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상의 흐름
앞에서는 주로 중국사상의 특색만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거기에 빠진 철학사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중요한 사항들을 열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중간에 더러 어려운 철학용어들로 인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국어로 된 백과사전이나 철학사전을 찾아보기 바란다.
1. 고대사상의 흐름: 상고(上古)에서 후한(後漢)까지
여기서는 상고시대부터 3세기 초까지 나온 중국의 중요한 철학사상을 훑어보기로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나온 소위 제자백가와 전·후한(前·後漢) 시기의 사상, 즉 중국 본래의 사상의 상호 전개와 대립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의 철학사는 서기전 6세기인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孔子)에서 시작된다. 공자의 언행은 오늘날 《논어(論語)》에 의하여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책에 의하면 그는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의 실천을 중실하였다. ‘인’의 진의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지만, 대개 ‘애(愛: 사랑)’를 본질적인 내용으로 삼으며, 또 그 실천 방법으로는 ‘충서(忠恕: 남에게 충성스러움과 남을 너그럽게 보아줌)’를 역설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애(사랑)’도 소위 우리가 지금 흔히 말하고 있는 ‘박애(博愛)’와는 다르고, 다분히 혈족적인 의식에 근거하여 먼저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차츰 나아가서 널리 온 무리에 미치는 차등애였다. 이러한 사랑을 기저로 하여 ‘덕(德)’을 완성시키는 것이 공자의 사상이었다.
공자가 죽은 뒤 100여 년이 훨씬 지나서 맹자(孟子)가 나왔는데, 그 사이에 묵자(墨子)와 양주(楊朱) 등이 나와서 유가와 대립하였다. 묵자의 전기는 분명하지는 않다. 그는 공자의 차등적인 사랑에 대하여 소위 무차등적인 사랑, 즉 ‘겸애(兼愛)’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 파는 전국시대 말기 이후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편, 양주는 공자의 충서(忠恕)에 대하여 ‘위아(爲我: 利己)’를 주장하였다. 양주의 사상은 뒤에 쾌락주의적인 요소가 가해져서 도가에 흡수된 것 같은데, 도가철학의 출발점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고 상해(傷害)를 피하는 데 있다고 본다면, 양주를 도가의 한 선구로도 볼 수 있다.
맹자의 사상은, 공자의 인(仁)에다가 ‘의(義: 옮음)’를 더하여 ‘인의(仁義)’를 가지고 도덕의 근본으로 여기고, 이것이 인성에 뿌리박힌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인 판단력, 혹은 행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이러한 능력을 ‘사단(四端)’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마음속으로 살펴보고서 자각하여 밀고 나가면,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에 이르게 된다.
맹자보다 조금 늦게 도가가 나왔다. 그들의 가르침은 노자(老子)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노자의 전기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의 저작이라고 하는 《도덕경(道德經)》도 한 사람이 한 시기에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인데, 편장(篇章)을 상세히 분석하여 보면 한 대에까지 내려오는 것도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학설은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그 요지는 먼저 ‘도(道)’를 역설하면서 유가나 묵가에서 말하는 도는 상대적인 것으로, 참된 도가 아니라고 배척한다. 그는 우주만물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존재를 ‘도’라고 부르며, 그 형상을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명(無名)’이라고 하였다.
도는 조용하고도 구분이 없고(寂然混沌), 어떤 것과도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만물의 본체로서 항구 불멸하는 것이다. 그 작용은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이 없는 자연 그대로이다. 그렇지만 ‘도’는 만물을 생성시키며 화육(化育)시킴에 부족함이 없다. 노자의 처세술은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노자 뒤에 주목할 만한 사람은 장자(莊子)이다. 그와 관계가 있는 《장자(莊子)》라는 책은 지금 33편이나 전하고 있는데, 그 중에 〈내편(內篇)〉에 들어있는 7편만이 비교적 그의 사상에 가갑고, 나머지는 한대의 후학들의 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였다. 그러나 노자는 그것을 주로 처세술로서 사회적·정치적인 면을 말한 것에 비해 장자는 주로 개인적 심경의 세계에 관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장자는 유가들이 말하는 도덕은 물론 세속의 권위, 명예 등 모든 것은 무가치하며, 생사까지도 자연계의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여기에서 유명한 인생을 초월하여 자연에 ‘소요(逍遙)’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자연주의가 나왔다.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순자(荀子)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바로 전에 나타났다. 그는 맹자가 도덕을 내재적인 것으로 말한 데 대하여 그것을 외적인 규범으로 생각하였으며, ‘예’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쳤다. 순자는 먼저 이 ‘예’를 선왕이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선왕이 이것에 적당한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예를 설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도덕설은 필연적으로 성악설을 낳게 한 것인데, 사람은 성인이 제정한 예악에 의거하여 교화되어야만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순자의 문하에서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가 나왔는데, 순자의 사상이 그의 제자의 사상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쪽으로 법가사상의 계통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그는 유교사에서 존중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비자는 법가의 이론을 대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법가는 유가의 덕치주의와 달리 형법에 의한 정치를 말한 사람들이다. 그전에도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신도(愼到)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에게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의외로 도가들이었다는 것이다.
법가들이 말하는 “임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법에 의거할 뿐이다”라는 주장은 도가가 자연을 존중하는 정치설과 관계가 있다. 또 ‘우민정치(愚民政治)’를 이야기하여 유명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낳게 한 것은, ‘지(智)’를 부정하고 ‘우(愚)’를 예찬한 도가의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그래서 전변(田騈), 신도와 같은 법가적 도가, 도가적 법가가 나온 것은 그때의 사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유(儒), 묵(墨 ), 도(道), 법(法) 등 제가들이 논쟁을 일삼으면서 변론술이 필요하게 되었고 거기에 따라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 흔적은 제가들의 일부 학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전국시대 말기가 되면 이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명가(名家)라고 하는 궤변학파(詭辯學派)가 나타난다.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 같은 사람이 이 파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지만, 묵가에서도 ‘별묵(別墨)’이라고 하는 유사한 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한(漢)나라로 내려와서는, 무제(武帝) 때에 동중서(董仲舒) 같은 학자가 나와서 공자가 정리한 《춘추(春秋)》의 주석서인 《공양전(公羊傳)》(公羊高 지음) 같은 책에 나오는 ‘천하일통’(天下一統: 천하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됨)의 이념을 제공하고자 유교가 국교화 되고, 유교경전을 연구하는 소위 ‘경학(經學)’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교로 고정화되면서부터 학문으로서의 순수성을 잃게 되고 신비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한나라 초기에는 음양설(陰陽說)·오행설(五行說)이 들어오고, 후한 말기에는 참위설(讖緯說: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말)까지 첨가되기도 한다.
주의할 만한 것은 도가가 한나라 초에는 오히려 유학을 능가하여 상층 사회에 퍼졌다가, 후한 중기부터 한제국의 통제가 허물어지고, 사회가 혼란해짐에 따라 다시 재기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참위설과 신선(神仙)사상과 결합되어 종교적인 도교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2. 중세사상의 흐름: 위(魏)·진(晋)에서 오대(五代) 말까지
위(魏)·진(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 수(隋)·당(唐)을 거쳐 오대(五代)말까지의 이 시기에는 유학이 국가의 학문으로 되었기 때문에, 사상은 고정화되어 힘을 잃었으나 오히려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사상 쪽에 민심이 영합되었다. 그렇지만 사상계에서는 이 시대에 처음으로 외래 인도(印度)사상과 교섭을 가지게 되고, 그 영향을 크게 받아서 도교가 생겨나게 된다. 소위 육조(六朝)사조의 발생을 보면, 3교(三敎) 교섭의 시대가 된다.
한제국이 붕괴된 후 수의 통일(589)까지 약 350년 사이는 다시 중국역사의 혼란기이다. 한족은 서북방의 이민족들에게 쫓겨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양자강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있을 때에, 황하(黃河) 유역에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왕조가 계속되었고, 중국 사상 전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현학(玄學)’이라고 불린 노장학이 위·진 시대에 성행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심은 고정화된 경학으로부터 떠나서 그 안정을 도가에서 구한 데서부터 이러한 사상이 생겨났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초속성(超俗性)이 가장 강한 장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왕필(王弼)은 《노자》를 주석하면서도 장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노자를 해석한 것이 그 한 예인데, 당시에는 《노자》·《장자》·《역(易)》을 ‘3현(三玄: 세 가지 심오한 철학책)’이라고 불렀다.
노장을 숭상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유교를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도의 조화를 시도한 것이 당시 현학(玄學: 노장철학)의 한 특색인데,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왕필의 《역주(易注)》, 곽상(郭象)[향수(向秀)의 작이라고도 함]의 《장자주(莊子注)》 등이 이런 경향을 가진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현학과 관련하여 위와 같은 저작들이 있지만, 그 본령(本領)은 오히려 그 시대에 유행한 청담(淸談)과 같은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무(無)’ ‘무위(無爲)’ ‘소요(逍遙)’ 등에 관한 현담(玄談)은 일면으로는 지적인 유희에 빠진 점도 있지만, 중국인의 사고에 깊이를 더하여 준 점도 있으며, 뒤에 가서 불교의 교리를 수용할 소지를 마련하여 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학자들을 ‘신도가(新道家)’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드러난 것은 동진(東晋) 때까지이고, 그 이후에는 불·도 두 가지 사상이 다투어가며 성행하게 된다.
불교는 전한 말기(기원전 1세기)에 중국에 들어와서 후한 200년 동안 조금씩 유포되었으나, 동진에 이르러 불교경전이 본격적으로 한문으로 번역되면서부터 크게 일어나게 된다.
불교의 내용은 초기에는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중국인들에게 이해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격의’란 중국고전에 나오는 사상과 용어를 가지고 불교의 이해를 돕도록 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반야(般若)’의 ‘공(空)’사상에 대하여 노장(老莊)의 ‘무(無)’사상을 가져다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교의 전개는 동진의 도안(道安)과 라습(羅什) 시대에 와서 크게 발전되었다. 도안은 불교경전의 종류를 정리하고 또 번역을 모아서 처음으로 경록(經錄)을 편집하고, 또 종래의 번역서들을 비교 연구하여 ‘격의(格義)’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여러 경전을 번역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인도의 사변적(思辨的)·피안적(彼岸的)인 불교는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수·당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화엄(華嚴)·선(禪)과 그 밖에 중화불교(中華佛敎)의 여러 파들은 모두 피안 보다는 현실을, 번쇄한 것보다는 간이(簡易)한 것을, 사변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노자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기도 하였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唐) 후기에 와서 한유(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인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다가올 송대(宋代) 철학의 선구가 되었다.
3. 근세사상의 흐름: 송(宋)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송으로부터 원(元)·명(明)을 거쳐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송학(宋學: 性理學)’인데, 이것은 불교와 노장사상을 혼합 소화시킨 유학 즉 ‘신유학(新儒學)’이다.
송나라에 들어와서는 오랫동안 침체를 계속하고 있던 유교가 불·도를 대표하여 다시 우위를 확립하였다. 송나라의 건국(960) 이래, 언제나 서북방 민족의 침공에 시달려오고, 150년 후에는 할 수 없이 양자강 남쪽으로 이전하기까지 이른 절박한 사태는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긴장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래서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림)의 학문인 유학의 본래 면모에 대하여 진정한 재검토를 하여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한나라나 당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가지고서는 국난에 처한 사대부의 학문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또 그것으로는 불·도 양교의 교리에 대항하여 도저히 자기의 우위를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난에 대하여 대의명분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설을 사학(史學)·춘추학(春秋學)을 통하여 나타내고, 불·도의 철학체계에 대항하여서는 특수한 교리체계를 형성한 소위 ‘송학(宋學)’을 전개시켰다.
‘송학’은 그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에 도학(道學)·이학(理學)·의리학(義理學)·성리학(性理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송 중기의 주렴계(周濂溪: 周敦頤)로부터 시작하여 소강절(邵康節: 邵雍), 장횡거(張橫渠: 張載), 정명도(程明道: 程顥), 정이천(程伊川: 程頤)을 거쳐서 남송의 주자(朱子: 朱熹)에 이르러 대성된다. 그들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도통(道統)’의 전수를 특별히 강조한다. 여기서 도통이란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과 같은 옛날 어진 임금들로부터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 같은 유가의 성현들이 바른 길(道)을 잇는 전통을 이어받았고, 그것을 송나라 유학자들이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② ‘이기설(理氣說)’이라고 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에 근거를 둔다.
③ ‘사서(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를 높이 평가하여 여기서 일관된 의리를 구한다. ……는 것 따위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할 만한 것은 그들 사이에는 불교와 노장사상을 배척하는 태도가 매우 강력하지만,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기(理氣)를 위시하여, 그들의 학설에는 이 양자로부터 받은 영향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이다.
송학의 정수가 된 책은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이다. 송학에 있어서 《맹자》와 《중용》에서는 심성론(心性論)을, 《대학》에서는 수양설을 각각 많이 취하였는데, 사서(四書)라는 말은 사실은 이 《사서집주(四書集註)》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송학은 다시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주자에 의하여 대표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때에 육상산(陸象山: 陸九淵)이 나와 별도로 특색이 있는 한 분파를 형성하였는데, 주(朱)·육(陸)의 학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심성론에 있어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바탕하여 ‘성즉리(性卽理: 사물의 본성이 즉 理이다)’를 말하였고, 육상산은 ‘이일원론(理一元論)’에 입각하여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理이다)’라고 말하였다. 수양의 방법에 대하여서도 주자는 ‘궁리(窮理)’, 즉 객관적인 진리를 구하는 것을 중시하여 경험적·귀납적인 학풍이 생겨났는데 반하여, 육상산은 독서보다도 내성(內省)을 중시하여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이며 직관적이었다.
주자에 의하면 우주 존재의 근본은 태극(太極)으로서의 이(理)이다. 그러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서는 기(氣)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세계는 ‘이’와 ‘기’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는데(理氣二元論), 인간에 있어서는 ‘이’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선(善) 그 자체이지만, ‘기’는 그 물질성에 의해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이 인욕(人慾)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발휘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심성을 가다듬어 자신의 마음속을 잘 살펴보는 동시에, 내외를 관철하는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계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하여 ‘이’를 자세히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을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이치를 추궁함)’라고 하였다.
육상산의 사상은 명대 중기의 학자 왕양명(王陽明: 王守仁)에게 계승되었다. 주자에게 있어서는 ‘이’가 외계의 사물에도 객관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왕양명에게서는 ‘심(心)’이 바로 ‘이(理)’로써 ‘심’ 외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을 인지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그 지(知)는 행(行), 즉 체험을 통해서만 확실하여진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나 정치의 질서원리로서만 작용되어서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지’를 이룬다[致良知], 즉 본래의 심정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양명학의 주장이다.
명나라 말기가 되면서 이 주관적인 경향은 한층 심해져서 이탁오(李卓吾: 李贄) 같은 사람처럼 인욕을 긍정하고, 거짓 없고 솔직한 동심(童心)을 존중하여 기성질서에 반대하는 사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양명학의 실천적인 면을 이어받아 17세기 명말 청초에는 일종의 실학적인 경향이 활발하였다. 황종희(黃宗羲)나 고염무(顧炎武)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 경향은 청나라의 한족에 대한 압박으로 세력을 잃고, 훈고(訓詁)·고증(考證)의 학술로 바뀌어 사상계에서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4. 서양문화의 유입과 최근세의 사조
끝으로 청말 아편전쟁(1840) 이후 서양세계의 충격에 의하여 이와 같은 전통사상이 변혁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청 말기의 혼란기를 맞아서 사상계에서도 각 방면으로부터 혁신적인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은 강유위(康有爲)를 중심으로 한 청말의 소위 ‘금문학파(今文學派: 公羊學派)’의 활동이었다. 강유위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같은 책은 금문학파의 입론을 집대성하고, 거기다가 최종적인 결론을 부여한 것인데, 특히 앞의 책은 후한(後漢)의 고문경전, 즉 《공양전(公羊傳)》을 제외하고서는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고문으로 된 경전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에 만들어진 위작(僞作)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논지는 청나라 학문의 정통파뿐만 아니라 이전 경학의 기반을 근저로부터 뒤흔들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곧 이후에 과학적인 입장에 서서 중국의 고대사를 재고하였던 의고파(擬古派)의 선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5·4운동(1919) 시대 같은 때에 공자를 비난하는 사조를 유발하였다.
강유위의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일면은 《대동서(大同書)》라는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동서》는 ‘대동’이라고 일컫는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사회주의, 공산제, 남녀동등, 세계국가 등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룬다. 그는 현실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다. ‘천하일통(天下一統)’과 같은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설을 역설하면서도 여기에 외래의 신사상을 가미한 강유위의 사상은 유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탈피를 시도한 것인데, 이 특이한 사상은 신(新)·구(舊) 양 세대 중간에 위치한 교량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구사상의 유입은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끝난 뒤, 소위 ‘양무운동(洋務運動)’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본격적인 것은 1896년(光緖 22년)에 있었던 엄복(嚴復)이 영국의 Huxley의 《진화와 윤리》라는 책을 《천연론(天演論)》이란 제목으로 번역 간행하면서부터이다. 그에 의하여 Smith, Spencer, J.S.Mill 등 영국의 공리주의 계통의 사상문헌이 계속하여 번역되어 나왔고, 또 왕국유(王國維) 같은 사람이 Kant, Schopenhauer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1898년 강유위와 그의 제자들이 주동하여 일으켰던 입헌군주제 개혁운동인 이른바 ‘무술정변(戊戌政變)’ 이후가 되면, 해외에 유학했던 사람들이 게속하여 나오고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 중국의 학문을 바탕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응용한다)’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서구의 근대사상이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의 지도이념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양계초(梁啓超)의 ‘신민설(新民說: 구도덕에서 해방되어 이성적인 현대시민이 됨)’ 등이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전통적인 중국사상을 타파하고, 중국사상의 주류가 되기까지에는 진독수(陳獨秀)·호적(胡適) 등에 의한 윤리혁명과 문화혁명을 거쳐야만 하였다.
신해혁명 직후에 성행한 ‘공교(孔敎: 공자의 가르침을 국교로 삼으려 하였음)’의 제창이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배격되었을 때, 2천년이 넘는 경학(經學)의 권위는 대체로 부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들의 생활과 문화》, 이장우·노장시, 중문출판사, 204-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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