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1859-1916년) : 한국 선교의 선두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신학교를 다니던 당시 미국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한국)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알버트 목사님은 신학생들에게 호소력 있는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큰 도전과 감동이 되었다.
“지금 조선은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문호가 폐쇄되었는데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던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언더우드는 많은 갈등 속에서 자신이 가야겠다는 주님의 부르심에 확신이 있었다.
그는 한번도 복음을 못 들어 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그 어느 곳보다 선교의 우선 순위가 있다고 깨닫고 또 한번의 결단을 하고 희생을 치루기로 하였다. 가장 큰 희생은 그 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어를 배우고 준비해 놓은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 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조선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듣고 한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한 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 북장로교 첫 한국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날을 한국교회는 최초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다.
호레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의료선교사인 '호레스 알렌'(H. Allen)이 설립한 제중원(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고 고아원과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서회'를 만들어 성서번역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였고,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였다. 그의 선교적 열망은 뜨거워 한국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쳐 [기독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는 청년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53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형을 설득하여 그로부터 5만 2천 달러를 헌금 받아,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1915년 [Chosun Christian College 조선신학교] (연희전문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깨워나갔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특별히 고난에 처한 사람 즉 버려진 고아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치료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의료선교사 앨런은 고종의 어의로, 언더우드 부인은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활동함으로써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아 한국 개신교 선교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됐다.
언더우드는 당시 국왕이었던 고종의 탄신일을 맞이해 축하 기념행사와 예배를 드려 를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교임을 일반에게 알림으로 전도의 기회도 얻으려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 즉,임금도 아비도 없는 무뢰배들의 오랑캐 종교라고 잘못 인식이 되어 조정으로부터 혹독하고 비참한 모진 박해를 받고 무수한 순교자를 낸 것과는 달리 개신교는 오히려 조정의 비호를 받으며 순조롭게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공헌이 컸다.
그것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과 한국 국민 뿐만 아니라 황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1916년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그 해 뉴저지주 아틀란타시에서 57세의 나이로 30년 간의 한국 선교를 마감하고 소천하였다.
그의 후손들의 활동도 언더우드 선교사 못지않았다. 2세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박사는 일제하 암흑기에 학살사건을 외국에 폭로했으며 한국학 연구에도 크게 힘써 한국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1940년에 일제하에 진주만 사건을 계기로 추방당했다가 6.25전쟁을 계기로 다시 입국하여 부산에서 과로로 1951년 심장마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세운 조선 신학교에서 학교학장으로 일했다.
3세 원일한(Horace G. Underwood 1917-2004 )박사는 한국 전쟁시 미 해군에 자원 입대해 1953년 휴전이 되기까지 판문점 회담에서 통역팀을 주도했다. 4세인 증손자 언더우드가의 적자인 원한광(1943 - ) 박사는 2004년11월 한국 내 활동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계속된 그의 자녀와 손자들의 헌신으로 백년이 넘는 오랜기간에 걸친 한국과 언더우드가(家)와의 사랑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그의 선교정신을 길이 기리기 위해 1999년 5월 미국에 안장된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와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외국인묘지에 이장하였다.
호레스 언더우드 선교사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사회의 성숙의 기틀을 제공했다. 우리도 이런 미전도 종족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명문 선교의 가족이 되자.
< 언더우드의 기도 >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H.G언더우드(연희 전문학교 창설자.초대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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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lobal Youth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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