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메트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
이광호 목사
마호메트가 태어나고 이슬람이 생성된 시기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서였다. 그 시기의 세계정세는 크게 보아 오리엔트 지역을 포함한 서방세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방세계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방과 서방세계는 어느정도 분리된 형편이었다. 중국에서는 6세기 말, 수(隋)나라가 통일하여 유교를 회복하고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사상적인 통일을 기하였다. 그리고 7세기 초에는 수나라가 망하고 대신 당(唐)나라가 세워져 찬란한 중국문화의 기틀을 굳게 잡아갔다. 그 당시의 한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상호 실력들을 겨루고 있었다.
한편 마호메트 시대의 서방세계에는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두개의 강대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동로마의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이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으면서 그 세력다툼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하고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남동부 유럽을 장악하고 있었다. 4세기 이래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화된 후 기독교는 전로마제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자연적으로 그 무대가 동로마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편 사산조하의 페르시아제국은 수도를 이라크에 두고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전통적으로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렇듯이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양대세력은 정치적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거대한 두 세력 사이에는 끊임없는 군사적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6세기, 두 제국간의 세력다툼이 치열해지자 전란을 피해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아라비아반도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하여 새로운 무역로상에 위치하고 있던 메카(Mecca)는 상업도시화하고 두 강대국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점차 힘이 쇠진하게 된다.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에는 어느정도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며, 이것이 후에 이슬람 세력이 전아라비아 반도와 나아가서는 전서방세계에 힘을 뻗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이 찬란한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던데 반해 마호메트 시대의 아라비아의 문화적 여건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반도는 동서방세계에서 볼 때 지극히 낙후된 문화적인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유목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과 영세한 농민들이 여러 부족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교역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유목민들은 새로운 목초를 구하기 위해 여러곳을 이동해 다녀야했고, 생존을 위해서 그 동일 집단내에서는 서로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적으로 약탈이나 전투가 잦았다.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변가에 정주해 살던 정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유목민들이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유목민들과 정주민 사이를 잇는 교역들을 통해 외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낙후된 형편이었다. 당시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어느 부족이 피습을 당하면 항상 역습의 기회를 노리는 힘의 논리가 팽배했고, 따라서 <동해보복의 원칙>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안정되지 못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서 당시에는 지극히 비인륜적인 퇴폐적 관습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으로, 원치않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산채로 매장해버리는 악습이 있었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낙태가 곧 그것이다). 그것은 명백하고도 끔찍한 범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용인되었던 것이다. 여아를 생매장하여 살해하는 것이 그 사회에서 인정된데는 몇가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여성인구의 과잉 때문이다. 생산인력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비인력으로 인식되는 여자가 많으니 집단이나 가정을 위해 더이상 필요치 않은 여자아이는 임의로 없애버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목사회의 인구조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탈을 일삼고 전투를 되풀이해야 하는 사회에서 부족한 식량문제의 해결이나 싸움에 필요한 남자가 아니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아라비아의 전통에서 남자는 여자를 목숨걸고 보호해야 하는데, 보호해야 할 대상이 많은 것은 오히려 짐이 된다는 남자들의 판단 때문이다. 이러한 악습이 통용되는 그 당시의 사회상을 우리는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교에서 일부다처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슬람 바깥 세계에서는 마호메트를 여성을 남성을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남성우월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렇지만 이슬람 학자들은 마호메트를 오히려 여성옹호주의자로 이해한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은 생활능력이 없는 여러 여성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의 일부다처주의가 여러 아내를 둔 아브라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여아를 살해하는 악습을 없애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또한, 마호메트 시대의 여러 정황들 가운데 우리가 특히 관심있게 보아야할 부분은 종교적인 형편들이다. 그가 자라나면서 영향을 받은 종교는 정령을 숭배하는 애니미즘(animism)과 신령과의 특별한 중매인(무당)을 두고있는 샤마니즘(Shamanism)을 비롯해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 아라비아 반도내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토속종교들이다.
이슬람이 있기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종교적 혼합상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아라비아에 사는 각 부족이나 공동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다양한 우상신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과 정령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독특한 종교의식들을 거행하곤 했다. 그들은 메카에 중앙 제전인 카바신전을 두고 매년 특정한 달에 희생제물을 바치며 공동의 종교축제를 벌였다. 특별한 의식을 수반하는 매년의 순례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가 펼쳐지는 분위기였다. 그 신들 가운데서는 지고의 신인 '알라'(Allah)가 동시에 숭상되고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신적인 존재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통해 숭앙 되었던 것이다.
그 신들은 모두 동일란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신들은 좀 더 힘이 세고 높았으며, 또 다른 어떤 신들은 약하고 지위가 낮았다. 그 지역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신들 가운데는 대표적으로 마나트(Manat), 우짜(Uzza), 알라트(Allat)등이 있었는데, 그 신들은 지고신인 '알라'에게 예속되어 이었다. 그러므로 '알라'는 마호메트가 창출해낸 신이 아니라 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었던 것이다. 즉, 마호메트는 당시 지고신이었던 알라를 유일신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당시 마호메트의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메카의 카바에서는 360개의 다양한 우상들이 숭배되고 있었는데, 마호메트는 후에 카바 곧 석신을 알라와 동일시하였다.
한편 당시 그 지역에는 유태교와 기독교가 다양한 형태를 띤 채 들어와 있었다. 그 때 아라비아에 있던 유태교나 기독교는 외국인의 종교였으며,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아라비아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마호메트는 그들을 보며 자기의 종족인들의 복합신 사상 보다는 유태교나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젊었을 때 그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에 나름대로 심취하기도 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그는 나중에 코란에 유태교와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거 유입시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에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유태교의 금식을 지키도록 요구했으며, 기도하는 방향도 예루살렘(Jerusalem)을 향하도록 했다. 물론 나중에 유태교와 결별한 후에는 메카(Mecca)로 바꾸게 된다.
마호메트의 유태교에 대한 그러한 처신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마치 유태교인으로 개종한 것 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지만 마호메트가 경험한 유태교나 기독교는 정통 유태교나 기독교가 아니었다. 아라비아 지역에 살고 있던 그 외부로부터 온 종교인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성경책(Bible)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 가운데는 외경의 이야기들과 전설적인 자료들 그리고 토착종교들과 습합된 관행들이 성행하였다. 이로써 다양한 기독교적 이단들이 많이 생겨났다. 마호메트가 경험한 유태교나 기독교는 바로 그러한 종교였던 것이다.
이렇듯이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 시대의 아라비아 지역은 새로운 종교를 강력하게 요구할 만큼 혼탁한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전반적인 궁핍을 피할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건전하지 못한 악습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 주민들은 그러한 악습 가운데 살면서도 별 비판없이 그것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종교적인 불합리성과 복잡한 미신숭배는 사람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나약하게 했다. 따라서 당시 그 지역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악령의 세력에 빠져 들었으며 참된 인간적인 삶을 상실 당하고 있었다. 그러한 잘못된 삶의 형태는 풍요를 주기 보다는 불안만 가속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결국 마호메트의 사상과 종교로 하여금 사람들 가운데 뿌리내리도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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