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성 관호진 사자머리 종이조각
(사진: 비주시 관호진의 사자머리 종이조각)
중국 동부 강소성 비주(邳州)시 관호진을 언급하면 현지 주민들은 항상 먼저 빠른 경제발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활기찬 모습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분야가 또 따로 있으니 바로 전통 민간 수공예 분야입니다. 그중에서도 중국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자머리 종이조각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이 수공예 기법을 장악하고 있는 현지 장인 석영성(石榮聖)도 국가급의 무형문화재 프로젝트 전승인으로 지정되는 영광을 지녔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석영성과 그의 사자머리 종이조각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주의 사자머리 종이조각은 주요 재료로 종이도배를 활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인데 조각과 도배, 짜기, 회화 등이 혼연일체를 이룬 종합 조형예술입니다. 관호의 사자머리 종이조각은 거칠고 호방한 북방지역의 기질을 지녔는데 이발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모습이 매우 험상궂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흉악스러움 보다는 위엄이 느껴지고 천진스러움과 어수룩함이 보이면서 익살스러움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관호진 인근지역에서는 석영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사자머리 종이조각의 전문가라고 입을 모읍니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의 선조들도 모두 사자머리 종이조각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 역사가 이미 500여년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자춤 공연은 중국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공연자들은 북과 징의 음악 반주에 맞춰 사자머리를 들고 사자모습을 본따 여러가지 동작을 흉내냅니다. 사실, 1700여년 전인 삼국시대때 중국에는 벌써 이런 놀이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비주 지역의 역사자료에도 사자춤의 성황이 기록되여 있습니다. 석영성 선생의 소개를 직접 들어봅니다.
"농촌에는 별다른 오락이 따로 없습니다. 지방극 관람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다가 음력설을 전후해서는 사자춤이 성행하게 되는데 도처에서 사자춤 대열이 눈에 띄고 폭죽소리가 들리며 인파가 몰려 시글벅적한 장면이 만들어 집니다."
비록 사자머리 종이조각 제조가 괜찮은 생계유지 수단이기는 하나 시간과 품이 많이 들고 꼼꼼함이 요구되다 보니 이 손재간은 하루아침에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였습니다. 제작자는 우선 점성이 있는 찰흙에 삼실을 섞어 토련으로 파열과 변형이 되지 않는 반죽덩이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사자머리 모형을 조각합니다. 그다음, 사자머리 모형에 크라프트지를 몇겹씩 도배하는 방법으로 단색의 사자머리 외각을 만들고 그위에 안료로 무늬를 그립니다. 색갈은 붉은색과 검은색, 노란색과 흰색이 주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입과 수염 등을 완성합니다. 석영성의 소개를 들어봅니다.
"이 걸 만들려면 열 몇가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모형을 만들고 한층한층 도배를 끝내야 하며, 안료를 바르고 테두리 고정을 마친후 다시 한가지씩 그려야 합니다."
사자춤이 농촌에서 음력설 기간 봄맞이 행사에 빠져서는 안되는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되면서 사자머리 종이조각 제조도 자연스레 직업의 일종으로 태여나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문에 사자머리 종이조각을 만들 수 있는 손재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동네 인근 주민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였습니다. 관호진에는 현재 10개의 사자머리 종이조각 작업장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석영성 일가가 가장 유명한데 살림살이도 주위 이웃들에 비해 많이 넉넉합니다. 석영성의 아내 유인령(劉印玲)의 소개를 들어봅니다.
"그땐 식량이 한근에 10전 정도 였고 계란도 하나에 4전, 5전씩 할 때였습니다. 그때 사자머리는 개당 10원씩 팔 수 있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의 힘든 공부와 연마를 거쳐 석영성은 마침내 아버지 세대의 사자머리 종이조각 제조기법의 진수를 장악하게 되였고 색채 응용과 조형에서는 용기있는 혁신도 진행했습니다. 1992년 석영성은 유네스코로 부터 "중국 민간공예 미술가"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그가 제작한 사자머리 종이조각은 더나아가 '중국 민간 예술의 절색'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석영성도 부득이하게 매출이 연간 수 십개에서 몇 개로 줄어드는 참담함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시장 판로를 늘리기 위해 석영성은 끊임없이 다양한 크기의 사자머리 작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재, 지름 80센치미터 크기의 사자머리 종이조각 한쌍의 판매가격은 인민페 4백원이며, 가장 작은 주먹만큼한 크기의 사자머리 한쌍은 인민페 2백원으로 판매가격이 책정되여 있습니다.
그래도 석영성 일가가 만든 사자머리 종이조각의 판로는 좀처럼 늘어나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해에도 겨우 한쌍의 대형 작품만을 철부진(鐵富鎭)에 판매했을 뿐입니다. 판로가 갈수록 줄어들자 유지가 힘들어진 관호진의 기타 작업장들은 연이어 전업(轉業)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영성도 아내, 자식들과 함께 인근 판재공장에서 품을 팔아 생활비를 보태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석영성은 어쩔 수 없이 저녁이 되여야만 애지중지하는 화필을 들고 사자머리를 그릴 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의 집 몸채 중간방에는 아직도 많은 사자머리 성형제품들이 어지럽게 바닦과 시렁 위에 쌓여져 있습니다. 가끔 산뜻하게 다가오는 이들 사자머리들을 바라보며 석영성은 더없는 막연함을 느낍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석영성이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는 것은 아들과 며느리가 이 수공예에 특별한 관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미 석영성의 가르침으로 사자머리 종이조각 제조의 기본적인 단계별 기법을 장악했습니다. 석영성의 아들 석미(石微)의 소개를 들어봅니다.
"현재, 많은 젊은 사람들은 이런 전통이 시대에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상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수공예가 실전(失傳)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해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석영성의 아들은 이미 중국 최대의 인터넷 교역 플랫폼인 토우보(taobao)닷컴에 사자머리 종이조각이라는 매장을 개설했습니다. 석영성은 어느덧 매일 아들을 재촉해 주문을 확인해 보게 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중국의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의 목판 연화(年畵) (0) | 2010.02.06 |
---|---|
[스크랩] 연화(年畵)의 매력 (0) | 2010.02.06 |
[스크랩] 중국의 벽돌에 새겨진 예술 (0) | 2010.02.06 |
[스크랩] 중국의 전각(篆刻)예술 (0) | 2010.02.06 |
[스크랩] 리족문화의 살아 있는 화석 "해남 여금(黎錦)" (0) | 2010.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