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적 선교의 꿈, 신과 같은 선교사
이재환 선교사
- 이재환 선교사는 모슬렘의 나라 감비아에서 15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했으며, 현재는 미국에서 아내와 함께 선교단체 ComeMission을 섬기고 있다.
사도행전 14장을 읽다가 깊은 감동에 빠져 기도제목들이 튀어나오더니 마침내 가슴이 뛰었다. “우리도 신과 같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평생 한 번도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이로 인하여 루스드라 사람들이 신이 현현했다고 믿고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바울을 허메네오로 명명하고 소를 끌어 오고 화환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바울은 옷을 찢으며 “우리도 당신들과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라고 외치면서 이 기회를 복음 전하는 절호의 찬스로 삼았다. 너무 멋있다. 두 사람이 놀라운 기적을 행함으로 신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처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김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신적 대우를 통해서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역사들은 꿈이 아닌 실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제를 실제로 믿지 않고 꿈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실상은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도행전은 역사서이다. 꿈이나 이상을 말한 예언의 책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서이다.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다면 우리는 이 책을 과거의 역사서로 보지 말고 현 사역의 지침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어제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하셨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시는 것이다. 14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라고 말한다.
‘신과 같이 존경받았던 사도’들을 통해 그 어려운 이방인들의 믿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꼭 기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할까? 지성 감성 영성이 온전한 사람 중의 사람으로 선교지에 보여 져야 할 것이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우리 동네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나쁜 종교지만 Mr. Lee의 종교는 좋다” 감비아는 이슬람 국가이다. 기독교는 진짜 종교가 아니라고 이미 세뇌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결코 좋은 종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 찾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선교사는 많은 나라에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많은 나라 안에서 특히 이슬람권 안에서는 결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되고 살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앞잡이라고 생각을 하기도하고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사가 아닌 것처럼 살면서 복음의 기회를 찾고 있다. 심지어는 내부자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선교사 자신이 내부자가 되어 복음의 기회를 찾는 자도 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루스드라 사역 후 유대인들과 안디옥 그리고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을 것 처럼 만들어 버린 후 시외로 끌어냈다. 그런 중에도 바울은 다시 살아나서 쉬지 않고 사역을 했다. 생애 가운데 바울은 위대한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이처럼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놀라운 일들이다. 기적이고 이적이고 혁명처럼 느껴진다.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과 환난은 항상 함께 가는 일임을 알게 된다. 전자는 많은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임을 알게 하고 후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하며 금식하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준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를 통해 영광을 얻게 되지만 그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아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복음의 영광과 전파자의 아름다움 삶이 적혀 있다. 이 양면적 삶의 능력이 바로 사도행전적 선교의 삶이며 사도들이 신처럼 보이도록 살았던 모습이다. 베드로가 던진 말에 깊은 찔림을 받는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으나 내가 가진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한 말씀이다. 그 말을 받은 앉은뱅이는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했고 성전 안으로 예배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은도 있고 금도 있고 돈도 있으나 진정한 영적 파워가 없다.
사도들은 참으로 신 같았다. 초대교회의 시절이나 초창기의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분들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랬고 사랑의 원자탄이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그러셨다. 이름도 없이 살다가 죽은 순교자들, 이들 모두가 작은 하나님처럼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옮긴 자들이다. 작은 하나님 같은 선교사들이 이 사도행전의 인물들처럼 주님의 모습을 따라 기적과 이적, 그리고 소금 같은 삶과 빛 같은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들로 살았으면 좋겠다. 거기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주셨던 권능과 역사를 일으키는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소원한다. 이런 선교의 역사가 지금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간발적이고 지엽적인 것을 보면서 사도행전 2장의 17이하의 약속을 바라본다.
시편 8장 5절에 “그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한다. 과거의 개혁성경은 ‘하나님보다’를 ‘천사’라고 번역을 했었다. 영어 NIV는 ‘Heavenly beings’라고 번역을 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는 ‘천사보다 잠시 못하게 하시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주님의 실제를 나타내는 말씀이지만 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을 예언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이 우리에게 천사가 흠모하는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심은 바로 그보다 더 큰일을 통해 그 분을 전하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천사보다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하나님으로서의 복음 전도자가 바로 말세에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15억이라는 이슬람의 무슬림을 보면 불가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작은 하나님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 거대한 산은 평지가 되거나 옮겨질 것이다. 8억의 힌두가 무너질 것이다. 4억의 불교가 무너질 것이다. 1,400만의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 숨겨진 미전도종족이 무너질 것이다.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 선교사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그 날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사도적 선교의 모델은 바로 말씀의 확신, 성령의 능력, 선교의 열정, 그리고 삶의 균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작은 하나님 같은 선교사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절실하다. 이들에 의해서 사도행전적 선교는 지속되어 마지막에는 최대의 선교의 추수기(The Great Harvest Season)를 이루게 될 것이다. 모든 선교사들이 제우스신처럼 그리고 허메네스라고 생각하여 그 앞에 엎드리는 자들을 향해 “ 여러분 저희도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외쳐 가르쳐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을 꿈이 아닌 실제로 보고 싶다.
|출처/선교타임즈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