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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사 (1) / 들어가면서|종교개혁의 요인|독일의 종교개혁

수호천사1 2010. 7. 28. 18:17

종교개혁사 (1)

 

 

들어가면서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을 때에 교회당 안에 울려퍼지는 소리와 더불어 중세 카톨릭 교회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지금까지 교황의 일방적인 독재아래 미신적인 신앙으로 시달림을 받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중세 말기에 지식인들이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중세인들에게는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를 듣기 원했고,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주시는 평안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바로 이러한 요구를 루터가 충족시켰던 것이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서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와 영국,그리고 북부지방에 이르기까지 전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16세기 내내 유럽은 대변혁을 맞이 하였다.이 사이에 국가는 점차적으로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으며,문예부흥과 더불어서 지금까지의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변하였으며,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교회의 확장과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등 사회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 났었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카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들을 반격할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더욱 폐쇄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으며,다른 한 쪽에서는 개신교들이 미처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교황권 옹호와 해외선교에 힘을 쏟는 교단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일과 스위스,그리고 영국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서 더욱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있었다.이들은 소위 말하는 초대교회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재세례파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들과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반 삼위일체파들이었다. 이러한 혼탁와 분열가운데서 그래도 종교개혁의 주류는 도도히 흘러서 근세로 연결되어짐을 볼수 있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위에서 열거했던 내용으로서 진행되었다.종교개혁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든지 원래의 순수하였던 이념을 상실하고서 그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에 메이게 되면 내부적으로 썩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그래서 유대교의 전통과 제도에서 썩어버린 복음을 예수님께서 새롭게 개혁하셨듯이 언제나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서 제도속에 살면서도 제도에 메이지 않고 이념을 구현할수 있는 종교가 참다운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제 1 장 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 카톨릭교회의 잘못을 고쳐서 신약교회의 원형으로 개조하려는 운동이었다.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위클맆 이나 후쓰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 였고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 권위,이신득의의 교리,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카톨릭 교회의 변화를 추구 하였다.

 

루터나 칼빈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있고 광범하게 전개 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준비시킨 요인은 3가지 정도로 말할수 있을 것이다.

 

1.도덕적 요인

 

만일 루터가 속죄권판매를 정당시한 텟젤과의 대결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늦어졌을런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그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 했다.그리고 신부의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개혁을 교황바울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2.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고대 문학에로의 복귀,개인주의적 각성,지리상의 발견에따라 동서문화의 교류,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불지르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긴 지적인 통제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3.사회적 요인

 

십자군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경제가 상업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로 인한 교황 위신의 실추는 교회개혁을 부채질 했다.교회가 부과하는 세금과 교황청의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 했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사회는 사치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나님꼐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해갈을 위하여 현실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백성사이에 생겨진 괴리에 새로운 개혁의 가교는 누군가에 의하여 놓여져야만 했다.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복음에 의한 해방과 더불어서 로마교회로 부터의 경제적,정치적,자유를 얻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1.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의 군대파견으로 전쟁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스페인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영국은 스페인의 위성국가 였으며,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교회의 가장 강력한 힘이 미칠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로마교회의 시녀 노릇을 하였다. 면죄부를 구매하고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등 독일은 로마교회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아래 대봉건영주들의 총회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 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 시키고 관세법을 통일 시킴으로서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립의 아들이며,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챨스5세가 1519년 6월 선재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찰스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로마교회의 착취

 

로마교회는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동안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예술적으로 치장하는것을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중심으로 각 개인의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독일인들 이었다. 이들은 각종 세금성제도에 합당한 이유만 첨가된다면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였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교회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일 폐회가 컸던 첫수입세,팔리움,보류권,사라젠세 등은 각종 제도와 면죄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공석금,기부금,특별면죄권,등이 있었다.그런가 하면 로마교회는 십일조를 강요하였는데 각 교회는 수입의1/10을 교황청에 바쳐야 했다. 그리고 죽은 날을 위한 미사와 개인을 위한 특별미사, 매일같이 지속되는 성자의 날 기념미사와 특별헌금-----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도화 되어 있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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