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 (2)
제 3 장 루터
1.마틴 루터의 어린 시절과 회심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광산촌 만스펠트 지역에 속한 조그마한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사이에서 태어났다.그는 어려서 부터 가난을 체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경험하면서 자랐다.그는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면제 받았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의무적으로 노래해야만 했다.
루터는 3년간의 아이제나하의 생활을 마치고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을 맞이 하였다.이 대학은 후기 스콜라학문에 속하는 스코투스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오캄과 가브리엘 비엘로 이어지는 유명론의 전통에 서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출세를 보장하는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또한 자격을 가졌다.그러던 그가 주위의 부러운 눈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날 사라져 버렸다.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된 동기에 대해서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 오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오히려 루터를 모독하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영혼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죄사면의 확신을 받기를 원했다.그의 이런 자세가 수도원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2.수도원에서의 루터
루터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어거스틴파 운둔수도회 였다.이 수도원은 당시에 가장 신선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여기에는 후기 유명론에 입각한 스승들이 있었다.그리고 이들은 교황의 절대성,양심의 가책,교황의 면죄부의 효력등을 엄격하게 주장 하였다. 루터는 이런 유명론 신학에 서서 혼자 성경을 읽는것이 금지 되었고 스승들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루터는 성경읽는것이 금지 당한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 하였다.루터의 고해 성사는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 하였다.그러나 아직까지 고백해야 할 죄를 찾지 못한듯한 자책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뇌를 알아차린 사람은 당시 교황청 대리인 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했돈 요한 스타우피츠 였다.그는 루터의 고민을 듣고서 성경을 읽을수 있도록 허락 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수 있다.고 설명하여 주었다.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 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묭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
3.비텐베르크의 루터
후기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고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선제후 프레데릭도 챨스 5세의 삼촌으로서 자신의 영지내에 대학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할려고 하였다.그래서 비텐베르크 마을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모집했다.그러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프레데릭은 새로운 교수진을 초청하기를 원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옮겼다.루터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 했으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를 요청받고 어거스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그는 설교도 하였으며 1511년에는 교단의 업무차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거룩한 계단에 이르러서 전통에 따라서 무릅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그리고 그토록 거룩했다는 로마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서 중세적인 제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되었다.그는 중세적인 스콜라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힘이 있는 강의를 하였다.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신앙이란 스리스도 역사적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사면에 대한 깨달음이 성화의 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 어거스틴과 중세의 신비주의를 더욱 연구 하였으며,이때부터 중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 했다.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은 성장하기 시작했다.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상호유익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즉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인 프레데릭의 신변보호가 필요하였고 프레데릭은 자신이 세운대학을 명문대학으로서 성장시켜주는 명교수이며,명설교자인 루터가 필요하였다.
4.95개논제를 못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다.중세의 참회제도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죄를 고백할수 없으며,사제가 부과한 보속행위도 완전하게 행할수 없었다.따라서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였다.그래서 중세인들은 누구든지 연옥에 갈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연옥에 있는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것은 중세의 미덕이었다.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는 전임자 율리오스 2세가 남겨놓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그로서는 면죄부를 다시금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10세가 선포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와 마인쯔의 대주교가 징수를 맡고 도미니크파 수도자 요한테첼이 판매하였던 면죄부는 루터를 그대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입성한 면죄부 판매인 요한 테첼은 “하늘문이 열리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다행히 비텐베르크는 프레데릭의 명련에 따라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이 인근 부근에까서 면죄부를 사오는 것을 보고 루터는 참을수가 없었다.
매년11월1일 모든 성자의 날을 기해서 프레데릭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보관중이던 유물을 무료로 개방하였으며 그날이 되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유물에 보관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ㅂ주속교회당 정문에 95개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 논제를 못박아 게시 하였다.
5. 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개최 되었다. 이것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을 게제한후 엑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다.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자 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노련한 논쟁사 엑크의 승리로 끝났다. 루터 스스로 이단을 좋게 말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단에 속한다고 인정케 하였다.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간파 하였다.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하게 면죄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종세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터는 힘이 있었다.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도와주었으며,도시민들도 독일이 로마로 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존재를 뒤엎어 버리고 동시에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수 있는 3개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6.종교개혀 3대 논문
1519년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 이후로 엑크는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청 법원회의를 개최하였다. 일련의 어려움이 있었의나 1520년 6월15일 출교교서는 완성되었다. 그러닌까 루터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과 때를 맞추어서 출교교서는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이어서 루터는 같은해 8월에 기독인의 자유를 발표하였으며, 또다시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서 루터는 1520년 12월10일 교황의 출교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 하였던 것이다.
1)출교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교황청 출교 교서는 시편 74:22절을 인용하면서 작성 되었다.여기서 루터는 41개조의 정죄문과 더불어서 루터의 모든 책을 소각할것을 명하였으며,모든것이 금지 되었다.그리고 추종한는 사람들의 동조를 취소할것을 명하였다.
2)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루터는 이 논문에서 먼저 교회의 3가지 담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첫째는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한으로 인해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권, 둘째는 교황의 성경해석권으로서 어느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한 특권, 세째는 회의 소집권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국한 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회의로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 특권.
이상의 3가지 담이 지금까지 로마교회를 세속화 시켜 왔으며,교회를 지켜주는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 주창 하였다. 루터는 사제의 중재라는 중세의 대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만인제사직 이론은 중세인들을 사제의 공포와 전횡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다.
3)기독교인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이 개혁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한 문제제기 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인의 자유라는 논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부분에 해당하는 구원론을 다룬다.특히 중세의 공로중심적인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반대하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이것이 기도교인들을 중세의 교리적 쇠사슬에서 풀어주는 자유였다.
여기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3대 명제인 하나님의 말씀,은총,그리고 신앙을 모조리 이야기 한다. 그리고 루터는 여기에서 또한번 만인 제사직 이론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지금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일반 교인 사이의 차이는 각각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진 성직자인을 강조 하였다.
4)교회의 바벨론 포로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수도원 시절의 악습들을 간파하면서 중세인들이 사제의 중재라는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7성례전을 파기하고 성경에 근거한 세례와 성찬 두가지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세는 7성례전으로서 사람의 70년 인생을 묶어 버린다고 해서 바벨론 포로기 70년에 비유해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루터는 희생설에 기초한 중세의 화체설을 부인하고 공재설을 주장함으로서 중세의 성례전 이론을 뒤엎었으며,특히 성체성사 이론에서 일종성찬을 베푸는 중세의 악습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더 나아가서 참회제도를 극렬하게 비판 하였다.
5)출교교서의 소각.
루터가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작성하는 동안 로마교회는 루터를 출교시키는 교서를 유럽의 여러곳에 배포하고 루터의 손에까지 들어왔다.
1520년 12월10일 아침 9시에 교황청의 헌장과 스콜라 신학서적등을 공개적으로 소각 시킬 예정이므로 비텐 베릌 학생들이 증인으로 참여 해 달라는 것이다.
루터는 교황청의 교령들,교회법 법전들,그리고 엑크와 엠저의 몇가지 글들을 화염속에 던지면서 여호수아 7:25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대가 주님의 거룩한 자를 근심으로 괴롭게 하였듯이 영원한 불길이 그대를 괴롭게 하리 라고 되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교황청 법령의 장례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 교황청을 조소하면서 스콜라서적과 교황청 서적들을 화염속에 던졌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 되었다.
7.윔스의회
1520년 12월 10일 루터가 교황청의 출교교서를 소각하였다는 소식을 곧바로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이제 독일인들은 루터가 독일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받아 들이게 되었다.이러한 즈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 죽고 그의 손자인 챨스 5세를 선출했다 그의 대관식을 갖고 첫번째로 주재한 회의가 1521년 1월 22일에 개최한 윔스의회 였다.
교황청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루터의 범법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루터는 윔스의회에 두번 출두 출두 하였으며,무오하다고 믿는 교황과 성경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는 루터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그래서 루터를 윔스로 부터 비텐베르크에 되돌아가게 했다.그러나 설교는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터가 사라졌다. 프레데릭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 시킬것을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였으며,루터는 바르크 부르트에 피신해서 융거 게오르그 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있었다.루터는 이곳에서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 했으며,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영적으로 무장하였으며,어떤 의미에서 제2의 영적 고뇌기간이었다고 할수 있다.루터의 이 기간은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여 동안 영적인 고뇌의 기간을 가졌던 것과 동일한 준비의 기간 이었다.
크게 움츠릴수록 더 높이 뛸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개혁에도 적용될수 있었으며,아마도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 기간을 허용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8.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윔스의회에 참석할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 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 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푸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으며,아우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수 없게 되었다.
1)칼슈타트의 개혁운동
중세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경건주의적 신앙운동은 여러 갈레로 나뉘어 졌다. 형제회 등과 결합한 운동은 학교교육을 통한 자녀교육,경건서적 탐독 및 구제와 봉삭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후쓰 운동의 한 줄기인 타보르파의 흐름에서 나온 사람들은 신비적인 종말운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루터가 없는 비텐베르크는 칼슈타트가 주도하는 개혁운동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도시 전체는 영적인 각성으로 정열적으로 흐르고 있었고 칼슈타트는 수도원 서약,독신제도,성직자의 구별된 의복착용,미사의 대속적인 헌신의 의미,교회내의 화상과 성상 사용 등의 구세대적인 행습을 대대적으로 비난 하였다.
칼슈타트는 개혁의 고삐를 더욱 강하게 잡아 당겼다. 1522년 1월 24일 시 당국은 법령을 공포하였다. 도시의 공동금고를 설립해서 시의 모든 수입과 지출을 관리케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프레데릭을 위시한 루터의 지지자들을 근심케 하였다.선제후는 조지 공작하게 비텐베르크의 문제는 칼슈타트와 쯔빌링이 일으킨다고 지적할 정도 였다.멜랑히톤은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 앉힐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제는 루터가 아니면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루터는 언제 잡혀서 로마로 압송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바르트부르크를 몰래 빠져나와서 1522년 3월 7일 비텐베르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거의 일년만에 돌아 왔으며,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2)농민소요
유럽의 농민들은 14세기 부터 시작해서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소요를 끊이지 않고 일으켰다.그리고 이것들은 성직자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십일조는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강제적인 세금이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도 다닐수가 없었다.
이때 한스 힘의 설교는 모든 소외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그는 사제들에 대한 욕설과 공격으로 시작해서 황제와 제후들과 군주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외쳤다. 이것은 그가 화형 당함으로 영적 각성이 끝이 났지만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동요의 불씨를 심어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24-1525년 사이의 독일에서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켰다.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으며,이들의 신분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이들의 요구사항은 12가지로 말할수 있다.
첫째:시민 당국이나 교회 당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위배될 때에는 정당한 권리요구를 갖는다.
둘째,목회자의 청빙의 자유와 축출의 자유
세째:대십일조는 의무로서 지킬수 있으나 소십일조는 거부한다.
네째:대십일조에서 부락사제의 급여를 감당할 것이며,나머지 부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사용하라.
다섯째:농노제도를 폐지하라
여섯째:적법한 명령에는 순종하겠지만 강압적인 명령은 거부한다.
일곱째:낚시의 권리,사냥의 권리를 갖는다.
여덟째:삼림,목초지,경작지를 지주로부터 찾아와야 한다.
아홉째:모든 유형의 강제 봉사은 폐지 되어야 한다.
열 째:모든 형태의 노력 봉사는 정당한 임금의 지불이 있어야 한다.
열한째:사망세의 명목으로 고인의 귀중한 동산을 압수 할수 없다.
열두째:모든 지역에 공평한 재판소를 설치하라.
이상의 열두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작성된것이기 때문에 어느것 하나라도 잘못이 있으면 기꺼이 배제 시킬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농민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일내에 결성된 모임체 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사태는 북독일로부터 진압되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 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 줌으로서 원하는 독일의 개혁이 달성될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지역을 찿아 다니면서 운동을 자제해줄것을 당부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개혁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떼를 반대하여”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물론 루터의 고민을 충분하게 이해 할수 있으나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소요는 루터의 개혁에 치면타를 가한것은 사실이다.
9.루터의 죽음
루터적인 개신교를 지지하는 슈말칼트 동맹은 헤세의 필립이 이중 결혼으로 인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개신교측은 꿋꿋하게 버티어 나갔다. 그러나 챨스 황제가 1544년 프랑스와의 평화를 마무리 지음으로 이제부터는 독일문제를 원하는 대로 다룰수 있었다. 그래서 트렌트에서 총회를 개최하도록 명하였다.그렇지만 개신교들은 여기에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며,총회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지속됨으로서 황제는 무력을 사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루터는 죽음을 맞이 하였다.
10 루터에 대한 평가.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어떻게 가난한 벽촌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가진것도 없이 엄청난 일을 감당할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성공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에게는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철저하게 의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루터의 가장 큰 꽤는 꽤를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바로 그 꽤 였다.
루터는 말씀의 사람 이었으며,기도의 사람이었으며,경건의 사람 이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믿으면서 모든것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끝을 맺었던 사람 이었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개혁을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계획표를 짜고서 밀고 가지 않았다. 루터는 일이 되어지는 대로 하나씩,하나씩,처리해 갔으며,억지로 일이 되게끔 몰고 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 하였다.
루터가 단 하나 머리를 써서 세밀하게 이끌어갔던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절대로 개인자격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는 자신의 의견을 언제나 공중적인 전체 회의나 집회를 통해서 발표하였다.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인 회의 중심적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루터의 개혁은 철저하게 복음중심적인 원칙적인 싸움이었지 무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힘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지식인들과 지도층의 지지를 확보 하였다.루터는 개인의 인기를 편승해서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본인이 몸소 터득한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심어 줌으로서 중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는 강한 사명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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