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제네바 종교개혁
Ⅰ. 칼빈과 제네바
1. 칼빈의 개혁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4.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5.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Ⅱ. 칼빈과 종교개혁
1. 칼빈의 생애
2.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
3. 칼빈의 神政政治
Ⅲ. 칼빈의 사상
1. 칼빈의 신학
2.칼빈신학의 주요 원리
3. 칼빈의 경제사상
Ⅳ.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의 비교
Ⅴ. 맺 은 말
Ⅰ. 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활을 했다. 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3년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칼빈은 1533년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 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바젤로 옮겨갔으며, 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1.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년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년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 공중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4가지 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 파렐, 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였다.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4.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빈을 그들은 조직적으로 괴롭혔으며,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많은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간다.
4-1.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 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4-2. 교리적인 문제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4-3. 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이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가는 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다.
■ 생활규범 강조
제네바 시를 이끌어 왔던 사보이 가문의 자유주의자들은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방탕한 호기를 펼칠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방종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제네바를 바로잡기 위해서 칼빈은 무릅을 쓰고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훈련의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앞에서의 권면, 셋째 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 자는 감독이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처럼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 수 있는가를 분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전반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춤, 도박, 주정, 술집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분수에 넘치는 접대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 금지, 혹은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 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년 6월5일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 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5.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1536년으로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 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월급의 증액을 거부하였으며, 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 설교, 강의, 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 손님접대, 각종 자문 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 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1564년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 4월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년 4월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 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 칼빈은 마지막 몇일 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동녘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조용하게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칼빈주의는 근대 세계를 특징지어 주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 근대 과학, 복잡한 서구 사회의 규율과 합리화 혁명적 정신과 민주주의, 세속화와 사회적 행동주의, 개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경험주의에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어져 왔거나 혹은 그렇다고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자타가 인정을 받을 만한 그의 업적과 공헌은 거의 최근까지도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거의 근래에 들어와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나 세계의 많은 이들의 막연히 진정 아닌 존경을 받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단순히 칼빈의 명성만 듣고 대충 흘려 버리는, 또 그들의 말에 비판과 수용 없이 맹종하는 독자들과 오늘날 수많은 그의 사상을 접한 바로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또 이제까지 다루어져 왔던 칼빈에 대한 사상 연구는 비역사적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고 혼란이나 논리적 비적합성, 모순 그리고 인간의 부족함을 나타내 주는 여타의 다른 요소들을 갖지 않는 것으로 가정되어 왔다.
여기서는 칼빈의 생애와 그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종교개혁과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칼빈과 종교개혁
1. 칼빈의 생애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프랑스 피칼디 주 노용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중산계급출신으로 14세때 파리대학의 부속인 라 마르슈(La Marche) 대학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배웠으며, 그 해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겨 철학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그는 오를레앙(Orlean)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부루쥬(Bourges) 대학에서도 법학을 공부하였다.
칼빈의 이러한 학교생활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부친 사후 법률에서 방향을 바꿔 고전을 연구하였다. 칼빈이 언제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사후 법학을 버리기 신학을 택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로 보인다. 또한 칼빈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학구적인 주석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저서로서 의미 깊은 저작이었다. 칼빈의 이 저작은 1532년에 나타났다.
이 저작은 칼빈이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모범을 따른 조예가 깊은 휴머니스트임을 드러냈으며 그가 희랍어를 읽고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고대 문헌과 역사를 폭넓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후에 종교 개혁자로서 활동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휴머니스트 활동가들과 우정을 나누는 데 있어서 확고한 근거가 된다.
1533년 니콜라스 콥의 대학 학장 취임 연설문을 초안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이단의 내용을 기술하였다고하여 프랑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칼빈은 성직록을 포기하고 로마 카톨릭과 결별함으로써 개혁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2.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
『세네카의 관용론』과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여 프랑스로부터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였다. 이 당시 스위스 제네바는 신교 도시로 바뀌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화렐에 의해 주도되었다. 화렐의 협력 요청에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고 제네바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칼빈은 성 피에르 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는 일로 제네바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1536년 10월에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구교간의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잘못을 밝혔고 결국 신교의 승리로 끝났다.
칼빈은 제네바를 신앙공동체의 도시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권징권의 집행에 대해 시의회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반 칼빈파였던 필립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칼빈과 화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였다.
개혁자들이 빠져나가자, 로마 카톨릭은 제네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칼빈과 화렐은 다시 돌아와 개혁을 시행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의 최고 성직자 겸 설교자로 임명되었으며 평신도 장로와 5명의 목사로 구성된 교회 회의(Consistory)를 구성하여 神政政治를 실시하여 시민의 사치와 오락을 금지시키고 금욕적인 생활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제네바는 신교의 보급 중심지가 되었으며 칼빈주의는 널리 보급되어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네덜란드의 고이센(Geussen), 스코틀랜드의 장로파(Presbyterians), 영국의 청교주의(Puritanism) 등 널리 보급 되었다. 또한 칼빈주의의 인기는 스위스에 국한되지 않고 무역과 금융업이 발전된 서유럽으로 파급되었다.
3. 칼빈의 神政政治
칼빈은 이론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 도시로서 당시 정치 및 종교적 혼란에 휩싸여 있던 주네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간파한 그는, 1536년말에 그곳에서 이주하여 즉각 설교와 교회 조직을 시작했다. 그는 1538년에 추방당했다가 1541년에 다시 주네브에 복귀했는데, 복귀한 후에는 주네브 시의 정치와 종교를 금방 장악할 수 있었다.
칼빈의 지도하에서 주네브 정부는 신정정치를 펼쳤다. 도시의 최고 권력은 12명의 평신도 장로와 5명의 목사로 구성된 "교회회의(Consistory)가 장악했다. 교회회의는 회부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 이외에도 도덕을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이러한 활동은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징벌뿐만 아니라 모든 개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주네브는 여러 구역들로 분할되었고, 교회회의에서 파견된 감시인이 불시에 모든 가정을 방문하여 가족들의 습관을 검사했다. 가장 온건한 형태의 오락조차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춤, 카드놀이, 극장 구경, 안식일에 일하거나 노는 행위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악마의 소행으로 여겨져 법으로 금지되었다.
오늘날 같으면 그와 같은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칼빈의 주네브는 전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완전 무결한 프로테스탄티즘을 상징하는 횃불로 비쳐졌다. 예를 들면 칼빈의 제자로서 칼빈주의를 스코틀랜드에 도입한 존 녹스는 칼빈의 주네브야말로 "사도 시대 이래 지상에 등장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선언했다.
Ⅲ. 칼빈의 사상
1. 칼빈의 신학
칼빈의 신학은 그가 제네바에서 저술한『기독교 강요』에 나타난다. 여기에 나타난 칼뱅의 엄밀한 신학의 특징은 신의 전지전능으로부터 출발하여 밑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칼뱅에 의하면 우주 전체는 전능한 신(자신의 영광을 위해 천지를 창조한)의 의지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신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타고난 악에 손발이 결박되어 도저히 풀려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께서는 신만이 아는 이유로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예정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을 예정했다.
인간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영혼에는 신의 축복, 또는 저주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현세에서의 행위에 무관심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선택된 사람들이라면 신은 그들에게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 주실 것이다. 올바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비록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영광의 보좌에 앉도록 선택받았음을 보여 주는 징표이다. 신앙의 공개적인 고백과 성찬에의 참가 역시 구원받도록 선택되었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칼뱅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적극적 삶이야말로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여된 의무라고 주장했다. 칼뱅이 생각한 훌륭한 기독교인은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로 생각해야 하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칼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으니 조용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으라고는 결코 권하지 않았다.
2. 칼빈신학의 주요 원리
그같은 종교개혁자로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교회나 소종파들의, 그리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종교개혁 내부에도 역시 존재하고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나 미신들과 투쟁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이나 사상의 여러 내용들은 그런 오류에 대한 대항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실제로 그의 사상의 중요한 몇 개의 강조점들이 모두 사람들의 그런 잘못에 대한 처방, 혹은 해결책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칼빈 신학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점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서로만" 그리고 "신자들의 자기부정과 개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칼빈 신학에서 어떤 교리이거나 형식이기보다는, 방법이나 내용에서의 하나의 특징, 원칙, 혹은 어떤 지향점을 나타내주는 것들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원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앞의 논점과 관계해서, 첫째 원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신적인 것을 유한하고 물질적인 또는 인간적인 어떤 요소에 가두고, 그것과 동일시하는, 당시에 만연했던 우상숭배와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풍조 앞에서, 칼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신성, 그의 초월, 자유, 존엄, 주권, 불가역성(irreductibilit ), 처분불가능성(indisponibilit ), 즉 그의 사상에 신중심적 강조점을 매겨주는 요소들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의 주권(Souverainet de Dieu)"이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원리 "오직 성서로만"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상상하고, 꾸며대고, 만들어내고 하는 그런 또 하나의 오류인 미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종식시키고자,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와 그 계시의 결과들, 특히 성서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과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두 가지 요청 앞에 서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우상숭배의 성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자기부정과 개혁을 매우 강조했다. 칼빈은 사람들이 미신과 우상숭배를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것들을 더 이상 안하는 인격, 그것을 완전히 떠나서 참된 신앙과 예배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일이 중요했다. 그것은 곧 신자들의 지속적인 자기부정과 변혁을 의미했다. 칼빈은 그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칼빈신학에서 제외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칼빈에 따르면, 신자의 자기부정, 그리고 끊임없는 개혁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가능하다. 그것으로써 신자는 언제나 다시금 자신을 버리고, 개혁함으로써 최후의 완성을 향해 열려있는 종말론적 삶을 살게 된다. 그 점은 "신자들이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개혁"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3. 칼빈의 경제사상
막스 베버는 직업소명설, 예정설이 자본주의 발달에 공헌했다고 보고 있다.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라' 이것은 근면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했다는 예정설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과연 내가 어떻게 예정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대답은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삶은 가능한 한 절약하고 검소한 삶이다. 근면, 검소에서 자본이 축적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에른스트 트뢸치는 하나를 더 보태는데 칼빈은 노동과 유익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기독교 사회주의로 발달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Beler는 칼빈의 경제 사회 사상에서 칼빈의 경제사상은 인격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각자로부터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것이 인격적 사회주의이다. 이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Graham은 제네바가 복지국가였다고 보았다. 제네바의 이상은 기독교 사회주의였다는 것이다.『건설적인 국민과 칼빈』이 graham의 책이다.
이양호 교수님은 칼빈에게는 자본주의적 인 면과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칼빈은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아니면 힘있는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의 편재도 인정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상공업을 인정했다. 이자 받는 것에 대해서 '돈에는 증식성이 없다.'는 것을 부정했다.돈의 유통과정에 서 증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주장했다. (☞ 칼빈이 practical syllogism(실천적 삼단 논법)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정 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산다. 김 씨는 거룩하게 산다. 그러므로 김씨는 구원받았다. 이것이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공헌했다. 동시에 칼빈은 사랑의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부의 편재를 주장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는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테스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부의 편재의 목적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고 하였다. 칼빈은 기금에 의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금을 가능한한 늘려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사봉급은 국가가 주어서 가난한 아동들도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기의 능력껏 벌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는 사회가 칼빈이 생각한 사회였다.
Ⅳ.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의 비교
칼빈은 언제나 자신이 신학적인 면에서 루터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노라고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적 가르침은 비텐베르크 개혁자의 가르침과 여러 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첫째,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에 대해서 루터는 칼뱅에 비해 훨씬 소극적이었다. 루터는 훌륭한 기독교인이라면 현세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칼빈은 부단한 노력으로 신을 위해 이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둘째, 칼빈의 종교는 루터의 종교에 비해 한층 율법적이고 구약 신앙에 가까웠다. 이것은 두 사람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루터는 안식일에 관하여 오늘날의 대부분의 기독교도들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론 신자들이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시간에 일체의 오락이나 일을 삼가야 한다고는 요구하지 않았다. 반면에 칼빈은 엄격한 유대인의 안식일 개념을 부활시켜 세속적인 모든 일을 금지시켰다.
끝으로 두 사람은 교회 행정 및 예식의 근본 문제에서 현저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카톨릭의 교회 계급 제도와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루터주의에서 지역 감독은 주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루터는 또 제단과 예복 같은 로마 카톨릭의 많은 특징들을 유지했다. 반면에 칼빈은 "카톨릭"의 냄새를 풍기는 모든 것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므로 그는 계급 제도의 모든 흔적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그 대신 신도들로 하여금 목사들을 선출토록 하고, 목사들과 장로들(신도들의 올바른 신앙 생활 지도책임을 맡은 평신도)로 이루어진 평의회로 하여금 교회 전체를 다스리도록 했다. 더욱이 그는 교회 예배를 지극히 간소화할 것을 주장하여 예식·예복·악기·성상·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러한 가르침이 실천에 옮겨지자 칼뱅주의 신도들의 예배는 "4면의 벽, 그리고 설교"만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Ⅴ. 맺 은 말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교회 정치가이고 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공헌했던 사상가였던 칼빈의 생애, 종교개혁 운동, 그리고 사상, 신학, 정치면에 걸쳐 고찰해 보았다.
칼빈의 사상의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결국 그 자신의 시대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 그 운동이 성공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던 후의 세기들에 그 운동이 지속된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에게서 이 불안정한 혼합을 상속했다. 대립적이고 변화하는 충돌들 사이의 불확실한 균형인 칼빈주의는 중세 후기 교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와해되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칼빈의 사상이 가지는 중요한 역사성은 자본주의의 성립과 근대시민사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예정설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시민들이 가지는 근면과 검소 그리고 절약정신을 고찰시켰다. 또한 경제에 있어서 부의 축적과 사유재산의 인정은 근대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칼빈만이 가지는 역사적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유럽이 근대 시민 사회와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토마스 M 외 1명,『宗敎改革史(Ⅱ)』,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2
라은성,『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심, 2002
E.M.번즈,『서양 문명의 역사Ⅱ』, 소나무, 1994
존머레이,『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5.
박조용,『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 1994.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논문]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0) | 2009.12.26 |
---|---|
[스크랩] 기독교 교리문답 (종합) (0) | 2009.12.26 |
[스크랩] 기독론 (종합) (0) | 2009.12.26 |
[스크랩] 기독교 교리문답 (0) | 2009.12.13 |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0) | 2009.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