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으로 밀려난 그리스도를 회복하라 |
마이클 호튼은 우리의 삶과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
최근 내놓은 책에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제목을 붙이긴 했어도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미국 교회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구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 유혹에 몹시 약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부흥과개혁사 역간)와 「복음이 이끄는 삶」(The Gospel-Driven Life, Baker Books)이라는 책을 써서 문제를 집어내고 해답을 펼쳐 보였다.
호튼은 캘리포니아 주 에스콘디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변증론을 가르치고 있고 여러 책을 저술했다(올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연재한 존 칼빈 칼럼의 무기명 필자이기도 하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장 마크 갤리가 호튼을 만나 그가 최근작에서 제기한 문제에 관해 물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유혹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좀 더 보수적인 상황에서는 인본주의가 설교조의 간곡한 권고로 둔갑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문화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당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고 있는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이것만 강조한다.
또 심리치료적인 접근이 있다. “하나님의 원칙대로 살면 더 행복해진다.” 말하는 사람은 웃으며 전하지만 이것은 명령이다. 이것은 잘 되는 나를 위한 원칙과 기교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성경을 믿는다고 써 붙인 교회에 가도 나는 내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를 들을지, “다니엘처럼 용감한 사람”이 되는 지침에 관해 들을지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성경이 명하는 바가 있고 없고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미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령만 듣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복음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결혼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좋은 설교를 하는 교회가 많지 않은가?
문제는 이것이 복음인가 하는 것이다. 율법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나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를 본받으라”나 “삶을 변화시켜라”나 “자녀를 잘 양육하는 법”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부모 자격이 없는 부모, 예수를 대충 믿는 신자들을 죄에서 건지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우리는 모두 그런 죄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만 강조한다.
왜 교회가 이런 유혹을 받는가?
우리가 본래 그런 존재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해도 바깥에서 온 것보다 내면에서 경험한 것을 더 믿기 마련이다. 타락 이후 우리에게는 내면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는 올바른 지침을 지키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날 때부터 펠라기우스주의(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 펠라기우스(Pelagius)에서 유래한 이단 사상/편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 사회처럼 자력으로 일어서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하는, 심리치료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회에서, 우리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하셨다는 메시지는 우리 자아에 상처를 남긴다. 이런 문화에서 기독교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차별을 없애는 것,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가 된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열매다. 나는 복음에 힘을 보탤 수 없다. 복음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이미 성취한 것에 관한 메시지다.
이 문제가 새로운 것인가?
당연히 오래되고 되풀이되는 문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인에게 복음은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도리어 오늘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그리스인이다.
오래된 문제이지만 상황은 새로워졌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점점 더 공공연하게 기독교를 반대한다. 아울러 교인들만 아니라 목사와 신학자들까지 기독교의 믿는 바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설득력 있게 변론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뉴스위크>최근호에 리사 밀러 기자가 쓴 “이제 우리는 모두 힌두교 신자이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그는 미국인이 힌두교를 거의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여러 조사를 들어 많은 복음주의자를 포함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교리보다 힌두교 교리를 더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힌다.
두 가지 예를 들면, 첫째, 육체의 부활에 관한 문제다. 밀러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인 대다수는 죽을 때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영혼이 마침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거나 환생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더 일반적으로, 모든 길이 하나님이나 신으로 통한다는 힌두교의 주요 교리를 믿는 믿음이 널리 만연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예수가 유일한 중보자이고 구원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는 어긋난다.
“복음이 이끄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내가 샌디에고에 살고 있으니까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알려주는 온갖 최신 장비를 갖춘 범선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장비가 항로를 정하지만 범선은 바람이 불어야 움직인다. 당신은 순풍에 돛을 달고 떠났다. 그런데 큰 바다에 나가자 바람이 그쳤다. 배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때 라디오에서 태풍이 온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러나 배에 있는 고성능 장비들은 당신을 안전한 항구로 데려가지 못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배를 움직이는 바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극적인 회심을 겪은 사람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철석같이 믿는다. 이 복음의 바람이 배를 움직인다. 그러나 2년이 지나면 그들은 긴급한 명령을 하나둘 듣는다. 어느 뱃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것저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듣고 읽는다. 그들은 영적 훈련에 관한 모든 지침서를 읽는다. 목사로부터 기도를 더 많이 하라, 성경을 더 많이 읽으라, 전도를 더 많이 하라는 말을 듣는다. 이제 그들은 큰 바다에서 멈춘다. 배를 움직이는 바람이 그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회심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칼빈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기 때문에 매주 복음을 들어야 하고, 성만찬을 해서 그 약속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음이 이끄는 삶」에서 뉴스를 은유로 사용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나는 그 아이디어를 사도들에게서 훔쳤다! 그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빗댔던 지배적 은유는 “기쁜 소식”이다. 이 소식의 알맹이는 하나님이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을 하셨고 우리는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마르틴 루터에게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죄와 불순종이죠!”
복음은 내가 겪은 회심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나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할 것이다. 우리가 사도들에게서 듣는 모든 증언은 그들의 내면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증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던 역사적 사건에 관한 증언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내 내면에서 온갖 변화를 일으키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지만 복음 자체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내 구원을 성취했다고 나에게 와서 선언하는 외적 말씀이다.
어떤 사람은 지침을 가지고 와서 “당신이 이것, 저것, 혹은 그것을 하면 당신의 삶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봐라!” 복음은 좋은 지침도, 좋은 아이디어도, 좋은 충고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은 복음이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다”거나 “예수를 주님과 구세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했다. 무슨 뜻인가?
나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살펴보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우상숭배를 할 때조차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문제는 상속자를 입양하고 그 상속자를 의롭게 하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가, 혹은 재판관과 관계를 맺는가만 다르다.
“예수를 주님과 구세주로 삼는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개인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체를 결정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출애굽기에서 어떤 유대인이 자기가 하나님을 해방자와 주님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 주권적 사역을 하나님에게서 받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저런 하나님으로 삼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예수의 공로로 우리가 예수를 주님과 구세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고 해방하셨다는 것이고 그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일반적 방법은 “예수를 따르라”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바라보는 대신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고 기준으로 세우면 그리스도보다 우리 스스로를 전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가 복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따른다고 공언했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지 못할 때에는, 우리 스스로가 타락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이봐요, 내가 굉장한 경험을 하고 도덕성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말아요. 당신과 나는 심히 악하고 죄를 짓기 쉬운 사람이라서 구세주가 필요하니 그리스도를 바라봐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불신자들은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우리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분을 최고로 여긴다는 증거를 눈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향기와 같은 우리 삶으로 인해 복음에 흥미를 갖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삶이 바뀌는 것이 복음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에서 성취하신 객관적 사건이다.
당신이 개혁신학자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단지 아르미니우스주의자(칼빈주의의 핵심사상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를 원조로 하는 사상/편주)에게 훈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서문을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자 연합감리교회 감독인 윌리엄 윌몬(William Willimon)이 썼다. 두 책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은 이것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주의자인 내가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당연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건 오늘날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인 이신론이 감리교회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에서도 안개처럼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것은 특정 교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는 정통 개신교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종교이기 때문에 개인주의를 낳고 세상일에 관심을 잃게 한다고 주장한다.
정반대다. 나는 「복음이 이끄는 삶」에서 이 문제를 아주 자세히 다루었다. 말씀은 공동체를 세운다. 모든 개혁자들은 사람이 구석에서 혼자 성경을 읽으면 얼마나 많은 영이 속에 들어찰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것은 루터가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외적 말씀은 공동체가 함께 겪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 말씀은 설교로 가르쳐진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사는지는 구석에서 혼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영성 훈련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개인주의를 낳는다.
나는 이머징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성만찬을 하고, 어떤 사람은 비디오를 시청하고, 어떤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개인주의다.
“너희가 모두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너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내가 내 영으로 너희를 모두 내 아들 안으로 이끌어 너희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뿐 아니라 서로 연합하게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강조하는 건 공동체가 함께 겪는 사건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가 연합하는 성례이기도 하다. 바울은 제각기 성만찬을 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라고 우리는 빵 하나를 먹기 때문에 모두 한 몸이라고 말했다. 우리 문화에 만연한 자기애와 개인주의를 근절하려면 [종교개혁적 개신교의] 말씀과 성례가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복음이 이끄는 삶의 첫걸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는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고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화를 냈다. 마리아는 예수 곁에 앉아서 배움에 힘썼다. 예수는 동생을 비난하는 마르다를 나무라시고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택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는 자이다. 그의 가르침은 참으로 그의 성품과 사역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가 우리를 대속하셨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복음이 우리 속에 깊이 다시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합당하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교리와 조언을 지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려고 애쓰지 말고, 복음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바가 명령으로 주어질 때 따르자. 그러고 나면 우리의 범선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복음의 바람은 돛을 부풀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인도한다. 비로소 “복음이 이끄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 - 인터뷰 마크 갤리 Michael Horton Interview by Mark Galli January 13, 2010 최요한 옮김
|출처/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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