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투 예루살렘 비전의 선각자들
백투 예루살렘 비전의 선각자 1 : 메카차오(Mecca Chao)
메카차오(Mecca Chao)는 중국, 해난지방의 링 사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기근을 피해 상사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곳에서 십대 후반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도 변함없이 주님께서 이끄시는 곳은 어디든지 복음을 전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메카차오(Mecca Chao)는 구원 받은 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놓고 기도할 때 종이에 쓰여 진 “메카(Mecca)" 라는 글자에서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글자가 의미하는 바를 몰라 친구들 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 글자가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 확신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알고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에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고, 주님은 나의 가야 할 길을 명백히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5년간 메카차오(Mecca Chao)는 열심히,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이후 세상에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유혹과 야망을 따라 살다가 군대에 들어갔고 전쟁 중 포로로 잡혀, 혹독한 고문과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감옥에서 탕자를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격리된 감옥에서 지난날 주님께 받은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다시 나의 갈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는 중국 안에 이슬람교가 성행하는 닝시아 지방의 지도와 함께 중국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메카차오(Mecca Chao)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낙담하고 쓰러져 있는 나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25세에 감옥에서 나갈 것을 약속해 주셨고 27세가 되면 나에게 주신 소명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25세가 되던 5월, 나는 감옥에서 나왔으며, 26세 7월에 노스웨스트(Northwest) 성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27세가 될 때 간슈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났고, 여름에 감옥에서 보았던 닝시아 지방을 밟게 되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에 감사했습니다.”
노스웨스트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메카차오(Mecca Chao)는 마크 마(Mark Ma)목사에 의해 그 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메카(Mecca)라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마크 마 목사는 메카차오(Mecca Chao)에게 “형제가 받은 소명은 이슬람의 중심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고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중국 이름대신 “메카차오(Mecca Chao)”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메카차오(Mecca Chao)는 노스웨스트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며, 백투 예루살렘의 비전을 들었고, 하나님께서 동일한 비젼으로 부르시는 것을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그는 열정적인 백투 예루살렘 첫 번째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품은 7명의 선각자가 낙타를 타고 간슈 지방을 떠나 싱지앙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의 짐은 작은 가방과 각자의 세숫대야(특이할 만한)에 한정되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그들은 백투 예루살렘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역을 할 시간이 도래했다. 영적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선포는 영광과 찬미가 아닌 고난과 순교의 메시지다. 고난과 순교는 우리를 두렵고 약하게 만들지만 주님께서 더욱 강한 믿음과 은혜를 주셨다.”
1947년 3월에는 중국의 서쪽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된 5명의 여인들이 준비되었습니다. 시편 68편 11장의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라는 말씀은 이 다섯 여인에게 어울리는 말씀인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이 가기에 너무나 위험한 여정이었기에 많은 염려와 걱정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5명의 여인들은 “우리는 기꺼이 시온산을 향한 길 위에 순교의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행에 합류한 호은정 자매가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은정 자매는 어릴 적부터 성경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베다니, 시온산 등을 지명을 마당에 붙여놓을 정도로 성경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1937년 텐진에 있는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17살의 호은정은 “싱지앙으로 가라.”, “결국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호은정은 복음 집회에 참석하면서 선교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기도를 하던 중 주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대하고 빛나는 광야에 나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슬픔에 차 있었고, 도움을 간절히 찾고 있는 울부짖는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심한 공포와 고통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자비롭고 은혜로운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둠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나는 주님의 목소리에 한없는 감동과 사랑을 느꼈으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 후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비전의 선각자 2 - 로스 루(Ruth Lu) 자매
노스웨스트성경학교 백투 예루살렘 인물소개(2)로 10년 후 백투 예루살렘 그룹의 일원이 된 호(Ho)의 계획은 카쉬가르(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팀의 일원인 로스 루(Ruth Lu) 자매는 허난성(河南省) 출신으로 1940년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 그녀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후, 노스웨스트(Northwest)성경학교에 입학한 로스 루는 기도하는 중,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던 중,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의 절규를 듣게 된다. 곧바로 “저 영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줄 수 있겠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그녀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곧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도 응답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신장성(新疆省)에 위치한 카쉬카르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여행을 지속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어도 배웠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팀의 일원인 이 친 추안(Li Chin Chuan) 자매는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산 이 친 추안자매는 12세에 집에서 가출해 많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긴 시간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20세에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 변했습니다. 1941년 노스웨스트성경학교에 입학했으며, 3년 후인 1944년에 간쑤(甘肅)성에 있는 란저우(蘭州)로 단기선교를 나갑니다. 다시 노스웨스트성경학교로 돌아온 그녀는 백투 예루살렘 팀에 가입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그녀에게 티벳을 향한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부담감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했지만, 곧 티벳 영혼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1947년 3월 백투 예루살렘 팀과 함께 중국의 서부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헬렌 바이레이(Helen Bailey)는 비록 백투 예루살렘 팀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백투 예루살렘 팀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헬렌 바이레이는 25년 동안 중국에 살면서 복음을 전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노스웨스트성경학교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격려하며,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그룹에 가입해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길 권유 받았던 그녀는 백투 예루살렘은 중국 현지그리스도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교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자신이 백투 예루살렘에 참가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당시 중국전역에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한 마음으로 백투 예루살렘 팀을 기뻐했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안전과 성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중국의 주교였던 허우톤(F. Houghton) 당시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현재 중국교회는 노스웨스트(Northwest)성경학교에서 시작된 백투 예루살렘 운동에 들뜨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장성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신장성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 내륙선교의 선구자인 허드슨테일러(Hudson Taylor)와 같이 진실한 헌신과 주님의 거룩한 부름에 신실하게 반응하며, 실제적으로 이 모든 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결국 7명의 신실한 복음 전도자들은 중국의 북서부에 위치한 시닝까지 도달했습니다. 시닝에서 이들은 수(Su)목사를 만났습니다. 수목사는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아랍어를 배우길 원했지만 팀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황위안(Huangyuan)에 도착했으며, 메카차오(Mecca Chao)는 홀로 칭하이(靑海)성의 울란(Ulan : 지금의 툴란 Tulan)에 도착해, 다른 팀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초기지를 만들었습니다. 울란(Ulan)은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중앙아시아의 대상들이 통과하는 관문도시이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메카차오(Mecca Chao)는 오랜 시간 여행으로 신경성통증으로 극도로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학교와 약국에 가서 선생님들과 가게주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메카차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여행을 기록했습니다.
“여행도중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었다. 몽골인, 티벳인, 무슬림들이 텐트에 살고 있으며,여행 도중에는 여관과 같은 여행자를 위한 시설은 없다. 사막, 광야, 야생동물, 사람을 잡아먹는 티벳의 들개들, 산적들이 있을 뿐이다.
여행하며, 도로를 따라 굶어죽은 시체들을 많이 보았다. 매일 밤, 수풀을 해치며, 길을 가야 했다. 많은 날을 야외에서 노숙했다. 많은 도적과 산적들의 위협이 있었다.
이 모든 위협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도였다.”
1947년 7월 후반부터 백투 예루살렘 팀은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폭설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여름기간동안만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습지와 고산을 넘어 결국 신장(Xinjiang)에 도착했지만, 수일동안 국경에서 감금되었다가 겨우 통과허가를 받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결국 백투 예루살렘 팀은 중국의 가장 서쪽지역까지 도달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크 마(Mark Ma), 메카차오(Mecca Chao), 끝까지 함께 했던 백투 예루살렘 일원들은 결국 하나님이 처음으로 주신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선교사들 모두에게 이슬람세계를 향한 복음의 열정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계속 사막을 통과해 서쪽으로 복음을 전하며 이동했습니다. 계속적인 식수부족, 도적들의 약탈, 열악한 기후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보호해 주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비전의 선각자 3 :
백투 예루살렘, 위기와 새로운 시작 백투 예루살렘 일행이 낙타를 타고 한달 정도 신장(Xinjiang)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하고 있을 때 정부관리에 의해 여행을 저지당했습니다.
정부관리는 중국의 서쪽 지역에 대한 정책이 바뀌는 관계로 더 이상 서쪽으로 여행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팀은 계속 여행허가를 간청했지만, 관리는 여자들과 외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팀은 안전상의 이유로 타클라마칸사막을 통과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위구르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많은 사람이 사막을 건너는 동안 죽었습니다.
알리스 테이러(Alice Taylor)는 회고록에 ‘우리는 매우 완고한 관리의 태도로 결국 칭하이(Qinghai)로 돌아와야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표현했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팀은 함께 기도한 후 그 해 겨울은 칭하이에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서쪽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행은 칭하이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신 것처럼 선한 길을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칭하이에서 전도와 기도로 겨울을 보내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 때, 중국에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 핍박이 시작되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추방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현지그리스도인과 외국과의 연결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외국에서는 백투 예루살렘 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 정권은 중국교회를 말살하기 위한 계획을 체계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마크마’,’메카차오’,’호엔청’은 지하교회에서 은밀하게 사역해야 했습니다.
이후,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으며, 핍박의 기간도 수 십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지속된 환난과 핍박으로 백투 예루살렘 비전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듯했습니다.
눈에 보이던 모든 성과들은 사라졌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비전, ‘예루살렘까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외치며, 간절히 기도하던 헌신 된 이들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꼈습니다. 1940년부터 1950년 초까지의 백투 예루살렘의 비전은 혹독한 핍박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백투 예루살렘 선교여행팀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순수한 헌신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들 가슴속에 있는 구령의 열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백투 예루살렘 비전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었지만 썩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헬렌 테일러(Helen Taylor)와 가족은 노스웨스트성경학교에서 백투 예루살렘팀원을 지속적으로 격려하며, 도왔습니다. 헬렌 테일러는 1948년 칭하이로 일시 철수한 백투 예루살렘팀원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기도요청을 했습니다.
“우리 함께 중국서쪽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사악한 어둠의 영이 세상을 점점 어둡게 하는 상황에서 결코 지치지 않은 하나님의 깃발아래서 복음의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로 죽음과 폭력으로 철옹성같이 단단히 닫힌 복음의 벽을 열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 빛의 행진을 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를 위해 함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 성령 충만한 이 기도 요청은 다시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바라보며, 행진하는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수천, 수 만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국교회가 백투 예루살렘이라는 소명을 충실히 완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중지시킨 것인가?
1940년대 주님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백투 예루살렘의 비전은 결코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백투 예루살렘 비전은 아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실패한 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땅속에 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듯 백투 예루살렘비전은 반세기가 지나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대, 처음으로 백투 예루살렘비전이 중국교회에 알려졌을 당시 중국교회그리스도인은 백만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투 예루살렘 비전도 매우 적은 그리스도인들만 동참했습니다.
신기하게도, 50년이 지난 후 중국교회그리스도인은 1억 이상이 되었고, 현재 중국교회 수 천 만명 그리스도인이 백투 예루살렘 비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하박국2:3)”
여기에 기록된, 백투 예루살렘비전의 초기 멤버 중 몇몇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이들은 모두는 반세기동안 혹독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초기 멤버 중 한 여인은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중국의 서쪽 신장에 살며,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한 자녀들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백투 예루살렘 비전의 선각자 4 - 시몬조(Simon Zhao)
시몬 조(Simon Zhao)는 30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노스웨스트 성경학교에서 일어난 백 투 예루살렘운동의 복음지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40년도 시몬 조는 퀸(Qing) 왕조 때 정부 고관을 지낸 명망 있는 가문의 웬 물링(Wen Muling)이라는 젊은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소비에트 연합의 북서쪽 국경에서 중국 전역으로 복음을 전하는 소그룹을 이끌었으며 이들은 중국이 대외적으로 혼란을 겪던 어려운 시기에 국경선 부근에서 많은 군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다. 또한 산둥성(Shandong)에서 신장(Xinjiang)까지 인적이 없는 사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걸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몬 조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여의었고 어머니가 홀로 아이들을 길렀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 때때로 마을 지도자가 그의 집에 와서 어머니를 유혹했지만 시몬 조의 어머니는 끝내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마침내 사악한 마을의 지도자는 그녀를 강간하였습니다. 어린 시몬은 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해 분노하며 원한을 갚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그가 자라서 군 지도자가 되어 어머니가 당한 일을 되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소용없단다. 군의 지도자도 사악한 마을의 지도자만큼 타락되었단다.” “그러면 저는 군의 지도자 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겠어요.” “소용없단다. 지방 지도자도 군의 지도자만큼 타락되었단다.” “그러면 저는 지방의 지도자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소용없단다. 황제도 그와 같단다.” 시몬은 어머니의 대답에 화가 나고 한편 마음이 상했다. “그럼 누가 황제보다도 힘이 있는 건가요? 정의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의로 심판하실 수 있단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이 되겠어요.” 라고 어린 시몬 조는 대답했습니다.
시몬의 상한 마음은 치유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십대 때 작가가 되었고 글쓰기를 복수의 수단으로 삼아 마을 지도자의 범죄행위를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주님은 그의 삶을 붙드셨고, 그는 더 이상 그의 어머니에게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의 변화된 마음은 삶의 목적을 바꾸었고, 복음의 증거를 통해 세상에 주님을 알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시몬 조는 선양(Shenyang)에서 기도하는 중에 첫 번째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기도하던 당시는 한겨울이었으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문을 열수 없었습니다. 3명의 신도들은 중국 지도상의 신장(Xinjiang) 북서부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후에 시몬 조는 난징(Nanjing) 지역으로 간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장(Xingiang)지역에 복음을 전하라는 비전을 받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나 함께, 사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이미 떠나 신장(Xingiang)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었으며, 시몬이 속한 두 번째 그룹은 난징(Nanjing)을 떠나 산시(Shaanxi)를 경유하여 신장(Xinjiang)으로 여행하였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산동(Shandong)성 출신인 주 콘젠(Zhu Congen)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시몬 조의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신장(Xinjiang)의 동부지역인 하미(Hami)에 도착해, 2년 전에 도착해 사역하고 있던 노스웨스트 성경학교 그룹과 합류했습니다. 1950년도 겨울에 시몬 조는 헤타인(Hetain: 신장의 서부에 위치한 마을)으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들어가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2주 후 Public Security Bureau는 그들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였고 그들은 그 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Kashgar에서 더 서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1950년은 그들에게 혼돈의 시간이었다. 복음이 반혁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군인들에 의해 인계된 시몬은 영문도 모르는 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백 투 예루살렘 그룹의 각 멤버들은 각각 다른 기간의 형을 판결 받았습니다.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매우 혹독한 판결을 받았으며, 그 중 시몬은 사형을 면한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체포 당시 임신 상태였으나 곧 유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59년 여성 수용소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1973년까지 그 누구도 시몬에게 그 사실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Kashger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의 몇 달간, 교도관들은 시몬의 신념을 훼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시몬이 기도하지 못하게 했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때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도를 멈출 수 없었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교도소 측에서는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직 작가였던 그에게 공산주의 계도의 효과를 찬양하는 글을 교도소 신문에 기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교도소 당국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사를 보고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교도관들은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그의 글은 바로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의 스케치였습니다. 교도관들은 그의 등을 무거운 나무벤치로 때렸습니다. 무자비하게 때리며 발로 찼습니다. 지방관계당국은 그에게 더 오랜 기간의 형을 판결하였습니다. 시몬은 강제 탄광 노동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대부분의 수용자들이 무자비하고 고된 일들로 인해 6개월 안팎으로 죽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작고 약한 사람은 결코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양의 석탄량을 요구하였습니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것 뿐 아니라 등에 바구니를 매고 광산에서 그 석탄들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모든 수용자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 14시간씩 일하였습니다. 음식은 빈약하고 고약한 냄새가 났고, 여름에는 숨 막힐 듯이 찌는 듯한 더위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시몬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탄광으로 들어 왔고 그들의 대부분은 시몬 보다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몇 달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시몬은 그의 동료 죄수들에게 그의 신념에 대해 조심스럽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명은 이를 믿게 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에는 몇 명의 목사들도 있었는데 당국에서는 그들에게 모두 다른 방과 다른 일을 주었고, 시몬은 아주 잠깐 동안 그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방문자도 만나는 것이 제한된 상태였다. 그는 집으로부터 수마일 떨어져있는 무슬림 국경 도시에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코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는 하나님의 굳은 약속을 제외하고는 시몬은 매우 외롭고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정반대인 고향의 친척들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침묵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사람들은 거의 그를 생각지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가혹한 시간 동안 그는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이 그에게 비전을 주신 것과 그 비젼은 예루살렘을 향해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그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동역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조금씩 시몬은 백 투 예루살렘의 열정과 불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결코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탄광에서의 고통의 긴 시간 동안 시몬은 거의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국은 신장의 다른 지역에 있는 화학공장으로 그를 보냈습니다. 상업적인 공장이었지만 그들은 노동의 주요한 공급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일은 매일 유독가스와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있어 상황이 좋아진 것이라 볼 수 없었습니다. 일이 끝난 저녁에 감옥으로 돌아온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하게 하여 서로를 좌절하게 만드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국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하였고, 특히 시몬은 이들의 손쉬운 목적물이 되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에 동료들은 그가 난방이 되는 방에 수용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속옷을 벗기고 눈 내린 추운 곳에 그를 세워두었습니다. 그리고 문밖으로 그를 밀며,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 너의 하나님한테 따뜻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그래.”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처음 몇 분간은 추운 바람이 그의 살을 얼려 버릴듯 했습니다. 시몬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곧 무언가 신비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엄청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의 땀이 온몸을 적셨습니다. 그의 발주의의 눈은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열로 인해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감방 안에 있는 동료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그의 몸에서 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와 같은 극적인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혹독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수 백 번씩 그는 무자비하게 맞았습니다. 교도관은 신장지역의 지독한 무슬림 이었습니다. 그 간수는 유독 시몬에게 잔인하게 굴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돼지를 먹는 사람들이라며 싫어했습니다. 후에 시몬은 그 간수가 그를 때린 것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마치 염소를 죽이기 직전에 둘러싸 달려드는 것처럼 대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심하게 맞고 채여 두개골이 파열되고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무의식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절대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의식을 회복 했을 때 그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는 맞았던 머리부분을 만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머리상처의 피가 다 말라있고, 치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그가 감옥 안에 있었던 32년 동안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오직 거의 마지막 몇 년- 그의 나이 60대-동안만 육체적인 고문이 없었습니다. 감옥 안에 있었던 그 오랜 시간 중에, 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길 원했네.
옆구리의 창, 심장의 고통
나는 파라오의 전차를 타는 것보다,
나의 다리에 묶인 족쇄의 고통을 느끼길 원하네.
1981년의 어느 날 감옥의 책임자가 시몬을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복도를 지나 걸어가면서 그는 혹시나 나의 형량이 늘어나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감옥의 책임자는 시몬에게 앉으라 권한 뒤 담배를 피우며 두꺼운 파일을 꺼내놓았습니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정부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어. 국가를 대항한 범죄에 대한 관용을 너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나는 너를 풀어줄 권리를 가지고 있고 너는 이제 자유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얼떨떨하여 감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1981년 시몬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중국은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시몬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어서, 1976년 마오쩌둥이 죽기 전까지 있었던 광기의 문화혁명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혁명당시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광신적인 홍위병(RED GUARDS)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시몬은 힘없는 노인입니다. 그의 몸은 매질과 고문, 힘든 노동으로 인해 매우 쇠약해져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30년 이상 험난한 감옥에서 고생한 것을 사투를 증명하는 깊은 주름이 있었습니다.
중국 전체의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31년 전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감옥에서 출소했을 땐,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살수 있는 작은 방을 구해 중국의 서쪽 끝 카쉬카르(Kashgar)로 겨우 갈수 있었습니다. 31년 만에 출소한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카쉬카르에 있는 작은방에서 몇 달 동안 약속을 지키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며, 조용히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없이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를 살아있게 지켜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시몬은 세상에서는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잠언18장 24절(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에서 말씀하신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로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후 카쉬카르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시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증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단한 먹을 것과 성경을 주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로 시몬을 도왔습니다. 시몬에 대한 소식은 신장에 있는 교회로 퍼져갔습니다. 곧 복음으로 인해 31년 동안 하나님의 힘으로 믿음을 지킨 기적적인 사람이라는 소식이 중국의 다른 지역까지 전해졌습니다.
한편 1960년대 말부터 하나님은 허난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수 백 만 명의 지하교회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넘쳐흐르게 했습니다. 허난성은 ‘중국의 갈릴리(The Galilee of China)’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중국 지하교회의 부흥의 중심지로 알려졌습니다.
허난성의 수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1940년대에 있었던 백투 예루살렘 비전에 대해서 들었었지만 선각자들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습니다. 허난성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31년간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선각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로부터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카쉬카르에서 사역하는 몇 명의 동역자들이 시몬을 만났고, 우리에게(허난성 지하교회그리스도인) 시몬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카쉬카르에 있던 우리 교회의 일원들은 시몬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시몬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시몬조는 감옥에 있는 31년 동안 믿음의 동역자와 이별만을 경험했지만,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깊이 존경하는 정신적인 아들과 딸들을 주셨습니다. 카쉬카르 교회의 자매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하고 빨래를 하며 그를 도왔습니다. 마침내 허난성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버스와 기차를 탔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겸손한 종으로 깨어진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신문을 설립했었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간증이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긴 고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지켜주셨는지를 나눌 필요가 있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항상 “나는 나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거절했습니다.
1950, 60, 70, 80년대까지 백투 예루살렘 비전은 거의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은 생존을 위해 힘쓰고 기도하던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1990년 초 하나님께서 시몬에게 50년 전에 주셨던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우리들에게 다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시몬을 설득하기 위해 드보라(Deborah) 자매를 시몬이 있는 카쉬카르로 보내었습니다. 시몬과의 출발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서쪽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부르셨어요, 여기는 중국의 가장 서쪽인 신장입니다. 적어도 나는 서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어요. 그런데, 왜 내가 예루살렘과 더 멀어진 동쪽(허난성)으로 가야 합니까. 나를 카쉬카르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드보라는 매우 고집 센 자매였습니다. 그녀는 시몬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따라다녔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어 허난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허난으로 가시는 것이 전투의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교회 가운데 다시 백투 예루살렘의 비전이 다시 불붙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시몬이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나누어준다면, 수 천명의 신실한 주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몬은 자신이 그녀와 함께 허난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보라 자매에게 완고한 고집을 주신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동쪽으로(허난성)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31년간 감옥 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새롭게 치료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경구절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이사야 54장 1절에서 5절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시몬은 중국을 가로질러 허난으로 돌아오는 4일 동안 기차를 타고 오며 잠잘 수 있는 침대칸 자리를 마련할 돈이 없어 작은 공간에서 신문지 위에 웅크려 허난까지 도착했습니다.
시몬이 허난지역의 지하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능력이 충만했으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감격이 넘쳤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성도들은 선교사로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의 더욱 열심히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긴 흰머리와 수염을 가진 주님의 성자처럼 보였다. 시몬을 통해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백투 예루살렘의 비전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백투 예루살렘 비전을 완성하기 위해 지도자들 마음 가운데 무거운 부담감을 주셨습니다.
시몬은 2001년 12월 7일, 사랑하는 주님의 성도들 사이에서 83세의 나이로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그의 삶은 돌아보면 주목할 만 합니다. 그는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신 원대한 꿈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완성되기 전에 그는 31년간 감옥에 갇혔으며, 기나긴 침묵 속에서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는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는 침묵만 존재하는 감옥 속에서 있었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시몬에게 보여주신 동일한 백투 예루살렘비전을 중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뿌리셨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께서는 시몬에게 20년간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중국가정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은 시몬조를 주안에서 가장 존경했으며, 하나님은 시몬을 천국의 왕자처럼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장 29절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이 시작하신 위대한 계획을 마침내 끝내시며, 언제나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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