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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사 (5) / 영국의 종교개혁

수호천사1 2010. 7. 28. 18:19

종교개혁사 (5)

 

       

제 7 장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개혁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의 반대로 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진행되었으며,한사람에 의해서 주도된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조금씩 개혁쪽으로 이동되어 갔다. 따라서 영국의 개혁은 신학적인 이론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대륙의 개혁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였으며,그것도 주로 스위스 개혁자들의 사상으로 흘렀다.

 

1.튜더 왕조와 헨리 8세

 

리차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 이었던 스페인과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리 사이의 셋째딸인 캐더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 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도생 헨리 8세와 재혼 시킬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케더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8세와 결혼 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8세는 어쩔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할려고 했지만 케더린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 남았다. 후일의 역사는 그를 가리켜서 피의 여왕 메리라고 부른다.

 

이렇게 복잡하자 헨리8세는 정치를 추기경인 월시에게 위임한다. 월시는 수도원을 세속화 시키고 거기서 얻은 돈을 가지고 그리스도 대학을 세운다.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따라서 자신이 게더린과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이혼하고 앤과 함께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깜짝 놀란 케더린은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챨스5세에게 결혼 뮤효승인을 취소케 하였다.그래서 월시는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롬월이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롬웰은 헨리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 시킨다. 이 두가지 법으로 교황의 권한이 영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 할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여왕이 되었다.

 

1533년 9월 공주 엘리자베드가 태어나고 1534년 국왕의 영국교회 수장법이 통과 되었다.그리고 153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 시킴으로서 드디어 영국교회가 탄생되고 말았다. 앤은 두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계승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튜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드라고 명기 하였다.

 

1536년 앤은 두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 당하고 세번째 여인인 제인 세이모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후 헨리8세는 클리부스 앤과 결혼 하였으나 이혼하고 크롬웰도 참수 시킨다. 이제는 보수파에서 케더린 하워드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카돌릭6개 조항을 발표 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고 헨리8세는 케더린 하워드를 간통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 여섯번째 부인인 케더린 파르와 결혼 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서 에드워드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유지에 부심했다.즉 개혁을 향한 의지는 약하였다 그러나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새로운 독립을 유지 하였다. 그래서 영국 교회는 완전한 개혁측도 아니고,그렇다고 완전한 카톨릭측도 아니고 중간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오르게 되었다.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솜머세트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솜머세트는 개신교 추종자 였다.종교개혁은 속속 진행되었다.

 

[1]영국 전역에 대한 방문조사 겸 상황파악이 실시 되었다. 결과는 너무도 심각 하였으며,더 나아가서 당혹케 되었다. 여기에서 성직자의 무능과 무식이 지금까지 교회에 통용되어 왔으며,이것이 교회의 부패의 근원이었음을 지적 하였다.

 

[2]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 시킴과 더불러서 모든 이단법을 파기 시켰다. 이렇게 해서 영국교회와 국민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3]국회는 이종성찬을 허용하였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회는 신아의 미신적인 행위를 금하였다.

 

[4]에드워드 제 1기도서 의 작성이었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하였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부처 였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 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교회에 소개하기 시작 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 하였다.

[5]성경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 되었다.

 

[6]에드워드 제 2기 도서가 마련 되었다.

 

[7]영국교회의 대헌장이라고 할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 되었다. 물론 이 헌장은 엘리자베드 여왕 시절에 39개 조항으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8]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카톨릭교회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3. 메리 여왕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계승 문제를 야기 시켰다. 영국사람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조카인 챨스 5세의 자문을 구하였다. 메리 여왕은 한 많은 여왕 이었다.그래서 그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수 번복 하였다. 헨리 8세와 케더린과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메리는 적법한 왕위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 시켰으며,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여왕은 중세적인 예배전통을 그대로 복구 하였으며, 미사를 다시금 실시 하였다.

 

메리여왕은 스페인의 왕 필립과 결혼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 했다.대륙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서 왔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모두 대륙으로 되돌아 갔으며,영국의 개신교들도 대륙으로 도피 하였으며,가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다.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파견 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 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도들의 박해가 시작 되었다.

메리여왕은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 하였으며,불운한 삶을 살았던 자다.

 

4.엘리자베드의 수습

 

엘리자베드(1559-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교회를 개신교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한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러한 좀에서 청교도들의 출현은 당연했다.

 

[1] 엘리자베드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왕의 영국교회의 지존법을 통과 시켰다. 이렇게해서 헨리 8세의 모든 권한이 엘리자베드에게 주어졌다.

 

[2] 영국교회의 통일법을 통과 시켰다.그래서 성직자의 복장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것을 통일 시켰다.

엘리자베드는 1563년 두번째의 국회소집으로서 제 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더 종교개혁을 강하게 추진 하였으며,많은 점에서 칼빈 유형의 개혁교회의 형태로 기울어져 갔다.

 

[3]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39개 조항으로 개정 하였다.

그러나 1563년 두번째 국회는 영국교회의 통일법을 가지고 분열을 초래 하였으며,청도교측의 패배로 끝났다.로마교황청은 엘리자베드의 파문을 미루다가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드는 반교황법을 통과 시켰다.그리고 1585년 예수회사람들을 영국에서 추방 하였다.

 

엘리자베드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로마 교황권과 로마주의 신앙으로 부터 영국을 보호 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서 화려했던 과거의 영국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드의 영국 교회의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어느하나도 버리지 아니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영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지만 예배모범과 교회조직에서는 가톨릭 모범을 많이 반영한 복합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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