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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00년이 지난 미국 개신교 : 한 장로교인의 관점 (James M. Philips)

수호천사1 2010. 1. 23. 22:01

400년이 지난 미국 개신교 : 한 장로교인의 관점


James M. Philips


조만간 미국인들은 1607년에 미주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 타운에 처음으로 도착한 앵글로 아메리칸 정착민들의 도착을 기념하는 400주년 축하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이 정착민들은 영국 교회의 개신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400년 동안 미국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에 대해 비전문가인 본인은 장로교회의 일부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에 대한 개관을 살펴보려는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간략한 개요는 더 포괄적인 필치로 그 이야기의 상세한 내용을 스케치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생략될 것이고 모든 것이 언급되어야 하지만, 수 많은 예외가 있으므로 특성을 살려야 합니다. 게다가, 제가 여러분에게 줄 자료는 많은 유명한 학자들이 썼던 자료인데 그들의 참고문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듣게 될 내용은 새로운 자료가 아니라 본인이 장로교회의 관점에서 제시하였던 옛 자료들입니다. 이런 모든 면에서 여러분의 이해와 관대함을 먼저 구하겠습니다.

우선은 이러한 과제에 관해 제시하고자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미국 역사를 4개의 주요한 시기로 나누어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1. 식민지 시기, 1607년-1790년대
2. 초기 국가 시기, 1790년대-1890년대
3. 근대 국가 시기, 1890년대-1960년대
4. 포스트모던 시기, 1960년대 이후

이 기간들은 매우 간략하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럼 자세를 바로 하고서 미국 개신교 역사를 통해서 장로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I. 식민지 시기, 1607-1790년대

제 아내와 제가 몇 년 전에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 타운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는 제임스 타운 개척자들이 4세기 전에 예배 드렸던 첫번째 영국 성공회가 있었던 장소라고 표시된 건물의 허물어진 벽 옆에 서 있었습니다. 미국 식민지에 온 정착민들은 이 새로운 땅에 집과 마을을 세우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며, 이 신세계에다 본인들이 옛 고향에서 익숙해 있었던 교회의 전통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주와 남부 식민지 땅에 있었던 정착민들은 영국 성공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영국 성공회의 회중들은 그 지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확고한 주립 교회를 세워나가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에 회중 교회를 세워 다른 전통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던  뉴 잉글랜드의 깔뱅주의들도 비슷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교회사의 영역에 새로운 자취들을 수립한다고 의식하였습니다. 깔뱅주의 회중교회 목사인 존 로빈슨이 1620년에 플리머스에 정착한 미국 최초의 이주자들에게 한 고별인사는 아주 기억할만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더 많은 진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중세 교회를 변화시켰던 개혁 교회들의 기치를 충분히 동감할 수 없으며, 지금도 그들의 개혁정신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합니다. 루터와 깔뱅은 당대에 매우 위대한 사람들로 빛났었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꿰뚫지는 못하였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당신에게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McNeill에서 인용: 336).

이 인용문의 첫번째 문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였을지라도, 로빈슨은 주님이 그들에게 더 많이 계시하고자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더 많은 진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주목해 볼 다른 점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 개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첫번째 우선순위로 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시민 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의 목적은 이미 설립된 교회들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척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일이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정부를 먼저 세우고 나서 그런 다음 예배당을 세웠을 것이라고 상상하였지만, 뉴 잉글랜드 청교도는 정반대의 순서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영국 성공회 교도들이 남쪽 식민지에 어떻게 교회를 세웠고 회중교도가 뉴 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된 것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뉴저지와 뉴욕과 펜실베니아와 중부 식민지의 다른 곳에 정착한 장로교인들은 이미 확립된 교회전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식민지에서 장로교회 제도를 형성하려고 노력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이미 거기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 세운 장로 교회는 독립교단이었습니다. 1706년에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노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했으며, 그런 다음 1716년에 몇 개의 노회들이 모여서 총회를 형성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발전해갔습니다(Loetscher 1954: 2).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 뉴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언약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중세교회와 개혁교회의 학자들의 예를 따랐습니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뜻이 단지 개인과 관계된 일 뿐만 아니라 그룹에도 관계된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신적인 자선의 신학을 강조하고 신생 국가를 추켜 세우고 우주적인 질서를 찬양함으로써 깔뱅주의 구도를 수정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는 1740년대의 부흥운동을 방어하는 맥락에서 깔뱅주의자의 강조점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러한 낙관주의를 배격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깔뱅주의자의 정통성과 계몽주의적 낙관주의 사이의 긴장과 관련하여 후기 혁명시기의 신학적인 과제를 설정했습니다.

혁명의 시기는 뉴 잉글랜드의 회중교회 신자들과 중부 식민지에서 주로 독립을 지지했던 장로교인들로부터, 독립지지자와 영국황실 지지자들 사이에서 분열된 남부 식민지에 있던 성공회파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신생 국가의 창설을 이끈 혁명전쟁 이후에 헌법(1787년에 제정되고 1789년에 발효됨)은 제정되었지만, 신생 정부의 종교적 정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10개 조항의 최초 수정안(“권리 선언,” 1791년에 발효됨)은 신생 국가가 종교 집단을 운영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을 때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수정안은 종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의회는 종교의 설립을 존중하거나 그에 준한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기만적인 단순한 문구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문구는 의회가 미국에서 어떠한 종교를 창설하거나 어떤 다른 종교 위에 한 종교 단체를 두는 것을 단순하게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수정안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의회가 시민의 종교적 신앙의 자유로운 활동을 간섭하지 못하도록 정해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들에 대한 명확한 의미와 범위를 개인 혹은 법정이 결정하는데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그들이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종교적 자유에 이르는 국가를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결정이 정착되어 실행되었을 때, 미국의 종교 단체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주 단위로 “제도화된 교회들”이 지속되었지만, 19세기가 경과하면서 그러한 교회들은 역시 폐지되기도 하였습니다.

II. 초기 국가 시기, 1790년대-1890년대

헌법과 권리장전은 이와 같이 미국에서 역사학자들이 부르는 소위 “첫번째 종교 국교제폐지”를 가져왔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인들은 국가의 생명력 속에 종교적 역할의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를 중요하지 않게 간주하거나 어떤 종교 단체가 국가적으로 “법적인 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최초로 3개의 개신교 단체는 미국 성공회와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였으며, 지금은 3개의 “신생 종파”인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와 그리스도 제자교회로 나누어져 있고, 19세기 초에는 “복음주의적 연합 전선”을 형성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루터교가 나중에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주로 메릴랜드에 소수의 로마 천주교회가 캐톨릭 교도인 로드 볼티모어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뉴욕과 로드 아일랜드에서 몇몇 유대인 가정들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이상은 신생국가 미국에 있는 주요한 종교 집단에 대한 사항이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의 경건에 의해서 미국의 초창기가 구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780년도에는 미국 인구의 5-10%만이 종교 단체에 소속되 있었습니다(Coalter: 69). 심지어 미국의 개신교 그룹이 “법적인 제도” 없이도 운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13개 주에서 종교적 생명력과 국가의 원동력을 흡수하기 시작하였던 서부로의 대이주를 대비하도록 “문화적인 제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정책들에 대한 양상을 다음의 몇 가지로 열거해 보겠습니다.

(a) 교단은 종교개혁 시기에 나온  “제도권 교회”와 “종파”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조직으로 보여지도록 제정되었습니다. “교단”은 종교적 그룹의 새로운 형태이며, 확실한 권리와 특권을 가진 무역회사의 모델을 따라서 법적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시간이 지나면서 “교단”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계 곳곳에 조직되었습니다.

(b) 해외 및 국내 선교 위원회도 두 세 개의 교단으로부터 그룹들 사이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알렉시드 토께빌이 기념비적인 연구서인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언급하였듯이 미국인들의 삶의 특징이 되었던 자원봉사회 혹은 자선단체로 설립되었습니다. 장로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그 시대의 모든 주요한 자선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미국의 해외 선교 위원회(1810), 미국 교육 학회(1816), 미국 성서공회(1825), 미국 주일학교 연맹(1824), 미국 봉사회(1825), 미국 국내 선교회(1826)(Coalter: 96-97).

(c) 주일학교는 비록 영국에서 처음으로 생겨나기는 하였지만, 미국 사회에서도 변화된 형태로 나타나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기독교 교육에 봉사하였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d) 헌금은, 유럽의 경우와 같이, 미국에서 정부의 지원이 점차 금지된 이래, 교단의 재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e) 교회를 위한 사회 및 윤리적인 의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교단들은 노예제도 폐지와 관습의 개혁과 학교, 대학 및 교육 기관의 설립과 알코올 금지와 여성의 권리와 전쟁 반대 등과 같은 과제들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런 의제들의 근대적인 내용들 중 단 한가지 예외적인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된 환경적인 관심들이었습니다(Coalter: 97).

(f) 신학교 또한 신생 교단들에게 목회 지도자를 양성하면서 미국의 독특한 제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만들어 낸 신학은 한가지만을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다. 후기 혁명시기에, E. Brooks Holifield가 그의 놀랄만한 조사 결과에서 보여주었듯이, 보편주의와 셰이커주의와 자유 의지 침례주의와 복고주의와 경건주의 및 기타 “깔뱅주의에 반하는 모든” 다른 사조들이 일어났습니다(Hastings: 486). Ralph Waldo Emerson과 선험론자들은 이차적인 권위 또는 이성주의자의 증거와는 다른 직접적인 경험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에 반하여 Benjamin Warfield와 함께 모더니즘의 조류에 반하는 프린스톤 신학을 주장하는 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들이 이끄는 정통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선험론자들과 정통주의자들의 사이의 교리적인 주장 위에 종교적인 경험을 두고자 하는 Horace Bushnell가 서 있었습니다. Jonathan Edward가 예상하였던 의제는 향후 미국 신학에 반영되었고, 대부분의 개신교 그룹도 동의할 수 있는 일말의 일치점을 제공하였습니다.

사실상, 교단 사이에서 협력의 근거를 만든 미국의 개신교 교회가 설립한 “문화적 제도”의 성공은 매우 현상학적입니다. 정착자들의 출신지인 유럽에서 그러한  상황에 대한 신랄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유럽에서 특별한 사회적인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귀족과 왕과 또는 제도권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드넓은 광야에 흩어졌고 정부 기관은 매우 작고 비효율적인 미국에서, 정착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들의 노력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Robert Bellah와 다른 학자들은 “문화적 제도”가 미국에서 “시민의 종교”가 되고, 1960년대에 도덕적 붕괴를 이끈 사회 권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Bellah 1975).

또한 이런 “문화적 제도”에도 실패가 있었습니다.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다루는데 분명히 실패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물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실패는 미국 헌법의 제정권자들도 논란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던 노예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미국이 국가의 존속을 위협하였던 남북 전쟁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남북 전쟁이후 개척지에서 선교사 프로그램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만들었던 개신교 그룹 사이에 비공식적인 협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 교단들은 미국인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법인들을 연달아서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Coalter 외 공저. 1992: 100-101). 교회생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모델은 다음 세기에 대한 많은 분파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개신교 교회는 “2차 문화적 제도 폐지”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III. 현대 국가 시기, 1890년대 –1960년대

남북전쟁 이후에 미국의 산업화는 이전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진행되어갔습니다.  한 세기 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일어났으며, 당시 매우 농업주의적인 국가에서 19세기 초기와 같은 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국초기 행정수반때 부터 신속한 산업화를 반대할만한 다양한 방해들이 제거되었고, 대기업은 경제구조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언급하였던 것처럼 교회도 성장에 대한 새로운 잠재력을 주기 위해 법인체로 재정비되어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반면에 나라의 공장들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면서 확장되어 갔습니다.

수 많은 새로운 일자리들이 미국에 유입된 이민자들에 의해서 채워졌습니다. 19세기 초에 미국에 온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및 독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지만, 남북전쟁 이후에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많은 수가 이주해 왔으며 중국인 노동자들도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Morrison: 480). 1820년과 1930년 사이에 삼천칠백만명 이상의 이민자가 미국에 받아들여 졌다고 합니다(Coulter: 51). 이런 많은 이민자들은 로마 천주교와 유대교와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서 미국 사회에 우세하였던 개신교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노동조합과 정당과 공제 조합 및 종교에 중점을 두지 않는 다른 그룹들이 생성되면서 미국의 세속화는 가속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초창기에 세워졌던 대학들 대부분이 신앙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 설립된 주립 대학 제도는 세속주의를 토대로 조직되었습니다.

또한 증가하는 종교적 경쟁도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불안감을 주었습니다. 몰몬교의 성장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이들에게 불안감을 주었습니다. 로마 천주교와의 경쟁관계도 오래된 문제였으며, 1899년에 교황 레오 8세가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성직자들과 몇몇 “미국적” 예배식을 비판하는 서신을 발표하여 상황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Morrison: 774). 1890년대에 번성하였던 성결교단과 같은 신생 개신교 그룹도 있었습니다. 나사렛 교회가 텍사스에서 1908년에 시작되었고 전국에 걸쳐 퍼져나갔습니다. 오순절파 교회는 1906년 로스 엔젤레스의 아주사에서 거리 선교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에 주요한 종교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도심지역에서 유대교 집단도 모였습니다. 이 모든 집단들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애국주의적인 열정으로 모였으며 그들의 국가관에 대한 정체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는 많은 수의 주류 개신교 사상가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비평하도록 이끌어 갔습니다. Walter Rauschenbusch는 사회 복음에 대한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신학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의 자리에 인종과 계급 및 성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종종 파괴하는 신학을 세우고자 주장하였습니다.

20세기 초에 윌리암 제임스는 신학이 “삶에 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와 교육 개혁자인 존 듀이는 개인적 가치를 증진시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종교적이며 교육적인 정책을 발전시키도록 추구하였습니다. 그러한 실용주의적 관점은 무슨 일이든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미국인의 성향을 지속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대주의 사고에 대한 보수주의의 반격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J. Gresham Machen 교수가 주도하였고, 그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두개의 분리된 종교로 보았습니다.  Machen은 프린스톤을 떠나 새로운 신학교와 새로운 교파를 창설하였지만, 더욱 더 심한 분열이 그 뒤를 이어서 일어났습니다.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Karl Barth와 Emil Brunner의 독일과 스위스 신학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 운동에서 신학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H. Richard Niebuhr는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를 비평하고 단순히 지지할 수 없는 “근본적 유일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형제인 Reinhold Niebuhr은 많은 저서를 통해서 기존 사회를 향해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아무 것도 완전히 깨달을 수 없는 초월적인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인용하였습니다. 독일의 나찌정권으로부터 망명한 Paul Tillich는 기독교 신학을 그의 문화적인 분석으로부터 유추한 질문과 연관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1890년도부터 1920년도까지 미국의 개신교주의에 대한 “2차 문화적 제도 폐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법적인 상태에서 변화는 없었으며 개신교 교회는 미국인의 삶에 대단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 문화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더 이상 미칠 수 없었고 로마 천주교와 유대교와도 함께 공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떤 개신교도인들은 -모두는 아니었지만- 미국의 문화적인 제도를 더욱더 폭 넓은 용어로 보아야 한다고 인식하였습니다. 1956년에 Will Herberg는 “미국인의 생활방식”을 “개신교인-천주교인-유대교인”의 새로운 종교양상으로 묘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후, 전 미국에 걸쳐서 애국적이고 종교적인 열정들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1950년대에 교회의 교인 출석이 새롭게 높아졌고, 이러한 흐름은 전후 세대에 지속되었습니다. Eisenhower 대통령은 1954년에 새로운 종교적 전망을 정당화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미정부는 매우 깊이 느끼는 종교적 믿음을 기반으로 설립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믿음이 무엇이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Ahlstrom : 954)

존 F. 케네디 대통령 정부가 들어섰는데(1961-1963), 그는 로마 천주교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개신교인들이 로마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버렸고, 이러한 양상은 대중적이며 카리스마적인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소집된 제2차 바티칸 회의(1962-1965)가 개최됨으로써 확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국에서 종교적인 전망은 정말로 낙관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IV. 포스트모던 시기, 1960년대 이후.

1960년대의 혼돈은 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쿠바 미사일 사건으로 인한 혼돈이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서 멋있게 다루어지고, 마틴 루터 킹이 시민운동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였을 때는 분명히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1963)이 있었고, 그 후 루터 킹이 암살(1968)되었고,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살해되는 사건(1968)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위대한 사회와 “빈곤과의 전쟁”을 표방하고 높은 희망을 가졌던 Lyndon Johnson 대통령 행정부(1963-69)가 출범되었지만, 미국 해군 구축함이 통킨 만에서 북 베트남 군함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추정된 이후로(1964) 미국은 베트남 전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이 이길 수도 패할 수도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 여론은 남북 전쟁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분열되었습니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정부 고관들도 시민에게 전쟁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었고 이로 인해 특히 미국의 젊은 사람들은 정부의 관리들을 더욱더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은 리차드 M. 닉슨 대통령 정부가 시작된 첫번째 임기(1969-74)까지도 지속되었고 전쟁에 대한 여론의 반대는 계속해서 커갔습니다. 결국, 정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닉슨 대통령은 재당선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찾아왔고 닉슨 대통령은 결국 해명해야 할 일들을 은폐한 이유로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정부 고관들과 권력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도 이런 경멸로부터 면제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의 “제3 문화적 제도 폐지”가 특별히 교회를 어렵게 하였습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역할을 지지하였던 교회지도자들과 이를 반대했던 지도자들 사이에 심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여론은 이런 혼돈의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인도하기를 바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실망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미국이 전쟁에서 졌고 이 사건의 적은 강대국의 축을 이루고 있던 독일과 이태리 및 일본이 아니라 작고 후진국가인 북 베트남의 농부출신 군인이었음이 처음으로 분명해졌습니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여준 “람보” 영화는 미국이 승리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했으며, 또한 자신들의 충고가 받아들여졌다면 전쟁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정치 지도자들의  주장도  미국의 패배를 가려주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뒤를 이은 염세주의의 결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다른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개념은 없지만, 그 용어는 종종 이 시기에 주도되었던 몇 가지 확신들을 언급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이전에는 사회가 일치된 가치체계를 운영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회가 많은 다른 가치 체계와 세계관들로 운영되도록 얽혀있다고 여겨졌습니다.


(2) 이전에는 한 종교와 철학 또는 세계관이 ‘규범적’이어야 하고 그것에 의해 다른 것들은 ‘파생적’으로 판단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결론이 거부됩니다. 모든 다른 것들보다 우월한 삶이나 사고의 한가지 형태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같은 수준에 모두 서있는 것처럼 보여 지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3) 이전에는 “모던”이라고 생각되는 철학적 관점과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고 추측되었던 어떤 기술적인 양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각은 우리가 “포스트모던”의 사고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거부됩니다.


(4) 이전에는 도덕에서 어떤 것들이 “옳고” 다른 것들은 “틀린”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포스트모던주의자는 그런 판단력이 단지 “가치 선호”이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과는 관련이 없다고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5) 이전에는 항상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포스트모던주의자는 지금 소위 “보편적” 가치들이 완전히 한가지 문화에 묶여 있고 단순히 개인적인 선호도와 비선호도를 표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파의 신학자들에게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 방법이었습니다. 복음주의적 개신교 그룹은 1945년 이후 시대에 현격한 성장을 경험하였고, Carl F. H. Henry와 Cornelius Van Til 및 Harold Lindsell 등과 같은 신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은 변화 가능한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성경의 오류를 확증하는데 아주 유용한 것들이 많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완전히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비난을 받았습니다. 현재 Hans Frei와 George Lindbeck은 복음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실마리로 복음을 이야기 형태로 바꾸고자 추구하였습니다. 어떤 미국의 과정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종말에 대한 Alfred North Whitehead의 형이상학을 채택하여, 신학자들로 하여금 윤리학과  생태학 속에서 긴박한 문제를 주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아직까지도 다른 신학자들은 사고와 실천이 교차하며 서로 영향을 미치는 “실천(praxis)”이란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제3 세계 특별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전하였던 해방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James Cone은 미국 흑인들의 고통과 저항으로 형성된 자신의 흑인 해방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Rosemary Ruether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해 어떻게 여성 신학의 관점이 형성되었는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과 스페인계와 순수 미국인 및 기타 인종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숙고할만한 것은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발전 속에서 개신교 예배자들의 반응도 혼합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의 시각이 전적으로 틀리며 미국은 성경을 기초한 진리가 확정되어야 하며 “기독교적 미국”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고 믿는 몇몇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때로 사라진 황금시대를 위한 그러한 외침은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도피의 행동일 수가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개신교인들은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종교와 세계관의 다원주의는 분명하게 미국인들의 삶에 있는 현실이며, 이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것과는 다른 과정으로 환상주의와 억압으로 이끌어 지도록 얽매이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포스트모던의 관점이 수용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절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민 종교”의 날을 장식했던 개신교 우세의 시대가 지금 끝났다고 하는 인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줄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1세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난 후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데 몇 가지 좋은 일들이 있었듯이, 개신교 우세로 인해 몇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 1세가 기독교를 정착시킨 이후에 비참한 결과가 있었다고 지금 인식되고 있음으로, 우리는 “시민 종교”의 맹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로 1960년대에 천주교인과 유대교인에게 여지를 주기 위해 법을 수정함으로써 개신교의 우세를 유도한 “시민 종교”의 붕괴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 손실에 대해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발전은 우리에게 더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신호입니다. 우리 개신교도인은 많은 다른 동료 신자들과 더불어 존 로빈슨 목사의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더 많은 진리를 말하고자 합니다”라는 주장을 지금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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