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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약사(略史)

수호천사1 2008. 11. 24. 11:46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약사(略史)

 

 

 한국교회가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만주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1908년 3월에 조선선교연회를 조직하고 9월에는 남감리 선교연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이화춘 목사를 간도 용정촌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10년에는 미감리교 조선연회에서 배형식목사와 손정도목사를 남북 만주에 파송하였다.1) 그러나 이것은 한국동포를 위한 선교사역이었다.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9월에 평양여자 성경학원에서 총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52명의 목사들 가운데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의 목사를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한국교회는 이 때부터 선교사를 외국땅에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사역하기 위하여 보냄 받은 자로 보기 시작하였다.2) 처음 선교사들은 도착한지 3년째 되던 해에 세명의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섯명의 교인들과 합하여 교회를 시작하였다. 한국선교사들의 사역은 세분의 첫 선교사들이 임지를 떠나고 유능한 선교사들이 더 도착하였을 때 급성장하게 되었다.  

 

1917년에 방효원, 홍승한, 1918년에 박상훈, 1931년에 김효순, 1937년에는 방지일 선교사가 각각 파송되어 산동성 선교를 이어나갔다. 특히 2대 선교사인 방효원목사는 라이양현 주변 여러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담당하면서 조선선교사회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 라이양 남관에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선교초기의 통계를 보면 1917년에는 28명의 세례교인, 35명의 학습교인, 그리고 26명의 새신자가 있었다. 여섯 개의 집회처가 개척이 되었고, 각 16명, 10명, 그리고 6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세 개의 자립하는 학교가 있었다.  선교 20년만에 한국의 선교지구안에 단독노회를 설립하였고, 선교30년이 되는 1942년에는 교회 35개, 세례교인 1,716명을 얻는 당시 중국선교사상 최대의 기록을 남겼다. 그후 45년 동안 즉, 1957년 중국 공산당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8명의 목사와 한명의 여전도사를 위시하여 여러명의 의사, 교사 등의 평신도 조력자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산동성 선교사역은 근대 중국 교회사에 괄목할 기록으로 남는다.

 

 하지만 중국은 1921년 부터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항거와 장개석 국민당의 퇴거로 중국 선교는 1957년 일단락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국교회는 중국 선교를 포기했다고  보지 않는다. 이제는 대만과 홍콩, 그리고 마카오를 통하여 중국선교를 겨냥하게 되었다. 대만의 경우 1957년에 김영진 목사를  파송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매년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도 1967년 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수십명의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중국을 선교하기 위한 전진기지 내지  교두보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중국이 개방되면서 1980년대 초 미국의 한인교회로부터 다시 시작 되었으며, 특별히 1992년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선교사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명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동북 3성에 집중해 있었으나 점차로 전지역으로 흩어지고 있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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