푸르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505년 1월에 문학 석사 학위를 얻었고, 1505년 5월에는 법률가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동 대학의 법과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은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맨스펠트시에서 에르푸르트시로 오던 도중 폭풍 속에서 일어났다. 천둥이 치고 친구가 벼락에 쓰러지는 것을 본 루터는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하고 서원하였고, 무사히 에르푸르트시로 돌아온 그는 즉시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성경 연구와 고행주의로 이름난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애썼다. 루터는 하나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철야 기도는 물론,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06년 사제 수업을 시작하여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았고, 5월에는 생애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사제 서약 후에는 금욕과 고해성사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1508년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신학을 연구하여 1509년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509년 10월 에르푸르트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어 1511년까지 롬바르드의 문장론 강의를 계속하였다.

1510년 루터는 수도원의 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로마 순례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였다.

중세인들에게 로마는 순교자의 무덤과 성물(聖物) 등의 많은 보화가 보존되어 있는 성지였다. 칼릭스투스(Calixtus) 성당 지하실에는 40여 명이 넘는 교황들의 유해와 7만 6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성당에는 소위 모세가 본 가시 떨기나무, 헤롯에 의하여 죽임 당한 아이들의 뼈가 300개나 있으며, 바울의 쇠고랑,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사도 요한의 목을 잘랐다는 가위,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받았다고 하는 동전 하나가 전시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는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덕을 입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로마 순례는 하나의 큰 축복이었다. 심지어 교황 레오 10세는 각 유골에는 4,000년의 연옥 형기를 감해 주는 효과가 있고, 심지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때 받은 동전 하나를 소유하면 1,400년의 면죄 효과가 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성지 순례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1510년 11월 로마로 향하였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거룩한 계단’이라고 불리는 라테란 성당의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순례의 걸음을 내디뎠다. 당시의 관례를 따라 계단을 기어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한번씩 외웠고, 계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곳에서 사죄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수도원장 슈타우피츠(Johannes Staupitz)의 권유를 따라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성경을 연구하여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1513년부터 2년 간 시편을, 1515년에는 로마서를, 1516년에는 갈라디아서를, 1517년에는 히브리서를 강의하였다.

성경 연구를 통하여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회의를 품고, 복음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시편의 여러 곳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였는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루터는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는 말씀 때문에 고민하던 중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라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 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신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크게 열려진 문을 통하여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 듯 했다.”고 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그 수도원의 탑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를 ‘탑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루터의 탑의 경험은 결국 종교 개혁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루터와 95개조 항의문

루터는 1517년 2월 24일 마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면죄부의 해악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루터의 설교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루터는 다음 단계로 마이센(Meissen),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짜이츠(Zeits)의 주교와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에게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루터의 편지에 답하지 않았다.

설교나 편지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에게 면죄부의 성격과 효과, 그것이 교회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토론을 요청하였으나, 교수들 또한 교황청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루터는 먼저 ‘95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하여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에게 그 사본을 보냈다. 그는 대주교에게 면죄부의 해독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면죄부는 영혼의 구원과 성화에 공헌하지 못하고, 다만 교회 법에 부과된 일시적인 형벌을 사면할 뿐이다.…그리스도는 어디에도 면죄를 증거하라고 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였다. 주교들이 복음보다 면죄를 더 중히 여기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면죄만 뻔뻔스럽게 선포하도록 용납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알브레흐트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교회의 무반응에 지친 루터는 보다 강력한 방법을 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95개조 항의문’을 1517년 10월 31일 정오 경에 비텐베르그 성곽 교회 앞에 게시하는 것이었다.

그 글의 서문에 루터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밝게 드러내려는 열망에서 아래의 논제들은 문학사요 신학사요 신부인 마틴 루터에 의하여 비텐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루터는 그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바 있다. 그는 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썼다.

이 항의문은 공개된지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다. 이 항의문이 이같이 짧은 시간 내에 그토록이나 큰 영향력을 독일과 구라파에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명 때문이었다. 1450년 구텐베르그(Guttenberg)에 의하여 개발된 인쇄술에 의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은 삽시간에 전 구라파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항의문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첫째로, 교황의 면죄권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항의문 1조에서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고, 6조에서는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21조)라고 했고,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32조)라고 했다. 또한 ‘어떠한 크리스챤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36조)고 하였고,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40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한 마디로 교황은 죄를 면제할 자격도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에게 면죄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의 면죄권을 돈으로 사면 인간의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면죄증을 파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더 나아가 면죄증을 샀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죄에 대한 형벌을 등한시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교황의 내세권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 사람에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제벌<諸罰>에 대한 교회 규정)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된다.’(8조)고 하였고, ‘임종(死)에 처한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10조)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22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한 마디로 교황은 내세 문제에 대하여 관여할 권세가 없고, 죄의 면책권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세를 결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교황에게 내세권과 사죄권과 연옥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면죄부를 팔아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50조)고 하였고,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51조)고 하였다.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86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루터의 지적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 교황청과 교황권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3) 루터의 개혁 논쟁

95개조의 항의문이 소개되자,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독일 교회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독일인들 가운데 루터의 항의문에 동조하며 로마 교황청을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그 반대로 루터의 강력한 적대자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잉골슈타트 대학의 교수요, 한 때 루터의 친구였던 요한 에크(Johannes Eck, 1486-1543)였다. 그는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이 나오자마자 ‘날카로운 기둥들’(Obelisci)이라는 논문을 써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하였고, 1518년 초에는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 수도회가 루터를 로마에 정식으로 고소하였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루터는 이에 불응하였다. 이 일을 조정하기 위하여 색소니의 선제후 프레드릭이 나서게 되었고, 교황은 추기경인 카제탄(Cardinal Cajeta)를 시켜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제탄과 로마 교회는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이를 감지한 프레드릭이 루터를 아우구스부르그로부터 피신시킴으로써 저들은 실패하였다.

루터의 개혁 운동이 교회 당국에 의하여 쉽게 제어될 수 있는 성격이었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루터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 투쟁에 눈이 멀어 있어서 종교적인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1519년 초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맥시밀리안(Maximillian)이 사망하자, 유럽 여러 나라는 루터보다는 맥시밀리안의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Francis Ⅰ)와 스페인의 카를 5세(Karl Ⅴ)가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놓고 대결하다가, 1519년 6월 18일 카를 5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 카를 5세는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하여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터어키(Osman Turky)는 프랑스와 호응하면서 독일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1520년에 오스만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술레이만 1세는 유럽을 상대로 정치를 하면서 반(反) 합스부르크 정책(카를 5세 일가)을 시종일관 유지하였다. 술레이만이 이런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1526년에 손에 넣은 헝가리 문제 때문이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를 장악하고서 사포야이 야노슈를 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자신의 아우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 집요하게 간섭하였다. 이후로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 틈을 비집고서 프랑스가 오스만제국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술레이만은 더 나아가 카를 5세가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 원조를 약속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적의 적인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함으로써 유럽의 분열을 유도해내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무튼, 당시 유럽에는 ‘투르크인들이 종교개혁의 동맹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논쟁은 1519년 7월 4일에서 14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열렸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가 1518년 에크에 반대하여 성경 본문이 전 교회의 권위보다 우선된다고 주장하자, 에크가 공개 토론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에서는 에크를 비롯한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하였고, 루터 측에서는 루터, 칼슈타트, 멜랑톤 등의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들이 참석하였다. 초기 논쟁은 에크와 칼슈타트가 이끌었고, 후반에는 루터가 논쟁을 주도하였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에크는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루터는 교황의 권위가 인간의 전통에 근거한 것이며 교황도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 교회의 교리와 규범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에 따라 교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이와 같이 성경 중심의 개혁을 주장하자,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이 중세 말의 현대주의 사조(via moderna)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하면서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루터의 사상은 콘스탄스(Constance)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위클리프(John Wyclif)와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John Hus)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위클리프나 후스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을 정죄한 교회 회의가 잘못을 범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둘째로, 연옥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에크는 연옥이 마카비2서(Macabee Ⅱ)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연옥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외경일 뿐 성경이 아니라고 하였다. 외경의 교훈은 신적인 권위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고, 그러한 외경에 근거한 연옥 교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로, 면죄부와 고해 성사가 다루어졌다.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 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의 고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므로 면죄부와 고해 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쟁을 통하여 ‘오직 성경’ 사상을 주장하면서 에크의 교회 전통 사상을 비판하여 반로마 교황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4) 루터의 파문과 문서를 통한 개혁 운동

라이프찌히에서 행한 루터의 발언에 대해,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는 1520년 6월 15일 ‘주여 다시 일어나소서’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루터의 논제에 41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반박하며,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아니하면 파문하겠다고 하는 파문 위협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루터에게 도착한 날짜는 1520년 10월 10일이었다. 그로부터 유예기간으로 주어진 60일이 경과하는 마지막 날인 1520년 12월 10일에,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 교정에서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천주교회의 교회법과 중세의 교서 등을 불사라 버림으로 교황청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된 이듬해 1월, 로마로부터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부되었으나 아무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아니 하였다.

루터는 그의 개혁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인쇄술을 적극 활용하였다.

1520년 5월에 저술한 ‘선행론’(The Sermon of Good Works)에서, 그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성경적인 기독교의 차이점을 비교하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최고의 선행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Sola Fide)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기초로서,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공로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선행을 좁은 의미로 규정하여 오직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금식과 자선을 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 즉 장사 등을 포함한 모든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선행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같은 해 8월 18일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German Nation)를 써서 니콜라우스 암스돌프(Nikolaus von Armsdorf)에게 보냈다. 루터는 이 글에서 황제와 영주 및 여러 귀족들에게 철저한 개혁을 호소하며, 교회의 개혁을 방해하는 세 가지 벽을 지적하였다.

루터가 이 글에서 지적한 첫 번째 벽은, 성직이 세속 권력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권 우위 사상이었다.
그는 교권 우위 사상의 기초가 되는 사제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황, 주교, 사제, 수도사 그리고 수녀들을 종교 계급이라 칭하고, 제후, 군주, 장인(匠人) 그리고 농부들을 세속적인 계급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루터는 두 번째로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만인이 읽고 묵상하며 교리와 생활의 원리로 삼아야 할 교재이다. 성경은 일부 계층이 아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쓰여졌고, 성경의 내용은 명확하며 확실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세 번째 벽을 허물었다.
그는 사도행전 15장 6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를 소집한 사람은 첫 번째 교황이라고 불리는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와 장로들에 의하여 회집되었으며, 초대 교회 시대에도 콘스탄틴(Constantine)과 같은 평신도가 교회 회의를 소집한 적이 있으므로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고 하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교회 개혁안을 전개하였는데, “교황이 그리스도의 후계자가 되려면 우선 청빈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속 권력을 지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교황은 독일을 재정적으로 착취하지 말아야 하며 독일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수도원 생활과 성직자 독신주의, 죽은 이를 위한 미사, 면죄부, 탁발 수도를 금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2개월 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저술했는데, 이는 교회 안에 들어온 미신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미사, 견진, 종부, 결혼, 고해, 성찬(성체), 세례 등 일곱 가지의 거룩한 의식을 가르쳤으며, 이 의식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며 연옥의 형기가 단축된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주장을 일축하면서 고해, 세례, 성만찬만 유용하다고 말하였다. 그것도 믿음으로 하는 것만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후에 고해는 멜랑톤에 의해 취소되었다.

루터는 11월 초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Treatise on Christian Liberty)를 독일어와 라틴어로 저술하였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9장 19절, 로마서 13장 8절, 갈라디아서 4장 4절, 빌립보서 2장 6-7절과 같은 바울 서신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속 사람, 곧 신앙에 의하면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겉 사람 곧 행위에 관해서는 모든 것에 봉사하는 노예이며, 모든 사람들의 종이다”라고 하였다.

루터가 저술한 글들은 인쇄되어져서 삽시간 내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이 글에 동조하는 개혁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동인이 되었다

5) 보름스 의회 이후의 루터

1521년 1월 21일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된 후, 교회로부터 영원히 제외되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정부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의 박탈을 의미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면 루터의 생명을 자유롭게 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루터가 출교 되자 카를 5세는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하였다. 독일 정부는 루터에게 신변 보장을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프레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의회에 나가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만약 보름스의 지붕의 기왓장들만큼이나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해도, 나는 그 곳에 가겠다”고 말하면서 보름스로 향하였다.

보름스 의회는 1521년 4월 18일부터 22일까지 루터의 사상을 심의하였다. 이 의회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독일의 여섯 선제후, 24명의 공작들, 8명의 후작들이 참석하였고, 30명의 대주교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7명의 대사들, 교황 대사들 그리고 자유시의 대표자들 등 모두 206명이 참석하였다.

의회는 루터에게 지금까지 그가 주장해 온 사상들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루터는 24시간의 여유를 요청하고 무엇을 철회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하며 곰곰이 따져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의회 앞에서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스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외친 후,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국외로 추방할 것과 그들이 쓴 글에 대한 소각령을 내렸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그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은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하여 찬양하였지만, 로마 천주교회 당국은 루터를 살해하기 위한 교활한 음모를 세웠다. 이를 알게 된 프레드리히는 4월 24일 한 떼의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어 루터가 튀링겐의 한 숲 속에 이르렀을 때 그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시켰다. 루터는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10개월 동안 이 성에서 프레드리히 현인의 보호 가운데 많은 글을 썼는데, 특별히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1522년에 출판되었고, 전체 성경은 1534년에 출판되었다. 루터는 1522년 3월 조용히 비텐베르그로 돌아왔다. 그는 과격파 칼 스타트를 쫓아내고 본격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강단에는 독일어 성경이 놓여지고, 사제들도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의식들은 억제되었고, 사람들은 독일 찬송가로 예배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예식의 형태는 미사로부터 제사적인 언어를 제거했으며, 예식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전환했고, 설교하는 기회를 많이 늘렸으며, 성찬을 주일과 성일들로 제한하고, 1521년부터 멜랑톤에 의해서 로마 천주교에서 빵만 주는 것과 다르게 빵과 포도주로 하는 개신교 성만찬이 시작되었다.

루터가 쓴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가르침을 따라서 많은 수도승들과 수녀들이 루터의 개혁에 가담하였고, 몇몇의 신부들이 결혼함으로써 실제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 캐더린 폰 보라(Catherine von Bora) 수녀도 루터의 개혁 사상에 감화를 받아 개종하고 수도원을 나와 루터의 지지자가 되었고, 1525년 6월 13일 루터와 결혼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루터는 왕성한 저술가요, 음악가요, 시인이었다. 루터가 지은 찬송시 중에 잘 알려진 것은 종교개혁의 군가(軍歌)로 불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루터는 1546년 그가 태어났던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만년에 건강이 나빠 고통을 당하였으나 운명할 때에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계속해서 세 번이나 일어나 “아버지여, 주님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는 비텐베르그에 있는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29년 전에 그 교회의 문에다 루터가 유명한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곳이다.

그 이듬해 여름에 황제 카를 5세가 루터의 무덤을 찾아왔다. 그의 대신 중의 한 사람이 옆에 서 있다가 이단의 괴수의 뼈를 파내어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카를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과 싸웠지 죽은 사람과는 싸우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활과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여기에 잠들게 하라.”

루터의 육신은 그 날 이후 그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 사상은 죽지 않고 살아서 중세를 깨우고, 오늘을 깨우고 있다.

6) 루터의 신학(1)

루터의 신학은 칭의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수도사로서 루터는 “죄인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하였고, 탑 속의 체험을 통해 그 해답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칭의의 신학을 전파하는데 바쳐졌다.

또한 루터의 신학은 말씀(성경)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은 물론 모든 신학적 문제의 해답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했기 때문이다.

(1) 신관

루터에게 하나님은 감추어진 하나님이나,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특히 성육하신 그리스도, 성경,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인류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 가운데 성령을 통해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에게 성령의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라고 하였다.

루터가 성경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시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역설적인 하나님이시다.

(2) 성경관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동의어이며, 모든 성경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는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가장 정확하게 증거하므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다음으로 바울 서신과 베드로전서를 꼽았고, 공관복음,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순으로 성경의 우위를 정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거나, 적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절하된다고 판단하여 한 때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는 야고보서가 선행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싫어하였고, 요한계시록도 상징적인 내용이 많이 기술되었기 때문에 ‘계시적이 아니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구약 가운데 창세기, 시편, 요나서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에스더서는 유대인의 복수심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저급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나중에 그의 이러한 편견을 회개하고, 야고보서를 비롯한 모든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였다.

(3) 기독관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직을 주장한다. 곧 예수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다만 화해자요 구원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죄인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만족을 드린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마귀와 싸워 이기심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셨다. 이와 같이 루터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등의 사상을 그의 기독론의 중심으로 세우고 있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다. 루터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라고 한 말씀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4-5)라는 말씀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하신 말씀을 좋아했다. 이러한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율법과 인간론

루터는 복음 안에서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율법폐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성경보다는 그의 경험에 근거한다. 루터는 칭의를 얻기 위하여 수도승으로서 고행하며, 기도하며, 금식하였지만, 영원한 죽음만을 보았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지거나 성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고, 동시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는데, 곧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율법관에 기초하여 율법과 복음이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보았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정결한 마음과 완전한 순종이나, 복음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므로, 복음은 율법의 권세를 폐지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구원만 강조하고 성화를 등한시하는 율법폐지론(Antinomianism)의 기초가 되었다.

6) 루터의 신학(2)

(5) 선택교리

루터는 성경에서 선택교리를 바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경으로는 로마서 8장 28절,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스마엘과 야곱의 이야기, 로마서 9장 15절, 17-18절의 토기장이이ㅡ 비유, 요한복음 10장 29절, 13장 18절과 6장 44절, 시편 115편 3절과 디모데후서 2장 19절 등으로, 이러한 성경들은 선택 교리를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9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이 성도들을 악에서 구원하는 것, 선하고 유식한 자들을 버리고 사악한 자들을 회심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택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사람들은 예정 교리를 배척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반론은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①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예정 교리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없이 의작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의지는 죄에 사로 잡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택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 나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하면서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였다.

②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예정 교리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모든 사람은 모든 선택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여 제한 속죄를 주장하였다.

③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를 원하고 죄인을 강퍅하게 하는 것처럼 말함으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와 자비를 보여주기 위하여 죄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궤변은 죄인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생각하므로 나오게 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선택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를 3가지로 나누었다


ⓐ 자신을 선택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자들이 있고,
ⓑ 하나니이 자신을 유기된 자들로 간주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자들이 있고,
ⓒ 하나님이 원한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고 자신을 포가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정 교리는 인간이 싫어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수용해야만 하는 교리라고 하였다.

(6) 소명과 만인 제사장주의

중세 시대에 소명이라는 말은 성직자에게만 적용되었다. 수도싱으과 사제와 같은 성직으로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성소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소명 사상을 보편화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도록 수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성과 속의 개념을 깨 버렸다.
그는 사제의 소명이 결코 다른 직업으로의 소명보다 더 신성한 것이 아니라도 주장하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므로 신성하다고 하였다. 루터가 이와 같이 소명사상을 보편화 한 것은 소명을 수평적으로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수평적인 인간 관계를 통하여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소명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마하면서, 직업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사상은 수도원적인 신학을 붕괴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노동 윤리관을 바꾸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직은 소명론만이 아니라, 성경 번역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만인 제사장설에 근거하여, 모든 신자들은 로마천주교인과 논쟁할 수 있도록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신부들이 사제의 권위로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곤 하였지만, 루터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므로 죄를 위해 사제가 필요 없고 스스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가정에서의 가장은 그 가정의 제사장이므로 온 식구를 말씀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루터는 가정마다 성경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가정 예배를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주의를 배척하고 회중의 권위를 높임으로 교히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목사의 권위는 그를 부른 회중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교리 문제, 목사와 교사의 시취 문제, 재정의 관리와 구제 문제, 권징과 파문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세가 회중에게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 모든 제안은 영주들과 시의회의 반대로 인하여 즉각적으로 실천되지 못하였지만, 루터파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는 교회 회의의 결정이나 교황의 교서를 신앙의 기본으로 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만을 교리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신앙의 기초와 예배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였으나, 성경이 금하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포용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칼빈이나 부쳐보다는 폭넓은 신학의 길을 열었다.

 

2. 독일의 개신교

1526년에 카를 황제는 스파이에르(Spires)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복음적인 운동에 호의적이 ㄴ조처가 취해졌는데, 다음 회의로 모일 때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자유가 허용된 것이었다. 이는 카를 5세가 종교 개혁자들에게 베푼 관대하고 온건한 조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유감으로 여겼다.
3년후에 스파이에르에서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지난 번 회의에서 채택되었던 조처가 역전되어 황제는 교황이 지우는 멍에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제후들은 분열되었고, 그들 중 6명이 수많은 독일의 도시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양심이 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황제의 요구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러한 항의 때문에 그들과 그 추종자들은 '항거하는 사람들'(Protestants)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기독교회의 입장을 대신한 사람이 필립 멜랑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었다.
멜랑톤은 종교 개혁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단적인 운동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운동임을 밝히기 위하여 1530년 루터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부르그신조'를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였다.

회의에 루터는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아직도 그가 제국의 파문령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루터가 삭소니의 프로테스탄트 선제후의 영토를 벗어나는 것은 안전한 일이 못되었다.
황제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전체 회의석상에서 라틴어로 낭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삭소니의 선제후 요한은 "안됩니다. 우리는 독일인이며 독일 땅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도록 전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앙고백서가 독일어로 낭독되었으며, 그 결과로 라틴어를 모르던 수많은 참석자들이 이신칭의의 교훈을 비롯한 성경의 위대한 교리들을 생생하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신앙고백서를 듣고 대단히 감동되었다. 또한 개신교가 그 모든 근거를 오직 성경에만 두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요구하는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사람들이 이해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로마교의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여 개신교의 신앙고백서를 논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듣고 제후들 중 한사람인 사소니의 공작 게오르그(George)는 루터의 적수였지만 "그러면 루터주의자들은 성경에 뿌리박고 있고 우리는 성경밖에 서 있는 셈이군요."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른 지적이었다.

그 회의에서의 심의는 연장되었으나 마침내 황제는 1531년 4월까지 개신교도들에게 그들의 입장을 재고해 보라는 결정을 내렸다. 황제는 압력을 가하면 멜랑톤이 반대자들에게 항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후들은 항복하지 않고 카를에게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슈말칼트 동맹'(The League of Schmalkald)을 결성하였다. 이에 대 황제는 터어키족과 프랑스인들이 자기의 군대와 교전 중일 때는 또 다시 그들(제후들과 동맹 세력) 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독일에 있는 카톨릭 세력으로 하여금 카톨릭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30년대에 이 두 개의 동맹 세력은 서로 대치하였으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546년 루터가 죽을 때까지 불안한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 때는 황제가 프랑스 왕을 격퇴시킨 후였으므로 개신교도들의 도전을 능히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개신교 제후들의 세력은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섭리는 역사의 방향을 역전시켰다. 카를 5세는 그의 아들 필립(Philip)을 제위 계승자로 선출시킴으로써 스페인과 항구적으로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야욕이 노출되자 독일 내의 시신구교를 망라한 제후들은 스페인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여 반황제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1552년 봄 신교 제후들은 재집결하여 카를 5세의 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이탈리아 북쪽의 티롤 산중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이싸움을 끝으로 카를 5세의 전제적 독재정치는 그의 야욕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 후 카를 5세는 정치에서 손을 뗀 후 실의에 빠져서 스페인의 한 작은 수도원에서 은거하다가 1558년 9월에 죽고 말았다.

신구교 양측의 대표자들은 1555년 아우구스부르트시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할 것을 합의하고, '아우구스부르트 강화'를 체결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강화'는 한 나라에는 하나의 신앙, 한 명의 왕, 하나의 법만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따라 통치자의 종교를 백성의 종교로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카톨릭 신자이면 백성들도 카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고 통치자가 개신교이면 백성들도 개신교가 되어야 했다.

독일에서의 개신교란 곧 루터교를 의미했다. 이로 인해 독일 내의 여러 국가들과 도시들에 잠정적인 평화가 깃들었다. 독일은 평화를 얻었지만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3.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독일에서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부터 로마교회의 많은 가르침과 의식들이 성경에서 말한느 교훈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확신을 초기 교부들의 저술들과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음으로써 더욱 분명해졌으며, 종교개혁을 갈망하게 되었다.
루터가 신앙과 교리의 기초로 성경과 함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은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 하에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의 의식을 받아들은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는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중심적인 신학은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에 의하여 계승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주의 신학(the Reformed Theology)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 명칭은 루터파와 구별되는 명칭이 되었다.

1) 개종하기까지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트하우스 (Wildhaus)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쯔빙글리의 부모는 영특했던 쯔빙글리는 아주 어릴 때무터 외지로 유학을 보냈다. 쯔빙글리는 베른 대학과 비엔나 대학을 거쳐 1502년 바젤 대학에서 토마스 비텐 바하(Thomas Wyttenbach)로부터 에라스무스이 개혁 사상을 소개받아 인문주의자가 되었으며, 1515년 에라스무스를 직접 만나 그와 학문적 교제를 나눈 후, 그는 더욱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쯔빙글리는 바젤 대학에서 1504년 문학사 학위, 1506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점차 대학자로 성장하여갔으며, 그 해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글라루스 (Glarus)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10여년 간 그곳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교인들을 돌보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는데 바쳤다. 이런한 가운데 쯔빙글리는 로마 천주교회가 과연 인가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쯔빙글리가 글라루스에서 목회하는 동안, 수많은 스위스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1512년 무적의 스위스 연합군은 교황청을 돕기 위해 밀란에 진군하였다. 이 때 쯔빙글리는 관례에 따라 용병의 군목으로 차출되어 1513년 6월 참전하였다. 종군 생활을 통하여 쯔빙글리는 용병 제도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많은 고민 끝에, 쯔빙글리는 1515년부터 용병 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그느 민족주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용병 제도를 반대하다가 1516년 교회에서 쫓겨나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보다 폭넓은 독서와 성경 연구를 통해 인문주의자에게 개혁주의자로 변신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이 출판되자, 쯔빙글리는 즉시로 구입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주야로 헬라어 성경을 애독하여 바울 서신을 암송할 정도였다.

쯔빙글리는 셩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하여 완전하게 영감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오직 성경에서만 신앙과 예배, 생활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그에게 종교 개혁의 원리를 제공하였다.

쯔빙글리는 1518년 12월 27일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아 취리히로 가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그의 개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1518년 8월 취리히를 강타한 흑사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흑사병이 번지면서 쯔빙글리의 형제 안드레아스(Andreas)를 비롯한 취리히 시민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취리히를 떠났으나, 선한 목자 쯔빙글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어가는 취리히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다 결국 그도 1519년 9월 흑사병에 전염되었고, 1년 가까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하다가 1520년 여름에 이르러서야 겨우 건강을 회복하였다.
투병 생활을 통해 쯔빙글리는 그의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 곧 동정녀 마리아와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신앙에 회의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만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분 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교회와 사회 개혁을 기대하면서 1519년 1월부터 복음적인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시작하여 사도행전, 바울 서신, 공동 서신 순으로 설교함으로 개혁운동을 펴 나갔으며, 1526년까지 신약 전부를 강해하였다.
특히 그는 복음서에서 사랑의 윤리, 그리스도인의 철학과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성경적 기독교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종교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로마 천주교회의 종교적 남용을 비판하는데 앞장서면서 쯔빙글리는 일약 취리히의 종교적인 영웅이 되었다.
당시 그로스뮌스터 성당은 유럽에서 비교적 큰교회이며, 영향력 있는 교회였으므로 쯔빙글리의 개혁 운동은 스위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3)쯔빙글리의 최후

(1)마르부르그 회의

취리히의개혁운동이 공개 토론으로 성공하자,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526년에는 루터의 대적 요한 엑크와 쯔빙글리가 로마 천주교 영지인 바덴(Baden)에서 4주간 동안 종교개혁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바젤의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가 참석하여 로마천주교회를 곤경에몰아넣었다.

바덴 회의 이후 스위스 내에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압력이 가중되었지만, 1527년 2월과 3월의 바젤과 콘스탄스 논쟁에서 기독교가 로마 천주교회를 누르고 승리하였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에 대비한 상호 만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제안으로 1529년 독일의 마르부르그에서 두 사람이 만나 회의를 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와 루터는 3일간의 논의를 거쳐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믿음에 의한 칭의, 세례에관한문제등14개조항에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았다. 15조항의 초기 부분에서 화체설과 미사를 희생으로 보는 것을 배척하였고, 빵과 포도주두가지성찬의 요소를신자에게 주는 것이옳다고 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성찬에 대하여는 심각한 설전을 벌였다.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가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임하지는 않지만, 본질적이고 실체적으로 임재한다고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서로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루터는 쯔빙글리와 화해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쯔빙글리를‘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정죄하였다. 결국 교회의 연합이 무산되었고, 개혁자들의 힘이 분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2)카펠전투

마르부르그 회의 이후 루터파와의 공조체제가 무너져 힘이 약화된 가운데서도 쯔빙글리는 모든 스위스 백성이 로마 천주교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던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과 같은 산지의 주민들은 스위스에서 취리히가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1529년 4월 쭉(Zug), 루쩨른(Lucerne)과 힘을 합하여 스위스의 숙적인 오슨트리아의 합스부르그가의 페르디나도 공작과 동맹을 맺고 취리히에 대항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쯔빙글리는 1529년 6월 저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카펠(Kappel)로 진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카톨릭 속한 주들이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고, 개혁운동에 대한 박해를 종식하며, 종교 선택을 자유롭게 허용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제1차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자 1531년 1월에 열린 스위스 연맹 회의에서는 상호 비난의 소리가 높아갔고, 쯔빙글리는 개혁자들 사이의 내부 결속을 다지고 로마 천주교회를 지지하는 산지 주들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세워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다. 이 봉쇄령으로 어려움에 빠지게 된 로마 천주교회에 속한 주들은 1531년 10월 11일 8,000명을 이끌고 취리히에 대항하여 카펠로 몰려왔다. 쯔빙글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1,5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카펠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쯔빙글리는 부상을 당하여 결국 숨을 거두었으며, 취리히 측의 전사자는 400명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는 26명의 시의회 의원과 25명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은 쯔빙글리의 시체를 조각 내어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공중에 뿌리면서 승리를 자축하였다. 이때 쯔빙글리의 나이 47세였다.

이 일로 인해 취리히의 개혁 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취리히의 저력을 의식한 로마 천주교 측은 11월 20일 취리히와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제1차 카펠 평화 회의를 무효로 하며, 개혁교회 지역에서는 로마 천주교회의 포교가 허용되지만, 산지에 속한 주에서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자유가 금지된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 조약의 결과 취리히에서 로마 천주교회의 활동이 허용되었고, 개혁운동에 대한 방해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취리히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로마 천주교도로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혁 신앙은 스위스는 물론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였다.

쮜리히에서의 쯔빙글리의 계승지는 그의 사위인 볼링거(Henny Bullinger)가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 아래서 개혁에 동참하는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였다. 이 신앙고백은 ''헬베티아 신앙고백서''(Helvetic Confession)로 알려져있다(고대 로마 시대에는 스위스를 ''헬베티아''라고 불렀다). 이 헬베티아 신앙고백서에는 존 낙스(John Knox), 그 외 다른 스코틀랜드의 목사들, 화란 남부의 교회들, 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개혁교회 회중들이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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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칼빈의 종교 개혁

루터와 쯔빙글리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빈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파리 북동부 피카르디 지방 노용(Noyon)에서 1509년 7월 10일 출생하였을 때, 루터는 이미 4년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칼빈이 겨우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칼빈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터는 95개 조문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루터와 칼빈에게 적당한 시간차(25년)를 두셔서 당신의 일을 적절하게 수종들게 하셨음을 볼수있다.

칼빈과 루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칼빈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루터는 사교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칼빈은 가끔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품이 치밀하고 과묵하며 꼼꼼하고 대찼던 반면, 루터는 자유분방하여 각계 각
층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앙이 같다는 데에 뿌리박은 상호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1539년 루터는 칼빈의 작품「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ardinal Sadoleto on Why the Reformation Was Necessary)을 읽고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1545년 4월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한 책방에서 칼빈이 저술한「신앙의 교훈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을 사서 읽고 “이 저자야말로 학식과 경건을 겸전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 외콜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가 처음부터 이처럼 명료했다면 그처럼 좋지 못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피상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칼빈은 심오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칼빈은 항상 루터를 변호하였는데, 쯔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늙은 루터를 비난하자, “부디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용기 있게, 강건하게, 유능하게, 학식 있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쳐부수느라고 계속 열성을 기울였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대로 아래와 같은 입장에 추호도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가리켜 악마라고 한다해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 부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빈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1)개종하기까지의 칼빈

(1)출생과 초기 교육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Noyon)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르 꼬뱅(Gerard Cauvin)과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벵은 대대로 이어내려 오던 와즈(Oise) 강 뱃사공 일을 하다가, 1500년경에는 퐁 레베크의 고향집을 떠나 노용에 와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인 쟌느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장인 덕분에 노용 시청 서기가 되었고, 그 후에는 대성당의 교구 서기로서의 일을 보았는데 이때 칼빈이 태어났다.

칼빈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는 당시 교양이 높은 가문으로 알려진 노용의 캉브레 호텔업자의 딸이었다. 쟌느 르 프랑스는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며 학문과 경건과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으로 알려졌는데, 칼빈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종교성 모두가 어머니 쪽으로부터 유전 받은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칼빈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한 살 때는 노용 성당에 있는 라 게진느(La Gesine) 채플의 사제 보조직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칼빈은 노용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523년 8월 파리로 유학하여 라 마르슈(de la Marche) 대학에 등록하여 라틴어의 대가인 코르디에(Mathurin Cordier)를 만나 라틴어를 배웠고, 인문주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몽테귀(de Montaigue) 대학으로 전학하여야만 했다.

몽테귀 대학에서 칼빈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옥캄주의자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메이저는「대 영국사」(History of Great Britain, 1521), 복음서 주석」(Commentary on the Gospel,
1529)과 같은 책을 써서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개혁 운동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은 어린 칼빈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인문주의자 칼빈

교구 성직록(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9년 3월 노용의 참사회와 불편한 관계가 된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을 포기하고, 다시 법률을 공부할 것을 명하였다. 효자였던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Orleans)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만난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Pierre de L’Estoile) 교수에게서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나 엄청난 정신적 영향을 받아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문주의 사상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헬라어를 가르치던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이 볼마르 교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볼마르 교수가 당시 유명한 이태리의 르네상스에 사상적 영향을 끼친 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부르쥬 대학(Universites de Bourges)으로 전근 갔을 때, 거기까지 그를 따라서 학교를 옮긴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볼마르 교수는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신약성서 원문을 가지고 칼빈 등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 쟈끄르 페브르 교수로부터 종교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청년 칼빈은, 볼마르 교수로부터 신약 성경 원문을 배우면서 이러한 사상이 더욱 자라게 되었다.

역사가 프로리몽 드 레몽(Florimond de Raemond)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말하기를 볼마르야말로 칼빈에게 ‘이단 교리의 달콤한 맛’을 최초로 맛보게 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은 나바레 왕비의 관할지인 부르쥬에서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 교수를 만났는데 이는(칼빈에게는) 불행하고도 불운한 만남이었다. 볼마르 교수는 그리스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언어학에서는 매우 박학하고 탁월한 교수였다. 그는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볼마르는“칼빈의 기억력은 매우 탁월했으며 정신력은 활발했고, 강사의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로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서 표현해 낼 줄 았았으며, 그것을 다시 더 쉽고 더 아름다운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 놓는 데 매우 탁월하고도 섬세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 두었으며 다른 학생들보다 더 깊이 사랑했다. 하루는 함께 산책을 하는 중, 볼마르 교수는 칼빈에게 신학에 헌신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쥐스티니엥(Justinien)의 법전을 그만두고 모든 학문 중의 학문이요 학문의 여왕인 신학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으며…볼마르는 또한 그에게 루터교의 비밀 교리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칼빈이 노용으로 간 후에는) 편지로 내왕을 했고, 그가 독일로부터 입수한 서적들(개혁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보내주었으며, 칼빈에게 주님의 교회를 계몽하는 사업을 계속할 것을 부탁했다. 칼빈은 그 위대한 사업(종교개혁을 뜻함) 가운데로 자기를 밀어 넣었던 사람이 볼마르라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1531년 5월 26일 봄에 칼빈은 법학사 학위를 받고 그 후 법률 공부를 4년 더 해서 1535년에 법률 면허증을 받았으나 법학 박사학위는 끝내 거절하고 받지아니했다. 그러나 이렇게 갈고 닦은 그의 고도의 법학 지식은 후일에 그가 표현하는 교리의 정확한 언어 구사와 논리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부친의 사후 그는 다시 인문주의자가 되기를 꿈꾸면서 파리로 돌아와서 삐에르 당느(Piere9Danes) 교수로부터 고급 헬라어를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배우면서 프랑소와 바따블(Francois Vatable) 교수로부터는 히브리어를 배웠다. 이것이 후일 그가 구약과 신약 성경을 주석하는 데 필요한 어학 실력의 기초가 되었다. 넓은 범위에 걸친 그의 인문학의 지식 섭렵의 경지를 두고 귀빠뗑(Gui Patin) 같은 이는 칼빈을“유럽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방대한 양에 해당하는 그의 주석을 자세히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의 박학다식한 지식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1532년「세네카의 관용론 주석」(Commentary on Lucious Anneas Seneca’s Two Books on Clemency)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칼빈은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이어 3가지 종교적
인 질문, 곧 이교와 기독교,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 통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칼빈의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은, 베틀즈 교수(Ford Lewis Battles)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그가 바른 종교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주석을 통해 학자들의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으
나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자, 신학을 연구하여 학자가 될 계획을 세웠다

2) 칼빈의 회심과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일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보다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

칼빈은「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오를레앙 지방에 1년간 머물다가 1533년 8월에는 노용을 방문하고, 10월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만성절(All Saints Day) 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마튀렝(Mathurins)
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초안하였다. 칼빈은 이 연설문에서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다. 대노한 프란시스 Ⅰ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심히 불쾌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 대학에는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피신할 수 있었다.

19세기 칼빈 연구가 아우구스트 랑(August9Lang)의 저서 칼빈의 회심(Die Bekehrung Kalvins, 1897)에 의하면, 니콜라스 콥은 루터가 이미 1522년 만성절 설교에서 사용했던 본문(마 5:3)과 제목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했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이 원고가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엄격한 전통에 매여 있으면서 성직록의 혜택으로 많은 신세를 져온 칼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상을 등지고 조국과 고향을 떠나 한평생 종교개혁 운동에 몸바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칼빈은 1534년 노용에가서성직을 반납하였으며, 두 차례나 잠시 동안 투옥 당하는 경험을 맛보았으며, 파리에도 들르고 오를레앙과 포이티에르도 방문하였는데, 포이티에르 근처의 한 석굴 속에서 최초로 개혁주의 신조에 따른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판판한 돌을 성찬상 대신 사용하였다.

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이 사태를 더욱 극화시켜서, 이러한 더러움으로부터 다시 파리시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촛불을 켜들고 노트르담 사원까지 엄숙한 행렬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 참석한 국왕은 자기 영토에서 이러한 해독을 제거시키겠노라고 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발생한 일반 대중들의 폭발을 더욱 조장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
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마음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칼빈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etan)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썼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Neuchchatel)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재침례교도에 의하여 영혼 수
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자, 이단 사상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한 칼빈은 1534년「영혼 수면설에 관하여」(Psycho pannychia)라는 책을 써서 영혼이 천국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잠자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1) 기독교 강요 저술 동기

칼빈은 1535년 초반에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프랑스 남서부에 있던 친구 뒤티에(Du Tillet)의 집에 피신하였다. 훌륭한 장서를 다량 소장한 뒤티에의 집은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칼빈은 그곳에서 프랑스 당국에 의해 고난받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 문답서요,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왕에게 밝히는 변증서인「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했다.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랫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우선 주님께서 보실 때에 너무나도 값진 내 동생의 죽음의 의미를 의롭지 못한 자들 앞에서 옹호하며, 또한 똑같은 위협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므로 이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있다.

그는 이 작품을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였다.

“고명하신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일에 착수하였을 때는 나중에 폐하께 헌정할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경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경건으로 덕을 세우기에 적합한 기본적인 책을 써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노력은 특히 저의 동포인 프랑스인들에게 유익을 줄 생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악한 사람들이 맹위를 떨쳐 폐하의 나라로부터 건전한 교리를 추방해 버린 것을 알았을 때 저의 저작을 폐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음으로써 폐하로 하여금 그 교리가 저 악한 사람들이 불과 칼로써 그토록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이 문제는 당신이 들을 가치가 있고 알 가치가 있으며 판단할 가치가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죄인들이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며 세상의 모든 권세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적들은 우리의 교리가 새롭고 불확실하며 기적들에 의해 확증되지 않았고 교부들의 일치된 목소리에 상반되며 유구한 관습에 반한다고 말합니다…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 우리의 교리를 새로운 것이라고 함으로써 저들은 그 거룩한 말씀을 새로운 것이라고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가 저들에게 새로운 것임은 저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바울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뱔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 아무리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불확실성을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저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면, 우리는 저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나 하나님의 심판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0 저들이 기적들을 요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온갖 기적들에 의해 확증된 복음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를 옛 교부들과 대립시키는 것은 마치 교부들이 우리의 대적들의 악한 행위를 선동하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것으로써 중상모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 또한 저들이 관습에 호소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만약 인간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면, 선한 사람들은 이전의 관습들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다수가 더 나은 길을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다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이내 관습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 저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단이거나 교회가 여러 세대 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많은 괴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B 끝으로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전파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며 비위에 거슬리게 소요들과 소동들과 분란들을 열거하는 행위에는 전혀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시여, 다시 폐하께 말씀드리오니, 우리의 대적들이 이른바 ‘새로운 복음’은단지 폭동을 선동하고 악을 방종되이 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넌지시 얘기하는 말에 동요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분열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순결, 관용, 자비, 절제, 인내, 중용을 비롯한 모든 미덕의 본보기로서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을 섬길 것입니다…”

칼빈은 이 책을 출판하면서 신변 보호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2) 기독교 강요의 내용 ②

제2권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도신경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마찬가지로 우리의 저자는「기독교 강요」제2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며 우리를 중보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여기서 칼빈은 타락과 원죄를 다루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죄 또는 죄로 인하여 인간 위에 걸려 있는 저주에서 피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마음이 새롭게 될 때까지는 정죄받을 만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완전히 상실되어 스스로를 치유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한 생각을 품지조차 못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외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도덕법에 대한 해설로 이어진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에게 구원의 근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복음 아래에서 세상에게 더 온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관한 논의가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구원의 온전한 효력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것, 그는 실제로 참 인성을 취했다는 것,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 제사장, 왕, 선지자라는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그의 공로와 권능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을 획득하고 적용하려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가 실제로 구속주의 사역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에 관하여 듣는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다룬 사도신경의 조목들이 해설되어 있다.

제3권 은혜를 받는 방법과 은혜로 인한 열매들에 대하여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도신경에‘성령을 믿사오며’로 나온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켜주는 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제3권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성령,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로부터 거져 주시는 칭의, 중생, 회개의 유익들을 받는 수단인 믿음을 다룬다. 회개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칼빈은 다음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안에서 낳는 저 지속적인 회개를 강론한다.

그런 다음 칼빈은 거저 주시는 칭의라는 주제로 되돌아가며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는 약속된 축복들을 우리가 받아 가지는 손으로서의 기도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저자는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을 다룬다. 이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수여하신 것 외에는 우리 안에서 아무런 선도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어 복음의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중생의 온전한 효력들과 행복의 온전한 향유를 위하여 우리는 마지막 부활로 넘겨진다.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들의 행복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 마지막 부활을 바라보아야 한다.

제4권 은혜의 외적인 수단에 대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믿음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복음의 설교를 사용하고 규례들과 치리의 사용을 명하였기 때문에,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제4권에서 교회 그리고 성령이 교회를 부르고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적인 나라를 다스릴 때 사용하는 홀인 말씀의 설교, 세례, 성찬.

그리고 세속정부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가정이자 피난처인 한에 있어서, 칼빈은 그러한 정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으로서 교회는 이 일시적인 피난처로부터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될 그 영원한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마땅히 감사함으로 그러한 정부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4) 칼빈과 제네바

(1) 제네바에 오기까지의 칼빈

칼빈은 1536년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한 후원을 얻기 위해서 페라라(Ferrara)의 공작 부인이요 공주인 르네(Renee)를 만나려고 페라라를 방문하였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종교적 관용 조처가 내려지자, 파리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그의 동생 앙뜨앙느(Antoine)와 이복 여동생 마리(Marie)를 데리고 스트라스부르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3차 합스브르그-발로아(Habsburg-Valois) 전쟁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직행로를 이용할 수 없어 제네바를 거쳐가는 우회 도로를 택하여야만 했다.

칼빈은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방문을 받았다. 칼빈은 당시의 기억을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파렐은 나를 제네바에 머물도록 강권하였다. 그가 사용한 수단은 상담이나 권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나는 이러한 폭언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는 것과 같이 느꼈다. 그 당시 내가 은신처로 정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단 하룻밤만 제네바에서 묵고 급히 떠날 결심이었다…비열하게 신앙을 버리고 로마 천주교회로 되돌아간 한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를 알리는 바람에 나의 존재가 드러났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매여있던 파렐은 나를 붙잡아 두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나는 개인 연구에 전력할 것을 결심한 뒤여서, 다른 일에는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간청 정도로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일 내가 긴급한 시기에 도움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추구하는 은둔과 평온한 학문 생활에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나는 마침내 계획하였던 여행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칼빈은 파렐의 강권에 의하여 제네바에 정착하였고, 1536년 9월 1일 제네바 교회에 부임하였다.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프랑스와 이태리와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Savoy)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16세기 초반 프리브르그(Fribroug)와 베른(Berne)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고,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던 주교를 몰아내었다. 제네바의 행정은 200인의 귀족으로 구성된 대의회와 25인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관할하였고, 시민들로 구성된 총회는 4인의 평의원과 재정관을 선출하여 시정을 행사하였다. 제네바 시의회가 로마 천주교회 신앙을 옹호하는 사보이에 대하여 정치적인 반란을 시도한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교황제의 노예 상태에 매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렐의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렐은 1485년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가프(Gap)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인문주의자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는 1521년 온건한 개혁자인 브리소네의 비호 아래 설교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유랑 생활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부쳐를 만나 교제하였다. 그는 1532년경부터 제네바에 와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네바에 도착한 파렐은 제네바 시민들이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격렬한 설교를 감행했기 때문에 도리어 시민들의 감정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하마터면 생명까지 빼앗길 뻔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친구들과 같이 제네바 시를 떠날 수 있었다. 파렐은 일단 퇴거했다가 베른(Bern)에 있는 친구 프로망(Antoine Froment)을 제네바 시에 파송하였으나 그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실패의 원인은 당
시 제네바 시민들이 개혁 신앙의 참 뜻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파렐의 설교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렐은 이에 힘을 얻어 프로만과 함께 다시 제네바로 향하였고, 1534년 3월 1일 제네바 시 당국으로부터 설교권을 얻기에 이르렀다.

파렐, 올리벳탄, 젊은 안톤 프로망 등은 제네바 속에서 설교 및 선전공세를 통해 그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운이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교측에서 제네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그는 제네바 시가 자유와 안보를 위한 투쟁과 복음주의적 사상 사이에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535년 6월 장기간 계속된 교리논쟁을 통해 파렐과 비레는 무능한 카톨릭측의 대변자들을 물리치고, 중앙 성당을 비롯한 여러 교회들을 과감하게 차지하였다. 성상 파괴론자들(Iconoclasts)은 교회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부수고 성자들의 조각들을 우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그해 8월 대의회에서는 미사집전을 중지시켰으며, 그 후 수개월 간 카톨릭 성직자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 프로테스탄트측 지도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1536년 1월 프로테스탄트인 베른 시는 사보이 가를 격퇴시키고 점령하였으나, 오랜 논란 끝에 이 도시를 독립시키는데 합의하였다. 1536년 5월 21일 스위스 직접 정치에 따라, 각 가족들의 남자 가장들이 대성당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만장일치로 복음주의적 형태의 예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다. 교회 재산은 시의회에서 감독하기로 하였으니, 쯔빙글리가 쥬리히에서 실시한 바와 같은 국가 - 교회 형태의 제도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시기에 파렐은 제네바에 들른 칼빈을 강권하여 이 도시의 개혁에 참여하도록 붙잡은 것이었다.

(2) 제네바에서의 칼빈

칼빈은 성 피에르(St. Pierre) 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는 일로 제네바 개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제네바 시 당국은 칼빈을 그 이름조차도 거명하지 아니하고 ''저 프랑스인’이라고 불렀다. 제네바에 도착한지 한달 후인 10월에 로잔에서 카톨릭과 개혁자 사이에 성찬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1537년 1월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면서 파렐과 함께 ‘교회 행정에 관한 조례’(Articles Concerning the Government of the Church)를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조례는 4개 조항의 개혁안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① 바울의 가르침대로 찬송할 때 시편을 사용할 것, ② 매주일 성찬을 행할 것, ③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④ 결혼 법을 개혁할 것 등 이었다. 칼빈은 예배의 개혁을 위하여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고, 어른들도 찬송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결혼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와 재침례교도의 교리가 매우 위험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곡된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붕괴할 수 있다고 본 칼빈은 제네바를 신앙적인 공통점을 가지는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교훈과 신앙고백」
(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이라는 신조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모든 시민들은 10명씩 그룹을 지어 이 조문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 노력은 1537년의 포고령이 제정됨으로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칼빈은 세속 정부도 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것은 인정하였으나, 정부가 교회의 고유한 특권을 침해하거나 순수하게 영적 문제들에 대해 상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점차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 조직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사치를 금하는 각종 법규 및 윤리에 관한 규칙들을 통해 전통적으로 시의회에서 취급하던 도덕에 관한 문제들은 사실상 교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 인물들을 시의 모든 구역에 배치, 임명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예방하고 악덕한 행위를 보고하도록 시켰다. 마
태복음 18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포고령은 규정하기를, 만약 잘못을 범하는 신자가 있을 때에는 우선 형제의 사랑으로 권면하도록 하고, 그 후에도 개선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에 알리도록 하였다. 만약 계속 죄를 범할 경우에는 목사가 공개적으로 그 자를 비난하고 회중 가운데서 축출시킨다는 것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기 신자들의 도덕 생활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반동적 경향을 보이는 반대파의 세력들이 그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이 본래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시내에 프랑스계 난민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해 간다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로잔에서 목사직을 맡고 있던 정서적으로 불안전한 경향을 보이던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는 그곳에서의 비레의 활동을 흠잡기 시작하였다. 카롤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칼빈에게 반삼위일체적 경향이 있다는 중상을 하기 시작했다. 베른 시의회는 칼빈의 입장을 두둔하는 한편, 그곳 영내에서 카롤리가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로 되돌아갔으며 결국 다시 카톨릭으로 재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칼빈의 위치는 약화되었으며, 제네바 내에서 그의 권위도 손상되었다.

한편 제네바 자체 내부에서도 쟝 필립페(Jean Phillipe)라는 자의 지도 하에 강력한 반대당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니, 그는 개혁을 반대하고 목사들이 도덕문제를 취급하는 것과 강제로 신앙고백을 시키는 것 등을 반대하였다. 1538년 2월 칼빈의 대적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요직을 차지하게 되니, 목사들은 강단에서 이들을 반박하였다.

한편, 베른 정부는 베른 식의 예배, 성례 의식 규범을 전 영내에서 실시하고자 하였으니, 이 가운데에는 성찬 때에 무교병의 사용과 세례식에 사용하는 성수반(Baptismal Fonts)의 보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파렐은 이러한 요구를 제네바 안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으므로, 베른식 예배 규범을 일단 유예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소위원회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1538년 부활절에 설교하였으나, 이처럼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성례식을 베푸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 다음 날 200인 의회는 모임을 갖고 칼빈과 파렐에게 사흘 내에 그곳을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제네바를 떠나 베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취리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곳에서 교회의 체제, 지리문제 등에 관한 자기들의 입장을 밝히고 일반적인 호응을 받았다.

파렐은 누사텔로 돌아갔으며, 칼빈을 스트라스부르로 향하였다.

(2)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개혁 운동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빈은 1538년 9월부터 1541년 여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체재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3년 동안 칼빈은 주로 목회와 상담과 저술로 시간을 보내며, 개혁의 견문을 넓히는데 사용하였다
.
스트라스부르그에 대하여 독일의 종교개혁사가인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종교개혁이 가능하도록 여러 조건이 이곳보다 잘 갖추어진 곳은 유럽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동시의 위정자들은 종교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정치적 입장에서 능란하게 처리했다. 그 결과 스트라스부르
그는 저 위대한 시장 요한 스트룸(John Strum)의 지도 하에 비록 제국도시 가운데서 최대의 위용과 부를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면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인문주의자들의 무리, 학문과 교양이 풍부한 시민들, 독일신비주의운동이 남겨 놓은 내적 경건의 전통, 라인강으로 인해 예부터 문명의 통로가 개통되어 자유로운 정신이 교류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약동하는 생명력은 부쳐라는 한 개혁가의 영혼 속에 깊숙이 흘러 들어가 용해되었으니 축복 받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스트라스부르그는 사가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의 안디옥’ 또는 ‘서남 독일의 비텐베르그’라고 불려 질만큼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부쳐와 교제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부쳐의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 의식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겼다. 특히 교회 음악에 있어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 찬송을 더 선호하여, 시편 중 18개를
작곡하였고, 찬송을 편집하여「찬송가」(Book of Music)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찬송을 기도와 함께 공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칼빈은 공적인 기도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배 사상은 나중에 개혁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었다. 칼빈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는 약 500여 명의 교인이 모이곤 하였는데, 한 방문객의 말을 빌리면, 그의 교회는 ‘노래하는 공동체’(singing community)라고 표현할 정도로 찬양을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부쳐의 영향으로 교회 연합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어디서나 누구하고도 협동할 수 있다는 것과 자유로운 협동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이와 같은 칼빈의 주장은 부쳐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칼빈은 1539년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기독교 연합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자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1540년 부쳐와 함께 하게나우와 보름스에서 열린 교회 연합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541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공식 사절로 레겐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하여 콘타리니 추기경과 멜랑톤을 만나기도 하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면서 기독교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목회하는 가운데 틈틈이 네델란드의 개혁자 요한 스트룸이 세운 중등학교에 출강하여 신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적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경험은 나중에 제네바에서 매우 유용한 개혁의 수단이 되었다.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함을 받아 이곳에서 결혼하였다.

칼빈은 언제나 무리하여 일을 하는 편이었으므로 친구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결혼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 생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희랍인들이 트로이를 공격한 것처럼, 오직 아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카톨릭과 싸웠다는 중상을 듣기 싫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부를 찾는데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칼빈의 내조자의 조건은“겸손하고 소박하고 평범하고 인내심이 깊어야하고 내 건강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40년 칼빈은 베자의 소개로 세 자녀를 둔 과부 이델레트 드 부레(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였다. 이델레트는 네델란드에서 박해를 피해 온 재침례교도였으나 부쳐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1542년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일찍 잃게 되었다. 그때 칼빈은“우리 아버지 는 우리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신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사람들이 그에게 자녀가 없음을 비방할때, “나는 무한히 셀 수 없는 영적인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응수하여 자녀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델레트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549년 사망하였는데, 후에 칼빈의 적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녀가 지루함
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고 악평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며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으나 결혼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539년「로마서 주석」을 간행하였고, 「기독교강요」개정판을 내었으며,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서신」과「기도서」그리고「성찬론」을 각각 집필하였다.

6) 칼빈과 제네바 개혁운동

칼빈과 파렐이 떠난 뒤, 제네바는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개혁자들이 빠져나가자, 로마 천주교회 당국이 제네바를 회유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539년 5월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성령께서 계속하여 교회의 칙령과 종교회의들을 인도하셨으므로”로마 천주교회에 오류가 없으니, 오류 없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하였다. 그는 제네바 시민들에게“전체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여 교회의 칙령과 교회 법과 성례를 지키던가, 아니면 분열과 계략을 일삼는 인간들을 따르던가”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당면한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선동을 잠재울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유일한 대안은 칼빈이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고 개혁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칼빈에게 “어두움이 지난 후에 빛을 소망한다.”라는 말이 겉봉투에 쓰여진 간절한 내용의 재청빙 서한을 보냈다.

‘제네바 시장과 시의회는 우리의 훌륭한 형제요 탁월한 친구인 칼빈 선생님께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의 확장만이 당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한 제네바시의 대·소의회와 총의회(총의회는 자신들의 이
름이 여기에 쓰여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우리에게 부탁하였습니다)의 이름으로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당신을 초청합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옛 직무를 다시 맡아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당신을 예우하고자 합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삶이 죽음과 같이 힘든 과정이었으므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내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죽어야 하는 그런 십자가보다는 일백 번 죽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고 심경을 토로하였지만, 이번에도 파렐의
경고와 권면 때문에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칼빈이 돌아오자 제네바 시의 모든 민중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귀환을 환영하였고,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연봉으로 250 플로린스(florins), 12섬의 밀, 1,000리터
의 포도주로 사례를 책정하고, 칼빈의 계획대로 제네바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스위스에 다시 돌아온 칼빈은 제네바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교회 헌법을 만들기를 원해, 이를 위한 위원회 구성에 시의회가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위원회는 칼빈을 돕기 위해 6인의 위원을 임명하였고, 위원회는 3주만에 헌법 작업을 마쳤다. 위원회는 그 초안을 시의회에 제
출하였는데, 소위원회와 중위원회를 거친 후, 마지막 단계로 11월 20일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제네바 교회 헌법’(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이다. ‘교회 헌법’은 지역 교회의 자율과 평등 사상을 강조함으로 감독 정치에서 볼 수 있는 위계 질서 사상을 배제하였고, 신약의 가르침대로 장로 정치의 골격을 유지하였다.

칼빈은 치리법원을 세워 세속 정부와는 별개로 파문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가 교리 및 교회 내 치리문제에 개입하는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곳에서는 도시 내에서 각종 부도덕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치리법원은 아주 사소한 범죄까지도 검토하고 재판하였으며, 음탕한 춤, 가슴을 깊게 판 여인들의 의상, 카드놀이, 술 취하는 것 등도 심한 제재를 받았다. 제네바는 당시 악명높은 매춘의 도시로 꼽히고 있었으므로 칼빈은 이에 대해 매서운 태도를 취하고자 보다 호된 처벌을 주장하였다.

칼빈의 주장에 의해 술집들은 일단 문을 닫고, 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카페들을 다시 열어 이곳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참고삼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어판 성경을 비치하도록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소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다시 술집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술, 이단, 간음, 신성모독, 난동 등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심각한 범죄들은 세속정부에 이관되었다. 어떤 시민은 자기 개를 칼빈이라고 이름지었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러한 법 집행 과정에서는 고문에 의해 자백을 얻어내는 사례도 허다하였는데, 4년 동안 58명이 처형당하고 76명이 유배당하였다. 칼빈은 법률에 대한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공공질서에 관한 부문에도 밝았기 때문에 순전히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하여도 의회들과 평의원들의 자문에 응하였다.

칼빈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라는 소공화국에서 거의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이처럼 그의 지식의 노련한 힘과 인격의 영향력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결과 제네바는 짧은 시간안에 순결한 교회와 개혁된 정치질서의 영광으로 빛났다. 칼빈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제네바로 몰려들었다. 또 여러 곳에서 폭정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영향력과 그 지배 아래서 안전한 거처를 찾아 제네바로 이주하였다.

(1) 개혁의 반대자들

칼빈의 제안대로 ‘교회 헌법’이 시정부에 의하여 통과되었지만, 제네바 개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칼빈의 도덕적인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대항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인 방종파(Livertines)는, 칼빈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자, 칼빈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카드놀이 제조업자였던 피에르 아뫼(Pierre Ameaux)는, 칼빈의 개혁 운동으로 유흥을 멀리하는 풍조가 일어나 막대한 재정적인 손실로 파산지경에 이르자, 1546년 1월부터 칼빈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중상 모략하였다.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는데 앞장섰던 아미 페린(Ami Perrin)도, 부도덕한 그의 장인과 아내가 장로 법원에서 치리받자, 칼빈의 개혁 운동에 대하여 사사건건 반대하였다. 특히 그는 1553년 원로원 회원으로 당선되자, 장로 법원이 가졌던
출교권을 시의회로 환원시키려고 하여 칼빈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칼빈은 반삼위일체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33)의의 도전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에서 궁정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Saragossa)와 툴루즈(Toulouse)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이태리와 독일을 여행하면서 필립 멜랑톤과 마틴 부쳐를 만났다. 그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을‘삼위일체 오류론’(De Trinitatis Erroribus)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1541년부터 1553년까지 비엔나의 대주교 주치의로 일하였다. 이때에 그는 칼빈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얼마 못 가서 그의 정체를 발견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익명으로 쓴 ‘기독교의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에서 그의 모든 사상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프랑스 리용에서 체포되어 화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 집행 전에 탈출하여 제네바로 향하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로 온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칼빈의 적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합하면 칼빈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제네바로 왔다. 그러나 제네바 시 당국은 그가 도착하자마나 체포하였고, 이단과 신성모독 죄로 정죄하였다. 당시의 법 형평상,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상은 성도의 영혼을 죽이는 염병으로 간주되어 화형에 해당되는 벌을 받곤 하였다. 세르베투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제네바 시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 선고를 내리자, 칼빈은 좀 더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것을 시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적대적이던 시의회는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빈은 2개월 13일간 세르베투스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그의 개심과 수정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1553년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칼빈과 제네바 시 당국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도전을 받았다.

그는 사보이 출신으로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을 만나 개종하였으나, 인문주의적인 사상 때문에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44년 아가서를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단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자, 바젤로 가서 신학을 가르치던 중 ‘이단에 관하여-그들은 박해받아야 하며, 어떻게 취급되어야만 하는가’라는 글을 써서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해 비판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였다.

카스텔리오는 삼위일체론, 예정론, 자유의지론, 신론, 천사론 그리고 종말론 등을 구원과 관계없는 교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추방하거나 구속, 투옥, 화형, 교수형을 선언하는 것은 교권의 횡포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리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생활이므로, 교회가 교리적인 문제로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1551년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개종하여 제네바 근교에서 의원을 개업한 볼섹(Jerome Hermes Bolsec)의 중상 모략을 받았다.

그는 원래 파리에 소재한 카멜파(Carmelite) 수도사였으나, 이태리에서 의학 수업을 받은 후 프랑스의 샤블레(Chablais)에서 생활하면서 칼빈과 교제하였다. 그는 1551년 제네바에 도착하여, 칼빈의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칼빈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네바 당국은 그를 중상 모략 죄로 체포하고, 바젤, 취리히, 베른의 교회들과 함께 정죄하였고, 그 해 12월 제네바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그는 샤블레에서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을 계속하면서 예정 교리를 비판하던 중, 1562년의 오를레앙 교회회의와 1563년의 리용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칼빈의 반대자들은 신학적으로 그릇된 사상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세력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야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칼빈을 괴롭혔다. 그가 자주 다니는 골목에 사나운 개를 풀어놓는다던가, 예배 중에 교회를 향하여 총을 쏜다던가, 그가 설교할 때 크게 기침 소리를 내어 설교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네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곳으로 만들어 나아갔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칼빈은 죽을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였다.

칼빈은 중간키에 창백한 안색이었으며, 검은머리와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특히 그의 광채나는 눈동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의복은 소박하였으며 음식도 약간만 먹었고 잠도 적게 자는 편이었다. 굉장히 재치가 있었고 관찰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놀라운 천부적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랑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익살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그의 태도는 엄숙하였으며, 어조는 단순하고 직접적이었고, 심사숙고한 후 심각하게 말을 꺼내곤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소위원회에서는, 하나님은 칼빈에게‘당당한 위엄을 갖춘 성품’을 부여하셨다고 회상하였다.

몸이 약했던 그는 13가지나 되는 병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병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과로와 피곤과 교회를 위한 근심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장시간 집무를 계속하였다. 부디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는 친구들에게 그는“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 보시면 어떻게 하지?”라고 답하였다. 너무나도 몸이 쇠약해져서 정상적인 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기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는 서기의 급료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수입은 상당한 편이었으나 주로 구제사업을 위해 이것을 바쳤기 때문에 재산은 불과 얼마 되지 아니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에는 들것에 실려 교회당에 가서 강단에 앉아서 설교하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진력을 다하던 칼빈은 1564년 2월 6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병석에 누었다. 5월 2일에는 최후의 편지를 누사텔에 있는 파렐에게 보내어 빨리 제네바에 와서 함께 마지막 날들을 지내자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임종시까지도 ‘여호수아 주석’을 집필하던 가운데 있었는데, 결국 이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격이 되었다. 테오도레 베자는 칼빈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여 “겨우 영혼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하였다. 칼빈은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베자의 품에 안기어 임종하였다. 다음날 사람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플랭-팔리에(Plain-Palais)의 일반 묘지에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매장하였다.

칼빈은 진정 위대한 용기와 완전한 헌신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베자는 기록하였다. “나는 칼빈의 생활을 16년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죽음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첨가할 수도,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완강한 고집, 성급함, 갑자기 폭발하는 분노, 충동성과 너그러움과 개방성의 부족등 모든 인간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기독교권의 위기에 나타난 영적 거인이었다.”

19세기의 온건한 회의론자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칼빈은 당대 제일의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만약 칼빈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사실과 다르거나 혹은 너무도 막연한 판결이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1536년에 시작된 칼빈의 종교개혁은 한때 실패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개혁 운동을 전개함으로 1555년에 이르러서는 어느정도 그 틀이 잡히게 되었다. 성경이 가정, 교회와 국가 영역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고, 인간적인 권위는 사라지고 성령의 지도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개혁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는, 제네바는“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였다. 나는 다른 곳에서 전례를 본 적이 없다.”고 기술하였고, 영국의 개혁자 존 베일은“제네바는 내게 놀라운 비밀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가난 가운데서도 살 수 있는 성소와 같았다.”고 증언했다.

 

5. 종교 개혁 운동의 확산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 운동은 칼빈과 파렐의 고국인 프랑스에도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16세기 중반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절정에 이르렀으며,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 중엽부터 칼빈의 제자들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종교개혁의 성공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개혁주의 국가가 되었다.

1) 프랑스의 개혁 운동

프랑스의 개혁 운동을 세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초기의 개혁 운동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들은 로마 교황이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프랑스 왕에게 양보하기로 조약을 맺은 1516년부터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로는 르페브르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연대적으로는 1536년부터 1560년까지로, 칼빈의 영향을 받은 위그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프랑스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시기이다. 마지막은 박해와 살육의 시기로 1560년 이후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1) 칼빈 이전의 개혁 운동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파베르 스타풀렌시스(Faber Stapulensis)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르페브르(Jacque LeFevre d''Etaples, 1450-1537)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중세의 신비주의를 수용하여 제도적인 로마 천주교회에 도전하였다. 신비주의는 파커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믿음이었고 성경을 푸는 열쇠였다. 그는 신비적 신앙을 통하여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것이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을 1512년 출판한‘바울 서신 주석’에 진술하였다.

르페브르는 1522년에는‘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그는 1523년 프랑스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백성들 가운데 널리 보급하여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었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져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루셀(Gerard Roussel),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등이 있었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성경 중심적 사상에 감화를 받은 후,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로마 천주 교회의 고질적인 악습, 분별 없는 성인 숭배와 성물 숭배를 비판하였고, 성부와 성령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정죄하였다.

인문주의적인 개혁 운동은 급진적인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개혁 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브리소네는 소르본느
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국외로 떠났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Francis I)와 그의 누이 마르그리트(Marguerite)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통치권이 약해지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복음주의자들을 박해할 것을 요청함으로, 무력한 왕은 교회 당국의 압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르그리트의 딸 쟌느 달베르(Jeanne d’Albert)는 개혁운동을 지지하였고, 그녀의 아들인 나바르의 앙리(Henry of Navarre)는 개혁 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153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개혁에 대한 과격한 주장들이 나타났다.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는 1534년 10월 18일에‘플래카드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고, 수백 명의 개혁자들이 투옥되었고, 35명이 화형을 당했는
데, 그 가운데에는 칼빈의 동생과 칼빈의 친구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도 끼어 있었다. 박해가 심해지자,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피신하여야만 했다.

박해로 인해 피난민이 늘어나자, 프랑스 당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심지어 로마 교황 바울 3세도 프랑수와 1세에게 비인간적인 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내적, 외적인 압력에 직면한 프랑수와는 1535년 7월 15일 꾸시 칙령(Edict of Coucy)을 선포하여 개혁자들에게 종교적인 관용을 허락하였다. 왕은 누구라도 개혁 사상을 철회하고 귀국하는 자는 용서할 것이며, 쯔빙글리파를 제외하고는 박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지 않았고, 개혁자의 진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
다. 실책을 깨닫게 된 프랑수와는 결국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고 박해를 택하였다. 그는 1540년 개혁자들을 재판하고 처형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1545년에는 추기경 프랑수와드 뜨르농의 주장대로 왈도파 교인 3,000명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박해가 한창 전개되던 1546년 모(Meaux)에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으나,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2)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

칼빈은 제네바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동족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1536년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를 그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고, 프랑스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국가로 개혁될 것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수많은 개혁자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복음적인 신앙에 호응하거나 이미 복음 편에 서 있는 시민과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개혁 운동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나바르의 앙리(Henny of Navarre), 콩드의 왕자(Prince of Conde), 콜리니 제독(Admiral Coligny) 등에게 서신으로 개혁 운동을 독려하였다.

1547년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리 2세(Henry Ⅱ, 1547-1559)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심해졌다. 프랑스 전역에 있는 성직자들, 종교재판소, 세속 법정, 최고 법원까지 동원하여 종교 개혁자들을 색출하고 투옥시켰다. 특히 최고 법원인 빨레망(Parlement)은 500여명의 개혁자들을 화형에 처하여 ‘불붙는 방’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앙리는 1551년 싸
토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서로 정하였고, 개혁자들이 화형 당할때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성장하였다. 1550년경부터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칼빈의 제자들이 귀국하여 브르조와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농민보다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아갔다. 무지와 미신 가운데 살던 농민들은 무지하여 개혁 운동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으나,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위그노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수풀, 들, 동굴 또는 인적이 없는 시골에서 예배를 드렸다. 위그노들은 목사의 지도없이 개인의 집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를 위하여 모이기도 했다. 파리에 사
는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사람은 유아가 로마 천주교 신부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것보다는 기독교 목사에 의해 세례 받기를 원하였으나, 파리에는 기독교 목사가 없어 300마일이나 떨어진 제네바에 가야만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페리에는 1565년 9월 동료들과 함께 모여 조심스럽게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타진한 후, 회중 가운데서 목사, 장로, 집사들을 선택하고, 목사로 하여금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안에 칼빈주의적인 교회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인 수가 많아지자, 위그노 지도자들은 제네바에 있던 칼빈에게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것을 요청하였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일꾼들이 칼빈의 사촌 올리베땅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 제네바에서 출판한 시편, 칼빈의 글들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모(Meaux), 뿌와띠에(Poitiers), 부르쥬(Bourges), 뚜르(Tour)와 같은 지역으로 퍼져 갔고, 교회마다 제네바에서 훈련을 받은 목사들로 채워졌다. 참신한 목사들이 교회를 담임하게 되자, 지도적인 사회 인사들이 속속 교회로 돌아왔다.

1559년 앙리 2세가 사망하고, 그 해 3월에는 샤토 칼브레지(Chateau Cambresis) 평화 회의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프랑스의 캐더린 메디치(Catherine de’Medici), 영국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태리를 손아래 넣으려던 프랑스의 노력이 실패하자, 프랑스 왕실은 국내 문제 해결에 주력하면서 교회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개혁 교회의 교인들은 굳건한 조직체를 구성하여 힘을 키워 나아갔다.

개혁자들은 1559년 파리에서 최초의 전국 대회를 결성하였다. 대회 조직 구상은 이미 1557년 크리스마스에 칼빈의 제자인 앙뜨안드 샹듀(Antoine de Chandieu) 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그는 뿌와띠에를 방문하여 개혁 교
회가 성장하려면 대회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샹듀의 노력으로 1559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파리에서 50여 개의 교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개최하였다.

파리 대회는 앙뜨앙느 샹듀의 ‘신앙고백’과 ‘권징 규칙서’를 프랑스 교회의 신조와 헌법으로 채택하였다. ‘신앙 고백서’는 칼빈의 ‘35개조 신조’, ‘권징 규칙서’는 ‘기독교 강요’와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 교회의 모형을 따라 작성되었다.

위그노 운동은 교회의 조직과 함께 프로방스(Provence), 도핀느(Dauphine), 노르망디(Normandy), 오르레앙(Orleances), 나바르(Navarre)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1561년경부터 공개적으로 회집할 수 있었고, 목사들은 매주 4회 이상 공적으로 설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종교 개혁이 번성하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가까운 리용(Lyon)과 부르타니(Brittany)에서 더욱 흥왕하였다.

(3) 종교적 갈등 시대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1559년 박해자 앙리 2세의 죽음은 프랑스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였다. 앙리의 죽음으로 프랑스 안에서 개혁주의 운동이 힘있게 전개되자, 칼빈은 잘 훈련받은 목사들을 보냄으로 개혁 운동을 후원하였다. 1555년부터 1572년 사이에 칼빈에 의하여 훈련된 120명 이상의 설교자들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572년 캐더린 왕비의 명령에 의해 작성된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에는 2150개의 개혁 교회와 150만 여명의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캐더린이 교황에게 보고한 것처럼 “그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서,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여 나간 자들을 창이나 칼 법률로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게되었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위그노와 로마 천주교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다.

앙리 2세를 이어 프랑수와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고, 그의 아우 샤를르 9세(Charles Ⅸ, 1560-1574)가 왕위에 오르자, 캐더린은 직접 섭정에 나서서 진보적인 인물 미쉘 드 로피탈(Michel de L''Hopital)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였다.

로피탈은 1562년 위그노에 대하여 관용적인 정책을 펴도록 캐더린 메디치를 설득하였다. 기즈 가문에 대항하던 세력이 위그노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자, 캐더린은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1560년 1월 생 제르멩 앙 레이(St. Germain-en-Laye)에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위그노의 실체를 인정하였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에서 캐더린은 위그노들이 점령하고 있는 교회당들을 반환할 것을 명령하였고, 위그노의 예배는 도시 밖에서 허용되며, 도시 안에서는 개인 집에서만 가능하다고 명시하였다. 칙
령이 발표된 지 2개월이 채 안되어 로마 카톨릭 측이 칙령의 준수를 거부하면서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의 종교적 내분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다.

로마 천주교회 측은 스페인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뒤, 기즈 가문의 사람들과 합세하여 위그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1562년 3월 샹퍄뉴 지방의 바시(Vassy) 계곡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습격하여 300명 이상을 살해하였다. 위그노들은 콜리니 제독, 나바르의 앙리와 콩드를 중심으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1월에 여왕이 선포한 칙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캐더린과 샤를르 9세를 종교개혁에 반대하던 기즈 가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썼다. 한편,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지교회 책임자를 대위, 노회의 책임자를 대령, 각 지역의 최고 책임자를 장군으로 세우도록 하여 교회를 군사 조직화 하였다.

내란의 조짐이 일어나자, 캐더린은 위그노를 진압하기 위해 스위스와 독일 출신의 용병들을 고용하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위그노들은 오를레앙, 리용과 같은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개혁 운동의 거침돌이 되던 기즈 가문의 프랑수와 공을 살해하였다. 전쟁을 통해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없음을 깨닫자, 위그노와 프랑스 정부는 1563년 암보아즈 평화조약(Peace of Amboise)을 맺음으로 휴전을 선언하였다.

암보아즈 조약으로 칼빈주의적인 귀족들은 그들의 지역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일반 시민들도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과 콜리니는 이러한 화해의 내용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교황과 샤를르 9세 역시 불만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1567년 전쟁으로 이어져, 위그노 지도자 콩드는 3만 명의 위그노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569년 3월 자느낙(Jarnac) 전투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내란의 와중에서도 위그노들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1564년에서 1572년 사이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칼빈의 교회 정치 사상
을 받아들임으로 장로 정치를 채택하여 분열의 위기를 넘겼다. 점차 교회가 안정되면서, 개혁 교회의 교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두메르쥬(Emile Eoumergue)의 통계에 의하면, 1572년 당시 프랑스 인구 2000만 가운데 300만이 위그노가 되었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가자, 캐더린은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살인 계획이 폭로되자, 위그노들이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여 캐더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위그노에게 사과하거나 그들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뿐이었다. 캐더린은 콜리니 만이 아니라 모든 위그노들을 처치할 음모를 세우게 되었다.

캐더린은 그의 딸 마르그리트와 개혁 교회의 지도자 나바르의 왕자 앙리를 결혼시킴으로 음모를 실천에 옮겼다. 두 사람의 결혼이 선포되자, 로마 천주교인들과 개혁 교회 교인을 막론하고,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내란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올 것을 예견하였다. 종교 전쟁의 종식을 기대하는 수많은 인파가 결혼 축하를 위하여 몰려들었으나, 축하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살해 극이 시작되었다. 캐더린 메디치가 샤를르 9세에게 1572년 8월 24일 바돌로뮤 축제일 밤에 생 제르멩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모든 위그노를 살해하도록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인자들은 교회당 주변을 포위하여 결혼 축하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전멸하였다. 콜리니를 비롯하여 약 30,000명에서 70,000명의 위그노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 운동을 벌이던 위그노의 개혁 운동은 기가 꺾였으나, 원수들은 축배를 높이 들게 되었다. 캐더린은 “하나님과 샤를르 9세에게 반항하던자들을 깨끗이 소멸시켰다”고 부르짖었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며 축하하였고, 기념 메달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2)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은 루터란 시대(1520-1525), 성례주의자 시대(1525-1530), 재침례주의자 시대(1530-1540)를 거쳐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은 카를 5세가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을 억누르면서 더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카를 5세는 1550년 네덜란드에서“루터, 외코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부쳐, 칼빈과 혹은 거룩한 교회가 이단으로 지정한 자들의 책이나 글을 인쇄하거나 보급하는 자를 화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경건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는데, 1561년에는 100,000명이 넘는 개혁자들이 단지 성경적인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카를 5세의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운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네덜란드 전역으로 번져 나아갔다.

1543년 칼빈은 황제인 카를 5세에게 종교 개혁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저들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개혁 운동을 계속하여 밀고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나 기타 다른 이적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개혁 역시 하나님의 역사이며 단지 인간들의 소망이나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를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호의를 가지고 협력하기를 기다리거나 상황이 면하기만을 고대하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절망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우리가 물을 일이 아닙니
라고 하였다.

카를 5세는 신교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자신이 신교를 용납하는 것은 1세기가 넘는 동안 자신의 왕조가 충성해온 로마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칼빈주의적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칼빈의 직접적인 노력의 결과로, 그는 스트라스부르그나 제네바에 있을 때에도 네덜란드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곤 하였다.

칼빈의 네덜란드인에 대한 관심은 그의 가족적인 배경에 기인하였다. 칼빈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국경 지대에서 살았고, 그의 아내 이델레트는 네덜란드 남부 왈룬 사람으로 리제에서 첫 남편과 스트라스부르그로 피난 왔던 재침례교도였다.

칼빈은 네덜란드 출신의 개혁자 요한 스트룸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였고, 네덜란드에 편지 또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애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1543년 친필로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있을 때 복음 진리를 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될 것을 보여주는 소논문’을 써서 네덜란드의 교회 개혁을 고무하였다.

1544년에는 네덜란드의 복음화를 위하여 설교자 피에르 브룰리를 파송하였고, 1545년에는 라틴어 교리문답을 써서‘동 프리슬랜드 전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에게’헌정하였다.

칼빈의 제자 기오도 드 브레스(Giodo de Bres, 1522-1567)는 1561년 네덜란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위해‘벨직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개혁주의 신앙과 재침례파의 신조와의 차이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1571년 엠덴에서 열린 네덜란드 개혁 교회 총회에서 가장 성경을 잘 해석한 신앙고백서로 인정받았으며, 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37개조 신조로 개역되었다.

1563년 4월 23일 투코잉(Turcoing)에서 네덜란드 최초의 대회가 조직되었고, 그 후 교회의 성장과 함께 여러 지방에서 대회와 전국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1568년 베셀(Wesel)에서 전국 대회가 열렸고, 2차 대회는 1571년 엠덴에서 개최되었다. 엠덴 대회는 교회 정치와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네덜란드 교회의 신앙적 성격을 결정하였다. 엠덴 대회에서 네덜란드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의 의무와 같은 교회의 직제, 그리스도인의 결혼, 가정 문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성례를 시행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교회 행정 문제를 논하면서, “어느 교회나 어느 목사, 장로, 집사라 할지라도 다른 교회나 다른 목사, 장로 집사를 지배하거나 우월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여 평등의 원리를 채택하였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위해 제네바 교리문답서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인을 위해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2)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신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교회는 알미니우스 논쟁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알미니우스는 1560년 네덜란드의 오우더바터(Oudewater)에서 태어나 개혁주의 신앙 가문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우트레흐트와 마르부르그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가운데 그의 친척들이 스페인 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테르담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레이든 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로 가서 베자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587년 암스텔담으로 돌아와 이듬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589년 교회 당국으로부터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던 쿠른헤르트(Dirk Coornhert)의 글을 논박하고 칼빈의 예정론을 변호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쿠른헤르트의 글을 읽는 가운데 그의 주장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침묵하였다.

알미니우스의 자유주의적 신학은 1590년에 가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로마서 7장과 9장의 예정 교리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태 중에 있는 자의 구원 문제와 창세 전에 인간의 구원이 예정되었다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관심을 끌
지 못하였다.

알미니우스는 1603년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뒤를 이어 레이든(Leiden)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를 휩쓴 전염병으로 유니우스를 비롯한 레이든 대학의 교수들이 병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알미니우스는 전염병이 만연할 때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민들을 간호한 일로 인정을 받아 레이든 대학의 신학 교수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잘 알고 있던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가 그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알미니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다.

고마루스는 부르게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그, 노이스타트,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하이델베르그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587년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네덜란드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1594년 레이든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고마루스의 지적에 대하여,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타락 후 예정론자(Infralapsarian)라고 밝히면서, 고마루스를 당시 소수에 불과하던 타락 전 예정론자(Supralapsarian)라고 비난하였다. 1608년에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감상적 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s)이라는 책을 통하여 표명하였는데, 그는 이 책에서 ①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
스도를 임명하기로 작정하였고, ②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한 모든 자를 용납하시며 구원하시고, 완고한 불신자들을 유기하기로 작정하였다. ③ 회개하고 믿는 자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④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들이 끝까지 믿고 참을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알미니우스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발전되어 온 예정 교리를 부인하고, 사람의 수납 여부에 따라 구원이 주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곧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이지 결정적이게 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구원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은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알미니우스에 의해,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예지에 있게 되었다.

1610년 위텐보개르트(Uytenbogaert)를 중심으로 한 46명의 알미니우스주의자자들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고우다에 모였다. 그들은 오랜 토론 끝에 ‘항거’((Remonstrance)라는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개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를 믿고 순종할 자들을 단체로 선택하셨다. ② 그리스도는 만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③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④ 그러나 인간이 그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 ⑤ 성도의 견인에 대한 교리는 모호하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을 항론파(Remonstrance)라고 일컫게 되었다.

당시 정치 지도자였던 모우리스는 당면한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618년 11월 도르트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제외하고는 개혁 교회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에큐네미칼적인 교회 회의였다. 모우리스는 회의에서 논쟁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영국, 독일, 스위스, 제네바와 같은 서구 여러 나라의 개혁주의자들을 초청하였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토론에 참여토록 주선하였다.

도르트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던 개혁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 사상의 위험성을 지적한 다음, 항론파의 항론에 근거한 개혁주의 교회의 입장을 천명하고, 그에 대항하는 교리를 확정함으로써 칼빈주의 5대 강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와 속수무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가 가진 생래적인 빛은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Total Depravity). ② 선택의 기초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않고, 창세 전부터 섭리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목적 위에 이루어졌다(Unconditional election). ③ 그리스도의 속죄 효과는 택자에게만 미친다(Limited Atonement). ④ 중생은 영혼과 의지의 내적인 갱신이며 강력하고 놀랍고 즐겁고 신비하고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이다(Irresistible grace). ⑤ 하나님은 택자들의 회개와 인내와 겸손과 감사와 선행을 새롭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존하셔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신다(Perseverance of the saints).

도르트 회의에서 알미니우스 신학을 대변한 신학자인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는 도르트 회의에서 정죄를 받고 알미니우스 추종자들과 함께 쫓겨나 벨기에로 갔다.


(1) 튜더 왕조의 개혁 운동

종교 개혁이 일어날 즈음에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잉글랜드는 튜더가,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 상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적어도 17세기 초까지는 계속될 참이었다.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그런
관계였다.

잉글랜드 왕 헨리 7세는 자신의 큰아들 아더를 스페인의 공주 아라곤의 캐더린(당시 15세)과 결혼시켰다. 하지만 아더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은 이 어린 과부를 둘째 아들인 헨리와 결혼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우호 관계를 감안해서 몇 년 뒤 재혼이 성사되었으니 헨리는 12세였고, 형의 부인은 19세였다.

본래 교회법은 형수와의 결혼이 금지되었기에 교황은 특별 윤허를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별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교황에게 교회법을 중지시키고 형수와 결혼하게 할 권한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결혼의 합법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1509년 헨리는 부왕의 뒤를 이어 헨리 8세가 되었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르네상스 가정 교사들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고, 외국어 실력도 뛰어났다. 신학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다. 운동 선수였고, 사냥을 즐겼고 승마를 잘했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우상처럼 대접받고 성장해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고집이 셀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기질들을
발휘해서 종교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캐더린과 사이에 딸 메리 외에 더 이상은 자녀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후계자가 될 왕자를 얻기 위한 헨리의 노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그는 앤 볼린이라는 처녀와 연애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요청하여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처음부터 교회 법에 어긋나게 억지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니 진정한 결혼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런 결혼 무효 칙령은 교황으로서 드문 일이 아닌 오히려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카를 5세의 숙모를 이런 식으로 폐위시키고 이 황제와 원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지연시키기만 하였다. 교황 측에서는 그저 비밀리에 첩을 두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권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헨리는 자기의 뒤를 이을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필요하였다. 헨리
의 자문인 크랜머는 당시 중요한 대학에 편지를 보내서 상의해 보았다. 그들 모두 처음부터 이 결혼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는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성직자들을 국왕의 지배 아래 두었다. 하지만 그가 개신교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서처럼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교황의 세력을 막아서 왕의 권리를 높여 보자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루터에 대항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루터의 사상은 영국에 밀려들어 이전의 위클리프의 사상과 연합하고 있었다. 개신교를 추종하는 이들은 왕과 교황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본래 위클리프는 세속 통치자가 교회를 감독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정책은 이것과 같았다. 여
러 가지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헨리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자문인 크랜머는 그런 식의 개혁을 갈망하였다.

헨리는 캐더린과 비밀리에 이혼한 지 6년이 된 1533년, 비밀리에 앤 볼린과 결혼하였다. 앤이 임신한 것이 확실하자 태어나는 아기의 합법성을 위해서 크랜머 대주교는 두 사람의 결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공포하였다. 앤이 정식으로 여왕이 되자 곧이어 헨리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는 1534년 지존법을 통해 교회에 대한 왕의 통치권을 선포하고 교황청으로 가던 모든 헌금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은 단지 교황에 대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개혁은 멀고도 먼 길이었다. 개혁의 주동자는 역시 토마스 크랜머였다. 그는 왕을 움직여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헨리를 절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왕을 통한 영국의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종교개혁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의 관
심은 정치적인 이익이었다. 신앙 문제는 전통적인 교리 그대로
보수적으로 신봉했다.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종교 문제는 단지
정치 문제의 변화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지 로
마와 관계를 끊고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
고 있었다. 신학이나 예식의 개혁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
지않았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가톨릭 교도로 남아 있었다.

1536년 개혁 의회는 헨리에게 수도원을 탄압하도록 요청하였다. 수도원들이 왕의 강압에 의해 해산됨으로써 가톨릭의 전위대는 사라졌다. 대신 왕실의 연간 수입은 10만 파운드 이상 증가하였다. 수도원에 속했던 토지를 손에 넣은 신흥 귀족들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왕에게 대한 충성심도 그러하였다.

그후, 앤 볼린도 딸만 하나 낳았기에 캐더린보다 나은 입장이 못되었다. 1536년 캐더린이 죽은 해에 앤 볼린은 간통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다. 그 후 제인 세이모어가 왕비가 되어 에드워드 6세를 낳았지만 일년도 못되어 사망하자 헨리는 네 번째 신부로 앤을 맞아들인다. 몇 년 뒤 그녀와도 이혼하고 캐더린 하워드와 결혼하였으나 다시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 마지막 캐더린 파르와 결혼하여 5년을 더 살고 헨리는 힘든 일생을 마쳤다.

(2) 에드워드의 종교 개혁

에드워드는 건강 면에서는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병약했다. 12살에 즉위한 그는 겨우 6년을 더 살았다. 그의 재위 기간 처음 3년은 서머셋 공작이 그를 도와 섭정하였다. 이때 종교 개혁은 큰 진전을 보았다. 개신교식으로 평신도들에게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가 주어졌다.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고 여러 가지 성상들은 철거되었다. 공동 기도서가 만들어짐으로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나라말로 된 예배 의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머셋과 함께 크랜머도 조심하면서 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였다다. 성경의 출판, 판매, 주석에 대한 모든 제한은 철폐되었다. 이로 인해서 에드워드의 재위 기간 중 개신교도들의 발언권은 강화되면서 높아지고 있었다.

서머셋의 뒤를 이은 노섬버랜드 공작은 더욱더 극단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크랜머는 대륙의 개혁자들을 초청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마틴 부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1551년 이곳에서 죽었다. 존 낙스도 왔다. 기타 유럽 전역의 저명한 개혁자들이 영국에 왔다. 특히 라스코라는 목사는 칼빈과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신자로서의 생활과 품성 계발에 역점을 두어 목회하였다. 5천 명 가량의 신자가 그를 따랐다.

(3) 피의 여왕 메리의 반 개혁 운동

553년 에드워드가 죽자 캐더린에게서 난 메리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에드워드드 시대의 개혁은 끝이 났다. 메리는 영국을 자기 어머니의 종교로 되돌려 놓으으려고 굳게 다짐을 하였기 때문이다.

메리는 여왕이 되자마자 에드워드 시대의 개신교 관리들을 모조리 축출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주교들을 복직시켰다. 스페인 왕 필립 2세와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지자 개신교에 대한 탄압에 온 정력을 다 쏟아서 ‘피에 굶주린 메리’로 불리게 되었다. 존 로저스, 휴 라티머, 존 후퍼 등 저명한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죽음을 당하였으며, 약 300명 가량의 목회자들이 1555년 2월에 옥스퍼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불길이 이들을 덮치기 시작할 때에 라티머(Latimer) 주교는 리들리(Ridley)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를 하였다. “리들리 경, 담대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또 훌륭한 개혁가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회유를 견디지 못해서 압제자의 요구에 서명하고 취소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하다가 결국 1556년 3월에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1556년 3월 21일 토요일 아침, 옥스퍼드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장작이 쌓여졌다.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가 행해졌는데, 궂은 날씨였기 때문에 만장한 대학의 교회당 안에서 설교가 행해졌다. 거기에 작은 단이 세워지고 그 위에 크랜머 대주교가 올라섰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는 청중들에게 자기가‘거룩한 어머니 교회’(holy mother Church, 즉 가톨
릭 교회)로 전향한 사실을 공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 옛 신앙을 반복·재확인하는 선언을 했으며, 자기의 손이 자기 중심의 뜻과는 달리 잘못된 사실을 서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내 손이 맨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나의 손부터 태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교황에 대해서는“그의 모든 거짓 교리와 더불어 적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단언하였다. 사제들은“저 이단의 입을 막아라.”고 소리쳤다. 주변의 구경꾼들도 그가 틀림없이 미쳤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곳 교회로부터 뛰어나와서 이미 맹세했던 대로 오른손부터 불 가운데 집어넣었다.

또한 후퍼는 복장으로 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의 복장”이며“우상에 바친 음식”과 같다고 비난한 일로 인하여, 1553년 로마 천주교 신앙을 따르던 메리 여왕의 등극과 함께 투옥되었고, 1555년 2월 9일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에 처하여졌다.

그가 처형당하기 직전 그를 방문한 한 사람이‘살아 있는 것은 즐겁고 죽음은 두려운 것임’을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가 여왕에게 굴복한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죽음이 두렵고 살아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아는 바이오. 그러나 내세의 죽음은 훨씬 더 두려운 것이며, 내세의 생명은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올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갈망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알고 있소. 나는 이 땅에서의 죽음이나 생명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소. 단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부인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내 앞에 놓여 있는 불타는 고통을 잘 견뎌 내기를 바랄 뿐이오.”

1554년 말 잉글랜드는 교황에 대한 충성을 다시 서약하였다. 헨리와 에드워드 시대에 내려졌던 여러 가지 조치들이 대부분 철회되었다. 결혼한 성직자들은 아내들을 내보내야 했다. 성자들을 위한 여러 축일들도 다시 회복되었다. 얼마나 많은 개신교도들이 해외로 도피했는지 모른다. 무서운 공포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메리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1558년 메리는 그의 잔인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4) 엘리자베스의 중용적 종교 개혁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 기간은 4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전체는 완전한 개신교의 나라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앤 볼린의 딸로서 개신교도였음에 틀림없다. 메리 치하에서 그녀는 개신교도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그녀는 커가는 개신교도단에 의해 그들의 옹호자로서 환호를 받았으며, 망명자들은 대륙으로부터 서둘러서 돌
아왔다. 그녀는 외교적인 수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과의 외교관계가 없었으며 예식 없이 로마에 있는 사절을 철수시켰다. 1558년 성탄절에 그녀는 칼라일의 주교에게 성체거양(聖體擧揚)을 못하도록 명령했고, 복음을 따라 그 교회를 떠났다.

1559년 1월 25일 의회 개회 때, 그녀는 당당하게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촛불, 향 그리고 성수(聖水)를 든 대수도원장과 수사들에 의해 영접되었고, “우리가 잘 볼 수 있으니, 그 횃불들을 치워라”고 말함으로써 수사들
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개신교 설교가들을 불렀고, 개신교도 귀족들, 특히 이전의 서머셋의 주장관인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이 그녀 주위를 에워싸게 했다.

이와 같이 엘리자베스는 출생, 교육 그리고 신념에 의해 개신교도임에 틀림없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개혁에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중용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이상은 영국을 주변 국가의 위협과 침입으로부터 막아내고 단시일 내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와 같은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는 민족의 총체적 통일과 단합을 도모하는 것이 그녀에게
는 급선무였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문제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은 중간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존 낙스는 그녀에 대해서 평하기를“확실히 교황주의자는 아니지만 훌륭한 개신교도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1559년 4월 29일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선포하여 그녀가 국가의 최고 책임
자임을 선언하였다.

영국 의회는 엘리자베스의 정책을 수용하여 수장령을 통과시키면서, “영적이나 세상적인 모든 외국의 침략적 권세와 권위가 이 나라 모든 영역에서 영원히 종식되고…무력화 시키는 것이 폐하의 뜻”이라고 선언하였고, 어떤 사람도 국
왕의 뜻에 반하는 법률, 법령, 관습, 제도를 주장할 수 없도록 조처하였다. 종교적 결정은 왕권에 위임하도록 하였고, 교직자나 왕의 녹을 받는 행정 관료는 그들의 신분 위엄, 권세에 상관없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도록
하였다.

“나는 양심을 걸고, 여왕 폐하가 영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이 나라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서약합니다. 따라서 외국의 군주, 성직자, 권력자, 또는 외세가 이 땅에서 교회적으로나, 영적으로 지배권, 권력, 통치권,
통솔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든 외국의 지배권, 권력, 통솔권 등을 부인하며, 그들에 충성하지 않으며, 이후로는 여왕과 그 후손과 합법적인 승계자에게만 진정한 충성을 바칠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렇게 해서 헨리 8세의 모든 권한이 엘리자베스에게 주어졌다.

한편 로마 교황청에서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파문을 미루다가 1570년 2월 25일 교황 피어스 5세에 의해서 발동시켰다. 심지어는 암살까지 허용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맞서서 엘리자베스는 반교황법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더 나아가서 1585년에는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반대자에 대한 처벌은 엘리자베스의 45년 통치 기간에 221명이나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로마 교황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의 개혁과 더불어 뿌리를 내린 영국 국교회는 엘리자베스의 대외 전략에 맞추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하게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어느 쪽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 모범과 교교회 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은 많은 개신교도들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재위 기간에 그녀의 종교정책에 대하여 비판하는 청교도인 수는 더욱 증가했다. 이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순수한 신앙생활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였고 정책적으로도 이것이 반영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좀더 순수한 개혁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에게 청교도(Puritans)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5) 청교도 운동


① 엘리자베스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은 1570년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때부터 가톨릭은 영국에서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성공회) 안의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 추방당하거나 망명한 이들, 또 자발적으로 제네바에 가서 대륙의 개혁 교회 신학을 배웠던 이들은 엘리자베스 시대가 오자 대거 귀국해서 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영국을 제네바처럼 거룩한 도시로 만들기 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혁 신앙이나 설교를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목회에 별 관심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종교 행사는 국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를 것을 선언하였다. 그녀는 가톨릭과 방불한 여러 가지 의식들을 통해서 영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성경대로 확실한 종교 개혁을 진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불만이었다.

청교도들이 논쟁에 나서게 된 것은 성직자들이 예배드릴때 입는 예복 문제부터였다. 성직자들이 가톨릭의 신부들처럼 입는 것을 불평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줄 때 성호를 그린다든지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행위, 종교 축일이나 휴일이 너무 많은 점,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 심지어는 결혼식할 때 반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가톨릭의 잔재라고 비난하였다.

청교도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청교도로 불린것은 그들이 신앙의 순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파들은 감독 제도만 반대하였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인들은 장로회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질 것을 요구하였다. 분리파들은 국가와 교회가 분리됨은 물론 교회와 교회도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에는 침례를 주장하는 침례파도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비롯한 청교도 지도자들은 1572년, 성공회식 감독제도 대신에 장로교식으로 조직을 개편하자고 주장하였다.

카트라이트는‘대주교와 주교의 명칭 및 직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감독(목사와 장로를 의미함)과 집사직을 두어야 한다. 감독은 순수하게 영적 기능만을 발휘해야 하며 집사는 빈자의 구제에만 종사해야 한다.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는 지교회를 가져야 하며 신도를 거느려야 한다. 목사의 인사와 주교의 임명에 있어서 주교 한 개인의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지교회의 선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교회정법의 권위를 목사와 장노회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친 교회 체제를 따라서 당회를 조직할 것과 회중들이 목회자를 위임할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배 형태도 거의 외형상 가톨릭과 비슷한 예배를 대폭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결코 혁명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왕과 주교들은 이러한 주장들이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즉시 처벌이 내려졌고 카트라이트 교수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자 1572년부터 1574년까지 2년간 제네바로 가서 직접 칼빈주의 개혁운동을 목격하면서 당대의 개혁가들과 교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하 운동은 계속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서운 벌을 가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운동을 근절하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지하 조직책들이 색출되면서 장로교 운동은 1592년 경 일단 수그러들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단 국교에 머물면서 왕에게 충성하며 개혁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칼빈도 영국 성공회의 체제를 특별히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인사들이 천대를 받으면서도 국교회에 계속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좀더 과격한 청교도들도 있었다.

최초의 분리주의자는 캠브리지에 거주한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었다. 이들은 국교회를 떠나기를 주장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독립파 또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었다. 1580년경 브라운은 노르위치에 이러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분리주의는 재침례파처럼 급진적인 형태였다. 정부는 놀라고 진노하였다. 이들에 대한 박해는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 대주교를 바꾸었다. 확실하게 자기 명령대로 집행하는 이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휫기프트(Whitgift)가국교회에서 벗어나려는 청교도들을 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1583년 그는 청교도들이 국가의 질서에 순응해야 할 것을 선언했다. 그 해 발표된 6개 조항은 교회에서도 국왕의 수장령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를 거스른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200여 명의 교구 사제들이 그 직에서 쫓겨났다. 1586년에는 신학서적을 검열하여 극단적 청교도들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런 일들 때문에 여왕이 가톨릭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때때로 그녀는 동정녀에게 기도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에 이런 억측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② 제임스 1세 시대

1603년 엘리자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헨리 7세의 증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단리 경(Lord Darnley)의 아들인 제임스 1세(1603-1625)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제임스 6세)이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제임스를 통하여 비로소 연합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을 다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그를 항상 외국인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자베
스 치하에서 세력이 강해진 상인 계급은 귀족만을 우대하는 제임스를 싫어했다.

제임스 왕은 요한 낙스(John Knox)와 조지 부커넌(George Buchanan)과 같은 이들로부터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에 오자 국교회의 원리를 받아들였고 감독들과 대주교를 존경했다.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에 대한 더 많은 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1063년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천 명의 성직자들이 교회 개혁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청교도 목사들은 교회 내 가톨릭적 요소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영국도 스코틀랜드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듬해 회의를 소집했다. 왕이 의장인 회의에서 청교도들이 장로교에서 쓰는 ‘노회’라는 말을 사용하여 왕을 화나게 했다. 감독들이 장로가 되면 왕은 물러나야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회의는 중단되었다. 곧 300명의 성직자들이 국교회에서 직책을 박탈당했다.

제임스 왕은 이 때부터 왕권의 사도적 계승과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1604년 로마 천주교회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는 등 반개혁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처럼 회의는 중단되었지만 전혀 쓸데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이 새로운 성경 번역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1611년 소위 흠정역이란 성경이 나왔다. 요즈음에‘킹 제임스’역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 나온 번역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모든 계층 사람들이 읽었다. 여기의 표현들은 영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청원이 왕에 의해 거부되자, 교회 개혁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 개혁을 막는 영국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 교회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신학 전통에 서 있어서 영국 교회 안에 교회의 표지가 있는 한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교회의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야곱(Henry Jacob, 1563-1624)을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은 그릇된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분리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회중에 의한 각 지교회의 목사 선택, 정책 결정에 있어서의 지역 교회의 자율성,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등 등을 내세워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로버트 브라운의 분리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와 감독들의 입장은 청교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의회에 점점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은 얼마간의 국정경험이 생기자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금을 새롭게 더 부과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 1614년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구성된 의회는 전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은 세금만으로 버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주교들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토와 왕위를 빼앗긴 개신교도 보헤미아 국왕 프레드릭은 그의 사위였다. 그러나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민들에게 비겁자로 보였다.

더 나아가 제임스는 태자를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계획하였다. 황제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청교도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이었다. 제임스는 재정의 압박으로 두어 번 더 의회를 소집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청교도 지도자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③ 찰스 11세와 내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찰스 1세였다. 그도 아버지처럼 왕실의 강력한 중앙 집권을 원했다. 그러므로 의회와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다. 결혼을 위해서 영국의 가톨릭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 왕비와 수행원들은 가톨릭으로 의식을 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왕비는 구약의 음녀 이세벨로 비유되며 영국민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청교도적이던 의회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찰스는 계속 모든 문제에서 의회와 충돌하였다. 1629년 그는 의회를 무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11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물가는 오르고 귀족들만 입장이 좋아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자문인 윌리엄 로오드(Lau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다. 그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국교회에 대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형벌을 마련하였다. 큰 벌금을 부과하고 뺨에 선동자의 약자를 낙인으로 찍는 것이었다. 그밖에 귀를 자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1645년 이러한 형벌을 받은 법률가 한 사람이 꾸민 조서로 말미암아 처형을 당하게 된다.

영국의 국교회를 장악한 로오드는 스코틀랜드에도 자기의 정책을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강력한 장로교를 시행하고 있었다. 1637년 그는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도 읽도록 명령을 내렸다. 반박은 즉
각적이고 강력하였다. 두 지역은 즉각 전쟁 상태가 되었다.

찰스 왕은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재정난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의회를 소집하였다. 소집된 의회는 왕의 뜻에 대항해서 왕을 독재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로오드를 체포하였다. 왕은 의회에서 자신에게 항거하는 주동자들을 체포하려고 몸소 부하를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늦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1642년부터 6년간 의회파와 국왕파는 전쟁을 하였다. 국왕을 지원한 이들은 귀족들이었고 의회를 지원한 이들은 그 동안 고통을 겪어 온 계층들이었다. 양측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전투는 아
직 일어나지 않았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왕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모든 청교도 분파는 단합하여 왕에게 대항했다.

이 와중에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보조를 같이 하기 위해 감독 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신앙 문제에 자문을 담당할 수 있도록 신학자들을 소집했다. 이것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minster Assembly)이다. 여기에는 의회에서 임명된 121명의 성직자, 30명의 평신도 그리고 8명의 스코틀랜드 대표들이 참석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의회와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 법령은 1644년 실행에 옮겨졌다. 다음 해에는 윌리엄 로오드가 처형되었다. 차츰 전투가 시작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역사의 앞
부분에 나타났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청교도가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있었다. 그는 국왕의 주력 부대가 기병대임을 알고는 여기에 맞서는 군대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의 기병대는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거룩한 전쟁에 임한다는 확신으로 시편을 노래하며 전투에 나섰다. 차츰 의회파의 전체 군대는 같은 확신으로 용기 백배하여 내스비 전투에서 국왕의 군대를 물리쳤다.

의회 군은 왕의 본거지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왕이 외국 가톨릭 군대와 손잡은 것을 폭로했다. 다급한 찰스는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을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사로잡아 의회 군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청교도 군은 의회를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찰스에게 동정적인 의원들을 제외시킨 뒤 왕의 재판을 진행하였다. 찰스는 1649년 참수 당했다.

④ 호민관 시대와 왕정 복고

찰스의 처형으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권력을 잡은 이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국왕 헨리 8세의 측근이던 T. 크롬웰의 혈통을 이은 헌팅던 지방의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시드니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16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영지
관리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고, 그 후 40년까지 그는 헌팅던에서 적극적으로 농업경영에 힘쓰는 한편, 치안판사로서 늪지대를 개척하는데 반대하고 있던 농민 편에 서서, 베드퍼드 공작의 대리인과 싸웠다. 그 사이 20년에
결혼하고, 또 28년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하지 않았다. 40년 케임브리지에서 단기의회 및 장기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자, 국왕 반대파 입장에 섰으나 결코 그 중심 인물이 되지는 않았다. 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무력항쟁이 시작되자, 크롬웰은 국왕파에 대항하여 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에지힐을 비롯하여 그밖의 전투를 통해 의회군의 훈련 부족을 통감하고, 동부 여러 주에서 열렬한 청교도들을 모아 엄격한 훈련을 시켰으며 몸소 기병을 거느리고 싸웠다. 그 효과는 마스턴 무어(1644)와 네이즈비(1645)의 두 전투에서 유감없이 나타나 철기대(鐵騎隊, Ironside)라는 명칭과 함께 그 명성을 드높였다. 그 결과 제1차 내전이 끝난 시점에서 크롬웰은 가장 유력한 의회파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안을 정돈시켰다. 우선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왕파의 폭동도 진압했다. 크롬웰은 내친 김에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어쩔수 없이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호민관
의 칭호를 채택했다. 이제 그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일부의 온건한 감독파들까지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다. 경건한 청교도였던 그는 주일 성수, 경마, 투기, 극장에 관한 여러가지 입법을 통해서 영국의 풍속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제 정책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어서 귀족층과 극빈자들은 자연히 호민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크롬웰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평안하게 영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전의 왕들처럼 의회와는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좌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거룩한 왕국을 추구했던 그는 1658년,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셋째 아들인 리처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같은 능력을 가지지 못한 아들은 이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청교도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이 소망하던 나라는 사라지고 옛날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영국인들은 너무도 경건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제네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옛 왕조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청교도에 대한 강한 반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회는 장로교의 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감독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그리고는 반대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이제 국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교회에 발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장로교 목사들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던 크롬웰의 묘는 국왕 살해의 장본인이라 하여 파헤쳐졌다. 얼마 안되어 반란과 폭동이 발생하였다. 장로교 측 반란군은 처절한 살육전 끝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찰스 2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나중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도 그리하였다. 영국인들은 장로교도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영국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렌지 공 윌리암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제임스는 통치 3년 만에 프랑스로 도주하였다. 얼마나 오랜 투쟁과 투쟁의 연속이었던가!

이제 영국에서는 누구든 왕실에 충성하고 1520년의 39개 조항에 서명하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성공회가 국교로 남은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교리로 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의 이상은 계속 남아 영국 사람들의 전
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대륙에 미국을 건국하는 토대가 되었다.

4)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1) 개혁의 선구자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은 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에서 비롯하였다. 1407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파 신부였던 제임스 레스비(James Resby)가 퍼스(Perth)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에 처하여졌고, 1433년에는 보헤미아 출신의 의사요 후스파 선교사인 폴 크라바르(Paul Crawar)가 성경을 가르친 일로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처형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대륙의 전역으로 번져 나가자, 1525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루터의 신학 사상을‘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면서 종교 개혁의 확산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1526년부터 영국의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의 종교개혁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① 패트릭 해밀톤의 순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운동은‘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The Morning Star of Scottish Reformation)이라고 불리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4-1528)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왕손으로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페른(Fern)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파리에서 유학할 때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루터의 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패트릭은 1526년부터 공개적으로 루터파의 사상을 옹호하기 시작하였고, 1527년 이신득의 사상을 설교한 일로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의 소환을 받았다. 그는 대륙으로 피신하여 비텐베르그에서 루터와 멜랑톤을 만났으며, 개혁자들이 새로 세운 대학을 살펴보기 위해 마르부르그를 방문하였으며, 복음적인 신앙에 고무되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1527년 말경 귀국하였다.
해밀톤은 귀국과 동시 공개 토론과 설교를 통해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공개 토론의 대상은 알레시우스(Alesius)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해밀톤에게 설득 당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해밀톤은 설교를 통하여‘성지 순례, 연옥, 성자에게 기도하는 것,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고, 순수한 초대 교회 신앙으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이일로, 1528년 대주교 제임스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았고, 2월 28일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정문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한다는 이유로’화형에 처하여졌다.

복음을 사랑했던 순교자 해밀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를 태우던 연기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을 소위‘이단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한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처럼, 패트릭의 순교 이후 스코틀랜드 지성인 사이에 그의 화형 이유를 밝히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로마 천주교회에 정면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1534년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교황청의 편에 서있던 스코틀랜드와의 평화가 깨어지자, 많은 개혁자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여 영국과 대륙으로 피신하였다. 대주교 비튼은 데이빗 스트라턴(David Stratton)과 노만 굴레이(Norman Gourlay)와 같은 종교 개혁자를 화형에 처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탁발 수도사 알렉산더 시튼(Alexander Seton)은 설교를 통하여‘교황청의 부패한 교리’를 비난하였고, 상인들과 선원들은 과감히 종교개혁 사상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였다. 왕실의 개혁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고, 성화를 손상시키거나 개인적 예배를 금하는 법이 1540년에 통과되었다.

1542년 제임스 5세가 전사하자, 백작 얼(Earl of Arran)이 섭정하였는데, 그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호의적이어서 복음적인 설교를 허용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비튼의 반대로 스코틀랜드와 영국과의 동맹관계가 깨어지자, 헨리 8세는 1544년 스코틀랜드를 침입하여 에딘버러와 남부 스코틀랜드 도시들을 불살랐다. 영국의 침략으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추기경 비튼의 학정이 계속되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와 로마 천주교회를 지지하는 무리와 영국과 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이들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인물이 바로 조지 위샤트이다.

② 조지 위샤트의 개혁 운동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의 소년 시절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538년 몬트로즈(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다가 교회 당국에 소환되었고, 1539년 영국으로 피신하였으나 동일한 이유로 정죄를 받아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과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고, 스위스 신앙고백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 후, 영국 케임브리지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공부했으며, 154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몬트로즈와 던디(Dundee)에서 설교하면서 성
경대로 교회를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 지역을 순회하며 개혁 사상을 증거하고, 로마 천주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1546년 1월 체포되어 에딘버러 감옥에 투옥되었고, 1546년 3월 1일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추기경 데이빗 비튼(David Beaton)에 의하여 화형에 처하여졌다.

위샤트의 처형으로 시민들의 항거가 일어났다. 그들은 위샤트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하였음에도 범죄자처럼 처참하게 살해되자, 추기경 비튼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이는 가난한 시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귀족, 지주, 명예로운 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로 확산되었다. 한술 더 떠서, 공공연하게 조지 선생의 피에 보복해야 한다거나,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자고 하는 맹세들이 행해졌다. 이러한 맹세는 1546년 5월 시민들이 추기경의 관저를 습격하여 살해함으로 실천되었다.

(2)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①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순교자들과 시민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며 시민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존 낙스(John Knox, 1505-1572)이다. 낙스는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하딩톤(Haddington)에서 존경은 받
았으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글라스고우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25세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될 때까지 낙스를 인도한 것은 스콜라 철학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어 교부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 주로 제롬과 어거스틴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제롬으로부터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의 순수한 원천이라는 것과 원어로 읽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거스틴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인 성경의 내용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종교개혁의 원리인‘성경의 권위’와 ‘신앙 의인’의 기초를 터득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나 미신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종교심을 가지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힘껏 선행하라는 식의 사고는 종교마다 공통적이다. 그렇게 해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죄이다. 겉으로 선행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으로부터 계명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선행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낙스는 도달하였다.

그러던 중 존 낙스는 죠지 위샤트의 후견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위샤트를 만나 종교개혁 사상을 직접 접하게 되었으며, 그와 나눈 대화를 통해 크게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죠지 위샤트의 지지자가 된 존 낙스는 그가 설교할 때면 칼을 들고 그를 호위하곤 하였다. 이때가 1545년에서 154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그 후 6주가 지난 어느 날 죠지 위샤트는 체포되어 세인트 엔드류스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위샤트가 순교한 후에 존 낙스는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전 생애를 스코틀랜드의 개혁에 바치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종교 개혁을 요청하고 있었다.

나라 전체 부의 반 정도를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도 소수의 지도자들 손에 있었다. 탐욕과 야심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세속 권력과 다투고 있었다. 사제들은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하였다. 신앙은 완전히 미신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기도는 성모를 비롯한 성자들에게 드려졌고, 미사는 예배가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참여한 자들에게는 공로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마음 속의 신앙은 외형적인 행위로 대치되었다.

영국의 북쪽에 있었던 스코틀랜드는 역사적으로 영국과 적대 관계인 프랑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영국의 헨리 7세가 자기 딸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시키면서 두 나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다
시 헨리 8세가 개신교로 전향하자 왕실은 다시 프랑스와 전통적인 동맹 관계로 선회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 두 나라는 교회의 개혁과 교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교황과 결별한 영국과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따라서 확실하게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 사상이 스코틀랜드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전부터 이미 후스의 사상이 퍼지고 있었고 독일에 유학했던 사람들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글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다. 의회는 이러한 서적들을 법으로 금하였고 개신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이들을 처벌하였다. 1528년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하였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봉자들은 불어났다. 특히 왕실의 세력이 강화되는데 대한 반감으로 많은 귀족들이 개신교를 따르게 되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아직 젖먹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에드워드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친영파인 개신교도 귀족들은 이 결혼을 찬성하였다. 하지만 가톨릭을 신
봉하는 왕실은 메리를 프랑스로 보내 교육시키고 프랑스 왕자와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친불파가 성공하여 개신교도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개신교 열성파들은 세인트 앤드류 성을 점령하고 대주교를 살해하였다. 왕실은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당시의 내부 분쟁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던지라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이 성을 신앙의 본거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 후에 이 성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모아 싸우게 된다.

낙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 싸움을 통해서 개신교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 성의 점령을 계획하던 두 귀족의 아들들을 가르치던 가정교사였다. 본래 그는 개신교도들이 이 성을 점령했을 때 자기가 가르치던 소년들을 이곳으로 데려다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성에 도착하자 그는 그 사건에 깊숙이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신학 공부를 위해 독일로 가려던 계획은 중단되고 그곳에서 개신교도들의 목회자가 되었다.

 

존 낙스의 개혁 운동②

낙스가 세인트 앤드류 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왕실과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 수비대에 남아 프랑스와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모두가 내정 문제로 골치를 썩는동안 개신교도들은 이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유를 얻자마자 응원군을 파견하였다. 스코틀랜드 왕실도 이 성에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힘을 다해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힘으로 볼 때 너무 열세였다. 결국 얼마 못 견디고 1547년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류의 수비대에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세이트 앤드류 대학의 교수들과 일반대중 앞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스승 존 메이저도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낙스는 다니엘 7장 24-25절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라 해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청의 교리 이탈과 역대 교황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이 첫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낙스의 소명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낙스는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하였다. 둘째, 그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셋째, 예배의 근간은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설교는 심장을 쪼개는‘파괴력’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

낙스의 열정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모인 훈련되지 않은 시민들과 조직 없는 수비대는 가톨릭과 왕실을 당해내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섭정, 기즈의 메리(제임스 5세의 미망인)를 통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제독 레옹 스트로찌(Leon Strozzi)의 지휘 아래 도착한 20여 척의 갤리선 대포가 성을 포격하였고, 낙스를 포함한 전수비대원들이 포로가 되었다.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갤리선‘노트르담’(Notre Dame) 호에서 노 젓는 노예로 일했다. 노트르담이 소속한 함대는 여름엔 루앙(Rouen)에 주둔하여 영국 해적들의 침략 행위를 방어하였고, 겨울에는 본거지인 낭트(Nantes)에 주둔하
였다.

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보통 갤리선의 길이는 일백 오십 피트에 달하였으며, 길이가 오십 피트 가량 되는 돛대를 달고 있었다. 선미에는 선장용 객실 하나와 창고가 있었고 노예들이 앉아 있는 의자들 한가운데는 우뚝 솟은 복도가 자리잡고 있어서, 감독이 이 위로 왕래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을 말로, 또는 폭력으로 다스렸다. 한편에 대개 스물 다섯 개의 노가 있었고, 한 노에는 여섯 명의 노예들이 배당되었다. 보통 삼백 명 정도의 노예가 한 배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쇠사슬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항해 중에 이들은,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비,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을것이다…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영국
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이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54), 베릭(Berwick)과 뉴캐슬(New castle)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눔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노예 생활로 인해 생긴 위궤양과 신장염도 목회 기간 동안 치료되어 갔다. 성경 연구와 좋은 주석을 읽는 데도 열심을 내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노햄
성(Norham castle) 장군의 딸인 마조리 보우즈(Marjory Bowes)도 이때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는 낙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를 여섯 명의 궁정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명하여 설교를 시켰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낙스를‘청교도의 창시자’로 평한다.

제네바에서의 낙스

장로교를 지원하던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그는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도망하였다.

거기서 그는 생애 가장 위대한 스승을 만났다.

낙스가 칼빈주의를 알게 된 것은 프랑스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로 추측된다. 낙스는 프랑스 해군의 갤리선 노트르담호에 강제로 승선되어 중도동을 했지만, 이 배가 루앙과 낭트에 정박할 때는 육상 근무를 할 수 있었다.

1548년에는 이 지역에도 칼빈주의가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낙스가 프랑스 개혁주의자들을 만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의 신빙성 있는 증거는, 낙스가 칼빈이 쓴 예레미야 주석을 이미 1549년에 알고 있었고, 1550년에 간행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학계는 낙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제네바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가 신빙성이 있다고 볼 때, 영국 체류 때 낙스의 신앙은 상당 부분이 칼빈주의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네바에 도착한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 때 낙스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The Form of Prayer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예배 순서는‘죄 고백과 시편 낭송, 주의 강림을 간원하는 기도, 설교 및 그 후의 질의 응답, 목회자의 기도, 축도’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
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가장으로서, 목회자로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칼빈과 낙스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밀접하게 나누었다. 칼빈은 낙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제네바에서 낙스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신사 계급인 지도층 위그노들과 그들을 따르는 상인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영국, 폴란드, 스페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 칼빈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낙스는 직접 간접으로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
으면서 자신의 사상 체계와 신학의 폭을 넓혔다. 낙스는 그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제네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이곳이야말로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가 이처럼 신실하게 개혁되어 가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
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낙스는 4년 동안(1555-9)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다.

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에 들어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1558년 낙스는 칼빈과 의논하지 않고, 「여인의 괴수 정부에 대한 첫 번째 나팔 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ur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이 책자는 개신교를 박해하는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의 메리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여인의 국정 관여와 통치행위의 부당성을 탄핵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 칼빈도 낙스의 언어와 행동의 결렬함에 놀랐다. 낙스는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여선지 드보라와 같다고 일컫고 그의 언어를 순화시켜 여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다. 1559년 5월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개혁의 싸움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의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낙스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격을 느꼈다.

저들의 예상대로 스코틀랜드 왕족인 메리 스튜어트는 1558년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일년 뒤에는 왕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당시 16세였던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가 결혼하던해 영국에서는 메리 튜더가 사망하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영국의 여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메리와 사촌 엘리자베스는 서로 친척이었지만 원수가 된 셈이다.

스코틀랜드는 실제로 메리의 어머니에 의해서 섭정되었다. 점점 친 가톨릭 정책이 강해지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1557년 말에‘복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섬기겠다고 서약하였다. 그 후 그들은‘회중의 지도자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섭정은 이들을‘이단자’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하게 버텼고, 다음 해에는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의회를 비롯하여 지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559년 낙스와 회중의 지도자들은 퍼스(Perth)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 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섭정은 4,000여 명의 정부군과 900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게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이때 낙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000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낙스는 영국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는 낙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10,000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윈터(Winter) 제독이 1560년 1월, 8척의 함대를 이끌고 낙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1560년 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 전쟁이 되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성 자일즈 교회(St. Giles Church)를 담임했다. 낙스는 그의 후원자들이 이 전쟁에 소극적임을 알고 곧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여왕에게“낙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은, “그는 설교를 시작할 때는 보통 조금 구부정한 모습이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얼마나 열정적인지 마치 단상을 산산조각 내며 솟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청중들은 너무 강하게 마음이 찔려 설교 메모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만큼 낙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낙스는 마리아나 성자들의 화상과 조각을 강하게 배척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은 던디와 퍼스의 사람들은 가톨릭의 많은 성상과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그는 아무리 크고 웅장한 건물이라고 해도 거기에 온통 성상으로 범벅이 되어 신자들이 우상 숭배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수도원이나 사원들을 마구 파괴하기도 하였다.

낙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년 4월 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다.

1560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녀는 한 때“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개신교를 멸시하였으나, 임종시에는 개신교 목사 존 윌록(John Willock) 앞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프랑스에서 과부가 된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낙스와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메리는 새로 결혼한 남편을 죽이고 다른 이와 결혼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으로 도망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엘리자베스를 제거하고 영국의 왕이 되려는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사형되고 말았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에서는 개혁이 급진전되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은 후, 스코틀랜드 의회는 낙스와 다섯 명의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 작성을 요청하였다. 이에 낙스는 4일 만에 다섯 명의 동료 목사들, 일명 다섯 명의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로마 천주교도들이 입법 과정을 살피려고 참석하였지만, 의회가 개혁자들이 제출한 신조를 동년 8월 17일 채택하므로 개혁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의회는 로마 교황청이 주장하던 사법권을 폐지하고, 미사를 불법으로 정죄하는 등 로마 천주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화하고, 프랑스와 단교를 선언하였다.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 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 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의 글들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이 신앙고백서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산물이요, 낙스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신조가 채택하고 있는 세속 정부에 대한 입장은 낙스의 것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행정 관료의 의무와 책임을 역설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서문은“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샤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에서의 과오였다.”고 지적하였다.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The Council of Trent)가 취한 가톨릭의 구원관에 기겁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사의 참석은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필수적이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적 희생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낙스는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미사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제8장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하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그리고 정당한 교회 훈련(권징)을 언급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고 샤프는 그의 신조학에서 밝히고 있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이러한 개혁은 후세들에게도 이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특별히 교육에 강조를 두고 있었다. 모든 교구에서 젊은이들에게 경건 훈련을 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낙스는 어느 지역에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후에 칼빈은“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시간에 이루어진 성공을 보며 이 나라를 특별히 사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국가 개혁의 가르침

낙스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칼빈의 것과 같다. 그는 칼빈의 충실한 제자였던 것이다. 단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칼빈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종교 개혁 당시는 군주의 종교가 곧 국민의 종교였기에 낙스는 개신교도를
박해하는 가톨릭 여왕들과 싸워야 했다. 조국을 사단과 미신으로부터 해방하여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었던 것이다.

낙스가 개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통치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하였다. 그녀는 왕권 신수설에 근거하여 절대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낙스가 진행시켜 법제화된 가톨릭 미사 금지를 그
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낙스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에 오자마자 왕궁의 홀리루드 하우스(Holyrood house)에서 미사를 드렸다.

낙스에게는 한 번의 미사가 만 명의 군대가 침공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낙스는 곧 여왕의 미사 행위를 설교로 규탄했다. 여왕과 종교 개혁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왕은“아름답고 우아하며, 용감하고 영리했다. 그
러나 성격에 안정이 없었고, 확신에 찬 남자들이 고분고분 하지 않는다는 것을”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프랑스 궁중에서 음모와 술수를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스는 여왕의 미모와 화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여왕이 가톨릭 의식에 따라 단리(Henry Darnley)와 재혼하려 할 때 낙스는 이를 공격했다(1563). 여왕은 분에 떨며 눈물을 흘리며 낙스에게 말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호의를 얻고자 했습니다…이제 나는 복수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낙스는 연소한 여왕을 설득시키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여왕의 결혼이 당신(낙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은 당신이 이 공화국에서 무엇인가? 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왕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비록 백작이나 남작이나 귀족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저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단리가 살해되자 여왕은 보스웰 백작과 개신교식으로 다시 결혼하였다. 보스웰은 단리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때 낙스는 메리 여왕의 퇴위와 처형을 주장하였다.

낙스가 단순히 여성 통치자가 싫어서 이런 강경책을 폈을까?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낙스의 정부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낙스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하였다. 더군다나 통치자가 가톨릭 군주로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더 혐오하였다. 낙스는 영국에서 메리 튜더가 가톨릭을 국교로 하여 개신교를 탄압하고 스페인 왕과 결혼한 후 곧 사망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의 잘못된 정책으로 비슷한 사건이 경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낙스는 구약 특히 예레미야를 기초로 하여 독재하는 군왕이나, 우상 숭배를 주장하는 통치자에 대해 무력 항쟁을 인정하였다. 칼빈은 귀족층에 의한 질서 정연한 법적 저항을 인정하였지만, 낙스는 귀족층이나 하부 통치 계급이 독재자에 대하여 수수 방관할 때는 평민들도 개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개혁에는 군왕의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사형 집행까지도 포함시켰다. 낙스는 칼빈보다 훨씬 더 과격한 혁명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낙스의 강한 신념은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개개인이 하나님의 대행자인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지만‘하나님께 반하는 명령은 듣지 말라’는 가르침을‘대항하라’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낙스가 여
왕과 싸워 여왕을 넘어뜨렸음에도 칼빈이 비난하지 않고 칭찬한 것을 보면, 그도 낙스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고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여하간 그의 이러한 신학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데도 큰 원동력이 되었다.

낙스는 교회가 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 안에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
고 가난하든 부하든 모든 어린이들이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혁명을 외치거나 민주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칼빈의 가르침 안에 머물고 싶어했다.

낙스가 가르친 순수한 예배와 개신교의 원리를 보면 그가 청교도의 시조 중 하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폭군에 대항하여 반대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칼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장로교인들과 프랑스 위그노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지는 낙스 자신의 삶과 사상을 움직였듯이 후대 장로교인들의 삶과 사상의 분명한 원리로 남아 있다.

낙스는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스틸링에서 즉위할 때 소년 왕 요아스(왕하 12장)에 관해 설교하였다. 1567년 12월 의회가 열렸을 때 낙스는 의회의 개회 설교를 하고, 그 의회가‘앞으로 모든 왕들은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의무화하고 아울러 교회 모임의 자유와 권한을 인정한 새로운 입법 조항’을 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3)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죽자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성공회식 감독주의를 소개하려 하였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세인트 앤드류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임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암소가 우유를 내게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루 멜빌이 등장하였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스 근교에서 태어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뒤, 1569년 제네바로 가서 베자의 영접을 받았다. 제네바에서 멜빌은 아우구스부르그 은행가 퍼거(Ulrich Fugger)의 도움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들을 구하여 연구하였으므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베자의 임명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시민법 학과의 과장이 되었다.

멜빌은 1574년 스코틀랜드에 돌아왔는데, 그 때 베자(Theodore Beza)는“제네바 교회가 스코틀랜드에 보여줄 가장 큰사랑의 표시는 앤드류 멜빌이다.”라고 편지하였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에 귀국한 후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에, 1580년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네바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를 만들었다.

멜빌은 제2치리서를 통해 보다 더 성경에 가까운 장로 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낙스가 감독자를 인정한 것과는 달리, 멜빌은 감독 정치가 불법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는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 둘로 나누고, 성경에 나오는‘감독들, 목사들, 그리고 목회자들(ministers)은 동일한 용어’로 장로 직분에 대한 묘사라고 하였다.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장로교 교육을 받은 제임스 6세가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온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
랜드의 장로교 대의 정치는 왕권 신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빌은 제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
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왕으로 섬기며, 귀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멜빌을 런던탑(London Tower)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영국에서 추방하였다. 멜빌은 1611년 영국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세단(Sedan)으로 갔고, 거기에서 신학생들을 양육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제임스 1세는 앤드류 멜빌을 추방한지 얼마 지난 1618년 스팟티스우드(John Spottiswood)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 파송하여‘퍼스 5개 신조’(Five Articles of Perth)를 채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퍼스 5개 신조’의 내용은 ①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을 것, ② 성일(聖日)을 엄수할 것, ③ 감독 교회식의 견신례(Episcopal confirm!ation)를 집행할 것, ④ 개인적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⑤ 개인적으로 성찬을 베푸는 것을 중심 사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임스의 정책은 멜빌의 영적 지도를 받던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의 저항을 초래하였고, 종교적인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임스의 사망(1625) 후 찰스 1세(재위 1625-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더 힘든 수난을 맞게 되었다. 찰스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윌리엄 로우드(William Laud)를 등용하였고, 로우드는, 영국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박멸 운동을 전개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예배와 교회 정치에 있어서 성공회주의에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그의 명령에 의하여, 스코틀랜드에서는 1637년 7월 23일부터 장로교회가 폐지되고 성공회 의식대로 예배가 드려지도록 되었다. 그러자 이 날에 아주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에든버러의 사제장이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성공회 의식을 따라 예배를 집전하려고 할 때, 제니 겟즈(Jenny Geddes)라는 여인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사제장을 향하여 의자를 집어던지는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을 봉기시켰고, 장로교회들은 찰스의 종교 정책에 항의하면서 장로 정치의 수호에 목숨을 걸 것을 서약하였다. 그들은 에든버러의 그레이 프라야 교회당(Grey Friar’s Church)에 모여 장로교회 정치와 예배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찰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국가 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었다.

6. 30년 전쟁
(Thirty Years'''''''' War, 1618-1648)

종교 개혁 시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끝없는 갈등 속에서 흘러갔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 특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올 더 무서운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교 전쟁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가장 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30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종교 개혁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1) 전쟁 발발의 원인

1555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맺었던 아우그스부르그 강화조약이 겨우겨우 약속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문제 때문에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란 이 조약이 가톨릭과 루터교도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개신교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과 각 지역 통치자들이 자기 구역의 종교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기에 전 지역이 작은 영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혼란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가톨릭이 되면 전체가 가톨릭이 되었고 다시 루터교도가 되면 모두 다 루터교도로 개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25년 동안 3번이나 종교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 다른 종교는 곧 박해와 불이익을 의미했다.

독일 사람들 가운데는 칼빈주의자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는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의 아무 곳에서도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아우그스부르그 조약에 그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을 비롯한 다른 개신교도들은 제국에서 계속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종교적인 편견이 강하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우그스부르그 조약에는 보류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몇몇 지역에서는 주교나 영주가 개신교로 개종하더라도 여전히 그 지역은 계속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다는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악용되었고, 대체로 가톨릭 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상황을 살펴볼 때 당시의 정황은 어느 때라도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을 밀어붙일 분위기였다. 이 불안한 평화 속에서 크고 작은 종교적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50년가량이 흘렀다.

그러다 1606년 도나우베르츠라는 황제 직할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 도시는 이미 개신교를 택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가톨릭 세력은 단지 수도원 하나뿐이었다. 이 도시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에서만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수도원 밖으로 행진해 나온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이들을 다시 수도원 안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는 이 도시에 인접한 바바리아라는 큰 주의 영주 막시밀리안이었다. 바바리아는 강력한 가톨릭 지역이었다. 이 사건 후 일년 뒤 막시밀리안이 군대를 거느리고 도나우베르츠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시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 직할시는 당연히 황제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주민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들은 개종은커녕 대항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다. 그 결과는‘복음주의 동맹’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상대방은‘신성 동맹’을 만들었다. 언제고 두 파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가톨릭은 교황과 황제의 지원을 받는 데 비해서‘복음주의 동맹’은 개신교 전체를 포함하지 못한채 단지 루터교도들로만 이루어진 약점이 있었다.

보헤미아에서도 그 갈등이 심했다. 지금의 체고슬로바키아인 이 지역은 존 후스 시대부터 개혁의 정신이 강했던 곳이다. 이 지역 주민의 90퍼센트는 칼빈주의자였다. 때문에 독일의 칼빈교도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가 볼 때 여기 주민들은 가톨릭도 루터파도 아닌 이단들이었다. 페르디난드는 국왕이 되자 이 지역의 이단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로마 교회가 멸시당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 몸이 찢어져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었다. 주민들은 즉각 반발하며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왕실 위원회에 항의하였다. 모든 진정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들은 항의를 듣던 왕의 신하들을 창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출발이 되었다.

2) 전쟁의 시작과 가톨릭의 만행

보헤미아 사람들은 페르디난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드릭을 왕으로 선출하였다. 반란은 곧 동부로 퍼졌다. 인근의 실레시아와 모라비아에도 미쳤다. 마침 사촌인 황제가 죽자 페르디난드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에게 보헤미아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신성 동맹군을 이끌고 엄청난 힘으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프레드릭은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개신교는 프라하 근처의 하얀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졌다. 재위가 너무 짧아서‘겨울 왕’이라 불린 프레드릭은 네덜란드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보헤미아는 무서운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페르디난드는 극악한 조처를 취했다. 보헤미아 사람 네 명 가운데 셋을 죽였다. 그리고 한 명은 노예로 팔았다.

보헤미아는 페르디난드에게 돌아가고 팔라틴은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의 대가로 주어졌다. 두 지역에서 개신교도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도자들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그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사람들은 그 지역을 떠나거나 처형당해야 했다. 개신교도들은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만행은 거의가 가톨릭에 의해 자행되었다.

페르디난드의 득세는 유럽의 개신교도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또한 유럽의 영주들 모두는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그의 융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해서 1625년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은 개신교 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독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프레드릭을 다시 팔라틴의 영주로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황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부 가톨릭 영주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막시밀리안 외에 또 다른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크리스천 4세와 전투를 벌였다. 독일은 그 두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다. 가톨릭의 지휘관이었던 발렌스타인의 알베르트 공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결국 크리스천은 그에게 패배하여 도주했고 독일 땅은 황폐해졌다. 전쟁에 진 결과 다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고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강요되었다.

황제는 의기충천했고 가톨릭교도들은 기쁨에 찬 반면, 개신교도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다. 동트기 전은 절망적으로 어두운 법, 구원은 스웨덴 왕을 통해서 왔다. 이 위대한 왕은 죽기까지 싸움으로써 유럽의 개신교도들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오래도록 진행되었다.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스(Gustavus Adolphus,1594-1632)는 루터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경건한 왕이었다. 자기 나라 말 외에도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스페인어, 영어, 폴란드어, 러시아어도 알아들었다. 그가 17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을 때 스웨덴은 약한 나라였다. 덴마크가 대부분의 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한 왕이었다. 국토는 분열되어 있었고 왕위는 대단히 약했지만 그의 현명한 정치는 나라를 점차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비서관 옥센스티에르나(Oxenstierna)의 지원을 받아 사법체계를 개혁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공업을 장려하고, 강력한 경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또한 역사상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데, 그의 야전 전술들은 잘 훈련되고 기동성 있는 소규모 머스킷총 부대들을 운용한 것을 포함하여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곧 덴마크 사람들을 스웨덴에서 몰아냈고 황제를 배출하고 있는 합스부르그가 세력과 맞서게 되었다. 결국 그는 합스부르그 가문의 끝없는 야심과 야만적인 행위를 중단시키고 개신교도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소명에 불타게 되었다.

1630년 구스타브 아돌프스는 발트해를 건너 독일에 상륙했다. 그의 군대는 1만 8천 명의 잘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대할 적은 숫자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가톨릭 군은 틸리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이미 30여 차례나 치열한 전투을 하고 승리를 얻어낸 전문가들이었다. 황제와 신하들은 또 하나의 겨울 눈사람 왕이 나타났다고 비웃었다.

더 어려웠던 것은 독일의 개신교도들이 구스타브 아돌프스왕과 합세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개신교도들은 황제의 무자비한 처벌을 두려워하였다. 보헤미아가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이 악한 인간은 지옥의 사자였다. 또한 그들은 스웨덴 왕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비록 복음적인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군대까지 믿을 수는 없었다. 이미 덴마크군도 패하고 도주하였기 때문에 더욱이나 믿을 수 없어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구스타프 아돌프스를 통하여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의 만행으로부터 구원하실 계획을 착실히 진행케 하셨다.

3) 개신교 군의 승리

스웨덴 군은 모범적이었다. 왕은 뛰어난 무장이었고 전략이 출중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틸리 군을 분쇄하면서 들어왔다. 거듭되는 승리는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군사들은 전에 독일을 쳐들어왔던 다른 군대와는 달랐다. 친절했고 주민들을 존중했다. 그들은 가톨릭교도나 칼빈교도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사였다.

스웨덴 왕은 자국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그 본보기로 독일 땅을 한치도 요구하지 않으리라 선언했다. 프랑스가 그를 지원하려고 할 때도 그 나라가 독일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위대한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차츰 독일의 개신교 영주들은 그를 진심으로 원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힘은 점점 더 강화되어 갔다.

가톨릭 군은 그를 지지하는 가장 큰 도시를 포위하였다. 그것은 막데부르그였다. 틸리의 군사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살육이 벌어질 때 아무도 탈출할 수 없었다. 어린이들은 루터의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다. “우리를 지키소서. 악한 교황이 칼로써 당신의 나라를 빼앗고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을 허사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분노한 틸리는 그 어린이들 전체를 죽여 버리도록 명령했다.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불탔다. 일부 성당을 제외하고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3만이나 되었던 인구는 4천 명도 채 안되게 남았다. 이 무서운 만행을 행한 틸리는 의기양양해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대승리였습니다. 폐하와 황궁의 귀부인들이 오셔서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유감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황제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막데부르그의 대학살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가톨릭 군에게 오히려 손해가 되었다. 이 사건은 개신교도들을 무섭게 단합시켰다. 가톨릭 앞에는 지옥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단결된 개신교도들은 구스타브 아돌프스의 깃발 아래 행진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스웨덴 군사들에게 걸었다.

황제는 남쪽 삭소니의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삭소니 사람들은 명령을 듣는 대신 스웨덴 사람들과 합류했다. 구스타브 아돌프스는 남쪽으로 내려와 틸리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가톨릭은 참패하였다. 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령관 틸리는 심한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그는 이듬해 회복해서 다시 스웨덴 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다시 패하고 치명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이제 반대로 남부의 바바리아가 위협을 받았다. 이 지역은 가톨릭측 신성 동맹의 심장부였다. 견디다 못한 가톨릭 지도자들은 평화 조약을 애원하였다. 스웨덴 왕은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가톨릭과 개신교도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를 줄 것, 보헤미아 왕국을 본래의 주권자에게 돌려줄 것, 팔라틴을 다시 프레드릭에에 돌려줄 것, 그리고 제국 안에서 예수회원을 축출할 것 등이었다.

이를 접한 페르디난드는 절세의 지휘관 발렌스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발렌스타인은 황제와 전에 싸운 적이 있어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기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일의 통치자가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프라하를 점령한 개신교도를 몰아내고 신성 동맹의 잔여 병력을 모아서 진군하였다. 드디어 스웨덴 군과의 대접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1632년 11월 두 군대는 뤼첸에서 회전하였다. 스웨덴 군은 왕과 함께 주의 축복을 간구하였다. 그리고는 루터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왕은 “어린 양떼여 원수를 두려워 말라”라는 찬송을 부른 뒤 무릎을 꿇어 부하들과 다시 기도하였다. 전장을 덮고 있던 안개는 오전 10시쯤 걷히기 시작했다. 위대한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과 격돌하였다.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양측은 무서운 싸움을 벌였다. 다시 안개가 끼어 왕은 전장도 자신의 군사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적군들이 몰려와서 그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그는 대답한다. “나는 스웨덴의 왕이다. 오늘 내 피로써 독일 민족의 신앙과 자유를 보장한다.” 적군은 이 말을 듣고 총으로 그의 머리를 쏘았다. 이렇게 그는 신앙의 제물이 되었다.

이 비보를 들은 스웨덴 군은 눈물을 뿌리며 더욱 분발하여 모든 힘을 다해 황제의 대군을 물리쳤다. 안개가 걷히면서 전장은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스타인 군은 참패하였다. 스웨덴 군은 왕의 시신을 거두어 승리 가운데 왕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몸은 스톡홀름 교회에 안장되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종의 희생을 통해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다.

4)베스트팔렌 조약

그 후에도 전쟁은 18년이나 지루하게 계속되었다.여기 저기서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었다.전쟁에서 여러 해를 보낸 군인들은 이제 전투가 직업이 되었다.이제 프랑스도 전쟁에 참여했다.지친 발렌스타인은 스웨덴,프랑스,독일의 개신교도들과 협상을 시도했다.황제는 그를 배반자로 생각했다.얼마 후 발렌스타인은 아일랜드의 한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황제를 지원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고 가톨릭인 프랑스는 황제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개신교도들을 지원했다.이제 전쟁의 동기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주도권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변했다.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이들은 전쟁터에 거주하는 독일 사람들이었다.이제 전쟁을 찬양하던 이들까지도 지쳐버리고 말았다.

1637년 페르디난드 2세는 죽었다.얼마나 악한 황제였던가!뒤를 이은 그의 아들은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부친처럼 광신적이고 악하지 않았다.스웨덴 군은 철군을 원했다.프랑스는 가장 휴전하기 유리한 시기가 되었음을 알았다.유럽인 전체가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들 있었다.

1643년 이래 베스트팔렌 지방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종교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어 오다가 1648년 10월 24일 오스나브뤼크에서 베스트팔렌조약이 조인되었다.

‘베스트팔렌 ’또는 ‘웨스트팔리아 ’(The Peace of Westphalia)조약으로 불리는 이 휴전 협정으로 30년 전쟁은 그쳤다.가만히 앉아 있다가 막판에 뛰어든 프랑스가 가장 큰 이익을 보았다.라인 강까지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다.스웨덴은 오랜 싸움의 대가로 발틱해와 북해의 넓은 땅을 얻게 되었다.독일의 영주들은 황제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권력을 얻어냈다.

영토의 광범위한 변화와 함께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종교적 관용에 대하여 어떤 기본 원칙이 선언되지는 않았지만 종교 전쟁은 완전히 그치고 말았다.아예 그런 문제로 싸우는 데 진력이 나 버렸기에 언급도 하지 않은 셈이다.황제는 독일에서 가톨릭교를 강요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칼빈주의자들도 루터교나 가톨릭과 동등한 입장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나타난 종교의 자유의 원칙은 상대방을 이해한다든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받아들여서가 아니었다.이제 종교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물론 시작은 순
수한 종교적 열정 때문이었다.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사람을 거의 미치게 해서 마귀의 도구로 만들었다.하나님을 위해서 살인하고 약탈하고 강간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에 대한 열정이 전보다 많이 식었다.우리 것이 옳으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겨야 할텐데 저쪽 편도 이기는 것이었다.그리고 우리 편이 옳으면 우리는 끝까지 신사적이어야 할텐데 우리도 전쟁 중에 똑같이 악한 행동을 일삼지 않았던가.도대체 우리가 옳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옳다고 어떻게 주장하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 동안의 전쟁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당연하던 문제들이 이제는 회의의 대상이었다.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0년 전쟁의 참화를 만들어 낸 그들의 교리는 무엇이었던가? 과연 광신자들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인가? 그리고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마귀 취급해야 바른 신앙인가?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종교가 올바른 것인가?”

그리하여 유럽인들이 종교 개혁 시대에 가졌던 신앙의 열정은 많이 가라앉아 버렸다.그리고 차츰 이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많은 지성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었다.어떠한 경우라도 종교 문제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일어나면서 다른 신앙에 대해서도 관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영주들은 종교 문제보다는 자신이나 자기 국민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실리주의로 흘러갔다.전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살인도 전쟁도 불사했다.그러나 이제는 모든 정책이 신의나 신앙보다는 자기 나라의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결정되어야 했다.이로부터 근대 세속 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종교 개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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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교상담실한국상담교육원
글쓴이 : 아카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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