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써야 하는 세계 기독교사’(1)
- 2006년 韓國크리스찬 學術文學賞 著述大賞 作 -
글 심상용 (월드크리스천성경학연구소 소장)
1. 현대인들이 보편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서구교회의 죽음
매우 심각스러운 현상임에도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만 보고 그저 입으로만 상식으로만 알고 있는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서구 기독교가 죽었다라는 소문에 대한 사실과 문제이다. 서구교회가 죽었다는 말은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고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보편적인 상식의 문제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서구 교회가 죽었다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인 사실로 알고 있다. 더구나 서구 사회를 다녀온 기독들은 서구교회가 어느 정도로 죽어가고 있는지 그 심각한 현상에 대한 위기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아이러니 한 사실은 서구교회가 치명적으로 죽었음에도 한국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하여 통곡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마디도 여기에 대한 논의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큰 문제라서 그럴까? 아니면 자신의 교단 교회와 직접 관련이 없으니 자신에게서 동떨어진 문제라서 그럴까? 과연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심각하게 죽어 가고 있어도 그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으로 일관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들이 우리에게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아주 신앙이 독실한 감리교에서 지도자급의 평신도가 이제 남은 생애를 교회에 전념하기 위해 서구교회를 방문하고 돌아 왔다. 그의 여행의 목적은 서구교회를 돌아보고 자신의 신앙심을 더욱 고취시켜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생활에 더욱 매진하고 헌신하자 하는 것이었다.하지만 한 달 여간의 그의 서구교회의 탐방은 그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큰 충격과 회의감으로 몰아넣었다. 그 이유는 서구교회가 완전히 황폐화 되어져 있는 현실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그는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교회를 둘러본 그는 기독교회가 적지 않은 교회가 이슬람 사람들에 의해 이슬람 사원으로 팔려 나가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어지고, 누드 화실, 호텔, 음악당 등으로 교회가 속속 팔려 나가고 바뀌어져 가는 현실과 현상을 목격하고 돌아왔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서구교회의 현실 앞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혹감 속에 방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서구교회의 중심에 있었던 서남아시아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 지역과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미국의 기독교회들의 오늘의 상태는 회생이 불가능한 식물인간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교회들의 죽음은 물론 그나마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가장 활발하다고 하는 한국교회도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는 우려와 이야기도 자주 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1870년대 기독교가 한국 땅에 들어온 이후 기독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나마 오늘날 치명적인 딜레마이어에 빠져 있는 서구교회에 비해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성장을 해 왔다.
하지만 그나마 겨우 현상유지 되던 한국교회 성장율은 1990년대 한국사회에 몰아 쳤던 허구적 사실로 드러난 기독교인들의 각종 종말 운동과 당시 집중적으로 부각된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매스 미디어들에 의해 한국사회에 쏟아져 나옴으로 그나마 유지되던 성장의 곡선은 꺽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 아래로 향하는 하향곡선은 계속 질주하고 있는 상태이다. 서구 교회는 서구교회대로 아주 심각할 정도의 상태에서 회생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어둔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대로 점차 마치 항해하고 있는 배가 자신들에게 어떤 파도가 몰아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을 가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달려가는 것과 같이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원인을 알 수 없는 서구교회의 치명적인 죽음
문제는 총체적으로 왜 서구교회가 치명적으로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는지, 지금까지의 기독교회가 왜 죽어가고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었는가에 대한 원인적 접근이나 이유에 대하여 문제의식에 대한 접근 자체가 근본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솥 안에 가두어진 개구리가 솥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을 하다가 솥 바깥에서 불을 붙임으로 점차 뜨거워지는 자기 세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을 감자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구 교회의 죽음은 이제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물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아사되어져 가는 현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 또한 이제 한국사회라는 솥 안에서 유영하기 시작한 이래 이제 서구교회라는 솥에 달구어진 불이 한국사회의 기독교회에도 조그만 불씨가 점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직 한국의 기독교회는 그 불씨의 정도로 보아 견딜만 한 상태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느끼고 있다시피 있는 기독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퇴조하고 있는가를 통해, 또한 교인들이 느끼고 들려오는 소문들에 의해 한국교회가 침체의 늪에 빠져 들고 있는가 하는 것은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침체되는 대세의 침체국면에 대한 반전이 쉽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체념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교회 침체도 그렇지만 교회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서구교회 침몰의 문제는 마치 사해와 같이 ‘왜 침체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은 있지만 그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서구기독교는 물론 한국교회 역시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은 왜 침체되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수도 없이 던진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후원 재단의 도움으로 몇 년간 왜 미국교회가 죽어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연구를 수년간에 걸쳐 실시하였다. 그 연구의 결과 최종적인 대답으로 내 놓은 것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원인이 의해서 죽어가는 것! 이것처럼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세계 역사에서 인류를 괴롭혔던 대부분의 것은 그 원인이 밝혀졌다. 중세 시대에 수많은 세월동안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도 원인이 밝혀졌다. 인간을 괴롭히는 어떤 병도 첨단의 연구를 통해 그 원인이 밝혀졌다. 기계적인 결함이나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의 존재와 행복에 위협을 가져다주는 문제들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해 냄으로 극복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서구기독교를 침몰로 몰아간 기독교회 죽음의 원인은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지성(知性)들이 때로는 목숨을 바쳐가며 격렬한 논쟁과 연구를 거듭하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기독교 문제의 현실이다.바로 이 기독교가 안고 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원인의 문제가 기독교를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어도 그 원인 없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기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독교회의 죽음과 침체라는 국면으로 내 몰리고 있는 것이다.
3. 기독교 위기에 대한 현안들에 대한 대답과 결론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도 1990년대 위기의식을 절감한 많은 기독교 단체나 학자들이 기독교 위기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학술세미나나 발표회 강연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그때 비하면 요즘은 거의 소멸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극복해 냈기에 잠잠해 진 것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위기의 문제를 다룰 때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고자 모인 자리들마다 수많은 토론과 세미나의 결론은 ‘큰일 났다’ ‘대안이 없다’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최종적인 결론이었고 대답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러니 다음에 비슷한 범주의 문제들을 가지고 다시 모여 보았자 그 대답은 언제나 동일한 양상들이었다.
마치 환자가 왔을 때 칼로 째 놓고, 큰일났다, 대안이 없다고 하면서 벌려 놓기만 하는 것이니 다시 병원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것이었다. 같은 대답과 결론만 되풀이 되니 가 보았자 그 대답은 뻔한 것이 되었기에 자연히 그 같은 논의나 모임은 아예 의미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시작은 했으나 끝이 없고, 원인은 있으나 원인을 모르고,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없으니 차라리 말을 안 꺼내는 것이 좋고 거론을 해 보았자 상처만 더욱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침묵의 도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아 아예 그 같은 문제에 대하여 아예 칩거하고 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교회보다 서구교회가 더 심각한 침묵이었다. 한국교회의 침묵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돌아보면서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논의하다가 스스로 덮어 버린 침묵이었다.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의 서구기독교의 침묵은 격렬하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지성들이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알고 기독교를 향하여 집요하게 문제제기를 한 결과라는 데서 침묵의 성격이 다르다. 서구교회가 초기적 단계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가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자들을 잡아다 사형을 시키면서까지 그들을 침묵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제기가 서구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그 침묵은 도리어 기독교의 침묵으로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가 안고 있는 심각하고 집요한 문제제기에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던 기독교는 초기에는 칼로 화형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이 문제제기가 서구 전체로 확산되고 여론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자 그들의 날카롭고 치명적인 질문 앞에 기독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구 기독교나 한국기독교의 신앙론의 특징 중에 하나는 무조건적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아직 한국기독교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좋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서구사회에는 이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호소에 대한 설득력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그 의미가 상실되어져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의 설득력 구조가 와해되면서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외침은 오히려 미신으로 취급되었다. 더 나아가 심지어는 우상이라고까지 공격당하기조차 하였다. 이 뜻은 믿어야 하지만 알고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자신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대답이 없음에 스스로 침묵을 하였다면, 서구기독교는 타인들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침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침묵에는 기독교의 딜레마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이러한 기독교회 침체와 딜레마에 대한 문제는 터무니없는 이단들의 자기 정당화의 좋은 빌미로 제공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들은 마치 이와 같은 기독교와 자신들은 별개라는 식으로 떠벌리며 성경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며 자기가 유일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리는 기괴스럽고 광신적인 양태로 이끌고 가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어김없는 허구집단들이지만 교활한 그들의 조작과 그것을 발본할 수 없는 연구와 분석의 한계로 인하여 속수무책으로 방임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온갖 광신주의와 극단적인 신비주의 또는 성경을 사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을 마치 구세주 형태로 조작하고 신비스런 존재로 표현하는 기만적인 이단들이 속출하였다.
수많은 종파로 나누어지고 후기 기독교적 양상과 상황이 더욱 가속되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이단들의 기생과 양상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서구교회에서는 물론 한국교회도 이러한 양상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독교가 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기독교의 과제는 더욱 시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다시 써야 하는 세계기독교사는 기독교의 딜레마적 원인을 찾고자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기독교 현안적인 문제를 찾기 위해서는 원인론적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구사회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정작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도 요원한 거리에 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으며 지금의 서구 기독교의 죽음과 한국기독교의 침체는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아 내지 못하는 원인 때문에 서구기독교의 죽음과 침몰이라는 치명적인 위기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대책 없이 침체의 국면으로 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원인은 있으나 원인을 모르고, 입구는 있으나 출구의 문제점들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출발부터 정확하지 않으면 역시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본질을 외면하고 입에 맞는 좋은 말만 동원하여 역사를 기술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진정한 역사를 바로 기술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교회사가 아니라 기만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Catholic)에 의해 주도된 교회 역사는 엄격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교회사가 아니라 그 역사를 왜곡시킨 자신들의 정당화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그것이 사실인 냥 역사를 왜곡시킨 가톨릭의 주도로 쓰인 기만적인 역사이다. 따라서 가톨릭으로 채색된 역사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침몰을 가져온 원인이 가톨릭에 의해 주도된 왜곡된 역사와 무관치 않다는 사실과 이들에 의한 역사가 어떠한 내막을 가지고 있는가를 밝혀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밝히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 써야하는 세계기독교사’는 사실적으로 본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봄으로 과연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가 바로 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Catholic) 의해 굴절되고 혼합된 예루살렘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왜곡된 역사 속에서 나온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며 성경과 복음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서구기독교의 난맥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전환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구 기독교의 총체적 현상을 알고 그들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치 중요한 일이 없다.
이를 위해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총체적인 영역에 해당되기에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영역은 역시 세계기독교사에 대한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다시 써야 하는 세계 기독교사’는 한국의 교회가 한국기독교의 침묵은 물론 서구기독교의 침묵을 깨며 진정한 생명력 넘치는 시대를 새로이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 시대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 기독교가 여기에 대한 과제를 풀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기독교의 딜레마이어를 풀어갈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제는 어느 특정 종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종파 전체를 뛰어넘는 초역사적인 기독교인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를 포함한 바로 알아야 하는 기독교사의 진정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그 전모가 밝혀져야만 하는 이 시대의 최고의 과제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면모를 찾기 위해 역사의 긴 여행을 출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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