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신학적 관점에 의한 선교 이론의 변화와 역사적 상황에 의한 선교 방향의 변화에 관한 고찰

수호천사1 2009. 5. 20. 21:50

신학적 관점에 의한 선교 이론의 변화와

역사적 상황에 의한 선교 방향의 변화에 관한 고찰

 

서언

 

MIssion 이란 차용한 말로써 라틴어의 본래의 뜻은 파견 혹은 사명,위임이란 뜻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수한 임무를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사명과 위임을 주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임무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다가 더 이상 신앙을 유지 하지 않는 사람이나 방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댜.

 

선교를 불신 세계에 대한 교회의 임무라고 볼때 그 임무가 외국이냐 내국이내에 따라 해외선교 이방선교 혹은 내국선교 대중선교로 나눌수 있다. 또한 선교를 타종교권으로 겨냥할때 불교권선교 회교권선교나 유대권선교 라고 표현할수도 있다.

 

이러한 복음의 개념과 정의는 단순하게 정의 될수 없으며, 각 상황과 선교대상에 따라 조금은 그 개념이 다르게 변할수도 있다.

 

선교란 '예수 그리수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일' 이라고 단순하게 정의 할수 있다. 하지만 간략하고 단순한 예수님의 명령인 선교가 그 시대와 각 개인에 의하여서 그리고 지역과 이데올로기에 의하여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보편적 신학의 선교적 관점과 실천것 실천실학의 선교적 관점은 판이하게 틀린다. 캘빈과 W.C.C.의 관점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지금 올바른 선교관의 정립은 이 시대에 맡겨진 사명이라 하겠다.

1 신학적 관점에 의한 선교 이론의 변화

 

1 피터 바이엘 하우스(Peter Beyerhaus)

 

그는 선교의 개념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선교는 세상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영원한 구속을 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등진 결과로 영원한 형벌아래 있게 되었다. 그런 인간이 구원받도록 부르는 것이 선교이다.

 

셋째 선교는 악한 마귀를 내붸는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 열두제자를 보내실때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붸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로서 그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네째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초대 선교사들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거룩한 성급함이 있었다. 이 시대의 종말은 예수께서 재림하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때 였다.

 

2 오를란도 코스타스(Orlando E. Costas)

 

그는 자신의 책 {선교의 본래모습 (the Integrit of Mission)}에서 선교에 대해 몇 가지로 간추리고 있다.

 

첫째 선교는 선포(proclamation)이다.

 

그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 함으로 말미 암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1 주의 이름을 선포 하는 것이다. 즉 그의 인격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삶의 새로운 방업의 수용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가 쓰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삶의 새 질서 새 인간성 새 창조라는 말로 표현되는 역사의 변혁을 말한다.

 

3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회심의 결단)을 선포함이다.

 

회심이란 죄에서 하나님께 돌아옴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서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새로운 가치관과 태도를 견지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사외에 전적으러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1 신자가 재 단체에 연합됨으로 주를 따름을 말한다.

2 예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예수를 순종하는 것으로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 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셋째 선교는 활동(mobilaization)이다

 

케네스 스트라한(R. Kenneth Strchan)은 "어떠한 운동이든지 간에 그 운동에 대한 신념을 일깨워 주고 그 신념에 따라 전 회원이 활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때 그 운동은 성공리에 확산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하고 한다.그는 활동의 과정을 1 의식화 2 분석 3 계획 4 공동의 노력 5 평가의 순으로 정하고 있다.

 

넷째 선교는 복합적 성장(integral growth)이다.

 

숫자적인 성장을 '폭의 성장'이라 한다면 경험 조직 개념과 경배 상호 도움에서 깊이가 더 해감을 '깊이의 성장'이라 한다. 따라서 신학의 이해와 봉사 그리고 교제로 깊이의 성장을 해야 하고 빛된 삶 타인을 위한 삶 희생의 삶 등으로 높이의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선교는 해방(liberation)이다.

 

바돌로매 데 라스 카사스(Rartolome de las Casas) 는 멕시코의 치아파스(Chiapas)에서 인디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으며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세인트 토마스(Saint thomas)라는 곳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어 흑인을 위해 투쟁하였고 수리남에서는 형제단체를 설립하여 노예를 자유인처럼 대해 주었던 사실을 그는 예로 제시한다. 그는 해방의 개념으로 세가지 카테고리를 즉 가난함 눈멂 그리고 포로됨과 압박 받음으로 부터의 해방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선교는 축하(celebration)이다. 선교는 승리적인 상황을 축하함이고 교회를 축하함이며 예배의 연속이다 라고 그는 주장한다.

3 하나님의 선교(ㄍㄊㄓㄓㄊㄐ ㄉㄅㄊ)

 

이 개념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 선교의 개념은 아주 독특하다. 선교의 기원은 교회도 아니고 교회한에 있는 어떤 특정 그룹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은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둔다. 하나님은 세상에 오시기 위해 변방(장애)를 가로질러 오신 선교사이다. 성육신이 바로 그사건이다. 아들이 성육신 하심도 선교이고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도 선교이다. 이렇게 볼때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바네크(Warnck)는 그의 {복음적 선교학}(Evangelishe Missionslehre)에서 선교가 삼위 하나님에 근거됨을 언급하고 칼 할텐스타인( Karl Hartenstein)은 1933년에 이 사상을 더 충본히 발전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연구 결과는 빌링겐 선교 대회에 반영되어졌다. 빌링겐 회의의 보고서에는 "우리가 한 부분이 되어 있는 선교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고백한다. 사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체계적 정립은 그대회 이후 조지 비세돔(George Vicedom)에 의하여 이루어 륵다. 그의 {하나님의 선교}하는 책의 주제는 하나님은 선교에 있어서 '행동하는 주체'(acting subject)라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란 우선 선교가 하나님께 속한 활동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이시고 위임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소유자 이시고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는 선교의 주역이시다."

 

그는 선교 신학을 하나님 즉 삼위일떼 주님으로 부터 도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은간들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들에게 그 나라에서 누릴 수있는 은사들을 전해줌에 있다.고 정의 한다. 그리고 그의 이론에서 하나님 나라가 선교의 목표인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즉 그 나라는 현세적인 형태일 수 없고 실현될것을 바라는 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비세돔은 이렇게 말한다."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곳에 있고 이 완료 시제에 근거하여 미래에 도래할 것이다. 하는 말로서 불신자에게 선포될 수 있다."

 

즉 우리는'이미'(alread) 라는 근거 위에 '아직 아니'(not yet)로 나가야 할것을 여기서 찾을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와 종래의 선요 이해와 드른 점들을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것은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 세우는 일'(implantio ecclesiae)의 약화를 뜻한다. 종래의 선료관은 교회 확장이 영원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사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church for others)로 봄으로 교회의 중요성은 교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함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종래의 '하나님 --교회 --세계'라는 구원 사역의 차서는 '하나님--세계--교회'라는 차서로 바뀌고 교회는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역사하심의 징표에 민감하여 그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존테일러(John Taylor)와 요하네스 아가드(Johaaes Aagaard)에 의해서 발전된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하나님의 설교를 삼위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여러 분야의 선교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셋째로 그것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God acts and History)을 강조 한다.즉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judge)로서 그리고 해방자(liberator)로서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할수 없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구원행위는 사회적 일로만 하려들면 불가능하다. 만약 예수 없이 행하는 복지 사업 해방운동 공의 운동 등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따라서 예수를 통하여 새하늘을 창조함이 간과되어서는 않될것이다.

 

4 칼 바르트(Karl barth)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화해 사건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선詷 신학을 도출하는 하나님의 선교와는 달리 그가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그의 선교 신학을 도출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즉 화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연합을 원함에서 부터 이루어졌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을 가능케 되었다. 교회는 이화해의 일에 참여 함으로써 선교의 일에 참여하게 될수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료 신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선교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제시함에 그치는 것이 된다. 즉 보편적 구원론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그의 말대로하면 선교에 있어서 인간은 구원을 얻도록 초청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증인이 되게 하는 부름에 초청되는 것 뿐이다. 즉 믿음과 성령에 의한 적절한 결단과 응답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5 그스타프 바네크(G. warneck)

 

바네크는 복음선포를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복음으로 인해 많은 청자의 심령들이 깨어지고 양심이 살아나 이런 사람들이 연합할때 교회가 되며 비로소 거기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6 해롤드 쿡(Harold R. Cook)

 

그는 "선교란 선료사 라고 부르는 선택된 일꾼들의 그룹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인도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다."라고 정의한다.

 

첫째 선교는 교회의 일이다.

둘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얻으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셋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이끄는 것이다.

네째 선교는 선택된 일(full time)꾼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선교의 개념이 상이한 것은 각 개인의 관점 즉 그의 선교적 관점의 차이라고 할수 있다.하지만 이러한 선겨적 개념이 이론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선교 현장에서도 다른것은 선교가 대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 역사적 상황에 의한 선교 방향의 변화

 

선교는 예수님에 의하여 선포되었고 충성스러운 종들의 노력으로 이어져 가는 운동이다. 따라서 필연적을 역사의 흐름 가운데 그방향이 뚜렷이 달라져 왔다.

 

1 자발적 확대

 

몇몇 소수의 미천한 사람의 모임이 어떻게 로마제국의 공식 족교로 까지 발전 될수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없다. 알렌(Rolland Allen)은 그것을 '자발적인 확대'에 의하여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발적인 확대한 그들 스스로 발견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자신靪의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선교가 잘되었던 이유는 무었일까 ?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구속의 은혜에 대한 체험 때문이다.

2 성령의 능력을 의존했다.

3 대상지역의 문화를 숙지 했다.

4 종말론적 사명감 때문이다.

 

라투렛은 초대교회의 선교 성공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2 사회의 붕괴

3 교회의 발전된 조직

4 교회의 포용성

5 교회의 비타협성과 유연성 즉 정체성의 확립

6 기독교의 종교적 철학적 탁월성

7 유대적 기원 즉 기독교는 메시지를 전달할 매개체인 유대교를 이용할수 있었다.

8 도덕적인 질

9 기적

10 예수 자신의 특이성

 

2 정치적 세력을 통한 확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제국의 종적 종교로 수용한 후에 교회의 성격과 선교가 변하게 된다. 질서가 자발을 대신하였고 이제 교회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순종하고 회심하도록 하였다. 즉 기독교 국에 의해 정복을 당한 백성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굻도록 강요당하였고 정복자에 대한 항복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는 "감독이나 사제나 집사를 죽이는 자는 어떤 자라도 즉음에 처하여 질것이다. 세계를 받기를 거절하는 미세계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즉음에 처하여 질것이다."는 등의 규칙을 국가가 공권력으로 집행하였다. 또한 프러시아의 항복 조약문은 이러하였다. "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자는 한 달 안에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타협을 않으려는 자들을 그리스도인 무리로 부터 격리 되어야만 한다. 원상태의 이교로 되돌아 간자는 어던 자라도 노예가 되어야한다. 이교의 경배는 멈추어져야 한다.일부일쳐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실쳔은 채용 되어져야 한다. 교회들이 세워져야 한다. 새로 개종한 자는 주일날과 절기날 교회에 참여해야만 한다. 교역자의 지원을 위해 지급을 해야만 한다.회심자는 사순절의 금식을 지켜야 한다. 회김자는 일년에 최소한 한번은 사제에게 고백을 해야 한다. 부활절의 서례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각국가의 정책 범위를 넘어서 까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정복자는 피정복민의 단체 회심을 강요 하였던 것이다.

 

15세기 교황 알렉산더 6 세의 조정에 의해 그들 카톨릭 국가의 해외 식민지는 조정된다. 즉 남북 아메리카는 스페인의 영역 아래로 브라질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포루투칼의 영역 아래로 놓여지게 되었다. 선교는 이제 국가와 교회의 공동 사업이었다. 현지의 인디안들은 스페인의 왕에게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복종해야만 했다. 토착인들에 대한 착취와 항거하는 그들을 대량 학살 하는 것이 선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역기능이 심각하게 발생 하였던 것이다.

 

3 수도원 제도를 통한 확대

 

교회와 국가의 결탁에 대하여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을 결성하였고 이들 수도사들 중 많은 사람이 변경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596년 그레고리 교황에 의하여 영국 섬들에게 보내어진 어거스틴은 수도사였다.

 

이들은 본터인의 절기와 장소를 훼손하지 않고 기독교화 시켰다.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그레고리 교황이 어거스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들의 이교 사원들은 파괴 시킬 필요가 없다. 그들 중에서 발견되는 우상들만을 파괴 시켜야 한다. 만약 사원들이 잘 세워져 있다면 귀신 예매를 제거하고 참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사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중략.....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나타냄에 있어 우리는 피선교 지역의 풍속과 언어를 채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혼합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토착화 작업에는 많은 주의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4 신교의 선교회

 

신교가 교구적이고이기적이며 이교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다는 천주겨의 조소는 근거없는것이 아니다. 1500년에서 1700년 까지 200년간 진취적인 로마 카톨릭은 유럽에서 개혁운동 때문에 신교회에 내어준 교세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회심 시켰다. 그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가 ?

 

첫째로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은 불신자의 구원을 하나님의 일로만 미루었다. 따라서 그들은 불신자의 구원을 위한 총체적인 노력을 유보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신교의 교회는 허약한 상황에 있었다. 신교의 관심은 확대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셋째로 신교의 고립적 위치이다.카톨릭 국가보다 신교 국가들은 외국 이방에 대하여 몰랐다.

 

네째로 신교는 종교적 제도가 갖는 축복을 향유하지 않앗다. 신교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족에 얽매어 멀리 나아감에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구교보다 200년이나 뒤늦게 시작한 신교의 선교는 어떻게 발전되었던가 ? 17세기초 화란에서 시작된다. 즉히 1648년 호이얼니우스느(j. Heurnius) {인도인들 가운데 복음적인 선교를 착수하기 위한 권고, 즉 숙고의 가치}(An Exhortation, Worthy of Consideration, to Embark upon an Evangelical Mission among Indians)라는 책을 썼으며 인도네시아러 선교사가 되어간다.기스벨투스 보에투스(Gisbertus Voetius)는 저서 {Politica ecclesiastica} 에서 하나님 자신이 선교의 원인자라고 하고 교회는 선교의 대리자 이어야 한다.고 주당한다. 그는 선교의 목적에 대해서 1 이방인의 회심 2 교회를 세움 3 신적은헤의 영화와별현 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단적 측면에서 재세례파의 선교 사상은 다른 신교 그룹들 보다 앞선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은 참된 징표로 순례 선교 그리고 순교 에 둔다.

 

5 19세기의 폭발

 

중세의 수도원이 복음화에 기여 하였다면 19세기는 신교의 선교부가 선교에 기여하게 된다. 케리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로서 1792년 침례교 선교회를 구상하였고 {추구} 라는 책을 지었으며 침례교 선교회에 의하여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한다. 윌리암 케리의 선교 강조점은 다음과 같다.

 

1 도든 가능한 수단에 의하여 복음을 광벙의하게 선표함

2 그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베포함으로 선교를 후원함]

3 초기의 가능한 때 교회를 설립

4 초기의 가능한 때 본토인 목사의 훈련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는 7년간 중극에서 선교를 하며 중국인과 동일화를 시도하였다.그의 선교회의 즉성은 아래와 같다.

 

1 선교회는 초교파적이었다.

2 형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자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 주었다.

3 선교회의 방향은 중국이지 영국은 아니었다.

4 선교사들은 중국인 옷을 입기를 바랏다.

5 선교의 기본 목적을 광범위한 전도에 두었다.

 

유럽과 북미에서의 경건주의의 영적인 역동성은 1787~1914년 사이에 여러 선교회를 낳게 하였다. 그당시의 산교의 목표는 개인 전도에 있었고 교회 세움에 있지 않앗다. 그리고 현지 문화의 존재에 무관심 하였고 다만 서양 문화의 우월성만을 믿고 그것을 복음과 함께 선교지에 심으려고만 하였다. 이것은 선교의 목적으로서 복음화 보다도 무영화를 더 우선시 하는 견해이다. 여하튼 19세기 유럽인의 세계 진출은 기독교로하여금 세계종교가 되게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계 전역에 기독교가 퍼륵다 그래서 라투렛은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하였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세계 선교를 위한 선교회가 많이 조직 되었다.

 

6 20 세기의 혼란

 

유럽과 이국에 의해 주도된 선교운동이 경제적 식민지적 그리고 정치적 힘에 배경을 둔 문화와 결탁하여 확장된 것은 사실 이었다. 그힘은 선교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유용하였지만 복음의 순수성에 타격을 입텣다. 20 세기에 이르러 선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 대문이었다.1910년 에딘버러 대회는 세계 복음화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28년 예루살렘 대회에 화서는 그 강조점이 사회복음 쪽으로 전환되었다.윌리암 혹킹은 {선교의 재고}에서 예루살렘대회의 사상을 강조한다.

 

1938년 마드라스에서 모인 국제 선교 대회에서는 타종교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주장을 거절하고 성경의 권의를 주장하였다. 1947년 휫트빗대회에서는 복음의 덩참자의 의식이 고취되었다. 1961년 뉴델리 대회(W.C.C.)에서 무었이 교회이며 무었이 선교인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비기독교의 것과 관계를 가져야 할것인가 ? 등의 문제가 에큐메니칼의 조화를 위해 폐지 되었다. 거기에서는 교회 연합을 강조한 나며지 나라를 복음화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삭감되었다.

 

결론

 

우월한 문화 경제적 바탕위에서 이루어지는 선교가 복음의 사업으로 보다는 국가적예속화를 가속화 하는 방편을 이해되어지는 현실은 선교적 관점에서 볼때 크나큰 문네가 아닐수 없다. 중세와 근세에서 식민지 점령의 국가적 정책을 이용하여 선교가 이루어 졌고 현제에도 소의 선진국의 국가 우위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상황이 이러한 오늘의 문제를 낳았다고 볼수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선교의 사회적 역활에 대한 관심 이동으로 종국적으로는 복음의 선포 보다는 인간의 삶의 질적 향상 즉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선교의 진리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내용인 복음의 독단적 강요가 아니라 선교 대상지의 정신세계와 포용적 화합으로 극단적인 종교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만들게 까지 되었다. 압제의 세계로 부터 제 3세계의 탈출은 선교를 식민지적 도구로 배척하게 만들었고 기독교 국가에서는 극단의 합리적 사고의 가치관으로, 기독교 진리 자체가 그 호소력을 잃고 있다.

 

간략하고 단순한 예수님의 명령인 선교가 그 시대와 각 개인에 의하여서 그리고 지역과 이데올로기에 의하여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보편적 신학의 선교적 관점과 실천것 실천실학의 선교적 관점은 판이하게 틀린다. 캘빈과 W.C.C.의 관점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무시한 극단의 사변적 선교관과 복음의 진리를 외면한채 사회변혁만을 주장하는 실천적 선교등은 피해야 할것이다. 선교의 대상은 바로 현재에 살고 있는 인간이며 또한 동시에 선교의 내용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다.

 

복음없는 실천은 무의미하며 실천없는 복음은 공허할 뿐이다.우리는 온전히 선교의 주인이신 성령의 역사에 민감히 반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겸허히 신 중심적인 입장에서 모든것을 버리고 초대교회의 선교 현장으로 돌아가는 선교의 혁명이 있어야 될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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