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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사 (3) / 스위스의 종교개혁|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수호천사1 2010. 7. 28. 18:18

종교개혁사 (3)

 

 

제 4 장 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서 산업이 발달할수 없는 곳이었다.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 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 하였다.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뇬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감으로서 상호 전투를 겪는 민족적 어려움을 겪었으며,챨스5세와 프란시스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수 없다.

 

1.쯔빙글리의 개혁

 

즈빙글리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 자차주의 빌드하우스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부락의촌장을 역임해 왔으며,외할아버지는 사제 였다 삼촌은 베젠의 학장으로 취임함에 따라서 쯔빙글리의 신학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삼촌은 새로운 학문조류인 인문주의를 받아들여 조카에게 전수해 줌으로서 자신의 역활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10세때에 베젤에서 바젤로 옮겨서 라틴어 문법,음악,그리고 변증학을 배웠다.1498년에는 베른 대학에 입학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수로 알려졌던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1500년 부터 2년 동안 쯔빙글리는 비엔나로 옮겨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보호 아래에서 학문활동을 하였다.

 

1502년에는 다시금 바젤로 돌아와서 성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으며, 1506년에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 하였다.

 

1)글라루스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1506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사제로 임직 되었으며,글라루스의 목회자가 되어 부임 하였다 10년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했고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시인, 웅변가,저술가들을 공부 하였으며,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서신교환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으며,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글라루스 목회자로서 자연히 용병으로 싸우는 글라루스 연대의 연대소속 목사로 두차례나 이탈리아로 갔었다, 이때부터 쯔빙글리는 용병제도의 위대성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스위스의 죄악,악덕,불신앙성,외국숭배와 이것이 조국의 자녀들을 집어삼키는데 대해서” 와 “황소의 우화”을 통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를 공격 하였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이며,풍자적 이었다. 이곳에서 쯔빙글리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수사학자,인문주의자,도덕주의자라고 말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2)아인지델른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서 교구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1516년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가로 알려 졌으며, 교부들의 책을 읽었고, 면죄부의 해악성을 설교 하였다.동시에 그는 주민들에게 마리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가르쳤으며,교황청의 악덕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1516년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3)취리히의 쯔빙글리

 

쯔빙글리는 적이 많았다. 그것도 교리적인 면 보다는 그의 자유 분방한 행동에 관한 성토가 대부분 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아님 다수에 의해서 1518년 12월 27일 쯔빙글리는 취리히에 도착 하였다. 취리히에서의 그의 개혁은 노랍게 진행 되었다.

 

[1]루터가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는데 반해서 설교의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였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으로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을 연속적으로 강해하기 시작했다.

 

[2]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인 베르나르딘 삼손이 도시에서 면죄부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3] 쯔빙글리는 1519년 8월 취리히에 페스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이 고생하게 되자 밤낮 쉬지 않고 환자를 돌봄으로서 9월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아프게 되었다.이것을 통해 그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4] 쯔빙글리는 십일조에 관한 공격적인 설교를 퍼부음으로서 십일조의 자발성을 강조 하였다.

 

[5] 쯔빙글리는 금식기간 동안에 육식을 먹어도 괜찮다고 선언 하였다.

 

[6] 쯔빙글리는 교황청에 파송하는 용병과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연금의 잘못을 파악하고서 본인에게 지급되던 연금을 포기 하였다.

 

[7] 쯔빙글리는 공개토론회를 통해서 교황청의 각종 악덕을 지적하고 비난 하였다.

 

[8] 쯔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함으로서 지금까지의 비난과 물의를 일소 시켰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결혼 하였다.

 

4)쯔빙글리의 최후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나, 모든 곳에서 환영받는것은 아니었다. 삼림 자치주들은 개혁교회 스타일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그러자 개신교 자치주에서는 산림자치주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삼림 자치주는 전쟁을 통해 해결할수 밖에 없었다.

 

1531년 삼림 자치주는 샤벨을 쳐들어 왔다, 쯔빙글리가 이끄는 취리히 군대는 1010월 11일 샤펠에서 교전 하였으며,쯔빙글리를 위시한 목회자 의회의원등 다수가 전사 하였다. 47세의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쯔빙글리는 개혁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끝내 숨지고 말았다.

 

5) 쯔빙글리의 평가.

 

쯔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 부터 출발해서 복음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럼로 쯔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 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 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여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데서 인정을 받았다.

 

쯔빙글리는 루터만큼 많은 저술활동을 하지는 않았다.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수 있는 복음 이해와 성찬 이론을 확립 시켰다.

 

한마디로 말해서 쯔빙글리는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 마무리를 후배인 칼빈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복음주의로 바뀌었던 칼빈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또한 완성자 였다고 말할수 있다,.

 

제 5 장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체제에 의해서 통치 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서 자연히 자유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 했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세사는 대의회에서 결정 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 였으나,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수 있다”라고 쓰여 졌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사우니어,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 할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숫적으로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 되었다.

 

카톨릭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 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수 있었다. 그래서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3월1일 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 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 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준 사람이 바로 존 칼빈 이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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