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vs 바이블로드의 역사와 회복 및 전망 |
조효근 목사 (한국 기독언론인 협회 회장) |
인류 역사의 중요 길목이 열리는 때가 왔다. 이는 동과 서, 또는 아시아와 유럽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그때였다. 아시아의 거대한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의 무모한 젊은 영웅 알렉산더의 충돌은 동서양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다.
알렉산더. 그의 부친 필립 왕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서 제국의 꿈을 꾸는 영웅이었다. 세계 역사상 군사전략에서는 위대한 천재로 평가되는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통합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뜻을 이루었다. 군사전략가이고 점령군주인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그가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자로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가정교사였다. 일화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전쟁터를 누빌 때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훈집을 말안장 밑에 가지고 다니면서 틈이 나면 읽었다고 한다.
그는 오리엔트 문명을 알아보았다. 그의 전승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하고 동․서 사상사에 뛰어난 현자(지혜자)들을 모아 일명 철학의 도시를 만들었다. 그의 알렉산드리아가 뿌리 내린 곳,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로 큰 문화의 도시로 성공했다. 전성기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장서가 80만권이나 되었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알렉산더가 그의 출중한 무력으로 페르시아, 인도 등지를 장악하여 동서문명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각기의 장점을 보완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서양은 겨우 아시아의 끝자락 자투리 땅에서 연명하는 작은 종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훌쩍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로 건너 가자. 알렉산더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정지작업을 했다고 보면 좋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알렉산더의 정복전쟁은 동서양이 헬레니즘의 이름으로 만났고, 헬레니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주체인 헤브라이즘과 쌍벽을 이루며 일단 유럽사상의 기본틀을 마련했다.
Ⅰ. 비단길을 통해서 바라보는 대륙선교
1. 유라시아 복음의 길을 열고자 했던 바울
바울은 일반사에서도 그 사상과 업적에 대하여 후하게 평가하거니와 기독교 자료에 의해서도 그는 요한복음 복음(저자)이 등장하기 전, 그러니까 예루살렘 멸망기(AD 70~72)까지에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해야 할 만큼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는 안디옥교회 파송 선교사로 AD 47년 출발하여 키프로스를 거쳐서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거치는 1차 전도여행을 하였다. 2차 전도여행 마무리 지을 무렵 바울은 ‘아시아의 길’(행 16:7)을 가겠다고 성령 하나님께 졸라 댄다. 가자면 못 갈 길이 아니건만 바울은 거절을 당한다.
바로 이 대목이 주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바울의 아시아 전도여행 요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건을 흥미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바울이 가겠다고 한 아시아가 어디냐에 대하여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진보층에서는 대륙 아시아, 곧 중앙아시아의 중국을 말하지만 보수층에서는(소아시아) 에베소 등지를 ‘바울의 아시아’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아시아는 소아시아가 아닌 것 같다. 소아시아의 경우 바울이 1차 전도여행지 범위 안에 들어 있으며, 설사 아나톨리아 지방이라 해도 시비가 되지 않는다. 바울의 아시아가 어딘가? 그곳은 바울이 알고 있을 것 같다. 지금의 터키 중부지방인 아나톨리아까지를 인정한다면 곧바로 수메르, 아카드, 바벨론까지를 인정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대륙 아시아인 중국까지 포함된다.
만약 바울이 노린 곳이 에베소나 서머나를 중심한 소아시아가 아니라면, 아나톨리아를 수용해야 하고 아나톨리아를 받아들일 경우 오리엔트 문명권 모두를 수용해야 한다.
바울은 ‘아시아 요구’를 하다가 마케도니아 행을 선택해야 했다. 그의 발걸음은 유럽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아시아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깝다. 왜, 바울은 더 이상 아시아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가 ‘아시아행 거부’를 당한 것은 사도행전 16장에서이다. 마케도니아 지경이나 고린도 지경을 다녀온 후에 ‘아시아 요구’를 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런데 왜, 바울은 더 이상 아시아 선교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2. 바울시대에 활짝 열린 비단길
바울 활동기 직전에 비단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는 중국의 정세를 분석하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중국의 후한(後漢) 왕조를 문물유통의 적절한 시기로 볼 수 있다. AD 25년 유수가 후한 왕조를 세운 후, 본격화 되었다. 물론 한무제의 충신장건이 1, 2, 3차에 걸쳐서 B.C 139년부터 20여 년 동안 유라시아 길목을 막고 있는 흉노세력을 물리쳐서 동․서문명의 큰 길을 열었음을 우리는 안다. 드디어 로마와 중국의 무역은 물론 동서 문명의 교차로를 만들어 냈었다.
그러나 중국의 적극성에 비하여 로마는 태도가 소극적이었다. 물론 이의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진나라 한나라를 이어오면서 중국은 변방의 흉노들과 3백여 년 동안 싸우면서 자기 영토를 지켜냈다. 그 과정에서 서역을 견고하게 개척한 점이다. 서역은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로써 160만 ㎢가 넘는 드넓은 땅이다. 한반도의 8배에 해당한다. 대부분 모랫더미와 산지로 이루어졌으나 이 길을 열어야 한다. 서역, 곧 신강 위구르 한복판으로 가로지르는 천산을 좌우 또는 상하로 비껴 길을 열면 중국의 서북방 돈황을 지나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카스피해를 비껴가면 로마, 곧 유럽에 다다른다.
이 길을 통해서 대륙으로 간다. 다소 억지스럽다할지는 모르겠으나 초기 기독교는 좌우로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힘을 대동하고 아시아의 길을 열었어야 했다. 페르시아 변경을 우회하면 알렉산더가 밟았다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가 나온다. 여기서 숨을 고르고 천산산맥을 남북으로 끼고 전진하면 신강 위구르(서역)를 지나 중국 본토에 이르른다.
사도행전 16장의 막연한 단어 하나 ‘아시아’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힌트임을 고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명령과 이를 따르는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인 바울사도의 길이 어찌하여 마주칠 수 없었더냐는 불만스러운 투정을 하는 것이다.
3. 아시아의 기독교
사도행전 16장, 바울은 밤을 세워 기도하였다.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우리를 도와달라고. 바울은 바로 여기에 계시가 있다고 믿었다. 그날 이후 바울은 아시아의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다. 바울은 유럽을 개척하는 것으로 그의 사명을 삼아야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아시아의 사도를 별도로 준비하셨다. 그 대표 인물이 도마이다. 그의 길은 육로와 해로를 겸하여 넉넉하게 열려 있었다. 기원 초기에 역사지리학에는 스트라보(strabo)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부 학계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의 지리학은 1세기 사람들에게 상당히 익숙해 있었다. 스트라보의 지리학에 근거한 세계지도는 근세 지리학 수준에 접근해 있었다. 그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알고 있는 듯 했으나 아시아의 북부와 남부를 잘 알고 있었다. 스트라보가 그린 지도에는 아라비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 동쪽으로 앗시리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더스도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에 스트라보에게 정보를 준 사람들은 이집트의 선원들이었다. 그 선원들 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튀어나왔다. 어느 선원의 말, ‘내가 (사도) 도마를 싣고 인도에 갔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도마의 선교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의 선교를 시도했던 사도행전 16장의 바울을 주목하면서 아시아의 꿈을 꾸었으나 그는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세계 기독교회사는 유럽행 기독교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아시아행 기독교는 에뎃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출발하는 것으로 기록했다.
안디옥교회 지원을 받으면서 사도바울의 천재적인 선교역량이 드러나는데 비하여 에뎃사는 어딘지 모르게 기울고 있었다. 당시,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의 (성)령에 붙잡힐 무렵은 사도들이 박해에 시달리며 이집트나 수리아, 페르시아 접경지 등지로 피난을 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런데 수리아 안디옥은 헬라파 유대인들 중심의 집결지요, 에뎃사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중심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시아 기독교의 터전은 옛 페르시아의 영지인 파르티아 왕조와 사산조를 거치면서 그들의 기반을 이루어 갔다. 그러니까 유럽의 기독교는 로마를 배경으로 성장해 가고, 아시아 기독교는 크게는 페르시아의 영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로마기독교는 AD 313년 콘스탄틴에 의하여 자유화 되었고, 아시아 기독교는 아르메니아 오르헨 공국이 AD 280년 국교선언을 하면서 함께 깃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의 씨앗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AD 325년 니케아 세계 기독교 공의회가 열려서 ‘아리우스 이단정죄’를 하고 기독교 기본교리인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다가 돌이키기 어려운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제국 밖에서 성장해 가는 시리아 기독교는 에뎃사에 둥지를 튼 채 큰 어려움이 없이 페르시아 옛 영토를 활용하면서 성장해 갔다.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를 탄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다. 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국을 정복한 고레스는 자기네의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에 호감을 가졌으며, 그래서인지 그는 유대인들을 도와 주었다. 예루살렘 귀환을 위해서 편의를 제공했으며 바벨론이 파괴한 성전을 다시 지어주기도 했다. 예루살렘 귀환을 원치 않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영토내에서 자국인들과 다를바 없는 삶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에뎃사는 로마제국 밖의 기독교에게 행복한 터전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시기심에 쫓겨난 동 기독교(아시아 기독교)는 니시비스로 터전을 옮긴다.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의 무자비한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Ⅱ. 비단길 따라서 아시아로 가는 네스토리안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변고가 생겼다. 어느 누구의 선택은 아니었으나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알렉산드리아 키릴과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싸움에 말려들어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파문하였다.
이는 세계 기독교의 큰 과오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은 승승장구하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견제를 위하여 정치싸움을 걸어왔다. 그리고 싸움꾼 키릴은 승리했다. 자기 인기만 믿고 방심했던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가 되어 이집트와 리비아 사막을 떠돌며 회복의 날을 기다리다가 AD 45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복권의 날을 기다리면서 기도했고, 반론을 위하여 글을 쓰기도 했으나 잔인한 로마의 눈을 피해서 헤라클레이데스라는 필명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오, 사막이여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대는 나의 벗이며 나의 양육자였고 또 내가 머무는 거쳐였노라. 그리고 너 유배지여, 내가 죽은 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날에 다시 부활할때까지 나의 육신을 지켜줄 나의 어머니 사막이여’를 속삭이면서 역사 속으로 갔다.
1. 네스토리우스가 연 아시아의 길
아시아의 길을 열어야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진다. 이미 놓쳐버린 아시아의 기득권인데도 이를 생각하면서 후회마저도 없는 기독교는 미래시대를 책임질 용기도 없는 것 같다.
앞서도 밝혔지만 아시아의 길은 바울시대에 열려야 했다. 알렉산더가 연 세계화의 열망을 기독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가? 그가 비록 창과 칼을 들고 아시아로 진군해 갔으나 그가 이룩한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을 기독교는 방심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헬레니즘 바다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메시아의 삶에 동참하지 못하고 지중해 변경과 라틴파가 지배하는 아시아의 끝자락인 유럽에 만족했던 기독교는 결국은 ‘절반승’의 위안을 받는 것으로 역사를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바울이 다시 한 번 아시아 행을 위하여 기도했어야 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마케도니아 인이 바울을 모셔갔으나 로마로 끌려가서 바로의 재판을 받고 사면을 받았던 AD 62년 경 바울이 아시아에 가겠다고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으면 어떠했을까? 아시아의 길을 가다가 사마르칸트에서 죽은 들, 천산산맥을 남으로 향해 가다가 카쉬기르에서 숨을 거둔 들, 아니면 돈황까지만 갔어도, 더 달려서 흉노의 땅을 지나 후한 왕조의 수도 낙양에 짐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펼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레오바고에서 그 많은 소피스트들에게 창조의 복음을 전했던 기개로써 공자, 노자, 맹자와 장자의 제자들에게 단순명쾌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전도했으면 인류역사가 바뀌었지 않을까.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죽고, 바울을 죽인자들의 친구들에 의해서 이단자가 된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 19세기의 조선 땅 보부상들처럼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드넓은 사막의 땅을 바람처럼 달려 중국을 찾아갔다. AD 635년 당태종의 귀빈 대접을 받으면서. 빛나는 종교(景敎)라는 이름으로 AD 635년 당태종 앞에 나타난 기독교의 큰 승려(大德 또는 上德이라고 중국에서는 호칭하기도 한다.) 아라본에 대한 내용은 김호동 서울대 교수의 책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에서 몇 줄 옮겨 본다.
지금 서안(옛 자안) 비림 박물관에 있는 경교비에 나타난 일부를 옮기면 ‘대진국(大溱國)에 아라본이라는 높은 승려(上德)가 있었다. 그는 청운을 점쳐서 진리의 경전을 싣고, 바람의 흐름을 살피면서 힘들고 어려운 길을 달려, 정관(貞觀) 9년 장안에 도착했다. 황제는 제상 방현령을 시켜 의장대와 함께 서쪽 교외로 보내, 깍듯이 환영하여 대궐로 모셔 오게 했다. 황실 서각에서 경전을 번역케 하고 내전에서도(경교의) 도를 물어 보았다. 그것이 옳고 참됨을 깊이 알게 되니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정관 12년 후 7월, 조칙을 내렸다’고 기록되었다.
‘대진국’이 어디냐, 했을 때는 좁은 의미로는 예수께서 태어난 유대지방이고, 크게는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라본(阿羅本)’이라는 한자는 시리아어로 랍반(Rabban)으로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인데 사제에 대한 존칭을 말하는 것 같다. 아라반이 장안(서안, 당시 당나라 수도)에 도착했을 때 재상 방현령이 안내를 하고 의장대 사열을 받을 정도이면 주요 외국 사절단의 대우였을 것이다. 아라본 도착 3년 후 AD 638년 당태종은 공식으로 선교(포교)를 인정하는 조서를 내렸다.
2. 뒤따르는 이슬람
숙명인가? 네스토리우스 곁에 이슬람이 늘 가까이 있다.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 비쉬켁에서 이스쿨 방향으로 70km 쯤에 토크막(Tokmak) 주변에 부라나와 악베심 등지에서 발굴된 네스토리우스 자료에 보면 그들 이슬람이 네스토리안 교회 별체에 함께 생활하기도 했고, 또 몽골리아에서도 동일한 모습의 형용으로 나타났는데 무덤(묘소) 안에 합매장을 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만 숙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네스토리우스가 에베소 종교회의에서(로마기독교에게) 이단으로 추방된 이후 초기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 수리아, 이집트, 리비아, 아라비아 등지에서 살았다. 후일의 이야기인데 네스토리우스의 교회나 그의 제자로부터 무하마드가 ‘예수공부’를 했다고 한다.
공부만 한 것이 아니다. 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사람들 곁, 가까운 곳에 그들이 있었다. 페르시아를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진출을 한 네스토리안의 뒤를 100여 년 쯤 따라 붙은 이슬람은 언제나 기독교를 잡아먹으면서 세력을 키워갔다. 잡아먹었다는 살벌한 용어가 싫으면 기독교(선교) 영토를 빼앗아 갔다고 하겠다. 이슬람은 기독교 영토를 나눠 가졌다. 절반 이상이나. 이슬람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전 기독교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그리고 로마 등 5대 교구를 세계적 틀로 삼고 운영해 갔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로마(가톨릭) 교구 하나를 빼고는 모두 이슬람에게 바쳤다. 기독교에게 빼앗아간 이슬람 지역을 말해볼까? 예루살렘, 이집트, 리비아, 수리아. 안디옥,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을 대강 살펴보면 바그다드, 페르시아, 박트리아, 아프카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기스탄, 키르기즈탄, 카자흐스탄, 신강 위구르, 몽골리아 그리고 또…. 대충 주먹구구식으로 해도 기독교는 애쓰고 수고하여 선교한 나라들을 대다수 이슬람에게 빼앗겨 버렸다. 현재 아라비아 일부를 포함하여 지구상의 이슬람 영토의 3분의 2쯤이 본디 기독교 영토였다.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유사 기독교’에 해당하는 이슬람에게 거의 다 빼앗겨버린 기독교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앞 일이 캄캄하다.
3. 아시아의 끝, 세계의 끝까지
기독교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네스토리안들의 선교열정을 바로 살피면 혀를 내두를 것이다. 네스토리안의 선교 파워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앞서 잠시 언급했으나 안디옥과 에뎃사의 숙명적 이해관계가 빚어낸 결과물일까?
예를 들어 도시적이고 로마식인 안디옥과 전원적이며 신비한 성품의 에뎃사의 정서가 각기 서양식과 동양식으로 나뉘었다고 해야 할까? 더 쉽게 말하면 로마식과 페르시아 식으로 크게 나뉘는 것이 안디옥이요 에뎃사일까?
에뎃사는 로마제국의 이단자가 되어 쫓기던 또다른 로마제국식 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파와 시리아 고유의 기독교 사이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네스토리우스의 등장 이전의 에뎃사 중심의 시리아 기독교, 또는 동기독교(The church of the East)는 그들대로 자부심을 가진 기독교의 한 세력이었다. 한 예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 탄생하실 때 선물을 가지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이 에뎃사의 현자(지혜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예수 제자인 아다이(또는 타네우스)가 활동했던 곳이며, 로마보다 먼저 개종자를 낸 곳이며, 동일터전인 아르메니아 공국 오레헨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자부심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로마 박해시절 피난자들이 모여서 열정어린 신앙생활을 했던 곳,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 박해 중지(AD 313년)와 기독교 국교(AD 392)로 지정할 때는 파르티아 왕조를 무너뜨린 페르시아계 사산조 샤프르 2세 치세(AD 309~379)의 혹독한 박해와 AD 420년 바람 5세치하에서는 15만 3천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순교) 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동․서 기독교 모두 피속에서 성장한 셈이다. 그리고 에베소 종교회의(AD 431) 파동은 에뎃사에도 단성론과 양성론의 투쟁장이 되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사람들은 단성론자와의 싸움을 피하여 니시비스로 옮겨 양성론 기독교의 독자적 세력으로 선교의 길을 열었다. 더구나 AD 497년 니시비스의 주교 바바이가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선택, 합류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는 교세가 강화되었고, 또 교구제도화를 통한 행정기반도 튼튼히 해갔다.
크데시폰의 중앙본부에서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아라비아, 투르키스탄, 몽골리아, 티베트, 인도의 방갈로르, 북경 쪽으로 거대한 선교단들이 진출해 갔다. 그들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 수 없을 만큼이었다. 오랜 시련을 거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사도 이후 기독교가 가진 잠재력의 표출이었을까.
네스토리안들의 선교 특징은 그들이 진출한 곳이면 거기에 반드시 ①교회 ②학교 ③병원을 짓고 운영했다. 그들은 선교지원을 후방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최전선의 결사대들처펌 현지에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마련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말하여 19세기 보부상처럼이라 하였으나, 저들 네스토리안의 선교자원은 그들의 동시대 사마르칸트를 중심한 유명인 집단인 ‘소그드인’들에게 배운 상술로 풍성한 선교자원을 마련했지 않았을까 싶다. 장사하는 기술은 중국인을 당해낼 수 없고, 한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난로를 팔아먹은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을 말하기도 하지만 네스토리안들도 장사에는 이골이 났었다. 사막의 대상들로부터 생산지 값으로 물건을 사다가 도매, 중간도매, 소매 등의 방법으로 선교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아시아 일대를 그들의 선교무대로 만들었다. 앞으로 네스토리안들의 아시아 선교현황이 더 많이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여기서 다시 서울대 김호동 교수의 자료를 따라 네스토리안 선교조직을 살펴보면 ① 주교좌 ① 대주교좌 ① 총주교좌 ① 유물발견지까지 포함하면 58개처가 나와 있다. 막연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이보다 10배 정도 이상의 유적발굴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하 신교기독교의 편견, 로마 가톨릭의 적대감을 극복해 낸다면 지하에 숨어 있는 자료, 아마도 로마 카톨릭의 본산인 바티칸 지하 자료실에 네트토리우스에 자료가 많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당시 AD 431년 이후 머지않은 날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죄를 ‘사면’했다. 비록 중국과의 무역에서 페르시아가 중간 이익을 많이 보는 것이 싫어서 전략(정략)적으로 사면을 했다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사면을 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단에서 거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기 인물인 루터는 네스토리우스 교리에 문제점이 없다 하였고, 칼빈의 제자들 중에 네스토리우스 연구학자도 있다. 17세기 이후는 물론이고 현대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네스토리우스 신학을 정죄하는 이들이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교리 싸움에서 정치적 수완 부족으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를 ‘기독교 신교’에서는 거리를 두는가. 예를 들어 보자. 네스토리우스는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 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기독교인들 어느 누구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던가?
필자는 세계 기독교 역사가 ‘아시아 역사’를 버린데 대하여 분개하며 이를 복원하여 명실공히 세계기독교사는 유라시아, 또는 아프로 유라시아(아프리카․유럽․아시아) 역사의 균형을 잡아야 함을 확신하면서 탐구하고 있으며 특히 네스토리우스의 역사 유적지 발굴 및 답사를 위하여 1992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몰두하고 있다.
4. 네스토리안 선교의 좌절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실패했다. 그들의 엄청난 희생을 통한 추진력에 의해서도 아시아 기독교 시대는 열리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의 그 화려한 기회를 지혜롭게 선용하지 못한 아쉬운 역사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도 회복의 시간은 있었으나 송나라와 명나라의 거부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중국 역사는 진, 당, 원, 청나라가 변방 족 출신 지배세력이고 한, 송, 명 나라가 한족(漢族)출신, 곧 중국 본토족 지배였다. 추측성이기는 하지만 이방종교는 한족의 거부감 때문에 뿌리 내리기 힘든 곳이 중국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네스토리안의 선교는 실패했다. 마르코 폴로가 베니스를 떠나 아시아, 대칸 쿠빌리아 시대의 중국진출을 1260년대에 했으며, 1580년대 예수회 사제인 마테오리치가 중국진출을 해서 크게 성공을 했는데 네스토리우스의 역사는 중국사에 AD 1401년 이후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사업가 마르코 폴로는 모르지만 마테오리치의 예수회 기반과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가 중국에서 만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Ⅲ. 복음의 길 회복의 전망
기독교의 아시아를 향한 길은 비단길(Silk Road)이 아니라 애초부터 복음의 길(Gospel Road)이었다. 바울이 열었으면 했던 그것도 아시아의 복음세계였으며, 도마 일행이 인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전설같은 현실에서도 복음의 인도승부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16세기 이후 기독교는 아시아 선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했으며 현재에도 중동, 중앙, 중국 아시아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주 예수의 복음을 심고 있다.
1. 네스토리안들의 복음사역을 복원(복권)시켜야 한다.
니케아 시대로 가자. 니케아 시대의 과오는 물론 미숙한 시대를 인식하자. 그때 그들의 싸움은 성장과정의 기독교 모습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기독론’은 물론이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신감 넘치는 논리확보를 못했다.
카타콤 시대의 한계라지만, 그 시대의 기독교는 아프리카,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등 각 지역마다 각기 실험 신학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성급하게 기독교를 조직하려 했고, 그의 생각을 따르지 못하는 기독교 신학은 자칫 세속적 이해에 눈독을 들인 자들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다.
네스토리우스를 파멸시키고야 말겠다 했고, 또 성공했다고 자부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키릴루스)은 그의 숙부의 원한까지 포함하여 변방의 인물로서의 열등감 극복을 위한 속셈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네스토리우스와 키릴의 정치싸움(교리싸움)의 불씨를 살릴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교리적 완전성은 아직도 미숙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실크로드 시대’에 복음의 아시아에 큰 공적을 남긴 네스토리안들의 ‘1천년 선교역사’는 기독교의 앞날을 위해서도 주요한 역사(자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실패의 역사도 재산이다. 누가 네스토리우스의 아시아 선교를 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 하였고 또 중앙아시아와 중국대력에서 그들 네스토리안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장구한 세월동안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날들을 우리 현대 기독교는 기억해야 한다.
키르기즈스탄 토크막 지대와 이스쿨 지역의 공동묘지에는 600여 개의 묘비석이 나왔는데 네스토리우스 파 특유의 십자가 모양이 있고 시리아어로 비문이 쓰여 있다. 비문에는 매장자의 이름과 사망 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연도는 그리스력으로 그 숫자에서 311년을 빼면 서력 기원을 산출해 낼 수 있다.
발굴 자료 중 858년도 비석 하나, 911년도 비석 또 하나, 그리고 다수는 13~14세기의 것이며 1345년도 비석이 최후의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투르크 식 이름, 성경의 주인공들의 이름 등이며 투르크어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 자료에 의하면 8백년 대와 1천 3백년도의 사이의 매장자 비문으로 볼 때 5백여 년간 집단 거주를 했을 수도 있고, 지속적 연고지가 되기도 할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네스토리안들이 중앙아시아나 중국 대륙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저들의 신앙의 부족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9세기 무렵까지는 사마르칸트나 소그드인들의 활동지, 타슈겐트 너머의 키르기즈스탄 지역에서는 매우 두터운 뿌리를 내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중국 본토 역시 마찬가지다. 농사짓는 자들에게는 농사기술까지 전수해 가며 현지인의 삶에 동화하였고, 유목민들과 함께 할 때도 그들과 동반이동을 하는 등 지혜와 끈기를 발휘했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에게 완전정복이 된 7세기 후반, 페르시아 전역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세력이 이슬람에 의하여 약화되어 후방 지원이 차단되어갔으며 중앙아시아 일대의 네스토리안들도 차츰 이슬람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후반기에 안록산의 난 때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어떤 이익을 얻었으나 황소의 난 때는 네스토리우스파는 물론이고 이슬람, 조로아스터의 배화교, 마니교 등이 일제히 타격을 받았다. 보다 중요한 부분은 실크로드와 아리비아 해로(海路) 중에서 차츰 해로쪽으로 기울고 아리비아 이슬람이 국력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본토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는 약화되어 갔다.
당나라의 쇠멸과 송나라 등장은 저들 한족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배타성 때문에 움츠렸다가 징기스칸 이후 저들의 세력과 부침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중앙 아시아와 중국변경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는 기독교는 먼저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를 복원이 아니라 복권시키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2.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교리적 한계
어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뿐인가? 니케아 기독교는 먼저 ‘기독론’에 잡음이 많았다. 그 시대의 가장 큰 희생자가 네스토리우스 였으니까. 또 삼위일체 교리는 요즘도 사람(목사)들마다 자신이 없어서 어떤 이들은 벌벌 떤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와 완전 결별을 못하고 ‘유대파 크리스찬’ 노릇을 하는 것은 요즘도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인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는 기독교의 결정적인 취약점이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론의 완전에 가까이 가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쯤은 되어야 그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인데 말이다.
삼위일체 경우, 이것이 궁금하여 많은 사제들을 찾아다니며 질문을 던졌던 이슬람 창시자 무하마드의 그때를 생각하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동 비극을 함께 보는 것 같다.
3. 기독교 때문에 미숙한 종교로 남게 된 이슬람
무하마드에게 삼위일체를 가르쳐 주지 못했던 6세기 말 기독교는 지구 위에 또 하나의 미숙한 셈 족의 종교를 탄생시키는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들 세 종교는 함께 설익은 아브라함 자식들로 오늘은 ‘하나님의 괴로움’이 되어 있다.
무하마드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못하는 중세 초 기독교를 유일신 종교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삼신교’ 또는 ‘다신교’라 하여 등을 돌리고 그 스스로가 유일신 아브라함 종교의 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 해석을 잘 못한 동일 범죄자가 되었다. 기독교는 셋이면서 하나이신 뜻 몰라서 고생이고, 이슬람 역시 그 하나 안에 셋이 조화를 이루는 유일자 되심을 몰라서 비극을 잉태했다.
그러므로 잘 못 가르쳐서 무익한 종교 만들게 한 기독교나 기독교의 미성숙을 바라보다가 비슷한 종교 만들어 고생하는 종교가가 되어버린 이슬람, 이 또한 주님의 고뇌가 아닐 수 없다.
Ⅳ. 아시아 선교의 전망
기독교는 유럽식과 아시아식의 조화를 통하여 완전을 지향해 갈 수 있다. 이는 아벨과 가인의 만남을 위해서이며, 이삭과 이스마엘의 만남을 성취해 내기 위한 필연의 코스이다. 실크로드가 바이블로드(Bible Road)로 되어야 하는 것은 단순 전도를 통한 구원자의 확대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유라시아 순례를 정정당당하게 마침으로 세계종교(절대종교)로써 자기완성기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을 배우면서, 또 그것들에게 부대끼면서 인생이 성장해 가듯이 기독교는 아시아 수련을 거쳐야만 제 맛을 내는 열매가 될 것이다.
1. 아시아 종교의 극복을 할 수 있는가?
기독교는 바울의 ‘아시아 행’이 좌절되면서부터 아시아 충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도마나 그 밖의 전도자들이 아시아 선교를 시도했다고도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성취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었다.
앞서도 얼마간 다루어 보았으나 기독교는 아시아 종교들 앞에서 늘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바울의 아시아 행을 극구 만류하셨던 이유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신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21세기의 오늘도 기독교의 아시아행은 늘 두렵다. 아니라고 할 사람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불교나 유교 노자와 장자 앞에서 자유로운 몸짓이 가능한가? 아닐 것이다. 맹목으로 문 닫아 걸고 이불 속에서 소리쳐도 소용없는 일이다. 저들 아시아 종교에 대하여 공부를 해 보았는가? 공부도 해 보지 않고 어찌 그들을 아는가?
우선 같은 셈 족 계열인 이슬람에 대하여 아는 바가 있는가? 꾸란을 읽었는가? 저들의 깊이 있는 신앙세계를 따스한 눈빛으로 접근해 보았는가? 특히 선교사들이 이슬람권에서 해마다 겪는 ‘라마단’에 대한 이해는 되어 있는가?
해마다 라마단 절기가 오면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적극성을 가지고 ‘라마단 절기’가 무엇인가, 그 근원적 가치에 도전하여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들과 함께 해가 떠 있는 시간동안 금식하여 거기서 영력을 보충하고 또 먹을 것 절약해서 구제금으로 내놓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여 이슬람의 요구를 충족시켜 보라.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다.
이슬람의 태생은 아브라함 이후 족장시대의 이스라엘, 성전시대, 유대교 시대의 주요 특성을 이스라엘과 기독교와 함께 가지고 있다. 다만 기독교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처럼 이슬람을 가르칠 교훈이 따로 있어야 한다.
예수 바로 배운 기독교는 이슬람을 가르칠 수 있다. 이는 타락한 기독교시대의 사생아가 이슬람이기에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기독교가 기독교 노릇을 바로 할 수만 있다면 이슬람은 기독교의 장애가 결코 될 수 없다.
2. 마테오 리치와 존 로스를 아는가?
마테오 리치는 가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했다. 15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 북겨에서 세상을 떠났다. 1573년 선교사의 길을 선택, 유럽을 출발하여 1578년 고아에 도착. 1582년 마카오를 거쳐 중국선교에 나선다. 저는 1591년 사서삼경 중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할만큼 중국사상에 달통했으며 노․장자나 불교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을 능가하였다. 1594년부터는 사제복을 벗고 중국의 복식을 따라 의관을 갖추니 영낙없이 중국의 선비였다. 1601년 영주권을 얻어 베이징에 주거허가를 받았으며, 중국사상과 문화를 서양에 전했고, 그의 종교를 천주실의(天主實義)에 담아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역사는 마태오리치를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부른다. 1610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중국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사람이다.
우리는 또 한 사람 존 로스(J. loss)를 알고 있다. 한국인에게 낮익은 로스(loss) 선교사는 중국사상을 배우기 위하여 7년을 투자했다. 노자의 도(道)와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는 저들의 사원에 들어가서 승려 노릇을 하면서 배움을 익힌 후에 복음의 선교사 임무를 수행한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AD 635년 중국의 당태종 앞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정착했던 (선교 허가를 받았던) 아라반 이후 네스토리안들이 너무나 안이한 방법으로 선교를 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네스토리안의 자료들을 보면 ‘성경번역’은 물론 ‘성경언어’를 창안하는데 부족함이 드러났다. 좀 더 침착하게 천년의 무개로 선교의 길을 열었어야 한다.
성경번역의 오류,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도’라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존’이라 하여 부처와 동일인물시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중국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도교와 불교 속에 흡입되어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변명이 있겠으나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 중에 ‘마테오 리치’나 ‘존 로스’ 같은 사람 하나만 있었으면 중국와 몽골, 중앙아시아에 기독교는 정착했을 것이다.
3. 선교공동전선을 이루어 내야 한다.
오늘의 한국선교는 중앙아시아와 세계 각 선교지에서 성공을 하려면 특히 중동, 중앙, 중국 아시아에서 ‘선교파산’을 하지 않고 작은 성공이라도 거두려면 즉시 ‘선교연합전선’을 이루어야 한다. 첨단광통신 시대요 우주선을 활용하는 시대에 부족사회 수준의 선교 시스템을 가지고 선교를 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비극의 시대라고 해야 한다.
특히 이슬람의 문화권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사들 간의 공동전략과 전술, 생존과 선교계획을 일치시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선교생위를 중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이 정도 수준의 ‘글조각’을 뒤적이면서 역사 공부를 하자는 것 아니다. 필자는 무엇을 위하여 이 글을 쓰며, 또 이를 발표하는 것과 함께 이 행사에 동행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역사가 헛 돌고 있음을 본다. 또 다시 실패하기 위하여 역사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정직을 뒤로 감추고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서도 안된다. 용기를 멀리하고 공허한 외교술을 동원해서는 더욱 안된다.
끝으로 실크로드(Silk Road)는 복음의 길(Bible Road)로 자리 잡았는데, 역사 속에 묻어둘 수 없는 네스토리안들의 선교열정을 되살리고 선교 21세기의 오늘을 향한 소망스러운 전략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본 논고는 2006년 11월 21일-24일 / Royal Benja Hotel, Bankok, Thailand에서 열렸던 실크로드 미션 포럼에서 발제된 것이다.
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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