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평신도 선교동원 방안 연구 (이재웅)

수호천사1 2011. 2. 10. 11:35

평신도 선교동원 방안 연구

직장선교대학 / 이 재 웅


Ⅰ. 서론


  A. 문제 제기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 영역을 교회 안으로 국한시킨 결과 하나님의 활동영역마저도 교회 안으로 축소시켜왔다. 그래서 20세기의 선교학적 논의 중 하나는 선교의 영역을 교회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교회 밖으로 확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등장하였는데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영역도 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 되었으며,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 문화가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모든 교단과 전통, 교리와 신학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총체적인 선교활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명을 일깨워주었다.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에 교회역사상 기록할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목회자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동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평신도들이 교회 사역의 대부분을 감당해 왔고 교회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사회에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이는 평신도사역을 교회에 제한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주 활동무대인 직장이나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하도록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평신도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제도화된 교회만 섬기는 내향적인 존재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차적 원인은 평신도 자신에게 있지만 목회자가 평신도의 사역을 교회 중심으로 하게 하였고 사회 속에서 사명을 다하도록 구비시켜주지 못한 책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일꾼이고 도구이다. 이를 위해 평신도는 제도적 교회에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세상에서 선교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B. 연구 목적


       21세기 선교에 있어서 평신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목회학적 측면에서 요청받고 있다. 지금까지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였으나 미래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된다. 미래교회는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을 통한 교회성장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에게 의존되어 있던 목회 패러다임을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제 평신도들의 역할과 기능을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사회 속으로 확대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1)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에 의하여 신앙뿐만 아니라 직업관, 인생관, 가치관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현대는 정치, 경제, 문화가 사회 구조와 방식이 급변하고 있다. 토인비 교수는 "미래는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전 세계는 도시화하여 간다. 세계의 인구동향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도시화 현상은 교회성장에도 큰 영향을 주어 교회의 도시 집중화가 일어나고 있는 반면 농촌교회는 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집중화는 효과적 전도의 이점이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전달이 용이하며 공장, 직장, 사무실이 밀집되어 접근이 용이하다.2)

       오늘날에 있어서는 초대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적 환경과 문화가 변했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소수의 목회자나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숫자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신도에 의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하기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평신도 선교사역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은 증대되었고 평신도를 통한 선교를 위하여 교회와 신학교의 관심과 지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형편이 되었다.

       셋째로 선교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의 선교전략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것과는 달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아시아의 선교지 들을 볼 때 선교사가 외국에서 선교하는데 비자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외국 선교사의 비자규제정책을 채택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자획득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직업선교, 의료선교 등의 방법을 통한 선교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국의 선교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략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접촉하는 평신도 자원이 유용하므로 이들을 위한 선교훈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평신도 선교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이 시대에 평신도를 선교자원으로 동원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평신도들이 시간․공간적으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삶의 현장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평신도들이 목회자의 동역자로서 사회 속에서 목회와 선교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목회의 영역은 훨씬 넓어지게 될 것이다.

  

   C. 연구 방법


       본 논문은 한국교회의 98%를 차지하고 있는 평신도를 어떻게 선교자원으로 동원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평신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재조명하고 정립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평신도는 목회자의 동역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보조자에 불과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평신도가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평신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제Ⅱ장에서 서술할 것이다.

       제Ⅲ장에서는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을 서술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목회자와 평신도와의 관계, 특히 그 중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일이다. 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혼동하여 쓸데없는 갈등을 유발하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선교사역에 지장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목사와 평신도의 역할 구분이 정확하지 않아 충돌과 갈등이 일어난다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전통적으로 선교사라고 하면 정식 선교사 훈련을 받고 교단의 인정을 받고 목사와 선교사의 신분으로 해외에 파송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식적인 목사․선교사 신분으로 선교를 허용하는 국가는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평신도들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창의적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평신도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제Ⅴ장과 제Ⅳ장에서는 평신도의 선교에 대하여 종교개혁이후부터 지금까지 평신도 선교역사과 평신도 사역을 살펴본 후 앞으로의 가능성을 서술하고자 한다. 기독교 역사상 훌륭하게 선교사역을 했던 평신도들이 있었는데 이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가능성을 말해 준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한국의 선교에 있어서 사역을 해왔던 평신도들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여기에는 충분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와 선교 사역에 있어서 그 주도적인 역할을 목회자가 해왔고 평신도 사역을 과소평가한 결과에 있다고 본다. 이제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국내외 평신도 선교 사역을 문서화하고 공식적인 선교 사역으로 인정하여 앞으로 다가올 평신도 선교 사역의 근거로 삼는 일은 시급한 과제중 하나이다.

       제Ⅵ장에서는 마지막으로 평신도 선교동원 방안을 위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평신도가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자원이라 것을 인식 하였지만 어떻게 동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평신도 선교동원 방안을 제언함에 있어서 객관적 진술보다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이 부분은 교회뿐만 아니라 범교단적 차원에서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Ⅱ. 평신도에 대한 이해


    A. 어원적 이해


       평신도를 가리키는 영어 명사 ‘레이티’ (Laity)는 본래 희랍어 ‘라오스’를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그런데 70인 역에서 ‘라오스’ 는 히브리어 ‘암’이 번역된 단어이며 ‘암’은 구약성경에서 ‘백성’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라오스’가 유대인 그리스도들과 함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는 구약보다 더 확대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3)

이 단어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즉,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신약성경의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교회에서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1960년대 이후부터 사용하였다. 평신도라는 용어가 나오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신도, 교인, 성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교계에서나 신학계에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평신도 운동을 제창하고 나온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B. 성경적 이해


       성경적으로 평신도(laikoi)라는 단어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다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영예로운 단어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laikoi, 벧전 2:9) 으로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4)

       출애굽기 19:5-6절에서는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과의 계약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의 의미와 그들이 가지는 선교적 역할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세 가지 이름을 주셨다. “열국 중에서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그것이다.

베드로전서 2:9-10에서는 ‘택하신 족속’ 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고 ‘제사장 나라’ 대신에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다.5)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새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 불신자들 사이에서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처럼 평신도는 그 소명이 분명하다. 평신도는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서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자들이다. 즉, 평신도는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평신도는 세계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요, 전 세계를 축복하는 하나님의 통로이다.6)

       베드로전서 2:9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주신 목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해야 할 내용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 과거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들과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등 이다. 본문은 평신도들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목적이 선교에 있음을 밝히 말하고 있다. 평신도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7)


    C. 교회사적 이해

 

       14세기 후반에 존 후스(John Hus 1373-1415)는 남부 보헤미야를 중심으로, 당시의 교황제도에 반발하면서 아울러 평신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위클리프의 저작들과 성경연구를 통해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주장했다. 그의 평신도 운동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엄격한 중세교회의 개혁을 계속 주장하게 했다. 이러한 후스의 영향력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17세기에 일어난 유명한 평신도 운동인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성서적 신앙과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에서 멀리 떠난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95개조의 항의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났다. 루터는 교회를 ‘교황이나 교회의 전통이 아니고 성도의 교제’라고 보았다.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누구나 같은 제사장(만인제사장론)이며 평신도와 안수 받은 사제 간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오랜 세월 동안 소외되어 왔던 하나님의 백성인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와 사명을 근본에서 다시 회복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활기찼던 평신도 생활은 과학의 새로운 발전과 산업에서의 새로운 발달로 인하여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오래된 분열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간에 일어난 새로운 균열이었다. 산업과 경제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은 교회의 관할권과 관심 밖에서 발전하였다.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가정과 교회에서의 봉사 그리고 개인의 도덕적인 생활속에서 좁아들었다. 과거에는 신앙생활이 평신도들의 생활전체를 지배하였으나 이제는 한 부분 즉 여가시간에 영위되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부분과 관계가 있을 뿐이었다. 이로써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교회안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평신도의 중요성이 각 교파마다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도 제2차 바티칸 종교회의 (1962-1965)에서 평신도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평신도들에게 성경읽기를 허용한 것, 예배시에 성경을 봉독케 한 점, 그리고 평신도가 세상에서 사도적 역할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제1회 암스테르담대회(1948)이후 모든 대회마다 평신도의 사역에 대해서 강조해 왔다. 1948년에는 한 분과 위원회의 프로그램에서 평신도 문제가 특별주제로 주어졌다. 1968년 웁살라대회에서는 “남녀 평신도들은 그들의 선교적 헌신을 교회안의 봉사 차원분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과 공공봉사에서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 진영의 세계교회에서도 평신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화고 있다. 1966년에 발표된 휘튼선언에서 ‘거대한 평신도 집단에 대한 훈련과 활용이 너무 부족하다’는 문제를 인식했다.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로잔대회에서 메디슨 포드는 평신도의 활발한 참여에 대하여 전 세계 교회에 호소했다. 1989년 7월 필리핀 마닐라에 개최되었던 제2차 세계복음화 국제 대회, 즉 제2차 로잔대회에서 발표된 ‘마닐라 선언’에서는 평신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전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맡기신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따라서 안수 받은 자와 마찬가지로 평신도 모두가 이 복음화 사역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하고 훈련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평신도,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의 사역을 돕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모든 평신도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바른 위치를 가지도록 격려하고, 도와서 주님의 대사명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


       D. 신학적 이해


       루터의 평신도 신학은 그의 주요사상인 의인사상, 성서이해, 교회이해, 그리고 만인제사장론에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평신도의 위치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만인제사장론이다. 만인제사장론에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나 평신도나 다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였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단지 직무의 차이뿐이지,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만인제사장론이 목회자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목회자를 세워야함을 주장하였다. 다만 루터는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들의 사명을 놓치고 있다.

       카톨릭에서 평신도신학을 확립한 대표적인 인물은 콩가르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교회안의 평신도’이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혁명적인 서술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교회는 곧 성직이라고 규정하며 성례전적인 몸으로서의 성직자의 권리라고 강조해 온 교회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교회론이었기 때문이다. 콩가르의 평신도 신학은 오랜 세월 성직자의 독점이었던 교회에 대하여 평신도의 지위를 끌어올림으로서 평신도의 교회적 위치를 회복하는데 공헌하였다.

       핸드릭 크레머의 평신도 신학은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이 세계와 인류를 향하신 것이었으며 그러기에 전 인류는 하나님의 관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크레머의 평신도 신학은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비젼을 가지는 교회 즉 신앙공동체에서 찾는다. 또한 교회의 사역은 전통적으로 예언적, 제사장적, 왕권적 사역으로 구분되었는데 크레머는 여기에 ‘고난 받는 종’이라는 새로운 사역을 추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평신도 신학은 교회의 전체적인 일원으로 세계를 대변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 하는 선교적인 ‘고난 받는 종’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전 인류의 구원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는 세계는 하나님의 활동무대이다. 평신도 신학은 교회안에서의 참여의 증진만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증언의 자리와 그 속에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여기서 평신도 신학은 대변적이며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기에 크레머의 평신도 신학은 교회적인 차원과 선교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양차원의 것이다.8)

 

Ⅲ.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


     A. 목회자와 평신도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목사와 평신도의 역할 구분이 정확하지 않아 충돌과 마찰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할이 지위를 결정하는 문화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역할을 바꾸지 않으면 지위를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신분과 지위를 바꾸려면 당연히 역할을 바꿔야 했다.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과 평신도의 역할이 따로 있는데 그 역할은 서로 다르고 역할이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역할은 다른 역할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편견을 갖게 되어 목사는 일반교인들과 달리 인식되어 지고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되고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문제는 목사와 평신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목사의 역할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목사의 역할을 평신도가 감당하려는데 있다. 목사와 평신도의 지위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와 평신도의 역할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역할을 정확하게 구별해 주고 목회자의 역할을 놓고 벌이는 경쟁과 갈등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공적 예배의 말씀 선포는 목사가 전문적으로 전담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말씀의 선포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은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개신교에서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의미하는데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예식 중의 하나이다. 이 성례는 목사가 전문으로 전담해야 할 사역중의 하나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 하는 것은 목회의 전문적인 사역으로 목사에게 전담케 하는 것이 옳고 바람직하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과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교회는 혼란과 갈등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지만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모든 성도가 은사를 부여받은 사역자들로 설명되고 있다. 각 지체는 성령의 나누어주심을 통해 은사를 받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들에게는 지식을, 어떤 이들에게는 지혜를 ... 주신다. 여기서 등장하는 성령의 역사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목회자와 평신도를 사역의 관점에서 구분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목회자가 여기서 제시된 여러 직책 중에서 하나의 직책을 맡게 된다면 당연히 다른 직책들은 평신도의 몫이다. 목회자는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은 한 직분자이며 평신도들 역시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은 다른 직분자들이다. 성도가 부름 받은 것은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2장9절)  바울도 에베소서 4장11-12절에서 평신도의 지위를 사역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재 미국교회에서는 목회자를 ‘패스터’ (Pastor)라고 부르고, 평신도 사역자를 ‘미니스터’ (Minister)라고 부른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나 두려움,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다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내에서 사용되는 ‘미니스터’(Minister)라는 말은 주로 목회자들에게 독점되어 있으며, 평신도 사역자들에게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B. 평신도의 사역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목회자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다같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서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을 구별해서 각기 맡겨진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보다 더 힘 있게 참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목사로서 교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며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많은 평신도가 평신도 사역을 단순히 직분과 연관시킨다. 그래서 직분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사역자가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심지어 평신도 중에는 사역을 역할을 섬김보다는 교회내 지위 상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목회영역은 더욱 전문화되고 목회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교회는 다양한 사역을 수행하는 평신도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평신도 신학의 권위자들인 브루스 라스손과 랄프 오스븐은 오늘날이야말로 평신도를 참여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때라고 말한다.

       “ 교회성장의 가장 큰 장벽 중의 하나는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사역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 혼자만 가진 비전이나 통찰력, 그리고 목사 혼자만 인정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이렇게 다양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일방적이고 비효과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뻔한 일이다.”9)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많은 성도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가장 적절한 교회는 전문분야를 담당할 평신도 사역자를 세우는 교회일 것이다.


       1) 제사장적 직능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이 말은 기도와 예배에 있어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제사장은 중간에 그 누구의 중재도 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전원이 참여하여 드리는 것인데 평신도들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배하는 자이며 자신의 몸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2) 예언적 직능

       평신도가 예언적 직능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설교와 교육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평신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또 가르쳐야 한다. 평신도는 누구나 말씀의 증거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특수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설교와 교육과는 구분된다.


       3) 왕권적 직능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곧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기관과 조직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행정적 사무와 교회사무와 교회정치가 따른다.


Ⅳ. 평신도 선교


    A. 평신도 선교의 성경적 근거

       독생자를 세상에 주신 하나님은 선교의 주역이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교의 대상인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 (요3:16, 요일4:19) 선교의 주역이신 하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며 동등하신 예수님을 종의 형체로 세상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주셨다. (빌2:6-8) 여기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칼빈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언하셨다”고 표현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 (눅19:10)이며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 고 하였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아직 하나님의 품에 오지 않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큰 관심을 가진다. 양 일백마리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다닌다. 특히 세상속에서 사는 평신도는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신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후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요17:18)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마28:19)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선교 사명을 주어 파송한 것처럼 평신도는 세상 속에 선교를 위해 파송되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의 명령을 하신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 (요14:16)고 하신대로 지키셨다. 성령께서는 선교의 사역을 하도록 담대하게 복음증거하게 하신다.

평신도는 지역교회 안에서 중요한 봉사자로 친교와 봉사에 참여하여 교회공동체를 구성하고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봉사를 교회의 영역에 제한하지 말고 사회를 향한 봉사와 선교적 사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인 동시에 선교를 위한 공동체로 복음증거의 사명을 갖기 때문이다.

       평신도는 주일 이외의 날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평신도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를 벗어난 생활이 아니라 교회의 확장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평신도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평신도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야 할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선교에 있다.


     B. 평신도 선교의 신학적 이해

       은준관은 크레머의 평신도 신학이 끼친 영향과 의미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로 평신도 신학은 선교적 사건(Missionary Event)으로써 의미가 있으며 한국적 상황에서는 평신도의 성직화도 아니고 반성직운동도 아니라 다원화된 세계상황을 위한 평신도 선교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둘째로 평신도 신학은 평신도로 하여금 교회구조의 참여와 세계구조속에 복음의 증언자로 사역하게 한다.

       셋째로 평신도 신학은 평신도 사역(Lay Ministry)이라는 새로운 사역으로 평신도의 소명을 발견하게 했다고 본다. 평신도는 선교를 위한 세계속의 ‘준거 집단(Reference Group)'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평신도 신학은 교회의 교권화와 고립화로부터 교회가 세계 변화의 선교 증언자로써 활력을 갖게 하는 다양한 선교구조의 이해와 참여를 말하게 된다.10)

       1989년 마닐라에서 열렸던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발표된 문서에는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목사의 우선적 파송을 제시한 것은 없다. “마닐라 선언서”에서 포괄적 선교 및 통합적 선교를 강조하였다. 교회 개척선교와 교회수의 증가를 정책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든 교회와 교인에게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과제를 맡기었고 안수 받은 자들과 평신도들이 다 이 과제를 위하여 동원되고 훈련받게 되기를 우리는 갈망한다.” (제12조항) 한국교회가 목사 위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한국적 상황을 비판없이 타문화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이며 이제는 이 점을 검토할 때에 이른 것으로 본다.  (평신도의 선교요원화, 14p)


     C. 평신도 선교의 역사적 고찰


      1. 로마제국 시대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많은 순교자가 속출하였지만 이 대부분의 순교자가 거의 평신도들이었다. 국가가 강요한 모든 행위는 신앙에 위배된다 하여 반대했던 평신도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사업에 매진하였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평신도로 시작된 운동이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사제의 계급이나 가문에서 나온 사람은 별로 없다. 사도 후 시대의 교부들 (Clement, Hippoclytus, Tertullian)의 기록에도 평신도로서 예배, 교육, 자선, 증거, 고행 등등의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실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초대교회의 유명했던 신학자로 저스틴 (Justin), 터툴리안, 판테누스 (Pantaenus),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 (Origen) 등은 모두 평신도였다. 그 중에 오리겐만 후에 사제가 되었다. 애굽과 시리아의 수도승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고, 프랜시스칸 운동도 사실은 평신도 운동에서 발단되었던 것이다.


      2. 종교개혁 이전


       성직주의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 초기 수도원운동이다. 그들은 주로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순수한 기독교적 삶을 추구하였다. 평신도들은 수도원에서 열심히 수도하며 경건한 훈련을 쌓았다. 이러한 수도원의 평신도들은 중세시대에 파리대학을 위시하여 각국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그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또한 신부 외에는 설교를 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수도사들은 소외된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므로서, 평신도의 영적 생활에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11) 그 중에서도 로욜라 중심의 예수회는 주도적으로 세계 선교 사역까지도 감당하였다.

       12세기초 교권에 반대하여 남부 프랑스에서 피터 왈도 (Peter W미애)와 함께 일어난 평신도운동이 월덴시안 (Waldensian) 운동이다. 피터 왈도는 매우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복음을 전하였다. 왈도는 설교금지령을 받았지만,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을 더욱 확신하고, 더 많은 평신도 설교자들을 배출하여 전도케 하였다.12)

       14세기 경에는 평신도 중심의 전도가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의 사역을 중심으로 평신도 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므로 평신도들로 하여금 복음전파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약성경의 모형대로 둘씩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도여행을 실시했다. 그의 제자들을 일컬어 ‘롤라드’(Lollards) 라 불렀다. 그리고 교회의 확실하고 유일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증거하였다. 그루트(Groot)는 평신도 설교자로서 평신도를 조직해서 교역에 전력했다. 그가 설립한 교역기관에서 토마스 (Thomas a Kempis), 에라스무스 (Erasmus), 그리고 루터 (Luther)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존 후스 (John Hus)는 남부 보헤미야를 중심으로 당시의 교황제도에 반발하면서 아울러 평신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위클리프의 저작들과 성경연구를 통해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주장했다. 그의 평신도 운동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엄격한 중세교회의 개혁을 계속 주장하게 했다. 이러한 후스의 영향력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17세기에 일어난 유명한 평신도운동인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평신도와 안수 받은 사제간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오랜 세월 동안 소외되어 왔던 하나님의 백성인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와 사명을 근본에서 다시 회복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3. 종교개혁이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교회 내에서 설교의 직분이 강조되면서 설교자들이 새로운 목회자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은 성경의 핵심으로 만인제사장론을 찾아내어 주장하였지만, 루터의 교회론과 만인제사장론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평신도의 공동적인 선교와 섬김이 약화되어 있었다. 칼빈은 루터보다 목회자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였다. 결국 만인제사장론은 실질적인 존재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장식품으로 남아있어야 했다.13)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역사에서 자력으로 신학자가 되었던 평신도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의 유명한 ‘기독교 강요’는 성직자나 신학자의 작품이 아니라 평신도의 작품이었다. 17세기의 번연 (Bunyan), 밀턴 (Milton), 라이프니츠 (Leibniz), 그리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같은 평신도 신학자들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17세기의 평신도 운동은 경건주의에서 크게 영향을 입어 일어나게 되었다. 경건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야콥 스페너 (Jacob Spener)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루터교 목회자로서, 교회의 평신도들을 그룹을 만들어 성경공부와 기도에 대해서 지도하였다. 특히 프랑케 (A. H. Franke)는 평신도들에게 그들의 은사를 일깨워주며 선교사역에의 소명을 심어 주었다. 그의 경건주의 사역은 할레(Halle)에서 꽃을 피웠는데, 여기서 그는 선교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모라비안 형제단에게 영향을 받은 평신도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Nicolaus von Zinendorf)는 세계 선교를 위해 평신도 남녀로 구성된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직접 카리브해와 미국 등 선교 현지를 방문하여 사역을 돕는 등 33년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선교에 대한 그의 최대의 공헌은 그가 많은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경과 윌리엄 윌버포스 (Willim Wilberforce)는 자신들의 기독교적 소명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표현했던 두 명의 평신도였다.


       4. 근세

       

       19세기에는 18세기에 일어난 ‘영적 대 각성운동’의 영향으로 평신도운동이 선교사역과 지역교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일어났다. 19세기 말경에 일어난 학생신앙운동 (SVM)은 괄목할만한 평신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존 월더와 당시 YMCA 코넬 지부장이었던 존 모트 등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평신도 존 모트 (John R. Mott)는 학생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영국 출신의 평신도 하워드 기니스 (Howard Guiness)는 자신의 운동 장비를 팔아 캐나다행 배삯을 지불하고, 기독학생회 (IVCF, 나중에 이렇게 불린다) 운동을 캐나다에 전해 주었다.14)

       평신도 무디는 학생신앙운동의 설립에 막대한 역할을 감당한 지도자였다. 1886년 여름 메사츄세츠州에 있는 헬몬산 연합집회에서 무디는 설교를 통해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여기서 100명의 학생들이 선교에 헌신할 것을 결단하였다. 1880년대와 90년대에 ‘학생신앙운동’은 일생을 선교에 바치기로 결단한 10만 명의 선교사 지원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 2만 명이 실제로 해외로 파송되었다. 이들의 수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전 세계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의 절반가량이라고 추정되고 있다.15)

Ⅴ. 평신도 선교의 평가와 전망

  

    A. 평신도 선교의 평가

       

       교회가 평신도를 재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선교사역을 목회자의 소유로만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목회자와 평신도가 협력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평신도들에게 제한해 왔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평신도 신학에 대한 책을 펴내면서 새로운 주제에 대한 연구를 가능케 하는 기초를 세웠다. 아직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위상정립과 재발견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는 목회자 중심, 주일중심, 교회당중심, 예배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주일에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성도가 많다. 물론 이러한 것은 교회의 본질이고 핵심이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이것으로 교회의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일성수를 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이지만 평신도들이 사회에 나가 평일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이며 현대선교의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도움과 지도를 받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목회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면 이제 목회자의 역할과 함께 평신도의 사명과 역할과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은 교회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각성하여 선교하고 자신의 처해 있는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가능하다. 교회의 선교는 평신도의 선교이며, 교회의 개혁은 평신도의 개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선교이론과 실제를 앞으로 “상황화”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다양한 선교분야의 전문인의 역할이 시급하다. 현재 선교 이론은 대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선구 선교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이론을 검토하고 상황화를 시도하여야 하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급하게 선교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고 확장과 성장에 집중하였으므로 서구의 선교이론과 실제를 배워 모방하는데 탈피하지 못했다. 선교 실제의 심층분석과 선교신학의 작업은 선교지에서의 이웃과의 지속된 만남과 대화, 협력사역을 통하여 시간과 함께 가능한 작업이라고 본다.


    B. 평신도 선교의 전망


       지금까지의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는 은혜 받고 배우고 순종하는 것으로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특수한 계층의 사람만 복음 사역에 헌신할 것을 교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인류구원사역의 역군으로서 “그리스도의 일꾼” (고전4:1) 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21세기의 사회구조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미래인의 사고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미래인의 몸에 맞는 교회로 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구조조정이 곧 평신도 중심의 교회 구조로의 전환이다. 이제 목회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구조는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 구조로 조정되어야 한다.

       평신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목회자는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목회자가 가질 수 없는 전문적 영역을 평신도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의 잠재력은 목회자 개인이나 교회에 굉장한 힘이 될 수 있다.16)

       온 교회가 온 세계를 향해 복음의 온전함을 다 증거 하는 시기이다. 목회자에게만 의존하는 선교에는 제한이 크다. 선교사가 목사로서 교회 개척 및 교회 중심의 선교를 해야 할 때 파송하는 교회와의 교단 관계 때문에 선교지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협력의 장을 열기보다는 교단 교회의 특수성에 매이기 쉽다. 평신도 선교사 경우에 자기 전공 분야에 따라 전공 영역에서 만나는 이들과 현지 교회에서 더 융통성 있는 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다.

       교회 개척 선교가 어려운 지역 대상으로 하여 평신도의 선교사를 적극적으로 격려할 필요가 있다. 교회 개척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천년이상 교회 전통이 있는 지역이다. 또 하나는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서 지금까지 교회 전통이 없는 곳이다. 이러한 지역을 위하여 목사 아닌 전문직 선교사가 요구된다. 현재 20억의 인구가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평신도 선교를 통한 미전도 종족 선교이다.

       이미 교회가 다양하게 세워진 선교사의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보다는 평신도를 원한다. 선교에 헌신하면서도 자기 전공에서 유능하게 일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전문직을 가진 선교사가 주일에는 현지 교회에서 평범하게 봉사하기를 바란다. 목사는 주일 강단을 원하므로 이미 있는 교회에서 협력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현지교회 지도자들은 목사인 선교사를 경계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 선교사들의 70%가 목사로서 주로 교회 개척, 교회 목회, 신학교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신도 선교사의 수는 대조적으로 적다. 불균형의 파송 현황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시아에는 현지 교회 지도자들이 평신도 전문인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적어도 한국 선교사의 반은 평신도이어야 한다. 목사들이 선교부의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목회자 중심의 선교사 파송을 한 것 같다.

       평신도 선교사는 선교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현재 한국 선교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선교비인데 선교비 책정 문제, 선교비 지급 과정의 문제, 선교비 모금 문제, 선교비 관리 문제등이다. 

입국 문제가 아직도 어려운 나라들이 있다. 목사의 신분으로서는 들어갈 수 없고 선교사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는 지역이 있다. 선교사라는 신분으로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을 위하여 그 나라 정부가 환영하는 직업인들이 선교사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미 각 나라에서 다양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 교인들에게 평신도 훈련과 선교사의 훈련을 제공하고 그들의 이민생활과 또는 단기간의 파견생활을 복음선교를 위한 선교의 차원으로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무진장의 평신도 자원을 훈련시켜 동원하여야 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평신도들을 선교사역의 일선에 서게 하면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선교 사역도 얼마든지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엘톤 트루블러드 (Elton Trueblood)는 평신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지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생명력 안에서 세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17) 평신도들 안에는 세계를 흔들만한 생명력과 힘이 존재한다.


Ⅵ. 평신도 선교동원을 위한 제언


       성도들의 삶은 크게 개인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로 구별할 수 있는데 (골3-4장) 이중에서도 특히 사회생활은 평신도들의 삶의 중요한 영역이다. 지금까지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주로 개인과 교회생활에,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실상 성도들에게 도움이 가장 필요한 가정이나 직장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직도 직장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도 커다란 사회운동을 못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직장속에서 빛과 소금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크리스찬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도록 적용할 수 있는 설교가 되게 해야 한다. 실제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의 대부분은 사회생활보다는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선포되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 동안 직장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와서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설교말씀은 그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지기 쉽다. 설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했을지라도 듣는 사람들의 상황과 무관하다면 의사소통의 기본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에도 어긋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벧전1:23)

       둘째로 평신도의 사역의 범위를 교회에서 사회로 까지 확대해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너무 많은 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고 하소연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평신도들의 참여가 없이 전임 사역자들만으로 교회 사역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교회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사역으로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더러 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이루어지는 사역도 중요한 사역으로 인정해 주며 그것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골3:23) 하라고 하신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장막 고치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살전2:9)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 제도적으로 교회사역의 안식년 제도를 두어 기회를 주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셋째로, 평신도직업인들을 선교 동원 하는데 있어서 교회는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직업인선교사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가 별로 없다.  현재 해외 선교사 가운데는 과거 전문직에 종사하던 평신도가 전적으로 선교에 헌신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고 선교지에서 목회자 선교사를 도와서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경우 그가 목사가 아니라고 해서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거나 파송 및 후원을 하지 않는다면 선교에 막대한 장애를 주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의 전략적 측면을 고려하여 평신도선교사와 목사선교사를 동역자로 이해하고 대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나 교단은 평신도가 선교에 온전히 헌신하고, 교단이 인정할만한 일정한 선교 교육 및 훈련 과정을 거친 후, 동일하게 선교사로 인정하여 파송, 후원 및 관리를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넷째로, 직장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내에 직장선교부를 두어서 평신도들이 직장내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체계적으로 도우며, 가능하다면 전임사역자가 선교사역을 담당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한 연구와 훈련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선교의 열매를 교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 직장인의 사역은 중요하다.  교회가 이런 시대적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 영역에 헌신할 때 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훈련을 받은 성도들이 제자에서 사도로 전환되어야 하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많아야 다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교회 가운데 한국교회가 23교회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4,500명 이상이 되며 주일이면 교회마다 많은 교인들이 가득 교회를 메운다. 그러나 교회밖에는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진다. 이것은 교회 안에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지만 교회밖에는 없다는 뜻이며 교인들은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섯째, 지역 교회, 신학교, 복음적인 선교 기관은 평신도 선교사역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협력함으로 평신도 사역이 뿌리내리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평신도들에게 성서적 직업관을 가르쳐 자신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천직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평신도 선교 사역의 성공적 사례들이 널리 소개되고 사역의 기술과 경험들이 공유되어야 하며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Ⅶ. 결론


       평신도 선교 동원에 있어서 평신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평신도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중에 하나가 교회론에 관한 것이다. 흔히 교회를 건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모여 있는 공동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흩어져 가정과 직장에 있을 때에도 교회의 지체요, 교회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 현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 모여 예배드리고 흩어져서 전도하며 교회 성장을 위해 힘쓸 때에만 교회가 아니다. 가정에 있을 때에도, 세상에서 이웃을 만날 때에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전 중심의 활동이나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가정 , 직장, 사회, 정치, 문화생활, 등에서도 교회로서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다. 평신도들은 교회중심의 생활, 종교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으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정, 사회, 그리고 직장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도 못했고 훈련받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직장에서의 삶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결단하여 살고 있다.

       교회 역사적으로 평신도들은 교회의 침체에서 부흥을 가져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 역사의 현장에는 피터 왈도․ 존 위클리프․요한 칼빈․진젠도르프․디엘 무디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평신도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입증해 주는 증인들이다. 세상의 전문지식과 기술이나 직업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을 선교사역에 동원하는 것만큼 세상 속에서 효과적이고 이상적으로 선교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평신도들은 대부분의 시간과 삶을 세상 속에서 보내고 있는데 세상 속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지극히 일부분만 그리스 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의 시간 전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세상 속에서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목회자는 평신도의 역량을 교회에 집중시키는 내향적인 존재로 만들지 말고 교육시키고 무장시켜서 세상속으로 파송해야 한다. 그  평신도들이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들에게 맡겨진 선교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21세기 교회의 과제이다. 또한 오늘의 교회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무진장의 평신도 선교 자원을 동원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광대하고 부담되는 주제이므로 이 분야에 더욱 많은 연구와 실제적 적용이 필요하다. 필자의 부족한 선교․목회 이론과 사역경험으로 제한된 자료를 통하여 평신도 선교 동원 방법에 대하여 소견을 제시함에 불과하다. 또한 평신도 선교 동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훈련에 대한 부분을 다루지 못하였는데 평신도 선교훈련 목표, 단계, 방법, 모델등에 대해서는 더 연구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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