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옥성호)

수호천사1 2010. 2. 17. 18:22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제가 아는 한 교회의 목사님께서 광고 시간에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한 40분 떨어진 곳에 기도원이 하나 매물로 나왔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숙고한 결과 이 기도원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원 구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시설이나 여러 가지 주변 상황이 ‘저 장소가 기도원의 역할을 제대로 할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곳이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기도원을 구입하고 몇 년 후 사용하는 사람도 없고 관리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대학부 때 아는 한 선배가 대학부 성경 공부 리더였습니다. 그 선배 성경 공부 조원 중에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그 자매를 특별히 아끼면서 그 자매와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곧 그 자매는 대학부에서 그 선배의 공식 애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귄 후 한 2년이 지난 후 그 자매가 친구였던 지금의 제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빠가 헤어지재. 기도하니까 나와 만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래....”

위의 두 사례는 교회를 좀 오랜 다닌 사람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얘기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들고 나오는 ‘하나님의 뜻’....무섭습니다.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양심을 마비시키는 ‘하나님의 뜻’으로 무장된 사람들에게는 거짓말도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닙니다. 말 바꾸는 것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될 ‘장치’가 준비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몰라서 그런 것이지 절대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때도 나는 진실했어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말 바꾸는 것 같지만 이건 말 바꾸는 게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정 불만 있으면 하나님께 얘기하세요.“

이런 사람과는 그 자리에서 ‘토론 끝’입니다.
더 이상 이성적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정치인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정치목사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국민의 뜻'보다 더 위력있는 만병통치약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무장한 사람들보다 더 무서운 집단이 조금씩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서 넘어서서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몇 년 전 제가 교사로 있는 청소년 부서에 어떤 목사 부인이 간증 겸 무슨 특강을 하러 왔습니다. 그 사람의 특강 중 일부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시카고에 도착한 날 물었습니다. ‘하나님 날 시카고에 왜 보냈어요?’ 그러자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카고 땅에 입을 맞추라.’ 그래서 저는 시카고에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내려서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하나님이 음성으로 인도하시는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 분의 경우는 좀 좋게 보면 ‘귀여운 수준’이고 제대로 보면 ‘심각한 상태’이지요. 로마 교황 외국 방문 뉴스 장면을 좀 너무 많이 시청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런 사람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어떨지 솔직히 좀 걱정이 됩니다.

이 분의 아들이 사귀는 여자를 엄마에게 인사시키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얘야, 어제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쟤는 아니라고 하시더라. 딴 사람 찾아봐라.”
내지는
“얘야, 오늘 아침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앞으로 결혼하지 말고 이 엄마를 보필하면서 살라고 하신다.”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겠지요?

속된 말로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에게는 “약이 없습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피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단은 직통 계시가 뿌린 결과입니다. 직통 계시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 않는 이단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며칠 전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을 읽었습니다. 한 마디로 ‘직통 계시’로 넘치는 책입니다. 책을 읽고 하도 우울하고 마음이 답답해서 글을 하나 썼는데 돌맞을까봐 올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아무리 신령해보이고 신기해보이고 희생적 삶으로 넘치는 사람이라도 그의 주장이 성경과 다르면 아닌 것입니다.

왜 사도신경과 같이 거룩한 고백 안에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질적인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대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쓰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바로 기독교가 가진 ‘역사성’ 때문입니다.

실재하는 역사 속에서 숨쉬는 기독교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안에 있습니다. 즉, ‘본디오 빌라도’가 만약 가공의 인물이라면 기독교는 고백할 가치가 없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저 딴 세상에 존재하는 주관적 자기 체험 내지 자기 최면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서 역사적 객관성을 배제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역사 없는 기독교보다는 역사에 관심없는 힌두교가 더 효험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거나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상식을 초월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것은 ‘비상식’에 불과합니다. 주변의 이단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상식에 벗어난 행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거룩한 영성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은 굶고 있는데 엄마가 교회에서 주방 봉사를 하고 있으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 비상식은 교회 봉사를 빙자한 ‘가정에 대한 폭력’입니다. 교회가 재정이 없어서 매달 힘들어서 허덕이는데 ‘믿음’으로 대형 부지를 계약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믿음’을 빙자한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오늘날 점점 더 교회 안에서 ‘신비주의’와 ‘은사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각종 ‘영성’이니 ‘은사’니 하는 이름으로 무당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건전한 상식과 건강한 이성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출처/옥성호의 세상읽기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