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한자(古代漢字)의 구조
일반적으로 중국의 고문자(古文字)는 소전(小篆)까지를 말한다. 소전의 다음 단계인 예서부터는 필획(筆劃)의 개념이 생기고 형태가 간략해지면서 소위 고문자에서 드러나는 한자의상형성이 급격히 감소되었기 때문에 예서 이전 단계인 소전까지를 고문자 단계로 보는 것이다.
① 갑골문(甲骨文)
갑골편(甲骨片)은 본래 약재상에서 거래되던 품목이었다. 명청대(明淸代)부터 사람들은 이 갑골편을 용의 뼈, 즉 용골(龍骨)이라 부르면서 각종 질병의 특효약이라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하는 대로 약재상에 팔았다고 하는데, 1899년의 어느 날 약재로 구입해 온 소위 용골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왕의영이 본격적으로 갑골편을 사들여 연구를 시작하면서, 용골의 효험을 지닌 약재에서 중국 고대사의 비밀을 담은 중요한 연구자료로 탈바꿈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갑골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 동안, 고문자학자들은 갑골문의 연구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자의 자형변화 및 의미 변화를 연구하고, 기존의 문자학 연구에 있어서의 오류를 수정하는 동시에,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하여 고대 사회를 재구성하는 등 문자학과 역사학, 고고학에 있어 많은 공헌을 남겼다.
갑골문은 일반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된 문자가 아니라 조상신이나 자연신의 생각을 묻기 위해 상대 왕실에서 점을 치면서 점친 내용 및 점친 날짜와 점친 사람, 점괘에 대한 판단, 그 점괘가 실제로 맞아 떨어졌는지에 대한 결과 여부 등을 기록해 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대 왕실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들, 예를 들면 왕이 조상신이나 자연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수품은 어떤 것을 얼마나 사용하면 좋을지, 어떠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을지, 올한해 농사는 풍년이 들지, 주변 국가와의 전쟁이나 교섭에 있어 길할지 흉할지, 왕이 사냥이나 행차를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을지, 왕이 병에 걸렸는데 괜찮을지, 심지어는 오늘 날씨가 어떨지의 여부와 앞으로 열흘 간의 전반적인 운세가 길할지 흉할지 등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해 점을 쳤기 때문에 그 내용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글자가 있는 10여만 편의 갑골편에서 중복되는 글자를 제외하고 통계를 내보면 갑골문 낱글자의 수량은 총 4,600여 자라고 하는데,
갑골문은 상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상대 왕실에서는 모든 일을 점복(占卜)에 의거하여 결정하였고, 그에 관한 기록이 바로 갑골문이기 때문에 갑골문은 상대 왕실, 나아가 상대 사회의 기본적인 상황을 개략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갑골문의 발견과 연구를 통해 그 동안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지던
② 금문(金文)
금문이란 상대부터 춘추전국시기까지 약 1200여년 간의 각종 청동기물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킨다. 금문은 갑골문처럼 칼로 문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주조한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에 비해 필획이 두텁고 덩어리 형태(이를 괴상(塊狀)이라 한다)가 자주 보이며, 문자가 보다 규격화되어 갑골문에 비해 좌우나 상하를 바꿔 쓰는 이체자(異體字)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특징이 있다.
금문의 주재료인 청동기는 사실
은상대의 청동기가 주로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주대에 들어오면 왕으로부터 신하가 관직이나 토지, 기타 물품을 하사 받았을 때나 어떤 공적을 세웠을 때 그것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념할 내용이나 사건을 기록한 기념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청동기에 새기는 명문의 글자 수는 당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훗대에도 금문이 많이 사용되면서 무늬는 현란하게 장식되어 화려해지고 형태는 더욱 정교해지는 등 금은을 상감하는 기교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③ 주문(籒文)
주문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라는 관직에 있던 주(籒)라는 사람이 처음 이 자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주(籒)가 만든 글자’라는 의미에서 주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하지만 글자란 어떤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국가적인 한자 통일 차원에서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이 자형을 정리하고 체계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근거를 들어보면 이러한 생각은 그저 하나의 가정에 그칠 뿐이다.
주문(籒文)을 대전(大篆)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국가의 통일과 함께 동시에 문자의 통일도 단행하여 주문을 기초로 소전(小篆)이라는 자형을 만들었는데, 그 소전은 주문을 근거로 한 것이었으므로 ‘소전과 유사하면서 소전보다 먼저 사용된 글자체’라는 의미에서 대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현재 전해지는 주문 자료로는 동한(東漢)의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속에 실려있는 220여자의 주문(籒文)이 대표적이다.
④ 고문(古文)
고문은 육국고문(六國古文) 혹은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하며, 전국시대에 진을 제외한 동쪽의 육국(六國)에서 사용한 한자를 가리킨다. 진대의 분서를 피해 사람들이 감춰두었던 책들이 한대에 들어오면서 하나 둘씩 발견되었는데, 책에 쓰여진 글자체는 한대 사람들이 이전 시기의 한자 자체로 알고 있던 대전이나 소전과도 달랐고,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와도 달랐기 때문에 이를 아주 오래된 ‘상고(上古) 시대의 글자체’라고 오인하여 고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문자통일 정책을 펴서 천하 통일 이전 육국에서 제각각 사용되던 육국문자(六國文字), 즉 고문을 모두 폐기토록 했다. 진시황의 분서 정책으로 인해 많은 소중한 고서들이 사라지고, 진시황의 문자통일 정책으로 인해 고문 역시 역사에 더 이상의 흔적을 남길 수 없게 된 형편이었는데, 허신이 『설문해자』에 고문을 500여자 수록해 두었으며, 위나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경에서도 고문을 고문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일부나마 고문의 자형을 살펴볼 수 있다.
⑤ 소전(小篆)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 한 후 국가 정비를 위해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함과 동시에 문자의 통일도 단행하였다. 전국시대에는 각 제후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통치하였으므로 나라별로 다른 한자 자형을 쓴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전국이 통일된 후에는 애기가 달라진다. 각 지역으로 행정문서를 주고받아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마다 쓰는 한자체가 달라 행정에 어려움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문자 통일의 필요성을 느낀 진시황은 ‘동일한 글자 쓰기’ 정책을 실시하여 당시 승상을 하여금 기존의 진나라에서 쓰던 대전의 자형을 간략하게 만들어 통일왕조에서 사용할만한 한자를 정리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일왕조 진대의 공식서체로 사용된 소전이다.
지금 볼 수 있는 소전 자료로는 허신의 『설문해자』에 실린 소전이 대표적이다. 허신은 소전을 포제자로 삼아 총 9,353자의 소전을 수록하여 자전을 만들었는데,『설문해자』는 역대로 귀중한 저서로 학자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2000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또 그 덕분에 소전 역시 현재까지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소전은 전체적으로 약간 타원형이고, 획의 굵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며, 곡선의 형태가 많고, 좌우 혹은 상하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문 자형 중에서 동일한 형태가 중복되는 편방은 생략시켰고, 전체적인 형태를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던 편방을 하나의 형태로 통일하였고, 한 글자 안에서 편방의 위치를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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