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속죄구령에 힘써야 해요
99세 방지일 원로목사 파워인터뷰..."감독회장 다툼 부끄러워"
뉴스파워/
방지일 원로목사는 올해 99세이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노인아파트에서 매주 월요일 후배 목회자 4~50 여명을 모아놓고 51년째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공부 뿐만 아니라 국내외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한다. 꼬박꼬박 기록해서 설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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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목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고, 이후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했다. 그리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1957년 강제로 추방돼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영등포교회 담임목사와 예장통합 총회장을 지냈다.
2007 1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때 방지일 목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방 목사는 평양 장대현교회와 길선주 목사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기억할만큼 건강했다. 특별히 따로 건강관리를 하는 것도 없다고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방 목사는 수십년 전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외국을 나갔을 때 중국인교회에서는 중국어로 설교를 할 만큼 여전히 중국어 실력도 뛰어나다. 중국 선교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방 목사는 1937년 27세의 나이에 총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부친 방효원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던 중국 산동성을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모두 철수하기 시작했다. 방 선교사는 그러나 마지막까지 선교 현장을 지켰다. 교인들이 처형당하고, 교회는 폐쇄되는 고난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5,000명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공산화되면서 나 혼자만 남아 9년을 사역했어요. 중국 정부가 나를 추방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라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중국 선교사로 나가기를 고대했지만 갈 수 없었다. 결국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했다.
방지일 목사는 한국 화교교회 설립의 산파역할을 감당했고, 재한 중화기독교유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못다한 중국 선교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또 전세계의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격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도 하루하루 사역 일정으로 꽉 차있다.
방 목사는 이번 인터뷰에서 속죄구령(贖罪救靈)을 강조했다. 조용조용하게 말하다가도 속죄구령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만큼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방 목사는 한국 교회의 분열에 대한 아타까움도 토로했다. 1959년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됐을 때는 너무 분해서 아무데도 안 들어갔다."고 밝혔다. 자신이 속한 영등포노회에서는 갈라지지 말자고 합해보자고 3년 동안 아무 총회도 안 갔다고 소개했다.
방 목사는 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아들이나 딸이 예수를 믿으면 못 믿게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려고 인두로 지지고 했다. 그래도 믿었다."며 "그런 때도 아닌 데 뭐가 위기냐?"고 했다.
방 목사는 "교단별로 총회장, 감독되겠다고 싸우는 것이 부끄럽지 다른 것은 없다"며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속죄 구령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방지일 목사와 인터뷰는 3월 28일 오전 자신이 살고 있는 강서구 등촌동 노인아파트에서 한 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올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건강관리 비법이 있으시다면?
내가 1911년생이니가 한국 나이로 99세입니다. 지금은 걷기를 잘 못해 부축을 받기도 하지만 주일마다든지 설교를 해달라고 하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니까 살아있지만 전보다 잘 걷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건강관리로 별다른 규칙은 없어요. 밤에는 목욕을 합니다. 오늘도 새벽 2시에 일어나 목욕을 했습니다. 자꾸 발을 움직여야 동하지 않지요.
목사님의 조부께서 신앙을 처음 받아들이셨죠? 아버지도 목회자이자 중국 선교사이셨던 것으로 압니다.
우리 조부께서는 본인이 직접 찾아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구속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방 씨 일가 250호 정도가 함께 하는 마을에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장자였어요. 예수를 믿으니까 제사 안 지낼라고 한다고 반대를 많이 받았어요.
신앙은 한번 들어가면 변치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열 몇 살 때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 것을 보고 믿기로 결심했다고 그래요.
결국 우리 가족은 마을에서 쫓겨났어요. 증조부가 돌아가셨는데 유교식이 아닌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자 정말 반역했다고 쫓아냈어요. 수십 리 밖에서 집을 얻어서 살면서 숫하게 고생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 자손 6남매 중 아들 2명과 사위 한 명이 목회자가 됐어요. 목사가 셋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좋은 신앙 유산을 물려받고 자손들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목사님은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신 적이 있습니다. 평양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나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고 평양은 그곳에서 삼백리 정도 떨어져 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가서 숭실대학교와 평양신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 4년 신학교 3년 외에 교회 사역을 하고, 개척교회도 하면서 총 8년여를 평양에 있다가 총회를 통해 중국선교사로 파송됐습니다.
목사님께서 계셨던 장대현교회와 요즘 한국 교회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그 때는 예배할 때 떠들거나 박수하는 것이 없었어요. 장로교, 감리교가 먼저 들어오고 몇 년 있다가 성결교가 들어왔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박수를 치면 성결교라고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요즘은 박수를 치면서 흥겹기도 하지만 예배적 입장에서 보면 좀 안되었다고 봐요. 누가 왔다고 박수치는 것을 보면 공설운동장에서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 좋아하는 것 같아 제가 착각하는지도 모르지요.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십자가의 복음을 많이 강조하십니다.
구속의 도리지요. 속죄의 구령이 복음의 강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 때문에 와서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셔서 내가 사죄함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그것을 빼면 복음 신앙은 없어요.
월요성경공부모임을 꾸준히 해오고 계시지요?
중국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958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51년이 됐네요. 여러 목사들도 오고가고 하지만 출석을 안불러서 누가 오는지 모르지만 오고 싶다고 데리고 오라고 하는데 20여명 정도가 모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후배 목사에게 강조하는 것은?
종교라는 카테고리에 복음신앙, 구속의 복음을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혼동할 수 없어요. 유일한 속죄의 복음이에요. 죄를 속하는 것을 두고 어떤 곳에서는 도를 닦고, 공을 세우고 하는데 인간의 각성으로 예수의 속죄를 알 수가 있나.
내가 종종 그럽니다. 내가 종종 그럽니다. 조류나 돌고래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소리를 못 듣습니다. 짐승의 소리도 안 들리는데 하나님의 영음을 어떻게 듣겠어요. 그것은 달라요. 예수님이 너희를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께 구해 보혜사를 보내겠다 하셨고, 보혜사가 와서야 죄를 인식하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깨닫는 것은 영으로만 알 수 있어요. 기도할수록 죄가 깨달아집니다. ‘죄만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성경에서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더 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를 깨달을수록 죄를 찾아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치하에 선교 활동을 하면서 ‘기도는 죄를 찾는 현미경’이라는 말을 찾았어요. 내가 끼고 있는 돋보기는 5배 10배를 확대 하지만 현미경은 백배 천배를 들여다 볼 수 있어요. 눈으로 볼 수 없는 미균을 지금도 눈으로 찾아내고 있잖아요. 몇만 배로 확대해 조류독감, 에이즈 균 등을 연구하고 있잖아요. 아직도 못 찾고 있는 균도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렌즈가 높아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보여요.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기도할수록 죄는 찾아지는 겁니다.
목사님은 장로교가 분열되기 전인 1937년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조선신학교에 김재준, 송창근 박사로 인해 분열되고 장로회신학교가 생겼고 1959년에는 통합과 합동이 분열했습니다. 후에 합동은 또 분열되었습니다. 분열의 과정을 보시면서 목사님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나는 암만 해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교파가 갈라지려면 심경이 달라야 합니다. 심경이 다르려면 신앙고백이 달라야 합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교파가 다른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알 수가 없어요. 우리는 웨스터민터스터 신앙고백이에요. 사도신경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했다가 다시 오신다는 다 같은 고백인데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왜 갈라졌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합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교가 12개라고 합디다.
연합회 고문이라고 해서 어느 자리에 가보면 각 교단별로 환영을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100여개라고 해요. 예장 개혁측 회장, 총무라고 인사하는데 A, B, C라고 구분을 해요. 역사에서 후손들이 뭐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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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분열을 극복하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삼환 목사(예장통합 총회장, NCCK 대표회장)가 가톨릭, 그리스정교와 함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예배를 같이 봤다고 해요. 구교와 신교가 예배를 한 것은 아주 감사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오실 때에는 갈라질 수 없어서 합하게 될 것이라는 징조가 아닌가 합니다.
그전에 나도 영등포교회에서 시무할 때 도림동성당 신부와 수난주일에 같이 예배를 보자고 했었어요. 당시 교황 바오로 2세가 갈리진 형제에게 잘되자는 교서를 냈었지요. 내가 회장되고 그가 부회장 되면서 달마다 모였어요. 영도교회, 영도학교에서 신구가 합해서 예배 보고 또 서울 영락교회에서 수난주일 예배를 같이 봤어요. 수녀가 한 5백 명 와서 함께 했는데 아주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시간이 없다고 해서 못했어요.
미국 선교사가 이런 얘기하니까 ‘방 목사 속지 마시오. 당신을 이용하는 거요’라고 합디다. 그래서 그냥 웃었어요. 그런데 성경에 있어요. 주님 오시기 전에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붙잡고 우리도 같이 예배하자는 내용이 있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하는 것은 하나 아니겠어요.
통합과 합동이 분열됐을 때는 너무 분해서 아무데도 안 들어갔어요. 영등포노회에서는 갈라지지 말자고 합해보자고 3년 동안 아무 총회도 안 갔어요. 어느 사람은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서로 합해보자는 모임도 많이 했지요. 합하자고 하면 모드들 좋다고 하지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중에 도리가 없어 교회가 발전한다고 하니 내가 갈 데로 갔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선교사를 반대하는 것이에요. 내가 선교사로 나갔지만 그 정말 얼마나 어려운 것이요. 그들을 반대하는 입장에는 안 간다고 해서 통합으로 갔습니다.
조직신학자셨던 고 박윤선 목사님과 동기시죠?
중학교 선후 동창이고 대학과 신학교도 그렇습니다. 박윤선 목사는 합동신학교를 세우고 나도 그곳에서 가르쳤지만 감히 제자들이 박윤선이 이름을 못 부르더만. 또 김진홍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우리 셋이서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어요. 두 친구가 먼저 가고 나도 가려고 하는데 총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나를 파송해서 못 갔어요. 나중에 두 사람은 일본이 투항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나는 1957년 중국에서 추방을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중국에서 21년 동안 선교사 생활을 하셨고 공산화 과정에서 핍박을 받고 추방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런 중국이 지금 부흥하고 있습니다.
친구 김진홍 목사 무덤에 가서 추모예배를 보고 왔는데 CTS에서 다큐멘터리를 해요. 그 사람들이 내가 일하던 곳에 가서 옛날 교인들을 만나고 녹음을 해 가지고 왔어요. 내가 많이 울었어요. 내가 길러내고 신학공부를 시켰고, 중국에서 나오기 전에 출가시켰던 왕유메이의 가족 사진을 가져왔더라고요. 다 그 자손들이에요. 이 아이가 전화를 해 와서 목사가 보고프다고 울어요. 88세인 사람도 보고프다고 울면서 전화왔어요. 같이 울면서 감격했습니다.
중국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여전하신가 봅니다.
20여년을 중국인들과 같이 있었는데요. 얼마 전에 폴란드에 갔는데 중국인교회에 목사가 없어서 그곳에서 중국어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고 왔어요. 뉴욕 중국 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장신대 이사장 취임식에 갔는데 중국에 있었다는 서양 사람이 있어서 같이 중국말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공산치하에서 순교적인 각오로 선교를 하시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중국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까 내가 외국인인줄도 몰라요. 우리 교인 중에 죽은 사람도 많아요. 말에 끌고가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살았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도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중국 교인들과 함께하는 외국인 선교사는 나 혼자였습니다. 어느날 본국에서 미국 영사관에 접촉해서 돌아오라는 통지가 왔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먼저 가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있으니 같이 있겠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때에 따라 순교적인 각오라는 말을 들어요. 순교. 각오. 그런 말을 떠올릴 새가 없습니다. 일촉즉발이 아니라 내 생명이 살아있는 것을 생각할 때 순교라는 말을 생각할 여유가 있어야지 그것은 다 모를 소리에요. 편안할 때 하는 말입니다.
중국에 계실 때 동생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중국공산당이 들어왔고 1945년 이후에는 한국과 연락이 두절됐어요. 선교비도 한 푼 못받았습니다. 나하고 같이 있던 이대영 목사도 해방이 됐다고 한국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는데 두절됐어요. 그 가족도 내가 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 동생이 죽은 줄도 몰랐어요.
미국을 거쳐온 연락을 통해 1950년에 미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홍콩과 미국을 거쳐 몇 달 걸려 답장을 보냈는데 회답이 왔습니다. ‘위로받으세요’라며 다음해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해요. 내 동생이 떠나고 아바이가 세상 떠난 것을 석달 후에 알았어요. 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생, 아바이가 떠나 집안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1957년에 돌아와서 제가 서울로 유해를 옮겨왔습니다.
목사님은 지금도 선교사 의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와서 목회할 생각은 없었어요. 추방받을 때 중국 교인 백 몇십명이 철야를 하면서 내가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없어질지 모르니까요. 많은 성도들이 청도역에 나와서 울면서 보내주었어요. 내가 간 후에 많은 성도들이 공산당들에게 많이 취조받았을 거에요.
그렇게 홍콩을 거쳐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총회에는 돈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10여년이 넘게 받지 못한 생활비는 받지 못했고 용채에 쓰라고 100환을 줘요. 지금 한 십만원 정도 될 겁니다. 그러면서 선교사 예산은 없고 총무 예산은 있으니 총무를 하라고 해요. 그래서 난 안 한다고 했어요.
그 때 영등포교회에 목사가 없어서 강단을 지켰지요. 그 해 영등포교회에서는 위임을 하자고 해요. 나는 중국선교사라고 못한다고 했어요. 아직도 중국 교회와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며 안 맡았어요. 교회에서 계속 요청을 해왔고 생활비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 선교사를 사임한 후 영등포교회를 했지요. 그러고도 한국에 있는 중화기독교회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몇 십년 동안 활동하면서 중국 교회를 돌아보고는 해요.
예전 경제권이 있던 중국 사람들은 다 떠나고 노무자들 20만 명이 왔다고 합니다. 지금 중화 교회가 서울, 부산, 대구, 군산, 수원, 영등포 여섯 곳인데 영등포는 내가 와서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시작해 예배당을 지어서 80명이 모여요. 많은 노무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어요.
목사님에게 있어서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로마서 5장에 우리가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했어요.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합니다. 환난이 있는 가운데 참을 수 있고 참음 가운데 연단한단 말이야요. 군인들 훈련과 같이 훈련 안에 소망이 있는 것이에요.
가령 가정에서도 무남독녀나 외아들을 아무 고생 없이 길러낸다면 면역성이 없어요. 사람은 단련을 받아야 해요. 단련은 성경대로 고난은 십자가를 맛보고 길이에요. 우리가 믿어서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런 가운데 십자가 맛을 알지 지금은 너무 태평천하에요.
중국에서 돌아와서 보는데 빨간 성경을 끼고 맘대로 주일날 왔다 갔다 해요. 어디 중국에서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도 중국에서는 지하교회가 발전을 하고 있어요. 핍박을 받는데 발전이 있고 신앙의 깊이가 있어요.
Q. 목사님께서 평양에 계실 때 전봇대전도, 전차전도, 통신전도, 봉사전도 등 전도를 많이 하셨지요?
친구들과 미국 유학할 것을 포기한 것도 그거예요. 언제 주님이 올지 모르는데 한 사람이라도 구원해야지 시간을 보낼 수가 있느냐. 겨자씨라는 월간 잡지를 만들어 나눠 보고, 전봇대와 평양전차에 돈을 주고 일본말 한국말로 된 전도지를 써서 붙였어요. 알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디로 편지를 보내라고 주소도 적어놨어요. 편지 봉투에도 우편부도 보라고 말씀을 적었습니다. 전화부를 보고는 일본인, 한국인에게 전도지를 보냈어요. 천장 보냈는데 한 장 두 장이라도 회답이 오면 성공이에요.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어요. 따뜻한 물을 끓여 나눠주며 하는 야간전도는 계획만 하고 실천을 못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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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성장이 둔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비판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한 10년 전에는 길 가는 사람 막고 '예수 믿으시오'하면 10명 중 6명이 믿는다고 하고 3~4명이 믿겠다고 하는데 지금은 믿는다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해요. 지금은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어져요.
영등포교회도 예전에는 주일학교 6백명 어른 2백명 했는데 지금은 어른 천오백명 주일학교 2백명이에요. 아이를 안 낳아요. 나는 주례할 때 셋 이상 낳는다고 해야 합니다. 주일학교가 죽는 원인이 출산율 저하입니다. 초등학교도 문닫은 곳이 많습니다. 보은에 한 초등학교를 가봤더니 천명이 줄었다고 해요. 경북 봉화에 있는 영화 ‘워낭소리’ 촬영지에는 10년 전에 폐쇄되고 풀만 났고요.
한국 교회가 비판적인 평을 받는다고 해요. 교회가 동생들을 키우는 처녀 가정에 쌀을 주고 독거노인에게 연탄지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믿든 안믿든 당연한 것입니다. 과거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잠을 재워달라고 하면 사랑방에 불을 피우고 이부자리를 내어 재워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경 미문의 거지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은 구걸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요즘 교단별로 총회가 시끄럽습니다.
답답해요. 글쎄, 내가 보기에는 옛날 장로교회 총회 하나 있을 때 나 회장 하겠다는 경우는 없었어요. 그저 어른 될 만한 사람을 투표해서 정했어요. 이제는 회장을 추천하고 연설을 합니다. 서로 하겠다고 하니까 완력이 생기고 교단별로 재판이 있어요. 섭섭한 것은 말할 수 없어요.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들 말합니다.
옛날에는 아들이나 딸이 예수를 믿으면 못 믿게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려고 인두로 지지고 했어요. 그래도 믿었어요. 그런 때도 아닌 데 뭐가 위기에요?
우리가 뭘 못해서 핍박을 받나요? 전도를 못해서 핍박받는 것을 몰라요. 우리가 교회를 못가는 것 아니에요. 다만 아이 안 나서 교인도 줄고, 교단별로 회장, 감독되겠다고 싸우는 것이 부끄럽지 다른 것은 없어요.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속죄 구령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대담: 김철영 목사, 녹취: 이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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