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목회학(牧會學) 원론(原論)

수호천사1 2009. 7. 26. 19:02

목회학(牧會學) 원론(原論)

-에드워드 투르나이젠, 박근원 역-


제1장 신학과 교회의 문제로서의 목회

1. 서론


목회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그 본질이다. 교회의 모든 정통적인 기능과 마찬가지로 목회도 교회에 주어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1) 목회의 장소


목회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2) 목회의 바탕


목회는 하나의 신학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교회의 문제로서 대두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목회의 이론을 정립하려할 때, 그 바탕을 살펴보아야 한다.


3) 목회의 위치


목회의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교회 안에 자리할 목회학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 하는 점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4) 목회의 중심


말씀의 선포 즉 설교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목회의 중심이 된다. 선포하는 행위 즉 설교가 모든 실천신학의 본질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2. 설교


1) 신학의 전반적인 과제는 말씀을 다루는 일이다.


a. 역사신학(historische Theologie)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석(Exegese)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교리사 및 교회사로 범위가 좁혀질 경우 하나님말씀에 대한 이해이다.

b. 조직신학(systematische Theologie)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깃들어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견주어 발굴하고 다시금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c. 실천신학(die prakttische Theologie)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선포와 그것을 인간이 듣는다는 사실과 그것이 바로 학문의 대상이며, 또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곧 실천신학이다.

2) 교회의 설교

 

교회의 설교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목회행위이다. 설교는 여러 가지 신학 분야들이 취급하는 수많은 기능들을 다 내포하고 있는 선교행위이다. 그 중에서도 선포하는 행위를 본질적인 의미에서 설교라 한다. 이 설교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설교학(Homiletik)이라 부른다. 이 설교학에는 필연적으로 성례전(Sakrament)과 기도(Gebet)가 포함된다.

 

a. 예배학


교회의 행위인 기도하는 방법, 설교로 표현되는 말씀과 관련하여 연구하고 가르쳐야하며, 또 그것이 개개인의 생활 속에 적용되며,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배를 총괄적으로 다루는 ‘예배학(Liturgik)’이다.

b. 교회교육학


말씀이 진정으로 선포되기 위하여 넓은 의미에서 아직 말씀을 듣기에 미숙한 신자들에게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 속에 담겨진 용어들과 진리의 표현들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것이 실천신학에서의 ‘교회교육학’이다.

 

c. 선교학


교회의 설교와 세례 그리고 성찬으로 대표되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선포활동이 아직도 공동체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그것들이 교회의 설교 및 공동체로서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만 지속된다면 국내선교의 장애인 세속화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가 선교로서의 특성을 갖게 된다고 본다. 교회가 이러한 사역으로부터 탈선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연구와 함께 자선행위까지 포함된 포괄적인 의미로서 ‘선교학’을 말할 수 있다.

 

d. 교회학(목회학)


설교, 교육과 국내외 선교활동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여기에 교회의 기능과 건축 그리고 확장을 등이 포함된 것을 ‘교회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목회학’이라 할 수 있다. 목회학이란 교인대중을 향해 선포된 메시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전달하는 것이란 뜻이다.

3. 목회

 

1) 목회의 정의

 

a. 목회가 설교와 성례전을 대치(代置)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필연적으로 동반(同伴)한다. 목회는 설교와 세례 및 성찬을 받음으로써 야기되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교회가 갖추어야할 부차적인 기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b.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되, 개인을 중심으로 한 형태로 하는 것이다. 소위 선각자들 가운데서도 루터파 소속인 ‘뢰에’가 목회와 설교의 상호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잘 다루었다.

2) 목회의 본질

 

a. 설교를 하고 교리 문답을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흔히 사용되어지는 일반적인 수단만을 견지하는 한 그것은 목회를 협소한 의미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목회’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첨가될 성질의 것이다.

b. 목회를 담당하는 사람은 꼭 안수 받은 설교자만은 아니다.

 

확실히 말해 그것은 안수 받은 설교자의 특수한 임무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교회전체가 다 목회에 참여하며 또 그것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다.

 

c. 목회의 영역과 그 구분에 대한 모호성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꼭 있어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과 이론의 신학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없다. ‘뢰에’는 설교와 예식을 중심한 예배만을 대상으로 하여 목사의 역할을 아주 협소하게 정의 내린 사실을 예로 들 경우 그는 정말 설교, 예식, 그리고 순수한 경험적 바탕 위에서 본 성례전 등에 목회를 첨가시키고 있지 않다. ‘뢰에’는 목회의 한계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고있다. 그러나 목회를 일반적인 것으로 보고 설교, 교리문답, 예식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크리스찬 파머’는 19세기 부르조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처럼 설교를 “위대한 왕을 모신 식탁에서 교우들이 모여 만찬을 베풀면서 행하”는 일종의 탁상담화와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스무센’도 목회대화를 세례준비, 결혼준비, 병자방문의 경우에만 한정시켜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나 세례나 장례가 아닌 경우에도 내적 고민을 상담하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3) 목회의 영역

 

a. 아스무센(Asmussen)


그는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목회말고 ‘영적지도’란 큰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교육’이란 말과 다를 바 없으며 나아가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 등과는 관계가 없는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

 

b. 베노아(Benoit)


그는 실절적인 목회 즉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 등과 ‘영적지도’구별하면서 전자는 결코 목회라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스무센은 개인목회와 말씀의 선포를 강조한 반면에 베노아는 말씀 선포보다는 오히려 교훈과 윤리생활 즉 도덕적, 지적, 변증적 또는 종교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영적지도자로서 갖추어야할 정서적인 역량이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아스무센과 견해를 같이 한다.

 

c. 휠마르(Vilmar)


그는 목회를 목사의 직책과 교회 장로들의 직분으로 한정시켜 목회를 가정과 교회 전반에 걸친 훈련을 증진시켜주는 행위로 설명한다.

 

d. 슈타인마이어(Steinmeyer)


그는 퉁명스럽게 개인 가정의 공기는 성직의 영광을 펼칠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목사가 개인 가정을 심방할 때에는 엘리야가 입던 두루마기가 어깨에서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4) 개인목회

 

a. 뢰에(Wilhelm Lohe)


a) 설교를 통한 목회를 실시했다.
b) 성만찬 이전에 회개를 요구했다.
c) 영적으로 완숙된 강력한 기도를 드리도록 요구했다.

 

b. 하름스(Claus Harms)


a) 그는 목회의 세 요소로 설교자(Prediger), 제사장(Priest), 목사(Pastor)를 언급한다.
b) 목사의 역할에서 그는 설교와 성례전 집행이라는 역할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다면서 그는 목회의 범위를 “슬픔이나 기쁨을 만나 특별한 격려를 필요로 하거나 또는 기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고 한정시켜 주장한다.

 

c. 경건주의 목회


a) 경건주의는 “개인목회”를 끈질기게 추구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리고 목사와 교회의 직책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지향한다고 본다. 경건주의는 심지어 설교와 성찬 배찬을 그것이 개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평가한다. 뢰에와 휠마르에게 있어서는 교회란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 즉 개개인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 지체로서의 개인들이 모인 장소이다. 개인은 오직 교회 공동체의 지체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b)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경건주의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고 회개한 개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깨우침을 받고 세례 받는 개인이 아닌, 깨우침을 받은 개인이다. 이처럼 교회는 깨우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총화를 뜻한다. ‘개인목회’라 할 때 ‘개인’이란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하나 개인적인 설득을 통하여 개개인의 양육과 성장을 중심으로 목회운동을 벌렸던 스펜서, 프랑케, 특히 진센도르프의 경건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d. 경건주의가 강조한 목회


a) 심방
b) 개인적 대화
c) 구역집회 및 서신왕래

 

e. 루트비히 호파커(Ludwig Hofacker)는 위대한 설교자였다.


a) 그의 설교는 각자가 속히 각성하고 회개하라는 강렬한 호소를 담고 있다.
b) 그는 설교말고도 개인목회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c) 그는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일하는 경건주의적 목사의 한 전형이었다.
d) 그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자신은 물론 하나님과 내적인 대화(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어디서 끝나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는 항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깊이 터득하며, 그것을 항시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기록해 두었다.
이러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자기 반성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장해 나갔다.

 

f. 휘마르(Vilmar)


그는 그의 저서에서 “경건주의에 흡입된 많은 목사들은 특히 젊은 목사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영적 체험을 토대로 불편 부당하게도 자기들의 체험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교인들의 신뢰를 얻기에 열을 올린다. 그들은 개인의 체험을 기쁘다는 듯 내 뱉는다. 이것이야말로 목사의 영적 생활을 말장난과 거짓말로 손쉽게 해소시키려든다”고 공격을 퍼붓고 있다.

 

g. ‘뢰에’와 ‘휠마르’ 그리고 ‘하름스’


a)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먹이고 살찌게 하며, 일깨워주고, 또 영혼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b) 그러나 경건주의 목회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가치가 훼손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c) ‘뢰에’는 “전통적 수단”에의 충성이나 현대인에게는 별로 관심거리가 못되는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하나님의 말씀”(휠마르)이란 것이 무슨 뜻을 가질 수 있겠는가를 비난하고 있다.

 

h. 경건주의 목회의 본질


a) 경건주의는 성서를 새롭게 발견하고 성서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한 복판에 갖다 놓음으로써 합리주의와 투쟁을 벌인 바도 있다.
b) 다만 경건주의는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학생이 선생 앞에 서듯, 그것을 읽는 학생이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지 못한 점이다.
c)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며, 그럴만한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4. 결론

 

말씀과 그 내용을 소유함으로 인하여 영적 생활을 확보하고 또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 맡겨진 말씀이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의 영적 생활, 즉 말씀으로 일깨움을 받는 개개인과 그 개인적인 경건이 아주 중요시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말씀의 독자성이 변질될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건주의 과오를 지적하며 또는 경건주의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비판이 경건주의적 목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경건주의적인 형태의 목회가 문제일 경우 목회자체까지도 문제가 될 수 는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을 전제로 하는 종교개혁의 교회는 목회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도 못한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자체가 영혼구원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고 그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은 일종의 목회운동이다.
그렇다면 목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목회는 목회대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적인 경건을 압도하여 유일한 가치를 지니는 목회, 그리고 인간은 항상 그 말씀의 학생이 되는 그러한 목회여야 한다.


제2장 교회훈련으로서의 목회

목회란 하나님은 개개인을 결단코 포기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믿음 안에서 각 개개인들을 설교와 성례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주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며. 교회 안에 삶을 보존시켜 주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교회를 형성하고 생존하게 하며 개개인을 영적인 타락과 부패에서 건져내어 삶을 보존시켜 주는 성화와 훈련의 행위이다.

1. 교회훈련에 대한 고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탕으로 삼고 있는 목회의 목적과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교회훈련의 개념과 실상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뢰에(Lohe)와 휠마르(Vilmar)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건주의(Pietismus)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의 디딤돌인 교부들까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1) 개혁교회(die reformierte Kirche)의 창시자들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burg)에 체재하는 동안 부처로부터 배운 말씀과 성례전으로 뭉쳐 있는 교회는 순수하고 생동력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기독교강요 제4권, 1559). 교회 훈련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이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훈련은 커다란 동경의 대상이 된다. 훈련은 몸의 지체로 하여금 서로서로 묶어져 살도록 역할을 하며 각자의 위치를 올바르게 설정해 준다.

2) 교회훈련의 정의

 

교회훈련은 개개인들에 대한 인격적 권면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설교(성례전을 포함한)라고 생각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곧 교회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훈련이 “교회의 연륜 깊고, 정상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뢰에의 주장 역시 칼빈의 주장에 버금간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훈련에는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회는 즉각 파멸되고 만다고 주장한다. 교인들간의 전체적인 조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씀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으면 개개인을 향한 권면, 즉 목회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칼빈은 당시 교회가 이러한 훈련이 결핍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절실한 구원의 손길을 호소한 것이다.

a. 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

 

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는 직선으로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그려볼 수 있다. 교회가 실제로 말씀과 은혜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 즉 교회훈련이 말씀을 대체할 수는 없다. 목회는 말씀의 일깨움을 받으며, 그 말씀을 뒷받침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주며, 각 개개인이 스스로 말씀아래 서서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러한 가시적인 행진이나 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가시적인 질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부르셨고 또 항상 새롭게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의에 따라 선택했다는 사실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다.

 

루터는 칼빈보다 더 강경하게 그리고 쯔빙글리보다도 더 강경하게 그리고 이 둘 보다도 훨씬 더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이 교회를 세우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과 신앙만이 교회의 바탕이요, 유일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바탕을 말하는 가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강경하고 분명한 어조로 교회는 “신앙을 통해서만” 항상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말씀과 설교를 통한 신앙만이 구제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신앙을 지니고 살게하는 가시적조직 또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루터는 철두철미한 교회의 불가시성 즉 하나님의 말씀이 태영광선처럼 하늘로부터 아래로 꿰뚫고 들어오며 바로 그런 현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참된 교회에 대하여 말씀과 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체

 

설교자와 성례전이 집행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수립되어야 한다.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마시게 하는 성만찬을 드는 이 모든 행위가 다시금 반복된다는 사실은 곧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임과 동시에 말씀이 역사하고 인간이 그로부터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설정된 설교와 상례전의 확증과 어떤 규범을 갖추어야한다.

3) 교회훈련의 위치

 

교회훈련이란 말씀과 성례전으로부터 출발하는 능력이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구체적으로 역사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아 알게 하는 행위이다.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모른 채 단순히 말씀과 성례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말씀과 성례전이 어떻게 삶으로 이어지는 가를 눈여겨보지 않은 채 말씀과 성례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다 볼 수 없으며 교회의 지체들이 교회란 공동체와는 떨어져 살고, 구체적인 삶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훈련을 시켜야 한다.

 

a.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장

 

언제나를 막론하고 신자들의 모임이며 동시에 그들 가운데서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거룩한 성례전이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집전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며 그 교회는 계속하여 존속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b. 칼빈

 

a) 정당한 신앙고백을 할 것
b)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것
c)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설교는 물론 성만찬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강건해질 것 등이다.

c. 마틴 루터

 

하나님은 은혜가 풍부한 분이다. 첫째로, 쓰여진 말씀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세계 속에 선포하며 둘째로는 세례를 통하여, 셋째로는 제단의 성스러운 성례전을 통하여, 넷째로는 열쇠의 힘을 통하여 그리고 형제의 상호교제와 위로를 통하여 이룩하신다고 했다.

4) 교회훈련(목회)의 역할

 

a. 카톨릭교회

 

a) 목회를 본질적으로 고해의 형태로 이해하고 이것을 제도화 시켜 놓았다.
b)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이 성례전이며, 이 성례전은 미사제물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니며, 설교는 성례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c) 카톨릭의 목회는 교회 자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d) 이러한 목회의 역할은 개신교회가 말하는 교회훈련과 그 성격이 다르다. 참된 회개 즉 진정한 구원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말씀과 성만찬의 성례전을 바탕으로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b. 칼빈

 

복음설교를 “교회의 혼”이라 하고 교회훈련을 몸의 지체가 함께 모여 공동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고리”와 같은 것으로 지칭한 사실을 기억한다.

 

c. 루터

 

슈발칼트 신조에서 열쇠는 잘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즉 모르고 진 비밀에 쌓인 죄까지도 매고 풀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여한 직책이요 능력이라고 말한 사실도 기억한다. 동시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 열쇠의 위력이 말씀과 성례전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소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 열쇠의 능력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d. 뢰에와 휠마르

 

목회는 설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교회에서 개인을 상대로 한 대화를 제외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교회 전체에 전달된 말씀을 강조하고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다.

5) 열쇠의 직분인 교회훈련

 

a. 루터

 

루터는 열쇠의 직분이 교회훈련이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고 본다. 목회 자체가 결단코 설교나 성만찬과 대등한 위치와 가치를 점할 수는 없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때 들려지는 곳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며 그것은 동시에 열쇠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표징인 것이다.

 

b. 칼빈

 

기독교강요 3장(1536)의 “거짓 성례전의 고해에 관하여”라는 항목에서 회개는 철두철미하게 개인적인 성례전적 행위이며 동시에 그것 자체가 죄의 용서를 이루어낸다는 주장에 강력하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는 의사이다.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자. 그는 상해를 입었고 찔림을 당했다. 그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자. 그는 마음을 찾으시며 모든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자. 그가 죄인을 부르고 계신다. 지체말고 그에게 가까이 가자”

 

c. 종교개혁자들

 

목회적인 교회훈련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한 어느 모로든지 구체적인 형태를 떠는 한 질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이것을 “죄와 악한 양심을 누르고 도움과 위로”를 베푸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칼빈은 교회훈련의 목적을 분명하게 악을 행하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하고 선한 지체들은 멸망에서 건져주며 죄인들을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 몰아쳐 넣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칼빈은 어느 정도의 한계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그는 교회훈련이 항상 세심하게 그리고 한계를 명확히 지키면서 이루어져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말씀과 성례전을 완전히 기능화 시킴으로서 위태로운 궁핍과 부패를 치료해주는 역할로서가 아닌, 교회의 일탈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6) 목회의 성격

 

목회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교회 내지는 회개훈련의 위력에 대하여 확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훈련과 목회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할 때 목회는 결코 죄를 용서하거나 거부할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못박아야 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아야 할 것이다. 믿거나 아니면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할 때 생기는 일이다. 불링거(Billinger)가 기초한 “제2헬베틱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 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천국열쇠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칼, 창, 검, 왕관을 연금하여 몸과 혼을 다스림은 물론 가장 위대한 하나님나라까지를 좌지우지 하려든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우리 주님의 말씀 위에 서서 교회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천국열쇠를 소유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이 열쇠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하려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말씀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설교자는 다만 이 말씀을 전달하는 자일뿐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열쇠의 위력을 발휘할 뿐이다. 교회훈련은 이것과는 다르다. 교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할 뿐이다. 비록 이것이 위축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와 공공생활의 환경에 몸담고 있는 교회를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훈련을 실천해야할 의무가 있다.

3. 결론

 

1) 교회훈련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대와 중세기 교회의 언어를 사용하는 ‘교회훈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것이 무언가 모자라는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교회훈련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교회도 없는 것이다.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백성으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교회훈련이라고 하면 교회가 갖는 외적인 형태 즉 교회의 모습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개인별 대화

 

개인별 대화의 형태로 계속하여 탐구되고 연구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인별 대화는 교회가 설정한 질서를 개개인이 책임적으로 수호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는 그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러한 처신을 할 수 있는 복종의 자세가 마련되어 있는지를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3) 목회의 개념

 

‘목회’라는 개념을 ‘교회훈련(Kirchenzucht)’이란 개념으로 정의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훈련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목회가 전적으로 교회훈련이란 각도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훈련은 목회가 의미 있게 수행되는데 필요한 여건을 제공해 준다. 목사와 교인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에 속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회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방금 전에 내린 정의대로 하면 이런 식의 대화가 목회의 정당한 성격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목회의 바탕은 바로 교회훈련이다. 목회를 현대심리학이나 일반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영혼치료’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목회는 ‘영혼’이 무엇이며, ‘돌본다’는 말이 영혼의 경우 무엇을 뜻하는 가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4) 목회훈련

 

목회훈련이라고 말할 때, ‘훈련’(Zucht)이란 개념을 얼핏 보아 목회의 개념과 무관한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은 ‘학교(Schule)’라는 뜻의 'disciplina'에서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선생은 바로 성서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좀 도덕화된 의미의 ‘훈련(Zucht, discipline)’이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훈련에 관한 가르침(disciplina)이 성서를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사롭게 그리고 공중을 향한 선포를 통하여 개인들을 부르셨다는 말을 규명하면서 항상 성서를 말한 사실을 기억한다.

5) 목회의 내용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수한 형태로 전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다름이 아닌 사죄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성화(聖化, Heligung)시키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회는 결코 성례전적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고해성사의 성례전을 다시 수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자격은 목사가 아닌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하신다. 그런 점에서 목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는데 따라 섬기는 것이요 설교와 성만찬을 통하여 그 말씀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6) 목회의 영역

 

결국 목회는 ‘교회’(Gemeinde)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말씀에서 출발하여 말씀으로 되돌아간다. 목회는 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목적으로 삼는다. 그 목회는 임명을 받은 자의 선포행위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목회자의 필수적인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목회는 교회 안의 지체들끼리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직책을 맡은 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란 몸의 직책만이 아닌 한 지체로서도 목회의 전제가 충분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형제 된 입장에서 다른 형제에게 실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목회가 모든 지체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교회의 표징들 가운데 궁극적인 전제가 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영이요, 이 영만이 말씀을 생동력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목표는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있는 그의 교회를 위하여 사람들을 얻어 들이는 일인 것이다.


제3장 목회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영혼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일이다. 그런데 목회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속에 있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마련인 몸과 “영혼(Seele)"과 정신이 하나가 된 인격적인 전인(全人)으로서의 영혼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인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목회는 하나님을 위한 전인(全人)의 성화(聖化)를 과제로 삼는다.

1. 서론


1)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주는 일이다.


인간의 영혼이라고 할 때, 영혼의 개념은 물론, 이 영혼이 돌보아 진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목회라는 입장에서 인간의 영혼을 문제시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생물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과학적 인간학(naturwissnschaftliche Anthropologie)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적인 이상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도 아니며 오직 순수한 신학적 인간학(theologische Anthropologie)을 말한다.

2) 영혼의 개념


창 2:7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적 인간학이 말하는 영혼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한다. 루터는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랬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 여기서는 바로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혼의 사람을 현재의 모습이 되게 했다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즉 한 육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영혼(lebendige Seele)”으로서의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좀 더 특별한 하나님의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작업을 말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루터의 번역대로 ”살아있는 영혼“이 된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계획된 대로의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이제 육과 영이 이미 주어진 대로의 하나님의 전인(全人)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2. 본론


1) 인간의 영과 육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과 육의 구별과 이 둘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라는 점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혼은 육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주권적인 실체이다. 영혼은 단순한 육의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도 역시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는 부분이지 결코 종속물이 아니다. 즉 부속품도 아니며, 기생(寄生)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을 감싸고 있는 감옥도 아니다. 영과 육은 똑같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인간의 본질은 모든 특성과 본능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 사람에게 생가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신 존재이다.

2)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생기는 곧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란 곧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육과 영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에게 영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림 받은 삶”을 살아간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피조성’(被造性, Geschopflichkeit)이라 한다.


3) 인간만이 유일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커다란 피조물의 공동체 즉 ‘자연’(Natur)속에 함께 몸답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특별한 존재이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30)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도 성서적으로 보면 육과 영혼을 함께 지니고 있는 하나의 “육”(Fleish)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것이다(창 2:7).


a. 하나님의 형상


형상이란 우리의 노력의 바탕이 되는 이상이나 내가 지켜야할 법이나 내가 완성해야할 목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이다. 즉 형상이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신분이며, 이 신분과 일치된 나의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신분과 태도는 결코 자연적, 생물학적, 역사적 또는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는 신분이요, 태도이며 원상태(原狀態)이다. 이것은 하나의 실재이며 인간이 현재의 인간으로 만들어진 실재이다. 또한 신분이나 태도가 가진 내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받은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인격을 지닌 존재 곧 “나”가 된 것이다.


b.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악용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과 하나님과 그 자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가리켜 ‘자유’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작은 하나님이 되어 뜻하는 대로 무어이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자유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고 악용한다고 한다면, 그는 그 자유를 잃을 것이며, 그를 이러한 악용에서 생기는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새롭게 개입해야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제2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창조하셔야 할 것이다.


c.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결코 기계적인 생산이 아니다. 또한 유출(流出)도 아니다. 단순한 고안이나 상상이 아니다. 그의 창조는 바로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d. 하나님 앞에 선 책임적인 인격


제3용어인 "Pneuma"(영, 靈)란 말은 곧 영(Geist)이란 뜻이다. 이 "Pneuma"란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존재를 뜻하며 그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위치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혼(Seele)이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일어나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에서 보면 인간의 실존을 이처럼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설명한 구절을 많이 볼 수 있다(비교, 살전 5:23, 고전 2:14). 여기서는 인간의 “Seele”적 존재와 "Pneuma"적 존재를 구분하여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하나님의 "Pneuma"에 의해서 이끌려 살아가지 못하는 단순한 육적 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Seele”란 말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Pneuma"와 같이 쓰여진 곳도 있다. 마 16:24-26 가운데 인간 영혼(Seele)의 무한한 가치를 말씀하시면서 “Seele”가 전체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게 되고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임을 아는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서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신학적 인간학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존재를 육과 영혼, 외적 존재와 내적 존재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점에서는 자연적, 생물학적, 심리적, 인간학과 견해를 같이하지만 전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내적, 외적, 존재 및 영혼, 육의 복합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점에서 후자와는 달리 새로운 특이한 입장을 견지한다. 성서적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을 구별하기는 하나 전혀 다른 구별 즉, 인간이 전체적인 삶으로 맞이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라는 위대한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놓고 영혼과 육, 영과 본능, 신적인 영역과 악마의 영역으로 구별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 존재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중성과 모순성뿐만 아니라 항상 피조물을 부러 세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바탕으로 인간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자연과학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을 인간 스스로에서부터 이해하고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도 없이 영혼과 육을 구별하고 동시에 그런 인격적 구조의 자동적인 통일을 주장하는데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간 본성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피조성’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 스스로의 인간이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4)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a. 단절된 관계의 회복


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운명에 빠져버린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상실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은혜는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존재로서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한 그의 고통도 종식될 것이며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한번 부름 받은 것이다.


b. 인간인식 곧 은혜의 인식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그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즉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내가 그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 내어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자신 사색도 아니며, 꿈도 아니며, 인간의 상상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인식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을 입고 오심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본래적인 형상”(골 1:15)이 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분이기에 그는 제2아담이 되셨고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를 악용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신학적 인간학은 항상 그리고 철두철미한 “그리스도론적 인간학”(Christologische Anthropologie)인 것이다.

3. 결론


1) 목회는 인간의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해 진다.


인간이 목회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을 자세히 다룬 이유는 그 인간의 바탕, 본질, 성취에 따라 목회가 결정되고 실행되는 것이며 목회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참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을 바르게 안다는 것이 곧 목회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와 부르심의 위대함, 그리고 심각한 인간의 타락, 타락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그것은 바로 우리들 항상 새롭게 경악시켜 갈 것이다. 만일 목회활동이 이러한 경악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목회활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 이러한 진정한 목회이해는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정한 인간이해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신앙의 눈으로 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는 성서를 통하여 목회의 대상인 인간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말씀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목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열려질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a. 말씀선포


인간을 돌보는 일은 곧 말씀을 인간에게 먹여준다는 뜻이다. 말씀선포는 곧 목회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말씀 선포는 곧 대중을 상대로 하는 동시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b. 목회대화


목회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임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므로 목회가 하는 선포의 내용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인 것이다. 목회에서는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은혜가 강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대화는 ‘투쟁적 대화’요, 목회자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그리고 인간의 문제해결을 위한 투쟁자가 된다.


c. 목회의 과제


목회학은 이런 대화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의 과제는 인간의 육적 영적 본질과 용서의 말씀이 죄와 죽음과 투쟁을 벌리는 전장을 진지하게 염려해 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학의 과제는 인간생활을 중심한 ‘심리학과 병리학’과의 대립되는 관계이다.


3)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성화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일을 성화란 개념으로 파악한 바 있다. 성화란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서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요구에 마주 서는 삶이 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성화를 통하여 죄 가운데 잊지 않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의 결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이 새로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에 대해 투쟁을 위하여 불러주신 계명(Gebot)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이렇게 목회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그 명령에 인간을 복종케 하는 일을 뜻한다. 결국 목회학은 회개와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며 목회대화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본질로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목회의 대상인 인간을 참되게 인식하는 데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제4장 목회에 있어서 인간이해를 위한 노력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의 노력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성서에 의한 인간이해는 어떠한 인간 이해와는 대립관계에 있다. 그런데 목회의 이론과 실제는 전제되어 있는 인간이해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형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이해의 성격이 목회의 본질을 결정해준다.

1. 경건주의 인간이해


1) 경건주의 이해


a. 경건주의란 16, 17세기를 풍미하던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여러 갈래로 그리고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추진된 각성운동을 총칭한다.
b. 경건주의가 역사적으로는 복잡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나 어떻게 보면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c, 경건주의는 같은 시대에 일어났던 합리주의 운동과는 다리 정통주의 이론 자체를 문제시 하지는 않았다.
d. 정통주의의 핵심은 바로 ‘의인론’이었다.
e. 여기에서 경건주의는 사죄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바탕으로 새롭게 부각시켜 합리주의의 홍수 속에서도 진리의 변질을 막는 데 기여했다.


정통주의는 의인론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셨고 그를 재창조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 이루지 못할 일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행하신 것이다. 즉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다고 한다.

2) 경건주의 문제


a. 하나님에 의한 해방을 문제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b. 방향을 새롭게 바꾸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그 행위가 나타나는 인간에게로 강조 점을 옮긴다.
c. 은혜가 갖는 유일한 효율성과 자유가 중심에서 밀려나는 대신 이 은혜를 받는 인간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d. 관심의 방향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고 성별 된다는 의인행위(義認行爲) 이상으로 성화(聖化)에 그리고 이것을 인간이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향하고 있다.
e. 인간이 참회하고 회개하는 인간의 역할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의 소산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는 말이다.
f. 성화가 독자적인 대상이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위에 덧붙여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있다.
g. 실상 의인(義認)은 인간의 삶 전체를 휘어잡아 회개와 참회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으면서 그 의인과 함께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행위, 즉 의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추가해야 할 어떤 새로운 행위(=성화)를 들추어 강조하는 것이다.

3) 경건주의 운동


a.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 내지는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로와 대등하게 그리고 심지어 그보다 우월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 경건주의는 조잡하고 냉엄한 정통주의 이론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c. 그러나 경건주의가 일깨우려 한 것이 실은 진정한 의인의 내용과는 성격이 다른 것 그러니까 안 하니 만도 못한 것이다.

4) 경건주의 목회


a. 경건주의목회란 성화와 관계를 맺고 있다.
b. 목회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한 말씀의 선포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선포자체를 가장 강요한 점에서 특징이 있다.
c. 그들은 성화가 하나님과 똑같이 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으나 이것은 인간의 영을 통해서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곧 아주 다듬고 다듬어진 인간의 역사란 모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d. 은혜를 받는 데에는 인간의 역할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성화가 인간적인 측면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e. 성화란 바로 은혜의 역사에 인간이 완전히 참여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은혜를 받고 내가 그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내가 회개하고 참회한다는 것이다.

2. 성화


1) 인간의 성화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a.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되고 다시금 창조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화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나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된 것이다.
b.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역사가 한 순간이라도 잃어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c. 그는 바로 내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주체자로서 행동하는 곳에 와 계시다.
d. 내 죄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2) 경건주의 목회가 성화를 인간행위에 중심을 둔 것은 위험한 주장이다.


a. 인간과 인간행위를 중심으로 하여 강조 점을 옮겨 잡게 되면 결국에는 치명적인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b. 죄를 용서하는 능력과 죄를 짓는 능력이 서로 맛 붙어 싸운다는 사실말고는 달리 성화를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c.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등의 왜곡된 투쟁으로 설명하고 말 것이다.

3) 성화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


a. 성화는 은혜를 통한 인간 자체 내의 투쟁이다. 즉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 정신과 본능, 선과 악, 영과 육의 투쟁이다.
b. 이러한 투쟁은 은혜의 결과로 필연코 인간 속에 일어나고 만다.
c. 성화는 죄와 싸우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인간 자체 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라는 형식 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4) 성화를 위한 인간의 투쟁


a. 투쟁은 실제로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의 투쟁이다.
b.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결전을 벌린 투쟁이다.
c. 예수그리스도와 암흑의 세력과의 투쟁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기피할 수 없는 투쟁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d. 본질적인 투쟁 즉 인간 내부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골고다 언덕과 부활의 아침에서 결판 또는 투쟁의 반영일 뿐이다.

5) 경건주의 목회의 위험성


a. 인간 내부의 투쟁과 똑같다고 여긴다.
b. 십자가와 분리시켜 생각함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c. 그리스도와 그의 행위를 인간의 행위와 동일시하고 있다.
d.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위에 있는 것과 아래 있는 것의 투쟁을 아래 있는 것끼리의 투쟁과 혼동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
e. 용서받은 것을 심리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게 된다.

6) 종교개혁사상


a. 죄인이 사죄 받았다고 해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b. 오히려 항상 새롭게 사죄를 받음으로서 다시금 죄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c. 그리스도인다운생활이 발전을 이루고 정화 속에 성장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죄인임을 좀더 깊게 그리고 실감 있게 의식하나 그것을 은혜의 능력 속에서 인식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d. 성화는 죄가 강력해지나 은혜는 이보다 훨씬 더 강력해지는 현실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나의 영역 속에 들어와 나를 바탕으로 성취된다는 인식이 구체화된 현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7) 루터의 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a. 나는 죄인이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오직 은혜만 먹고사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b. 인간은 죄와 투쟁하는 존재이므로 필연코 앞서 말한 투쟁이 일게 마련이지만 이 투쟁은 결단코 사죄 다음에 따라 앞서 나와 완성을 기해주는 식의 부차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c. 투쟁 자체에 사죄가 내포되어 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결단코 투쟁과 용서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d. 내가 이러한 투쟁을 감수한다는 말은 곧 내가 은혜를 힘입어 복종한다는 말이다.

8) 정통주의신학이 경건주의 목회를 거부한 이유


a. 성화란 유일한 성별의 역할을 하는 사죄의 은총을 전진적으로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계속하여 사죄를 누림으로서 죄를 피하고 미워하는 길이다.
b. 이것은 다시 구체적인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도 된다. 이 승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는 표징인 것이다.

9) 테르스테겐 - 테르스테겐의 신비주의와 카톨릭교회의 목회가 아주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a. 영혼을 인간 속에 스며드는 심층으로 보았다.
b. 심층 속에서 인간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한다는 것이다.
c. 이것은 은혜와 전혀 다르다.
d. 심층이 바로 바로 인간의 낮은 감각적 본성과는 반대인 진정한 본성인 것이다.
e. 이러한 심층적 본성이 하층의 감각적 본성과 싸울 때 투쟁이 생긴다.


3. 카톨릭과 인간관과 목회관


1) 인간관


a. 은혜가 위에서 꼭 닫아 놓고 있는 이상 아래에 있는 인간이 마음대로 열 수가 없는 것이다.
b.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는 않고 하나님에게 복귀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창조 받을 때 그리고 지금도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는 사실이 바로 카톨릭 신학이 종교개혁 신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요인이다.
c. 카톨릭의 신관과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하여 인간에게 임한다.

2) 카톨릭의 목회


a. 인간 속에 잠자고 있는 이 능력을 일깨워 준다.
b. 인간의 이 영혼의 불길을 불붙여 준다.
c. 인간의 영적 능력을 활용하여 내면적 투쟁을 이끌어 간다.
d. 육과 죄와 결전을 벌려 자신의 “영혼”을 일깨워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3) 루터와 칼빈의 인간이해


a. 인간은 “육과 영혼, 죽음과 삶을 함께 지닌”존재로 보고 그 인간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오직 철두철미하게 죄에 타락한 존재라 보고 있다.
b. 그들은 죄라는 말과 그것으로 대표하는 모든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모두 출구가 차단되어 있으며 오직 하나님과 단절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암흑만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시킬 만한 다리도 능력도 접촉점도 없는 것이다.


4) 카톨릭이 본 인간의 본질


a.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음으로써 그 앞에서 책임지는 존재이다.
b.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저주를 받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비극과 죄로 인한 고통의 심연이 있는 것이다.

4.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1) 하나님의 말씀


a. 인간을 해방시킨다.
b. 그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흘리신 보혈로 인간의 죄를 사하신 것이다.
c.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말씀이다.

2) 하나님의 뜻


a. 하나님은 결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과 접촉되지 않으신다.
b. 마리아도 그 어떤 성인도 제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접촉할 수 없다.
c.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없다.

5. 정신치료


1) 현대인과 그들에 대한 이해


a. 현대인은 교회와 한번도 접촉해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목회에 대한 개념만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
b. 현대인이 알고 있는 목회개념과 목회에 대한 기대를 알아야 한다.
c. 현대인의 욕구를 바르게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도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신치료의 도입과 위험


a. 목회자는 대화를 위하여 정신치료방법을 목회에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b. 정신치료는 진정한 목회를 이룰 수 없다.
c. 세속적인 형식을 갖춘 상식, 인격발전 또는 심리학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d. 현대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각도가 빗나가는 형식을 취해왔다.
e. 목회상담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인간사회의 모습을 개진해 왔다.

3) 현대인은 인간의 정신생활과 영적 생활에 무관심하다.


a. 현대인은 대중사회 속에서 대중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b. 19세기 초엽까지는 가정, 학교, 교회, 사회가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c. 그러나 19세기 이후 급격한 도시화는 인간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에서 대중의 문제로 바뀌어 갔다.
d. 인간의 관심사는 생활철학과 생활방식이 유물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4) 효과 잃은 교회의 노력


a. 인간의 정신생활의 타락물결을 뒤바꿔 보려고 계속된 노력을 기울였다.
b. 현대인의 관심은 집단화 내지는 물질주의화 되어 가는 마당에서 전례 없이 교회생활에 파탄이 거세게 일어났다.
c. 교회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불일 듯 일어남을 계기로 교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말았다.

5) 목회상담의 요청


a. 인간의 내면생활에 대한 좀더 깊은 지식 즉 목회상담에 대한 요청이 일기 시작했다.
b. 이것은 오늘날까지 침묵을 깨고 소리를 발한 것은 그 자체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c. 목회와 상담을 갈구하는 영혼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한 셈이다.
d. 다시는 병든 상태에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6) 현대인의 정신적 토대의 결핍


a. 현대인의 정신생활의 결핍
b. 노이로제
c. 철학적 혼돈과 방황
d. 곤혹스러운 혼란

7) 유물주의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물결이 퇴보하면서 나타난 증거


유물주의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물결이 퇴보하면서 인간의 영혼문제에 대한 강한 부르짖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a. 현대심리학
b. 정신병리학
c. 정신치료법

6. 인간의 이원성


1)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2)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능력


a. 잠재되어 있어서 어떤 교육이나 신비적인 몰입
b. 지적인 집착이나 도덕적인 순화작용을 통하여 재생될 수 있는 신적 본질로 설명된다.


7.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목회


1)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목회여야 한다.


2) 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실제로 대면케 하신다.


3) 항상 하나님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정해 주신다.


4) 현대인의 특징


a.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로서의 영혼이 일깨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제 나름대로의 이해를 지니고 있다.
b. 자기 스스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정신생활의 양식을 갈구하는 것뿐이다.
c. 그들은 믿어주고, 그들의 정신적 자원과 능력을 믿어주고 또 방향을 바꾸어 우리들에게 자기들에 대한 진리를 일깨우고 강화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d. 은혜를 통하지 않는 방법을 원하는 것이다.

5) 목회자의 의무


a.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해주는 영역으로 바꿔 놓기 위하여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b. 그들을 성서와 기도로 인도해야 한다.

8. 성서와 반대되는 인간이해


1) 자연신학


a. 자연신학은 계시와 이성, 성서와 인간의 능력을 동일시하는 사상이다.
b. 그에 따른 신앙이다.
c. 인간을 은혜 없이 이중성으로 보는 인지학(人知學)의 형태이다.
d. 이러한 자연신학은 교회의 사상적 신앙적인 적(敵)이라고 규정되었다.
e. 자유주의 신학과 자연신학은 동일한 것이다.
f. 자연신학적인 목회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말씀이나 성서와는 전혀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신비주의적 또는 도덕적 목회 방식으로서 진정한 목회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현대교회가 할 일


a. 자연신학과 자연신학적 인간이해를 최선을 다하여 막아야 한다.
b. 뢰에, 휠마르, 하름스 및 두 형제 블룸하르트를 소개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의 가치를 높이 들고 엄밀한 성서적 입장을 따라 목회의 영역을 추구하고 확정한 점에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 목회분야에서의 자유주의신학


a. 자유주의 신학의 정신이 크게 압도를 이루어 왔다.
b. 19세기 초엽에 “슐라이에르마하”와 같은 신학자가 위세를 떨치며 등장했다.
c.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성서에 바탕을 둔 신학을 약화시킨 채 그의 적수로 등장한 “알브레히트 릿츨”도 동일하다.
d. “슐라이에르마하”는 교인들의 경건한 의식과 경건한 생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e. 교회의 정신상담이 증가일로에 있었다.
f.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저명 인사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강론이나 설교나 목회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복음선포에 거의 영향을 받지 못한 흔적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9. 결론


목회는 이제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 다시 이루어 져야 한다.

 

1) 인간을 세례의 관점에서 보는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왜냐하면 세례는 인간이 이중성 전체 안에 있고 또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나아가 의식과 무의식 속에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존재한다.


3) 우리는 육과 영혼, 삶과 죽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실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에 속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4) 목회자는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심어주며 이것을 교회의 설교를 통하여 선포하는 일 이것이 복음주의적 목회의 과제이다.

출처/정신섭교수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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