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vs 바이블로드의 역사와 회복 및 전망에 대한 응답 |
응답 : 노봉린 교수 / 하와이 인터내셔널대학 교수 |
조효근 목사님의 좋은 논문에 응답하기 전에 “실크로드”라는 단어의 배경을 먼저 보기를 원한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기교회의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이루기까지의 선교사역은 실크로드를 사용하여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 실크로드를 바이블로드로 말할 수 있다.
실크로드 단어의 배경은 중국대륙 맨 끝 서부에 있는 신강성이라는 광대한 지역이 있는데 위구르 (Uighur)종족인 자치국이 있다. 이곳에서 두개의 유명물이 생산되는데 하나는 6,000 미터 (2000 feet)의 높은 금란산맥에서 옥석(Jade Stone)이 발견 되어 중국수도 북경으로 수출 되였다.
둘째로 금난산 남쪽에 유티엔(Yutien)이라는 곳에 실크공장을 설치하여 아름다운 비단옷감을 만들어 서쪽의 서방국가들에게 수출하게 되였다. 예를 들어, 559년 페르시아에서 온 한 네스도리아 기독교인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누에 (Silkworm)를 Constan- tinople에 가지고 와서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서부의 시리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동부의 주민들과 동부의 중국의 상인들이 4,000-5,000마일의 긴 실크로드를 통하여 거래하게 되였고 문화교류를 이룰 수 있게 되였다. 1983년 일본 NHK와 중국 CCTV가 공동으로 서안으로부터 터키까지의 실크로드의 탐험여행을 수개월 같이 하면서 10편의 DVD를 "The Silk Road"라는 제목으로 제작하였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약 10시간동안 실크로드의 대한 영화를 보게 되였다. 끝없는 사막지역과 높은 산을 넘고 넓은 들판을 걸으며 낙타를 타고 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조 목사님의 논문을 몇 가지로 평가하겠다.
1. 이 논문은 기독교의 복음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방국가들로부터 동방국가들에게 어떻게 전달 되였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다루었다. Alexander the Great (356-328 B. C)의 제국이 페르시아로부터 인도까지 미친 영향과 사도바울의 선교여행이 소아시아를 포함하여 기독교의 성장이 동쪽으로 시리아를 거쳐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전달된 것을 지시하였다.
바울시대에 활짝 열린 비단길(p.2) 부분을 더 확장했으면 좋겠다. 천산산맥은 3,000 미터 (1,000 feet)의 높고 긴 산으로 눈이 늘 덮혀 있으며 이곳의 쿠체 (Kuche)도시는 340,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도시이며 동부(중국)와 서부(유럽)이 만나는 중요한 곳이다. 종교는 본래 불교였지만 10세기의 이슬람교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페르시아문화와 헬라문화와 불교문화가 어울리는 중심지 (Cross Road between East and West)가 되였다.
중국의 상인들은 삼국 시대 (220-590)로부터 수이(Sui) 시대(590-618)와 당나라 시대(618-907)와, 송나라 시대(960-1279)와 몽골 제국 시대(1279-1368)와 명나라 시대(1368-1644)를 거쳐 1,500년의 긴 세월을 통하여 수 천 만 리의 사막과 산과 오아시스를 통하는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게 되였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서안)으로부터 란초, 천산산맥, 쿠체, 카슈갈(Kashgal)까지 이르게 되었고 또한 서양의 상인들은 콘스칸티노풀, 터키, 페르시아를 거쳐 쿠체와 카슈갈에 이루게 되여 동서문화를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2. 6세기에 동로마제국인 비잔틴 (Byzantine)과 몽골의 훈 (Huns)족의 영토확장이 실크로드의 이득을 많이 받게 되었다. 비잔틴왕 Justin I세(518-527) 황제로부터 Justinian Empire(518-610)를 이루게 되었는데 Justinian 황제(527-565)는 막대한 군사력으로 북아프리카를 점령(524)하고 이탈리아와 오랫동안(536-562) 전쟁을 치른 후 이탈리아를 점령하였다. 그는 실크로드를 사용하여 그의 제국을 페르시아(562)까지 이르게 되었고 Sssanian 제국과 50년의 평화 조약을 561년에 맺게 되였다. 그러므로 Justinian 황제의 제국은 비잔틴제국의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동서교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였다.
3. 그 반면에 433년 몽골의 Attila왕은 훈족의 지도자가 되여 그의 세력이 중동지역과 동유럽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지배하게 되였는데 시리아(540)와 페르시아(541)와 알메니아(543)와 데살로니아(552)와 최후 559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게 되었다. Attila왕이 453년에 사망한 후 훈족은 쇠약해졌다. 훈족이 유럽까지 침입했다는 것은 실크로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4. 조 목사님은 네스토리안 교회와 이슬람교의 선교 상황에 대해 많이 강조하였다. 첫째로 네스토리아 교회는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페르시아와 중국과 인도에 진출하였다. 둘째로 이슬람교는 622년에 시작 되여 7세기 말 까지는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를 10세기까지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을 표시하였다. 이 부분에서 한가지 중요한 Franciscan 선교사들의 활동이 빠졌다. 이것은 진기스 칸이 몽골제국(1206-1368)을 창설하여 몽골제국의 영토확장을 이루어 도서문화의 교류와 천주교 신부들의 중국선교 사역이었다. Christopher Dawson이 편집한 Mission to Asia와 The Mongol Mission: Narratives and Letters of the Franciscan Missionaries in Mongolia에 자세히 천주교 선교사들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진기스 칸(1162-1227)은 중국서부에 있는 기독교 족들을 침략하였다. 그는 Keracts족(1203)과 위구르(Uighur) 족을 또한 Naimensa족(1206)을 점령하였다. 그의 아들 오가다이 칸은 중국 서북쪽에 있는 타타족(Tartars)을 식민지로 삼았다. 손자 바투칸은 모스크바(1238)와 키부(1240)를 점령하였다. 손자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1258)와 시리아(1260)를 점령한 후 애급의 무슬림 군인과 대전하여 서방진출을 더 계속하지 못하게 되였다. 손자 크비라이칸(1216-1294)은 중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Cambaluc)을 수도로 삼았다.
5. 13세기 때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도착한 프랜시스칸 선교사들이 놀라운 선교사역을 추진시켰다. John of Plano Carpini는 1245년 Innocent III세 교황의 대사로 Gaul의 Lyons도시를 떠나 중국 Karakorum (북경의 서북쪽)에 도착하여 큐육칸 (1246-1248)을 면접하였다. 그의 History of the Mongols라는 책에 그의 선교 경험에 대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1247년 다시 로마로 귀국하였다. William of Rubruck은 1253년 중국서부의 우이거족과 타타르 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신부도 몽골인의 이상하고 재미로운 습관을 하나 하나 기록하였다.
John of Monte Corvino는 이탈리아의 신부로 1294년 실크로드를 통해 북경에 도착하여 2개의 교회를 세우고 수 년 만에 6,000명의 신도를 얻게 되였다. 그는 북경의 대감독이 되였으며 30년간 중국에서 선교한 후 1328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30,000명의 신자를 갖게 되였다. 그는 또한 중국의 네스토리아 교회를 반대하였다. 그때당시 24개 아세아지역에 6개의 네스토리아 노회가 존재하였는데 당나라시대의 네스토리아교회는 845년 이전에 대다수 자리를 감추게 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프랜시스칸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를 하였을 때 네스토리아교회의 영향은 아직 남아 있었다.
6. 조 목사님은 Marco Polo의 중국여행에 대해 언급하였다. 1260년 Nicolo Polo (Marco의 부친)과 Maffeo Polo는 선교사를 동반하지 않고 북경에 도착하여 크불라이칸을 접하고 1269년 그곳을 떠났다. 그 후 1271년부터 1295년까지 Kashgar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을 동반하여 아세아 극동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중국여행의 기록은 여러 책에 보고 되었다. Marco의 여행 4년 전에 Jacob d'Ancona라는 이탈리아의 유대인이 이탈리아의 Ancona도시를 떠나 배를 타고 Persian Gulf와 싱가폴을 거쳐 중궁 쟈이톤 (홍콩지역)에 상륙하여 육지로 북경까지 올라갔다가 6개월 후에 다시 쟈이톤으로 돌아간 후 배를 타고 Persian Gulf까지 갔다가 다시 육지로 실크로드를 사용하여 자기 본향 Ancona에 도착하였다. 이도 그의 여행을 재미나게 기록한 것이 출판되었다.
7. 조 목사님은 끝으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특별히 아시아종교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원주민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토착화”와 “상황화”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천주교 예수단의 Mateo Ricci와 개신교 선교사 John Russ의 예를 들었다. 현대 선교신학에서 많이 토론되는 상황화 문제에 대해서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 논의되었던 ‘선교하는 방법의 토착화 문제’와 1971년부터 WCC의 Theological Education Fund(TEF)이 강조해 온 ‘The Mandate of Contextualization(상황화의 요구)’은 토착화의 선교 방법론을 초월하여 복음자체를 상황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이 지난 30년 동안 열렬히 토론해 온 것이다. 오늘의 반 선교사 운동이 늘어나는 시대에 다시 한번 새롭게 선교 방법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본 논고는 2006년 11월 21일-24일 / Royal Benja Hotel, Bankok, Thailand에서 열렸던 실크로드 미션 포럼에서 '실크로드 vs 바이블로드의 역사와 회복 및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조효근 목사 (한국 기독언론인 협회 회장)님이 발제된 것에 대한 응답이다.
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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