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에 대한 이해
Ⅰ. 서론
21세기를 맞이한 현대교회는 목사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들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목사의 직무에 있어서도 리더쉽이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목사의 리더쉽은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나 현대에는 다양하고 전문화된 목사의 리더쉽이 요구되고 있다.
목회사역과 리더쉽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사와 그 직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목사의 자질에 대하여 논할 때 리더쉽의 문제가 다루어져야할 것 같다. 목사에 대한 이해는 곧 그 위치와 그에게 주어진 권위 그리고 그에 따른 직무와 그 역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목사와 그의 직무에 대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목회의 원리와 그 요소들을 찾아봄으로서 목회사역의 분명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사역의 분명한 이해는 곧 그 사역에 따른 지도자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 목사로서의 자질은 곧 목사로서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의 자질이란 지도력에 대한 겸비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목사의 자질을 위한 자기훈련과 계발은 곧 지도력의 계발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자기훈련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지도자의 자질을 위한 훈련들은 다음세대를 위한 지도자의 교체와 재생산을 위한 노력과 시도에도 좋은 영향과 그 기초가 되었으면 한다.
Ⅱ. 목회에 대한 이해
1. 목회의 의미
1) 목회의 정의
목회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가 수행하고 있는 모든 행동영역을 포함한다. 즉 설교, 세례전과 그 시행, 심방과 상담, 교육과 훈련, 교회의 관리와 운영 등을 말한다.
성도의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연약함을 돌보는 것이며 상처 입은 심령을 치료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성숙한 성도로 양육하는 일이다.
목회자의 양육 목적은 첫째, 성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후10:3-8, 13:5-10) 목회자 개인의 야심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영적 성숙을 위한 양육의 목적이 시행되어야 한다. 만일 목회자의 야심에 의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의 건물이나 숫자에 고정된다면 진정한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개개인의 영적 성장과 전도(선교)활동에는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롬12:4-5, 고전10:17) 교회는 믿는 성도가 같은 신앙과 고백에 의하여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성도가 하나 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이러한 고백이 일치 되지 못할 때 분열의 위험을 겪게될 우려가 있다. 또한 신앙은 같으나 그 생활의 규준이 달라 분열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언제나 같은 신앙을 고백토록 하여 생활의 규준이 일치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해야한다.(롬11:36, 롬12:1-2)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거룩한 예배의 삶이 되도록 양육해야한다. 이러한 양육을 위해서는 로마서[①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생활(롬12:1-13) ②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준(롬12:14-21)]이 좋은 교재가 될 수 있다.
2) 목사와 그의 직무
목사는 누구인가? 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가? 목사에 대한 성경의 명칭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곧 목사의 직무와 그에 따른 봉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1) 목사란 말의 어원
기독교 대사전에서는 목사(牧師, Pastor)란 '목자'라고 말한다. 한문(漢文)에서는 일찍부터 목민, 목백(牧伯) 등의 말이 있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을 의미했으나 목사란 말은 기독교와 관련되어 번역된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현대적인 의미로서 그 차이는 다소 있으나 목사로 안수 받은 자와 조직된 교회의 교역자를 지칭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가페 성경낱말사전에서는 성도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교회의 교역자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인들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격려하며 지역 내에 다른 목사들과 공동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엡4:11).
지금까지 살펴본 목사의 의미는 한국적인 배경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원을 찾아본다면 목사란 Pastor로서 '보호한다'(to protect)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헬라어 '포이멘'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이것은 곧 목자(shepherd)를 의미한다. 라틴어'pasture'에서 유래된 '꼴을 뜯어 먹인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목사란 양떼를 먹이는 사람인 목자와 같은 개념과 함께 푸른 초장을 찾아 양들을 안내하는 목자의 역할로서 순전한 양들을 인도하며 꼴을 먹이며 보호하는 목자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직무를 지닌 하나님의 사자이다.
양을 치는 '목자'(shepherd)란 말이 신약성경에서 열 여덟 차례 나온다. 구약성경까지 합치면 모두 여든 두 번 나온다. 그 중에 신약성경에서 여덟 번에 걸쳐 직접 양을 치는 목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는 일곱 번 나온다. 예수님을 가리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히13:20)라 했으며,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 되신 이'(벧전2:25)라고 기록된 곳이 한군데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목사'(pastor)로 번역된 곳이 한번 나타나 있다.(엡4:11)
(2) 목사란 용어에 담긴 뜻
'목사' 또는 '목자'라는 직무와 함께 긴밀하게 연관된 성경구절은 사도행전에 있다.(행20:28) 이것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행20:17)에 대하여 권고하신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자기(장로:elders)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overseers 또는 bishop)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목자로 세우셔서 먹이고 돌보도록) 하셨느니라"(벧전2:25, 5:1-4)
빌1:1의 말씀을 보면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는 성도와 구별된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에 여러 가지 직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 사이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한결같이 각각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사자'는 곧 '목사'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여러 사람들을 통괄하고 지도할 수 있도록 기름 부어 세운 것이다. 목사는 여러 가지 포괄적인 임무를 총괄하는 목자의 개념에서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사는 감독이나 장로가 지닌 직책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영역에서의 상담자와 행정가로서의 직책도 수행하게 되었다.
(3) 목사직에 내포된 요소들
①교사(teacher)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 목사와 교사는 한직임에 속한다. 가르치는 직임은 일정한 교회를 담임하지 않고 여러 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evangelists)'와는 달리 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에게 한결같이 그 중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②성직자로서의 임무도 포함되어 있다. - minister라는 말은 라틴어 minuere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그 말은 '가장 작다', '저하시키다', '감소시키다', '일과'(lesson) 등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동사로는 ministrare로 쓰여져서 섬기는 것(to serve), 종속되어지는 것(to be subordinate)이란 뜻으로 통용되어 minister란 말이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minister란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찾아보게 된다. 첫째는 '디아코노스'로 노동자(laborer), 종(servant), 또는 집사(deacon)라는 뜻이다. 둘째는 '레이투르고스'라는 말인데 공종(公衆의 종: public servant), 일군(worker)의 뜻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후페레테스'라는 말로서 배에서 노를 잦는 사람(under-rower), 또는 보조자란 뜻이다.
이러한 말들은 각각 교역자(minister)나 목사(pastor)로서의 직임과 그 기능의 본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4) minister이 종류와 그 직무 - 신약성경을 근거로 minister의 직무를 다섯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①사도(Apostles)이다. - 사도라는 명칭은 신약성경에 81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이 사도에 대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명칭은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바울을 도와 복음에 수종들었던 사도적인 사람들과 사도직의 은사와 은혜가 아울러 부여된 사람들까지 일컬어진다.
사도들은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막3:14, 눅6:13, 갈1:1) 둘째,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그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이었다.(요15:27, 행1:21-22, 고전9:1) 셋째,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나 입으로 말하는 것이든지 글로 쓴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영감 되어진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행15:28, 고전2:13, 살전4:8, 요일5:9-12) 넷째, 기적을 나타내는 때라든지 그들의 메시지를 비준하는 경우에 비상한 권능을 가지고 행사했던 것이다.(고후12:12, 히2:4) 다섯째, 그들의 수고에 하나님이 표적이 따랐고 그들의 직무에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고전9:1-2, 고후3:2-3, 갈2:8)
②선지자들(Prophets)이다. - 신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③복음전하는 자들(Evangelists)이다. - 사도들과 선지자들 밖에도 성경은 복음전하는 자들에게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행21:8, 엡4:11, 딤후4:5, 딛1:5, 3:10)
④목사(장로)이다. - 오늘날에 와서는 minister하면 그것은 거의 목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⑤교사이다. -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minister)로서의 직무 중에 교사의 직무 역시 중요한 사역이다.
이와 같이 minister의 종류는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행해야하는 minister의 임무로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다.
둘째는 모든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넷째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되게 하는 일이다.
다섯째는 진리(성경 교의)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일이다.
여섯째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일곱째는 모든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3) 목사의 자격(자질)
목사는 직업인이 아니라 사명인이다. 하나님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이며, 진리의 해석자이다. 그러므로 그 직분은 고귀하고 거룩하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목사의 직분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무려 5번이나 그 이유를 들면서 사양한 것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①'그는 사명자로서 적합하지 못하다'(출3:11), ②'권위가 없다'(출4:1), ③'입술이 둔하다'(출4:10), ④'마음이 내키지 않는다'(출4:13), ⑤'메시지가 없다'(출3:13) 등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를 발하시면서 그를 사명자로 세우셨다. 목사가 목사됨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지만 그 외에도 갖추어야할 요소가 많이 있다. 성경은 교회 지도자들의 자질을 중요하게 강조하여 거룩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자들이 갖추어야할 자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목회서신에서의 목사의 자질을 언급하면서 자신과 관계, 가정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등 제반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영적인 자질
바울은 영적 지도자들의 자격 요건을 열거하면서 업무능력보다는 성품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사람의 자격은 그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 보다는 그가 어떤 인물이냐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누가 죄를 지어 그로 말미암아 인격에 손상이 오면 그는 전체 회중 앞에서 징계를 받아야 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왜냐하면 교회는 그 거룩한 직분을 소중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자격에 관한 요건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신학교는 사람에게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켜줄 수 있고, 교회는 그에게 봉사의 기회를 확대시켜 줄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역에 합당한 자질을 부여하실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자격 요건들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교인들은 자연히 지도자를 닮기 때문이다("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6:40). 이러한 목사의 '영적인 자질'을 딤전3:1-7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 책망할 것이 없는 자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딤전3:2)라는 말씀 중 '책망할 것이 없으며'(아네피렘프토스)는 본문과 딤전5:7, 그리고 딤전6:14에 등장한다. 아네피렘프토스는 체포당할 여지가 없는, 붙들어 둘 수 없는, 비난받을 것이 없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책망할 것이 없고"(딛1:6),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딛1:7)에서 '책망할 것이 없고'(아넹클레토스)는 아무 죄가 없는, 무죄한, 비난 할 수 없는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①다시는 범행을 못하도록 어떤 범죄자를 붙들어 두거나 붙들어 둘 수 없다는 뜻이다. ②그를 고소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③그는 책망들을 일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격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그의 태도나 습관, 행위 등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성품에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의 설교나 생활에 있어서 모순이나 위선을 가지고 사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도자는 경건의 본이 되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17)고 했던 것처럼 지도자는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청교도 목회자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설교에서 금하라고 외치는 죄에 당신 스스로가 빠지지 않으려면 또 당신이 매일 정죄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은 늘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애써 하나님을 높이고 나서 다시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을 창피 주려하느냐? 당신은 애써 그리스도의 주관하시는 능력을 선포하고 나서 이를 능멸하고 스스로 거역하려 하는가? 당신은 그의 율법을 선포하고 나서 또 이것을 고의로 범하려 하는가? 죄가 나쁜 것이라면 왜 당신은 그 안에서 살려하는가? 만약 죄가 나쁜 게 아니라면 왜 당신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설득하는가? 죄가 위험한 것이라면 왜 당신은 죄를 짓는 모험을 하는가? 만약 죄가 위험하지 않다면 왜 당신은 사람에게 경고하는가? 하나님의 경고가 진실이라면 왜 당신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왜 당신은 쓸데없이 그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공연히 겁을 먹게 만드는가? 당신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그런 일을 계속 행하고자 하는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술 취하지 말라, 탐욕 부리지 말라고 하면서 당신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 무슨 일인가! 악을 금하라고 하는 그 입에서 악이 나올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경고하는 그 입이 이웃을 비방하고 중상 모략하고 헐뜯을 수 있는가? 당신도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이 경고하는 그 죄에 삼킴을 당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를 정복하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죄에 절하고 그 노예가 될 수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 오 형제들아! 죄를 꾸짖는 것은 쉬워도 죄를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감독에게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사도 바울은 그가 완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감독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사람의 평판을 더럽히거나 품위를 손상시킬만한 죄의 병폐가 그에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b. 한 아내의 남편
목사는 "한 아내의 남편"(딤전3:2; 딛1:6)이어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란 '한 여자로 만족하는 그런 남자'를 말한다.
이것은
①동성결혼(창19:7, 레18:22, 롬1:26-27, 고전6:9, 딤전1:10)을 배제하는 사상이다.
②교회와 결혼하는 소위 독신주의를 배제하는 사상이다.
③일부다처제를 배제하는 사상이다.
④재혼금지설을 배제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일부일처주의, 부부일신주의, 성결주의, 경건주의를 주장하는 사상이다.
영적 지도자에 있어서 이성문제는 가장 근신할 문제이다. 목사는 아내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일지라도 성적범죄는 사람을 평생 비난받는 위치로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죄 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8-20)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 교회는 아내를 속이고 나쁜 짓을 하는 성직자에 관한 스캔들이 빈번하다. 불규칙한 일과 그 계획, 많은 유혹에 직면한 목회 현장, 다양한 유혹들로부터 목회자는 도망쳐야 한다.
c. 절제하는 자
"절제하며"(딤전3:2, 3:11, 딛2:2)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말하며, 비유적인 의미로서는 중용을 지키다, 냉정하다, 용의주도하다. 등의 뜻이 있다.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하고(삿9:13), 위장병 등의 약으로 사용되기도 하며(딤전5:23), 마음에 근심하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도 하지만(잠3:16), 종종 폐해를 가져오게도 한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잠20:1)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쓸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23:29-35)
영적 지도자는 명석한 생각과 건전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과도한 일을 생활 속에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①영적 지도자는 세속주의에 동화되지 않고 ②세속에 깨어 있으며 ③명석한 판단을 소유한 자인 것이다. 일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도에 지나쳐서는 안됨을 알려 주고 있다. 어떤 때는 과식도 죄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늘 절제하고 균형 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d. 근신하는 자
"근신하며"(딤전3:2, 딛1:8, 2:2, 5)란 마음이 건전한, 자기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자제하는, 삼가는, 절제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마음, 정직한 마음을 뜻한다.
귀신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해진 경우가 근신에 대하여 잘 증명해 주고 있다.("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눅8:35)
절제력 있는 사람은 과도함을 피하고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며 그러한 명확한 사고는 다시 질서 있고 규율 있는 삶으로 이어진다. 그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지하게 대처한다.
박윤선 박사는 '근신하며'란 마음의 욕심을 절제하며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외부적 행위에는 절제하면서도 마음 속 욕심의 동작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생활에 영적 은혜가 없으며 기쁨이 없고 고민이 있으며 신앙의 성장이 없다'라고 했다.
석원태 목사는 「'근신'이란 건전한 마음가짐, 분별력 있는 지성, 자제력, 정절, 욕망의 자기 통제, 부단한 자아성찰, 그리고 일관된 심지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e. 아담한 자
"아담하며"(딤전3:2)란 잘 정돈된(well-arranged), 예절에 맞는(seemly), 정숙한(modest)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담한 삶을 사는 자는 예의 범절이 있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영적 지도자의 외적인 유덕미(遺德美)를 말한다. 품위를 나타내는 의상이나 교양미, 규모 있는 행동, 그리고 품행의 단정함을 의미한다.
f.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자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란 나그네를 친구처럼 사랑한다는 뜻이다. 즉 나그네의 필요를 공급해 준다는 말이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2-14)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5:10)
"손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4:9)
'나그네를 대접하며'라는 말이 가르치는 기본원칙은 자신과 자신이 가진 자원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영적 지도자는 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이익을 사랑하기는커녕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 자기에게 없는지 살펴야 한다.
g.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고 능숙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영적 지도자는 그의 목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지에 관계없이 가르치는 일에 목회의 비중을 크게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목사는 여러 가지 사역 중에 중요한 교사로서의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에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과 가르침의 기술에 있어서도 교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라는 말씀 가운데에서도 교사는 은사 중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르침에는 필수적인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①가르침의 내용이 복음 자체이어야 한다. 다른 교훈이나 다른 복음이 아닌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그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②전달방식에 있어서 지적요소가 수반되어야 한다. 좋은 교사는 효과적으로 의사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숙련된 방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통해서 그 자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③정확한 표현과 설득력(감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신뢰성이 있게 하는 정직성을 가져야 한다. 효과적인 가르침의 강력한 원동력은 신뢰성이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과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4:12)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후2:24)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5:17)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1:9)
h. 술을 즐기지 않는 자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딤전3:3), 지도자는 술을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술은 방종 하는 생활의 자극제이며 향락생활의 첩경이다. 이것은 사탄이 즐겨 쓰는 타락의 도구이다(계17:2). 술에 취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10)
"투기와 술 취함과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1)
영적 지도자가 술 취함으로 인하여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영적 지도자라 할 수 없다. 술에 취하여 자제력을 잃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무책임한 행동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I. 구타하지 아니한 자
"구타하지 아니하며"(딤점3:3, 딛1:7), 구타는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뜻은 손과 혀로 타인을 때리는 자, 치는 자를 말한다. 영적 지도자는 성질이 급하여 물리적인 폭력에 의존하면 안 된다. 어떤 분쟁을 해결할 때 주먹이나 다른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j. 관용하는 자
"오직 관용하며"(딤전3:3, 빌4:5, 딛3:2, 약3:17, 벧전2:18)라고 했다. 관용이란 알맞은, 공정한, 온화한, 온순한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범죄한 자를 용서하고자 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적으로 관용이란 선을 기억하고 악을 잊어버리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들의 허물을 보지 않고 좋은 것만을 보고자하는 마음가짐이다.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적 자질이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바나바 외에도 아브라함(창13:8-9), 이삭(창22장, 26:12-22), 요셉(창50:15-21), 모세(민12:3), 요나단(18:1) 등이 관용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는 인물로 성경에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k. 다투지 아니한 자
"다투지 아니하며"(딤전3:3, 딛3:2)란 저항 받지 않는, 정복할 수 없는, 싸움을 삼가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투지 않음은 관용의 결과로 주어진 화평을 말한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다툼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문제에 얽힌 다툼을 의미한다. 딤후2:24에는 주의 종이 갖추어야할 덕목을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다투지 아니함이란 지도자의 평화로운 인간상을 나타내고 있다. 아집이나 배타성, 독존성이나 우월감은 많은 사람을 놓치는 독소가 될 수 있다. 만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목사가 되기 전에 그런 성향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 목사는 먼저 자기제어, 자기 정복에 명장이 되어야 한다.
l. 돈을 사랑하지 아니한 자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3:3)란 낱말 그대로 돈을 사랑치 아니함을 말한다. 돈을 사랑하면 목사의 사역이 돈을 버는 도구로 보이게될 수 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6-10).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세상의 향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셨다(골3:5).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정당한 수입과 이를 선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m.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 지며"(딤전3:4)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다스림은 감독하다, 관장하다, 보호하다, 도움을 주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주어진다. 여기에는 자기 집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사람과 물질적인 재산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입증되어야 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5:17)라고 하셨다. 교회를 돌봄에 있어서는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행하여야 한다(눅10:34-35).
n. 성숙한 자
딤전3:6에 보면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했다. "새로 입교하다"말은 "새롭게 씨를 뿌린"이란 뜻으로 최근에 개종하여 교회가 받아들인 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감독은 바로 나무를 심어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열매(체험)도 없는 자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미숙한 자는 감독이 될 수 없다. 모세는 40년 간을 일하기 위하여 80년을 준비했고 바울은 부름을 받았을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한 자기보다 먼저 사도 된 자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 간을 머물렀다. 바울은 14년 후에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갈1:14-2:1). 예수님의 12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다. 역사상 유능한 감독들은 오랫동안 영적 경험과 다듬어진 식견의 과정을 밟았다. 감독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감독으로 피택되었을 때 도망간 일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병자를 위하여 자기 재산을 다 바친 후 주의 일에 전념했다. 에브라임(Ephraim)은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미친 사람처럼 했다. 밀란의 감독 암부로시우스(Ambrosius)는 자기의 전 재산을 기울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밤새워 가면서 기도하던 자인데 감독의 임명을 받았을 때 두려워 일시 피한 일이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루터(Luther), 칼빈(Calvin)이 모두 그러했다.
"교만하여지다"란 '연기로 휘감다', '부풀어오르다'라는 의미로서 교만으로 흐려진다는 말이다. 새신자는 헛된 우월감으로 들떠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이 교만한 마음으로 흐려져서는 안 된다. 마치 자만심의 연막(smoke screen of pride)에 휩싸이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새신자가 영적 지도력 없어서도 아니다. 훌륭한 교사로서 가르치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또한 좋은 지도자가 아니어서도 아니다. 도리어 강력한 지도자일 수도 있다. 단지 그가 영적 지도가 되는 순간 성숙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만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영적 지도자의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한 훈련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책망할 것이 없는 지도자, 한 아내의 남편, 절제하고, 근신하고,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아니하고,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딤전3:2-5)로서 훈련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o.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는 자
"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룰 얻는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3:7)고 했다. 감독은 비 기독교인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선한"이란 내적, 외적 선함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한 성품에 대하여 증거를 가져야 한다. "외인"이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즉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다. 감독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그 지역사회로부터 온전한 인격과 사랑과 친절과 관대함과 양선과 평판을 얻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적인 사항에 동의해야 한다. 실제로 그의 기독교신앙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인품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이로서 그의 지역사회에 경건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빌2:15).
p.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딛1:7) 여기에서 '자기 고집'은 자기 만족(self-pleasing), 제 멋대로(self-willed), 거만한(arrogant), 독단적인(arbitrary)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자기 생각(긍정)에 도취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기심이나 공명심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자기 사랑은 곧 교만이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남을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 오직 자기만의 길과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감독에게는 금물이다(빌2:3).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다.
q. 급히 분내지 아니한 자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딛1:7)라는 말씀 중 "급히 분냄"이란 '화내기 쉬운', '성을 잘 내는'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은 분을 발하는 경향이 없어야 한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성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되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엡4:26-27). 그러나 문제는 분을 내는 일에 거의 상습적인 사람들에게 있다. 이러한 고질적인 사람은 갑자기 분을 발할 뿐만 아니라 분노의 용광로에서 분을 폭발시키고 그분을 계속 끌고 간다. 분노는 영적인 일에 가치 있는 것을 하나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운 사람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으며, 적개심을 품지도 않으며, 다투지도 않으며, 분노를 품고 살 이유도 없다. 그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약1:19-20, 잠22:24-25)
r.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딛1:7)란 '부끄러운 돈벌이', '부정한 이윤' 등을 말한다.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을 말한다.(벧전5:2, 딤전3:3, 딤전6:10) 돈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타협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 영적 지도자는 자기가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탐욕을 품거나 자신을 방임해서도 안 된다.
바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엿새동안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대로 힘써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이레 되는 날은 그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다. 즉 부끄러운 돈벌이에 해당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s.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자
"미쁜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딛1:9) 여기에 "미쁜 말씀"은 신실한 말씀, 참된 말씀의 의미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전해진 복음을 뜻한다. '말씀"은 그리스도시요(요1:1),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것은 신실하여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감독은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파수할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 가르침대로 행해야 한다. 자신이 솔선 수범하여 복음의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지킬 때 비로소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바로 책망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입으로 복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2) 지적인 자질
바울은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딤후4:13)고 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서 있는 전도자의 한 면이 결국 책으로 돌아가는 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이 많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머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기록해 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딤후3:14).
a. 목사가 될 자는 먼저 학문을 전수해야 한다.
지식은 자연을 정복하고 행복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지식을 얻기 위해 목사가 될 사람은 학문적 기초를 닦아야 한다. 언어학, 인문학(문학, 심리학, 논리학, 철학), 교육학, 역사학, 과학, 정치학, 사회학, 천문학, 지질학, 경제학, 생물학, 수학, 컴퓨터공학, 유전공학 등의 다방면에 이르는 학문들을 개괄적으로 전수해야 한다. 이러한 일반 학문들은 신학입문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필요하다. e방면에 대한 일반학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계시(성경)를 접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다. 결코 선지자와 사도들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다. 저들은 당대의 학문사조를 통달한 자요,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을 받은 자이었다.
목사가 평소 학문적 열성이 없이는 결코 뜻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 목사가 현대의 사상과 생활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이해가 없이는 그 속에 우리의 신앙을 침투시킬 수가 없다. 목사는 그 사회 영역뿐만 아니라 지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현대 사상과 생활에 이지적이면서 권위 있는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보다 높고 넓은 지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목사의 수준이 교회의 수준을 판가름하기 때문에 목사가 될 사람은 이러한 일반학문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b. 신학을 전수해야 한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사는 그의 사명을 위해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그는 특별한 혹은 전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는가? 일반 대학교육으로 완벽한 준비가 되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신학교육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신학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중세에 있어서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일컬어졌다는 점에서 신학은 단연 모든 학문가운데 최고봉이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사는 신학적 배경이 든든해야 한다. 신학이 나름대로 확립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목사가 될 수 없다. 신학의 전문적인 기초가 없이 목사가 되려는 것은 마치 콘크리트를 하지 않고 맨 땅에 고층빌딩을 지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의과대학이 의사를 위해 있고 법과대학이 법률가를 위해 있듯이 신학대학은 목사의 사명에 대한 보다 효율적이고 진보된 훈련을 위한 학교이다. 그러므로 포괄적이고 통일성 있고 체계성 있는 신학교육은 정규과정에서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의 신학 전반의 정규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a) 성경신학 - 성경언어(히브리어, 헬라어), 신약학, 구약학, 성경해석학, 성경주석학 등이 있다.
b) 조직신학 - 교리학, 기독교 윤리학, 변증학, 신조학 등이 있다.
c) 역사신학 - 교리사, 교회사, 성경고고학 등이 있다.
d) 실천신학 - 교회정치, 교회행정, 기독교 교육학, 예배학, 전도학, 목회학, 설교학, 목회 상담학, 교회음악, 심방학, 선교학 등이 있다.
이러한 교과과정은 단순한 지식이 단편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서로 의존되는 자료의 통일된 프로그램이다. 즉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 교리적, 역사적인 표현에 대한 이해증진과 목회실천에 필요한 실천적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c. 임직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한다.
부지런히 학문을 추구하는 학생이 되지 않고서는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는 결코 그의 연구하는 모습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그의 연구를 중단하면 그의 사역이 빛을 잃게 되며 또한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목사 자신이 초기에 연구한 것과 신학교에 있을 동안에 수집한 자료를 계속해서 의지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목사는 항상 새로운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독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르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3)고 권고하고 있다. 독서는 목사로 하여금 주의 일과 세상일에 있어서 행해야 할 것에 대하여 익숙하게 인도해 준다. 독서는 예화 자료의 무한한 지원을 제공하며 그의 설교에 있어서 생동하는 생명력과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큰 원동력이 된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독서와 연구에 게으른 목사들에게 말하기를 "설교에 있어서 당신의 능력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7년 전에 행하던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기에 넘치는 것이라고는 하나 깊이가 없는 것이며 변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 결여된 것이다. 이것을 공급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이다. 당신은 그것이 없이는 완전한 기독교인 그 이상의 깊이 있는 설교자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목사는 학생이다.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설교하는 일정한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그는 독서하면 연구한다. 성문학, 전통, 역사, 언어학,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예술 등 모든 면에서 항상 여러 사람과 만나고 교제하면서 자기를 성숙시키는 자이다. 그래서 목사의 서재는 곧 기도실이요, 교수실이요, 바로 나타나지 않는 강단이요, 영적교통의 밀실이요, 영력의 보고이다.
(3) 건강의 자질
목사는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 신체건강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목사는 육체적인 건강을 책임져야할 그 범위까지 이르도록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건전한 정신, 건전한 생활은 건전한 신체로부터 출발한다. 건강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지만 인생의 기본조건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건강이라는 자본이 없으면 목사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건강(Physical Welfare)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웬만한 과로와 어려운 일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a.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a)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시100: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사43:1)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고전6:19)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몸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이러한 몸의 기원을 통해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b) 값으로 사신 것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여기에서 '산 것이 되었으니'라는 어원을 보면 헬라어 'agorazo'라는 말에서 유래된 'egorasdete'이다. 이것은 당시 노예시장이었던 'agora'에서 값을 주고 산 것('agorazo'; 값을 주고사다)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매매행위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을 깨닫고 주님의 소유가 된 이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c)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중생한 사람이며(요3:3) 새 사람이다(엡4:23, 골3:3).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ktisis'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몸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d) 성령이 거하는 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구약시대 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각 성도들 안에 내주 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몸의 주인이신 성령의 뜻대로 쓰임 받아야 한다. 결코 쾌락의 도구가 되어 그 몸이 상함을 입거나 학대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e)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지체'란 헬라어 'melos'이며, '몸의 일부, 사지, 팔다리' 등의 뜻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엡1:23, 4:16, 5:30, 골1:18). 즉 교회는 곧 성도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성도는 각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f) 의(義)의 병기이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여기에서 '병기'란 헬라어 'hoplon'이며, 전쟁이나 공장 등에서 쓰이는 도구를 나타내는 고대어로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무기(weapon)이다. - 신자의 몸은 신령한 전쟁에서 병기(무기)와 같다는 뜻이다. 죄를 대적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고 마귀와 접전하는데 필요한 거룩한 병기와 같다는 말이다.
②그릇(vessel)이다. - 하나님의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릇의 종류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합당한 그릇만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③악기(instrument)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기의 종류가 아닌 그 악기를 누가 연주하는 가에 있다.
이처럼 신자의 몸은 신령한 전투를 위한 몸이요, 주인이 쓰시는 그릇이요, 악기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목사는 자신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되도록 잘 다듬고 준비하여 주님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 되어 있어야 한다.
g)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여기에서 '몸'은 재창조함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의의 병기(롬6:13), 성령이 내주 하시는 성령의 전(고전6:19)을 말한다. 그리고 '산 제사'란 죄로 죽었던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사는 헌신된 삶을 말한다. 즉 비록 거듭난 사람이 완전하지는 못하나 그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h)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 된 것이다. 이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롬14:8),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한다(고전10:31).
I) 영광의 씨앗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고 했다. 바울은 현재의 육체는 썩고 욕되며 약한 것이나 부활 후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아니하며 영광스럽고 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현재의 몸은 병들고 신음하고 결국 죽는 욕된 것이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b. 주께 합당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목사는 자신의 몸이 신령한 하나님의 전임을 기억하고 적절히 관리하고 보호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목사의 몸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의 일을 다루듯이 자신의 몸을 잘 간수하고 보존해야 한다.
a) 연구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규칙적인 습관은 사역의 효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건강보호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침식시간을 정하고, 기도, 성경 읽기, 설교준비, 심방, 상담, 행정, 교육 등의 규칙적인 시간표를 만들되 주간 및 월간, 연간으로 만들어 시행하면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교회성장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교회의 특성상 돌발적인 사고(환자, 사고, 장례 등)가 있을지라도 원칙적인 계획에 큰 차질이 없는 범위 내에서 시간을 조정해야한다.
b) 충분한 휴식과 오락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쉬는 날이 필요하다. 물론 이 때 약간의 적절한 오락을 곁들이면 더욱 효과가 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락 그 자체가 보다 효과적인 휴식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 날의 피로는 그 날에 풀어야 한다. 이것은 충분한 수면으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잠이란 것은 누구나 필요하지만 특히 목사들에게 더욱더 요구되어지는 휴식의 한 방편이다.
c) 일정한 운동과 산책이 있어야 한다.
목사는 적당한 종류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만약 그러한 운동이 없다면 그의 사역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게되고 때로는 나태해 지기 쉽다. 의기소침해지고 또한 지루함을 느끼는 많은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산책을 하거나 다른 종류의 운동을 한다면 새로운 마음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체를 단련하여 건강함을 가지는 것은 목사에게는 너무 중요하고 또 목사의 사역만큼 힘든 사역도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건강을 위하여 꾸준히 연습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운동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d) 건강에 필요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과중할 경우 건강을 해치게 된다. 따라서 편식이나 과식은 피해야 한다. 또한 분주한 일정일지라도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e) 건강의 첩경이 되는 유쾌한 마음을 배양해야 한다.
심리적 조건은 육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마음이 상하면 허약한 육체를 만든다. 그러므로 목사는 항상 유쾌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유쾌한 마음은 건강에 유익한데 이는 심리적 조건이 육체에 큰 관련을 가지고 있다. 비록 절망적인 난관에 봉착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 전능하심을 의지할 때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근심이나 염려는 건강을 해치는 나쁜 습관이다. 항상 주안에서 감사와 평안을 누리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f) 건강관리에 호젓한 주택이 수반되어야 한다.
목사의 건강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만일 건강을 잃는다면 그의 모든 사역은 중단될 것이며 그의 모든 꿈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택환경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고 주택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워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목사의 육적, 심적, 영적인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환경상태가 되면 족하다.
c. 육신적인 장애가 있다면 공인으로서 목회활동에 부적합하다.
구약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 자손에게 세습이 되었으나 육신적인 장애자는 그 직책을 받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일러 가라사대...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상한자..."(레21:16-24)
물론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가 강건한 자라야 한다. 사도 바울도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고 했다. 그러나 특수분야의 선교적인 사명이 있다면 그들과 같은 형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
2. 목회에 대한 역사적 배경
1) 어원적(語源的) 배경
목회(Pastoral)라는 단어의 어원은 목자(Shepherd)에서 유래되었다.
(1) 구약에서의 명칭
a. 보켈
가축을 치는자(a herdsman)로 아모스가 소명 받기 전의 직업을 의미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암7:14)라고 했다.
b. 노케드
가축의 소유주(cattle owner, owner of flocks)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왕하3:4, 암1:1). 특히 아모스의 직업을 확인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어 졌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암1:1)고 했다.
c. 로에
가축을 먹이는 자(to feed flock), 가축에게 풀을 먹이는 자(to pasture), 가축을 돌보는 자(to tend)로 흔히 목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7-8)고 하였고,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창26:20)라고 했다.
(2) 신약에서의 명칭
a. 보스콘테스
광의적 의미로 가축을 치는 자(a herdsman)로 이 단어가 쓰여지고 있다(마8:33, 막5:14, 눅8:34).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마8:33)라고 했다.
b. 포이멘
협의적 의미로 양 무리를 먹이고(to feed), 돌본다(to protect)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서, 목자(a shepherd)로 쓰여지고 있다. 신약에 이 말이 18회 사용되어졌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8회는 양의 목자에게 언급되었고(마9:36, 25:32, 막6:34, 눅2:8, 15, 18, 20, 요10:2), 7회는 상징적으로 예수에 대해 사용되어졌다(마26:31, 막14:27, 요10:11-12, 14, 16). 또 1회는 양의 대 목자이신 예수(히13:20), 목자와 감독이라는 이중 명칭(벧전2:25), 목사(엡4:11)로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어원에 나타난 목자의 역할은
①가축을 비옥한 목초지로 몰고 가는 일(인도),
②가축에게 꼴과 물을 먹이는 일(양육),
③가축을 짐승과 도둑 떼들로부터 지키는 일(보호=구원)이었다(렘31:10, 겔34:12, 암3:12).
그러나 목자는 풍성한 초원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초원이 없는 목자, 초원이 없는 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목회(Pastoral)란 명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렘31:10), 에스겔은 "내가 내 양을 찾아서"(겔34:12)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가리켜 목자라고 불렀다(출3:1, 민27:17, 왕상22:17, 렘2:8, 10:21, 23:1, 겔34:23). 예수님도 자신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a Good Shepherd)로 표현하고 있으며(요10:11),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실 때에도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21:15-17).
2) 성경적 배경
(1) 구약시대
a. 홍수시대 - 노아는 일종의 목자로서의 성격을 지닌 사역자였다. 하나님께로부터 방주계시(말씀)를 받아 방주사역에 가담한 자들에게 그 계시(설계, 내용, 목적)를 가르치며 인도하였다(창6장).
b. 족장시대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목자성의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특히 족장들은 친히 제단을 쌓고 그 자녀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또한 요셉도 야곱의 후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목자성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c. 출애굽시대 - 민족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의 역할을 잘 감당한 이들은 모세와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목자적 공권을 허락하셨다(출3:1-10).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도록 하셨다(민27:18-23).
선민 이스라엘 사회에는 제사장(Priest)제도가 있었는데 족장시대와 출애굽시대의 제사장들은 우림(Urim)과 둠밈(Thummim)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신의(神意)를 전하는 매체로 사용하였다(신33:8-11).
d. 사사시대 전 · 후기
사무엘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역했다. 특히 사무엘 시대에는 백성들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언을 얻기 위하여 선지자(The Prophet), 혹은 선견자(The Seer)를 찾아가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았다(삼상9:9).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견책하고 충고하였으며 때로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개인 신상문제에서부터 국가의 장래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나단은 다윗에게(삼하12장),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좋은 목자였다(사36장).
e. 선지자시대
왕정시대가 시작되면서 전문성을 띤 신학교, 즉 권위 있고 노련한 선지자들의 지도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선지학교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선지학교로서 여리고, 벧엘 동편, 요단강 등지에 있었다(왕하2:1-18). 이러한 선지학교는 사실상 사무엘 시대부터 시작한 듯이 보여지고 전문성을 가진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포로시대를 맞이하여 선지학교는 없어지고 말았다.
f. 포로시대 전 · 후기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백성들을 지도하였다. 이들 예언자들은 사명 수행 시에 따라오는 죽음과 환난 때문에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불충실한 거짓목자(The Unfaithful Shepherd)와 신실한 충성된 목자(The Faithful Shepherd)와의 구별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였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사랑 없는 이기심의 목자는 양(백성)들을 강탈했고, 무시했고, 짓밟았고, 병든 자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반대로 선한 목자는 양(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았다. 여기서 목자는 이스라엘의 왕들(Kings)과 지도자들(Leaders)을 의미하고 있다. 슥13:7에는 목자의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 지를 말씀하고 있다. 곧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목자(지도자)의 신분과 위치와 사명은 실로 중대하다. 특히 환난 날에 사탄은 언제나 교회의 지도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2) 신약시대
a. 예수님 시대
복음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목자적인 사역에 대한 좋은 지식과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마5-7장, 10장, 눅10장, 15장, 요10장은 예수님의 유명한 목자론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 큰 목자, 목자장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참 목자상과 거짓 목자상을 비교하여 알려주고 있다.
① 참 목자상
ⓐ 참 목자는 초원을 소유하고 있다(요10:1-10, 요6장).
참 목자는 꼴(요10:9)과 생명의 떡(요6:35, 48), 참된 음료(요6:55)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바로 생명의 초원이었다.
ⓑ 참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있다.
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알고(요10:3, 27), 자기 양의 연약을 알고 있다. 또한 참 목자는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는 것도 알고 있다.(슥13:7) 그리고 참 목자는 자기 양이 한번 길을 잃으면 목자 없이 되돌아오지 못할 것도 알고 있으며(요10:5), 자신의 양의 수도 알고 있다.(렘33:13, 눅15:4)
ⓒ 참 목자는 양들을 차별하지 아니한다.(요10:3)
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 이것은 개인 개인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불러내는 참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개인 구원운동을 하였다. 인간 창조가 개인 개인이듯이, 그리고 인간타락이 개인적이듯이 인간구원도 개인적이었다.
ⓓ 참 목자는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요10:4)
참 목자는 앞서 행하는 솔선 수범하는 목자이다. 뒤에서 따라가는 목자가 아니다. 그는 앞서가면서 양들을 따라오게 했다.
ⓔ 참 목자는 변칙을 사용하지 않는다.(요10:7-8)
참 목자는 반드시 양의 문을 통해서만 양들을 인도한다. 결단코 편법을 사용하거나 변칙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확히 양의 문을 통과하도록 인도한다.
ⓕ 참 목자는 생명을 풍성히 한다.(요10:9-10, 28)
참 목자는 항상 푸른 초장을 준비하여 양들이 배부르도록 한다. 꼴(생명)을 얻어 만족한 상태에 이르도록 애쓰는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 참 목자는 잃은 양을 찾는다.(눅15:4-6)
참 목자는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닌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그 기쁨을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 참 목자는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는 목자이다.(눅10:30-37, 겔34:16)
상한 자를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는 선한 목자이다.
ⓘ 참 목자는 희생하는 목자이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 그리고 양들을 위하여 주는 목자요 희생하는 목자이다.(요10:11, 15, 17)
ⓙ 참 목자는 지키는 목자이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눅15:4), 악한자가 만지도 못하게 하고(요10:28), 세상 끝 날까지 지키며(마28:20), 영원히 보호하는 궁극적 안전보장의 목자이시다(요10:28).
ⓚ 참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면 단호히 버리는 목자이다.
자기 양이 아닐 때에는 믿지 않는다(요10:26). 결국 자기 양이 아니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목자로서 예수께서는
첫째, 사랑의 힘으로(power of love) 양들을 이끌고 설득한다.
예수께서는 결코 폭력이나 강압이 아닌 사랑의 힘으로 힘을 발휘하시는 참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개별적인 방법(an individual manner)으로 모든 영혼을 각기 일대일의 사랑으로 대하셨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 속에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자신의 겉옷에 손을 댈 때 그 여인을 이미 알고 계셨다(막5:31). 그리고 가난한 자, 피곤한 자,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이 화술에 능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사50:4) 예수님은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자기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요6:47). 예수님은 또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끌어 안으셨지만 그를 배척할 때 고통가운데서 슬퍼하셨다(눅9:41). 그뿐만 아니라 부자 청년이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였지만 거절할 때 그를 포기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막10:17-24).
둘째, 정죄는 구원으로 해결하였다(구원).
예수님은 정죄 보다는 용서하심으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참 해결자요 참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죄는 정죄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간음한 여인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끌려왔을 때(요8:1-11),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를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눅19:1-10), 저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자기들의 불의를 인식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관용성이 없었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이었다. 예수님은 우물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보셨고, 동시에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 영혼을 구원하셨으며, 그녀의 생을 바로 잡기 위해 열정을 다하셨다.(요4:1-26) 그 뿐만 아니라 정통적인 관례를 깨뜨리기까지 하면서 죄인들과 접촉하셨다.(눅15:2, 19:7) 주님은 결코 거만한 태도를 취하시지 않았으며 죄인들과 가까이 했고 마침내 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형벌을 받고 운명하시기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분이시다.(눅23:39-43)
셋째, 영혼의 구주인 동시에 육신의 불행에도 관심을 가지셨다.(축복)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에 대한 문제도 결코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소위 '전인적인 목회'(ministry for whole being)의 실례를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은 중풍병자가 고침을 원할 때 먼저 그 병을 고치시기 전에 "소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1-2)고 함으로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육체적임 질병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것임을 예수님은 아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근거로 하여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물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여인에게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임을 알려 주셨다.(요4:10)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문제만 지나치게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주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의 죄만 짊어지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도 짊어지셨다(마8:17, 사53:3).
② 거짓 목자상
ⓐ 거짓 목자는 가짜이다(요10:3, 4, 5, 27, 딤전1:19-20, 딤후2:18).
양은 참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
ⓑ 거짓 목자는 절도요 강도이다.(요10:1, 8, 10)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
ⓒ 거짓 목자는 삯군이다(요10:12, 13).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삯군은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
ⓓ 거짓 목자는 이리이다(요10:12).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것처럼 거짓 목자는 양을 해친다.
ⓔ 거짓 목자는 도둑이다(요10:10).
거짓 목자는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할 뿐이다.
ⓕ 거짓 목자는 살인자이다(요10:11).
참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거짓 목자는 양을 죽는데 내어준다.
ⓖ 거짓 목자는 도망치는 자이다(요1:12).
위급한 상황이 되면 양을 버리고 도망한다.
ⓗ 거짓 목자는 소경이다(요9:39).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므로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b. 사도시대
① 베드로
사도 베드로는 목자로서 천국열쇠를 받았다(마16:13-20). 이는 베드로가 목자적 공권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즉 목회신학의 권세요, 목회신학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선포권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도에 낙심하여 이를 포기했으나 예수께서 재임명해 주셨다(요21:15-24).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목자로서의 자격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목자장이신 예수께로 말미암아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목자의 자격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다. 바로 목자로서의 생명은 사랑임을 배우게 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로서 또 다른 목자를 권면하기도 했다(벧전5:2). 목자의 사명은 길 잃어버린 양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시는 예수께로 되돌리는 일이라고 했다(벧전2:21-25).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무수한 고난이 수반되고 그 고난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권면하였다(벧전4:12-16).
그 뿐만 아니라 거짓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무질서를 책망하고 널리 퍼진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에 대하여도 경고하였다(벧후2:1-3:18). 그 당시 거짓교사들은 성도는 윤리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독소가 가득한 이단 사설을 물리치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성도의 도덕성을 촉구하였다(벧후1:1-21).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도덕적인 실천을 행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여 신앙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확신의 권면도 빠뜨리지 않았다(벧후3:1-18). 주님 재림 직전에는 희롱하는 이가 일어나지만 주님의 재림은 약속대로 이행될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② 바울
바울은 행20:28-35에서 목자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에베소교회를 향한 부탁을 통하여 첫째,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하여 감독된 자들은 자신을 지키고(각성), 이단과 거짓교사들로부터 양떼를 지켜야한다고 권면하였다. 둘째,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양떼를 부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궁핍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목자였다. 바로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의 오네시모를 향한 관심은 개별적인 목자로서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주인 빌레몬에게 약하고 비천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줄 것을 간청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향해 대속의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문제를 막론하고 목자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신자간의 불신 법정 소송에 관한 반대(고전6:1-11), 결혼과 이혼문제(고전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고전8장), 부모와 자녀간의 문제(엡6:1-4), 사회생활문제(엡5장, 골4장), 그리고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고(갈6: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접하듯이 서로 영접해야 할 것(롬15:7)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의 목자와 같은 모습은 디모데와 디도를 향한 목회서신(딤전·후, 딛)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이를 통하여 신약교회의 목회신학을 수립하였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가르치고 경책하며 경계하여 전하기를 힘썼다(딤후4:2). 그리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다(딤전4:12-13). 한 마디로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목회의 골자는 바른 교훈을 지킬 것(딤후1:1-18), 가르칠 것(딤후2:1-26), 바른 교훈에 거할 것(딤후3:1-7)과 전파할 것(딤후4:1-22)을 명시하고 있다.
③ 요한
사도 요한은 그의 말년(70-100년경)에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 여러 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목자와 같은 사역을 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특히 그가 기록한 요한 서신에는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을 막는 일(요일2:26)과 믿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요일5:13)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은 소위 영지주의(Gnosticism)를 말하는데 초대교회 이단들 중에서 가장 위험했던 사상이다.
영지주의 중심 사상은 영혼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원론에서 나온 오류로서 도덕적 타락을 야기 시켰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이단을 논박함에 있어서 그들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였다.(요일3:8-10) 그리고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사역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목격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성육신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목회핵심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요일1:5)과 하나님은 의로우시며(요일2:2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요일4:16)을 밝히는데 있었다.
3) 교회사적 배경
(1) 교부시대
신약시대가 지난 후 목회의 역할은 복잡하게 발전되었다. 교회는 핍박받는 소수로부터 시작하여 초기시대의 말기에는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서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존재가 되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Polycarp)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가운데 성직자의 바람직한 자질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들도 모든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딴 길로 간 양들을 되돌아오게 하며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과부나 고아나 가난한 자를 소흘히 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고귀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 심술궂거나 편견과 편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은 용의주도하게 피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밝히는 것은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악에 대한 말을 지나치게 잘 믿어서도 안되며 그들을 나무라는 일을 지나치게 서둘러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죄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친히 계명을 내리신 분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과 주의 오심을 미리 선포한 선지자들과 같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다하여 주를 섬기자.'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강력한 필치는 목회자의 지위에 관한 초대교회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는 사역의 본질에 대해 성경적인 진술로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
'잘못된 길을 간 후에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말씀의 강력한 적용이다. 이것이 유일한 수단이요 가장 좋은 상황이다. 이것은 의술과 뜸질과 절단의 지위를 차지하며 만약 태우고 지르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용해야할 방법이고 만약 소용이 없다면 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격앙된 영혼을 침잠(沈潛)케 한다. 이것으로 지나친 것을 잘라내고 부족한 것을 채우며 영혼의 건강에 필요한 다른 모든 수술을 시행한다.'(On the Priesthood; 성직론)
여기에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본이 되는 생활을 할 필요를 덧붙이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35년 동안의 바쁜 목회생활에서 394편의 설교를 남겼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설교 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감독으로서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목회자였다. 그의 서품 기념일의 설교에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분쟁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것, 용기가 없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 약한 자의 편을 드는 것, 반대자들에게 논박하는 것, 함정들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무지한 자를 가르치는 것, 나태한 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 사고 팔려는 사람들을 단념시키는 것, 주제넘은 사람들에게 분수를 알게 하는 것, 싸우기를 좋아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 선한 일을 격려하는 것, 악을 견디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설교하며, 논박하며, 훈계하고, 교화하며, 모든 사람의 가까이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무거운 짐이며 내게 육중하게 부과된 것이다.'
(정신섭교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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