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聖經神學的 觀點에서 본 說敎의 諸方法 硏究 (馬鎬寅)

수호천사1 2009. 8. 15. 00:40

牧會學 碩士 學位 請求論文

聖經神學的 觀點에서 본 說敎의 諸方法 硏究

馬鎬寅 / 總神大學校 牧會大學院    

 

 

第 1 章 序 論

 

第 1 節 硏究의 目的과 意義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目的을 이루기 위해 說敎者를 택하셨고(딤전 4:16) 說敎의 內容을 指示하셨다.(딤후4:2)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族屬으로 弟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聖靈의 이름으로 洗禮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吩咐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命令하였다.

 

그러므로 基督敎가 참으로 基督敎다워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說敎하는 것이 重要하다. 說敎가 없는 基督敎는 生命이 없는 宗敎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說敎 없이는 宣敎도 없고 成長도 없다. 牧會者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說明한다면 첫째, 聖徒들을 穩全케 하며, 奉仕의 일을 하게 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穩全한 聖徒를 만들기 위해서는 敎育的인 기능으로서 聖經을 교재로 하여 바른 人間形成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곧 하나님의 領域을 擴張하는 것을 意味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敎會를 다스리는 홀이며 敎會를 기르는 飮食이다. 따라서 說敎者가 하나님의 말씀을 誠實하고 眞實하게 바로 證據할 때 그곳에서 敎會成長의 役事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난 1세기 동안 韓國敎會는 質的 量的으로 많은 成長을 했다. 그 成長의 背景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특히 하루도 끊임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宣布되었던 講壇의 說敎가 무엇보다 重要한 要素였음에 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講壇에서 宣布된 말씀은 聖徒들에게 靈的 糧食이 되었고, 이런 말씀으로 養育 받은 聖徒들은 하나님께서 敎會들에게 말씀하시는 다양한 요구들을 順從하는 마음으로 實踐해 나갔다. 祈禱하는 敎會, 傳道하는 敎會, 宣敎하는 敎會, 交際하는 敎會, 奉仕하는 敎會, 사랑이 넘치는 敎會, 養育과 訓練이 잘 이루어지는 敎會 등 韓國敎會를 나타내는 대표적이 修辭들이 결국 講壇에서 宣布된 말씀의 힘이며, 이것이 떨어져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은 결과다.

 

이런 연유로 韓國敎會에서는 무엇보다 說敎가 가장 重要한 牧會使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미국 등 다른 지역에서도 說敎는 重要한 牧會使役임에 틀림없지만 韓國의 경우 그 정도가 훨씬 더 높은 位置에 있다. 說敎者가 講壇 使役이 쇠퇴하면 敎會도 쇠퇴하고, 說敎가 위기를 겪게 되면 敎會 또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敎會가 거듭나고 바로 서기 위해서는 講壇에서 외치는 說敎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오늘의 韓國 敎會의 講壇에서 외치는 說敎가 과연 敎會成長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說敎가 聖經에서 떠나 非聖經的이며, 非神學的인 說敎 아닌 說敎를 남발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직업적인 復興師들은 卽興的이고 웃기기 위한 만담으로 禮拜를 이끌어가고 있는가 하면, 物量主義的인 敎會의 擴張을 바라는 一部 牧會者는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다 動員한다.

 

基督敎가 說敎를 경시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다. 敎會史的으로 보면 說敎 즉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宣布된 때는 敎會가 바로선 時代였으며, 敎會가 타락한 시기는 바로 說敎가 타락된 時代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敎會의 本質이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느냐의 여부는 講壇에서 외치는 說敎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 韓國敎會는 내부로부터 “韓國敎會의 說敎, 이대로 좋은가”라는 심각한 自己反省과 說敎의 현주소를 묻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 說敎의 危機는 어디서 오는가? “說敎者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외쳐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전부를 宣布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한 채 時代的 狀況 分析이나 歷史와 이데올로기의 解釋으로 자기 使命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또한 聖經말씀을 批判的인 學問的 方法에 의해서 分析하고, 마침내 社會定義나 敎會확장의 자기目的에 맞도록 任意的으로 再構成함으로써 韓國敎會의 講壇은 說敎不在의 危機를 맞고 있다.

 

이 論文에서는 韓國經濟의 成長과 맥을 같이하면서 韓國敎會의 成長을 이끌었던 說敎의 肯定的인 측면보다는 21세기 物質文明의 홍수 속에 점차 說敎의 本質에서 멀어지고 墮落해 가는 韓國敎會의 問題점을 깊이 認識하고, 그 代案으로서 聖經적인 說敎의 原流를 찾고자 「聖經的인 관점에서 說敎의 方法硏究」에 論議의 重點을 두고자 한다.

 

敎會의 事役과 存立에 있어서 說敎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런데 問題는 現代 韓國敎會에서 說敎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宣布되는 횟수는 많은데 그만큼 效果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좋은 음향과 시설이 있음에도 聖徒들의 靈的 성숙을 가져다줄 生命力 있는 說敎를 듣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다. 講壇에서의 說敎를 통하여 전해져야 할 聖靈의 感動은 점차 외면 당하고 있는 이런 현실의 問題를 說敎者라면 누구나 認識하고 있다. 분명 說敎의 위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危機를 극복하여 다시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聖靈의 感動이 살아있는 生命력 있는 說敎로 回復할 수 있겠는가?

 

가장 重要한 것은 근본적으로 說敎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聖靈의 役事를 통해서 聖徒들에게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가장 聖經的인 說敎의 原理는 무엇일까를 硏究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新․舊約 聖經에서 提案하고 있는 說敎의 方法을 硏究함으로써 오늘날 韓國敎會가 직면한 說敎의 危機를 克復할 수 있는 方法을 提示하고자 하는 것이 본 論文의 目的이자 意義라고 할 수 있다.

 

第 2 節 硏究方法 및 範圍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 21장 15-17)고 하셨다. 여기 주의 양과 그 양을 委託받은 牧羊者가 나온다. 牧羊者의 할 일은 福音의 生命공급(먹이다)과 天國을 指向한 生活 訓練이다. 牧者가 양을 이끌고 이 牧場 저 牧場으로 이끌며 먹이던 옛날과 오늘의 牧場은 다르다. 오늘의 牧羊은 양을 치는 자가 비료를 뿌리고, 풀을 싱싱하게 하며, 해마다 풀을 바꾸어가며 잘 가꾸어서 양떼를 먹인다. 옛날의 양과 지금의 양 그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비해 現代는 知識이 발달했으며 그 知識을 應用해서 現代的으로 보다 健實하게 양을 먹일 수 있는 색다른 方法을 使用한다는 것이다.

 

본 論文의 硏究方法은 聖經의 考察을 통해 神學的 觀點에서 說敎의 方法을 硏究하도록 하겠다. 즉 제 2장에서 說敎란 과연 무엇인가를 통해 說敎의 진정한 意味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3장부터는 時代別로 舊約과 新約을 통한 聖經的 硏究와 初代敎會 그리고 中世敎會 宗敎改革時代 및 現代 敎會의 說敎 등 歷史學的 年代期別로 提案하고 있는 說敎의 類型을 살펴보고자 했다. 제 4장은 說敎의 諸方法과 類型에서 4가지 類型을 提案하고자 한다. 5장에서는 홍정길 牧師의 提案처럼 “說敎의 更新은 說敎者의 更新에서 찾아야 한다”라는 말처럼 說敎者의 資質에 대해 논하고 자 한다. 끝으로 6장에서는 結論과 本文要約 및 앞으로 어떤 硏究가 더 必要한가에 대한 提案 등으로 본 論文을 마치고자 한다.

 

본 論文의 硏究 범위는 어떤 획기적인 理論이나 方法 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專門的인 論理를 펼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 論文이 實際的인 전개 方法과 범위는 오늘의 韓國敎會 講壇의 說敎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질서한 說敎현장에서 바람직한 說敎의 점검을 위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서 이론적 근거를 硏究, 검토하여 급변하는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實際的인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第 2 章 說敎의 基礎와 目的

 

第 1 節 說敎의 定義

 

1. 說敎學者의 定義

 

미국의 說敎者 블랙우드(Andrew W.Blackwood)와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說敎란 “人間에 의한 人間에 의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팰프는 “說敎는 說得을 목표로 하는 談話”라고 했고, 비넷 교수는 “說敎란 基督敎 眞理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說明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生活에 適用하기 위해 전해지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헤릭죤슨(Herrick Johnson)은 說敎는 “하나님의 말씀에 基礎하고 사람을 救援하려는 계획과 目的에서 사람을 感動하도록 하는 법 있는 宗敎的 講話이다”라고 하였고, 로이드 죤스(D.M.Lloyd-Jones)는 說敎란 全人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로 感服하게 되어 이 說敎者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說敎를 듣는 자 안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체험되며, 聽衆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實際的인 면에서 定義했다.

 

존 스타트(John Stott)는 “說敎는 聽衆이 하나님의 音聲을 듣고 應答하도록 말씀을 열어 그 意味를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說敎란 福音宣布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데 說敎者는 福音宣布에 있어서 言語의 구사 기술을 꼭 使用해야 하지만 言語 구사의 기술만으로는 福音을 宣布할 수 없다. 說敎者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言語라는 편의 도구를 하나님의 말씀과 맞바꾸려는 것이다. 說敎者는 단순히 大衆 演說者가 아니며 聽衆을 즐겁게 해 주려고 여러 주제에 걸쳐서 구미에 맞게 수다스럽게 興味 爲主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說敎者는 福音을 宣布하는 것이다.

 

2. 聖經的 定義

 

說敎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審判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傳播하라” 하셨다.(딤전4:1-2) 그러므로 聖經 말씀을 宣布하는 것이 說敎라 하겠다.

 

新約 聖經에 나오는 說敎에 대한 用語는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케류세인’ ( κηρύσσειν )이다.

 

이 用語는 新約에서 거의 60회가 使用되고 있는데 그 意味는 ‘전령으로서 福音을 宣布하다’의 뜻으로 公的 使者인 전령이 목소리를 높여 聽衆에게 분명한 消息을 宣布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人間을 죄와 사망에서 救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죽음과 復活 事件의 意味를 宣布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 福音 眞理 宣布를 통해야 비로소 救援받을 信者들이 생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앙겔리제스타이’ ( εύαϒϒελιζεσθαι ) 인데

 

“福音을 전하다”는 意味로 新約에 50번 理想 언급된다. 그리고 이것은 케루소와 相互 交換的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의 말씀(福音)을 전했다.(행15:35)

 

세 번째는 ‘마르투리아’ ( μαρτυρία ) 인데

 

“證據하다”, “證言하다”란 뜻이다. 이 用語는 法的 術語로 직접 經驗에 의한 知識을 갖고 있는 자의 眞理의 傳達을 描寫하는 말이다. 세례요한은 빛을 證據 하였고(요1:7-8),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證據 하였다(계1:2)

 

네 번째는 “디다스코”(διδαϭκω)인데

 

“敎訓”을 意味한다. 샤프는 說敎의 內容에는 敎訓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福音을 전하여 救援받은 靈魂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때 저들의 믿음을 키워 주시고 그리스도인의 人格을 成長시켜 天國 建設의 役軍을 養成하기 위해서는 敎育이 반드시 必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傳受된 메시지의 目的과 內容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앞의 動詞가 갖고 있는 要素를 排除하지 않는다.

 

3. 語源的 定義

 

新約聖經에서 케루소(Kerusso)와 유앙겔리조(Euangelizo)는 각각 ‘포고하다’와 ‘福音을 宣布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前者는 항상 公衆 앞에 福音을 宣布하는 것과 관계되고, 후자는 救援받지 않은 集團들이나 個人들에게 福音을 알리는 일을 表現 할 때 쓸 수 있다. 반면에 ‘가르치다’로 解釋한 디다스코(Didasko)는 오늘날 使用하는 ‘說敎’라는 단어에 더 가까우며, 福音을 믿는 사람들에게 眞理를 宣布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전4: 17).

 

그러므로 우리는 說敎란 믿지 않는 不信仰 속의 죽어 있는 靈魂을 救援하기 위하여 宣布되어지는 福音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안에서 養育하기 위하여 가르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理解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같은 說敎의 語源的 定義는 “福音에 대한 대중적 宣布”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救援의 使役을 成就하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生命을 주신다는 것을 宣布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語源的인 면에서 說敎는 “하나님의 榮光스러운 메시지인 福音을 直接的인 經驗에 의한 知識을 갖고 있는 자가 宣布하여 전하는 것”이 라고 定義 할 수 있다.

 

第 2 節 說敎의 要素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完成된 救援사건을 하나님의 말씀과 聖靈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生活과 役事에 適用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說敎者에게는 說敎할 메시지의 內容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대단히 重要하다.

 

그 內容을 두 가지로 말하면 「케리그마」와 「디다케」이다. 둘 다 聽衆을 대상으로 說敎하는 사실에는 아무런 異義가 없다. 그러나 그 目的이 다르고 適用이 다르다. 마치 똑같은 쌀을 素材로 음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는 밥을 만들어 어른들을 對象으로 供給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죽을 만들어 어린 아기에게 供給하는 것과 같은 原理로 理解하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救援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傳道 說敎를 決定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敎訓的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定立시켜 주는 것이 디다케이다. 다드(C.H.Dodd)는 이 두 가지를 說明하기를 케리그마는 사람을 救援에 이르게 하는 眞理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와 復活이 그 內容이며, 디다케는 메시지의 內容을 깨우치고 敎訓하는 要素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다드에게 있어서는 케리그마가 一次的이며, 根本的인 것이고, 디다케는 二次的인 養育의 意味였던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니(E.P.Clowney)는 다드의 하나님 말씀을 等級하는 입장은 크나큰 실수였다고 지적하면서, 디다케는 二次的인 것이 아니라, 宣布의 一部라고 주장하였다. 케리그마와 디다케는 說敎의 두 요소이지만 傳道的인 면이나, 敎訓的인 것의 强調에 있어서 또는 說敎의 요소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나 絶對的인 것이 아니다.

 

1. 케리그마(kerygma)

 

케리그마 說敎는 說敎者가 非基督敎세계에 대하여 ‘좋은 소식’ 즉 ‘福音’을 大衆的으로 傳播하는 것이다.(고전 1:21). 케리그마 說敎는 不信者에게 행해지는 것이며, 十字架와 復活의 宣布속에 그 中心的 引力을 가진다.

 

케리그마는 敎訓의 性格과는 달리 非基督敎的인 世界에 公的으로 基督敎를 宣布하는 것을 말하며, 사람을 救援에 이르게 하는 眞理를 意味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十字架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노라”(고전 1 : 23)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舊約에 豫言대로 오셨고, 十字架에 죽으시고, 復活하시고, 이제 再臨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宣布하는 것이 케리그마 說敎다. 한마디로 “기쁜소식” 즉 福音의 宣布를 일컫는 것으로 十字架와 復活에 대한 宣布, 죄의 悔改, 죄의 容恕에 대한 約束, 이 세 가지를 묶어서 ‘케리그마’ 福音의 기쁜 消息이라한다.

 

그러므로 케리그마 설교론을 聖經的으로나 基督敎的인 視覺에서 照明해 볼 때 가장 福音的인 說敎가 될 수 있다. 틸리케(Helmut. Tielicke)는 이런 說敎者를 救援의 技術者라고 불렀다. 이처럼 이 형태의 說敎는 基本的으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救主로 迎接하도록 하는데 그 일차적인 관심을 두는 說敎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이 說敎가 반드시 不信者들만을 對象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많은 懷疑를 나타낸다. 그 이유가 이미 예수를 救世主로 迎接한 무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救贖事件은 수시로 强調 되어야하고 오늘의 事件으로 새롭게 認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宣布的인 說敎는 어느 特殊 個人이나 集團을 對象으로 삼는 것 보다 全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2. 디다케(didache)

 

디다케는 敎訓을 意味하는 말로서 說敎의 內容 속에 포함되는 깨우치고, 가르치고, 敎訓하는 요소를 말한다. 福音說敎를 통해서 救援받은 자들을 자라게 하고 穩全케 하는 일종의 養育 내지 弟子訓練을 目的으로 宣布되는 說敎이다. 칼빈(Calvin)은 "敎會는 참 하나님의 말씀이 宣布되어지는 곳“이라고 말한 바 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의 宣布는 說敎를 통해 깨우치고, 가르치고, 敎訓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啓示 그 自體이고, 디다케는 그 啓示에 대한 人間의 反應이며 敎訓과 가르침과 順從을 意味한다.

 

舊約時代에 說敎에 있어서도 律例와 法道의 敎訓的 說敎가 있고, 新約時代에 와서도 세례 요한의 敎訓的 說敎(눅 3: 7-14), 예수의 山上垂訓 및 해변說敎(마 13장), 다락방 講話(요 13 : 3-16) 등의 敎訓的 說敎가 있으며, 사도들의 說敎에 信仰生活의 實踐을 强調하는 敎訓的 說敎가 있다. 이 說敎는 福音을 던지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說敎者들에게 값있는 指針이 될만한 말이다. 던져진 眞理를 받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眞理를 밝게 해 주는 後續 措置를 취한다는 것은 知慧 있는 說敎者의 자세이다. 이런 意味에서 이 敎訓的인 說敎는 基督敎信仰을 바르게 깨우쳐 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第 3 節 說敎의 目的

 

說敎의 目的이 데이비스(H.Crady.Davis)가 주장한 바대로 不信者를 改宗시키는데 目的을 둔 케리그마만이 說敎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며, 적어도 오늘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그들의 信仰에 새로운 活力素를 계속 供給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現代라는 社會 속에서 온갖 問題와 병을 안고 있는 크리스챤들에게 眞理의 말씀으로 照明해주고 治癒해 주는 임무를 說敎가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케르그마와 함께 하나님의 命令과 가르침을 宣布하는 것이 現代 說敎의 올바른 目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성구 교수는 “說敎란 한마디로 만남이다. 改革主義 자들은 說敎를 「호밀리아(Homilia)」라고 불렀는데 이 뜻이 바로 「만남」이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즉 說敎란 救贖主인 하나님과 죄인인 人間을 만나도록 하는데 目的이 있다. 티야드도 說敎의 目的을 “하나님과 說敎를 듣는 會衆들 간에 永遠한 個人的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努力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說敎者는 반드시 會衆들이 자기들의 삶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들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引導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說敎란 단순히 새로운 情報를 提供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聽衆들이 그 說敎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서 信仰的 發展을 한 걸음 더 내딛게 하여야만 한다.

 

존 부로더스(J.A.Broadus)는 說敎의 目的을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두 번째는 靈魂의 救援이며, 세 번째는 說敎를 통해서 敎會가 敎會되고, 聽衆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成熟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임스 콕스(James Cox)와 같은 說敎 神學者는 傳道說敎, 講解說敎, 敎理說敎, 牧羊說敎, 奉獻說敎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 目的들을 廣義的 차원에서 세 가지로 분류하여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救援을 目的으로 한 宣布的인 說敎

 

화란의 반델 비흐트(W.H.Van der Vegt)는 그가 편집한 칼빈의 說敎集 序文에 쓰기를 “說敎 없이는 救援이 없다”는 말을 함으로써 改革敎會에 있어서 說敎의 目的을 잘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救援을 目的으로 하는 傳道說敎가 宣布되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누가福音 22장 46, 47절에 기록되기를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苦難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悔改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族屬에게 傳播될 것이 紀錄되었으니” 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은 救援의 說敎를 하셨다. 예수는 길 잃은 자를 救援하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도 說敎에서 先知者들의 豫言대로 이룩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과 昇天을 主 內容으로 다루면서 그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그 앞에서 人間들은 悔改하고 容恕함을 받을 것을 宣布하고 있다.

 

이러한 內容은 복된 消息으로서 죽어 가는 人生이 永生의 삶으로 전격的으로 轉換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宣布的인 說敎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救世主로 迎接토록 하는데 目的을 두고 있다. 틸리게(Helmut Tielicke)는 이런 說敎者를 救援의 技術者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說敎의 目的은 聖經에 啓示된 宗敎的 眞理를 가지고 生命을 救援하는데 있다.

 

2. 敎育을 目的으로 한 敎訓的 說敎

 

왜 敎理的 說敎는 必要한가? 브로더스 (J.A.Broadus)는 “교리 곧 가르침은 說敎者의 주요한 임무이다”라고 한다.

 

救贖史의 宣布를 통하여 예수를 救世主로 믿는 사람이 된 후에 그 후속 조치를 成功的으로 취하는 것은 說敎者들에게 必須的인 요긴한 단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行動하느냐에 관한 行動指針의 提供이 바로 敎訓的인 說敎의 內容과 形態이다. 오늘도 敎會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 世界의 內容과 그 秩序와 責任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重要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次元에서 이 說敎를 敎理 說敎라고 부른다.

 

說敎는 本質的으로 敎理적이다. 그러므로 敎訓的 說敎는 언제나 근거가 敎理的인 것이어야 하고 成熟의 길로 引導되어 證據되고 收用된 眞理는 반드시 實踐的인 삶이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眞理만 전하고 말라는 것이 아니라, 眞理를 삶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牧會書信들(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핵심 命令語는 “가르치다”이다. 물론 객관적인 사실들도 가르쳐야 하지만, “敬虔”을 增進하기 위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說敎의 機能은 福音이 어떻게 삶과 關係를 갖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基督敎說敎의 窮極的인 目的은 福音을 믿게 하며, 그에 따라 살도록 전하는 것이다. 모든 說敎者의 마음에는 항상 “길이요, 眞理요, 生命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살게 하는 끊임없는 바람이 있어야 한다.

 

敎訓의 目的이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描寫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傳播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智慧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람의 靈魂이 救援받아 거듭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제 그 靈魂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引導되어야 하며, 그의 거룩한 믿음 위에 그 自身을 建築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3. 治癒的인 說敎

 

牧羊說敎 혹은 狀況說敎라고도 불리운다.

 

治癒的인 說敎는,

① 어떤 問題나 어려움을 인정하며,

② 있을 수 있는 분명한 解決策을 보여주고,

③ 그 問題와 관련되는 聖經의 眞理를 밝혀 주는 것이다.

 

現代人들은 高度로 발달된 文化圈 속에 살면서 開發된 機械文明의 尖端인 電子時代의 혜택을 받고 또 그것을 즐긴다. 그러나 精神的인 고통은 어느 時代보다 심각하게 現代인들을 압박하고 있다. 일찍이 스위스가 낳은 유명한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e)은 그의 『묻혀있는 自身』이란 책에서 불안한 소망과 함께 미래를 보는 人間의 눈이 肉體的, 政治的, 經濟的, 精神的인 고통이 繼續되는 오늘 속에 집결되어 있다“고 오래 전에 이미 갈파한바 있다. 時代가 흐를수록 現代인들은 병들어 가고 있다. 모두가 煩悶과 倦怠와 挫折과 不安 등의 상처를 안고 있다. 이들 모두가 어떤 면으로든지 치료를 받아야 할 精神的 또는 肉體的인 환자들이다. 그러므로 現代人들에게 절실하게 必要한 것은 牧羊說敎라고 불리우는 治癒說敎이다.

 

이 說敎의 權威者인 포스딕(Henr y. Emerson Fosdick)은 “모든 說敎는 어떤 問題 즉 마음을 혼란에 빠뜨리고 良心을 무겁게 하며, 生活을 어지럽히는 생생하고 重要한 問題의 해결을 그 주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現實的인 問題를 다루고 거기에 적은 빛이라도 던져주며 어떤 개인들을 도와서 實際的으로 그것을 통하여 자기의 갈 길을 찾게 해 주는 說敎라면 결코 흥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說敎는 환자에게 無限한 慰勞와 믿음의 큰 膽力을 얻게 하는 契機가 되게 한다.

 

비록 21세기 문전에 서서 尖端의 삶을 살고 있는 現代인들이지만 오늘도 절대다수의 會衆들은 敎會에서 포근하고 부담 없는 말씀을 받아 보려고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음을 본다. 이 각박한 苦難의 人生 길에서 마음에 상처받고 靈魂이 병들고 心靈이 메마른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을 주며,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治癒의 說敎야말로 대단히 유익한 說敎다.

 

4. 豫言的 說敎

 

社會的인 問題에 治癒的 메시지를 말한다. 舊約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新約의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뜻과 그 眞理를 혼탁한 그 당시의 社會에 외쳤던 것이 바로 이 說敎의 典型的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說敎者가 이끌고 있는 양들의 個人的인 타락과 不信仰의 모습을 비롯하여 그 時代의 不正, 腐敗와 여러 非道德的인 問題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照明하고, 그 길을 바르게 걷도록 외치는 것이 이 說敎의 目的이다.

 

이 說敎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問題點을 알아야 한다. 적절한 탄약도 없이 說敎라는 총을 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全體 福音을 說敎해야 한다. 그 이유는 說敎者도 한 人間으로서 어느 때 어떤 실수를 범할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自身이 완전하지 못함을 고백해야 한다. 도덕성이 타락과 부정과 부패의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벽한 細則을 제시하려는 욕심보다는 原則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넷째는 基督敎人들로 하여금 行動으로 옮기게 하여야 한다. 이 說敎에서는 어느 說敎보다도 會衆의 行動하는 良心과 그 結實이 可視的으로 나타나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 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成就되는 것을 目的으로 하는 基督敎의 메시지는 개인적 회개와 救援의 信仰과 敎理的 가르침과 상처를 치료하는 牧會的 治癒說敎와 더불어 하나님의 公義와 사랑이 社會 속에 具體的으로 실현될 수 있게 하는 豫言的 說敎를 해야 한다.

 

第 4 節 說敎의 重要性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手段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共生涯 事役도 說敎로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說敎를 위해 오셨다”는 죠지 버트릭(G. Buttrick)의 말과 같이 예수의 생애는 說敎로 點綴되었다. 예수는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그것이 주된 使役은 아니다. 예수의 첫 번째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福音을 믿으라(막 1:14-15)는 說敎였고, 마지막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福音을 傳播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救援을 얻을 것이요“(막 16:15-16)라는 說敎命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弟子들에게 부과하신 첫 번째 책임이 弟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행하신 最後의 命令, 또 그들의 약속된 聖靈을 받고서 행한 最初의 行爲 이것들이 모두 說敎였다.

 

이와 같이 說敎는 사도들에게 맡긴 命令이요 아울러 敎會에 맡긴 命令이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오는 날까지 說敎는 繼續되어야 한다. 그 어떤 使役도 說敎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사도들도 供饋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自身들은 오직 말씀 傳播와 祈禱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고백하였는데(행 6:2) 이것은 說敎使役의 重要성을 뒷받침 해주는 證據이다. 그러므로 2천년 교회사는 說敎의 使役이다. 基督敎의 발전 성쇠는 說敎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도時代의 베드로가 說敎할 때의 復興, 中世期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 의 위대한 說敎가 나올 때에 復興, 마틴루터가 그의 說敎로 敎會를 改革할 때의 復興, 19세기에는 죤 웨슬레라는 위대한 부흥사의 說敎에 의한 영국의 覺醒運動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必要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說敎이다. 또한 그리스도인과 回心者들의 心靈을 채워 養育하는 것도 역시 說敎이다. 이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福音을 傳達하는 說敎는 敎會와 聖徒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치며 더 큰 靈的 成長을 하도록 挑戰을 준다. 救援의 眞理를 傳達하고 說明하는 福音的 說敎는 그리스도인의 靈的 成長을 돕는 決定的 手段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로운 說敎가 宣布되는 敎會의 聖徒들은 살아있는 信仰을 갖게되고 敎會도 눈에 띄게 成長하게 되는 것이다.

 

福音의 窮極的인 目的이 사람에게 生命을 주는 것이다. 그르므로 다른 어떤 것도 說敎보다 더 重要한 것은 없다.

 

다네(James Daane)는 說敎의 重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說敎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었다. 한편 에밀 브른너(Emile Brunner)도 說敎의 重要성에 대하여 “진실한 說敎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宣布되고 있는 곳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重要한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베델도 基督敎가 서느냐 몰락하느냐 하는 것이 說敎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D.M.Lord Jones) 역시 “개인 상담이나 그의 모든 활동은 說敎를 보좌하는 手段이지 說敎보다 앞선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곽안련 교수는 說敎하는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최고의 特權으로서 그리스도의 生命의 道를 전하여 영원히 죽을 인생을 永生의 길로 救援하는 것이다.라고 說敎의 重要성을 말하였다.

 

일리온 존스(Ilion T . Jones)도 說敎의 重要성에서 첫째, 말씀의 청지기 使命이기 때문이며 둘째, 말씀 宣布를 위한 使用이며, 셋째, 하나님의 救贖의 道具이며, 넷째, 人間의 人格을 통한 하나님의 眞實이며, 다섯째, 禮拜의 中心으로서의 說敎이며, 여섯째, 牧會의 基礎로서 說敎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敎會成長에서 說敎는 가장 重要한 역할을 한다.

 

敎會成長에서 說敎가 왜 重要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命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目的을 이루기 위해서 說敎者를 택하셨고(딤전 4:16) 敎會成長과 발전을 통하여 窮極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完成시키시는 것이다. 說敎가 敎會를 存在케 한다는 말에는 意味가 있다.

 

說敎를 통해서 初代敎會의 사도들은 敎會를 세웠다. 原始敎會가 成長하는 그 모퉁이 돌은 바로 說敎였다. 現實에 있어서도 敎會가 成長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좋아야 한다.

 

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敎會를 나오게 되는 동기 중 가장 큰 요인이 바로 說敎말씀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聖職者와 平信徒에 設問調査 중에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說敎가 敎會成長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平信徒들은 說敎가 敎會成長에 ‘絶對的이다’가 66.5%이고 ‘絶對的은 아니나 重要하다’가 32.8% ‘보통이다’가 1.4% ‘重要하지 않다’가 0.3%로 說敎가 敎會成長에 重要한 것을 알 수 있다.

 

牧會者는 說敎를 위해 存在하며 하나님의 나라 宣布를 위해서 存在한다. 說敎는 하나님의 나라 擴張을 위해서 存在하며, 또한 敎會成長을 위해 牧會者와 說敎는 存在한다.

 

說敎가 牧羊의 方便도 되지만 敎會成長에는 絶對的인 方便이 될 수밖에 없다. 하루 삼 천명이나 悔改하고 설립된 예루살렘敎會를 비롯한 모든 初代敎會가 使徒들과 敎會 일군들의 說敎를 통해서 成長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韓國敎會는 說敎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의 敎會成長을 이룩하였음을 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第 3 章 聖經 神學的 說敎의 內容

 

第 1 節 舊約時代의 說敎

 

1. 五經說敎

 

基督敎의 說敎는 유대적인 背景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說敎者들과 聽衆들 그 배경과 靈的인 관계는 유대적이었다. 그러므로 說敎의 방식이 舊約의 선지자와 랍비들의 형식을 따랐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이었다. 아담의 칠대손 에녹은 예언을 했으며, 노아는 “義의 傳播者라” 불리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에게 전하는 責任을 맡았을 때 그 지팡이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가지고 이스라엘 인도자가 되었다. 이런 초기의 時代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職務에 대한 證據를 感知할 수 있다.

 

모세 오경 중에는 족장들과 민족의 指導者들을 통해 주신 길고 짧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說敎가 많이 들어 있다. 특별히 신명기는 모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自身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요단 맞은 편 아라라 광야에서 고백한 說敎의 책이다. 이 신명기 책이 요시야왕 통치 18년에 예루살렘 聖殿에서 발견됨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重要한 말씀에 의한 宗敎改革이 단행되었던 것은 유명한 敎訓的인 사건이었다(왕하22:8-13). 그러므로 신명기 책은 舊約說敎의 출발점이며, 그 이후의 모든 豫言者들은 이 說敎를 基礎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舊約說敎의 原型 중 하나 이다. 특히 新約에 와서는 福音書나 書信書에서 舊約이 많이 인용되었으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舊約說敎의 시초는 신명기와 說敎者는 모세라고 추론된다. 사실 모세의 신명기는 후대에 말씀의 復興을 일으킨 重要한 說敎였다. 모세의 說敎는 율법을 그 역사적 상황에 맞게 올바르게 適用하여 그것을 지키며 살 것을 勸告, 警告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順從케 하여 민족의 信仰回復을 이룩하고 選民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였다. 모세는 신명기 說敎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信仰을 크게 세 가지로 更新하였다.

 

첫째는 唯一 神觀의 定立이다.

 

둘째는 信仰 倫理書의 强調이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따라서 개인과 불쌍한 사람을 保護하는데 그 目的이 있다.

셋째는 契約의 重視이다. 이 契約關係 때문에 이스라엘은 契約을 지킬 의무를 갖고 이 契約을 지키므로 祝福 받도록 勸告한다.

 

2. 先知者들의 說敎

 

포사이드(Forsyth) 같은 학자는 聖經 자체를 최대의 說敎로 보았으나, 아무래도 先知者들의 활동에서 舊約說敎의 특징을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先知者들의 宣布의 특징을 침멀리(W. Zimerli)는 4가지로 들었다.

① 解釋을 요하는 理想과 불분명한 입술에 붙은 말을 하지 않았으며,

② 그들의 宣布는 이스라엘의 歷史的인 事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③ 이들의 宣布는 단순한 思想이나 理念이 아니라 歷史的인 事件이고,

④ 예언자는 종종 백성의 기대와 백성들이 소중히 여기는 傳統에 相反되는 宣布를 함으로써 하나님은 自由意思에 따라 行動하고 말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이 先知者들의 특징은 야훼의 말씀을 그 時代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先知者들의 기능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첫째, 보는 기능, 둘째, 듣는 기능, 셋째, 歷史를 解釋하는 기능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先知者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동시에 그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말로나 글로써 또는 두 가지 모두로써 그의 백성들에게 傳達하도록 指示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先知者들은 不義를 責하고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은 悔改하는 자를 容恕하고 救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장차 메시아가 오신다고 約束하였다.

 

3. 會堂의 說敎

 

舊約과 新約의 說敎를 連結해 주는 것이 회당의 說敎다. 회당의 起源에 관한 정확한 年代는 알려지지 않으나 많은 學者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예루살렘 聖殿에 가서 禮拜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聖殿 대신 세워진 것이 會堂이라고 한다.

 

會堂에서의 禮拜는 후일 基督敎會의 禮拜의 原型이 된다. 會堂에서의 禮拜는 율법의 낭독과 說敎가 집회에 가장 重要한 部分이었다. 당시는 會堂長이 司會를 맡고 說敎는 주로 律法學者가 맡았으며 說敎는 聖經의 일부를 읽고 그것을 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會堂에서의 랍비들의 說敎는 先知者들의 說敎보다 신선미를 잃어 갔다. 그 이유는 랍비들이 舊約 先知者들의 하나님 말씀 보다 백성들에게 더 호감이 가는 탈무드와 미쉬나 같은 口傳이나 法典을 더 즐겨 가르쳤기 때문이다. 사실 탈무드를 說敎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그 說敎는 生命力을 잃었던 것이다. 말씀이 生命力을 잃을 때 會堂은 타락했다.

 

第 2 節 新約의 福音的 說敎

 

1. 세례요한의 說敎

 

舊約의 선지자들의 說敎와 예수님의 福音傳道 說敎를 연결하는 다리는 예수님께서 “先知者보다도 나은 자”라고 불렀던 세례요한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 바로 廣野였다.

 

세례요한의 說敎는 마3:1-12에 기록된 대로 悔改의 說敎, 天國의 說敎, 恩寵의 說敎였다. 그의 메시지에는 임박한 진노를 가리는 審判을 力說하고, 도끼나 나무뿌리에 찍힌 懲罰을 警告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興해야 하겠고 나는 衰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함으로 그의 說敎가 죄를 회개하고 救援을 제시할 뿐 아니라 自身은 철저히 낮아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고 있다. 오직 救主의 紹介者로서 充分하다.

 

2. 예수님의 說敎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說敎의 中心이며 對答이 되신다.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흔히 說敎는 聖經에 基礎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聖經의 中心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한 說敎의 참 모습은 그리스도의 說敎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 自身이 福音이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自身을 說敎하셨다.

 

예수의 說敎의 重要한 部分은 마가福音 1장 14-15절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福音을 傳播하며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悔改하고 福音을 믿으라” 위에 引用한 구절에서 마가는 예수의 완전한 說敎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지는 않지만 예수의 說敎를 세 部分으로 要約하여 제시해 준다.

 

① 때가 찼다.

②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③ 悔改하고 福音을 믿으라.

 

따라서 예수님의 說敎의 職能과 特徵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예수님의 說敎는 유대 宗敎指導자들의 說敎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 안식일 가버나움 會堂에서의 說敎는 聽衆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마가는 기록하기를 “이는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막1:22)라고 했다. 예수님의 權威는 그의 人的 權威에 基礎한다. 예수님의 道德的 分別力은 하나님과 斷切되지 않은 交際에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완전한 善과 敬虔이 실재한다. 예수님의 說敎는 메시아의 紹介가 아니며 自身의 救援을 宣言하는 메시지였다. 그러므로 주님의 說敎는 차원이 다른 權能 있는 說敎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說敎는 사람들의 죄를 審判하는 豫言者로서의 說敎였다. 죄를 審判하는 說敎는 宗敎인을 가장한 形式主義자들, 儀式主義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헤롯 안디바를 향해 “여우”(눅13:32)라고 한 것이다. 주는 죄인을 사랑 하셨다. 그러나 죄 있는 그대로는 사랑하지 않으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救援과 永生을 目標로 하여 說敎하셨다. 祭司長으로서의 사랑과 慈悲의 說敎는 마음에 상처입고 소외된 자들에게 치유와 사랑과 救援의 恩惠를 宣布하는 오늘의 救援(눅4:18-19)이었다. 예수님의 說敎는 속죄와 十字架에 관련되었고 특색으로는 오실 자를 言及한 것이 아니라 自身이 救援이라는 것을 宣布하는데 있다.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說敎는 하나님 나라가 中心 思想이다. 예수님의 說敎의 强調 點은 하나님은 실제로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 모든 人間은 그의 자녀이므로 그에게 順從하고 , 그를 信賴하여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3. 使徒들의 說敎

 

예수의 弟子로서 使命을 감수해야 할 열 두 使徒들에게 使徒라는 독특한 이름을 주었다. 그 이름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自身들의 思想이나 經驗 또는 意志를 펼치기 위하여 나서는 存在들이 아니었다. 使徒란 일정한 使命을 받아 보내는 자의 뜻을 펴나가기 위하여 전 生涯를 바쳐 나가는 存在들이었다.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사도들의 說敎는 使徒行傳을 中心으로 베드로의 說敎 9편, 바울의 說敎 9편, 스데반의 說敎 1편, 야고보의 說敎 1편이다. 여기서는 베드로와 바울과 스데반을 中心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베드로의 說敎

 

베드로의 9편의 說敎 중 비교적 說敎 형태를 잘 갖추고 사도적 케리그마가 잘 드러나는 說敎는 3편이다. 행 2:14-41의 오순절 說敎와 행 3:12-16의 앉은뱅이 치유후의 說敎 그리고 행 10:34-43의 고넬료 家庭에서의 說敎이다.

 

특히 오순절날에 행한 베드로의 說敎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復活을 통하여 百姓들이 悔改하고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宣布였다.

베드로의 說敎를 整理하면

 

첫 번째, 舊約의 약속이신 豫言이 成就되었다는 사실의 强調이다(행2:16, 행3:33-36).

두 번째, 하나님의 主權的 能力에 대한 强調이다.

세 번째, 救贖을 成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强調이다.

네 번째, 聖靈의 使役이다(행 10:30, 2:38)

다섯 번째, 救贖史에 대한 倫理的 決斷(행 2:40) 등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說敎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의 케리그마이다.

 

2) 스데반의 說敎

 

우리가 新約聖經에 나타난 說敎를 논할 때 스데반의 說敎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사도는 아니었으나 사도행전 7장에 한편의 說敎를 하고 순교하였다. 결국 그의 說敎는 유대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說敎였다.

 

그 說敎의 要旨는 단순히 舊約의 歷史的인 사건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불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렬한 悔改를 촉구하는 舊約을 基督敎화한 메시지였다. 이 說敎에 의하여 분노한 聽衆들의 돌에 맞아 殉敎를 했다.

 

스데반이 첫 번 殉敎者로서 외친 十字架의 福音은 열매를 맺어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動機를 주게 되었다. 스데반 집사의 說敎는 무서운 能力을 나타냈다. 스데반이 한번 죽어 基督敎 殉敎歷史를 연후 그 뒤를 이어 殉敎한 자가 천만에 달했으니 그 몸은 죽었으나 그 模範은 죽지 아니한 것이다.

 

3) 바울의 說敎

 

바울은 大說敎者였다. 우리는 바울의 說敎를 통해서 사도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聽衆의 理解, 당시 演說의 方法과 型式 등을 發見할 수 있다.

 

바울이 행한 說敎의 주 대상은 이방인이다. 바울은 최고의 敎育을 받은 율법학자로서 헬라어에 능통했고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행 22:3,28) 이런 배경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적격자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다른 아무 것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죽으심만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곽선희 牧師는 바울 說敎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舊約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점. 둘째, 舊約解釋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셋째, 율법적 관계에서 福音을 說明했다. 넷째, 그리스도의 十字架와 復活을 中心으로 한 說敎이다라고 했다.

 

사도들이 남긴 召命에의 確信과 說敎의 특성을 보면서 우리 說敎의 줄기를 다시 다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사도들은 스승의 命令대로 한 마음으로 모여 聖靈의 임재를 祈禱 속에 기다렸고 약속대로 보내 주신 聖靈의 권능으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經驗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명의 참뜻을 깨달았다.

 

둘째, 사도들의 나타난 메시지의 內容과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생애와 敎訓과 十字架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復活과 審判主로 다시 오실 것을 宣布하는 것이다.

 

셋째, 사도들의 說敎가 진행되었던 영역에 대한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萬民에게 福音을 傳播하라”는 예수의 命令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넷째, 說敎者로서의 使徒들의 자세 속에서 오늘까지 이어져야 할 敎訓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證人이라는 어휘가 뜻하는 대로 이들은 순교적 자세로 福音의 宣布에 임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福音 宣布자들에게는 福音說敎의 方法을 제시해 주는 說敎였다.

 

第 3 節 敎父時代의 說敎 (1세기 - 430년)

 

敎父時代라면 대체로 사도와 敎父에 이르는 주후 4세기경까지의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로마제국이 팽창되면서 유례없는 박해가 說敎者들에게 가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반면에 A.D 300-400년까지는 콘스탄틴 대제의 基督敎 공인 이후에 敎會의 量的 成長의 단면을 보여준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도적 敎父時代에는 사도들의 信仰이 새로운 인물들에게 계승되어 생동력을 잃지 않고 다음 時代로 傳達되는 時代라고 볼 수 있다. 이 時代는 바울의 宣敎 영향을 받은 유명한 說敎者들이 나타나 說敎使役에 공헌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基督敎 信仰의 근본들을 權威로서 說敎한데 반해 敎父들은 그 信仰을 전제하고서 生活에 必要한 권면들을 說敎하였다.

 

1. 로마의 크레멘트(Clement of Rome. A.D 92-101)

 

크레멘트(Clement)는 60년경에 로마에서 고린도 敎會에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는 하나의 說敎文이었다. 이 說敎를 살펴보면 그는 舊約聖經을 많이 인용했고 사도들의 敎訓을 지키는 충실한 說敎를 하였다. 특히 바울의 영향이 많이 보이며 교리적이기 보다는 윤리형태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으로 있었으며, 107년경 트라야누스 황제 時代에 잡혀서 로마로 호송되어 殉敎 당했다. 호송 도중 그가 남긴 소아시아의 다섯 敎會에 편지한 일곱 장의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殉敎하는 기쁨이 나타나 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을 宣布하고 우리를 위하여 十字架에 달리시어 죽고 復活하였다고 斷言했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는 유대교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예수의 弟子된 자는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主의 날을 축하하라고 가르쳤다.

 

3. 폴리갑(Polycap)

 

폴리갑은 요한의 直系 弟子이다. 서머나 감독으로 1550경 殉敎했다. 그는 지사가 그의 人格과 學德을 귀하게 여겨서 석방할 의사를 가지고 가이사를 禮拜하고 그리스도를 욕하기를 권했으나, 信仰의 切開를 지키고 그리스도와 같이 잔을 마시는 殉敎者로서 參與하는 것을 기뻐했다. 폴리갑은 빌립보 敎會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肉身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비난에 반대하였고,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實際的인 勸勉을 했다.

 

4. 알렉산드리아의 유스티누스(Justinus of Alexandria)

 

유스티누스 때에 이르러 說敎는 哲學과 修辭學에 접촉하게 되었고 유스티누스는 철학세계에서 자랐지만, 한 노인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基督敎의 변증자로서 基督敎의 순결을 논하고 그리스도인의 救援을 주장하다 순교한 자이다.

 

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클레멘트는 이교도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리스의 아덴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판티누스 神學校에서 배우고 졸업한 후 교수가 되었다. 그의 스승 판티니우스의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宣敎 중에는 信仰과 知識, 헬라 哲學과 基督敎를 조화하고 절충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信仰을 물려받아 더욱 발전시킨 분이 그의 弟子 오리겐이다.

 

6. 오리겐(Origen)

 

오리겐은 基督敎人의 양친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순교 당하게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의 주선으로 살아 남아서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했으며 諷諭家와 聖經 批評家와 神秘主義者와 辨證家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說敎의 특징은 講解法이었으나 聖經의 자의적 解釋을 등한시하고 우의적 解釋에 치중하였다. 이렇게 聖經을 지나치게 우의적으로 解釋하여 많은 說敎者들에게 나쁜 影響을 주었다. 지나친 우의적 解釋을 하게 되면 聖經의 本文과 說敎의 本質적인 관련이 파괴되고 聖經을 자기의 空想이나 意見을 말하는 옷걸이 정도로 取扱하게 되는 것이다.

 

7. 터률리안(Tertullian)

 

터률리안은 북아프리카의 典型的인 說敎者이며 라틴神學의 원조라고도 불려진다. 그는 啓示를 초이론적인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 즉 敎理的 형태를 비유로 說明한 최초의 說敎者이기도 하다. 그의 말 가운데서 “나는 믿을 수 없음으로 믿는다”고 한말은 유명하다. 基督敎 說敎에 크게 공헌한 자이다.

 

8. 크리소스톰(Chrysostom)

 

안디옥의 크리소스톰은 基督敎 歷史上 巨峰이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본래 요한이지만 說敎에 능하고 雄辯的 說敎 때문에 크리소스톰(황금입- golden mouth)이란 별명이 본명처럼 쓰여지게 된 것이다. 그는 聖經解釋에 공헌하였고 敎會史에 있어서 참 註解者요 최대의 說敎者라고 불린다. 그는 說敎者의 資格에 대해 말하기를 웅변에 능하게 聖經을 使用할 것, 언제나 聖經을 옹호할 것, 잘 準備할 것, 사람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구할 것 등을 들었다. 그는 聖經의 문장 전후 관계를 주의하고 기자의 문의를 발견하도록 努力하였으며, 그 뜻을 당시 사람들의 모든 問題에 適用하는데 힘썼다.

 

크리소스톰은 宗敎改革 이전의 說敎가 중에서 최대의 聖經 講解者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안디옥학파의 학풍과 聖經解釋方法의 영향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說敎를 듣기 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모였다.

 

그의 說敎의 特性은 다음과 같다.

첫째, 聖經的이다.

둘째, 聖經에 대한 解釋은 單純하고 率直하였다.

셋째, 그의 道德的 適用들은 現實的이다.

넷째, 그는 罪를 宣告함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9. 어거스틴(St. Augustine )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로마카톨릭과 프로데스탄트가 공유하는 위대한 神學者이다. 그는 宗敎改革 前의 정통 神學者라고 불리우는 바울-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 루터- 칼빈의 信仰의 脈을 이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迎接하고 아프리카로 돌아와 희포敎會의 監督이 되어 世上을 마쳤다.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그의 說敎術 안내서 『基督敎 敎理』제4권은 說敎는 무엇보다도 聖經의 解說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立證하려고 애썼다.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哲學과 修辭學 그리고 說敎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解釋 說敎에 뛰어났으며 되도록 쉬운 말로써 일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다. 人間의 全的 墮落과 全的 無能力을 주장하고 救援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聖靈에 의한 新生으로 가능한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에게도 역시 은유적 說敎가 있었고 또 聖經本文에 의지하지 아니한 說敎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說敎의 선을 잇는 重要한 인물이었다.

 

第 4 節 中世時代의 說敎

 

中世時代를 暗黑時代라고 한다. 이 말의 意味는 바로 說敎의 暗黑時代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中世기의 敎會는 콘스탄틴 大帝 이후에 대체로 평온하게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敎會가 박해가 없어지니 안일에 젖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린 敎會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천 여년 동안은 說敎를 잃어버린 時代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中世時代에도 하나의 빛이 있었다면 12-13세기에 와서 도미니안파(Dominicans)와 프랜시스파(Franciscans)가 있었다. 그러나 그 활동은 극히 미비하여 그 어두운 時代를 밝히기엔 너무나 미약한 불빛이었다. 宗敎는 儀式만의 형태로 변모해 갔고 說敎는 남의 說敎를 표절하는 일이 파다했다. 스콜파主義와 수도원主義者들의 說敎는 과다한 形式主義로 나타났다. 이러한 說敎는 生命力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5세기 說敎의 衰退 原因은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첫째, 基督敎의 國敎化, 둘째, 禮拜의 의식화, 셋째, 信仰의 禁慾主義化, 넷째, 敎會의 贖錢의 增大다. 이와 같이 中世期는 전반적으로 暗黑時代였다.

 

第 5 節 宗敎改革 時代의 說敎

 

宗敎改革이 본래적으로 시도했던 重要한 精神은 당시의 잘못된 說敎를 初代敎會의 精神과 방향, 곧 케리그마 說敎에로 회복하려는 것이다. 宗敎改革은 說敎에 구심성을 부여하였다. 講壇이 제단보다 높아진 것은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救援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말씀 없는 성례용 빵과 포도주는 성례전적 특성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靈的 生活에 절대 必要하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改革者들의 說敎의 특성을 살펴보자. 루터, 칼빈, 쯔빙글리 낙스를 위시한 많은 宗敎改革者들은 의식에 얽매었던 굴레를 타파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救援을 세상 사람들에게 傳播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方法들을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그 說敎의 현장을 살펴본다.

 

첫째, 改革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미사를 지적하면서 初代 敎會처럼 말씀과 聖禮典이 동반된 敎會가 되어야함을 强調하였다.

 

둘째, 그들의 說敎는 사도들의 說敎 內容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의 福音으로 오신 예수를 외쳤다.

 

셋째, 說敎事役은 牧師의 가장 일차적인 使命임을 强調하였다. 그 이유는 牧師라는 직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실된 입”이라는 改革者들의 확신 때문이었다.

 

넷째, 하나님이 人間에게 지속적으로 주시는 恩寵의 傳達은 말씀과 성례전과 聖靈의 三大 方便을 使用하시며 그것이 오늘의 역사 가운데서도 繼續 使用하신다는 사실을 强調하였다.

 

다섯째, 改革期의 說敎家들은 說敎를 결코 思辨的이거나 修辭學的인 能辯에 의존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고 직선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현장의 人間들이 理解하는 말씀의 傳達에 努力하였다.

 

이와 같이 改革者들이 남긴 說敎의 形態와 內容과 展開는 후대 說敎者들의 살아있는 귀감으로서 說敎의 本質을 지키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第 6 節 現代의 說敎

 

루터와 칼빈 이후 약 100년간(1560-1648)은 전쟁과 아울러 神學論爭이 심화되어 마침내 改革作業의 精神도 時間이 흐름에 따라 약화되었다. 그때부터 다시 스콜라적 方法이 등장하여 세밀하고도 分析的인 說敎構造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타락적인 說敎가 만연되어 갈 때 17세기 말엽부터 여기에 반대하고 일어난 福音的 信仰 復興運動이 있는데 조지 폭스(Geroge Fox) 독일의 모라비안 형제단과 천로역정을 기술한 번연(John Bunyan), 웨슬레(John Wesley), 에드워드(J. Edwards)들이 있다.

 

웨슬레의 神學과 說敎의 핵심은 救援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은 길고도 哲學的이면서 무미건조한 說敎를 지양하고, 생기 있고, 직접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福音主義 說敎를 시작하였다. 이같이 활력이 넘치는 說敎로 영국을 도덕의 파멸에서 건져내었고 미국에서의 大覺醒運動은 미국을 聖經으로 돌아가게 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여 19세기 많은 훌륭한 說敎者들이 배출되었다. 필립 부룩스는 1877년 그의 예일 說敎學 강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說敎는 한 사람에 의한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는 眞理의 傳達이다. 가장 참된 眞理는 사람이 사람에게 형제의 人格을 통해서만 傳達되는 것으로서 결코 宣布된 眞理 자체가 아니다. 說敎는 그의 전 존재를 소개되는 하나님의 眞理이다”고 했다. 이 시기에 說敎의 復興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産業 社會에 급속한 발전으로 都市敎會들의 成長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자 說敎者들은 說敎보다는 敎會의 行政과 組織에 더 힘을 기울이고 相談者로서 분주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점차로 福音과 倫理問題가 똑같은 비중으로 대두되면서 이 두 분야의 균형 있는 발전을 모색해 보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說敎가 心理學的 方法과 知識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說敎가 퇴색되어감에 따라 儀式的 요소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간증이 도입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說敎檀이 중앙에서 한쪽으로 밀려나가기도 한다. 이 같은 說敎者들은 예수의 十字架와 復活에는 관심이 적고, 사회정의의 構造的 救援을 부르짖으며 說敎의 빛을 잃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의 說敎의 흐름은 聖經本文을 중요시하는 講解說敎의 方法이 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건전한 聖經的인 方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說敎의 本質은 聖經이고, 이념적으로 말해서 說敎한 聖經의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의 神學思想은 아주 다양하다. 正統神學, 解放神學, 民衆神學, 課程神學 등 이러한 神學思想을 배경으로 다양한 說敎 형태가 나타난다.

   

第 4 章 說敎의 諸方法과 類型

 

第 1 節 題目說敎

 

1. 題目說敎

 

題目說敎는 說敎의 形式 자체가 演繹的이다. 다루고자 하는 題目과 問題를 내걸고 그 問題에 대해서 聖經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저기서 뽑아 그 題目을 증명 지원하고 그 題目에 대한 說敎者 自身의 結論的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說敎를 말한다.

 

題目說敎는 聖經 本文에서는 題目만을 뽑고 聖經 전체에서 이에 연관되는 대지를 찾아내어 연결시킴으로 이루어지는 說敎이다. 그러므로 “대지는 本文과 상관없이 형성되어지게 된다”.

 

2. 題目說敎의 構成方法

 

1) 주어진 現實의 狀況에 적합한 本文을 찾아내라

2) 本文 안에서 한 題目을 선택하되 積極的이고 簡潔하며 命題的이요, 聽衆의 好奇心을 자아낼 수 있는 題目을 선택하라.(이 때에는 題目을 먼저 설정하고 聖經 本文을 찾아내는 方法도 使用되어 질 수 있다.)

3) 최대한의 創意性을 발휘하여 많은 자료를 동원하여 題目에 부합하는 대지를 형성 시켜라.

4) 大旨는 題目에 연결성을 갖도록 統一性에 유의하여 형성 시켜야 한다.

5) 大旨의 수는 3개가 적당하나 必要에 따라서는 2개나 4-5개로 할 수도 있다.

6) 小旨는 大旨를 분명하게 하며, 題目에 附合하도록 構成하라.

7) 題目을 中心으로 전체의 內容이 一目瞭然하도록 說敎를 구성하라.

 

3. 題目說敎의 長短點

 

1) 題目說敎의 長點

 

(1) 效果的인 說敎의 가장 重要한 要素의 하나인 統一性을 기하기가 쉽다.

(2) 說敎의 單一性으로 인하여 聽衆들로 하여금 永久的인 感銘 깊은 說敎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3) 說敎者와 聽衆으로 聖經의 전체적인 주제를 습득하게 해준다

(4) 聽衆들에게 聖經의 調和를 느끼게 해준다.

(5) 聖經의 人 敎理를 다루기에 적합하다.

(6) 광범한 主題를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7) 다양한 說敎를 할 수 있다.

(8) 說敎의 構成과 組織이 容易하다.

(9) 說敎者에게 分析能力과 創作能力을 啓發 시켜준다.

(10) 說敎者의 文學的 資質을 啓發 시켜준다.

 

2) 題目說敎의 短點

 

(1) 說敎者의 人生觀, 世界觀 등에 의해 지나치게 주제가 한 방향으로 쏠리는 위험.

(2) 世俗主義를 초래하기 쉽다.

(3) 聖經中心이 못되고 사람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聖經이 引用되기 쉽다.

(4) 말씀에 대한 깊은 黙想과 祈禱가 결여되기 쉽다.

(5) 분쟁의 소지가 있는 敎會에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6) 말씀의 偏食이 되기 쉽다.

(7) 聖經 本文의 뜻을 떠나 어떤 題目에 매달리게 만든다.

 

第 2 節 本文說敎

 

1. 本文說敎

 

本文 說敎는 本文을 택하고 그 本文의 文脈을 잘 살펴서 그 本文에서 題目을 발견하여 정하고 그 本文을 分解해서 大旨를 발굴하여 題目과 연결시키고 前進性 있게 배열하여 說明해 나가는 것이다. 題目과 大旨가 本文에서 나오는 說敎를 전통적으로 本文說敎라고 부른다.

 

本文 說敎는 註解說敎와 매우 가깝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은 本文 說敎는 한 두절을 택하여 짧은 本文 안에서도 說敎할 수 있고, 몇 절을 택하여 說敎할 수 있다는 것이다. 本文 說敎는 註解 說敎에 비하여 使用되는 本文이 一般的으로 짧다. 또한 本文에서 대지와 소지를 추려는 내되 註解는 하지 않는다.

 

2. 本文 說敎의 構成法

 

(1) 說敎할 本文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 전체 本文의 註解를 찾아내어 題目을 정하라(題目은 本文을 떠나서는 인정할 수 없다. 오직 本文 안에서 찾아야 한다)

 

(2) 각 人旨를 本文에서 主題 밑에 배열 시켜라.

 

(3) 핵심적인 單語들을 잘 배열하여 인지를 형성하고, 主題를 향하여 統一을 이루게 해야 한다.

 

(4) 人旨에 붙은 小旨는 本文에서 나와도 좋고 必要한 경우에는 다른 聖經구절에서 인용해와도 된다.

 

3. 本文說敎의 長短點

 

1) 本文說敎의 長點

 

(1) 本文 說敎는 題目說敎가 가지는 이점을 지니면서도 聖經의 思想에 충실할 수가 있다.

(2) 說敎 구조에 自然性이 있다.

(3) 같은 本文으로 다양하게 여러 가지 說敎를 할 수 있다.

(4) 사람의 오해와 감정을 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5) 聖經의 참뜻을 解釋하게 된다.

(6) 說敎에 權威가 있다.

(7) 聽衆에게 많은 聖經 知識을 얻게 해준다.

(8) 說敎者에게 한 두절의 말씀을 깊이 있게 硏究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9) 說敎者의 講解說敎 準備 과정으로 訓練받기에 유익하다.

 

2) 本文說敎의 短點

 

(1) 說敎者의 관심에 따라 本文이 피상적으로 관찰되기 싶다.

(2) 本文을 짧게 잡기 때문에 문맥을 무시하기 쉽다.

 

第 3 節 註解說敎

 

1. 註解說敎의 定義

 

J. D. Baumann은 말하기를 “註解說敎는 두 절 이상 좀 더 긴 本文에 基礎한 說敎이다. 題目과 인지들은 택해진 本文에서 나온다. 說敎 內容은 다른 聖經 구절에서 얻어진 생각에 힘입지 않고 그 本文에서 전개된다. 이 說敎는 하나의 단일한 目的과 주제로 統一性을 얻으며 과거와 현재를 모두 초점으로 하되 하나로 통일되는 타원형의 도식을 제시한다”

 

C. H. Clerk는 말하기로 “註解 說敎는 주석과 꼭 마찬가지로 주석과 說明을 하지만 그 재료가 모두 中心 題目의 주위에 有機的으로 조직되고 問題의 여러 가지 部分들이 조화되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석이면서도 하나의 說敎이며 일반 說敎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고 하였다.

 

장두만은 그의 저서 『讀解說敎作成法』에서 말하기를 “註解說敎란 주어진 聖經本文을 文字的, 文法的, 歷史的 方法에 의해 解釋하여 일정한 조직 하에 現代의 聽衆들에게 適用시키는 說敎”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학자들마다 제각기 强調 점에 따라 그 定義가 약간씩 다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학자들의 定義를 종합해 볼 때 거의 통일되어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대게 네 가지로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註解說敎에는 반드시 本文이 있어야 하되 一般的으로 本文 說敎에 비하여 긴 本文이다.

 

둘째, 本文을 中心으로 하는 組織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本文의 주제를 中心으로 한 인지와 소지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本文에서 나와야 한다.

 

셋째, 註解說敎에는 반드시 本文에 대한 解說이 따라야 한다.

 

넷째, 註解說敎에는 반드시 聽衆에 대한 適用이 있어야 한다. 適用이 없는 것은 解釋은 되어도 註解說敎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2. 註解說敎의 特徵

 

(1) 註解說敎의 本文은 說敎의 寶庫요 여기에는 모든 대․소지가 연결되어 나오게 된다.

(2) 註解說敎의 本文은 一般的으로 題目 說敎나 本文說敎의 本文보다 길다.

(3) 註解說敎는 완전히 本文이 中心이 되어 다루어진다.

(4) 註解說敎는 먼저 聖經本文이 정해지고 그 후에 題目이 주어진다.

(5) 註解說敎는 하나의 統一된 움직임과 方向이 주어진다.

(6) 철저한 適用의 法則이 强調된다.

 

3. 註解說敎의 普遍的 構成法

 

(1) 本文 全體의 文脈을 잘 살핀 후 中心 主題를 選定하라

(2) 主題를 中心으로 本文에서 인지와 소지를 연결하여 통일성 있는 구성을 이룬다.

(3) 問題의 背景과 文脈의 뜻을 해설하라.

(4) 本文의 字意를 語源學的으로 解釋하라.

(5) 解釋되는 말씀이 聽衆의 現實에 適用되게 하라.

 

4. 註解說敎의 長短點

 

1) 註解說敎의 長點

 

(1)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說敎의 强調점을 둔다.

(2) 聖經에 관한 넓고 깊은 知識을 갖도록 한다.

(3) 이 方法이 아니고는 등한히 할 수 있는 많은 주제를 다룰 수 없다.

(4) 말씀 事役의 다양성을 갖게 한다.

(5) 現實的 罪惡을 예리하게 다룰 수 있다.

(6) 主題의 空想的인 使用이나 고립된 부문만을 選好하는 데서 說敎者를 구해준다.

(7) 說敎者가 평생에 使用할 수 있는 충분한 說敎 資料들을 제공해 준다.

(8) 說敎者에게 權威와 能力을 갖게 해준다.

(9) 聖經의 보다 정확한 知識을 얻게 해준다.

(10) 항상 새로운 眞理를 찾아내어 공급할 수 있다.

(11) 聽衆의 興味를 끌고 慾求를 보다 더 충족 시켜줄 수 있다.

 

2) 註解說敎의 短點

 

(1) 說敎의 統一性이 缺如되기 쉽다.

(2) 자칫하면 註解說敎가 아닌 註釋이 되기 쉽다.

(3) 선택한 재료가 많아 說敎者가 게으르기 쉽다.

(4) 倫理性이 결여되기 쉽다.

(5) 說敎 時間이 길어지기 쉽다.

(6) 미숙한 說敎者의 說敎는 지루하게 되기 쉽다.

 

第 4 節 講解說敎

 

1. 講解說敎의 定義

 

F. B. Meyer은 “講解說敎란 그 속의 秘密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精神이 說敎者의 心靈 속에 들어오기까지 說敎者가 머리와 마음과 두뇌를 총동원하여 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울고 그리고 祈禱한 聖經 중의 어느 한 책이나 또는 보다 확장된 部分의 말씀을 繼續的으로 取材하는 方法”이라고 했다.

 

Denis J. V. Lane은 “講解說敎란 聖經 本文에 관련하여 歷史的, 文法的, 文字的으로 硏究하여 발추하고 알아낸 聖經的 개념을 傳達하는 것으로서, 聖靈께서 그 개념을 우선 說敎者의 人格 개념에 適用하시며, 說敎者를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適用하시는 것이다”

 

위에서 講解說敎에 대한 몇 가지 定義를 고찰 해 보았는데 講解說敎에 대한 定義가 학자마다 다소 다르고, 따라서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 중에서 데니스 레인(Denis J. V. Lane)의 定義가 제일 적당한 것 같다.

 

데니스 레인(Denis J. V. Lane)의 경우에 講解說敎가 아닌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경우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성경구절을 찾아내는 것은 講解說敎일 수가 없다. 本文의 말씀을 찾아내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결정해 버린다면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섬기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다.

 

둘째, 本文을 발표하고서도 그 本文과 무관한 것들을 말할 때 이는 講解說敎일 수 없다.

 

셋째, 本文에 대해서 길게 說明할지라도 사람들의 실제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각들이 나타날 때도 講解說敎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넷째, 本文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메시지에 대한 適用이 없을 때도 講解說敎라고 말할 수 없다. 說敎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을 變化시켜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한다.

 

2. 講解說敎의 範疇

 

講解說敎란 영어의 Expository Preaching을 우리말로 解釋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註解說敎” 또는 “註經說敎”, “解釋說敎”, “聖經的 說敎”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神學者들 가운데에서도 講解說敎의 바른 理解를 하지 못하고 사실 講解說敎라는 意味가 많이 혼동되어 왔다. 혹자는 講解說敎와 本文說敎를 대조하여 定義하기를 “적어도 두 세 구절이 아닌 그 理想 긴 문단에 근거한 說敎” 또는 “說敎의 인지와 소지들까지도 모두 聖經 本文에서 뽑아낸 說敎” 또는 “說敎 本文으로 정한 聖經本文을 한 절씩 차례대로 說明해주는 說敎”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구별이 아니라 오히려 혼동을 가져온 행위”였다는 점이다.

 

講解說敎는 그 意味가 “聖經을 中心으로 한 說敎”이다. 이런 까닭에 講解說敎는 聖經的으로 說敎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說敎의 類型에 따라 講解說敎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本文을 소급하는 態度에 따라 講解的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어떤 意味에서는 題目說敎도 충실하게 準備하면 講解說敎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說敎를 講解說敎, 本文說敎, 題目說敎로 구분하나 이러한 구분 자체가 별 意味가 없다고 본다. 죤 스타트(John Stott)도 말하기를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說敎는 講解說敎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하여 講解說敎의 구분 자체에 별 意味를 두지 않았다.

   

3. 講解說敎의 長短點

 

1) 講解說敎의 長點

 

(1) 講解說敎는 說敎에 신적 權威를 부여한다.

(2) 講解說敎는 說敎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說敎하게 한다.

(3) 講解說敎는 說敎의 자료가 무궁무진하다.

(4) 講解說敎를 하면 다루기 힘든 問題를 원만하게 다룰 수 있다.

(5) 講解說敎는 說敎者와 교인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잠기게 한다.

(6) 講解說敎는 敎會 成長에 원동력이 된다.

(7) 講解說敎는 聖經에 관한 전체적인 넓은 知識을 갖도록 한다.

(8) 講解說敎는 地域과 環境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9) 講解說敎는 說敎者의 주관을 극복하게 한다.

 

2) 講解說敎의 短點

 

(1) 講解說敎는 많은 時間을 必要로 하기 때문에 바쁜 牧師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등장한다.

(2) 講解說敎는 (특히 어느 책 한 권 자체를 시리즈로 說敎할 경우) 자칫하면 聽衆에게 권태감을 주기 쉽다는 것이 큰 어려움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題目說敎, 本文說敎, 註解說敎, 講解說敎는 모두 제 각기 長短點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어느 것만이 참되고 완벽한 說敎라고 할 수는 없다. 說敎의 정황과 때에 따라 각 說敎가 使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무사에게 검술법, 창술법, 궁술법 모두가 必要한 것과도 같다. 물론 한 가지만 가지고도 싸울 수 있으나 세 가지 무기를 다 자유자재로 쓰는 것만 못하다. 說敎者는 必要한 상황에 따라 이 네 가지 說敎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準備를 쌓아야 할 것이다.

 

第 5 章 說敎者의 資質

 

第 1 節 說敎者의 定義

 

1. 聖經이 말하는 說敎者

 

죤 스타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인 『現代 敎會와 說敎』라는 책에서 聖經 자체가 제시하는 說敎者의 상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가장 一般的으로 使用하는 것은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받고서 그것을 宣布하도록 命令을 받은 通報者 또는 布告事項을 알리고 다니는 읍사무소 직원의 상이다. ‘우리는 十字架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라는 표현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라는 표현은 福音傳道的說敎에 대한 바울의 가장 직접적인 묘사인 것이다.(고전 1:23, 고후 4:5, 사 40:9, 52:7)

 

둘째, 說敎者는 씨 뿌리는 자이다.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주님의 비유처럼 그는 밭에 나가는 농부같이 세상으로 나간다. 거기서 그는 몇몇 씨앗만큼은 잘 準備된 땅에 떨어져 머지 않아 좋은 結實을 맺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귀중한 하나님 말씀의 씨앗을 뿌린다.(눅 8:4이하)

 

셋째, 說敎者는 大使이다. 그는 외국에서 심지어는 적국에서까지도 사절로서 奉仕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다. 그는 그 나라에서 그의 군주나 정부를 대표하여 당당하게 그들을 변호할 책임을 맡고 있다.

 

넷째, 說敎者는 청지기 혹은 가정 관리인이다. 하나님의 가정을 관리하도록 임명받은 것과 하나님의 가족들이 必要로 하는 양식들을 위탁받은 것은 그의 특전이다. 이 양식들이란 하나님의 啓示된 秘密들을 意味하는 하나님의 신비들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그 양식들을 분배하는 일에 충실할 것이 기대된다.

 

다섯째, 說敎者는 牧師, 牧者이기도 하다. 牧者長께서는 하급 목자들에게 그의 양 무리를 관리하도록 임명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들을 이리들로부터 보호하여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 說敎者에 대한 여섯 번째 隱喩는 그를 부끄러운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떠한 일꾼이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그는 眞理의 말씀에 능숙해야 한다.

 

이 여섯 가지 상들에 있어서 곧바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점에 대한 한결같은 强調이다. 說敎者들은 메시지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 메시지는 그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와 같은 좋은 소식은 宣布하는 通報者에게 주어져 왔고, 좋은 씨앗은 씨 뿌리는 농부에게 그리고 좋은 양식은 분배하는 청지기에게 주어져 왔다. 마찬가지로 大使는 自身의 정책이 아닌 自身의 국가의 정책을 추구하며 일꾼은 自身의 말을 위해서가 아니라 眞理의 말씀을 위해서 일을 한다. 新約의 모든 은유들을 살펴볼 때 說敎者는 어떤 다른 사람의 權威 아래 있는 종이며, 어떤 다른 사람의 말을 傳達하는자 라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2. 說敎者의 指導者的 役割

 

社會變化가 심해질수록 역사가 그 變化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불확실성의 구름이 짙어 질수록 우리에게 必要한 것은 바로 說敎者의 지도력일 것이다.

 

說敎者의 지도력은 상당히 重要하다. 지도자에 대한 重要성은 고대로부터 널리 認識되어져 왔다. 플라톤은 사람을 배와 같이 육체적 욕구를 따르는 사람, 가슴과 같이 용기만 가지고 있는 사람, 머리와 같이 생각을 하고 行動하는 지도자의 세 종류로 구분했다. 컬럼비아 대학 총장을 지낸 버틀러는 사람을 주변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 주변의 變化를 보면서 남들만 비난하는 사람, 주변의 사정을 보고 무엇이 必要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行動화하는 셋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면 說敎者의 뜻은 명확해 진다. 說敎者는 머리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 무엇이 必要한 것인지를 보고 行動화하는 사람, 사공과 같이 자기의 조직을 그 방향을 향해 노를 저어 가는 사람이다.

 

중국의 당나라로부터 지도자의 資質을 身, 言, 書, 判의 4영역에서 논해 왔다.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용모가 준수하고, 건강하고 정력이 넘쳐야 한다. 말을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박식해야 한다. 판단력이 월등해야 한다. 그러면 이 모든 영역의 특질 가운데 가장 重要한 것을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무엇일까? 이런 면에서 說敎者가 반드시 가져야 할 특성 가운데 가장 重要한 것은 무엇인가?

 

리더십의 硏究에 몰두했던 19세기 영국의 카일라일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특성을 勇氣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勇氣란 두려움을 모르는 만용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해가 올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바른 일을 위해서는 그것을 감수하는 곧 利보다는 義를 취하는 참된 義氣를 말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가셀은 지도자의 가장 큰 資質은 克己心이라고 말한다. 美國의 社會心理學者인 리즈맨은 지도자의 가장 重要한 資質을 내부지향성에 두고 있다.

 

그러면 聖經에서 말하는 說敎者는 어떤 자인가?

 

요한福音 10장 11-15절에서 주님은 “삯꾼과 목자를 구분하셨다. 聖經이 가르치는 참된 說敎者는 목자상을 갖추어야 한다. 평상시에는 삯꾼과 牧者를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삯꾼은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利)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경우에는 모든 책임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 삯꾼이다.

 

이에 비해 牧者의 특성은 “선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곧 說敎者의 가장 重要한 특성은 犧牲精神이다. 자기를 犧牲하는 精神이 없는 사람은 說敎者의 資格이 없다. 犧牲精神이 있으면 카알리알이 말하는 용기, 가셀이 말하는 극기심, 리즈맨이 말하는 내부지향성을 모두 갖출 수 있다.

 

3. 說敎者에 대한 見解들

 

제임스 보이스가 말하기를 “說敎者는 그가 상세히 說明하고 있는 聖經과 그가 상세히 說明하는 聖經에 관련된 문화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順從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의 靈性과 心理學에 대하여 뛰어난 理解力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理解力은 단지 天賦的인 能力이나 또는 삶에 대한 단순한 관찰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說敎者가 自身의 일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과거와 현재의 모든 지혜를 탐구하는 힘든 硏究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성구 교수는 說敎者는 “하나님과 人間을 만나도록 仲媒해 주는 자”라고 하였다.

 

이중표 牧師는 “說敎者는 곧 聖靈을 통한 人間 變化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說敎者는 靈性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說敎者 自身의 축적된 信仰과 人格, 生活의 총체적인 조명이므로 說敎者는 說敎를 잘하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硏究해야 하지만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에 관하여도 열심히 硏究해야만 한다. 즉 說敎者는 끊임없이 예수 안에 있으면서 예수의 人格을 닮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1892) 은 자기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聖經의 대가가 되시오. 다른 책은 샅샅이 硏究하지 못해도 예언자와 사도들의 글에는 정통하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시오. 聖經을 理解하는 것이 우리의 대망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 주부가 바늘에, 상인이 장부에 선원이 배에 익숙한 것처럼, 聖經에 익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는 “說敎者는 그의 使役에 대한 분명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찾는 자가 아니라 그는 증언할 것이 있는 증인이다”라고 하였다.

 

정창복 교수는 說敎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여 주는 특별한 使命을 가진 도구”라고 定義하였다.

 

第 2 節 說敎者의 資格

 

牧師의 첫째 使命과 역할은 說敎다. 說敎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宣布하는 것이다. 그런데 說敎는 단순히 聖經을 解釋하는 것이 아니라 說敎者의 人格과 삶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서 전하여지기 때문에 說敎와 說敎者는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牧師의 기능이 說敎인 한에 있어서 牧師가 된다는 것은 한 평생 說敎者의 삶이란 意味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자란 자기 안에서 메시지가 이미 구체화된 사람을 말한다. 진실로 人格은 우리의 말보다도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죤 스타트(John Stott)도 말하기를 “진실이란 우리가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바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意味한다”고 보고 진실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열정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근래에 와서 說敎者가 說敎와 牧師의 人格에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경향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필립 브룩스는 “說敎는 人格을 통해 眞理가 전해진다”고 말한다. 임태진 牧師는 “說敎 準備는 문안 작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상 더 重要한 것은 그 說敎者 自身에게 있다. 그 이유는 說敎者의 人格 자체가 說敎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說敎의 성패는 說敎의 內容이나 傳達 方法보다 說敎者의 人格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정성구 교수는 說敎者가 갖추어야 할 人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自身이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說敎者의 人格은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온다. 說敎者의 靈性과 人格의 초석은 自身이 救援과 重生에 대한 철두철미한 자기 認識과 고백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야 한다. 참된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의 모든 使役의 重要 동기가 되어야 한다.

 

(3)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는 다른 사람의 靈魂을 사랑해야 한다.

 

웨스터민스터 信仰告白書 禮拜 모범에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說敎者는 임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 수고하여 주님의 일을 태만하게 행하지 말라.

 

(2) 명백하게 즉 가장 재능이 없는 사람도 理解할 수 있도록 하라. 眞理를 人間 지혜의 유혹적인 말로 전하여 그리스도의 十字架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되게 하지말고 聖靈과 能力의 證據로 전하라. 또한 알지 못하는 외국어, 이상한 어법, 억양의 무익한 使用을 삼가고, 고대나 現代의 별로 우아하지 않은 성직자나 다른 人間 저자의 문장의 인용을 삼가라.

 

(3) 신실하게 즉 自身의 이익이나 영광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과 덕성 함양과 救援을 바라보라. 이러한 거룩한 目的들을 조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억제하지 말고,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의 몫을 주고, 비천한 자들을 무시한다거나 신분이 높은 자들은 그들의 죄를 관대히 보아주거나 함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관심을 나타내라.

 

(4) 지혜롭게 즉 自身의 모든 교리, 권고, 특별히 견책을 가장 적절하게 설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하라. 각 사람의 人格과 처지에 가장 적절한 관심을 보이고 自身의 걱정이나 한을 섞지 말라.

 

(5)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도록 하며 自身과 自身의 使役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타락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몸짓과 音聲과 표현을 피하라.

 

(6) 사랑의 감정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自身의 경건한 열심과 그들이 선하게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7)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自身의 마음으로 설득하라. 그가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眞理이다. 그러므로 自身의 양떼 앞에서 그 眞理의 모범으로 행하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신중하게 自身의 수고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되게 하고 自身과 또한 주께서 그들 감독자로 세우신 양떼를 주의 깊게 감독하라.

 

說敎者들이 다른 사람의 靈魂을 사랑해야 될 이유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靈魂들을 사랑한 것에서 비롯된다. 땅 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종으로서의 모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가운데는 언제라도 人間의 靈魂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은 병든 자와 가난한 자와 고난받는 자를 理解하시고 저들의 靈魂을 극진히 사랑하신 것이다.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는 靈魂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된다.

 

(1) 說敎者의 人格은 眞實을 전제로 한다.

 

說敎者가 진실해야 할 두 가지 이유는 첫째로 그는 講壇에서는 自身이 말한 바를 진실하게 말해야 하며, 講壇 밖에서는 自身이 說敎한 말에 책임을 지고 그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진실 되지 못하면 說敎와 삶이 따로 움직여서 權威를 상실하게 된다. 說敎와 행위는 人格과 분리될 수 없다. 說敎者는 說敎를 어떻게 잘 해야 할 것인 가도 硏究해야겠지만 일주일 동안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說敎者의 人格에는 熱情이 요구된다.

 

열정이란 심오한 감정이며 說敎者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說敎者는 說敎를 할 때에 어떤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說敎할 수 있는 人格이 우선 되어야만 할 것이다. 說敎者가 갖추어야 할 資格은 다른 무엇보다도 說敎者 自身에 대한 準備가 먼저 행해져야만 한다.

 

첫째, 說敎者는 召命感이 있어야 한다.

 

召命이란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意味한다. 召命者는 자기의 연약함과 不足함을 알고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應答한 자이다. 하나님의 召命이란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든지 그의 音聲을 들었다든지 하는 것을 意味하지 않는다. 소명이란 聖經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命令을 깨닫되 聖經에서 요구하는 福音 證據에 대한 열정을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命令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說敎者의 生命은 소명의식에서 출발한다.

 

宗敎 改革자들은 講壇에 들고 올라가는 자기의 원고를 聖經 本文과 똑 같이 聖靈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信念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서의 자신이 召命에 대한 確信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神學의 수립과 끊임없는 硏究 活動이 있어야만 한다.

 

說敎者는 올바른 神學의 定立과 神學的 體系를 소유해야만 한다. 說敎者는 우선 自身이 聖經 解釋에 접근할 수 있는 能力을 갖추어야 한다. 리스쳐가 “說敎는 神學의 마지막 言語”라고 表現했듯이 說敎者의 神學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신성종 牧師는 神學의 부재로 인한 메시지의 問題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聖經 本文과 거리가 많은 說敎가 된다.

(2) 메시지의 內容이 非聖經的이 된다.

(3) 解釋에 있어서 지나친 靈解가 많다.

(4) 균형에 있어서도 偏食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죤 스타트(John Stott)는 근본적인 비결은 어떤 技術을 완벽하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確信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神學은 方法論보다 더 重要하다고 역설하면서 說敎를 하도록 뒷받침하는 다섯 가지 神學的 要旨를 說明하였다.

 

(1) 하나님에 관한 信念으로서,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이 행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 그 內容이다.

(2) 聖經에 관한 信念으로서 聖經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가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能力이 있다는 것이 그 內容이다.

(3) 敎會에 관한 信念으로 敎會는 말씀에 관한 하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 그 內容이다.

(4) 牧師職에 관한 信念이다.

(5) 說敎에 관한 信念으로 진실한 說敎는 모두 解說的 說敎라는 것이다.

 

셋째, 說敎者는 註釋과 解釋學의 세계, 說敎의 구조와 흐름 그리고 단순 명료함과 修辭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효석은 말하기를 “좋은 문장이 되려면 주장하는 內容이 뚜렷해야 하며, 論據가 구체적이고 確實해야 한다. 또 앞 뒤 문장의 흐름이 論理的이며 統一性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獨創性을 담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主題 文章을 젖혀놓고 다른 部分이 强調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되도록 문장을 짧게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說敎者에게도 동일하게 適用된다.

 

그러나 敬虔함이 없이는 결코 說敎者가 될 수 없다. 짐 그래함은 “제 說敎의 발전은 아마도 예수님과 同行하는 제 自身의 삶의 개인적인 발전 과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說敎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部分은 매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同行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웹스터 사전은 敬虔을 독실함, 전통적인 信仰, 그리고 성실함이라고 定義하고 있다. 그리고 敬虔한 信仰심이 깊고 독실한 또는 信仰심이 깊은 체 하는, 宗敎를 빙자한, 위선적인 등으로 定義하고 있다. 敬虔과 敬虔한 이라는 단어들의 과거와 현재의 一般的인 용법에 대한 검토를 通해서 나타나는 것은 그 단어들이 부정적이고 批判的인 요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폭 넓은 意味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敬虔이란 두렵고 떨림으로 恩惠와 眞理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내 전체 生活이 그리스도에게로 나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전 삶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수여 받은 하나님의 能力에 있다.

 

이와 같이 敬虔의 訓練은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祈禱함으로써 그 심도가 깊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祈禱를 통해서, 聖靈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넷째, 自身의 不足을 깨닫고 끊임없이 자기 改革을 해야 한다.

 

저명한 說敎學 교수였던 일리온 존스는 “說敎者에게 현재의 나는 초보 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說敎者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時間은 결코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로이드 죤스(D.M.Lloyd-Jones) 牧師는 20년을 說敎한 후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아마 여러분은 20년 동안이나 같은 講壇에서 說敎한 사람은 이제 말할 聖經이 없게 되고 聖經도 그를 더 이상 자극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정반대다. 나는 이제 시작하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다섯째, 說敎者는 말씀에 철저히 順從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說敎者도 自身이 가르치고 說敎하는 것에 완전하게 順從할 수는 없다. 그러나 說敎者는 말씀에 順從하려는 자세를 분명히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말씀에 實際的으로 順從함으로써 삶이 조금씩 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聽衆들은 說敎者의 말이 說敎者 自身의 生活 중에서 분명하게 실천되고 있다는 단순한 確信을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說敎者의 生活로 證據 되는 說敎는 聽衆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本質的으로 그리스도의 救贖이 說敎者의 말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와 전 생애를 통해 證據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다음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說敎와 일상生活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는 牧師들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실수는 그들이 說敎하기 위해서는 빈틈없이 準備하고 硏究하지만, 그 說敎대로 빈틈없이 살기 위해서는 조금도 努力하거나 硏究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섯째, 說敎者는 聽衆을 理解하려고 努力해야 한다.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說敎者는 聽衆의 理解를 최대의 염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聽衆의 理解는 모여든 대상뿐만 아니라 그들이 관련짓고 있는 가정과 社會의 배경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說敎者는 교인들을 심방하여 그들의 사정을 열심히 그리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牧會者가 가정을 심방하지 않으면 결코 교인들과의 人格的인 교류를 說敎 중에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회중이 진정으로 必要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그의 說敎는 교인들의 진정한 必要를 채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용기 牧師는 예수님의 牧會는 人間의 근본적인 問題를 해결하신 牧會였으며 사도들 역시 하나님의 위대하신 能力으로 현실적인 人間의 고통을 직접 해결해 주는 福音을 傳播하였다.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메시지는 모두 靈魂의 問題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問題를 해결해 주는 메시지였다고 주장하면서 삶과 연관이 없는 메시지는 그저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못박고 있다.

說敎者의 기본적인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의 眞理를 빛 가운데로 드러내는 일이다. 마치 땅의 감추인 보화를 캐내듯이 聖經의 감추어진 意味를 解釋하고 說明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 말씀의 원칙을 오늘날 사람이 깨닫고 順從할 수 있는 말로 옮겨 놓는 일이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자기의 주된 임무를 텍스트의 講解라고 생각했다.

 

이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本文의 意味를 本文으로부터 캐내는 것이고 聽衆에 대한 적절한 適用이다. 說敎者는 眞理를 단순히 傳達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說敎者의 궁극적인 임무는 위의 기본적인 임무를 잘 수행함으로써 회중에게 인상을 심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여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說敎者는 메시지를 전할 때 聽衆이 說敎者 自身을 잊어버리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에 들리도록 말해야 한다. 說敎者는 심각한 현실의 問題를 자각하게 하고 책임을 느끼게 하며 혹은 권고하고 결단하게 하는 使命이 있다.

 

일곱째, 說敎者는 철저하게 自身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정성구 교수는 말하기를 “說敎者는 주일 하루만이 重要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일주일 전부 그리고 삶의 전부가 重要한 것이다. 만약 說敎者가 일주일에 하루만 거룩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육일은 세속적인 삶과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삶이란 이원론적인 삶이 될 것이다.

 

說敎者는 자기自身의 현재의 位置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점검하고 평가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죤 스타트(John Stott)는 이를 위해 그의 經驗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提案하고 있다. “한 달에 한번 묵상일을 가지시오, 할 수만 있으면 아무 간섭도 받지 않는 시골로 가시오, 물러서서 앞을 바라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하나님의 안목과 그 뜻에 몰두하시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사물을 보려고 하시오, 긴장을 푸시오“

 

自身을 돌아볼 줄 아는 說敎者는 그의 長點과 弱點을 잘 알아서 長點은 개발하고 弱點을 수정 보완하는 끊임없는 자기 努力이 必要하다.

 

第 3 節 說敎者가 가지고 있는 問題點

 

1. 權威에 있어서의 說敎者

 

“敎會발전을 위한 說敎 개발”에서 이중표 牧師는 權威 개발을 위해 5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說敎者는 하나님의 말씀에 權威를 두어야 한다. 說敎者가 하나님의 말씀에 權威를 인정하는 만큼 說敎者의 權威도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權威를 두는 사람은 최고의 權威 있는 說敎者가 될 수 있다. 初代敎會의 사도들은 말씀은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은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우리는 祈禱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고 했다. 즉 사도들은 사소한 일로 말씀을 전하는 權威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을 하였다.

 

둘째, 說敎者는 使命감에 權威를 두어야 한다. 說敎者는 그리스도의 대언 자로서 權威를 확신하여야 한다. 說敎者가 社會的으로 무명의 사람일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성직에 대한 존엄한 認識이다. 說敎者는 역사에 하나님 말씀을 宣布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다.

 

셋째, 說敎者는 그 人格에서 權威가 있어야 한다. 說敎가 하나님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님 自身에 의해 宣布되지 않고 人間을 통해 宣布된다는 사실 때문에 說敎者의 人格 問題가 놓여지게 된다. 하나님은 人間 救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육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人間을 통해 재 성육 되어진다. 그러므로 說敎者는 진실한 人格者가 되어야 한다.

 

넷째, 說敎者의 최대 權威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한 사람이 說敎者로 부름을 받고 한 생을 살아갈 때 가장 重要한 과제는 위대한 說敎者가 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예수의 人格을 닮는 것이다. 說敎는 결코 명예로운 야망을 위한 방편도, 거룩한 성공을 위한 도구도, 성화된 實用主義를 위한 手段도 아니다.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說敎者 自身의 축적된 信仰과 그 人格, 生活의 총체적인 조명이다.

 

다섯째, 說敎者의 權威는 희생적 삶에서 그 權威가 오래도록 지속된다. 講壇의 소리가 메아리로 그치지 않고 역사 현장을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自身의 삶을 제물로 삼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재 성육이 되어지는 사건이 먼저 說敎者에게 일어나야 한다. 이 세상에서 높은 權威는 특수한 專門職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높은 權威는 희생적 權威이다. 說敎者의 人格은 宣布되는 說敎에 나타나지 않고 행위로 證據 되는 說敎에 나타난다.

 

마틴 로이드 죤스(D.M.Lloyd-Jones)는 그의 저서 權威에서 權威의 問題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가장 重要한 問題라고 말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해 기독교회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敎會가 그 權威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敎會가 權威 問題에 있어서 도전 받지 않으며 힘을 지닐 수 있는 비결은 자기 나름대로의 전통의 權威를 가졌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福音主義 입장에서 하나님께 權威를 두는 3가지 입장을 밝혀보면,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權威이다. 福音的인 그리스도인들이 啓示라는 커다란 주제에 따라 硏究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中心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自身을 제시하셨다. 히브리서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다.

 

基督敎의 權威는 이 예수에게서 출발한다. 基督敎가 다른 宗敎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일반 宗敎는 그 경전만으로 존립할 수 있으나 基督敎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人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基督敎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상의 유일한 權威이시다.

 

둘째, 聖經은 聖經의 權威를 말한다. 우리는 聖經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信仰과 행위에 있어 유일한 법칙으로 받아들인다. 敎會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셋째, 聖靈의 權威이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 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聖靈님의 절대 주권을 우리는 단지 내적 광명이나 感動적인 영향력 정도로만 낮게 평가하려는 時代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시느니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權威, 聖經의 權威, 聖靈의 權威는 敎會가 추구해야 할 삼대 權威인 것이다.

 

2. 召命感의 缺如

 

“牧師님 바쁘신 와중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의 비전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가 최근에 와서 직장生活을 하다보니 직장에서의 일보다도 牧會 쪽으로 생각이 계속 되어서 職場을 그만 두고 神學 공부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마침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도 이야기 해 보았는데 부모님의 서원에 의해서 본인이 원치 않았지만 간 경우도 많고 대학 宣敎 단체에 속해 있다보니까 자연적으로 분위기가 神學校가는 것이어서 간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도 이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되어져서 神學校에 가려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의 牧師職이 하나의 직업으로 理解되어지는 데서 비롯된다. 남들에게 존경도 적당히 받으면서 잘만하면 큰 敎會 牧會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人本主義的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대한 召命을 찾기 보다 주변의 분위기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은 主體意識의 결여로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무인가 神學校를 있게 했으며 올바른 神學校의 부재를 낳게 되었고 통속적인 직업화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心靈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聖靈이 각 성에서 내게 證據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주께서 내게 맡겨준 使命 곧 하나님의 은혜의 福音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生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 22-24)

 

바울이 바울된 것은 福音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기 生命도 마다하지 않고 穩全히 바쳤기 때문이다. 說敎者가 하는 일에는 어려운 일이 많다. 그러나 어려운 것과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말 確實한 소명감을 가진 說敎者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극복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기의 知識으로 자기의 經驗으로, 자기의 能力으로 牧會를 하고 說敎를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第 4 節 說敎者 自身의 안팎의 問題

 

1. 內的 問題

 

1) 牧會의 比重 問題

說敎가 牧會者의 優先的인 關心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實際的으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牧會者들은 說敎 準備보다는 그 외의 牧會 임무에 時間을 많이 할당하고 있는 편이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牧會者들은 심방이나 관혼상제, 무슨 紀念禮拜 등에 時間을 투자 하다보면 결국 講壇에 충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講壇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소명의식이 있지만 時間의 흐름과 더불어 현실의 타협 속에 돌아오는 주일이 전혀 겁나지 않는 불감증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러한 불감증 속에 자기 합리화만 더욱 커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敎會에서 說敎보다는 경영과 행정으로 정치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2) 神學敎育의 不在

 

韓國의 神學은 본래 敎會에서 神學校를 세워 敎會의 교역자를 양성하는 敎會의 神學이었다. 그런데 60년대와 70년대에 敎會가 급속도로 成長함에 따라 교역자의 수요가 많이 요구되면서 한 교단에서도 여러 神學校를 세우는 가 하면 군소 교단에서도 또는 교단의 배경이 없이 각기 神學校를 설립하게 되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대학령에 의해 세워지거나 또는 건전한 교단에서 그 교단의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神學校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神學校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도 구비하지 못한 채 神學校 간판을 걸고 神學生을 모집하였다.

 

임택진은 韓國 神學 敎育의 허실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神學校의 난립은 神學 敎育의 질적 저하와 아울러 神學敎育의 혼란을 일으켜 敎會와 牧師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神學校 난립과 敎育의 무질서가 社會에 물의를 일으켜 한 때는 정부에서 무인가 神學校의 정비와 神學敎育의 시정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백여 개의 神學校가 난립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2. 外的 問題

 

1) 급변하는 時代

 

역사적으로 時代의 변천을 살펴보면 “18세기 一般的 時代精神은 合理主義的 啓蒙精神이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權威에 대한 批判的 저항이 時代를 풍미했다. 19세기는 啓蒙主義 時代精神이 무르익어 한편으로는 헤겔의 觀念主義를 批判하는 歷史的 唯物論, 進化論, 歷史主義가 時代를 지배했으나, 20세기 전반기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9세기 부르주아的 自由主義의 樂觀的 進步主義가 깨어지면서 實存主義 思想이 時代를 풍미하고 危機意識과 人間 및 歷史의 本質에 대한 규명이 더욱 심화되었다.

 

宗敎는 그 本質상 그 宗敎가 제시하는 宗敎的 메시지에 絶對性과 그 메시지를 社會에 실천하고 傳播하는 이른바 宗敎 조직의 社會的 絶代 權威를 주장하고 있다. 宗敎的 信念體系 안에서는 宗敎的 理想과 宗敎的 社會 활동이 지상의 어떤 思想과 社會 조직보다 상위에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당위적 절대 신념 체계로서의 宗敎가 現代 社會에서는 思想과 제도의 양면에서부터 그 權威가 상대화되어진다. 따라서 모든 宗敎는 現代 社會에서 思想과 제도의 양 측면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사실 宗敎는 어느 時代의 어느 社會에서나 思想과 제도의 양 측면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이 도전은 특히 社會와 문화의 격변기에 더욱 크게 된다. 오늘날 같이 급속한 산업 社會와 社會 가치의 격변기에서 宗敎는 인류 역사를 통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급변하는 社會 속에서 說敎는 그 기능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수 많은 매스미디어들의 범람과 오늘도 繼續해서 쏟아지는 정보 속에 說敎는 그 방향성을 정립하고 자리 매김을 하지 않는 한 설 자리조차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급변하는 社會 속에서 삶의 구조, 사고방식, 宗敎에 대한 가치관과 世界觀 등 說敎에 관계된 모든 영역을 파악하고 이에 합당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는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2) 變動하는 權威構造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과 무지 속에 敎育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문맹률이 굉장히 높았고 또한 정보 매체도 빈약했기 때문에 그들은 敎會의 집회에서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또한 敎會에서 행했던 의료사업, 敎育事業, 奉仕活動 등 社會에서 必要로 하는 것들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牧師는 굉장한 權威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時代의 발전과 더불어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敎會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즉, 그 분야에 숙련된 전문가들이 과거에 牧師가 행했던 기능들을 더 잘 수행하게 되고 그 만큼 牧師의 社會的 權威는 하락하게 된 것이다.

 

클라이드 리드는 “說敎의 危機”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權威構造 속에 살고 있다. 牧師는 自身이 牧師라는 것을 근거로 會衆 들에게 命令하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옛날처럼 牧師의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도 이제 새로운 生活 정황에 우리 自身을 맞추어 들어가야만 한다. 牧師는 이제 자기의 새로운 임무를 발견할 必要가 있다. 이것은 아마 전적으로 옳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權威 구조의 빛 아래서 福音을 傳達하는 方法을 再 硏究하여야만 한다. 옛날 방식은 이제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자유한 자가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는 고백과 그가 유대인이나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약한 자들처럼 여러 모양으로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福音의 변질이 아닌 상황적 적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權威에 있어서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을 회상하며 옛것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즉 군림하고 다스리는 權威가 아닌 順從하는 행위, 奉仕하는 행위, 희생하는 權威를 세워야 한다.

   

第 6 章 結 論

 

說敎 內容에 있어서 重要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說敎가 얼마나 聖經的이냐? 하는 問題일 것이다. 진정한 說敎는 說敎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 다시 말해서 說敎者의 人格과 생각들, 메시지의 內容과 傳達 등의 모든 部分이 聖經的이어야 한다. 그리고 聽衆과의 상호조화가 이루어질 때 참다운 說敎는 가능하다.

 

說敎는 內容만 좋게 포장되어 傳達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뒷면에 說敎者의 모습도 대단히 重要하다. 說敎者가 說敎만 잘 전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自身의 信仰과 人格的인 모습은 망각한 체 메시지에만 치중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說敎者의 입을 통해 聽衆들에게 다가서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說敎의 內容이 聖經的이어야 하며, 說敎者가 信仰人格을 제대로 갖추고 講壇에 서는 것은 매우 重要한 問題다. 舊約時代부터 新約時代와 現代에 이르기까지 가장 重要한 공통점은 說敎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에는 반드시 聽衆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에 基礎한 說敎의 內容과 說敎者의 숭고한 삶을 통한 체험의 생생한 福音이 傳達될 때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說敎의 위기는 說敎者로 말미암아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올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說敎者는 올바른 說敎를 위한 끊임없는 努力이 무엇보다 重要하다. 우선 自身의 삶 속에서 경건의 生活을 유지하고 올바른 성숙을 이뤄가야 하고 그리고 올바른 說敎의 內容을 위해 끊임없이 聖經을 硏究하고 고민해야 한다.

 

說敎 內容과 傳達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취급이다. 說敎는 말씀에 대하여 바르고 충실한 解釋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聖經의 본래의 意味를 충분히 파악하고 理解하며 객관적으로 보려는 努力과 說敎者의 삶을 통한 適用들이 說敎를 통해 나와야 한다. 說敎者는 說敎를 準備함에 있어서 聖經의 자체 解釋에 충실할뿐더러 과거의 상황들을 현재에 맞게 재구성해서 聽衆에게 傳達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說敎者가 있다. 그러나 그 說敎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메아리로 그쳐 버리고 역사의 현장에는 傳達되지 않는다. 부조리와 악이 날로 팽배하여 위험 수위에 오른 오늘의 현실은 說敎의 부재 時代임을 증명하고 있다. 說敎者는 많지만 참다운 說敎者는 없고 說敎는 많지만 살아있는 生命력이 넘치는 理想的인 說敎가 없는 時代이다. 講壇에 說敎가 있어 說敎가 아니요, 敎會당이 많아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講壇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퍼져 나갈 때 비로소 그 說敎는 說敎로서의 기능을 다 할 것이고 그 敎會堂은 十字架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講壇이 살고 敎會가 진정한 敎會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무엇보다 說敎者가 살아있어 理想的인 說敎를 傳播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理想的인 說敎는 이 時代에 必要한 것이며 가장 重要한 과제중의 하나이며 時代의 요청이요 聖徒들의 고통스러운 목마름이다.

 

說敎更新을 위하여 說敎者가 가져야 할 자세를 다시 한번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說敎者의 자아의식이 重要하다고 본다. 說敎者가 한 인격체로서 自身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說敎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說敎者는 自身의 존재와 가치의 근원에 대해서 언제나 확고해야 한다. 부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움 받은 청지기로서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自身의 분수를 아는 세례요한과 같은 자세를 지닌 說敎者이어야 한다.

 

둘째, 說敎者는 다른 무엇보다도 說敎를 우위에 두고 說敎中心의 삶을 살아야 한다. 牧會者로서 많은 敎會의 일들 가운데 가장 우선되고 重要한 일이 說敎임을 기억하고 說敎中心의 生活을 하여야 한다. 敎會의 바쁜 다른 어떠한 일도 說敎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 된다. 說敎에 우선 순위를 두고 說敎에 가장 많은 時間을 배정하고 삶 전체가 說敎를 위하여 존재하게 될 때에 說敎의 更新이 이루어 질 것이다.

 

셋째, 說敎者의 삶이 說敎와 일치하도록 努力해야 한다.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說敎者 自身의 축적된 信仰과 그 人格, 生活의 총체적 조명이다. 說敎者의 生活이 說敎의 內容과 다르다면 그 說敎는 제대로 聽衆에게 傳達되지 못할 것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硏究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에스라 7:10)라고 한 에스라와 같은 결심으로 말씀을 통하여 生活에 모범을 보이는 說敎者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本文의 意味를 바르게 전하는 說敎 內容을 위하여 硏究하는 삶과 說敎를 성실히 準備하는 生活을 해야 할 것이다. 쉽게 自身의 생각에 끼워 맞추어 本文을 解釋하고 說敎하려는 유혹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는 硏究를 통하여 本文을 바르게 釋義, 解釋, 適用함으로 本文의 意味를 바르게 現時代에 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때 說敎의 內容이 更新되어 질 것이다.

 

다섯째, 說敎者는 靈性啓發에 힘써야 한다. 說敎者가 說敎를 하지만, 그 것은 하나님의 能力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다. 說敎者는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힌 事役者가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부패한 社會에 靈的인 각성을 가져오는 일들을 說敎使役이 감당하기 위해서는 說敎者가 靈的으로 특별히 강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說敎는 靈的인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靈的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聖靈의 사람, 聖靈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靈的인 能力을 소유하기 위해 靈性訓練에 힘쓰는 說敎者가 되어야 한다.

 

說敎者의 바른 자세로의 更新을 통하여 說敎가 새로워지도록 모든 說敎者들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1. 要 約

 

제 1 장 序論에서는 이 論文이 추구하는 硏究의 目的과 意義 그리고 硏究 범위에 대한 간략한 說明이 있다. 韓國경제의 成長과 맥을 같이하면서 韓國敎會의 成長을 이끌었던 說敎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21세기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 점차 說敎의 本質에서 멀어지고 타락해 가는 韓國敎會의 問題점을 깊이 認識하고 그 대안으로서 聖經的인 說敎의 원류를 찾고자 「聖經的인 관점에서 說敎의 方法硏究」에 논의의 중점을 두었다. 說敎者는 많지만 참된 說敎가 없는 오늘의 현실을 認識하고 聖經에서 보는 說敎 方法에 대한 定義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重要한 것은 근본적으로 說敎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聖靈의 역사를 통해서 聖徒들에게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가장 聖經的인 說敎의 원리는 무엇일까 를 硏究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新․舊約 聖經에서 提案하고 있는 說敎의 方法을 硏究함으로써 오늘날 韓國敎會가 직면한 說敎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方法을 제시하고 자 하는 것이 본 論文의 目的이자 意義라고 할 수 있다.

 

제 2 장에서는 說敎에 대한 一般的인 定義를 보았다. 우선 說敎學者들이 본 說敎의 定義로서 특히 죤 스타트(John Stott)는 “說敎는 聽衆이 하나님의 音聲을 듣고 응답하도록 말씀을 열어 그 意味를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說敎란 福音宣布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데 說敎者는 福音宣布에 있어서 言語의 구사 기술을 꼭 使用해야 하지만 言語 구사의 기술만으로는 福音을 宣布 할 수 없다. 說敎者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言語라는 편의 도구를 하나님의 말씀과 맞바꾸려는 것이다. 說敎者는 단순히 대중 연설자가 아니며 聽衆을 즐겁게 해 주려고 여러 주제에 걸쳐서 구미에 맞게 수다스럽게 흥미 위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說敎者는 福音을 宣布하는 것이다. 說敎는 단순한 言語 구사가 아닌 福音의 宣布라는 점이고 또한 聖經에서 보는 說敎의 定義와 어원적인 定義를 말하고 있다. 즉 說敎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메시지인 福音을 직접적인 經驗에 의한 知識을 갖고 있는 자가 宣布하여 전하는 것“이라고 定義할 수 있다.

 

說敎의 要素로서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救援사건을 하나님의 말씀과 聖靈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生活과 역사에 適用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說敎者에게는 說敎할 메시지의 內容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대단히 重要하다.

 

그 內容을 두 가지로 말하면 「케리그마」와 「디다케」이다. 둘 다 聽衆을 대상으로 說敎하는 사실에는 아무런 異議가 없다. 그러나 그 目的이 다르고 適用이 다르다. 마치 똑같은 쌀을 소재로 음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는 밥을 만들어 어른들을 대상으로 공급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죽을 만들어 어린 아기에게 공급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理解하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救援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傳道 說敎를 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敎訓的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이 디다케이다.

 

마지막으로 說敎의 重要성을 說明하면서 특히 다네(James Daane)는 說敎의 重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說敎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었다. 한편 에밀 브른너(Emile Brunner)도 說敎의 重要성에 대하여 “진실한 說敎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宣布되고 있는 곳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重要한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베델도 基督敎가 서느냐 몰락하느냐 하는 것이 說敎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D.M.Lloyd-Jones) 역시 “개인 상담이나 그의 모든 활동은 說敎를 보좌하는 手段이지 說敎보다 앞선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곽안련 교수는 說敎하는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으로서 그리스도의 生命의 도를 전하여 영원히 죽을 인생을 永生의 길로 救援하는 것이다라고 說敎의 重要성을 말하였다.

 

제 3 장에서는 聖經神學的 說敎의 內容에 관한 글이다. 즉 舊約時代부터 新約時代 그리고 敎父時代와 中世時代 및 宗敎改革時代 그리고 現代에 이르기까지 각 時代의 聖經神學的 說敎의 內容을 정리하였다.

 

舊約時代는 오경說敎와 선지자들의 說敎 그리고 회당說敎로 나눠서 說明하였고, 新約時代에는 우선 세례요한의 說敎와 예수님의 說敎 그리고 사도들중 베드로와 스데반 그리고 바울의 說敎를 說明하고 있다. 특히 가장 中心이 되는 說敎가 예수님의 說敎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說敎의 中心이며 대답이 되신다. 說敎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흔히 說敎는 聖經에 基礎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聖經의 中心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한 說敎의 참 모습은 그리스도의 說敎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 自身이 福音이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自身을 說敎하셨다. 예수님의 說敎의 직능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님의 說敎는 유대 宗敎指導자들의 說敎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 안식일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說敎는 聽衆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마가는 기록하기를 “이는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막1:22)라고 했다. 예수님의 權威는 그의 인적 權威에 基礎한다. 예수님의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은 교제에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완전한 선과 경건이 실재한다. 예수님의 說敎는 메시아의 소개가 아니며 自身의 救援을 선언하는 메시지였다. 그러므로 주님의 說敎는 차원이 다른 권능 있는 說敎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說敎는 사람들의 죄를 審判하는 예언자로서의 說敎였다. 죄를 審判하는 說敎는 宗敎人을 가장한 형식주의자들, 의식주의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헤롯 안디바를 향해 “여우”(눅13:32)라고 한 것이다. 주는 죄인을 사랑 하셨다. 그러나 죄 있는 그대로는 사랑하지 않으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救援과 永生을 목표로 하여 說敎하셨다. 제사장으로서의 사랑과 자비의 說敎는 마음에 상처입고 소외된 자들에게 치유와 사랑과 救援의 은혜를 宣布하는 오늘의 救援(눅4:18-19)이었다. 예수님의 說敎는 속죄와 十字架에 관련되었고 특색으로는 오실 자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自身이 救援이라는 것을 宣布하는데 있다.

 

敎父時代에는 로마의 크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폴리갑과 알렉산드리아의 유스티누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터률리안과 크리소스톰 및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說敎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암흑기로서의 中世時代의 說敎는 첫째 基督敎의 국교화와 둘째, 禮拜의 의식화, 셋째 금욕주의화 넷째 敎會의 속전의 증대로 인한 說敎의 암흑기를 說明하였다. 宗敎改革 時代의 說敎의 경우에는 改革자들이 남긴 說敎의 형태와 內容 및 전개는 후대 說敎者들의 살아있는 귀감으로서 說敎의 本質을 지키게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現代의 說敎는 다행스럽게도 聖經 本文을 중시하는 講解說敎의 方法이 발전되고 있음을 說明하였고 20세기 神學思想의 다양성으로 正統神學과 解放神學 그리고 民衆神學에 대한 內容을 담았다.

 

제 4 장에서는 說敎의 諸方法의 類型으로,

 

첫째, 題目說敎를 들 수 있다. 題目說敎는 다루고자 하는 題目과 問題를 내걸고 그 問題에 대해서 聖經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저기서 뽑아 그 題目을 증명 지원하고 그 題目에 대한 說敎者 自身의 結論的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說敎를 말한다.

 

둘째, 本文說敎는 本文을 택하고 그 本文의 문맥을 잘 살펴서 그 本文에서 題目을 발견하여 정하고 그 本文을 分解해서 대지를 발굴하여 題目과 연결시키고 전진성 있게 배열하여 說明해 가는 것이다.

 

셋째, 註解說敎는 반드시 本文이 있으며 本文을 中心으로 반드시 조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本文에 대한 해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講解說敎는 그 속의 秘密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精神이 說敎者의 心靈 속에 들어오기까지 說敎者의 머리와 마음과 두뇌를 총동원하여 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울고 그리고 기록한 聖經 중의 어느 한 책이나 또는 확장된 部分의 말씀을 繼續的으로 취재하는 方法이다.

 

제 5 장은 說敎者의 資質에 관한 內容으로 우선 제 1절에서는 說敎者에 대한 定義를 說明하였다. 說敎者는 메시지를 받은자가 좋은 소식을 통보하도록 命令을 받은 자라는 意味다. 2절에서는 說敎者의 資格에 대해 說明하고 있는데 說敎者는 거듭난 자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이며,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가 다른 사람의 靈魂을 사랑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또한 정성구 博士는 說敎者가 갖추어야 할 人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自身이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說敎者의 人格은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온다. 說敎者의 靈性과 人格의 초석은 自身이 救援과 重生에 대한 철두철미한 자기 認識과 告白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라야 한다. 참된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의 모든 使役의 重要 동기가 되어야 한다.

 

3) 說敎者의 人格의 基礎는 다른 사람의 靈魂을 사랑해야 한다.

 

3절에서는 說敎者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서 특히 사명감의 결여를 말하고 있다. 이 때 대안으로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心靈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聖靈이 각 성에서 내게 證據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헤의 福音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生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 22-24)

 

바울이 바울된 것은 福音 傳播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기 生命도 마다하지 않고 穩全히 바쳤기 때문이다. 說敎者가 하는 일에는 어려운 일이 많다. 그러나 어려운 것과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말 확실한 소명감을 가진 說敎者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극복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기의 知識으로 자기의 經驗으로, 자기의 能力으로 牧會를 하고 說敎를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제 6 장은 마지막 結論으로서 무엇보다 가장 重要한 것은 說敎者의 자세라는 점을 다시 한번 强調하고 說敎者의 끊임없는 자기 努力이 정말 이 時代를 救援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로 論文을 마친다.

 

2. 要 點 (論者主張)

 

牧會는 人間의 靈魂을 救援하는 使役이며, 이 救援 使役은 說敎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說敎는 牧會에 있어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宣布되어야 할 韓國敎會의 講壇을 非聖經的인 것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것을 막고 講壇의 更新을 위하여 놓았던 聖經을 다시 붙잡고 聖經만을 說敎하는 聖經的 說敎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宣布해야 한다. 오늘의 說敎현실은 지나친 개 교회주의와 교파우월주의, 大型化 경쟁 등으로 說敎神學이 사라진 說敎, 예수그리스도와 예수님의 十字架의 代贖의 사랑이 증발 되어버린 說敎, 하나님의 공의와 審判이 없는 說敎 때문에 생긴 말씀의 심각한 공해 속에서 敎會를 찾는 발걸음이 줄어들고 있다. 기복주의 信仰과 신비주의, 잘못된 헌금강요, 등 비윤리적이고 탈 역사적인 현상들이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必要한 것은 오직 철저한 聖經的 說敎이다. 그러므로 오직 聖經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說敎者는 끊임없이 배우고 努力하고 祈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宣布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說敎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說敎는 언제나 과거에 기록된 聖經을 本文으로 使用하면서도 오늘의 말씀으로 傳達되어야 하고, 現 時代의 다양한 問題들을 끌어안고 이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音聲을 듣고 宣布 해야한다. 說敎는 무엇보다 人間의 言語를 傳達 수단으로 하면서도 人間의 知識이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聖經을 전해야 하고, 聖經의 中心인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어 보여 주어야 하며 우리를 救援하시기 위하여 十字架로 代贖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믿게 하여 救援을 얻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의 救援은 예수그리스도의 十字架의 代贖의 공로를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中心이 되고 十字架의 代贖의 사랑이 中心이 되는 聖經的 說敎가 있는 곳에서 회심과 重生, 그리고 삶의 變化가 일어나는 救援역사가 있다고 믿는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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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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