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Ⅰ. 들어가는 글
인위적 과학 기술과 방편들과 인본주의적 가치 체계가 강조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할 것을 엄연히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아래서 그분의 '주권자'되심을 인식하는 가운데 마땅히 그분께 영광과 존귀와 지위를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마땅한 자세이며, 구원받은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며, 그 가운데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전적 무능력함과 구속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서에 입각하여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칼빈주의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은, 우리 신앙의 자본을 실질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칼빈주의의 정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서 칼빈주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후 칼빈주의의 신학 체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함으로서,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전반적인 신학 체계를 쉽게 인식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해 성서적인 입장안에서 고찰해 봄으로서 알미니안 주의와 어떠한 점에서 구별되는가를 구분하여 개혁주의 신앙의 지표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지도록 하였다.
참고적으로 칼빈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발전사에 대해 기술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칼빈주의를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아무쪼록 이 칼빈주의 소고를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성서에 나타난 분명한 계시의 빛 비춤을 얻어,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길 기도 드린다.(빌3:7-9)
Ⅱ. 칼빈주의의 정의
칼빈주의는 16세기 중반 제네바를 중심하여 중교 개혁을 일으킨 칼빈의 교훈을 충실히 따르는 신학자들이 17세기 초에 체계화 시킨 하나의 신학 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파'의 신앙 고백과 교리 문답들에 본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신학적인 신념 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주의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포괄적인 성경 사상 체계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근본 원리로 채택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조직화된 신학 사상이다.(롬11:36)
칼빈주의는 인간의 관심사나 인간 중심의 세상 체계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도리어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그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인간을 어떻게 붙드시며 섭리하시는 가를 먼저 생각하는 신학 체계이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삶의 근원을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만물의 처음과 나중이시며,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절대 주권자와 입법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주의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하나님 중심주의 신학 체계이다. 칼빈주의는 낙관주의 문화 철학이나 낭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을 제일로 여기고, 무한한 영광과 존귀와 능력속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하는 사상이다.
칼빈주의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하나님 중심주의 신학 체계이다.
Ⅲ. 칼빈주의 신학 체계
바우르는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를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며,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였다.
1. 하나님
신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칼빈은 지적하는데 그는 "신인식의 문제는 인간들이 마땅히 일생을 바쳐 탐구해야 할 주제" 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주도한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 제1문에서는 " 인생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일 " 이라고 했고 제3문에서는 "인간 최고 행복도 신인식" 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의 모든 사고와 일상생활의 대소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의 생각에서 조금도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인식은 불가피하게 인간 실존의 자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이 신인식은 창조자로서의 참되신 하나님 인식으로 이끌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칼빈은 신인식을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으로 확신했다.12) 따라서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과 일치 대응되는 사상임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존재 인식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냉담한 사변은 그것을 엿보지 못한다고 보았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아는 것 뿐이 아니고 그의 영광도 알고 그에게 대하여 경외의 있어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고 계시는 사람의 유한한 이해력에 적응시켜 진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사람에 접하면 사람을 죽게 하므로 피조물에 나타나는 것은 그의 영광으로 하신 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을 탐지할 수 없는 높이에서 찾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한도 안에서 인식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은 신인식에 있어서 피조물로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한계를 지었다.
칼빈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 창조와 성서를 병립시키며 사람의 본래 마음에는 그것이 타락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씨가 잔존한다고 하여 자연에서 신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기술을 보면 강요 1:2:1에 아담이 순결했더라면 하는 전제도 말했고 종교의 씨는 더러운 미신에, 더러는 의도적인 악행에 기울어지고 열매 맺을 만큼 성숙함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했고 자연적 신인식이란 사람으로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인식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즉 칼빈은 부패한 인간에게 관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숭배와 모든 미신의 무서운 원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자연은 신인식의 원천 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이고 오직 성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마음안에 자연적으로 심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창조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조의 상태에 의해 눈이 어두워져 있어서 성서에 주어진 더 완전한 계시를 필요로 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성은 출34:6에 나타나 그 이름에서 밝히 제시되고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34:6)
더우기 이렇게 열거된 완전성들은 우리가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는 그것들, 즉 동성, 선하심, 자비,공의, 심판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의로써 모든 사람들안에서 보시는 죄악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지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무한한 그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구속의 은총을 주셨다.
2. 창조물인 인간의 의지
창조물은 절대적이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숨겨진 '영감과 능력'에 의해 창조물을 유지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신다.(하나님의 내재성) 하지만 하나님이 결코 범신론적으로 그의 피조물들과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 섭리에 의해 통치하신다.(하나님의 목적성)
개혁파 신학의 근본적인 관념은 세계는 그 삶의 모든 부분과 과정과 단계와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된다.
즉 창조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작정을 따라 만물이 그 창조의 정해진 법칙을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연적으로 이루지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가 아니시며, 피조물의 의지를 침범하지도 않고, 제2의 원인이 되는 것들의 자유와 우연히 되는 것을 페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그 것들을 굳게 세우신다. 하나님은 가능한 모든 상태에서 되어질 일이나 또는 되어질 수 있느 것은 무엇이나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래의 어떤 일에 대해서 장차 그 일을 보고 아시므로 작정하심도 아니며, 또는 무슨 일이 어떤 형편에서 되어질 것임으로 무엇을 작정하신 것도 아니다.
칼빈주의에서 모든 행위와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이차적인 원인들이 작용하는 현실(인간 자유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를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인 은사로 여겨 소중히 여긴다.
인간은 본래 타락하기전의 올바른 상태에서는 의지의 온전한 자유를 소유했으며, 아담이 그 의지를 사용하여 생명 나무를 선택했더라면 영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앞에서 범죄하여 넘어진 것은 아담 자신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후 인간의 자유 의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위해, 죄을 짓고자하는 내적인 죄성에 더 기울어 지게 되었다.
칼빈주의을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다시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생활의 복잡한 현상에 있어 하나의 작은 요소에 불과 하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안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다만 제한된 정도로 상황을 만들어간다. 물론 인간은 어느 정도로 자기의 환경을 만들기도 하며, 파괴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킬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 인간에 제어 할 수 없는 원인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 일반적으로 그러한 제어 할 수 없는 것에 압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의 부모나 자기가 태어난 환경과 삶의 상태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또한 특정한 나라와 문화안에서 자신를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만나게 하며 자신에게 기회를 주며, 관계를 맺게 하는 특별한 사건의 과정들을 스스로 선택해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는 힘들과 부딪히며, 어떤점에서든지 외적인 섭리에 조금만 변화가 생기면 그와 관련되는 모든 개인들과 그것들 다음에 오는 사람들의 미래의 전체적인 양상이 바꾸어질 수 있다.
예컨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지 않았더라면 하나의 특정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결정이 전적으로 없을 것이며, 전적으로 다른 결정들에 있어서 요셉 자신과 이스라엘과 세계에 다른 결과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편에서 본다면 인간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 되는가? 하나님의 예지'에는 가능성들'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창조주앞에 놓인 이 무한한 가능성들가운데서 하나님이외에 누가 무엇이 그 이차적인것들이 '현실성들'로 나타나게 할 수 있겠는가?
피조물의 이차적인 자유와 부수성은 단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만 이것들이 현실적인 세계안에서 원인들로 작용하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3. 죄
칼빈주의의 섭리론에선 죄가 창조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일관성있게 주장한다. 그러면 죄의 행위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죄는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여러 가지로 결정되고 규정되고 통제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이 죄는 하나님의 지혜속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인간안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며 통제하신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죄와의 관계속에서 그분의 섭리을 통해서 나타난다. 죄는 단순히 하나님의 허락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안에서 지극히 현명하고 능력있는 통제력을 결합시킨 가운데 일어나며, 그분 자신의 거룩하신 목적에 따라 여러기지 경륜속에서 그것들(죄가 일어나게 될 환경과 시간등)을 정하시고 지배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그것의 죄악성은 단지 피조물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죄를 창조하거나 승인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을 지은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롬3:22-23)
4. 인간
칼빈의 인간 타락이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형사에 관하여 사람의 구성요소 가운데 동물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의 모든 동물에 뛰어난 요소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이 말은 아담의 지성이 명확하고 감정이 이성에 복종하고 그의 모든 감성이 잘 조절되고 자기가 가진 모든 훌륭한 것은 조물주가 주시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에 아담에게 주어진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칼빈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장소에 있었고 진정으로 이 은사를 가지고 평화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그는 불행히도 옳지 않은 부분을 택했으므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칼빈은 원죄의 성격이 부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적극성을 띤 아담의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원죄를 설명하는 용어는 교만이라든가 아니면 불순종, 배신, 변절, 범법과 같은 적극성을 띤 용어가 많은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원죄를 범할 때 범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명렬에 반항하는 행동인 줄 알면서 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친 상처는 "인간 존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전체에까지 미쳤다."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존재 전체가 사악의 홍수에 침몰되고 말았다." 고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17)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 순수한 존재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임의로 선으로부터 떠나 타락하고 부패한 것으로 본다. 인간 본성의 이런 부패는 인류의 첫 조상으로부터 나와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은사들은 죄에 의해 부패되었으며, 인간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회수되었다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갓에 대해서 칼빈은 '간접적인 '전가론을 주장한다. 즉 아담의 자손들은 직접적으로 아담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부패와 그 부패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죄의 행위들을 통해서 정죄받는 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을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롬5:12)
즉 모든 삶이 원죄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의 오점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본래 씨의 형태로 그 아담 한 사람안에 있었으며, 인류의 자연적인 본질에 의해서 유전적인 부패, 보편적인 타락과 ㅇ니간의 영적 자유의 상실등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덕목이나 찬란한 업적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덕목들과 은사들을 인간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형상의 잔재로 설명하고, 완전한 부패를 막기 위한 억제적인 은사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특히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보편적인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덕목들안에는 하나님을 위하는 참된 경건의 뿌리가 없으며,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의의 특성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지식이나 의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5.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를 위한 유일하고 가장 완전한 희생과 보상이며,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무한한 진가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이 그의 순수한 선의에 따라 복음을 보내시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과 구별 없이 선포되고 공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의해 부름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거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속에서 살기 때문에 마땅히 자신의 죄로인해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드린 희생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돌려져야한다.
6. 칭의와 성화
A. 칭 의
칭의란 성경에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서 칭의라고 한다. 칭의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체다카( )"란 말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수네( ) 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겨에서는 믿음과 칭의라는 말이 병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 이것은 구원을 양면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 칭의는 상속이 아니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즉 칼빈은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으로 해석 하였다.
B. 성 화
칼빈에 의하면 칭의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칭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어지고 성화는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영원한 유업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방식을 따라 성령과 함께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그는 성화의 영(SPIRIT OF SANCTIFICATION)이라 불리다고 보았다.
7. 성서론
칼빈은 열광적 영감주의자가 성서 본문을 떠나서 임의의 때와 곳에서 받는 일시적 감명으로 진리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있게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된다고 했다. 즉 성서의 으뜸이 되는 증거는 말씀하시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느냐 함을 설명하기를 " 만일 우리가 양심의 참된 관심을 의논컨대 -저희가 심적 동요를 받지 않기 위하여- 또 영속적 의심의 주제를 의논컨대 -저희가 적은 일에 주저 않기 위해서- 이 확신을 인간의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원천에서 구해야 하는 데 곧 성령의 숨은 증거에서 얻은 것이다. " 고 하였다. 이 구는 강요 제2판(1541년)에 처음 있는 그대로 실려 있고 그 이후 성서의 권위가 항상 제 1원리로 강조 되었다.
칼빈은 성령의 내증을 설명하면서 이 원리는 결코 주관주의가 아닌 성서 본문의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로 하고 그 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독자에게 다시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의 소재를 성령에 두는 것으로 성서 자체가 성스러운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합리적인 증거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받든다고 하여 똑같은 해석을 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경건히 또는 열심히 존경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의견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든일의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로 겸손하게 하며 인간이 성서의 진리를 찾아냄에 있어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8. 삼위 일체론
칼빈은 전통적인 표현 "인격"이란 술어를 독특한 말 SUBSISTANCE, 즉 존재 양태, 현실 존재로 대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칼빈은 SUBSISTANCE라고 부른 것은 개별적 현실 존재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한 것은 동질성과 개별적인 존재와 특성을 각 인간이 지속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 즉 다른 존재 양태에서 관계되어 있으면서 도히려 혼동될 수 없는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서적 계시에 의한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라고 선언하면서 명확한 구별로 세 인격으로 생각하도록 제시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이것을 이행하지 않고는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상이 없고 우리의 머리중에 부동하는 하나님의 공허한 이름만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삼위일체는 신관의 본질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세 인격의 본성은 개별적인 검토에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치안의 그레고리의 말과 같이 세 인격의 동시조명에서 비로소 한 인격이 이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터틀리안의 말을 인용해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오히려 배경과 질서에서 그의 말씀이 있다는 것과 본질의 통일에서 한 하나님이 있으나 이 통일이 신비스런 배경으로 삼위에 배정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셋이 있음은 상태로가 아니라 형태에서, 권능에서가 아니라 질서에서 된다고 하였다. 터툴리안의 이 세가지 인격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공격이 있으므로 그는 이를 변호하여아들이 아버지 다음 간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이것을 인격의 구분에만 적용한 것이지 본질에서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의 특성은 구분되고 부자, 성령이 영원하고 성부에게도 지혜나 권능이 결여되지 않으므로 시간적인 선행 후행을 말할 수는 없으나 질서가 존재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은 세가지 본체가 있고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의 완전함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을 떠나지 않고서 자의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편만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에 관한 이러한 이론을 성령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성부, 성자와 구분이 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체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있는 특성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며 고유성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관계에서 일치하며 그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일치함을 설명함으로써 고대 교회로부터 교회신학이 정립하고 인정한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의 신격과 그 관계와 행동에 있어서 오류가 없음을 성서상의 증거를 들어 믿고 승인하였다.
9. 성령론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고대 교회 교부들이 인정하고 있는 성령의 신격을 인정하고 그 어휘를 사용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증거들을 들어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고 해명했는데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성령을 삼위일체의 체계 안에서 성서가 증거하는 성렬이 하나님이심을 해명하고 있다. 그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믿고 승인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는데 첫째, 성령이 사용된 이름이 신이심을 증명한다. 성자가 인격적 존재 이기 때문에 예수(마1:21,25)라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성령도 인격적 존재 이기때문에 보혜사(요16:7)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책망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영원성(히9:15), 전지성(고전2:10-11), 편재성(시 139:7-8), 생명과 진리의 영(롬8:20, 요16:13)등을 거론하고 있다. 셋째, 성령 훼방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 받지 못하듯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용서르 받지 못한다. (마13:31-32) 네째, 여러가지 은혜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4-11)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8:19절을 인용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에서 이름이 단수로 사용됨에 따라 삼위가 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빈은 성령 하나님이 어떤 현상적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에서 여러가지 현상적인 제목을 붙여서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령을 양자의 영 (SPIRIT A DOPTION), 보증과 인(THE GARANTEE AND SEAL), 물(WATER), 불(FIRE), 생명(LIFE), 기름과 기름부음(OIL AND ANONTING), 샘물(SPRING), 주의 손(HAND OF LORD)등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으로 보았고, 아버지와 아들의영으로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인 영이라고 하였다.
10.거룩한 공회(교회론)
칼빈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이므로 성도는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러한 교회에는 참된 두 가지 표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것과, 성례가 정당하게 베풀어지는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바른 교리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되는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복음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황 중심의 성직 제도에 반대한다.
집사는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빈민, 병자 및 과부를 돌보는 일이다.
칼빈은 교회가 교역자를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들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된 성도의 높은 표준에 의하여 투표로 선출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왕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나 후계자를 필요라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대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고 주장 한다.
칼빈은 교회회의의 권위에대해 어는 종교회의의 교리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였으며,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칼빈은 교리문제 혹은 성경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을 이야기하는데, 권징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악한 사람들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사소한 죄악이 아니라 큰 범죄에 대하여는 출교시켜야 한다.
칼빈은 성찬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건지신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 칼빈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먼저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한다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다 온전히 찬양토록,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모든 성결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라 말한다. 이러한 성찬이 가져다주는 유익으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함이 있든지 지복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신케 한다는 것이다.
성찬은 죄인된 우리를 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부어주신 유익을 잊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게 하고,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를 고백케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신앙의 터를 제공하는 국가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우상숭배 억제, 치안 유지, 시민 재산 보호,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함).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신자의 태도역시 중요하다고 말했다.
Ⅳ.칼빈주의 5대 교리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아담의 범죄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복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의 범죄후, 부패한 내적 죄의 본성(롬7:20-8:2)을 유전받게 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일에 대해 죽게 되었고, 영적인 눈과 귀가 멀게 되었다. 아담의 범죄후, 인간의 마음은 기만적인 것이 되었으며, 하나님보시기에 절망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부패한 죄의 본성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인간 자신의 악한 본성에 억눌러 그 죄성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7장)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서 스스로 선함을 선택하여 온전히 행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적 부패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 선한 행동을 할 수 없고, 가능한 죄들에 대해 깊이 몰입되어있다.
이 전적 부패란 타락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보시기에 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후 모든 인간이 영적인 면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엡2:1)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어 사탄의 종이 되어, 우리 육체의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 (엡2:2-3)
인간의 이 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의 그 타락한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 나 생각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예수님의 생명주는 영(고전15:45)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삶을 산다. (엡2:2-3)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체의 정욕(갈5:20-24)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충족시키도록, 날마다 유인하고 매혹하고 있다. 사람이 비록 선을 행할지라도 자기 자신이나 사람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이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창6:5하, 렘 17:9)
모든 인류가 죄를 사랑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죄의 선고와 심판이 모든 인류에게 내려지게 되었다.(창6:5, 렘17:9) 죄란 사람의 외적인 행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내적 행위와 생각까지 포함한다.
사람은 부패한 내적 죄의 본성으로 인해, 주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신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롬3:10-12)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척하는 인류는 흑암의 신을 섬기고 흑암을 빛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1:1-12) 또한 범죄한 인간은 흑암의 권세을 잡은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에 인간의 그 자유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즉 마음은 바르게 살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치 않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보시기에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의 영혼은 그 자신 스스로의 자유 의지와 마음으로는 주예수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요15:40) 이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의지가 영적으로 '죽음의 신'인 사단에게 포로되었고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롬7:17, 딤후2:36)
또 타락한 인류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는 완전한 진리에 도달치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죄와 사망의 법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전도와 그 복음을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전2:14)
또한 아담의 범죄후 함께 전적 부패한 사람들은 그 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신령하고 영원한 하늘의 것들을 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빛과 진리와 거룩이신 주예수님을 그분으로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던 것이다.
니고데모역시 이스라엘의 유능한 교사였으나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요3:3)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은 빛(요1:3-10)을 볼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다. 아담의 범죄후 함께 전적 부패한 인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각이나 외적인 어떤 행동을 할 수 없다. (엡2:8-9) 불순종과 함께 타락한 인류는 소망없이 죄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며, 영적인 죽음의 밧줄로 사단에게 포로 된 자이며, 하나님의 사역과 전혀 상관 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타락한 본성이 주의 능력으로 깨어지게 되면 죽음은 영생으로 대치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과 열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원하여 행하게 된다. (빌2:13)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물이며 은사이지, 인간의 행위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모든 인류는 창조전에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목적을 따라 생명으로 인도될 자들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이 예정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선하고도 기쁘신 뜻에 따라 된 것이며 그분의 선하고도 기쁘신 뜻에 따랄 된 것이며, 그분의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그영원하신 사랑에 위한 것이지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끼칠 어떤 행위나 조건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롬 8:28-29, 롬7:11,13, 고전 1:26-29, 딤후1:9, 요15:16, 엡1:4, 요6:44등)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경륜에 따라 예정되고 선택받은 자들만이 죄와 사망과 그 모든 소극적인 것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행13:48) 주예수님께로 나아온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택한 자들이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며 주께로 나오는자들는 결코 내쫓김 당하지 않는다,(요6:37-390
엘리사 당시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으나 오직 이방인이었던 나이만 장군만이 고침받았으며, 엘리야 시대에 온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오직 시돈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은 것같이, 주님께서는 영원전에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특별한 무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으며, 그외의 무리들은 강팍케 되도록 내버려 두셨다.(롬11:7)
나아만 장군이나 사렙다 과부가 그 은혜를 받을만한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께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셨고,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결과 였던 것이다.(롬9:18)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는 이스라엘을 무시하시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푸셨다.(롬9:25-29)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선행이나 조건이나 마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롬9:15-16) 무조건적인 은혜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다. 주예수님께서도 친히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그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65-66)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선행과 그 행위의 의를 자랑하거나 앞세우거나 교만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며, 주님이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빌3:8) 주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발견되어지도록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생명과 믿음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와 마음으로는 속죄양되시는 '주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요5:40)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A. 문제제기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려 오셨으며 실제적으로 누구의 죄에 대해 구속을 성취하려고 이땅에 오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은 두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해답을 강구해왔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고 말하는 보편속죄를 주장하였으나,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믿는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제한 속죄를 가르친다. 알 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가 에서와 유다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말한다.(요일2:2, 고후5:14, 요4:42)
그들은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에수님을 배척하고 지옥에 빠져 들고 있는 버림받은 자들의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그분이 모든 자을 위해 죽으신 것)과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모든 자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
알미니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사죄함을 베풀어줄 수 있으나 정죄를 받은 죄인이 그 사죄함을 스스로 거절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한한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그 사실을 믿는 신자, 즉 실제적으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선택된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선 성부께서 그분 자신에게 주신자들의 죄를 속죄하기위해 , 십자가에 죽도록 계획되었다.(요6:37-40)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불신하는 인류가 포함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마1:21), 자기 양(요10:15), 자기 친구(요15:13), 교회(행20:28), 신부(엡5:25)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는 주예수님의 속죄가 그 능력에 있어서 제한이 없고, 무한한 능력과 가치를 지니지만, 그 실제적인 범위에 있어서 그분이 영원전에 선택한 자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B. 정의
하나님께선 그분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과 경륜에 따라 그 백성들을 예정하셨지,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다.(롬8:31-33) 그 구원의 은혜는 공로없이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다. 만약 온 인류가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주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것을 믿음으로 영광에 이른 자보다 불신앙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주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완전한 승리가 되지 못하고 부분적인 승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이들은 베드로서을 언급하면서 이 말을 반박한다.
"주의약속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베드로 후서가 누구에게 보낸 것이며, 그안에 무엇을 언급했는 가하는 질문에 응하므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예수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1:1)
여기에서 베드로는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들에게 편지한 것이지, 그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조건을 믿는자에게 편지한 것은 아니다. 그 구절의 본래 의도는 주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전세계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롬5:8)
하나님께선 우리 죄를 위해 그 아들을 죄인되게 하셨고, 그 아들의 몸을 제물로 받으심으로 단번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주예수님께서 택하신 '신부'만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됨을 말한다.(엡5:25)
또한 육체의 소욕을 따라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에 의해 쫒김을 당했고,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이 그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같이(롬9:7-9)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은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이 만세전에 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갈1:1-4)
성경은 '제한 속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5-26)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양'(여10:26)을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더구나 주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양들은 그분을 알고 따른다고 말한다.(요10"27)
그러므로 주예수님의 죽으심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인 것이다.(벧전2:9, 마1:21)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구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에 의한 것이며, 그분은 무한히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의 은총을 피조물이 대항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성령이 역사할지라도) 물리치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믿음은 그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상으로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인 것이다. (롬4:4-5)
인간은 사실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조금도 없으며, 그 공로를 하나님앞에서 행할 수도 없다(딤후1:9) 그러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무슨 말인가?
첫째로 소극적인 면에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억지로 행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주께서는 가롯 유다의 그 한일을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유다가 그 주인인 사단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자의'로 행한 것이다.
즉 가롯 유다는 그 부패한 마음이 행하도록 충동질한 것을 순응했고, 행동으로 실제 옮겼던 것이다. 이 사실은 주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택하시어 그의 공생애에 3년동안 함께 있게 하셨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둘째로 긍정적인 면에서 그 은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그분 자신이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롬9:22-23)
하나님의 그영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은 불가항력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원죄와 자범죄로 죽은 인간의 영은 불가항력적으로 죄와 사망의 법인 사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롬7:20,8:2)
주예수님께선 창세전에 그분안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모든 자들의 죽은 영혼과 육체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살리신다는 말은 그 양들에게 목자되신 주예수님을 불가항력적으로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성품(거듭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돼지는 본래 타고난 본성 때문에 진창에서 딩굴기를 좋아한다. 그라나 양은 그 본래의 타고난 본성때문에 진창에서 딩굴지 않는다. 가장 적은 새도 그 본래 '날 수 있는 생명의 법'을 가지고 있기에 가르치지 않아도 날 수 있는 것이며, 개에게 짓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본성이 본래 '짓는 것'을 가지고 있기에 짓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아담으로부터 전수되어진 그 본래의 타락한 본성과 성품 때문에 '죄와 불신앙'가운데 홀로는 일어서지 못하고 계속 죄의 수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택한 자들에게는 거듭난 생명(새로운 성품과 본성)을 주신다. 이제 주을 믿는 자에겐 옛 것들이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새성품과 본성은 인간의 거듭난 새 영을 말하며, 그영은 성령이 거하시는 영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죽었던 그영이 불가항력적으로 마귀와 어둠을 찾고 좇았던 것 같이, 이제 성도는 주예수님의 그 피의 구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 즉 거듭난 영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그 은혜로서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주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할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아들이 원하시는 자만이 아버지에게 올 수 있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요5:21) 사탄은 여호와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능력있는 피조물이었으나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되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저주받은 교활한 원수로서, 인간보다는 훨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보다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저주받은 천사의 그 행동을 그분의 뜻안에서 엄격히 제한하셨다. 그예로 욥을 사탄이 시험했을 때, 박해할 수 있었으나 생명에는 손을 될 수 없게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탄은 여호와처럼 어디에나 편재하지 못하고 절대로 전능하지 못한 작은 피조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탄은 단지 하나님이 만든 지극히 적은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의 머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해 상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불순종후 타락한 죄의 본성 때문에 사단에게 저항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후에 사탄으로 비롯된 죄와 사망의 법(롬7:17)에 종노롯하게 되었다. 즉 타락한 인간에겐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강력한 피조물이었던 사탄을 대항하고 저항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물든 인간들은 악한 사탄의 계획과 그 뜻의 통치를 저항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엡2:2)
그러기에 사탄은 자기 뜻대로 인간을 유혹하고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들로서 마귀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저주아래 있었다. 우리들은 본래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되고 제한된 의지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듭난 생명과 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사망과 죄의 법에 끌러 가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에게 붙여 주신 선택된 자들만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고 주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우리가운데 표현되어진 사단에게 포로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예수님에게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죄와 사망의 법을 저항하거나 뿌리치고 그 법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범죄후 마귀에게 사로잡힌바된 의지와 뜻인 '죄와 사망의 법'을 가지고 있어 주예수님께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창조 당시의 완전했던 그 자유의지가 범죄후에 죄와 사망의 법에 눌리게 되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그 자유의지를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되었기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주예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나 통로를 만들거나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6:44)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추구하는 어떤 경향도 일부러 회피하려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며, 설사 선(善)을 행한다해도 그 마음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내적인 본성이 잠재해 있기에, 그 마음을 관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그 선한 행동이 외식밖에는 되지 못하며, 온전히 열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범죄하여 죄와 사망의 법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만한 어떤 공로를 스스로 행하거나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생명과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되고 예정받았고 부름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예수님의 그 죽음과 그 고귀하신 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정하신 자들'만을 위해 특별히 주어진 것이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선택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며, 전능하신 그 뜻에 의해 결코 그들의 구원을 잃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이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행위로 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되었듯이,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의 선물역시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나 악행이나 조건들에 의해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다시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그일은 하나님의 사역이지 인간의 사역이 아님을 바울은 말한다,(빌1:6)
아버지께서 그 모든 능력을 아들이신 주예수님께 주셨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그 자신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빌3:20-21, 요17:2)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자는 언제나 그 믿음에서 떨어지거나 잃을 수 없다.(요6:38-39)
우리가 구원을 얻을 많나 행위를 절대적으로 행할 수 없듯이 구원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행위역시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사람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예수님께서도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요, 또 거처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디모세후서1장12절에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줄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다. 주예수님께서는 그분자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흠없이 보존하시는 놀라운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사실 인간은 그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힘으로 보전할 수 없다. 주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성도들을 항상 지켜 주실 뿐 아니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기에 성도들은 그분의 성령안에서 보존될 것이다.
만약 그 구원의 은혜의 유지와 보존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빚어진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에 의존한다면, 그 구원은 결코 소망없이 깨어질 것이다.
Ⅴ. 칼빈주의 예정론
예정론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칼빈의 독창적인 교리는 아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심지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마르틴 루터와 훌드리히 쯔빙글리, 마르틴 부써와 초기 멜랑히톤 등이 주장했다. 그런점에서 그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교리학에 있어서 아마도 무시되거나 외면 될 수 없는 위치를 가질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빈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지지되고 주장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예정론" 하면 주로 칼빈이나 또는 칼빈주의를 연상하게 되는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칼빈의 예정론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큰 주제이다.
칼빈의 교의학 속에서,예정론은 실제로 그렇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칼빈에 대한 주석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한때 알렉산더 슈바이처나 F.C.바우어 등여러 학자들이 칼빈 신학의 중심교리를 예정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예정론이 중심교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교리가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부정될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만일 칼빈이 그랬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리고 신학적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그런 의문점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 연구에서, 예정론이 칼빈에게는 어떤 정황에서 어떻게 발생하여 발전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신학적으로 어떤의미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것의 형성 과정들을 통해서, 그리고 칼빈 당시에 있었던 여러논쟁중에서 멜랑히톤과의 논쟁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한다.
1. 박해받는 교회들을 위한 위로와 확신의 교리
(초기 예정론의 자리와 의미)
칼빈은 1532년부터 파리와 오를레왕,부르쥬 같은 대학도시들을 다니면서,신학,법학,문학등을 공부했다. 당시독일이나 스위스 등지에서는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그 여파가 파리와 여러 지방 도시에까지 확산되고 있었다.특히[교회의 바벨론포로]나[그리스도인의 자유]같은 루터의 저술들이 많이 읽혔다.
칼빈은 1530년대 초부터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이유나 정황은 알려져있지 않지만,그는 아마도1533년에'급격한 회심'을 경험하고 복음적인 기독교의 전파자가 되었다. 당시에 프랑스에서는 군주 프랑수와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고 있었다. 특히 1534년10월에 일어난 플라카드 사건은그의 개신교도 박해를 가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B.밀롱이 화형당하고,여러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 가운데는 칼빈을 자신의 집에 묵게 했던 상인 E.드리포르쥬도 끼어 있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칼빈은 일단 파리를 떠났다가 프랑스를 벗어나 바젤로 갔다.그는 1535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 집필을 마치고 그 이듬해 출판했다.
이 책은 일반적인 교리문답서보다 조금 더 길고 상세한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간결한 책이었고 그 크기도 작았다.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이 망또 속에 숨겨 다니기 쉽게 하려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칼빈이 예정론을 말한 최초의 책이 바로 그 기독교강요 초판이었다. 거기서 그는 예정론을 사도신조를 해설하는 네번째 단락 교회론의 자리에서 말한다. 그는 여기서 '예정'대신에 '선택'이라는 용어만 쓰고 있다.'예정'과'선택'이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것은 그 이듬해의[교육과 신앙고백서]에서부터다. 그는 거기서도, 그리고 그이후로도 그 용어들을 특별히 구별하지는 않는다. 기독교강요 초판에 따르면 '거룩한 공교회'는 바로 '선택 받은자들의 수 전부'인데,"그리스도가 그들 모두의 인도자이며 왕자이며 몸으로 볼때 머리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왕국에모두 모여지기 위해서 세상이 세워지기도 전에 그분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서 의롭다고 인정하며... 성령의 축복들을 부어 주셔서 그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며,결국 거룩하고 흠없이 보이도록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은 소명(vocatio)과 칭의(justificatio)로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을 바로 선택된자로 본다는 것이다.오직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고 튼튼한 구조위에"서 있기때문에"세상이라는 건물이 전부 무너진다고 할지라도"그들의 "구원은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아니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신다"고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문제는 , '누가 선택된 자며 버려진자인지'를 가려내는 데 있는것이 아니라..."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그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선택해서 자신의 교회의 양떼속으로 인도하시고자 원했던"... 그 그리스도에 대한'확실한 신앙'에 있었다."우리가 신앙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만큼 사실상 그는 자신을 몸소 우리들에게 내어 주신다."
우리는 여기서 예정론, 즉 하나님의 선택론을 말하는 칼빈의 일차적인 관심이 교회론적으로 정위되어 있는것을 발견한다.
칼빈이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주요 관심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문제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어떤 외적 형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그리스도안에서)선택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의롭다고 인정했으며 성령의 축복으로,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서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흠없고 아름다운 상태"로 만드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 전부'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카톨릭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주장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교회들이 -그것이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건-바로 하나의 보편적 교회라는 시각이다.
그럼에도 초판의 서문을 대신한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칼빈은 기존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형태를 로마교회와 그 주교제도에다 설정하면서",자신들(개신교)의 교리와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어린 교회들을 중상하고 박해하면서 전멸시키고자 했다고 고발한다.
2. 종교개혁 정신의 신학적 표현으로서의 예정론
(예정론의 발전과 신학적 자리 매김)
기독교 강요가 발간된 그해 8월 칼빈은 기욤 파렐의 요청으로 쥬네브에서 종교 개혁활동을 시작한다. 구체적인 그의 직무는 성서를 가르치고 파렐을 도와 목회하고, 또한 종교적으로 필요한 여러 문건들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 이듬해인 1537년, 그는 최초의 교리문답을 작성하는데, 그것이[쥬네브교회에서 사용되는 교육과 신앙고백서]이다.
칼빈은 바로 이 문서에서 최초로 예정론을 "선택과 예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독립된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
칼빈은 그것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오직 주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선택으로써 자신의 자녀와 하늘의 왕국의 상속자로 예정했던 그런 사람들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세상의 창조이전에 되었던 하나님의 같은 그 계획에 의해서 영벌에 처해진 사람들 모두에게는 명백하고도 분명한 진리의 설교가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냄새 말고는 다른 어떤 것일수 없다".
그리고 칼빈은 주님이 그렇게 한 이유를 "우리들의 완악함"과 "연약함" 때문에 "숨겼으므로", 그것을 알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압도되는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단지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며, 영벌자들은 진노의- 그렇지만 정당할 뿐인- 그릇이라는 점을 인정하자고" 권했다.
끝으로 칼빈은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구하기 위해서 하늘을 꿰뚫고 들어가지 마고...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분하고 풍성하게 그 확실성을 확고히 해준 그 증거"가 바로 "세상의 기초들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생명에로 미리 정해진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 선택된" 그리스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지는"거울"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선택의 담보"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써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다면,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에 대해서 더이상 탐구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두드러진것은 칼빈이 최초로 이중예정을 말했다는점과 선택의 확실성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은 이 이중예정론을 말하기 위해서 문서 처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 예정된 자들에게만 뿌릴를 내리고 ... 영벌에 처해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냄새"일 뿐이라는 경험적인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1539년 기독교 강요 제2판 이후모든 판들에서 예정론의 출발점으로 다시 제시한다.
그럼에도 칼빈이 여기서 경험을 들어 주장하는 이중예정은 사실상 칼빈의 것은 아니다.프랑수아 벤델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는 마르틴 부써의 것이었다. 칼빈은 이중예정에 관해서 의심할바 없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초판이 기록되던 어간인 30년대만 해도 121명이 재판에 넘어갔는데, 그것은 바로 이전 20년대의 8명보다 무려 15배나 증가된 숫자였다. 그렇게 소수자들의 교회가 거짓교회로 낙인 찍히면서 박해받고 존폐의 위기 앞에 서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칼빈이 그 교회의 확실성,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왜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선택 받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의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고 튼튼한 구조" 위에 서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건물이 모두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흔들리거나,넘어지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신다".
이런 선언은 당시 신앙의 문제로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위로와 격려와 희망, 그래서 장작더미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변치않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와 같이 당시에 박해 받던 개신교들은 예정론으로써 위로 받고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견뎠다. 그래서 우리는 개신교들이 집단적으로 당했던 그러한 심각한 고난과 박해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칼빈의 초기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 할수 없다고 분명히 말할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나 또한 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예정론이 자신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증오하고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는 결코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예정론은 선택된자의 자의식을 우월감으로 가득차게 한다거나 또는 선택되지 않은 자들을 멸시 비방하게 하는 그런 것도 전혀 아니었다.
칼빈에게 예정론의 효용, 또는 목적은 바로 그것일 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론의 목적은 결코 "선택된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는데" 있지 않았다. 칼빈은 그것을 매우 강조했다.
따라서 이상의 논의로 볼때 칼빈의 예정론의'삶의 자리'는 박해, 특히 프랑스에서의 개신교의 수남이라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초기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로 예정론이 참된교회가 외적인 제도나 기존의 권위적 질서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성령의 빛으로 날마다 거듭나는 신자들의 무리들이라는 점을 천명함으로써 새로 태어나고 있던 개혁 교회의존재근거를 밝혀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것은 당시에 박해 받고 있었던 어린 개신교회들에게 확신을 주고 용기와 위로를 줌으로써 그 고난의 상황을 견디어내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것 들이 바로 칼빈의 초기 예정론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였다.
그는 설교나 목회의 경험등을 통해서 그것을 공감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점은 이[교육과 신앙고백서]가 칼빈이 쥬네브에 정착해서 성서를 가르치며 파렐과 함께 목회했던 그런 정황에서 쓰여졌다는 사실레서 뒷받침된다.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한 신학적인 이유는 이 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3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강요 제 2판을 발행했다.예정론은 8장에" (신의 예정과 섭리에 관해서)"라는 제목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예정론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라고 부른다. 그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각 사람에 대해 하기를 원하는 바를 결정했다... 주님은 자신이 구원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멸망 가운데 놓아두려는 자들을 자신의 영원하고 움직일수 없는 결의 가운데서 한번 정해 놓았다. 그는 자신이 구원으로 부른 자들을... 그들의 고유한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값 없는 자비로써 받아 들였다... 반대로 생명의 문이 그가 정죄 가운데 넘겨주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막혀 있는데 그것은 정의롭고 공정함에도 불구하고 신비하고 이해 할 수없는 그의 심판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칼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초판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그 예정이 소명과 칭의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한다."소명은 그들의 선택의 진열장이나 증거와 같으며... 마찬가지로 칭의는 또 하나의 다른 표시이자 표식이다..."
그래서 "주님은 선택한 자들을 불러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반면 영벌자들은 말씀의 인식과 그의 영의 성화로 부터 떼어놓는다".
그런뒤 칼빈은 암브로시우스나 오리겐, 제롬등이 말했던 예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각 사람의 공적을 미리 알고 선택했다는 사상을 배격했다
칼빈은 사도 바울과함께"세상의 창조이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선택(엡1장)"했다는 점을 내세운다."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상속자들로 삼으려고 입양했다.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은 그렇게 탁월하게 될 만하지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그의"선한 기쁨"과'은혜'에 의한것이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소명 가운데서 우리들의 공적들에 따라서 가 아니라, 그가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우리에게 주신자신의 기쁨과 은혜에 따라 우리들을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야곱과에서의 선택문제를 다루면서 선택이 사람들의 공적에 좌우되는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에게 속한것이라는 점을 길게 논증한뒤 영벌자들의 문제를 로마서9장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거기에 따르면 에서가 버려진것 역시 하나님이 그의 행위를 미리보고 한 행위는 아니다."하나님의 예정의 근거는 공적들에 관계된것이 아니다...하나님은영벌자들을 간청해서그들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나게한다...하나님은 그런것이 좋다고 보는자에게 자비를 베풀고,또한 그게 좋다고 보는자를완악하게한다.이것은 우리들에게 그 원인을 그의 뜻이외의 장소에서는 찾지 말라고 훈계하기 위한것이다".
칼빈은 거기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반대들에 대해 답변한다. 그렇다면,"그것은심판주의정 당함은 독재자의 잔인성에 더가까운것이 아닌가?" 칼빈은 그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며 그 뜻보다도 더 깊은곳까지 파들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비밀들을 경외하며 명상할 것"을 권한다.
또한 하나님이 정죄가운데로 예정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잔인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우리들 모두는 타락했고 악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폭군의 잔인성으로써가 아니라 합리적인 공평으로써이다."그러므로 "하나님울 부당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칼빈은 그런 식으로 여러가지 반대점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시해 나간다. 이렇게 요약 된것이 아마도 기독교강요2판에 나타난 예정론의 주요 내용일 것이다.우리는 [기독교강요]2판,그리고 또한 [교육과 신앙고백서]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토대로 칼빈의 예정론에 있어서 기본적인 면모들을 다음의 네가지로 파악한다.
첫째로 그의 예정론은 철저하게 신중심적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이며,그분자신이 "각 사람에대해 하고자하는 바를 결정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심판역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것이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심판하는가에 대한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속하는 문제로서 사람이 그것에 대해 판단하거나 파헤칠수 없는 문제이다.
그가자비와 은혜로 불러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면 그것으로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삼ㄹ을 살며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것이므로 우리는 그 크신 심판주를 두려워 할 뿐이다. 이런의미에서 그는 이중예정까지를 주장했다. 둘째로 칼빈은 예정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의 공적에 의한 선택이나 구원을 일관되게 반박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공적을 배제한다."는 것,그것이 그의 예정론의 주조이다. 그것은 예정론의 기본 관점이며 반복되는 강조점이며, 또한 그 논의의 목표로 나타난다. 그런 방식으로 칼빈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를 통한 구원사상을 물리친다. 구원은 전적으로 신에게 속한것이며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어떤 노력으로도 가능하지가 않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또한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사고가 깔려있다.-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는 펠라기우스적이거나 아르미니우스적인 생각의 어떤 형태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선택과 선택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도덕적 완성을 향한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종교적인 수행이나 수도원적 금욕이나 면죄부나 그 어떤 인간적인 것으로써가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나는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는다는것이 칼빈의 사상의 핵심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선택은 초판과 마찬가지로 제2판과[교육과 신앙고백서]에서도 공통적으로"그리스도안에서의선택"으로 나타나고 있다.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들을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상속자들로 삼으려고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인 거룩한 교회에로의'소명'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칭의'로써 증거되고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안에서 우리의 선택의 확실성을 발견하고 성찰하는'거울'이다" 넷째로 칼빈의 예정론은 성령론적으로 열려있다.그에따르면 하나님은인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선택했다".성화는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목표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그목표를 "하나님의은혜를 찬양하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하고 풍성하게" 드러난 선택의 확실성을 믿게 해주고,부르심앞에서 마음을 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불신앙과 의심은 언제나 다시 "미래의 구원에 대한 불안과 근심"속에 빠지게된다. 그러므로 최후의 그날까지 날마다 갱신되는 신앙이 필요한데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특별한 은사인 '중생'이며, 또한 '견인'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이'견인'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초판에서 보았듯이 칼빈은 예정론에 있어서완성에 이르는 날까지 "부어주시는""성령의 축복들"을 통해서"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즉 '중생'하는 선택된 자들의 삼ㄹ을 강조했다.
3. 예정론 정리
예정론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교리는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 은총에 참여치 못하는 사람에 관한 교리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제정을 말한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자기가 원하신대로 결정하셨다. 모든 것은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어떤이는 영생으로 예정되었고 어떤이는 영원한 파멸로 예정되었다. 각자는 이 둘중의 한 편으로 창조되었다. 즉 생명으로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예정 되었다." 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은 영원 불변하신 계획으로써 하나님은 단 일회적으로 구원에 용납될 사람과 파멸로 저주 받을 사람들을 결정하셨다고 했다. 선택을 받은 사람에 관한한 이 계획은 사람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저주 받은 자들에게는 의롭고 공평하고 심원한 심판으로써 생명의 문이 닫아지고 말았다고 했다. 칼빈은 예정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소명을 선택의 증거로 생각한다. 동시에 의인을 그들이 영광에 도달할 때까지 선택을 나타내는 또 한가지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중예정이라고 했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택함을 받았다.(엡 1:4)"고 설명한 것은 선택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은 물론이며, 로마서 9장에서 바울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9장 11절에서 13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을 인용해서 두 계급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면서 이사야 53장 1절에 있는 말씀으로 예정론은 넉넉하게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론이나 이중 예정론은 성서에서 가장 정당한 교리로 보았다.
Ⅵ. 칼빈주의의 전파와 개혁교회의 확산
1 프랑스의 개혁교회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루이 11세(1461-83)는 후에 마키아벨리적인(Machiavellian) 것으로 생각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충고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통치했다.) 루이 11세(Louis 11)는 1480년에는 완전히 봉건 세력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을 달성하였다. 그는 절대주의 왕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 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는 서구 최초로 강력한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근세 초기 프랑스인의 민족감정에 매우 일치하는 주장 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 (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레오 10세에 대항하여(토스카나의 패권을 둘러싸고)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한 후, 승리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조약은 절대왕정에 유리하였고 교회에는 불리하였다. 레오 10세는 1521년 루터를 파문했던 교황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혼란 중에 사망하였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the pleasure of the king)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the new learning of the Renaissance)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프랑소아 1세는 왕권 강화에 열중하였지만, 또한 문예의 보호에도 힘을 기울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프랑소아가 살아있는 동안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존속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 (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결국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 (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 혹은 휴그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소위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책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칙령의 폐지로 경제계의 타격은 매우 컸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1549년 6월, 칼빈은 한 부인 (그 편지는 Madame de la Roche-Posay에게 보내진 것이며, 1549년 6월 10일 발송된 것이다) 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God our Saviour)가 확장될 때, 그리고 주의 가르침의 좋은 씨앗(the good seed of his doctrine)이 널리 모든 곳에 뿌려질 때 우리가 기뻐해야 하듯이, 나는 당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이르러 당신으로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옥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과 이와같이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무한한 동정심을 표현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요. 따라서 성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사용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duty)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부르심으로써 우리의 전생애(our whole life)가 그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구별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무엇보다도, 즉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다.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
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Ibid., 231쪽. 앙리 2세(Henry Ⅱ)는 이단을 별도로 재판하기 위해 특수 법원(chambre ardent)을 설치하였다. 그는 가학적 취미가 있는 다로서, 말년에는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자기 양복을 짓던 제봉사가 불타 죽으면서 얼마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 보았던지 앙리 2세는 그 후 며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2.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개혁교회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a distinctive factor in the life of the Dutch nation)가 되어왔다.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것은 반(半) 수도원 단체로서 청빈, 순결, 순종의 세가지 규율을 지키기는 했지만 형식적 맹세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이 형제단은 탁발 수도와는 달리 조용히 연구에 몰두했으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들의 직업을 갖고 손수 일을 하였다. 흐루트가 페스트로 죽자, 라데빈 스가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395년에 교황 보니페이스 9세는 그들의 조직을 인정하였다. 공동생활 형제단 의 많은 회원과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The Usefulness of Reading Sacred Scripture in the Common Speech)"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
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본명은 Thomas Haemerken)는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데오피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는 14세기 말에 시작된 종교적 갱신(religious renewal) 운동이다. 그 운동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지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성(personal, interior spirituality)을 강조하였다. 그 운동은 네덜란드로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에서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of Loyola)가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운동의 고전적 표현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이다. 그 운동은 대중 교육과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자극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Ibid., p.65. 그 두 사람의 이름은 하인리히 뵈스(Heinrich Voes)와 요한 에쉬(Johann Esch)이다. 그들은 개신교 신앙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화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베네룩스(Benelux)삼국이라 부른다. 16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 호프만은 1530년 이후 화란의 재세례파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열정적인 종말론을 가르쳤고, 천상적 육신(heavenly flesh)의 기도론을 주장했으며, 성만찬에 있어서 신령주의적(spiritualist)견해를 가졌다. 또한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그의 말년(10년 기간)을 스트라스부르크 감옥에서 보냈다. 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파라고 한다.) 멜키오르파(Melchiorites)는 멜키오르 호프만의 추종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뮌스터 반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열렬한 종말론, 신령적, 비유적 성경해석 그리고 성인 신자의 세례에 대한 강조이다. 또한 영지주의적(Gnostic) 기독론을 갖고 있고, 교회의 순결(purity)을 강조한다.
멜키오르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 이라는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뮌스터 폭동 이후 침체된 재세례파를 재규합하여 형성되었다. 메노파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메노파는 성만찬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있으며, 평신도 중에서 선발된 장로들이 성만찬을 집례한다. 또한 설교는 남녀 아무나 할 수 있고, 국가의 군대 징집을 거부한다. 1980년 현재 전세계 메노파 교인은 64만 3천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개신교도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칼빈주의적 회중은 1548-1550년 무렵에 망명지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로마교회에 항거하는 폭동이 개혁교회 신도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합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 그는 침묵자 윌리암(William the Silent)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경험 많고 유능한 군 지도자이기도 했다. 1584년 7월 10일 그는 칼빈주의자로 변장하고 있던 카톨릭 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그의 지휘아래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1574년 최초의 신교 회의가 도르트(Dort)에서 열렸다. 다음 해에 윌리암은 라이덴 대학을 세웠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와 벨직 신앙고백서 를 채택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 (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 A. Dakin, Calvinism, p.138. Dordrecht는 Dort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Their influence on Protestantism generally was very great and accounted for the further spread of Calvinism).)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일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이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피스 코피우스, 위텐보가에르트)은 그들의 5개조 항의문 을 의회에 제출해 신앙고백 및 교리문답을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항의파 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 5개항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요 신조가 되었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지 그가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 난 부분이 칼빈주의의 핵심으로 알려진 예정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라 하면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 (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이 문서 때문에 그들은 Remonstrants 로 불리운다.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예정 개념은 결정론적 예정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 선택이나 절대적 유기를 믿지 않았다(개방적 예정론).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지닌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 다. 펠라기우스(Pelagius)의 가르침은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그들은 자유의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했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 (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마루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 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 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화란 의회는 처음에 항의파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읜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도르트 회의를 소집함에 있어서 화란의 교회 대표 뿐만 아니라, 영국, 스코틀란드,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도 초정하였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 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3. 한국의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들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과 목회이념을 전수한 교회이다. 스코틀랜드의 언약자들(Covenanters)과 영국의 청교도들(Puritans)은 칼빈의 영향을 받아서 장로교회를 건립했다.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그들의 신앙과 신학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 이후의 장로교회들은 이 모습을 따랐고, 한국장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청도교들의 신앙 색채를 받아들였다. 한국교회는 칼빈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좋은 영향도 많이 받았겠지만 왜곡되고 편협하게 칼빈신학을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일반적 평가는 항상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입장이 얼마든지 있고, 예외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한국교회의 다양한 입장과 형태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곡된 부분을 연구분석함의 당위성은 있다고 본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개신교의 태동이라는 면에서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역사적 발달과정에서 볼 때는 지, 정, 의가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을 근거로 중세의 그릇된 교리들을 바로잡았으며,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윤리적인 면에서 또한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지만 종교개혁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16세기 초반에서 중, 후반을 걸친 약 반세기의 종교개혁 시기가 지난 뒤 이른바 정통주의 시기가 도래했고, 이러한 개혁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서 이성주의가 성행하면서 신학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지적이고 논리적인 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의 열정과 헌신은 식어갔고 교리논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1.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교회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그 어떤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역사를 뚫고 들어와 일어난 실존의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문화속에 들어오셨듯(Incarnation),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아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접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역시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특수상황속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서구 교회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 교회와 그외의 나라의 선교활동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것을 다시 국내에 정착된 교파(Domination)에 촛점을 맞춰 심도 깊은 연구를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때(kairos)와 문화적 제약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살피고, 이러한 복음과 문화의 이중구조속에서 형성되어진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조선 선교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서구형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파형의 미국적인 기독교와는 달리 국가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있어서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과 결속면이 강조되고, 따라서 공동체의 신학과 교회론적인 신앙의 의식이 훨씬 강했다. 이렇게 한국선교를 시도했지만 언제나 바닷가만 지나간 서구교회의 선교에 대해, 선교사들의 모습과 실패의 원인,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교사들
먼저 벨트브레(John.J.Weltvree)와 하멜(Handrik Hamel)은 서양의 사람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으나 한국의 기독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 바질 홀(Basil Hall)
1816년 서해안 측량을 목적으로 배를 탔으나, 그해 9월 1일 황해도 백령도, 청도 근방에 상륙하여 물품과 한문 성서를 나누어 주었고, 군산으로 가서 관리들을 만나 선물과 성서를 전했다. 전라도 다도해 근방을 10일간 순항하면서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다.
2) 칼 구츨라프(karl A.F. Gutzlaff)
프랑스 신부 바텔레미 브루지에가 최초의 한국 신부로 임명받던 1832년에 한 사람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도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의 이름은 칼 구츨라프이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으로 상로 탐색차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전(前)네델란드 선교회(The Netherland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서구교회의 선교사였다.
그는 모리슨의 영향으로 동양에 눈길을 돌렸고, 중국에 와서 사이암어로 신구약을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백해도, 대청도, 소청도를 들러 충청도 홍천 길대도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었으나, 상륙은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안되어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했다.
그는 선교사다운 열의와 함께 상역(商易)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이양선(異樣船) 문제에 대해서는 근대사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3) 로버트 토마스(Robert J.Thomas)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웨일스의 라야더(Rhayader, Radnoshire)에서 태어나서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ge University of London)를 졸업하고,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한 상해의 런던 선교회 총무인 무어헤드(Wm. Muirheard)와의 불화로 선교사 사직원을 제출하고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알렉산더 월리엄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에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를 나누어준 뒤 북경으로 돌아간다.
얼마후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편승하여 1866년 8월 대동강 입구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함으로 결국 모든 선원이 살해되고, 토마스 목사는 칼로 그를 치려는 사람에게 성서를 주려했으나, 받지 아니함을 보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순교하였다(1866. 8. 3).
토마스 자신의 행동과 선교방법론에는 엄연히 서구적인 교회신학이 그 기조가 되고 있었다.
4) 알렉산더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66년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한국인 상인들과 그리고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그는 토마스 목사 순교후에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만주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고려문에 와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성서를 팔았다. 또한 한국 선교에 대한 열의로 해서, 한국에 대한 서구 기독교 여러나라의 무력 간섭을 꾀하였고 그 무력의 시위로써 개국을 강요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5)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스코틀란드 선교사인 존 로스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1872년 만주에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때마침 의주 청년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를 만나 신문화를 가르쳐주고 한국말을 배웠다. 그것은 1875년에 성서번역의 대업을 착수했으며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1883년에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884년에 마태복음이 발간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다.
2. 조선선교의 실패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되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 이유는 서구형의 교회 생리가 기독교국(Christendom)의 관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 카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 두드러졌고, 그에 따라 시대적으로나 교회론적으로 조선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러모로 단절된 순수한 형태의 복음,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부흥회 타입의 교파적 교회에서 가능성이 열릴 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을 가진다. 이렇게 한국정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성서를 보급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은 점에서 한국교회사 최초의 장(page)에서 길이 빛날 공헌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 서삼륜과 함께 한국말 성서 번역을 한 것과 그들과 관련된 한국인 전도자들을 한국 민족 교회사의 첫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3.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선교
1) 미국 북 장로교.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중에서 처음으로 주재 선교사를 파송한 영예를 가진 교회는 미합중국 북장로교회
였으며, 한국에서 체재하면서 일한 최초의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 - 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1883년 10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지내던 중 중국 산둥성 주재 미국 선교사 레이드가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회고하자 한국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다. 알렌은 1884년 6월 22일 서울에 들어왔으나 선교사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미국 영사관의 공의로 일하면서 전도하였다. 갑을정변으로 인해 민영익이 상처를 입었으나 알렌의 의술로 치료하여 왕실의 시의관으로 임명되고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정하게 되어 미국 선교사의 선교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복음 선교사로 언더우드가 들어오게 됨으로서 본격적인 선교가 추진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는 해방전까지 300명의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에서 장로 교회가 가장 큰 교세를 차지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2) 미국 남장로교.
미국 장로회의 외지 선교는 1861년까지는 단일 사명으로 추진되었으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장로회가 따로 조직됨으로 외지 선교도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외지 선교회의 목적은 '기독교의 전파와 교회의 조직'이라 하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8년 늦게 시작 되었다. 그것은 1891년 10월에 안식년으로 귀국한 언더우드가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선교를 위한 신학교 협의회에서 조선선교를 호소함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트(L.B.Tate), 존슨(C.Johnson), 레이놀즈(W.D.Reynolds)등이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내한하였다. 이것이 남장로교의 한국교회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후 그들은 최초의 선교지부를 전주에 세웠고 1898년 목포에 지부를 세웠다.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 남서부지방은 사실상 한국에 온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남장로교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선교하였는데 해방전까지 178명이 내한하였다.
3) 미국 북감리교.
미국 북감리교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정식선교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선교부 개설은 그보다 1달 늦게 내한한 스크랜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부인과 함께 왔다가 국내사정이 어수선하여 일본에 갔다가 두달 후에 다시 내한하여서 1 886년 배재학당을 세우고 교육사업과 함께 성서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스코랜톤은 1885년 5월 3일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서 병원사업으로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 학당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을 시작한 공로를 세웠다.
4) 미국 남감리교.
남감리교의 한국선교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1887년) 후 미국에 유학하여 남감리회 본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했던 윤치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한국선교는 1895년 10월 13일 중국에 있던 리드(C.E.Reid)가 내한 함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남감리회는 서울과 개성 및 춘천 이북의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4. 기타 선교
한국선교에서 비록 미국계의 교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이해에서 교파적 형태의 신학을 취하는 교회의 선교가 여럿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교회는 다음과 같다.
1) 호주 장로교.
미국에 이어 그 다음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한 선교회로,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해외 선교회였다. 18 89년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목사와 그의 누이동생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열은 왕성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삼아 선교하면서 한국선교에 체계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너무나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이 무리가 되어서 병약하던 중 아깝게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입국한지 1년이 되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호주 전체 장로교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한 열기가 높아져 이후 해방 전까지 77명이 내한하여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호주교회는 경남지방에서 농촌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2) 영국 성공회.
영국 성공회(The sowety for Propaagation of the Gospel in Forign parts 약칭 S P G) 는 영국 해군 군목이던 코르프 (C.J.Corfe) 신부를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한국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9월 29일 내한함으로 성공회의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성공회의 한국에서의 첫 교회는 1891년 5월 17일에 서울 충무로(지금의 대연각 건물이 있는 지역)에 선교본부와 함께 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부활의 집"이라 하고 공동생활을 개시했다.
초기의 선교방법은 엄격한 청빈과 기도생활을 하면서 서울과 인천에서 의료사업과 고아들에 대한 구제사업 및 출판을 통한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동시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성서 번역사업도 연합적으로 진행시켰다. 그리고 선교초기부터 성공회는 한국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 내리려는 열망으로 "토착화"에 힘썼으며, 한국학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914년 4월에와서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기관인 성 미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5년 12월 21일에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김희준씨가 서품되었다.
3) 캐나다 장로회.
캐나다의 한국선교의 시작은 특수했다. 캐나다인으로서 처음 한국에 온 사람은 맥캔지 목사 (William John McKenzie, 1861 - 1895)였으나 그는 그 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한 열정의 청년이었다. 18 93년 12월에 오직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안고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으로 선교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몇달을 보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례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청일 전쟁을 앞둔 시기에 그는 한때 일본을 위한 정탐군으로 오인되어 신분이 위태로워진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다. 맥켄지 목사가 가는 곳곳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한 다음에 다른 집과 구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만들어 달았다. 한국 북부지방에서 십자가 표식으로 교회당을 구별하는 방법이 퍼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성심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한 생활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그는 너무나 피로한 몸에 일사병까지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895).
이 죽음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정식 한국선교를 결의하였고 이에 1898년 9월 그리이슨(R.Grierson), 푸트(W.R.Foote), 맥레(D.M.Mcrae) 등이 내한함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1925년 본국에서 감리교회등 다른 교파등과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회가 된 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들의 활동무대는 함경도와 간도지방이었다.
4) 침례교회.
침례교회의 한국선교는 펜 위크(Malcolm C. Fenwick)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Toronto) 출신으로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아무런 선교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자격으로 왔다(1889년). 그는 서울에서 10개월 정도 우리말을 공부하고는 황해도 솔내에서 자리잡고 그 곳 주민들과 의식주를 같이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많은 개종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도에 힘쓰다가 재정문제로 한국선교를 중단한 미국 침례교 계통의 엘라딩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흡수 하였으나, 이 지역(충청도 일대)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토인 한국사람들 자신이 지도하도록 하였다. 펜위크는 경험을 통하여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보다는 본토인 한국 사람들 자신에 의해 증거되어야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 러시아의 동방 정교회.
1898년 1월 암브로시 신부가 내한하여 러시아 공사관 안에 성당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했으나 공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소극적 종교행위에 국한되었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까지 확장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노일전쟁(1904 - 5)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본국 귀환을 거부한 선교사들에 의해 정동에서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본국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남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는 사실상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널리 시베리아 쪽에서는 가난 때문에 이민간 숱한 우리 조선 사람들이 러시아의 동방정교회에 입교하고 있었다. 얀치히(Yantchihe)라는 마을에서는 4백여 가구가 교회에 등록하고 있었으며 우리네 가난한 이주민들은 제정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교회에 입교해서 그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리고자 한 동기는 비탄한 것이었다.
6) 구세군.
민중 지향적 교회인 구세군은 1908년 10월에 영국인 선교사인 허가두(R.Heggard) 정령이 그 일행과 함께 서울에 와서 서대문 평동 96번지(지금의 고려병원 뒷쪽)에 자리 잡음으로 그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노방에서 전도하고 옥내집회는 허가두의 집에서 보았으나, 참가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한달 후 부터는 지금의 구세군과 새문안교회 중간에 서울 1영(교회)을 개척하였고, 이어서 12월에는 서울 제 2영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군복차림으로 노상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을 모은 다음에 열심으로 전도하였다. 한일 관계가 험악한 그 시절에 군복 차림 때문에 오해를 받아 종종 변을 당하기도 하였고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1909년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주력을 하였으며 1910년에는 서울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본영(本營)을 확립하였고 구세군 본래의 사명인 빈곤과 사회악을 제거하는 일과 또한 복음의 전달을 위하여 적극적 공헌을 사회를 위해 남기기 시작하였다.
7) 성결교회.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었다. 다만 초교파적인 동양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경화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성결교는 1907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두 선교사, 즉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상준과 정빈은 일본 동양선교회(The Orient Missionary Society)가 경영하는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무교동에 집 한채를 매입하여 복음 전도관을 개설하여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교파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악대를 동원한 노방전도와 호별방문을 통한 전도로 얻은 결신자들을 인근 교파 교회로 인도하였다. 19 01년 일본에서 설립된 동양선교회는 그 설립목적을 동양지역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전도표제로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하였다. 이 전도표제는 매우 간결하여서 대중전도 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성결교 선구자들도 그런 정신으로 전도만을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기구의 조직이 불가피한 정도로 신도의 수가 확장되자 교단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1년 9월에는 정식적으로 성결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김상준과 정빈이 무교동에서 전도하기 시작한지 3년만에 영국사람 토마스(John Thomas)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1921년 9월 동양선교회 창설자 길보른(E.A.Kilborne)이 서울에 머물렀다. 특히 길보른은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하여 감독제에서 고문제로 바꾸어 발전을 꾀하였다. 최초의 고문은 이명직, 이명헌, 부릭스부인등 세명이었다. 이들은 1911년 3월 서울 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을 세워 교직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22년 축호전도를 경상남도에서부터 함남 혜산진에 이르기까지 실시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8) 일본교회.
한일합방을 전후로 하여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일본교회의 한국선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이고, 둘째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이다. 당시 일본의 3대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조합교회, 일본 메도디스트 교회, 일본 기독교회가 전자의 경우인 한국내 일본인을 위한 교회설립 및 전도활동을 모두 추진하였다. 그러나 후자인 한국인 전도는 일본 조합교회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한국병합이 노골화되면서 합병이야말로 한일 양국국민의 행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며 이것을 '조선전도'의 기본정신으로 삼았다던 일본 조합교회내의 극우파 에비나, 와다세는 1909년 4월 내한하여 한국선교 기틀을 잡았고 1911년 와다세의 한국 진출로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선교가 실현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추진된 조합교회의 한국전도는 1919년 이후 조선 회중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되기 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 외에도 1910년 이후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그리스도의 교회,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등과 반선교사 운동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라 할 수 있는 자유교회, 자치교회, 하느님의 교회 그리고 한국적인 신앙의 유산으로 이루어진조선 기독교회, 조선 복음교회, 예수교회 등도 각기 교단 조직을 갖추고 해방전 복잡한 개신교회 종파의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5.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교파형성
위에서 1910년 이전 국내에 선교를 개시한 각 교파 선교를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내에 들어 온 개신교회는 철저한 교파형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종 교파 선교부들이 다른 교파 선교부들과의 연합이나 대화 없이 독자적으로 한국선교를 실시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교파적 종교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 개신교회는 그 초기부터 선교의 주체가 되는 선교부 및 선교사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는 교파형 교회로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선교작업의 연결에서 교단형성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1) 장로교.
한국에 선교한 장로교회는 미국의 남북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4개 장로교회였다. 이들 네 장로교회는 본국의 해외선교부 조직 밑에 한국선교회(The Korea Mission)를 두어 선교사업을 추진케 하는 한편 한국 안에서의 다른 선교회 선교부와 연합전선을 펴 나갔다. 1889년 이같은 장로교 선교부 연합조직이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북장로회 선교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가 연합하여 <미국 북장로회선교 및 빅토리아 선교 연합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약 장로회 공의회로 알려진 이 조직의 초대 회장은 헤론이었고, 서기는 데이비스였다. 약칭 장로회 공의회는 1890년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자연 폐지되었고 1893년에 이르러 남장로회 선교회와 연합하여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회>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의 설립목적은 "조선지에 갱정교신경 장로회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 하는데 있었다(朝鮮地 更定敎信經 長老會政治 使用 聯合敎會 設立). 처음에는 미국의 남북장로교 선교회만으로 이루어졌으나 캐나다 장로회 및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에서도 가입하게 됨으로 명실공히 선교연합 협의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을 뿐 정치적 기능은 사실상 없었다. 이 조직이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되기는 1901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로 조직을 확대하면서부터 이다.
이 공의회는 비로소 한국인도 그 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01년 초대 공의회 회원에는 1900년 장로로 안수받은 김종섭과 1910년 장로 안수를 받은 길선주 방기창, 한국인 조사 6명이 참여하였고 선교사는 25명이었다. 이 공의회는 다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구분되었고 교회자치권은 <영어를 사용하는 회>에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공의회 안에 두 종류의 소회를 두어 가던 중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에서 모든 선교회를 통괄하여 처리할 수 있는 자유 장로회 설립을 건의하여(1902), 이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준비작업을 거쳐 1905년 각 선교회는 본국 교회에 독립된 하나의 장로회 설립을 요청한 바 각 선교부는 <조선연합 자유 장로회> 설립을 승낙하기에 이르렀고, 1907년 마침내 한국인 7명이 목사로 안수받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 (일명 독노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독노회는 1912년 7개 노회로 발전 분립되면서 비로소 교단조직이랄 수 있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된 것이다.
2) 감리교.
감리교의 경우는 장로교보다 훨씬 늦은 속도로 교단 형성이 이루어졌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선교회> (The Korea Mission)를 통해 선교 및 치리기능을 행사하였고, 이것이 1905년에야 <한국선교회> (The Korea Mission Conference)가 되었으며, 1908년 비로소 <조선연회> (The korea Annual Conference)가 되어 사실상 독립된 교회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남감리회는 1897년 한국선교를 개시하면서 <한국선교회>를 조직하여 중국연회의 관할 하에 두었고, 1914년 비로소 <조선선교연회>가 되었으며 1918년에야 <조선연회>가 되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공식적인 선교회 연합기구는 갖지 못하고 있었으나,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던 남북 감리회는 1924년부터 두교회 합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1930년 12월, 마침내 통합된 교단 조직인 <기독교 조선감리회>라는 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3) 성결교.
교회조직보다는 순수한 전도에만 주력했던 '동양선교회'는 조직없는 선교단체가 크게 성장할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1년까지의 15년간 교회수는 불과 33개 밖에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양선교회의 탈바꿈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동양선교회는 그 이름을 1921년 9월에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고 길보른 총리가 한국 감독과 경성성서학원 원장직을 겸직하면서 본격적인 교회조직을 하게 되고 교리도 확장하게 된다. 1929년 감리교회 조직을 본 딴 <조선연회>를 다시 1933년 4월에는 "조선성결교회총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4) 침례교.
펜위크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는 1906년 미국북침례교의 엘라딩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인수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이 교단 이름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하고 1933년에는 다시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다가 1940년에는 "동아기독교"로 변경시켰다. 1893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을 그들의 선교지로 분할하자 펜위크는 "대한기독교"의 선교지역을 국외로 과감하게 옮겼다. 그리하여 그는 만주일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몽고에까지 선교한 것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동아기독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교단은 강제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에는 1949년 총회에서 미국 남침례교와 관계를 맺고 비로소 그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라 고치면서 침례교단으로 출발하기에 이른다.
5) 그 밖의 교회들.
구세군은 1910년 10월 한국인 21명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으로 처음 임관됨으로 구세군 총회를 그해에 조직할 수 있었다. 19 18년부터는 구세군 특유의 사회 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주로 본영보조와 독지가들의 헌금과 그리고 정부의 보조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12월부터 유명한 "자선남비"가 등장한 것이다. 1928년 시작된 자선남비 전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구세군이 있는 나라마다 계속되고 있다.
성공회는 선교시작 때부터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로 코르프 신부를 임명하였고, 처음 선교 시작할 때에는 <대영종고성교회(大英宗古聖敎會)>란 조직하에 선교하다가 후에 <조선성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 14년 성미가엘 신학원을 개원하고 1916년 5월에는 교구회가 조직되고 조선성공회의 기본교리와 전례에 관한 선언이 있었고 헌장 법규도 제정하였다. 1941년 외국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로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세시 주교의 귀환으로 조선성공회가 재건되었다.
Ⅶ.나오는 글
우리는 지금 신학이 혼탁해가고 진리가 왜곡되어 가고 있는 인본주의적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가운데서 칼빈주의에서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 중심주의적 삶의 원리를 새롭게 정립하여 그 원리를 우리의 삶과 사역에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칼빈주의 신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질 수 있는 가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칼빈주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으로 일컬어지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롬 11:36)을 근본원리로 하여, 성경의 객관적 권위, 구원의 전적 은혜성(엡 2:8),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엡 1:22~23) 그리고 변혁주의적인 문화관(창 1:28)과 사회봉사(약 2:22, 요일 4:20~21)를 그 특징으로 한다.
개혁주의로 대변되는 칼빈주의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불가항력적 구속의 은총을 바라보게 함으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정한 조물주와 절대 주권자와 입법자로서 마땅한 지위와 영광과 감사를 돌리게 한다. 칼빈주의는 모든 만물과 그 현상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통찰함으로서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역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자세로 우리의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인간 자신은 무가치하고 공허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용납하심을 믿고 믿음안에서 그분께 나아가는 신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고와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즉, 지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그의 삶의 전 영역과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관계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절대 주권자)되게 결심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의 빛비춤아래서 교권주의와 반 교회주의가 함께 유행하는 시대에 교회를 귀중히 여기며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세속화시대에서 무엇보다 기도와 경건을 우리의 삶과 사역의 기초로 삼아 기도와 경건 생활을 다해야 하며, 개인과 교회와 사회 안에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적 삶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참고도서]
사전류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
그리스도교 대 사전, 대한 기독교서회
신학용어 해설 사전, 생명의 말씀사
단행본
헨리. 미터,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앙협회
정성구, 칼빈주의 사상 대계, 총신 대학 출판부
데이브드 스틸리, 칼빈주의 5대 강령, 생명의 말씀사
김성환, 평신도를 위한 칼빈주의 해설, 영음사
에드원 H. 팔마, 칼빈주의 5대 교리, 성광문화사
정성구, 칼빈주의의 사상과 삶, 기독교 문서 선교회
J.L.니브, O.W.헤이크, 기독교 교리사, 대한 기독교 서회
R.제베르그, 기독교 교리사(중,근세편), 엠마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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