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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

수호천사1 2008. 11. 24. 16:57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7:1~6)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내 안의 실제다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대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됐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참된 자유를 가져오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되었는가? 이것이 중요한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율법으로 벗어났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죽었고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생을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여러분들도 아주 잘 알고 믿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그 앎이 여러분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이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진정한 본질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항목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 억지로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들을 전제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율법으로 벗어났음의 전부일까요? 이것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의 본질일까요?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의 내용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굳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셔야만 합니까?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어졌고,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졌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그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이루도록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일까요?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는 여러분에게, 또 복음주의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먼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문제인 구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십니까?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능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우리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열매. 즉 거룩함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의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1:16)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당신의 거룩성을 우리 안에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거룩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에서 벗어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마음속에서 부담을 느끼게 하는 양심이라는 신호등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거룩해야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이 저와 여러분에게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거룩성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케 하시려고 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1:4)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거룩입니다. 이점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60년, 혹은 80년, 100년의 수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실 몇 년을 사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것들을 충분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분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영적인 교제를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곧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다면, 왜 처음부터 천사와 같이 영적인 존재로 지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다시 말해 왜 육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천사에겐 필요 없는 물질적인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 속에서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이라는 존재는 한번 지음을 받으면 그 본성과 본질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육을 입히셔서, 육안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은 영을 거룩하고 온전케 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써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는 거룩해져야 하는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대학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이름을 높이고, 사람으로부터 훌륭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놓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사와 같이 그런 영적이 존재로 짓지 아니하고, 이 땅에 두신 이유는 육의 세상이 있는 동안 우리 안에 있는 영을 거룩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존재 목적은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빚어지고 다듬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이 우리 안에서 다듬어지고 빚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다듬기 위해서 환경과 사건을 동원하시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환경과 사건들을 위해서 자신 안의 인격의 거룩성을 파괴합니다. 거꾸로 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내가 악해져도 괜찮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면 사람들과 싸워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나를 괴롭혀서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그를 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환경을 동원하신 목적이, 사건을 동원하신 목적이 나를 거룩해 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더 좋은 환경을 원하고 있습니다.


   훈련받는 사람이 훈련소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훈련소는 하나님이 배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목적은 거룩함에 있는 것이지, 좋은 훈련소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거룩해지라고 환경 속에 집어넣었더니, 이 환경 속에서 안주하는 삶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경 때문에 악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없는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나,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외톨이로 자란 사람은 그 환경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살아가는 생존방식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유지할 수 없고, 너 때문에 인생이 망쳐졌다.”라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부부사이에 나옵니다. 심지어 목사 사모들 마음에도 이런 상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해 하실 목적으로 이 땅에 두셨습니다. 그러니 거룩해 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란 말입니다.

 

 그러나 거룩해 지는 것은 율법 안에 있을 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못된 사람이 있을 때,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관념이고 생각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끊임없이 싸우면서 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선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은 사람을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본질이요, 핵심인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규제하고 통제해서 그 범주 안에 가두어 둘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거룩하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거룩해지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행동을 지시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연약한 상태를 드러내고 비추는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간다

 

 결정적으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이 율법이 우리를 더 죄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5)

 

율법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거룩함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면서, 율법은 오히려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합니다. 율법의 역할이 이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죄의 정욕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을 발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자극시켜서 그 욕망을 발동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율법이 우리를 더욱 강화시켜야만 거룩해 질것이라는 잘못된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짐을 쓰고 더 율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가르침은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잘못된 가르침입니까? 성경은 율법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오히려 죽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율법 안에 있으면 죄의 정욕이 발동해서 더 많은 죄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들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결정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고,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심으로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신랑과 신방을 꾸며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신랑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 신랑과 살면 열매를 못 맺고, 오히려 옛 신랑과 살면 엄격하지만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합니다. 옛 신랑이 문제가 아니고, 결국 자기가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만 정신 차리면 잘 될 거라고 하면서 옛 신랑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열매 맺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정욕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면, 율법은 육신을 발동시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7:5)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하면 이 결단이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방향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세워진 항목들을 지키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인생의 방향전환은 내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요, 나의 삶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삶의 자세는 나의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합니다. 다만 이러한 가운데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지 마라, 짜증내지 마라.”같은 말씀들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제부터 짜증내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짜증내지 말아야지.”하는 순간, 율법은 오히려 내 속에 짜증을 격동시킵니다. 이것이 율법이 오면 우리의 육신을 격동시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하는 이 마음이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율법을 지켜야지 하는 것은 육신을 자극시킨다는 말입니다. 육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의지적인 나’, 그리고 다른 하나가 그것을 지킬 수 없는 ‘타락된 본질의 나’입니다. 율법이 오면 이 두 가지 육신이 다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여러분 안에서 밝아지길 바랍니다. 이것이 깨달아 지면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율법을 붙잡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아서 내가 살게 된다면 붙잡겠지만, 오히려 그것을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내가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붙잡겠습니까?

 

 이 말씀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면, 오늘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앞으로 절대 화내지 않겠습니다.”하고 각오해 보십시오. 오늘 율법이 옴으로 죄의 정욕이 발동되고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됐다는 말씀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체험해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성질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십시오.

 

  전에 “화 내지 말아야겠다.”는 의식조차 없이 살아갈 때는, 화를 내는지 안내는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화를 내고 있어도, 화를 낸다는 생각도 없고 의식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을 하면, 화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내속에 잠재되어진 화가 자꾸만 올라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 사실상 본질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하고 생각하지 않을 때는 속에 있는 육신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지.”하는 순간부터 속에 있는 육신들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짜증을 내지 말아야지.”하면, 오히려 더 짜증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기 전에는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성질이 더 못됐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착한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난 후에 오히려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예수 믿고 선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악해져 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죄인 된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천성이 착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비겁하고 겁이 많아서 그 못된 성질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나면,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나면서 육신도 함께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예수 믿기 전에는 참 선하고, 부모님께서 야단을 치셔도 절대로 불손한 태도나 불손한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빛이 마음을 비추면 숨어있던 죄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 부모님께 그렇게 순종적이던 아들이 선하고 착한 쪽으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목을 세우는 쪽으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밥을 먹다가 뭐라고 하면 울면서 밥을 먹고, 절대 불손한 태도나 생각을 갖지 않던 아들이 이제는 마음에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말이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하고,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부모님이 하는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부모님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질을 내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도 “성질부리지 말아야지.”하는 그 의식 때문에, 결국에는 성질을 부리게 되고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이며, 율법이 육신을 발동시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아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교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합니다. 그렇게 죄로 인해 넘어질 때마다 죄책감에 짓눌리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같은 죄로 또 다시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이 그 마음속에 결단과 결심을 만들지만, 그 결단과 결심이 죄를 어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결단과 결심을 하면 할수록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7:19)

 

 여러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고, 율법의 요구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않는 것이 불경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자책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을 발동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죄책감과 고통이 오히려 신앙의 경건을 향한 거룩한 몸부림이라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로마서 7장은 정말 거룩해 지려고 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거룩해 지려는 몸부림을 쳐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이해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율법 아래 있어 본적이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어봐야 그 율법이 죄의 정욕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지 않으면 죄의 정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룩해지려고 노력할 때 죄의 정욕이 일어나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쳐 본적이 있는 사람은 지금 제가 드린 얘기가 구구절절 ‘내 얘기’라고 동의 할 것입니다.


  율법이 오면 육신을 발동시킵니다. 죄의 정욕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요구할지 몰라도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죄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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