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에 있어서 구속에 관한 이해
제1장 서론
1-1 문제 제기
현대 사회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최첨단의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가장 뛰어난 이지적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도 최상의 지적 성찰을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더욱 집착되어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최첨단 문명은 또 다른 면에서 인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산간 벽지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적 다변화 사회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다원주의 경향이 팽배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신사조가 기독교에 도전을 하고 있다. 즉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기독교 전통인 구원의 유일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수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신앙인에게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은 이미 신앙의 선진들이 살아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선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도록 구속사적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종교적인 심성을 파괴하고 있으며, 극도의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창출해 냄으로써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적지 않은 위기감을 고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의 종교적 가치관마져 전자 문명에 의해서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첫째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속을 성취해야 할 인류가 현대 문명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즉 미래보다는 현실에 집착되어 종교적 사색과 사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핵심인 구속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현대인들은 하나의 좋은 양서 정도로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경험하기에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 내재되어 있다. 즉 신앙 생활을 통하여 구속을 성취해야 할 신도들이 구속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의례히 신앙 생활을 하면 복을 받거나, 병을 고치거나, 사업에 성공한다는 식의 계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구속사적 구원의 복음이 잘못 전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넷째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 풍조에 의해서 기독교 전통이 파괴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이제는 모든 종교 안에도 그 나름대로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학 풍조는 예수의 동정성, 빈 무덤, 부활 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기독교의 정통성을 송두리체 부정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가 성서가 말하는 구속사의 의미를 파악하고 기독교 복음의 우월성을 피력함으로써 금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1-2 연구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의 최첨단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구속에 관한 이해를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적용되었던 복음의 보편성, 즉 구속에 관한 개념과 구속사를 오늘의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그 목적이 있다.
1-3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방법은 현재적 종말을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구속에 관한 이해, 삶에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는 성서를 기본 택스트로 하고, 구속에 관련된 문헌들을 통해서 다양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복음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로운 견지에서 비교, 분석, 정리하고, 논자의 견해를 구속의 현재성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범위는 제1장에서는 서론으로 현대 사회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앉고 있는 당면 문제를 제시하고, 연구 목적, 방법, 범위를 다룬다. 제2장에서는 구 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고찰을 통해 명확한 의미를, 그리고 성서를 통해서 예수 이전의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개념을, 그리고 신약; 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선포된 구속의 개념을, 그리고 신학자들의 구속(구원)에 대한 이해를, 그리고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구속사 이해에대해서 다룬다. 제3장에서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바울의 구속사를 죄의 선언,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의 교리 순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 제4장에서는 실천적 측면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하여 먼저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루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을 예배, 봉사, 교육, 연보 등을 다루며,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다룬다. 제5장에서는 결론으로 이제까지 내용을 간략하게 먼저 요약, 비판, 그리고 제언을 함으로써 본 논고를 맺고자 한다.
제2장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2-1 구속의 개념
구속이란 무엇인가? 구속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속의 개념부터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구속은 “성경의 주제이다. 그래서 성경을 구속의 책 이라 할 수 있다. 구속에 대한 설명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구속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를 못하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밖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설령 사용한다 해도 기독교가 말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구속이란 말은 필요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개념이 달라지는데 특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과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말,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말하는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리고 성경적 구속의 개념과 교회사적인 교부 및 신학자들의 구속의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2.1.1 어원
구속의 일반 통념상 개념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비에서 도와주고 건져주는 것”, 혹은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여러 종류의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이고 각종의 사고,질병,재앙,절망에서 생명을 보호하고 구출해 주는 것 등을 의미한다.
구속의 종교적인 개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여러 종교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나, 모든 종교는 어느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영어로 Redemption이다. Redemption은 N.I.V Holy Bible 신.구약 전체에 15회(민3:49,시49:8,111:9,렘32:7,8,눅2:38,롬3:24,8:23,고전1:30,엡1:7,14,4:30,골1:14,히9:12,15) 사용되었는 데, 특히 바울 서신에서 주로 구속이란 용어가 앞도적으로 쓰여졌다. Redemption의 뜻은 “다시 사들이기, 되찾기, 약속의 이행, 구조, 구출, 몸값을 주고 빼내기, 범죄에 대한 대가, 예수의 희생에 따른 죄의 갚음, 속죄, 구원, 변제, 상환”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구속(救贖), 구원(Salvation)의 뜻으 로 사용되고 있다.
구속은 히브리어로 여러 가지 단어가 있다. 즉 יוּא(名) 사63:4절에 사용되었는 데, 그 의미는 “되찾음, 저당물찾기, 상환, 회수, 보상, 이행, 면제,구출”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לאַ(動) 구약에 21회 사용되었는 데, 그 의미는 “더럽히다, 상징적으로 신성을 더럽히다, 모독하다” 등의 뜻으로 쓰여졌다. 또한 תוּד(名) 시111:9,130:7,사50:2절에 사용되었는 데, 그 의미를 살펴
보면 “구별, 구원, 분리, 시간의; 간격, 장소의; 간격, 거리 분할, 구출, 구속”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시49:9절에 ןוי(名)는 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속전, 속량된 것, 속량, 구속”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 구속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대의 개입이었다.
"내가 편 팔로 너를 구속하리라”“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속량 하셨다.” 거듭 거듭 이러한 본문은 똑같은 형태로나 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Salvation 으로 신.구약 성경에 545회가 사용되었는 데, 그 중에서 신약에 쓰인 것은 163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N.I.V Holy Bible에는 구원(Salvation)이 390회 쓰였는데, 그 중에 신약에는 40회나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가장 중요한 단어는 צ를 어근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파생어와 함께 353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뜻은 “자유, 해방, 번영,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희랍어로 구속은 ἀπολύτρωσις(名) 로 롬3:24,8:23절에 쓰였는데, 이는 “구속 행위, 벗어남, 속전의 지불에 의해 해방을 가지게 되다, 또 기독교에서 구원, 해방,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불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어 놓아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어원적인 고찰을 통하여 구속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구속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구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량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원적 개념을 넘어 언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구속 개념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2.1.2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다시 말해서 구속의 완성인 메시야에게 초점이 마추어져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결되고 있다. 논자는 바로 이런점에서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초점을 두고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에 흐르고 있는 구속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언약 관계를 자주 맺으셨는데, 그 예로는 노아(창6:18), 아브라함(창15:18), 이스라엘(출24:8), 다윗(시89:3)과의 언약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언약(렘31:31)이 성취될 날을 예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최후의 만찬을 언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눅22:20).
그리고 O.Palmer Robertson은 언약이란 “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수립할 때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약정을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주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구출 또는 구체적인 구출을 말한다. 즉 구속은 개인이나 백성이 처해 있는 환경속에서 영위하는 생활과 관계가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재난이나 곤긍이나 환난이나 대적이나 질병이나 사망의 위험이 있는 형편 가운데서 벗어나 안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구속은 신약과 달리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의미가 매우 약하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속의 본질적 차원은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죽음을 선사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 인류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셨다. 죄의 결과로 부끄러워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을 사용한 인류에게 언약의 상징인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고, 타락한 인류와 첫 번째 언약을 맺으신다.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상태가 창3장 1절로 24절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창3장15절은 인류에게 소망을 주고 그리고 구약에 전반적인 메시야적 약속에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번째 언약은 인류가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약 일년 동안 임하였으며 노아는 방주에 갇혀 있었다. 죄로 가득찬 인류를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 당시 심판의 척도는 국지적인지, 세계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방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인간은 새로워진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노아와의 언약은 모든 혈육 있는 자와의 언약으로 매우 일반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자연적인 축복이므로 흔히 자연의 언약 또는 일반 은총의 언약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홍수 이후의 인류의 문명은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하나의 단일체였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느 기간 동안 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으며(창11:1-9), 이 문명은 희생 제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에게 항구적인 무지게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인류에게 온 땅에 편만할 것을 축복한다.
그러므로 노아 와의 언약은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의 면밀한 상호관계 즉 창조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구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연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특이성과 언약 관계에서 가족을 말하고, 보편적인 면과 언약의 은혜로운 특징을 강조하면서 보존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제 세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상대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은 족장들을 불러 그와 언약 맺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자신이 족장들 곁에 나타나셨다는 것인데, 후에 신의 현현(顯現)으로 칭하였다(창18:1).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실재는 그의 언약의 말씀과 위로와 지시의 중요성과 신빙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였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언약의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언약은 구약의 특수한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국한한다. 그리고 신앙은 뚜렷하게 언약의 필연적인 요구로 나타나며, 할례는 언약의 백성이 되는 증표로 행하여진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번성하며, 애굽의 종이 되어 430년 동안 종살이 한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들이 부르짓는 고통을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으로부터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장자의 재앙으로부터 구속하여 출애굽 하게 한다.
그리고 40년 광야 길에서 네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모세와 시내산에서 맺으신다. 이 언약은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신4:37, 7:7-9, 10:15절외 여러 곳).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출34:6)”는 진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형성시킨 후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돌보고 도우시며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구원의 하나님이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에 이르는 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성막 또는 성소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으며, 시내산에서 받은 제사법을 따라 제물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속량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제사법에는 크게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가 있으며,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였고, 삼대 절기로 칠칠절, 초막절, 속죄일을 지켰으며,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행동 방식으로 이끌어 주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국가라는 구별을 짓게 했다.
이처럼 모세 언약을 신학적 배경에서 보면 세 가지 면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율법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전체와 유기적 기능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구속역사 전체에 걸쳐 율법이 존재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법은 모세 이전에도, 이후에도 중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에 있어서 전체와 점진적으로 관련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점진적으로 전개된 하나님의 율법 계시의 특징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가 점점 더 명백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 언약의 법의 특징은 내부적 성격에 있다.
인류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에서는 다섯 번째 언약으로 하나님과 다윗과 맺은 왕국의 언약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다윗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로 나타나기 이전의 구속 역사에서 최고의 완성적인 면을 나타낸다. 다윗 왕권은 새 기원을 끌어들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왕권을 전형적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다윗 언약의 수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야가 올 때 완성된다. 그리고 다윗 언약들의 규정들은 두 가지 약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 가지는 다윗의 계열에 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땅에 관한 것이다. 백성을 구원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다윗의 계열과 예루살렘의 왕권, 이 두 가지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선포가 여섯 차례에 걸쳐 사무엘하7:13,16,24,25,26,29절에 나타난다. 다윗은 이와 동일한 언약을 삼하23:5절에서 회고하여 그것을 “영원한 언약” 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89:28-37절에서 또한 이 영원한 언약의 불변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영원하며, 하늘의 날과 같으며, 해와 같고,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건성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다. 여기서는 무조건적이니 조건적이니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충분한 통찰은 구약 성경 자체에 나타난 다윗과 그 후손의 왕권을 검토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진정한 성경적 통찰이 이루어지려면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의 실제적인 통일성을 인식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다윗 계약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양상은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을 곧바로 연결한다. 다윗 혈통과 예루살렘 지역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상호 관계한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다섯 개의 언약 뭉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구속이란 말은 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구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구원이란 모든 종류의 “악한 운명과 국가적인 불운”“역병, 사망과 공포, 사자의 입”또는 전쟁과 악한자 환란 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재난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말은 가족법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환란에 빠진 친척을 구원하는 책임있는 말로써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해 낸 분 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온 인류의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구조적인 통일성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언약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는 역사 경험에서 언약 수립의 내용이 통일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언약 아래서의 백성들의 삶의 역사에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혈통적인 민족적 사역에서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새 언약을 연합시키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앞선 사역과 무관한, 구별된 언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은 먼저 수립된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 창조 당시 세워진 언약과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의 관계가 문제시 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써 창조주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존재해 왔다. 이처럼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계속적인 관계를 볼 때 인간에 대한 최초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약적인 구성은 놀라운 통일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 언약적 구속 사역의 통일성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구속사를 나타내 준다.
2.1.3 신약;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이제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 즉 완성된 언약을 신약 성경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일치되며 서로 구속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진리를 수납하시고 이것을 모든 교훈의 전제로 삼으셨다. 구약의 어떤 진리는 신약에서 성취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신약의 어떤 진리는 구약의 어떤 진리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약의 진리는 구약에 예언된 진리를 선행적(先行的)인 진리에 비하여 생각할 때에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혹은 더 풍부하게 하는 관계를 가짐이 분명하다. 구약의 교리적 진리가 신약에 성취된 것은 구속의 대진리를 생각할 때에 더욱 명백하다.
구약의 구속 경험은 언약 관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율법을 순종하는 것도 언약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언약의 관계는 사람의 죄와 허물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구속의 경험은 성질상 선행적이며 예상적인 것이다. 장래의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성령으로 인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구주를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은 신약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은 그의 인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에 더욱 관계된다.
신약 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 헬라어 동사 σῲζω(구원하다)와 명사 σωτηρία(구원)인데 약150회 이상(동사가 106회, 명사가 45회)쓰였다.
σῲζω는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σωτηρια는 육체의 질병(마9:27,눅8:36)과 위험(마8:25,14:30), 미혹(눅19:10), 죄와 분노(롬5:9)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특히 이 말은 종말론적 의미를 함의하는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 비로서 실현될 것이다(롬13:11,고전5:5,히9:28).
이상에서 본 것처럼 신약에서 구원 용어는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곧 병, 자연의 위험, 귀신의 압박, 죽음 등에서의 해방, 치유, 구조, 구출,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죄와 멸망으로부터 영적 구원을 뜻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제시하는 구원은 주로 죄로부터,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벌로부터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경험은 민족이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은 개개인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복음의 선포는 개인의 영혼을 대상으로 하며, 복음을 받아 들이면 사회적 민족적 상황과 관계 없이 개인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역시 역사적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종말적인 구원을 지향하고 대망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구약에서,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은 오직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 된다. 즉 구약의 백성들이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희미한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계시의 빛 아래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신약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업적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예수께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다. 산상수훈 역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구속을 바탕으로하여 전개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교훈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민족이나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중심으로 한 구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중심 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다. 구속 사회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를 말한다.
구원 사건 안에 도래하는 통치자는 사랑하는 아버지로써 현재속으로 들어온다. 예수에게는 모든 윤리적 요청 안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된다. 예수의 윤리는 구원 시대의 윤리적 혹은 새로운 언약의 윤리로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구속사적인 힘은 예수의 인격 안에 시작되고 그의 완성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신앙적인 승인에 달려 있다.
새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희생 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수립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한다. 바로 예수께서 피를 흘리는 것은 구약에서의 희생 제물의 언어를 반영하여 언약의 저주가 대속물 위에 얹져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언약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언급 함으로써 더 깊은 차원을 나타낸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피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구원의 언약이 처음 세워질 때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의 이중적인 역할을 반영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상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맺은 상징적 표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식이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이 시작되면서 옛 언약들이 쓸모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동정녀 탄생을 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를 몰랐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정결하게 하는 규정된 예식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는 할례를 받고 후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그리고 그는 천국 복음을 선포했으며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선험적으로 사시며 증언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약속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주었다. 바로 새 언약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인류에게 언약의 성취자로써 선물로 주신 것이다.
보른캄은 “ 예수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이미 일어난 신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는 반면 부활절 이후의 소식에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서 세대의 전환과 구원의 개시, 신의 도래와 지배가 이미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며, 신자가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국 신.구약성경의 구속의 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언약적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완성된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육체, 정신, 생활, 사회, 그리고 영혼 등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영역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 형벌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영혼의 구원,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구원 등이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구원 곧 기독교적 구원이란 죄로 인하여 멸망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죽은 영혼이 살림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고, 심판과 형벌에서 모면되고, 영생을 얻고, 장차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구속이며 참 구원이라 할 것이다.
2.1.4 신학자들의 구속(구원) 이해
앞에서 논자는 구속의 개념에 대하여 어원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적인 접근을 통해서,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구속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에는 충분할 만큼 구속에 대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구속에 대하여 어떻게 그 개념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주장하는지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구속에 대한 개념을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Pelagius는 하나님의 창조 정신을 강조하고 인간의 타락 및 죄를 가볍게 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며, 인간은 이 자유를 통해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펠라기우스는 타락한 후에도 원죄는 문제되지 않으며 자범죄도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으며, 아담의 범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정죄되었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는 결코 인류의 죄악이 될 수 없고 또한 아담의 죄로 인해서 그 후손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그의 후손의 영혼과 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은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성과 능력이 계속되어지는 한 태초의 아담과 같이 자유로이 善惡을 택할 수 있다.펠라기우스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죽음이 죄의 형벌이 아니라 아담이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한다.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인간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구원은 율법과 복음이 없이 얻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것들은 구원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며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은 좋은 모범을 인간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Augustinus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이 후손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타락으로 그의 후손들이 전체적으로 침해를 보았으므로 인간에게 완전한 의지의 자유란 더 이상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를 주장한다. 그래서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했으며, 사망과 무지와 현세욕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유실되어 자신에게 열려 있는 모든 선택도 결국 죄가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베푸셨다.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일단 인간에게 주어지면 은총이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 의지가 선을 이루도록 움직인다.
또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과 더불어 구원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와 일치하게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만들어 준다.그리고 어거스틴은 이런 은총은 세례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하였으며, 유아도 세례를 통해 죄책이 제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은혜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죽는 날까지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 나갈 때 최후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하였다. 그것은 은총으로 주어진 견인의 선물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은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였다.즉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저주받는 무리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Vitalis는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배격하고 어거스틴의 이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론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어거스틴에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구원을 받는 첫 걸음 즉 은총을 받아들이는 행위-신앙의 시작-은 순전히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도 이것을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여 은총이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진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이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Thomas Aquinas는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부패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원의를 잃어버렸으며, 인간의 자체 힘만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타락한 인간성의 희복은 하나님의 거져주시고 공로 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 점은 어거스틴과 같다. 이 은혜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은 최초의 은사를 희복하고 죄사함을 받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 은혜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인간의 영혼속에 창조된 사랑이며 참으로 인간적인 자비의 기질 혹은 습성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구원의 출발점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들고 있으나 이는 보편적인 것이고 성례전을 통해 얻는 사랑의 습성을 시행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랑의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믿음이고,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세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제의 사죄를 통해 고백하는 자에게 죄에 마땅한 죄과와 영원한 형벌을 사하지만 어떤 잠정적인 형별이나 보속은 죄의 결과로 고백자에게 계속 남는다. 그리스도의 대표자인 사제가 고백자의 통회, 고백, 보속을 기꺼이 치르려는 마음을 증거로하여 사죄를 선언해야 죄사함을 받고 사죄의 용서가 없이는 세례후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중세의 면죄부는 이 잠정적 형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없애 주는 보속행위로 성행했던 것이다.
John Duns Scotus는 구원이 오직 개인들과 그들의 공로에 대한 자유로우신 용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들의 영혼에 어떤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하여 토마스의 교리를 반대한다. 스코투스는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지에 따라 교회의 성례 활동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그들 자신의 구원에 충분히 협력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영원전부터 선택된 자들은 한 번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입으면 계속하여 참되고 가치있는 선행을 수행하고 따라서 영원한 구원을 보상 받게 된다.
William Ockam은 인간은 그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데, 이 선행은 적합한 공로로서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을 일으키고 하나님은 다시 이 공로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 보상해 주셔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로 선택이 조건지워졌다고 하였다. 즉 예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John Calvin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마음의 통회와 입술의 고백과 행위의 보속으로 나누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죄사함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리스도 이 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인간의 공로나 보속에 의한 구원을 부인했고, 중세 캐돌릭교회의 면죄부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면죄부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을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라고 혹평했다. 그리고 연옥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경멸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이 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의 어떤 공로도 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하여 공로에 의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이전의 모든 학설을 부인한다. 인간의 마음은 불결하기 때문에 인가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볼 때 근원부터 부패된 것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을 수 있으며, 그 의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 구원이 가능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영원한 선택 교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이 예정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은 선택된 제한된 소수만이 받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오캄의 주장과는 달리 선택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은 세례를 우리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여하는 표징이지, 은혜의 수단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기억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가 고발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
Jacobus Arminius는 예정 교리를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타락전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의 구속주와 구원자로 임명하시고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으로 예정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개개인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안에서 견인 할 것을 미리 아신자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를 예정의 기초로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에 예지를 두었다. 그러나 믿는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지 공로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도덕적 에너지라고 하였고, 수동적인 사람에게 부과되는 하나님의 의지적 독단적인 강요가 아니라고 하였다.
John Wesley는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는 점에서 어거스틴이나 칼빈과 같다. 그러나 웨슬레는 타락한 인간이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가? 타락한 인가는 아담 이후로 전혀 선행을 할 수 없었는가? 인간의 양심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알미니우스의 선재 은총 개념을 발전시켜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완전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나, 아담에게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약속하셨고, 그 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이 광명의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레는 선재 은총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이 응답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구원과 영원한 죽음으로 갈라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응답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 했다. 따라서 인간은 선재 은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에서 칼빈과 같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의한 믿음에 반해, 웨슬레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믿음을 가지게 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은총이 주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웨슬레는 선재적 은총의 경우 타락 직후에 주어졌고, 구속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주어진다. 유아의 경우는 선재 은총으로 태어날 때 원죄가 사해지며, 세례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자의지로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를 통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 즉 칭의와 동시에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거듭난 것은 아니라고하여 실제적인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세례 후에 자범죄에 대해서 웨슬레는 성결 교리를 주장한다. 웨슬레는 거듭남에 의해 성화가 시작되고 점진적인 성결 과정을 통하여 영화로 성화가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듭 죄를 짓게 되나 회개와 내적인 체험을 통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웨슬레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 해도 만일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함으로써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Karl Barth는 기독론 전개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 신학에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어느 곳에서도 보편적 구원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고 동시에 구원받은 자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선택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선택되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결론을 피하지 못한다.
Rudolf Bultmann은 비신화화의 신학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존주의적 구원 해석을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영원한 긴장속에 존재하며, 항상 구체적 자연 세계에 사로잡혀 그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여 버리든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안전을 포기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감히 투신함으로 참사람다운 존재가 되든지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죄의 본질이며, 육신에 속한 삶의 결과는 불안뿐이다. 고로 인간은 이런 불안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인간 스스로는 여기서 해방될 수 없다. 다만 인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신에 매여 사는 불안의 삶이 변하여 자유로운 삶, 곧 참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만 얻어지는데, 이 구원의 은혜는 구원의 메시지, 즉 케리그마가 전파되고 믿어질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
Jurgen Moltmann은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에 관심을 둔다. 그 미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 및 천국이 아니라 변혁과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이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그는 특히 구속론에 있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수직적인 측면에서 화해가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면적이고 역사적인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는 오직 역사적 평면 위에서 계급간의 투쟁이 끝나고 눌린자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되는 날 이루어지며, 이런 사회적 구원이 곧 오늘의 구원이며 이 구원이 성취될 때 만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미래가 아닌 오늘에, 천국이 아닌 이땅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이루는,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이요 만인의 구원이다.
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그리스도와 결부한다. 곧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새로운 실재인데, 불완전하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은 실재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으로써 새로운 실재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왔는데, 그 구원은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로서의 구원-중생,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구원-칭의,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로서의 구원- 성화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 및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관은 여기서는 간과 하도록 한다.
이상에서 신학자들의 구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속죄주 즉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메시야 한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 있으며, 성경적인 구원의 진리를 간과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를 촉진했다. 이제 구속사란? 무엇인가를 고찰함으로서 바울의 구속사를 준비하고자 한다.
2-2 구속사란?
구속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전개 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스런 접근을 하고자 한다.
2.2.1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
역사란 우리의 언어로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나 독일어에 있어서는 역사란 말이 두 가지 낱말이 있다. Historie와 Gechichte이다. 여기서 Historie는 세계사나 민족사, 정치사나 경제사와 같은 사람이 관찰하여 헤아릴 수 있는 “사학적 역사”요, Gechichte는 사람이 관찰하거나 헤아릴 수 없으되 실제에 있어서는 깊은 데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이다.
인류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원년으로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역사를 구분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18세기 이후, 우리 나라도 단군을 기원으로 하지 않고 서기를 쓰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에서 역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결과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신자에게도 역사의 의미가 주어졌다”고 한 브룬너의 말이 적용된 셈이다. 기독교적 역사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준비의 시대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역사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실현할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는 현대 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여러 가지 “역사들 속에” 속해 있다. 즉 가문의 역사, 민족의 역사 등에 속해 있다. 우리는 신앙의 결단으로 이 특별한 역사인 구속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일련의 신적 사건을 우리는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른다 . 그것은 또한 죄와 심판 때문에 멸망사(Unheilsgeschichte)일 수도 있다.
불트만 학파는 신약의 실존적인 문제를 구속사 문제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미숙하게 폐기시킨 이 학파는 이렇게 해서 잘못 오도되어, 신약의 사실상의 본질을 인격이 자기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오늘날 자기가 말씀을 듣는다고 여기는 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성서적 사신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장 최근에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Fichte는 자기의 저서를 이렇게 끝맺었다. “형이상학적인 것만이 축복하는 것이지, 결코 역사적인 것은 축복하지 못한다. 후자는 이해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이란 말 대신에 실존적이라는 말이 현대적 사고에 적합할 것이다.
우리는 2세기에 있었던 영지주의와의 싸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즉 기독교의 계속성의 문제이다. Marcion과 영지주의는 상호종속적이다. 공통된 점은 구약에 대한 공격이다. 마르키온은 계시와 구원을 점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도 하나의 점적이고 속박되지 않는 사건이며, 수직적이기는 해도 수평적이 아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구약을 부인하고 기독교의 영역 안에서 신약을 해석하여 구속사를 제거한다. 즉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가현설의 희생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계시와 구원의 사건을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발생사에서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구약을 인계 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이 구속사를 믿는, 즉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믿는 신앙이지. 점적인 구원의 사건을 믿는 신앙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한다. 구속사는 시종일관 발생사로서 가장 내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며, 예수의 탄생과 그의 복음의 선포가 그 당대의 역사적 인물들, 가령 헤롯대왕, 아우구스트황제, 로마 총독 등과 관련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구속의 행동은 역사적 컨텍스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역사학적 예수와 케르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에 연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사건이 역사적 Context에서 말해질 수 있다고 본다. 즉 구속사가 역사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즉 그리스도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적인 예수는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예수의 Kerygma만이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전인 예수의 처녀 탄생기사나 부활, 승천같은 기사는 예수를 숭배하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만든 신화적 이야기며 이같은 신화는 비신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르트학파의 계시 중심 주의는 역사비판 논구의 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원역사(原歷史)의 영역으로 도피한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원역사의 범주로 해석, 본래의 역사가 초기의 사역 내지 원역사의 반영으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Pannenberg의 역사 신학과 라이너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은 신의 계시와 동시에 객관적 역사 과정을 진지하게 다루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파넨베르크는 구원을 계시의 종속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파넨베르크 자신이 지나치면서 계시와 구속사와 관계를 인정했듯이 두 개념은 거의 구별할 수 없다. 논자가 보기에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주요 개념은 구원의 개념인 듯하다.
따라서 구속사는 신앙적으로 구원의 사건으로 인정된 사건들을 단순하게 첨가함으로써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그 때마다 과거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사건에 조명하여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계시에다 귀속시킨 해석의 행위는 구속사 자체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시의 중개자는 구약에서는 예언자이고 신약에서는 사도가 된다. 계시의 중개자는 그가 맡은 계시를 새롭게 해석하고 구속사와 결부시킨다. 우리는 이처럼 구원의 사신을 구원 사건에다 포함시키는 것이 신약을 위해 본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에도 현재적이다. 계시의 역사와 해석의 역사는 구속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구속사는 여전히 양쪽을 건너짚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서의 역사 전개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간격이 있고, 비합리적인 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창조, 선민의 선택, 남은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으로 좁아진 구속사의 선은 다시 제자들, 신앙 공동체,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성서적 구속사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 섭리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구속사에 접근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2.2.2 구속사(Heilsgeschichite)의 이해
많은 신학자들은 구속사”라는 표현에 대해 비동정적이다. Heilsgeschichite란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고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신약 어디서도 “구속사”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희랍어 οἰκονομία는 세속적인 용법에서 계획, 관리, 가사(家事)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능동적인 뜻으로 “집안 일을 돌봄”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그리고 영어로 번역 하면 management of a household; task, work, responsibility; (divine) plan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구원의 신적인 계획에 대하여 그가 받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한 신적인 신비의 개념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 자신과 그의 직분이 이 οἰκονομία에 속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9장 17절에 “나는 οἰκονομία를 위임받았다”는 구절 및 골1:25절과 엡3:2절 등에 지적되어 있다. 사도에게 나타난 신적 계획의 계시 및 그에게 맡겨진 위임은 그 계획에 속하고 따라서 구속사 자체 안에 속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신비의 청지기이다(고전4:1).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단순한 말씀이나 진리를 담은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근원으로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구원사 신학이라 할 것이다. 구원사 신학이라는 말은 교회사적으로 Ireneaus가 최초로 주장했다. 그는 주로 노스틱 이단을 반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세계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천국재림을 주장했다. 그리고 17세기에 와서는 Cocceius가 그의 계약 신학에서 세 가지 계약 시기 즉 아담과의 행위 계약, 모세와의 은혜 계약, 그리스도와의 새 계약으로 나누어 구약 시대의 죄사함과 신약 시대의 죄사함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신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까지도 구속사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19세기의 구속사 학파를 대표하는 Hoffmann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과 동시에 약속과 성취에서 성서의 통일성을 구속사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20세기에 Oscar Cullmann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단순한 점으로서가 아닌 선으로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되는 사건으로 보았다. 또한 Hunter는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메시야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구원의 방편을 삼아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다는 일관된 이야기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신약의 구속사가 생길 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과 장차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사건이 그것들의 장점과 중심적인 하나의 사건속에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구속사에 대한 구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실은 구속사의 발로를 성경에서 그 자신의 저자들이 특별한 사건 및 그 사건과 다른 사건의 관계에 대한 영적으로 파악된 계시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역사의 예언과 관계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 가운데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공포와 장래의 유혹에서까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영벌이 제거되고, 죄의 세력이 타파되고, 영원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온 인류에게 선재 은총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제3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구속사
이미 앞에서 구속사의 개념과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개괄적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외형적인 측면보다는 구체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구속사를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죄의 선언과,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 순으로 다루려 한다.
바울은 기독교 신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복음이 계시하는 義를 주제로 제시한 후에 전 인류가 보편적으로 또는 절실히 이같은 의를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먼저 義를 입기 전에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3-1 죄의 선언(In Sin)
구속이란 긍정은 죄악이란 부정에서 시작된다. 신적 부정이 없는 곳에 신적 긍정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에서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음을 선언한다. 먼저 그는 이방인의 죄를 종교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로 나누어 역설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전 인류의 죄에 대하여 선언을 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인간들의 죄악성의 묘사를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끔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는 것이다. 곧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불의인 것이다. 이러한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데 있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즉 인간들은 피할 수 없이 참혹하고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Brunner는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을 반역하여 돌진하는 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의지의 역풍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노는 개인의 발동적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성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로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하나님의 진노란 “인간에게 경건과 의를 요구하시는 그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고 하였으며, Meyer는 “하나님의 진노란 악에 대해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자의 사랑과 선이다”고 하였다. 강병도 목사는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계속적이고도 불변한 반응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우찌무라 칸조우는 사람의 노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감정의 흩어짐을 의미하는 매우 싫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하심의 상태가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현은 사실로서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우리들은 인정한다. 그리고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즉 이른바 죄인이다. 선을 선으로 알고, 이것을 행해야 할 것인줄 알면서, 굳이 이것을 억지하여 불의에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면서, 마음 가운데 실험되는 이 진리를 막고 그 발동(發動)을 억제하는 자이다. 환언하면, 진리를 진리로서 알면서 이에 따르지 않고, 불의를 알면서 이에 따르는 자가 바로 죄인이다.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노는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찌무라는 18절이 이방인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바울은 먼저 인류의 전부를 멀리 넓게 보고서 이 총괄적인 단정을 내리고, 그런 후에 인류를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2분하고, 19절 이하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다음으로 2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것으로 말한다. 조두만 교수는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부정당(不正當)한 행위 즉 도덕적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즉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느라고 진리,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상훈 박사는 바울이 경험한 죄는 악한 영향 악한 분위기 따위로 외부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나니라 인간의 내부를 향하여 침입한 세력이라고 하였다. Murray는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거룩한 진노로 죄를 다스리신다. 이 말은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속죄와 화목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Bornkamm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1장18절-3장20절이 이 물음에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主導語)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1:18)데 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 바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여 수 있다고 오해한다. 율법이 전해 주는 인식은 오직 죄의 인식 뿐이다(롬3:20). 죄는 바울에게 있어서 분명히 개인적인 도덕적인 과오일 뿐 아니라, 행위와 노예와 세력의 일치에 있다.큄멜은 바울이 모든 인간의 죄의 타락성(롬3:23,갈3:22)을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때 인간적인 존재의 시초에 관해 말한적이 있다(롬5:12-19). 그리고 이 구절의 목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죄의 보편성에 하나님의 크신 은사로서 한 사람 예수를 통하여 온 생명을 대조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죄의 시작이 중심 문제이다(롬5:12).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다. 결국 아담이 죽음의 형벌을 받은 이래로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한편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결합은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유대적인 표상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 유대적인 표상에 의하면 아담이 죄와 형벌의 결합에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를 통하여 이러한 벌을 받는다. 따라서 바울은 죽음의 사상은 철저하게 주장하지만 결코 원죄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적인 사유와 전적으로 일치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자는 이제 신약 성경에서 차지하는 죄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고,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고자 한다.
우리말 신약 성경에는 죄에 관한 기록이 342회나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쓴 일곱 개의 서신에는 81회나 언급 되었는데, 그 중에 로마서에는 57회, 고린도전서에 12회, 고린도후서에 5회, 갈라디아서에 6회, 데살로니가 전서에 1회가 죄에 대하여 직접 말하여졌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에서 집중적으로 죄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 - 32절에서 이방인들의 죄상을 면밀하게 지적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도덕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한 죄상과 제반의 악덕을 지적하고 있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장18-32절을 3단으로 나누어 말한다. 제1단 19-23절 오성의 혼란-우상 숭배, 제2단 24-27절 정성의 혼란-더러움, 제3단 28-32절 의지의 혼란-불의, 즉 바울은 이방인의 죄를 오성, 정성, 의지 삼자의 혼란으로 본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에서 육신의 죄를 열거한다. 즉 불품행, 더러움, 호색, 우상 예배, 마술, 적의, 분쟁, 시기, 분노, 당파, 분열, 분파, 질투, 살인, 술취함, 연락 등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1장 29절-31절에서 하나님이 없는 제반의 추악상을 폭로 하는데, 이상근 박사는 이것을 표로 나타낸다.
a.근본적인 죄 : 불의, 추악, 악의, 탐욕
b.사람에 대한 심적인 죄 : 시기, 살인, 분쟁, 악독, 교만
c.사람에 대해 표현된 죄 : 수군수군함, 비방,하나님의 미워하심, 능욕,자랑
d.비인간적인 죄 : 악을 도모, 부모를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
우찌무라 칸조우는 마가복음 7장 21,22절과 갈라디아서 5장19-21절을 로마서1장 29-31절을 비교하여 죄의 목록을 설명하는데, 마가복음은 예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가장 조직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한 죄의 수는 13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죄의 수는 16이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21의 목록을 싣고 있다. 이것을 우찌무라 칸조우는 표로서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죄의 총칭=불의
* 죄의 총체=악의, 악, 탐욕
* 질투의 죄=투기, 살인, 분쟁, 사기, 악념
* 참무의 죄=참언, 욕(훼방)
* 교만의 죄=불손, 교만, 대언장어, 악사를 도모함
* 불신의 죄=불효, 무지, 불성실, 무정, 무자비 등.
이 목록 중에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께서 주신 죄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살인, 탐욕, 악의, 사기, 투기의 다섯이다. 그리고 다른 16개의 죄상은 모두 바울이 새로이 든 것임에 주의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는 로마서 2장 1-29, 3:9-20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대체로 보아 유대인의 죄는 심리적인 것들이다. 즉 이방인의 죄가 육체적이요 외형적인 것임에 비하여, 유대인들의 죄는 심적이며 내적인 죄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를 공격함에 있어서 먼저 그 죄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지적한다.
첫째로, 종교적 우월감에서 남을 판단하는 유대인을 하나님은 심판한다.
둘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은 심판한다.
셋째로, 표준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며,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떠난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한다. 그리고 반율법적인 죄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 율법을 범한 할례를 질책한 다음, 로마서 3장 9-20절에서 전 인류의 죄를 다룬다.
바울은 이처럼 개별적으로 유대인의 죄상과 이방인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논한 후에 그 결론으로 전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단정한다. 바울은 먼저 구약을 인용하여 인간의 죄성을 신랄하게 규명한다. 그리고 이미 전 인류는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Meyer은 로마서 3장10-18절의 배합은 “죄의 일반적 상태(10-12), 말의 죄(13-14), 행위의 죄(15-17), 죄의 전체적인 원천(18)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0절과 2장 1절은 죄에 대하여 아무도 핑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전 인류가 죄 아래 멸망의 대상임을 전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대하면서 로마서 3장 21절-8장 39절까지에서 구체적으로 구속의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2단계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의의 기초를 세우심을 살펴 보고자 한다.
3-2 칭의(Justification)
바울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을 하고,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義가 나타난 것,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義니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義를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는 아니다. 즉 사람의 자력으로서 달성한 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義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주셔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Augustin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율법의 일이나 율법의 도움을 떠나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즉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義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신적인 칭의에 관한 복음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에 대한 상론을 로마서 3장 21-30절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믿음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의인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롬5:9,18, 8:30,33, 10:4,10, 고전1:30, 6:11) 그리고 하나님의 의(롬3:5, 5:17, 10:3, 고후5:21)에 관해서 여러번 간단하게 언급한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義가 주어진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 대신에 인간의 믿음을 신의 의롭다 함을 위한 인간의 선행동으로 요청한다는 오해를 언제나 일으킨다.
그러나 황현숙 박사는 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응답, 승인, 인정, 포기이며,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재 행위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뿐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논자의 견해도 전적으로 동의 한다.
로마서3:21-26절은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로마서1:16절은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필요성을 나타내고, 로마서3:21절은 하나님의 義의 역사적 현현의 본질과 의미를 밝힌다.
그러면 이제 좀더 깊이 있게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또한 의인과 신앙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義” 개념을 비교적 드물게 사용하고 있으나(롬1:17, 3:5,21-22, 25-26, 10:3, 고후5:21, 빌3:9은 다르다) 언제나 하나의 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바울의 의인론의 맥락에서 합성어의 전승된 의미에서 생긴다. 하나님의 義라는 합성어는 묵시문학적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롬3:21-22,26-27) 하나님의 義는 나타났다.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義는 현재에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를 밝히시는 분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은 선포되어진다. “행한 것이 없지만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롬3:26, 4: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자로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일어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義”가 죄있는 인간을 현재적인 종말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럼으로써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뜻한다면, 이러한 신의 행동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때에 좀더 명확해 질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의 義”는 명백하게 율법의 의에 대립시켜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롬3:20-21). 즉 율법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여 이루는 의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의니 절대로 완전하고 또한 믿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義는 의가 없는 자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그 의 때문에 영생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른캄은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즉 스스로 의롭지 못한 인간에게 제공한다.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믿는 자를 의롭게 하면서 자신의 의를 제시한다(롬2:26). 그리고 하나님의 義는 언제나 능동적이며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다(롬3:21)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계시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롬3:27-28).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는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의 마음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지적한다. 은혜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언약을 세워 준다.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의 분신, “우리가 처해 있는 은혜”에 근거를 제공한다(롬5:1-2).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와 의인의 관계에 관하여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한다(롬5:6, 8-9). 즉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게하신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결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 믿음은 설교자의 설교와 보냄에 근거하여 완성된다(롬10:14-16, 고후5:18-19). 그러므로 우선 믿음은 들은 설교에 대한 동의이다. 그리고 믿음은 본질상 복종이다(롬6:17). 따라서 믿음은 복음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의 義를 만들어 내는 구원의 복음과 마지막 날에 만났으며, 복종으로 붙잡힌 바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선포된 의롭다 함에 대한 모든 감사의 신앙고백에서 종국적인 의롭다 함은 하나님의 선물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이미 일어났으며, 믿는 자에게 받은 바 은혜의 선물로서 확실한 현재이다. 그리고 Murray는 “칭의는 응답이며 또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와 판사의 행위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신앙 때문에 되어지는 일은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신앙으로 말미암아(by Faith)” 혹은 “신앙을 통하여(through Faith)” 또는 “신앙 위에서(upon Faith)”의 칭의를 말하나 결코 “신앙 때문에(an account of Faith)” 혹은 “신앙을 이유로 해서(because of Faith)”를 말하지 않는다.
칭의는 영생에 대한 주제이며 또한 영생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실행의 義로서가 아니고, 그것이 행위에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은혜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곳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또한 칭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적 사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보른캄은 신앙은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순종적인 신뢰와 신뢰적인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롬1:5, 6:16, 고후10:5). 그리고 신앙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미리 인간적인 결심에 의해 믿고 그후에 구원에 참여하는 양식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신앙이 뜻하는 것을 아브라함에 의거해서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롬4:3, 갈3:6)에 한정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아브라함의 의인은 경건의 최고의 증거를 위한 적절한 보상이다. 바울은 이것을 “은혜의 보상”으로 이해했다(롬4:4-5).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롬4:19이하). 이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의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미래의 언약을 대망한 신앙이고 이것으로 믿는자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그 언약의 성취에 자신의 근거를 둔다(롬4:23이하). 그러므로 신앙은 공격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적의 포기이고, 결코 ‘자랑’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의 근거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옛 실존의 마지막인 동시에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사실을 보아 온 대로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도움을 찾는 이들에게 제시한 하나의 조건으로 이 조건을 수락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히브리에서 義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움직이는 관계 개념이었듯이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한 것 뿐 아니라 우리안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계속적으로 지켜 나갈 힘을 주신다. 성령은 신자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시키고 지속시키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칭의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취하셨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으로 화목된 것이다. 이 화목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실존의 삶을 살게 하였으며,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영원한 선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으며, 은혜의 생활을 누린다. 생활이란 환란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연단으로, 연단에서 소망으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 1절-11절에는 삼위일체 교리 및 믿음 소망 사랑 신앙의 삼요소 및 은혜 평강 기쁨 등 은혜의 세 방면의 중요한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이같은 결과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이 대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현재의 구원이며, 신령한 구원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아담은 범죄 함으로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은사로 많은 범죄에서 의인으로 영생을 가져왔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윤리적인 면에서 의는 점점 전진하여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성화(Sanctification)라 했다.
3-3 성화(Sanctification)
성화는 구속 적용의 한 부분이다. 성화는 구속 적용의 첫 단계는 아니다. 즉 성화는 유효적 소명, 중생, 칭의, 양자와 같은 다른 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 중에서 성화와 관련된 두 가지 단계는 소명과 중생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소명과 중생은 그들의 즉각적인 효과를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소명은 우리 의식을 향하여 우리의 의식에서 응답을 끌어낸다. 중생의 그 자체가 우리 의식 속에 신앙과 회개, 사랑과 순종을 일으키게 하는 갱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소명이며, 실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성화에 의해서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지고, 백성들은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성화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룩되는 성결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여 죄와 더러움을 지적하고 이것을 제거하는 길을 가르치며, 죄의 뿌리, 죄의 세력, 죄의 결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과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우리 속에 완성하시려는 은혜의 일이다.
성결에 대하여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성결해지는 상태와 다른 하나는 성결케 되는 과정이다. 성결로 역되는 영어의 Sanctification과 희랍어 명사 ἁγιασνός는 깨끗함, 성결, 성, 상태와 과정의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Wesley는 성결이란 사람의 내심의 문제이다. 성결해진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이다”(살전5:16-18). 그리고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완전 중에, 성결해졌다는 사람에게 특질이 있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실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였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며, 인심의 속 깊은데 있는 본원이며, 자녀가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은사이다”라고 하였다.
Murra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중생했다 하더라도 신자에게 아직도 죄가 있다(롬6:20, 7:14-25 참조). 신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리 만큼 그렇게 거룩하고 악이 없고 순결한 것도 아니며, 또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니다. 성화는 모든 죄를 감소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완전 일치가 되는, 즉 주님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화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모순된 것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그의 마음과 생활의 싸움을 의미한다(롬7:14). 비록 죄가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그 죄가 왕노릇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는 이 신앙은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게 하며 마지막은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과 의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힘이 된다(롬6:17,22)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의 방식은 신비에 싸여 있다. 우리가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명령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또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린 영이신 성령이 성화시킨다(고후3:17,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며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나니”(빌2:12,13).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미 소유된 구원이 아니라 종국적인 구원이다(살전5:8,9).
성화의 구속 교리는 로마서 6:1-8:17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대체로 삼대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화의 생활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중생을 말하고 있다(롬6:1-11).
둘째는 성화의 생활 형태로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를 말한다(롬 6:12-7;6).
셋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길을 장려한다(롬8:1-17).
성화의 기초인 중생은 세례와 관련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Denny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인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화의 형태는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로 나타난다. 새 주종 관계는 성도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종을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불신때의 죄의 종과 현재의 義의 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종은 또한 사망과 영생이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거룩함에 이르라” 바로 성화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Calvin은 “성도는 현세에서 성화를 향해 노력하나, 그 완성은 죽은 후에나 되어진다”고 말한다. Wesley도 칼빈과 성화론에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논자의 견해도 웨슬레의 입장을 지지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선언한다. 사망과 영생은 모두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이다. 단순한 존재적 의미에서는 양편이 다 영생이다. 그러나 전자는 참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된 저주의 생의 영속이요, 후자는 하나님과 결합에서 축복의 생의 영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ἐν Χριστῷ......”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7장1-6절에서 결혼관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법적인 부부가 그 어느 한 쪽이 죽거나, 이혼한 경우에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연합하여 자유인이 될 때에 이 생활을 성화의 생활이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변화 받기 전에는 율법 아래 죄 가운데 있어서 육신은 죄의 법을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을 가는 성도는 이제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이 곧 성화의 길이다. Barth는 로마서 6장 22절을 들어 “네 자신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의 종이 되라! 이것이 은혜의 명령이다.”고 말했다.
이제 바울은 성화에 이르는 길이 율법에는 없다는 것을 단정하고, 나아가서 성령 안에서 비로서 성화의 길이 있음을 로마서 7장7절 - 8장17절에서 옛 길과 새 길 두 가지로 제시한다. 전자는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그 본질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살게 하려는 율법은 결과적으로 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전에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있지 아니하여 죄가운데 행하였으나 한 법을 통하여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 함으로써, 한 마디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는 성화에 도달할 수 없음을 실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옛 길은 율법으로 정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 마음과 육신,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대립된다. 이 두 가지 계통과 역사가 내 자신 속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 하는데 이 새 길은 정죄함이 없는 생명의 길인 것이다.
3-4 정죄 없음(No Condemnation)
“성서를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 그 보석의 반짝이는 첨단이다”(Philip Jacob Spener)고 하였다. 이제 7장을 통과하여 8장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고뇌의 밤이 지나고 광명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느듯 바울의 구속사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자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선고로 인하여 참으로 인류의 실존이 참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무겁고 우울함 속에서 출발했는데,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 오는 동안 이 어둠의 겁풀을 하나씩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여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1절의 이제는 다시 정죄 없다고 하는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되는 선언을 통하여 본질적인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연약하여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정죄는 칭의의 반대 개념이다. 칭의는 정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 서신의 주제인 칭의는 불경건한 자를 완전히 그리고 다시 취소할 수 없이 의롭다 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칭의는 모든 정죄가 취소된 사실을 내포한다. 이것이 1절의 사상이다. 부정적인 표현은 강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한 문맥에서 나온 추론임을 뜻한다. 만일 사도가 죄책에서부터와 죄책이 부과하는 정죄에서부터의 자유만을 단지 칭의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땐 우리는 특별히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신 중에서 그런 추론의 기초를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정죄에서부터의 자유가 죄책에서부터의 구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부터의 구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의 문맥과도 아주 적절하게 관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장의 투쟁에서 명백히 나타난 것과 같이 죄 및 육신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까닭에 신자의 소유물이 되어진 승리를 감상해 보는 것은 더욱더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 8장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고 구속사의 절정이라고 한다. 우찌무라 칸조우도 앞에서 인용된 Spener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로 이는 성서의 최고 점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죄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권위의 한 사람인 고데의 분해 법을 소개한다.
제1단 1-4절 죄에서 해방되는 일
제2단 5-11절 죄와 그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는 일
제3단 12-17절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일
제4단 18-30절 후사로 되는 일
제5단 31-39절 대찬미
제1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단정하고, 그 근거로 2,3,4절을 기록하고 있다. “살리시는 영의 법”으로 율법을 대신하고, 성령의 역사에 무게를 둔 것이 특징이다.
제2단은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행복을 말한다. 이것이 성령에 의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 너희에게 거하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는, 너희안에 거하시는 바의 영으로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11절)라고 한다.
제3단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것을 주안으로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는 자는, 이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다”(14절),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들의 영과 함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16절)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흔히 듣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특별한 은혜에 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제4단은 상속자가 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약 자녀라면 또한 후사로 될 것이다”(17). 하나님의 아들로서 머물러 있는 이상은, 반드시 어떤 실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는 것은 새로운 우주-전세계 만물-모두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받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 바울의 신앙, 사상, 희망은 절정에 달한 것이다. 신자들은 부활하여, 영광을 입고서, 새로 완성된 우주의 주인공으로 된다. 이것이 신자들을 기다리는 최고의 영예 또한 구원의 완성이다.
제5단은 대희망 대감사가 가득 넘치는 마음에서 자연히 흘러 나온 대환희의 토로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 한 가지를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그러면 7장 이전의 전부와 8장과의 상위점 문제이다. 비교해 보면, 7장까지의 구원은 대체로 외부적인 것이다. 물로 구원을 영혼에 받는 점에서 말하면 내부적이지만, 그래도 8장이 아주 내부적임에 비하면, 7장까지의 구원은 사람의 겉에 주로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우러러 보고, 그것을 원형으로하여 성결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구원은 완성케 되는지? 아니 보다 더, 내부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우리들의 영과 합체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도와 주고,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일,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실로 8장의 주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내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7장까지는 죄로부터 칭의 사건을 통하여 성화의 과정을 통해 구속을 바라 본다면, 8장의 시작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본질상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거룩의 최종의 목적지인 영화의 단계를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역할을 8장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8장은 단순히 취급되기에 가장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바울의 실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생을 고난과 함께 십자가를 중심을 살아온 바울의 경륜을 쉽게 이해 한다고 하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정죄없음의 특성과 특권을 살펴봄으로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권과 함께 강론을 시작하면서 그 특권을 받은 자들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은 우울한 한탄과 갈등에 뒤따라 오는 그의 승리이다. 이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큰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특성은 생활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특권을 얻으며 이 특성에 부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특권들 즉 칭의와 성화의 특권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행위 언약인 율법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율법은 우리를 유죄 판결을 내린 채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언약은 은혜와 공로의 보고인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실패한 인류를 구출할 방법을 간구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이 결과로 우리에게 미치는 일의 복된 결과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율법을 어긴 보상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순종하심으로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특성에 부합될 수 있는가? 먼저는 우리의 마음을 살핌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의 일을 따르는지 영의 일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은총, 영혼의 복지, 영원에 대한 관심 등은 영의 일이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즉 영혼의 죽음인 것이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영혼은 비참이며 철저하게 죽은 영혼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된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이며 영원한 생명과 평안의 시작인 것이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Murray는 “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의 실제적인 원리이며 지배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적의의 기질을 드러내 보이는 구체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상근 박사는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에 대하여 지적하는데 “유혹의 육체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범죄의 그릇이 되고 영혼의 싸움은 계속된다. 그러나 육 본위의 생활 원리에서 영 본위의 생활 원리로 결단의 선을 넘어선 자에게는 문제가 달라진다. 이 선 이전에는 육의 일을 생각하고 이후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곧 사람이 마땅히 위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함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성행위를 하는 이유는 아주 부패하여 악의 근성이 된 까닭이다.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도 부패의 잔재가 있으나 그것의 지배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진노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우리가 이 두 원리 중 어느 한쪽에 정복되고 굴복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육을 택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결과에 도달할 것이고, 만일 영에 속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성격을 말함이니,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성화의 도상에 있는 자들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참된 신자들에게는 탁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과 양자의 영이다. 몸은 죽은 것이다. 몸은 생리적 신체를 의미하지 않고 부패의 총체를 의미한다. 신자의 몸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나 영은 부패한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한다. 그리고 영은 신자의 마음을 의미하며(10절), 그것은 義 때문에 생명을 얻는다. 여기서 義는 그리스도의 칭의의 의와 성화의 운동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13).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은 악행을 떠나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침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새로운 관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영이 존재한다.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도에 대한 신자의 순응에 대하여,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감심으로 옛 사람을 버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라도 유쾌하게 거부함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죽음에 소속된 것들 앞에서도 놀라지 않음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땅에 속한 기쁨이나 보배까지도 경히 여김이다. 그것은 보배를 자발적으로 내어버리며 재앙을 환영하며 포응함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신자의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 Calvin은 말하기를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여 주심과 함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담력이 생긴다”고 하였다(Commentary upon the Epistle to the Rommans,p.313).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 정점을 향해 전진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인간에 기대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3-5 영화(Glorification)
바울은 신자의 다섯 번째 행복 곧 미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생명이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로 정의되고 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자신께서 그들을 위해 세워 놓으신 유업의 후사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치만 유업의 범위는 더 광대하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곧 유업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사상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상은 무엇보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은 사실이며, 여호와께서 그의 유업의 몫이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위에 부여된 유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친교를 통하여 영광의 상태에서 바라본 측면이다.
이 세상의 상속에 있어서는 이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장자만 상속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그들은 무슨 공로이든지 자기들의 공로로 천국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상속자로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상태란 상속을 받기 위한 교육과 준비의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한 자들은 장차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의 보상이며 현재의 소망의 성취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으니 또한 틀림없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하는데 저울을 사용한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상태에서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대립적 개념을 역설한다. 즉 그의 고난에 동참이 없이는 영광에의 동참도 없다.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 정해 놓은 순서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계획과 고안에는 이런 순서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런 연합적 참여는 영광의 경우처럼 고난의 경우에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속죄, 화해, 화목, 그리고 구속의 달성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죄과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지우셨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은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케 하셨다. 즉 그리스도만이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8:17절은 “우리가 현세에서 고난을 받은 값으로 장래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일체임으로 동고동락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
Butler는 말하기를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이 캄캄할수록 영생은 더욱 명랑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성령의 위로와 감화의 역사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 함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지만 죽은 후의 천국 생활도 가리키는 것이다.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별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생각건대.” 이 말의 헬라어 원어 Λογίζομαι는 상상이 아니고 구체화한 확신을 말한다. 이것은 이 세상 고난보다 내세의 영광이 말할 수 없이 큰 사실을 확실성 있게 여긴다.
그러나 Murray는 로마서8:18절의 “현재”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와는 대조를 이루는 “이 시대” “현 세대”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기는 부활과 영광이 나타날 시기이다. 여기서의 대조는 죽음에 앞서 이생에서의 한 신자가 격어야 하는 고난과, 그가 죽어서 들어가는 지복과의 대조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영광은 부활의 영광이며 장차 볼 세상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소망의 목적을 의미한다. 즉 피조물이 해방되는 소망이다. “썩어짐의 종노릇”은 부패의 종노릇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안에 존재하는 자유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썩어짐의 종노릇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 “영광”은 17,18절에 제시된 그 영광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은 피조물도 포함하는 영광이며, 우주적 갱신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만물의 회복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기대와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목적을 기대한다. 그리고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하나님의 백성들을 현재의 고난과 탄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필요를 따라 구체적으로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8:28,29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초현세적인 경륜을 다루고 있다. 28절의 뜻은 29절에서 예지(豫知) 및 예정(豫定)의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예정은 구원 경륜의 최종 목표를 정의하고 있다. 30절은 우리에게 현세적인 영역을 소개하며, 그 영원한 경륜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실제로 결실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에 세 가지 행위가 언급되는데 소명, 칭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속사의 정점적 표현으로 로마서8:31-39절에서 영광에 대한 개가를 부른다. Godet는 이것을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찬미”라고 격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중보를 들어 신자들의 미래의 구원의 확실성을 댓귀법을 사용하여 고조시키고, 확고한 구원의 개가를 부른다. 결국 이 사상은 로마서8:18절로 돌아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하고, 현재의 가지가지의 고난이 미래의 영광을 빼앗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논자는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숙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런 관점에서 본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제4장에서 다루게 될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은 본 연구와 무관한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논자는 죄로부터 구원 받았다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진보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방식을 통하여, 결실하는 바울의 구속사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구속사의 연장선에서 제4장을 다루고자 한다.
제4장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
바울은 앞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구속의 측면을 다룬 후에, 이어서 신자들의 실천적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신앙과 현존의 삶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떠난 삶, 삶을 떠난 신앙은 현재라는 현존에서 서로에게 필요 충분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존의 삶의 현장에서 즉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구원을 선취하셔서 살았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은 이미 성취된 것이며, 우리는 이 구원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신민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존 세계에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열매 맺는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세상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고찰하므로써, 현존에서의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확고히 하는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4-1 세상 백성으로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세상의 권력의 주체이며, 우리의 삶의 울타리인 국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설령 참혹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부인 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요소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지역적으로 국가라고 하는 민족의 공동체 속헤 존재하며, 작개는 가정이라고 하는 환경속에 내(吾人)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개인의 삶에 대하여 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며, 특별히 신자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4.1.1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리는 이제 관원들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Murray는 말하기를 “바울은 합법적인 권위에 대하여 복종할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정부 당국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받거나 또는 행정관에 의해 적절하게 보복당하는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앞에 기록된 본문이 나타난 이유를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인위적으로 찾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13:1-7절은 신자들의 생애와 증거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관계를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관원의 대권과 백성의 의무에 대해서 교훈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13:1-7절은 "정부에 순종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원리는, 신본주의 윤리이다. 곧 정권 순종의 이유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1절). 물론 정권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는 아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인류 사회에 모든 필요한 제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것이다. 만일 침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침해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에 대한 순종의 요청은, 모든 다른 사회 생활 분야의 자유를 무시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위배되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순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신자가 개인적으로 폭군이나 정권을 반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Calvin은 “다만 공무원이나 혹은 부속 관원들이 폭군이나 혹은 기타 집권자의 방종을 막으려고 합법적으로 운동할 때에, 기독 신자도 가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신성하고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인생에게 있어서 모든 면중 가장 존중할 만한 것임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은혜와 인애와 공의의 어떤 형상을 자신에게 再現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집권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저들의 권세를 존중히 여기며 정부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정부가 국무를 정당하게 집행하는데 있어서 국민이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정부를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사회생활의 첫째 문제는 역시 국가적 권세에 대한 의무이다. 먼저 원리적으로 권세에 복종할 것을 권하고 그 이유로서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인 것과 하나님의 인간 지배의 사자로서 상성벌악하는 것을 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국가에 대한 각종의 의무를 열거하며 권장하고 있다. 같은 사실은 웨스터민스터 신경에도 계승되었고 그것은 모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22:21)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태도는 흔히 좌우에 치우쳐 성서의 근본 정신을 그룻 반영하였다. 바울 당시에도 헤롯당 같은 것이 있어 권세에 아부하며 타락한 것은 그 한가지였고, 정면 항거했던 열심당, 소극적으로 도피했던 옛세네파 등은 다른 한 경향이다. 이런 태도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있지 않다.
Matthew Henry는 “우리 머리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왕과 그 밑에 따르는 모든 권력자들의 권위와 위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의로운 권세는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임무 부과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사회 안녕과 질서, 정부에 원수요, 가이사의 원수요, 공적 권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품기 쉬운 유혹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임무 실천의 이유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권세자들의 칼을 받기가 쉬웠는데 그들의 반역으로 이걸 더 악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 공공 임무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양심으로 하여금 세상의 권세에 복종케하는 의무와 책임을 위한 몇 가지의 이론을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로13:1-6).
첫째로, 권력의 제도적 측면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라는 말은 보다 문법적인 번역으로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속하는 통치권을 가리키며 또 백성들편에서 요청되는 순종을 가리킨다. 바울이 편지를 쓴 당시에는 정부의 통치권은 로마 정부에 의해 행사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여기서는 정부의 집행자를 직접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기되는 문제는 ‘권세’가 인간 정권자 배후에 있는 불가시적 천사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Oscar Cullmann은 이 경우에서 권세라는 말은 이중적인 언급, 즉 천사적 능력과 인간적 집행자 양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상근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 어조는 현정권을 부정하려는 경망한 태도에 대한 경계조가 보인다.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것은 성경에 일관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신자의 가장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박윤선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구약의 인용절 단2:21, 4:25, 사10:5-6절 등을 보면, 모든 정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확실하다고 주석한다.
그리고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3장1절은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에 복종하라는 권면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이라 해도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 권세에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권면이다. 그리고 이 권능에 복종은 질서이며 평화이다. 따라서 이 국권 복종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대정신이다. 바울의 로마 정부에 대한 태도는 복종을 권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박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도 하나님의 섭리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권력의 의도적인 측면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이 말씀은 복종의 대상이 되는 정권의 성격을 밝혀 준다. 우리가 복종할 만한 정권은 그 원칙에 있어서 악을 방지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보복을 정당하게 실시하는 정권이다. 그리고 권력은 악한 행위와 악인들에게 무서운 존재이며,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칭찬이다. 그리고 여기서 집중되고 있는 사상은 악행에 대한 형벌이며, 정부 관원들의 행위이며, 우리가 국가의 구성원으로 봉사에 의해 취할 수 있는 선에 대한 중대한 정의를 마련해 준다. 즉 국가 관원이 촉진하고 있는 선은 경건의 유익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얻는 유익의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우리는 정부의 혜택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하고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6절). 곧 양심에 따라 복종과 감사의 표로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은 마치 축복과 혜택을 돌려 받을 것을 알고 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박윤선 박사는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한, 신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내신 제도인 줄 알고 관원의 감시가 있든지 없든지 성의 있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공세는 인구세로, 국민으로서 나라의 유지를 위해 세금을 잘 바쳐야 한다.” 그리고 권세에 복종하는 구체적인 길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다. 즉 국가에 대한 양심적 순종의 증거로 납세의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기 대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현존을 경시하지 말고 세상의 권세와 정치를 무용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의와 평화를 보증하는 자로서, 확립된 정부를 존중하고, 성실로써 사랑하며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의 자세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의 권력이 부패한다면 인내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중보하고, 감사함으로 복종해야 한다.
4.1.2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21절에서 모든 신자들이 준수해야 하는 공통적인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개인이 실천해야 할 사랑 (우애, 열심, 소망, 인내, 기도, 자선, 관용, 미덕)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랑. 이것은 도덕에 있어서 요긴한 것이다.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계명 전부를 지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결핍된 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남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남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거짓 사랑이다. 세상을 향한 신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있다면 논자는 서슴치 않고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12:9절) 같은 교훈이 고린도 후서 6장 6절에는 “거짓이 없는 사랑”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윤리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일역 성경에는 “사랑은 거짓이 없도록 하라. 악은 미워하고, 선은 가까이 하며, 형제의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예의로써 서로 양보하라”(롬12:9-10)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은 전적인 사랑이다. 가면적 또는 얕은 사랑은 악을 증오할 줄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깊고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열애를 품고, 또 사람에 대하여서도 깊은 사랑을 가졌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강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믿음”과 대응된다. 그리고 이 사랑 “ἀγάπη”는 그대로 믿음의 이면을 말한다. 아가페는 부단히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되는 사랑 “ἔρως”는 인간적인 것으로 이웃 관계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의무는 달콤한 한 마디 곧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아첨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에는 “벗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원수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이 있다.
첫째로, 우리의 벗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가 빚지고 있고 갚아야 하는 상호간의 사랑이 있다. 정다운 사랑은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새번역),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표준새번역),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니 더 없이 부드럽고 더 없이 자연스런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랑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이것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의 재능이나 소유물에 의하여 그를 잘못 평가한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재능이나 그의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혼에 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피 흘려 주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예의를 겸전한 사랑만이 오래도록 지속하며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두 가지 제시되어 있다. 교회 내부의 어려운 교우를 돕는 일과 지나가는 나그네의 대접이다. 유무상통은 초대 교회의 미덕이다(행2:44). 시대와 생활 방식의 변천에 따라 그 방법은 변할지라도 그 사실만은 지속되어야 한다. 특히 “공급하며(κοινωνέω)”는 ‘κοινωνία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들은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그는 자신의 고통에의 동참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고, 짐을 덜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동거동락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조적인 사랑, 연합된 사랑 또는 통일된 사랑, 공손 또는 겸손한 사랑,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랑이다.
둘째로, 우리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 결론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우리가 선한 것에 대한 선택과 진지한 애착 그리고 그 안에서의 부단한 인내를 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을 이길 때에, 원수의 악독이 역시 감소되고, 그 원수는 점차로 친구로 변화 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자는 세상 백성으로서 실존의 삶의 문제를, 그것도 현재라는 시점을 염두에 두고 구속 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존 세계에 속해 있다고 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적인 덕목을 중점에 두고 성화의 길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한층 성숙한 삶의 차원을 심층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4-2 천국 시민으로서
논자는 앞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세상 백성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실천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여기에서는 현존의 삶 속에서 미래의 천국 시민으로서의 선취된 실존의 삶의 모형으로써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에 대하여 천국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4.2.1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리고 가시적인 교회 또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봉사와 교육과 연보로 신자의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한다.
첫째로, 예배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는 우리의 신앙의 모든 의무와 순종의 원천으로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12:1). 이 몸은 희랍어 σϖμα인데, 이 몸은 인간의 생리적 신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영혼 없는 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이 이상으로만 하나님 봉사를 꿈꾸지 말고, 몸으로 거룩되이 구체적 생활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은, 과거에는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롬1:24),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능을 한다. 이제 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거룩한 산 제사”인 것이다. ‘산 제사’는 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에 죽여 바친 제물의 상대되는 것이다. 신자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가 되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 곧 산 제물이다. 그리고 몸을 산 제물로 만드시는 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갈2:20). 거룩한 사랑이 제물을 불태우며 의무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말이다(롬5:11절). 그리고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상대적인 거룩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생활이 강직하며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거룩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전의 그릇들이 하나님께 바쳐져 거룩하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은 몸에 거룩을 가져다 준다. 몸의 행동이 거룩하면 그 몸도 거룩한 것이다. 이 몸은 “성령의 전”(고전6:19)이니 만큼 “몸을 성결하게 간직해야 한다”(살전4:4,5). 우찌무라 칸조우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산 제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희생 제물은 산 것이라야 한다. 이 점에서 신약의 희생 제물은 구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에 있어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는, 잡아 화제로서 여호와 앞에 드려졌으나 신약에 있어서는, 신자는 그 몸을 산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신자는 살아서 선행의 선한 열매를 맺는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쓰이기 위한 희생 제물인 것이다. 성화된 몸과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John Murray는 바울은 ‘몸’이란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산 제사로 바쳐야 할 것은 죄의 몸이나 범죄한 몸은 아니다. 로마서6:13절은 이것의 부록으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신자가 드려야 하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의 몸이 멸했기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몸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며 성령의 전이다(고전6:15,19).
그리고 예배는 영적인 것이다. 이 예배는 이성의 행동이 요구된다. 몸을 바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영적 예배란 말씀은 희랍어 τὴν λογικὴν λατρείαν인데, 이것은 ‘말씀에 입각한 너희의 예배’라고 읽을 수도 있다. 말씀에 입각한 예배라야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인 예배요 영적인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상대하고 계신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신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 여기서만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 바울은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지성을 열거하고 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며 동시에 책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응답하며 그 응답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둘째로, 봉사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후에 그분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12: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롬12:6-8),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이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재능, 은혜, 직분, 믿음에 관한 다양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화에 관련된 지침(指針)을 보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임에서 그에게 수여된 특별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롬1:5, 15:15,16, 고전3:10, 15:9,10, 갈2:9). 바울은 적절하게 이 은혜를 활용했다.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 안에서 다양성을 인식케 하며, 질서와 조화 유지 및 맡은 바 직분을 행해 내는 지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많은 지체가 존재한다. 인간의 몸은 지체 자체의 특수한 기능을 지닌 많은 지체를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지체는 많으나 그 지체들이 동일한 기능을 이행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신자의 공동체 속에 투입하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상은, 곧 피차 의존의 조화 속에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역사되어지고 있는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이 표현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분배해 주셨던 성령의 모든 은사들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사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피차간의 은사 및 은혜를 공유하고, 다양성은 각 지체들을 부요하게 한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분배가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에 따라서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헌신적으로 참여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와 환경은 다르다 할지라도 현재를 살고 있는 신자도 자신이 받은 은사와 믿음의 분량 대로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자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문제는 믿음의 분량이다. 어떤이는 5달란트, 혹은 2달란트, 혹은 1달란트의 분량이다. 교회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과오는 자기의 받은 은사를 과대시하고 남의 것은 무시하는 데서 일어나는 신앙적 교만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분규와 혼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말고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각자가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 Augustine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째 중요한 것은 겸손이요, 둘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요, 셋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다”고 했다. 진정한 아름다움 봉사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겸손에 있다.
셋째로, 교육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오직 한 번 교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택스트를 바울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교육의 홍수 시대라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교육이 다양성을 띠고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학 교육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폭넓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육하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다양성을 띤 교육이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 등을 말하면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직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스트로하여 신앙의 질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교육을 받을 권리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만큼 믿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화의 성숙은 교육적인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의 신앙을 윤택하게 하며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기초 교육은 매우 바람직하며, 신자들은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연보에 대하여. 바울은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 전서에 2회, 후서에 5회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 언급한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교인들의 고난과 빈곤을 도울 특별한 연보를 걷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면서 신중하게 갈라디아 교회를 언급한다. 이것은 교회 간의 경쟁을 피하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연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연보하는 방법은 모든 각 사람이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축복의 결과이다. 따라서 연보금은 하나님께서 축복 하신 대로 하면 된다. 그리고 연보를 하는 때는 매주일 첫날에 즉 주의 날에 한다. 이 날은 거룩한 안식일이다. 이 날의 모든 일은 자비의 실천에 집중된다. 자비의 일은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의 열매이다. 바울은 그가 갈때까지 모든 것이 준비 되기를 원했다. 이처럼 준비된 연보는 고난 당하는 형제에게 사랑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보에 동참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관대함을 알개 한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그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구제하는데 동참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게 연보를 하였다. 마게도냐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보를 드렸다. 이 교훈을 들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거액의 연보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드렸다. 그리고 바울은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알고 미리 준비케 한다. 이것은 연보가 억지가 아니라 참 연보답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논자는 연보의 본래적 의미를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보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 우리 시대에서도 장려되어야 한다. 교회가 고난 당하는 자기 민족을 외면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자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치중하지 말고, 이제라도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난 당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연보를 하고, 우리 주변에 소외된 민중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천국 시민의 의무이며 책임이 아닌가? 이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속받은 천국의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실천이 요구된다.
이제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천국 시민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실천적인 측면에서 예배의 기본적 의미와 봉사와 신앙 교육 그리고 연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에 대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4.2.2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경은 전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이 전 세계 의 창조주 사상과 하나님이 전 세계의 통치자이기에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 리고 이스라엘의 구별은 만민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의 주변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기 나라 속에 성육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의 눈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표 본적으로 역은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적이다.
바울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세계화다. 유대교가 유대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또 유대 문화적 한계를 가지고 그것을 고집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복음을 세계화하려고 했다. 원그리스도 교회의 어떤 선교자도 자신의 목표를 그렇게 넓게 정하고 복음을 사람이 사는 세계의 끝까지 전하려고 하지 못했다. 바울은 그의 희심 이후 선교사로서 이방인들 사이에서 활동을 했었다. 바울은 아직 그 자신의 활동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늦어도 소아시아 지방 이래 또는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데살로니가에 이르는 도중에서 로마가 먼 목표로 그에게 떠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사해 주는 것은 후에 쓴 로마서에서의 자신의 진술이다. 즉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계획했으나 방해를 받아 왔다(롬1:13, 15:22)는 것이다. 바울의 기본 신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전해진 곳에서는 설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롬15:20, 고후10:15,16).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서방을 향한 그의 더 넓은 선교 여행을 위해 주요한 곳으로 남아 있었다(롬15:24,28). 바울의 선교 계획들은 스페인에 이르는 전세계를 자신의 선교에 맺어 놓으려는 의도가 있다. 그는 반복해서 ‘온 땅’(롬10:18), ‘땅 끝’(롬10:18), ‘모든 백성’(롬15:11)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울로 하여금 이 거대한 구상을 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가 도래하여 그의 주권을 신에게 넘겨줄 때 신은 그를 만물의 主로 높이고 그의 주권은 임박한 종말까지 지속된다는 신념이 있었다(롬15:16, 고전15:24, 고후2:14). 바울의 독특성은 철저한 종말 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한 것이다. 바울이 主에 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그는 예배에 모이는 개체 교회의 主일 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세력들의 主이기도 하고(빌2:6-11), 부활하여 올리움으로 죽은 자와 산 자들의 主가 되었다(롬14:9)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당장 부딪치게 된 것이 바로 토착화의 문제이다. 유대 문화권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이질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에 복음을 이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전통적, 묵시적 사상 체계로 복음을 해석하지만, 문화의 이질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복음을 해석학적으로 변용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이 가장 잘 수용하면서도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해석한다.
논자는 바울의 해석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토착화는 필연이다. 문제는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이 변화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세계를 향해 선포되어야 한다. 바로 바울의 토착화에 대한 복음 선포의 전략은 그 시대의 문화권에 적절하게 본질을 유지하면서 가장 쉬운 의미가 전달되도록 복음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토착화 과정에서 바울은 두 가지 반대에 직면한다. 예루살렘에서는 복음의 유대적 근원을 무시한다고 비난하고, 헬라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복음을 자신들의 에토스로 해석하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역시 영광 중에 오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 속에서 그의 생전에 종말의 구원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적인 약한 세대”와 현재적인 “구원의 날”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는 바울에 따르면 현재가 종말 이전의 구원의 때임을 보여주며, 이러한 구원의 현실에 의해서 믿는 자들의 실존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역시 현재를 구원의 시대와 구원 완성의 희망의 병행으로, 그 둘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사건과 결합시키고, 잠정적이며 또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은 - 원시 공동체의 체험과 관련하여 - 구원의 현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실존에서와 개개 그리스도인의 영의 체험에서 본다.
또한 바울의 복음 선교에 대한 전략은 먼저 헬라 세계의 도시를 축으로 하는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을 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복음의 세계화의 마지막 중요 거점 도시로 로마의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 로마서를 집필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지마다 적절하게 자기의 입장을 정리한다.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 교회이다.
바울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과 기존 종교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21세기를 바라보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식시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현장을 통해 오늘의 선교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구속을 위한 준비로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자 한다.
4.2.3 성령의 열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가 되신다. 또한 성령은 인격자로서 지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유일한 영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의지적 행동과 정신적 활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다. 그리고 구원받은 천국 시민으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참 신앙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신령한 열매 및 윤리적 열매를 보아 가늠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무엇보다 성령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성령의 열매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하여. 이단자 Arius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성령은 단지 피조된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에네르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성령의 교리와 변천은 실로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복음주의 정통 기독교 신앙의 주류는 성경에 나타난 계시에 따라 성령은 한 인격자이심을 주장한다. 즉 성령의 속성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하며, 성령의 사역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또한 인칭 대명사의 사용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이처럼 성령은 인격자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행동하게 하며, 성령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숙한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정통적인 기독교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함께 긍정하여 왔다. 핫지는 “제4세기 이래 성령의 참된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된 일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Cummings는 “구약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86회, 신약에 261절수 중에서 복음서에 56구절, 사도행전에 57구절, 바울서신에 103구절, 그밖에 다른 곳에 36구절에, 성령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거룩한 성경에는 성령의 신성의 증거가 넘치도록 풍성하다.
셋째로, 성령의 속성에 대하여. 성령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계시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오류없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계시되어 있다. 또한 인격의 속성에 대한 증거는 이미 열거한 바 있다. 성령은 무소부재하시며(시139:7), 전지하시며(고전2:10-11). 전능하시며(창1:2), 거룩한 영이시며, 영원하시다(눅11:13, 히9:14).
논자는 앞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이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죄로 말미암는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생명의 성령이라고 말한다. John Murray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 안에 역사하며 작용하는 하나의 권세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하며, 지배적인 사상은 죄책에서의 구출보다는 죄의 권세,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의 구출이라고 주석한다. 이러한 사상은 내적인 작용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지, 객관적인 성취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작용이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3절)을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을 통하여 행하셨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생명의 성령의 내적인 작용에 의해서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죄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이다. 이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신앙의 덕목들이다. 바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열매를 맺도록 내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논한다.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는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성령의 소욕을 덧입어 내성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 결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행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새 생활의 정정당당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를 가리키며 또 그러한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을 대적할 율법도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열매를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맺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성령을 힘입고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자에게 남겨진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어떤이는 영벌에, 어떤이는 영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논자는 긴 여행을 마치고 결론으로 나가고자 한다.
제5장 결론
5-1 요약
본 논고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출발했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구속에 대한 위기의식, 구속에 대한 일반적인 보편적 이해 결여, 특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본질적 의미의 이해 결여, 현대 종교의 특징인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범신론적 구원관에 의한 기독교의 구원관의 유일성 파괴 등이 논제로 제시 되었다.
구속의 개념 및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접근을 통해 구속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성경적으로 구약 성경에서는 인류의 시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맺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았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예언의 성취로서의 구속사를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그 개념을 파악, 통일성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다양한 신학자들의 구원관을 폭넓게 약술함으로서 보다 깊이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 스러운 접근을 위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일반 역사와 관계해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초점을 두고 불트만 계열을 중심으로 접근해서 실존적인 문제에 취급했다.
그리고 본 논고의 주제문으로 로마서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이 제시한 구속의 교리를 구속사의 흐름에서 접근하여 논자의 견해가 투영된 점층적 구조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유죄 선언 즉 죄의 선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즉 칭의,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심에 의하여 중생한 신자들이 나아가야 할 성결의 생활 즉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성화, 성화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된 무죄 선언 즉 정죄 없음, 구원의 완성을 통하여 얻게 될 최종의 목표인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해서 여러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여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울의 구원 선포가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이렇게 구속 받은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실천적인 문제를 세상 백성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개인으로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그리고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교회 중심의 예배 생활, 봉사 생활, 교육을 통한 제자의 생활, 연보를 통한 구제하는 생활 등을 살펴 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위임령을 실천하기 위한 복음 선포와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성경을 중심으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다루었다.
“ ὣστε εἴ τις ἐν Χριστῷ, καινὴ κτίσιςʹτα ἀρχαία παρήλθεν, ἰδοὺ γέγονεν
καινά.”(ΙΙΡΟΣ ΚΟΡΙΝΘΙΟΎΣ B 5:17)
5-2 비판 및 제언
바울의 구속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난해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희심한 후,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신앙 훈련을 위하여 이 서신이 구속의 교리를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그 핵심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 의한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시대도 다르지만 바울과 똑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방향성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 구속사 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객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논고를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을 염두에 두고 다루었다고 생각을 한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성을 두 가지만 제시한다.
첫째는, 많은 신학도들이 바울의 구속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에서 좋은 논문을 많이 남겨서 후학들이 바울을 이해하고 성서 전체의 주제인 구속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 한다.
둘째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실존의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세계화가 실현되도록 오늘의 신학도 및 신자들이 바울의 영성과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건이 아닌, 미래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 이 시대의 언어와 환경에서 바울의 구속사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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