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바꾸는 사회와 교회 |
용어 바꾸기로 본질 왜곡, 교회도 성경 내용 왜곡 심각 |
<< 노동부 홈페이지
노동부가 지난 5일자로 한 보도 자료를 내 놨습니다.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어렵거나 의미가 모호한 용어, 오해의 여지가 있거나 부정적인 어감의 정책 용어를 쉽고 친근하게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력 단절 여성'이나 '고령자 인재 은행'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용어나 '소셜 벤처'나 '잡 페스티벌' 등 외국어 등도 알기 쉽게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관공서 등에서 사용하는 '상신', '재가' 등의 한자어도 쉽게 한글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오는 3월부터 전문 기관과 공동으로 연구를 추진하겠다는 계획과, 빠르면 오는 5월 근로자의 날에 즈음하여 그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일단 그 취지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최근 법조계에서도 어려운 법률 용어를 쉽게 풀어 쓰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언론계에서도 기사의 내용이 과거보다는 많이 순화되거나 알기 쉽게 바뀌고 있는 분위기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과거의 한 사례가 떠오릅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7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현대자동차는 "거부감이 일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용어에 대한 순화 운동을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기업에서 사용하던 용어들을 순화하거나 누구나 쉽게 바꾸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재가'는 '결재'로, '상신'은 '여쭘', '소비자'는 '고객'으로, '네고'는 '상담으로 바꿨습니다. 이 외에도 약 60개가 넘는 단어들을 바꿨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나 거부감이 드는 말 등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런 용어들에 섞여서 바뀐 게 있었는데 바로 '下請業體(하청업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고 판단해서 바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꾼 게 바로 '協力業體(협력업체)'입니다.
하청업체는 주종 관계를 의미하지만, 협력업체는 동역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수많은 하청업체 대표들은 환영했습니다만, 현대자동차의 속내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하청'에서 '협력'으로 바뀐 건 단지 '용어'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작 '하청'업체들을 '협력'업체로 승격시켜서 그들과의 '동역자' 관계를 해 나가려는 마음이 아니었고, 단지 '현대' 자신들을 향한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박점규 금속 노조 미조직 비정규 사업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003년부터 현대차 아산, 울산, 전주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거센 투쟁이 일어나면서 사회적으로 사내 하청 노동자의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러자 현대자동차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하청'이라는 '부정적' 단어를 '협력'이라는 '긍정적' 단어로 바꿔 "사내 하청 노동자는 협력업체의 정규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심각한 비정규직, 사내 하청 노동자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현대자동차가 벌인 '꼼수'였다" - 02. 09 프레시안 칼럼
즉 '하청업체 노동자'가 아닌 '협력업체 정규 직원'으로 격상해 줬다는 뜻인데, 문제는 바뀐 용어 외에는 이들 노동자들의 복지, 인권, 급여 등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용어를 순화시킴으로써 순화되지 않은 본질이 바뀐 것처럼 포장을 씌우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즉 약자가 강자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표출하는 것을 '순화'라는 명목으로 왜곡함으로써 약자는 스스로 “이제 대우가 나아졌구나"라는 착각에 빠지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비정규직' 용어 누가 듣기 싫어할까?
이번 노동부의 발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말도 바꾸겠다고 합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처럼 지금의 '비정규직' 직원들의 현실을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요. 말 그대로 '정규직'과 똑같은 시간을 일하고, 오히려 더 어렵고 강도 높은 일을 하면서도, 급여는 절반도 채 못 받는, 그야말로 '비정규직'입니다.
이 말은 '비정규직' 스스로의 현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기 거북해 하는 집단은 '비정규직'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가진 '정규직' 또는 사주나 현 정부의 수뇌부들 아닐까요.
그 '용어'를 없애야 마치 '비정규직'이 사라졌다는 뉘앙스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부가 '용어'를 바꾸기 전에 오히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방안을 먼저 내 놨다면 좋았을 일입니다.
교회에서 왜곡되는 성경 용어
이처럼 약자들을 '말장난'으로 다독거려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들은 사회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이 더 심할 것입니다. 대중들에게는 '천국'과 '평안'을 외치면서도 자신들은 철저히 이 세상의 이익과 비리에 찌들었던 중세 시대 사제들이나, '축복'과 '은혜'를 '물질'과 '성공'으로 바꿔버린 개신교 지도자들이 세상의 기업보다 덜 할까요?
필자는 앞의 상황을 보면서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의 '말장난'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비판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목사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평소에 쓰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안 된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한번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과거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더 이상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는데, 조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절대로 '마귀'나 '악령', 또는 '귀신'이나 '지옥' 등의 혐오감을 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미국뿐 아니라 지금 유럽 교회들은 이런 사례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필자가 학생 시절 다녔던 교회에서 수련회 기간에 성경 토론을 했는데, 당시 전도사가 주제를 'CCM, 마귀의 역사일까 하나님의 뜻일까'로 정했다가 담임목사에게 혼이 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마귀'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 '저주', '진노', '진멸' 등의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이해는 안 됩니다만,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가르쳐야 할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안 하거나 왜곡되게 사용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축복', '일천번제', '솔로몬의 지혜'
▲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일천번제 헌금 봉투. | ||
특히 강남의 부동산 투기를 하는 교인들은 '축복'='땅값'이라는 생각을 하고, 수험생은 '축복'='합격'으로, 졸업생은 '축복'='취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축복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의 의미를 자신의 일상생활에서의 '필요 충족' 수준쯤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또 한 가지 대표적으로 잘못 사용하는 성경 용어에는 '일천번제'라는 게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1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교회들이 매일 새벽 기도나 주일 예배를 통해서 1천 번의 숫자를 채우도록 합니다. 물론 본질은 '헌금'입니다. 1천 원씩 1천 번이면 100만 원입니다. 하지만 이 '일천번제'에서의 '번'은 番(번-차례)이 아닙니다. 燔(번-굽다)입니다. 즉 솔로몬은 재물 1천 마리를 한꺼번에 큰 산당에서 태워 드린 것입니다. 이 용어를 마치 '1천 번의 헌금'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일천번제와 함께 엉터리로 가르친 용어가 바로 '지혜'입니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것을 마치 똑똑하고 영리한 머리를 주셨다는 것으로 가르쳤지만, 원문 히브리어는 그 뜻이 '듣는 마음'으로 돼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으로 백성들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판결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했던 것입니다.
일천번제라며 1천 개의 봉투를 바쳤다고 '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식들의 대학 입학이나 똑똑한 머리나 영리한 두뇌를 구하는 어리석은 가르침을 한국교회는 마치 '진리'이며 이것이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성경이 의도하지 않는 용어들의 왜곡, 무지를 벗어나야
히틀러가 집권하던 당시 독일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을 향해 '순종'과 '천국'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아닌 히틀러 정권에 대한 순종이었고, 그들이 설교했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 아닌, “지금 독재 권력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 천국이 보장된다, 따라서 항거하거나 반항하지 말라"는 의미였다고 당시 독일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말했습니다.
본 회퍼를 비롯한 소수의 깨어 있던 목사들을 제외하고는 독일 개신교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히틀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략했고, 그들의 교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미사여구들을 들으며 현실을 회피하도록 세뇌당해야 했습니다.
노동부가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를 바꾼들 지금 비정규직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권 탄압에 가까운 강도 높은 노동력에 비해 정규직의 1/3 수준밖에 되지 않는 임금을 받고 생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런 말장난을 보면서 개탄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힘을 지닌 '성서'의 내용이 왜곡되거나 곡해되는 교회의 현실은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불치병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어가 부정적이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서민들의 아픔과 현실을 대변해 주는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그 용어가 불편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없애려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게 만들고 교회와 목사를 향해 '순종'을 강요하지만, 과연 그들이 민초들의 '순종'의 대상인지 냉정하게 따지지는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겠습니다.
|글/진민용
|출처/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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