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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사 (6) / 과격파 종교개혁

수호천사1 2010. 7. 28. 18:19

종교개혁사 (6)

 

 

제 8 장 과격파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파,개혁 교회파,그리고 영국 국교회로 대별되는 3대 우파 종교개혁과 재세례파,신령주의파,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좌파 종교개혁이 있다.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에 대한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성경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 했다고 말할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우파에서 볼수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본다.

 

1.재세례파

 

재세례파의 기본적인 핵심은 성경의 초대교회를 이 땅에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2] 중세로부터 내려온 비교권주의 신앙운동들이 있었다.

 

[3] 이들의 과격한 행동에 이론적인 확인 작업은 루터가 바르크 부르트에 은거해 있던 동안에 비텐베르크의 개혁을 이끌었던 칼슈타드의 개혁안 이었다.

 

[4] 이렇게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과격파들에게 종말론적 신비주의 자들의 부르짖음은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라는 나팔소리와 같았다.

 

1)스위스를 중심으로한 평화주의자.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 부터 일어났다.콘라도 그레벨은 쯔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회를 조직하여 사람을 규합 하였다.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찬송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반대 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세속적인 직업 거부등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보니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파들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려고 했다.비폭력을 주장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2)뮌스터를 점령한 혁명적인 재세례파

 

이제는 제 2단계 재세례파인 혁명적인 구룹이 등장 하였다. 선구자는 멜키오프 호프만 이었다.그는 본래 루터파에 입문 했다가 쯔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그리고 예수님은 슈트라크부르크에 재림하셔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이런 소문이 네델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 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 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가톨릭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 하였다. 이제는 시민운동이 일어날 차례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인하여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주교군과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3)메노 시몬즈를 중심으로 한 평화주의 재세례파

 

새 예루살렘의 꿈이 깨진 다음에 재세례파 사람들은 다시금 첫 번째의 평화주의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메노 시몬즈는 네델란드 출신의 카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그래서 이들은 메노나이트라는 교회를 세우고 원하는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교인들의 말씀중심적인 훈련을 강조 하였다. 주의만찬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상징하며,불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 하였다.

 

이들은 3단계에 이르러서 평화주의를 되찾았으나,이들의 이론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먼저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서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둘째는 자의적인 세례란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그리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책임과,개인적인 경건과 보다더 성경에 철저하려는 이들의 동기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2.신령주의자.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을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서 자연적으로 반-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이들은 종교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속에 파고 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을 더욱 권위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있게 보았다.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쪽으로 흐르기 쉽다.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15612),세바스티안 프랑크(1499-1542),후안 데 발데스(1490-1541)등을 들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었다.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마련 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할수 있다.

 

3.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는것이 아니었다.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 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이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수 있는 폴란드,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 하였다.그리고 네델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수 있다.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그래서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께서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 시켰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 였다.흔히 유니테리안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었다.높은 학시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들 이었다. 다만 이들이 지금까지 존재할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윤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를수 없고 다만 기독교를 빙자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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